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돌베개, 2007)을 읽고 있다. 작년 벽두에 나왔으니 일년을 미뤄둔 책이다(사실 무슨 내용인지 알기에 미뤄둔 것이기도 하다.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니니까). 일부러 이 책을 강의목록에 올려놓았기 때문에 '자발적 강제'에 따른 읽기인데, 읽다 보니 같이 읽어야 할 책들도 여러 권 된다(가령 빅터 프랭클이나 엘리 위젤 같은). 몇 권만 추려놓는다...  


21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
서경식 지음, 박광현 옮김 / 창비 / 2006년 12월
15,000원 → 13,500원(10%할인) / 마일리지 150원(1% 적립)
양탄자배송
2월 9일 (월) 아침 7시 출근전 배송
2008년 03월 01일에 저장

이것이 인간인가-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의 기록
프리모 레비 지음, 이현경 옮김 / 돌베개 / 2007년 1월
12,000원 → 10,800원(10%할인) / 마일리지 600원(5% 적립)
양탄자배송
2월 9일 (월) 아침 7시 출근전 배송
2008년 03월 01일에 저장

주기율표
프리모 레비 지음, 이현경 옮김 / 돌베개 / 2007년 1월
14,000원 → 12,600원(10%할인) / 마일리지 700원(5% 적립)
양탄자배송
2월 9일 (월) 밤 11시 잠들기전 배송
2008년 03월 01일에 저장

Survival in Auschwitz (Paperback)
Levi, Primo / Touchstone Books / 1995년 9월
33,280원 → 27,280원(18%할인) / 마일리지 1,370원(5% 적립)
*지금 주문하면 "2월 13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2008년 03월 01일에 저장



21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2008-03-01 01: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8-03-01 08:50   좋아요 0 | URL
리스트야 별거 없지요. 레비의 책이 더 소개되어야 풍족해질텐데요...
 

컬처뉴스에서 자크 랑시에르의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인간사랑, 2007)에 대한 리뷰를 옮겨놓는다. 이미 여러 차례 지적한 바 있지만 이 번역본은 (한국어임에도!) '읽을 수 없는 책'이다. 그걸 지적하는 게 명예훼손과 무슨 관련이 있나 싶지만 여하튼 역자는 집요하게 자신의 명예를 챙기고 있다(리뷰에서도 언급하고 있는 나의 페이퍼는 알라딘의 책소개 페이지에서 블라인드 처리돼 있다). 한번 더 이야기하지만, 출판사나 역자나 책을 전량 폐기하고 전면 개역판을 내는 게 그나마 '명예'를 회복하는 유일한 길이 아닐까 싶다.  

컬처뉴스(08. 02. 29) 랑시에르, 데뷔전에서 곤욕을 치르다

“맑스주의라는 단어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던 이단적인 사유에 대한 가장 위대한 표현들 중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면, 가장 이단적으로 맑스주의를 사유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정통적인 맑스주의이다.” 프랑스의 맑스주의 철학자 루이 알튀세르의 이 말을 살짝 비틀면 이렇게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알튀세르라는 이름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던 이단적인 맑스주의자에 대한 가장 위대한 이름들 중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면, 가장 이단적으로 알튀세르를 사유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정통적인 알튀세르주의자이다.”

올해 초부터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2005), 『감성의 분할』(2000)을 통해 국내에 소개되기 시작한 자크 랑시에르(1940~  )는 ‘이런 의미에서’ 가장 정통적인 알튀세르주의자이다. 그도 그럴 것이 랑시에르는 알튀세르가 『«자본»을 읽자』(1965)를 통해 화려하게 데뷔시킨 제자 4인방, 즉 피에르 마슈레(1938~  ), 로제 에스타블레(1938~  ), 에티엔 발리바르(1942~  ) 중 ‘셋째’로서 알튀세르가 그랬듯이 그 누구보다 자신의 분야에서 ‘파격적인’ 사유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자신의 공식 데뷔작 『알튀세르의 교훈』(1974)을 통해 스승과 떠들썩하게 결별한 랑시에르가 이 말을 들으면 펄쩍 뛸 일이겠지만 말이다.

랑시에르의 사유가 파격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보다도 그것은 자신의 분야, 즉 철학에 대한 그 자신의 ‘파격적인’ 정의에서 기원하지 않을까 싶다. 랑시에르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북유럽판에 수록된 인터뷰(2006년 8월 11일자)에서 철학을 이렇게 정의한 바 있다. “저는 철학이 그 자체에게 뭔가 독특한 임무를 부여해 주는 독특한 정체성을 갖고 있다고는 믿지 않습니다. 철학에는 독특한 대상이 없는 셈이죠. 따라서 저는 차라리 철학을 끊임없이 움직이는 위치/자리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자신의 정의에 부합하게 랑시에르는 문학, 정치학, 미학, 역사학, 사회학, 영화학, 교육학 같은 분과학문의 주제/대상뿐만 아니라 스테픈 말라르메의 상징주의 시, 마르셀 브로타에스의 설치미술, 기타노 다케시의 영화 등을 종횡무진 넘나들며 끊임없이 움직였고, 그 여정을 통해 미학과 정치를 조우시킬 수 있는 자신만의 독특한 관점을 주조해냈다. ‘감각적인 것의 배분/나눔’(le partage du sensible)이 바로 그것이다.

 

 

 

 

 

 

 

 

 

 

랑시에르에게 우리가 흔히 말하는 정치는 ‘치안’(la police)이다. 즉, 한 사회를 위계적으로 조직하고 통치하는 구조 일체가 바로 치안인 것이다. 그렇지만 치안이 단순히 어떤 구조인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어떤 구체적인 권력, 예컨대 곤봉을 든 경찰력으로 상징되는 어떤 억압의 구조이기 이전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들리는 것과 들리지 않는 것,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즉, 감각적인 것)을 나누고 할당하고 분배하는 상징적 구성원리이기도 하다.

이와 달리 랑시에르가 말하는 ‘정치’(la politique)는 치안이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말할 수 없게 만든 존재들, 랑시에르의 표현을 빌리자면 ‘자기 몫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보편적 평등이라는 개념(“우리도 우리의 몫을 가지기에 합당한 존재이다”)에 근거해 각자의 몫을 스스로 주장하는 것이다. 즉, 치안이 만들어놓은 질서(특정한 분할선에 의거해 감각적인 것을 배분하고 나눠놓은 질서)를 거슬러 감각될 수 있는 것을 다시 나누고 할당하고 분배하려는 행위가 정치이다.

이런 점에서 랑시에르의 정치는 곧 민주주의와 동의어이며, 민주주의는 또 하나의 정치체제라기보다는 치안이 자신의 지배질서를 정당화하기 위해 내세우는 일체의 아르케(근본 원리)에 대한 부정이고, 아르케에 대한 이런 부정은 “모든 사람들은 평등하다”라는 평등의 공리로 수렴된다고 할 수 있다. 요컨대 랑시에르에게는 정치=민주주의=평등의 공리인 셈이다.

또한 정치든 치안이든 감각적인 것의 나눔/배분을 둘러싸고 형성되기에 랑시에르에게는 정치=미학이다. 단 이때의 미학은 통상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미학이 아니라 그 어원에 충실한 미학이다. 즉, ‘감각적인 것’ 혹은 ‘감각될 수 있는 것’이라는 뜻의 그리스어 ‘to aisthêton’에 충실한 미학(‘감각학’으로서의 미학) 말이다. 이렇듯 랑시에르에게 미학과 정치의 조우는 그 상동성(相同性)의 발견으로 가능해진다.

랑시에르의 저작으로서는 국내에 처음 소개된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인간사랑/2005)는 정치=민주주의=평등의 공리, 그리고 감각학으로서의 미학=정치학이라는 자신의 두 가지 테제에 근거해 랑시에르가 당대의 프랑스 정치현실에 카운터펀치를 날리는 작품이다.

그 정치현실이란 길게는 실업자운동이 대규모로 일어난 1995년 이후부터, 짧게는 2001~05년 프랑스에서 벌어진 정치현실로서, 프랑스 내에서 ‘자기 몫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프랑스 공화주의가 자랑스러워하는 “자유, 평등, 박애”를 자신들에게도 적용하라고 외치면서 일어난 사건들에 대해, 민주주의자임을 자처하는 지식인들이 “그런 건 민주주의가 아니야”, “민주주의는 원래 이런 거야”라고 말하며 민주주의의 요구(즉, 평등의 요구)에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찬물을 끼얹고 있는 세태를 말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는 국역본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에서 전혀 이런 내용을 확인할 수 없다. 건드리기에 따라 ‘엔(사타구니/aine)만큼 후끈 달아오를 ‘엔’(증오/haine)을 소재로 삼고 있는 이 책의 날카로움을 도저히 어떻게 해볼 수 없을 만큼 무디게 만든 번역 탓이다. 흔히 『국가』와 『정치가』로 옮겨지는 플라톤의 저서를 『공화주의』와 『정치』로 옮겨놔 독자들을 헷갈리게 만드는 것은 그냥 그렇다고 쳐도,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를 낳은 정세 자체에 대한 무지는 조금 참기 어렵다.

가령 랑시에르가 이 책의 목적을 소상히 밝히고 있는 서론의 첫 번째 문단부터 문제가 심각하다. “가상의 침략 이야기를 꾸며내서 프랑스를 조마조마하게 하는 젊은 여인, 학교에서 자신의 가면을 벗지 않으려는 청소년들 …… 초등학교는 평준화에 근거한 평범화 교육을 창조하고 있다.” 그러나 이 부분은 이렇게 옮겨져야 한다. “실제로 있지도 않았던 공격을 받았다는 이야기로 프랑스를 불안에 떨게 만드는 어느 여인, 학교에서 히잡을 벗지 않으려는 여학생들 …… 대안적 입시제도를 도입한 그랑제콜.”

『민주주의 대한 증오』의 옮긴이가 “가상의 침략 이야기”로 옮긴 사건은 지난 2001년 7월 11일, 어느 23세의 여성이 파리의 지하철에서 북아프리카 출신으로 보이는 6명의 흑인들에게 유태계라는 이유만으로 자신과 자신의 13개월된 아기가 폭행당했다고 경찰에 신고해 프랑스 전역을 떠들썩하게 만든 사건을 말한다(*영역본 주석에는 2004년에 일어난 사건으로 소개됐다). 이로 인해 정치권에서는 국내 치안의 문제는 이주민들 때문이라는 극우적 주장들이 빗발쳐 나오곤 했는데, 며칠 뒤 CCTV에 당시 사건이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다는 경찰의 조사 결과가 발표되자 이 여성의 진술이 사실인지의 여부를 두고 논란이 발생한 바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옮긴이가 “자신의 가면을 벗지 않으려는 청소년들”이라고 옮긴 에피소드는 지난 2004년 3월 14일 프랑스 의회가 공립학교에서 모든 종교적 상징물의 착용을 금지하는 법안을 압도적인 찬성 표결로 통과시켜 세인들의 관심을 집중시켰던 이슬람 여학생들의 히잡 착용 문제를 말한다. 히잡은 이슬람 여성들이 머리에 두르는 스카프이기 때문에 “가면”이라고 옮기면 안 된다. 가면이라고 부를 만한 다른 이슬람 상징물은 부르카(안면 가리개)이다. 또한 이슬람 남자들은 히잡을 착용하지 않기 때문에 두루뭉수리하게 “청소년들”이라고 옮기면 원래의 맥락을 전혀 파악할 수 없게 된다.

또한 옮긴이가 “초등학교”로 옮긴 그랑제콜(Grandes Écoles)은 프랑스의 소수 엘리트 양성기관이다. 그랑제콜에 입학하려면 그랑제콜 준비과정에 입학해야 하는데, 이 준비과정에 들어가려면 바칼로레아(대학 입학 자격시험)에 합격해야 할 뿐만 아니라 고등학교 성적이 상위 5% 이내에 들어야 한다. 그러고도 준비과정에서 2~3년을 더 준비해 과목별로 한 달간에 걸친 엄격한 경쟁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그런 그랑제콜의 하나인 파리고등정치학교가 지난 2001년 경제적으로 열악한 지역 출신의 학생들을 필기시험 없이 면접과 서류전형만으로 뽑는다는 새로운 입시계획안을 발표했고, 이는 극심한 찬반 논란을 일으킨 바 있다.

랑시에르는 이처럼 얼핏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사건들에 대해 수많은 지식인들이 내놓은 단 한 가지 답변, 즉 “이 모든 증상은 동일한 질병의 발로인데, 민주주의가 바로 그것이다”라는 답변을 내놓았다고 말하며 포문을 열기 시작한다. 그러나 역시 안타깝게도, 우리는 공공연히 민주주의를 증오하는 자들에게 랑시에르가 뿜어대는 그 십자포화의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없다.

지면의 한계로 더 쓸 수 없으니 자세한 것은 알라디너 로쟈님의 페이퍼(“반목의 철학, 불화의 번역” http://blog.aladin.co.kr/mramor/1911702)를 참조하시기 바란다. 그리고 관심 있는 분들은 좀 귀찮더라도 영어본이나 불어본을 읽으라고 권하고 싶다. 이것마저 여의치 않은 분들은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의 요약본이라고 할 만한 랑시에르의 논문 「민주주의는 무언가를 의미하는가?」를 읽으시면 되겠다. 이 논문은 『아듀 데리다』(맥밀란/2007)라는 데리다 사망 추모 강연회 논문모음집에 수록되어 있다(문제는 이 책이 비싸다는 것이다. 74.95달러. 정치의 민주주의뿐만 아니라 지식의 민주주의를 가로막는 것도 돈이다!).

더욱 더 안타까운 것은 이 하자 많은 국역본이 꽤 독자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기현상’은 이 국역본의 완성도보다 랑시에르의 사유에 대한 독자들의 관심이 그만큼 높기 때문에 가능한 것일 텐데, 마지막으로 책을 사놓고 도저히 무슨 말인지 몰라 자신을 책망할 몇몇 독자들을 위로하며, 그리고 한국어를 읽을 수 없는 랑시에르를 축하하며 한마디. “랑시에르 선생님, 욕보십니다.”(이재원_출판기획자) 

08. 02. 29.

P.S. 이미 관련기사들을 옮겨놓기도 했는데, 랑시에르는 아감벤과 함께 올 한해 가장 주목받는 철학자가 될 것이다. 그럴 만한 것이 그의 책들이 한꺼번에 앞다투어 소개될 예정이기 때문이다. 물론 '문제적인' 철학자의 새로운 사유가 우리말로 번역/소개되는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하지만 리뷰의 제목대로 그의 '데뷔전' 성적은 별로 좋지 못하다(이 점은 <호모 사케르>가 깔끔하게 번역돼 나온 아감벤과 대조된다).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뿐만 아니라 <감성의 분할> 또한 기대에 훨씬 못 미친다. '분할'이란 제목부터 '분배'나 '배분'으로 옮겨지는 게 더 적절했을 것이다(영어로는 'distribution'). 이 책 또한 불어본이나 영어본과의 대조없이 읽어나가는 건 고난도의 독해력을 요구한다. 앞으로 나올 다른 책들의 사정은 좀 나아지기를 바란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책사랑 2008-02-29 2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적하신 부분에 공감합니다. 그런데 참 희한한 현상인데 올해 자크 랑시에르 책이 쏟아져나올 듯 합니다. "정치의 가장자리에서" "불화" "무지의 스승" "역사의 이름들" "프롤레타리아의 밤들" "이미지의 미래"...
지젝 책이 거의 모두 우리에게 소개되었지만 랑시에르처럼 한 해에 이렇게 많이 쏟아져나오는 현상은 무엇일까요? 하여간...기대해봅니다.

로쟈 2008-02-29 22:50   좋아요 0 | URL
희한한 '한국적' 현상이겠죠. 우리에게 자극을 줄 만한 철학서들이 쏟아져나오는 건 나쁘지 않지만, 그래도 최소한 '읽을 수 있는 책'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베토벤 2008-03-01 0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만일 이 책이 파리 몇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분에 의해서 번역이 되었는데도 이 정도라면 개인적인 수준을 넘어서 뭔가 제도적으로
한국 출신의 학생들의 스칼라쉽이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우려를 가질 뻔했기때문입니다. 다행히 증권가출신이면서 프리랜서로 활동셨더군요. 그래서인지 '그럴만하다'라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프리랜서 번역가 분들을 무시한다는 말을 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그 분 개인에 국한하자면 말이지요.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문선 책들중에는 박사급 번역자가 번역한 책들중에도 만만찮은 책들이 있었으니 다시 우울해지려고 합니다.

로쟈 2008-03-01 09:02   좋아요 0 | URL
'파리 몇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분'들의 이상한 번역서도 드물진 않은데요.^^; 일희일비할 일은 아니고, 좋은 역자들이 좋은 대우를 받을 수 있도록 여건을 변화시키는 게 중요해보입니다...

람혼 2008-03-01 1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마 전 <감성의 분할>이 처음 출간되었을 때 매우 반가운 마음에 들면서도 구입이 망설여졌던 것은, 일차적으로 바로 그 제목의 번역 때문이었습니다. 이 국역본이 출간되기 전에 랑시에르의 <문학의 정치>를 소개하면서 저도 잠시 언급했던 바이지만(http://blog.aladdin.co.kr/sinthome/1840783), 'partage'의 번역어가'분배'나 '배분'이 되어야 한다는ㅡ즉, 단순한 '분할'이 아닌 '할당'의 뉘앙스까지를 포함해야 한다는ㅡ말씀에 적극 동감합니다. 또한 개인적으로 역자가 단순히 '감성'이라고 옮긴 'le sensible'의 번역 역시 문제가 있다고 느끼는데요, 이는 '감각적인 것'이라고 '적확히' 번역되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여러 가지 이유를 지적할 수 있겠지만, 가장 일차적으로는, '감각적인 것'을 단순히 '감성'으로 옮기는 '번역적 센스' 안에는 '미학'이라는 분과를 가장 '근대적인' 사유의 소산이자 '역사적' 구성물로 바라보려는 '초월적' 시각이 결여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곧 제목의 번역을 볼 때부터, 미학이 지닌 '감각학/감성학'으로서의 기원에 대한 적극적인 고려가 과연 번역에 반영되었을까 하는 의심이 드는 것이었죠. 그나저나 로쟈님의 글이 '명예훼손'이라면 이재원 선생의 이 글도 그렇겠군요? 조금 바쁜 일들이 지나가고 시간이 좀 날 때, 저 역시 국역본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와 <감성의 분할>을 함께 묶어 글 하나 써서 저 '명예훼손'의 대열에 동참해볼까 합니다.^^

로쟈 2008-03-01 11:45   좋아요 0 | URL
'법정'에서 심심하진 않겠습니다.^^ '감각적인 것'이 보다 정확한 번역이라는 데는 저도 동감합니다. 문제는 우리말로 익숙하지 않은 용례라는 것이죠(본문에선 또 너무 자주 나오는 용어이고). 비슷한 예로 '정치적인 것'이란 용어가 최근 들어 조금씩 쓰이고 있지만 어차피 그 말 자체로는 의미가 소통되는 것 같지 않습니다. 아직은...
 

이번주 한겨레21에 실은 '로쟈의 인문학 서재'를 옮겨놓는다(http://h21.hani.co.kr/section-021162000/2008/02/021162000200802280699046.html). 일명 '실용정부'의 출범에 맞춰 읽은 제임스의 <실용주의>에 대한 간략한 독후감이다. 역시나 마감이 지나서 쓴 글이어서 따로 더 손을 볼 여유는 없었지만 생각해둔 내용을 다 적으려면 최소한 20매 정도의 분량으로 더 늘려 썼어야 했다. 마저 적지 못한 내용과 <실용주의> 번역에 대한 이야기들은 따로 다루는 수밖에 없겠다.

한겨레21(08. 02. 28) 무엇을 위해 전봇대를 뽑는가

실용주의가 대세다. 너도나도 실용을 말하고 실용주의를 외친다. ‘민주주의’와 ‘개혁’을 말하는 대신에 ‘전봇대’를 뽑는다. 그리고 이게 새로 출범하는 이명박 정부의 첫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 말 많았던 대통령 대신에 등장한 ‘일하는 대통령’의 새로운 정책기조, 그것이 실용주의다. 거꾸로 되짚으면 어즈버 지난 10년 동안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실용’인 모양이다. 그런 생각에 눈길이 간 책이 윌리엄 제임스의 <실용주의>(아카넷 펴냄)다. 대세를 좇아가려는 공무원들이 앞다투어 읽어봄직한 책이지만 이건 또 ‘인문서’라 사정이 그렇지만은 않은 듯하다.

실용주의적 독서법은 아무래도 핵심을 먼저 파악하는 것 같아서 특히 ‘실용주의가 의미하는 것’이란 글을 먼저 읽었다. 그런데 이 문학적 필치의 철학자는 핵심만을 간추려주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사례들을 통해 에둘러 말한다. “철학적 문학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표현이 풍부하고 암시적”이라는 게 역자가 미리 일러준 것인데, 서두부터가 이런 식이다. “몇 년 전 산악지대에서 캠핑을 하던 중, 혼자 어슬렁거리다 돌아와보니 모두들 열띤 형이상학적 논쟁에 빠져 있었다. 논쟁의 실체는 나무둥치의 한쪽에 들러붙어 있는 다람쥐였다.”

어떤 상황인가? 나무둥치 한쪽에 다람쥐가 붙어 있고 반대편에는 사람이 서 있는데, 이 사람이 다람쥐를 보기 위해 나무를 돌면 다람쥐도 같은 속도로 움직이는 바람에 다람쥐를 볼 수 없었다는 것. 여기서 논쟁이 된 형이상학적 문제는 이런 것이다. 과연 그 사람은 다람쥐를 도는 것인가 아니면 돌지 않는 것인가? 어느 쪽이 옳은지 판결을 요청받은 제임스의 대답은 간단했다. ‘돈다’고 할 때 실제로 우리가 의미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가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덧붙이는 말. “실용주의의 방법은 애당초 그것 없이는 끝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형이상학적 논쟁들을 해결하는 방법이다.”

어떻게 해결하는가? 개념들에 대한 논쟁이 일어날 경우에 실용주의는 그 각각의 실제 결과들을 추적하고 그 개념이 누군가에게 어떤 차이를 가져오는가를 따짐으로써 해결한다. 가령 두 가지 개념이 산출하는 결과들 사이에 아무런 실질적인 차이가 없다면 두 개념은 실제로 같은 것이고 모든 논쟁은 쓸데없는 것이 된다. 그 ‘개념’이란 말을 ‘이념’으로 바꾸어도 마찬가지다. 가령 다람쥐 대신에 덩샤오핑의 고양이를 떠올려보자. 그의 유명한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이 주장하는 것은 무엇인가? ‘흰 고양이든 검은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것 아닌가. ‘쥐를 잘 잡는다’는 결과가 동일하다면 그 고양이가 ‘희다’거나 ‘검다’거나 하는 개념상의, 혹은 이념상의 차이는 무의미하다는 것이 실용주의 철학이다(중국 사상계의 덩샤오핑이라 불리는 리쩌허우는 ‘실용이성’의 철학을 ‘밥 먹는 철학’이라고 부른다).

제임스는 덩샤오핑보다도 훨씬 노골적인 비유를 든다. 그가 보기에 어떤 개념이나 아이디어가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실질적인 ‘현금가치’를 도출해낼 수 있어야 한다. 현금가치란 말할 것도 없이 우리가 실생활에서 사용할 수 있는 가치를 말한다. 혹은 우리가 하고자 하는 것을 할 수 있게 해주는 가치다. 배고픈 이들이 밥을 먹게 해주거나 배 나온 이들이 살을 뺄 수 있게 해주는 아이디어 말이다.

이러한 실용주의를 제임스는 개인적으로 과학과 종교를 통합하는 방식이라고 보았다. 예상할 수 있는 것이지만 실용주의적 종교론은 형이상학적 유신론이나 자연주의적 무신론과 대별된다. “신학적인 관념들이 구체적인 삶에 가치가 있다고 증명된다면, 유익하다는 의미에서 실용주의에게도 참이 될 것이다”라는 게 제임스의 입장이다. 다시 말해서, 종교적 신앙을 통해서 사람들이 절망을 극복하거나 소망하는 바를 얻을 수 있다면, 그런 실제적인 결과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종교적 신앙은 무의미한 것이 아니다. 다 맞는 말 아닌가? 단지 전봇대를 뽑고 쥐를 잡는 것이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인가란 형이상학적 질문에 덜미만 잡히지 않는다면 말이다.

08. 02. 2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지난 월요일에 읽고 공감했던 시사인의 칼럼을 옮겨놓는다. 도서관 전문사서 양성의 필요성을 제기하는 우석훈의 칼럼이다(http://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1307). 낮에 관련 전공자들과의 대화에서 이 문제가 화제에 올랐을 때 나는 스위스의 도서관 사서 이야기를 꺼내기도 했는데, 이 칼럼에서 인용한 것이었다. 아래 사진은 스위스 취리히 대학의 도서관이라고 한다. 이 정도면 나도 '사서' 하고 싶다(서지학이 부전공 아니냐란 얘기도 듣는 만큼 잘 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자면 스위스로 이민을 가야 할까?..

시사인(08. 02. 26) 도서관에 전문 사서가 없다

얼마 전부터 신문 안 본다는 게 자랑이 된 사람이 많다. 신문사도 좀 반성해야 할 것 같다. 신문이 신문다워야 볼 것이라는 지적에 대해서 좀 생각해보면 좋겠다. 어쨌든 사람들이 신문도 안 본다는 것은 사회의 위기이다. 그렇다면 잡지나 계간지는 보고, 책은 좀 읽는가? 다른 것도 별로 안 보는 게 우리나라 실정인 것 같다.

유럽에서 부러운 게 몇 가지 있다. 파리에서 할머니들이 아침마다 신문과 잡지를 사들고 커피 마시는 장면은 솔직히 부럽다. 더 부러운 장면은 아인슈타인이 다녔다는 취리히 공과대학에서 볼 수 있다. 할머니들이 이 도서관 소파에 앉아 책을 보는 모습이다. 스웨덴과 더불어 가장 먼저 1인당 국민소득 4만 달러를 넘은 스위스에서는 흔한 장면이다.

한국에서는 책 읽고 잡지 보는 모습을 대학 도서관에서도 보기 어렵다. 그 자리를 고시 책과 취업 서적이 휩쓸고 있다. 우습지만 한국에서 책 읽는 사람을 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공간은 스타벅스이다. 유럽에서도 일부 도시에서는 스타벅스가 성업 중이긴 한데, 정말로 신문·서적·잡지를 많이 보는 도시에서는 스타벅스에서 책 읽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렵다.



참 부러운 유럽 도서관의 책 읽는 풍경

내가 만나본 최고의 전문직 사서는 취리히에 있다. 영문학과 생물학 석사 학위를 가진 그녀는 두 아이의 엄마이며, 나보다 키가 큰 북구형 미인이다. 일주일에 이틀 일하는데, 뭐든지 주제어만 말하면 책을 찾아다 준다. 한국에서는 이런 전문 사서가 서울대에도 없다. 서울대 사서는 순환 보직으로 전문 사서와는 거리가 멀다. 그러니 제도를 탓해야 한다.

내가 만나본 최고의 서점 직원은 프랑스의 교보문고라 할 조셉 지베르의 직원들이다. 소르본 대학을 졸업한 그들은 책을 분류하고 관리하며, 책 파는 것을 천직으로 여긴다. 반면 교보문고에 가보시라. 점원에게 책 위치를 물어봤다가는 속 터진다. 당연하다. 그들은 비정규직이고, 파견직이다. 괜히 말을 걸었다가 서로 민망스러운 일이라도 생길까 봐 말을 거는 일은 어지간해서는 없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전문 사서와 서점의 전문 직원이다. 왜냐하면 이들이 그 사회에 지식의 축적을 돕고 원활하게 만드는, 그야말로 지식사회의 전사이기 때문이다. 더도 말고, 20대 딱 1000명을 정규직 서점 직원으로 채용하고, 이들의 월급을 보조해주자. 영화서적 전문, 미술서적 전문, 음악서적 전문…, 멋있지 않은가? 그리고 이들이 일할 수 있는 지역의 전문 서점도 지정해서 지원해주면 어떻게 될까? 어떻게 되긴! 잘사는 나라가 된다. 이건 큰 힘 안 들이고 바로 할 수 있는 일이며 효과도 확실하다. 10년 후, 이들이 자기 전문 영역에서 전문 서점을 1000개 만든다고 생각해보라. 이런 게 바로 지식사회다.

최근 프랑스 책방연합회에서 <도서관 경제학>이라는 책을 발간했다. 책이 살아야 신문도 살고, 신문이 살아야 책도 산다. 그래야 전문 잡지도 산다. 여기에 좌파·우파가 있겠는가? 같이 힘써야 할 일이다. 운하에 들일 힘 100분의 1만이라도 지식 축적에 쏟았으면 좋겠다.(우석훈_성공회대 외래교수) 

08. 02. 28.


댓글(21)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2008-02-28 22: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8-02-28 22:49   좋아요 0 | URL
도서관인데요.^^

2008-02-28 23: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2-28 23: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2-28 23: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늘빵 2008-02-28 23:47   좋아요 0 | URL
흐흐 로쟈님이 사서하면 누가 대학에서 가르치나요. ^^ 저야말로 저런 사서하고 싶군요. 스위스의 저 사서들 따라잡으려면 공부 많이 해야겠지만.

로쟈 2008-02-29 00:21   좋아요 0 | URL
비정규직 강사보다야 정규직 사서가 낫지요.^^

마늘빵 2008-02-29 23:25   좋아요 0 | URL
그건 그래요 :) 강사 급여가 좀 많이 올라가야하는데 말여요.

2008-02-29 00: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8-02-29 00:22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저도 로스쿨처럼 문헌정보학도 대학원 과정이어야 맞다고 봅니다. 이런 건 왜 '선진화' 안하는지 모르겠습니다...

lectrice 2008-02-29 00:15   좋아요 0 | URL
전문 사서라...제게 딱인 직업인데. / 외국의 도서관장들은 또 어떤가요. 노장 소설가들이 도서관장을 맡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면 부럽기 그지없더라고요. 보르헤스가 관장인 도서관이라, 생각만 해도 좋지 않습니까.

로쟈 2008-02-29 00:24   좋아요 0 | URL
'환상의 도서관'이죠.^^

바람돌이 2008-02-29 01:31   좋아요 0 | URL
학교에도 제발 전문사서를.... 학교 도서관에 사서선생님이 있는 학교가 가끔 있는데 도서관 운영이 얼마나 달라지는지 몰라요. 근데 정말 사서 선생님 있는 학교는 가뭄에 콩나듯하다죠. ㅠ.ㅠ

marine 2008-02-29 12:15   좋아요 0 | URL
도서관에서 책이나 제대로 찾아 줬음 좋겠어요. 책이름 말하고 찾아 달라고 하면 책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제대로 찾아 봤냐고 면박이나 주고, 책이 자리에 없으면 없는 걸 어쩌냐고 읽지 말라는 식으로 가 버리니, 참...

로쟈 2008-02-29 22:50   좋아요 0 | URL
개념 없는 사서로군요...

람혼 2008-02-29 15:32   좋아요 0 | URL
조금 더 어렸을 때는 저도 사서직에 관심이 참 많아서, 국립/시립 도서관 사서들에게 전화까지 걸어가면서 이것저것 여쭤본 적이 있었습니다. 요는, 전공자가 아닌 사람이 사서가 되는 방법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죠.^^;(전공자가 아닌 사람은 성균관대 대학원에 있는 문헌정보학 과정을 몇 년 이수해야 사서 자격증이 나오는 것으로 알게 되었는데,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현장을 잘 모르는 '소박하고 무지한' 질문이었는지는 몰라도, 그때는 '철학 전문 사서' 또는 '외국서적 전문 사서'도 있는가, 그런 질문도 했던 것 같습니다. 이 칼럼의 취지대로만 된다면야 더할 나위가 없겠죠. 그나저나 취리히 대학의 도서관 풍경은 정말 말 그대로 '환상적'이군요.^^

로쟈 2008-02-29 22:51   좋아요 0 | URL
안 그래도 문헌정보학과 대학원생과 대화를 나눴던 참이었습니다.^^

열매 2008-02-29 16:36   좋아요 0 | URL
한 일년 전부터 도서관 서가 개방시간이 22시로 연장되면서 17시 이후부터는 비정규직 사서들이 연장근무 시간을 메우고 있습니다. 그들 역시 대학이나 대학에서 소정의 과정을 거친 '전공자'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처우는 열악하기 그지없더군요.

얼마전 서울시립 도*도서관에 게시된 비정규직 사서모집 공고문을 보고 경악을 금치못했는데, 그들의 시급이 4천원상당이었던 것이었던 것이었습니다.
하도 어이가 없어 게시판에 '차라리 햄버거를 굽자'라는 제목으로--요즘은 고등학생들이 알바를 메우는 페스트푸드점 시급이 그정도입니다-- 그 시급의 기준이 무엇인지 물었더니 도서관 관리자는 공무원법 *조에 의한 것이라고 형식적인 대답을 하고 말더군요. 그런 경력이라도 있어야 나중에 공채에 도전할 수 있을 것이나, 채용된 2명의 여자분의 모습에 안쓰러움을 금치 못하겠더군요.

로쟈 2008-02-29 22:53   좋아요 0 | URL
그 도서관 관리자는 자신의 시급 또한 '4천원'이란 생각은 안 들었나 보군요...

turk182s 2008-03-02 14:36   좋아요 0 | URL
음..한때 저도 백수때 사서직도전할라고 무진장생각만많이한적이 있는데,,그냥 도서관이 좋아서,가면 편하고 무언가 보물창고같고,근데 갈수록 동네 독서실화 되어가는 도서관을 보면 마음이 슬퍼요...우리동네도 비정규직사서를 뽑던데 저라도해볼까 했는데 이중취업이 된다네요..

로쟈 2008-03-05 22:34   좋아요 0 | URL
좀더 크고 멋진 도서관들이 많아졌으면 싶어요...
 

개강은 코앞이고 할일은 산더미인지라 가급적 '서재질'을 자제하고 있는데(덩달아 도서 구입도 자제하고 있다. 그래봐야 플래티넘 회원에서 떨어지는 건 요원하지만), 그럼에도 어떤 책들은 손가락을 가만 내버려두지 않는다. 어쩌면 '비열한 유전자' 탓인지도 모르겠다(책에 대한 호기심을 유독 주체하지 못하는 걸 보면 비열하면서도 좀 특이한 유전자이겠다). 문제의 책은 테리 번햄의 <비열한 시장과 도마뱀의 뇌>(갤리온, 2008)이다.

 

 

 

 

부제는 '예측할 수 없는 시장을 꿰뚫는 현대 경제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이고 '경제이론서'로 분류돼 있는데, 사실 이런 분야의 관심도서는 내 경우 일년에 몇 권 되지 않는다. 게다가 분류는 '이론'이지만 "하버드 경제학 교수가 쓰고, 노벨 경제학상 수상으로 증명된 실전 투자 경제학"이란 소개를 참조하면 오히려 '실전'에 가까운 책(이런 책을 내가 손에 드는 건 몇 년에 한 권 될까 말까이다!).

알라딘의 소개는 "주류 경제학의 맹점을 통렬하게 비판하고, 복잡하고 비합리적인 시장과 개인의 투자 패턴 및 경제적 선택을 날카롭게 분석한다. 또 지금 독자의 투자 패턴이 매우 위험하다는 것을 일깨운다. 주식, 부동산, 채권, 모기지, 인플레이션, 저축 등 구체적인 분야를 살피며, 어떻게 돈을 벌 수 있는지 지금까지와는 다른 시각으로 효과적인 투자법을 제시한다."로 돼 있고, "시골 의사의 부자 경제학'의 저자 박경철, 카이스트 정재승 교수, 미래에셋투자교육연구소 이상건 이사가 강력히 추천하는 화재의 책!"이란 광고도 곁들여져 있다. 형편이 '투자'와는 전혀 무관한지라 나로선 "복잡한 시장을 알기 쉽게 풀이하는 탁월한 교양서"정도로 접수할 참이다.

사실 '비열한'이란 제목이 뭔가 상기시키는 바가 있어서 찾아보니 저자는 예전에 <비열한 유전자>(너와나미디어, 2003)를 공저한 바 있다. 그맘때 적은 '최근에 나온 책들'(http://blog.aladin.co.kr/mramor/878617)을 보니 이렇게 적어놓았다.

테리 번햄과 제이 펠란 공저의 <비열한 유전자>(너와나 미디어). 이건 어제 강남 영풍문고에 들렀다가 우연하게 집어든 책이다. 아무런 사전정보가 없이 제목이 눈에 띄어 집어들었는데, 에드워드 윌슨의 세 줄짜리 추천사가 없었다면, 그냥 싸구려 과학서로 내려놓을 뻔한 책이다. 저자들은 모두 윌슨의 제자들로서 하버드에서 경영학과 생물학 학위를 했다. '유전자 안내서(매뉴얼)'로 분류될 책의 서론에서 저자들은 "우리 자신과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할 일은 지그문트 프로이트를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찰스 다윈을 연구하는 것이다."(19쪽)라고 말한다.

내가 왜 '븐능적'으로 <비열한 시장과 도마뱀의 뇌>란 책에 끌렸는지 이 정도면 알 것 같다. 나의 관심은 진화론과 경제학의 만남에 있는 것. 감이 안 오는 분들은 당시의 한 리뷰기사도 참조해볼 수 있겠다.  

"지방이 가득한 음식을 좋아하고,아내 아닌 다른 여자를 탐하는 것은 자신의 몸 속에 있는 유전자 탓이다. 카지노에서 월급을 탈탈 털려 버려도 또 도박을 하고 싶은 것도 마찬가지다." <비열한 유전자>는 이 같은 인간의 탐욕과 도박 심리, 불안 등 생활 전반에 나타나는 현상을 진화론을 들어 설명하고 있다.

이 책은 사람들이 저축하기 힘든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원시시대에 가장 훌륭하고 쉬운 저축 수단은 사냥을 하는 즉시 먹어 치우는 것이었다. 저장해 놓을 곳도,저장해 놨다고 해도 남에게 곧 빼앗길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이렇게 우리 유전자가 진화해왔기 때문에 지금도 저축은 힘들다고 한다. 몸은 여분의 영양분을 지방으로 바꿔 저장한 뒤 굶을 때 사용한다. 포르노도 성적인 본능을 이용한다고 해석했다. 저자는 원초적인 욕망이 유전자에 의해 나타나고 때로는 자제할 수 없게 되는 경우가 많지만, 그럼에도 의지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이 동물과 구별되는 큰 차이라고 해석한다. 


 

 



문제는 이 '비열한 유전자'가 남도 아닌 우리 자신을 구성하고 있다는 것(우리 안의 도마뱀!). 이 점은 '실전 투자자'들뿐만 아니라 '인문학자'들도 좀더 유의해야 할 대목이라고 나는 생각한다(이게 다윈주의 좌파의 문제의식이기도 하고. 이에 대해서는 http://blog.aladin.co.kr/mramor/1486776 참조. '다윈의 대답'은 왜 계속 이어지지 않는 걸까?)...

08. 02. 2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