'시와 철학, 아주 오래된 연인들'이 내용에 부합하는 제목이지만, 그냥 '아주 오래된 연인들'이라고만 제목을 달았다(시는 철학을 그렇게 유혹한다). '시와 철학'에 관해 몇 마디 적을 일이 있었는데, 사정이 여의치가 않아서 이전에 쓴 '철학적 로고스와 문학적 로고스'의 내용을 많이 가져왔다. 다시 읽어보지 않아 무얼 쓴 건지 분명하지 않지만, 일단은 창고에 넣어둔다. '아주 오래된 연인들'은 물론 O15B의 아주 오래전 음반에 들어 있는 곡명이기도 하다.

"철학과 시 사이에는 오래된 일종의 불화가 있다네. 이 싸움은 중요한 것일세, 여보게 글라우콘!.. 적어도 시에 자극되어, 올바름과 그 밖의 다른 훌륭함(덕)에 무관심해질 만큼 되어서는 아니되네.”(플라톤, <국가>)

 

 

 

 

플라톤의 회상에서처럼 시와 철학 사이의 관계는 오래된 불화의 관계이다. 따라서 ‘시와 철학’에 관해 몇 마디 적는 일은 이러한 불화의 내력을 들추는 일과 무관하지 않겠다. 하지만, 내력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불화의 원인일 것이다. 그것을 오래된 것으로 만들어놓는 구조적이고 필연적인 원인, 혹은 조금 현학적으로 말해서, 불화의 발생론적 구조, 그걸 잠시 생각해볼까 한다.

어떤 ‘오래된’ 불화가 성립하기 위한 전제조건은 지속적인 관계이다. 끈끈한 인연이 아니고서야 서로가 서로를 불만스러워하는 티격태격의 관계가 반복/지속될 리 없다. 말하자면, 그들은 의무감으로 전화를 걸어서 관심도 없는 서로의 일과를 묻곤 하는 ‘아주 오래된 연인들’인 것이다. 서로를 불편해하면서도 끝내 헤어지지는 못하는 연인들 말이다.


그렇다면, 시와 철학을 묶어주는 끈은 무엇인가? 그들은 왜 서로에 대해 ‘넌 정말 아니거든!’이라고 겉으로는 넌더리를 내면서도 ‘그래도 네가 나한테 이러면 안되지!’라고 아쉬워하는가? 그것은 그들이 공통의 지반(地盤) 위에 자리하고 있는 공동운명체이기 때문이다. 그 지반이란 바로 언어, 곧 로고스(logos)를 말한다.

 

 

 

 

 

 

 

 


알려진 바대로, “태초에 로고스가 있었다.” 시와 철학은 그 로고스의 두 자녀이자 아종(亞種)이다. 그것을 각각 시적 로고스와 철학적 로고스라고 부르기로 하자(횡설수설을 시라고 부르지 않는 이상 시가 자기 나름의 로고스를 갖다는다는 건 지극히 당연하다). 물론 시와 철학이 규범적 범주라면 시적 로고스와 철학적 로고스는 양태적 범주이며, 이 두 범주가 동일한 건 아니다. 하지만, 규범적 범주로는 변종적인 사태, 곧 ‘시적인 철학’과 ‘철학적인 시’ 따위를 포괄하여 다루지 못하겠기에 양태적인 유형학의 도움을 빌어서 시와 철학의 관계를 새롭게 말해보자는 것이다.


흔히 이성이나 논리와 동일시되는 로고스를 언어적 차원에서 재규정할 경우에, 시적 로고스와 철학적 로고스의 양 극단에서 만나게 되는 것은 ‘기표-논리의 극대화’와 ‘기의-논리의 극대화’이다. 기의-논리가 극대화된 지점에서 우리는 자연어에서 기표성을 배제한, 아니 자연어 자체를 배제한 기호논리학의 세계를 만나게 되며(‘자연어’란 한국어, 영어, 일어 같은 개별 언어를 말한다), 기표-논리가 극대화된 지점에서 우리는 자언어의 기의성을 최대한 배제한 기표의 순수유희를 만나게 된다(가령 칼리그람이나 철자시). 이런 시는 어떤가?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요

 

 

 

 

 

 

 

 

 

가령 이 시 윤동주의 <팔복(八福)>만 하더라도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란 구절을 여덟 번 반복하고 있는바, 이러한 반복은 비록 순수유희가 아닌 정서적인 강도의 강화를 지향하지만 의미론적으론 ‘잉여’이다. 기의-논리 극대화의 관점에서라면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8”이라 기술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간단한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철학적 로고스는 세탁기처럼 기표의 때를 계속 세탁해대며(철학적 로고스의 강경파들은 그렇게 해서 언어를 ‘흰 빨래’처럼 만들 수 있다고 믿는다), 시적 로고스는 단어들에 폭탄 세례를 퍼부음으로써 기의를 증발시키거나 해체시키고자 한다(김춘수의 무의미시나 이승훈의 비대상시 등의 계보는 전범적인 사례이다).

 

 

 

 

 

 

 

 

 

즉, 극단적으로는 철학적 로고스가 자연어를 인공어화하려는 지향성을 갖는다면 시적 로고스는 자연어를 자움어(러시아 미래파 시인들의 표현을 빌자면 ‘새의 언어’)화 하려는 지향성을 갖는다(러시아어에서 '자움'은 '초이성'이란 뜻이다). 이 자움어를 한국의 ‘미래파’ 시인들이라면 ‘시체들의 언어’라고 부를지도 모르겠다.


나는 나의 질긴 자궁을 어디에 두었나

광장의 시체들을 깨우며

새엄마를 낳던 시끄러운 밤이여.

꼭 맞는 호주머니를 잃어서

오늘밤은 모두 슬프다

-황병승, <검은 바지의 밤> 부분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을 따라서 조금 단순화시켜 말하자면, 시란 자연어를 낯설게 사용한 것이다(해서, 지각을 지연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오브제를 데포르마시옹(deformation)함으로써 미적 효과를 창출하는 과정과 유사하다. 공통적인 건 어떤 ‘형태(form)’에 대해서 사고한다는 점이고, 그런 점에서 시는 조형예술과 먼 거리에 있지 않다. 미국의 신비평가들이 시를 ‘잘 빚어진 항아리’에 비유한 건 따라서 자연스럽다.  


시적 로고스는 기본적으로 언어의 조형화, 혹은 조형적 언어를 통해서 의미를 산출한다(야콥슨을 따라서 좀 어렵게 말하자면, 그것은 통합체적인 언어를 계열축에 따라 투사한다). 즉, 시는 어떤 조형적 입체이며, 거기서 중요한 건 볼륨이다. 언어는 시적 로고스 안에서 자신의 풍만함을 자랑한다(요컨대, 철학에 코기토가 있다면 시에는 코르셋이 있다!).


반면에 철학적 사유의 근간은, 그것이 형식논리(아리스토텔레스)이건 변증법적 논리(헤겔)이건 간에 논리에 있으며(해서 ‘논증’은 철학적 로고스의 가장 중요한 구성소이다. 논리는 철학의 정신을 구성하는 ‘뼈다귀’이다), 논리에서 중요한 것은 순서(order)이다. 시의 언어가 주로 분칠하고 치장하는 언어라면, 철학의 언어는 명령하고 주문/요청하는 언어이다. 똑같은 언표들이라도 배치순서가 바뀌면 문학에서는 새로운 의미가 창출되지만 철학적 논리는 한순간에 비논리 혹은 모순으로 전락한다(예컨대 3단논법의 논항들을 뒤섞어보라). 그러한 논리가 지향하는 것은 모순의 배제 혹은 지양이다.


의미론적 차원에서 논리적 모순의 등가물은 넌센스(무의미)이다. 때문에, 어떤 철학적 논증/저작에 대해 ‘넌센스’라고 말하는 것은 그에 대한 최대의 모욕이 된다(가령, “그게 말이 되냐?”) 반면에 시에서의 ‘넌센스’는 그 자체가 하나의 기법이자 전략이며, 장르, 더 나아가 사조를 이루기도 한다. 철학적 논리를 구성함에 있어서 순서가 중요하다고 하면, 철학적 담론의 구성인자가 되는 언어에 대해서 엄격한 훈령이 하달되는 것은 필연적이다. 이른바 ‘동작 그만!’이 요구되는 것이다.


해서, 풍만한 시의 언어가 ‘언어의 카니발’을 떠올리게 한다면, 강파른 철학은 ‘사유의 학교’(야스퍼스)를 넘어서 ‘사유의 군대’이기도 하다. 이러한 철학이 일차적으로 요구하는 언어는 당연히 바지춤 추스르기에도 바쁜 어영부영하는 자연어가 아니라 깍두기 머리에 자세 제대로 나오는 보편어 혹은 인공어이다.

 

 


 

 

 

 

 

 

20세기 철학을 흔히 ‘언어적 전회’로 특징지을 때 그것이 주목한 것은 사유와 언어의 관계, 보다 구체적으로는 사유에 있어서 언어의 매개성이었다. 아주 당연한 듯하지만, 우리는 ‘언어’로 사유한다는 것. 즉, 사유의 언어-의존성에 대한 자각이 ‘언어적 전회’의 일차적인 내용이다. 그리고 이때의 언어란 바로 ‘자연어’로서, 그리고 ‘일상어’로서의 개별 국어이며, ‘언어적 전회’는 이 자연어/일상어의 ‘존재성’을 인정하게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태는 정반대로 간다. 언어-의존성에 대한 자각의 이면은 이러한 자연어/일상어의 ‘병리성’에 대한 인식이었기 때문이다.


즉, 우리의 사유는 자연어로 이루어지는바, 철학적 사유가 오류를 범하는 주된 이유가 그 자연어의 병리성, 혹든 결함에 있는 게 아닌가 라는 데 생각이 미친 것이다. 비유컨대, 철학적 작전이 매번 실패하는 원인이 ‘병력 자원’의 부실에 있다는 걸 사단장-철학이 알게 된 것이고 이후에 대대적인 ‘군기교육’이 이루어진다는 건 자연스럽다. 철학의 과제가 ‘언어비판’, 더 나아가 ‘언어치료’에 있다고 하는 주장은 이러한 사정을 잘 요약한다. 하지만, 이때 철학적 로고스에 치료의 방책으로 주어지는 것은 한 가지가 아니라 두 가지이다. 두 갈래의 길이 있는 것이다: <인공어 ← 자연어 → 시어>


(1) <자연어→인공어>라는 방향은 이미 라이프니츠가 주장한 바 있는데, <논리-철학논고>의 비트겐슈타인이나 비엔나학파의 논리실증주의 철학자들이 선호했던 것이기도 하다. 그들은 어중이떠중이들의 언어(=일상어)로 오염되지 않은 인공어로 통해서 ‘건강한’ 사유가 구축될 수 있을 거라고 보았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시어는 자연어의 병리성이 극대화된 구제불능의 것으로 간주될 법하다. 하지만, 이 수축주의적 방향은 한편으론 언어-의존성이란 문제를 횡단하는 것이 아니라 회피하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 너무 잡다한 종이기 때문에 인간에 대한 성찰을 아바타나 사이버 모델에 의존하는 것과 같지 않을까?


(2) <자연어→시어>라는 방향은 후설의 수제자였지만, 현상학에서 존재론으로 ‘전향’함으로써 후설에게 배신감을 안겨준 하이데거에서 대표적인 사례를 찾을 수 있다. 어차피 사유가 언어-의존적이라면, 최상의 언어, 최고의 언어를 사유의 질료로 삼아야 한다는 건 자연스러운 요구이다. 하이데거가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말할 때, 그 언어는 무엇보다도 ‘일요일의 언어’인 시어인 것이다. 은유적인 언어가 개념어보다도 더 탁월한 사유의 질료라는 걸 입증해 보인 니체의 경우도 이러한 계보에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대략 이러한 구도하에서라면, 시와 철학의 오래된 불화에 대해서 다시금 말해볼 수 있을 듯하다. 이미 들었던 비유를 계속 갖다 쓰자면, ‘아주 오래된 연인들’의 관계란 인력과 척력이 동시에 작용하는 관계이다. 철학적 로고스가 <자연어→인공어>로 가고자 할 때, 시적 로고스는 그 대척점에 놓이게 된다. 즉, 철학은 시를 밀어낸다. 가령,


첫 번째는 나

2는 자동차

3은 늑대, 4는 잠수함


5는 악어, 6은 나무, 7은 돌고래

8은 비행기

9는 코뿔소, 열 번째는 전화기

-박상순, <6은 나무 7은 돌고래, 열 번째는 전화기> 부분

 


 

 

 

 

 

 

 

 

라는 시적 규정을 가지고 사유의 알고리듬을 구축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할 수 있을까? 하지만, 또 한편으론 <자연어→시어>의 방향에서 철학적 로고스는 그 자신의 빈곤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영감을 시적 로고스로부터 제공받을 수도 있다. 이 경우 철학은 시를 적극적으로 끌어당긴다. 


휴일은 가죽과 망토뿐이네. 휴일이여, 나를 빌려가세요. 언제나 당신을 위해 숨을 쉬겠어요.

-김행숙, <8요일> 부분

 

 

 

 

 

 

 

 

 


에서처럼 철학적 로고스는 시의 가죽과 망토를 빌려다가 새로운 숨을 쉴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어떤 철학은 시적 로고스를 끊임없이 참조함으로써 자극과 영감을 얻으며 스스로를 갱신해간다.


이 두 갈래의 방향이 모두 철학적 로고스의 길로 포함된다면, 시와 철학의 관계가 발생론적으로 밀고 당기는 ‘오래된 불화’를 연출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이해할 만한 일이다. 철학은 시라는 항성에 대하여 언제나 가깝고도 먼 타원형의 궤도를 그리며 자기의 존재를 가늠하고 있는 것이기에 그러하다. “그러니 여보게 글라우콘, 무엇보다도 시를 조심하게나!”

 

06. 07.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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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 2010-07-16 0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행숙 첫 시집을 읽어보려고 들어왔다가... 와, 너무 '감동적으로' 읽었습니다. 항상 부러움과 주눅듦을 느끼며 로쟈님 글을 읽기는 합니다만, 이 글은 완전히 다른 느낌이네요. 열광적으로 즐겼습니다!! 브라보...............

미지 2010-07-16 0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신. 06. 07. 16 이라는 숫자가 눈에 띄어 다시 보니, 지금은 10. 07. 16 으로 표기되네요 ^^ 인공적 시어 같은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