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한겨레21에 실은 '로쟈의 인문학 서재'를 옮겨놓는다(http://h21.hani.co.kr/section-021162000/2008/02/021162000200802280699046.html). 일명 '실용정부'의 출범에 맞춰 읽은 제임스의 <실용주의>에 대한 간략한 독후감이다. 역시나 마감이 지나서 쓴 글이어서 따로 더 손을 볼 여유는 없었지만 생각해둔 내용을 다 적으려면 최소한 20매 정도의 분량으로 더 늘려 썼어야 했다. 마저 적지 못한 내용과 <실용주의> 번역에 대한 이야기들은 따로 다루는 수밖에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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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08. 02. 28) 무엇을 위해 전봇대를 뽑는가
실용주의가 대세다. 너도나도 실용을 말하고 실용주의를 외친다. ‘민주주의’와 ‘개혁’을 말하는 대신에 ‘전봇대’를 뽑는다. 그리고 이게 새로 출범하는 이명박 정부의 첫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 말 많았던 대통령 대신에 등장한 ‘일하는 대통령’의 새로운 정책기조, 그것이 실용주의다. 거꾸로 되짚으면 어즈버 지난 10년 동안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실용’인 모양이다. 그런 생각에 눈길이 간 책이 윌리엄 제임스의 <실용주의>(아카넷 펴냄)다. 대세를 좇아가려는 공무원들이 앞다투어 읽어봄직한 책이지만 이건 또 ‘인문서’라 사정이 그렇지만은 않은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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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용주의적 독서법은 아무래도 핵심을 먼저 파악하는 것 같아서 특히 ‘실용주의가 의미하는 것’이란 글을 먼저 읽었다. 그런데 이 문학적 필치의 철학자는 핵심만을 간추려주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사례들을 통해 에둘러 말한다. “철학적 문학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표현이 풍부하고 암시적”이라는 게 역자가 미리 일러준 것인데, 서두부터가 이런 식이다. “몇 년 전 산악지대에서 캠핑을 하던 중, 혼자 어슬렁거리다 돌아와보니 모두들 열띤 형이상학적 논쟁에 빠져 있었다. 논쟁의 실체는 나무둥치의 한쪽에 들러붙어 있는 다람쥐였다.”
어떤 상황인가? 나무둥치 한쪽에 다람쥐가 붙어 있고 반대편에는 사람이 서 있는데, 이 사람이 다람쥐를 보기 위해 나무를 돌면 다람쥐도 같은 속도로 움직이는 바람에 다람쥐를 볼 수 없었다는 것. 여기서 논쟁이 된 형이상학적 문제는 이런 것이다. 과연 그 사람은 다람쥐를 도는 것인가 아니면 돌지 않는 것인가? 어느 쪽이 옳은지 판결을 요청받은 제임스의 대답은 간단했다. ‘돈다’고 할 때 실제로 우리가 의미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가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덧붙이는 말. “실용주의의 방법은 애당초 그것 없이는 끝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형이상학적 논쟁들을 해결하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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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해결하는가? 개념들에 대한 논쟁이 일어날 경우에 실용주의는 그 각각의 실제 결과들을 추적하고 그 개념이 누군가에게 어떤 차이를 가져오는가를 따짐으로써 해결한다. 가령 두 가지 개념이 산출하는 결과들 사이에 아무런 실질적인 차이가 없다면 두 개념은 실제로 같은 것이고 모든 논쟁은 쓸데없는 것이 된다. 그 ‘개념’이란 말을 ‘이념’으로 바꾸어도 마찬가지다. 가령 다람쥐 대신에 덩샤오핑의 고양이를 떠올려보자. 그의 유명한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이 주장하는 것은 무엇인가? ‘흰 고양이든 검은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것 아닌가. ‘쥐를 잘 잡는다’는 결과가 동일하다면 그 고양이가 ‘희다’거나 ‘검다’거나 하는 개념상의, 혹은 이념상의 차이는 무의미하다는 것이 실용주의 철학이다(중국 사상계의 덩샤오핑이라 불리는 리쩌허우는 ‘실용이성’의 철학을 ‘밥 먹는 철학’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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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는 덩샤오핑보다도 훨씬 노골적인 비유를 든다. 그가 보기에 어떤 개념이나 아이디어가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실질적인 ‘현금가치’를 도출해낼 수 있어야 한다. 현금가치란 말할 것도 없이 우리가 실생활에서 사용할 수 있는 가치를 말한다. 혹은 우리가 하고자 하는 것을 할 수 있게 해주는 가치다. 배고픈 이들이 밥을 먹게 해주거나 배 나온 이들이 살을 뺄 수 있게 해주는 아이디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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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실용주의를 제임스는 개인적으로 과학과 종교를 통합하는 방식이라고 보았다. 예상할 수 있는 것이지만 실용주의적 종교론은 형이상학적 유신론이나 자연주의적 무신론과 대별된다. “신학적인 관념들이 구체적인 삶에 가치가 있다고 증명된다면, 유익하다는 의미에서 실용주의에게도 참이 될 것이다”라는 게 제임스의 입장이다. 다시 말해서, 종교적 신앙을 통해서 사람들이 절망을 극복하거나 소망하는 바를 얻을 수 있다면, 그런 실제적인 결과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종교적 신앙은 무의미한 것이 아니다. 다 맞는 말 아닌가? 단지 전봇대를 뽑고 쥐를 잡는 것이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인가란 형이상학적 질문에 덜미만 잡히지 않는다면 말이다.
08. 02.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