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여름에 출간된 니클라스 루만의 <사회체계이론>(한길사, 2007)은 '올해의 이론서' 후보작 중의 하나일 만큼 중요한 의의를 갖는 책이다(관련 페이퍼는 '루만이냐 하버마스냐' http://blog.aladin.co.kr/mramor/1342097 '체계이론과 주체철학' http://blog.aladin.co.kr/mramor/1377766 등 참조). 여름에는 서론부만 좀 훑어보다가 다른 일들에 치여 미뤄두고 말았는데 내년에는 좀더 많은 장들을 읽을 수 있었으면 싶다(나는 영역본까지 구해두었었다). 다행히 관련 입문서들도 나온다고 하니 사정도 더 좋아질 듯하고. 연세대대학원신문에 게재된 기사를 담비에서 옮겨놓는다(http://www.dambee.net/news/read.php?section=S1N5&rsec=&idxno=7654). 국역본의 문제점도 짚고 있어서 유익하다. 

담비(07. 12. 11) 루만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니클라스 루만(Niklas Luhmann: 1927~1998)은 ‘체계이론’을 통해 현대사회학에 중요한 혁신을 가져온 독일 사회학자다. ‘메타는 없다’는 (언뜻 포스트모던한) 테제를 기초로 정교하면서도 거대한 메타 사회이론을 구축해냈다는 점에 루만의 지적 독특함과 거장다운 사유의 넓이가 있는 것 같다. 그는 다작으로도 유명하여 평생 50권이 넘는 저서와 350편 이상의 논문을 남겼으며 다룬 주제의 범위도 사회의 일반이론에서 정치, 경제, 교육, 법 심지어 문학과 사랑에 이르기까지 방대하다. 하버마스와 더불어 전후 독일 사회과학계의 가장 중요한 지성으로 평가하는데 이견이 없다. 하지만 국제적 명성에 비한다면 국내에서 루만에 대한 관심과 이해는, 그가 매우 난해한 이론가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기이하다’고 할 만큼 낮은 수준이다. 그의 주저 중 하나인 <사회체계이론1, 2>가 지난여름 국내에 번역, 소개되면서 이런 답답한 상황이 슬슬 개선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루만과 체계이론에 관심을 가진 원우들을 위해 두 편의 좋은 소개글을 싣는다. (편집자)

루만과 사회학의 사고 전환

니클라스 루만이라는 학자를 간단히 소개하자면, 첫째 사회적인 것이 무엇인지 밝혀내었고, 둘째 사회적인 것 일반을 다룰 수 있는 기초이론을 마련했고, 셋째 이를 토대로 한 사회이론을 제시했으며, 넷째 여기에 더해 20세기 후반의 세계사회에 대한 몇 가지 시대 진단을 내린 거대 이론가이다. 사회학자라면 누구나 그런 일을 할 텐데, 왜 굳이 ‘거대’ 이론가라고 부르느냐는 반론이 있을 법하다. 하지만 루만이 이룬 사회학적 사고의 전환과 사회적인 것 일반을 다룰 수 있게 하는 풍부한 개념틀, 그리고 그 방대한 작업 규모에 주목한다면, 다른 이론가들이 인본주의 개념틀에 사로잡혀 얼마나 협소한 범위만 다루고 말았는지 알 수 있다.

루만에 의하면, 사회적인 것은 의식적 내지 주관적인 것으로 환원되지도, 그렇다고 사물적 내지 객관적인 것으로 다루어질 수도 없는 창발적(emergent) 질서 차원을 이루고 있다. 이는 이른바 주관적 사회학과 객관적 사회학을 단순히 절충하는 것이 아니며, 더구나 하버마스처럼 주체 개념을 생활세계의 상호주관성으로 확장함을 통해 사회적인 것을 해명하는 것도 아니다. 루만은 서로를 꿰뚫어볼 수 없는 의식체계들은 어떤 공동의 실재 차원도 만들어낼 수 없다고 본다. 오직 가능한 것은 ‘기대에 대한 기대’로 이루어지는 이중의 우연성, 즉 타자의 우연적 기대에 대한 자아의 우연적 기대이다. 이러한 이중의 우연성은 근본적으로 해소되는 것이 아니라 의식체계들이 각각의 의도를 억제하여 기대 구조를 형성시킴을 통해 구조화된 우연성으로 변형될 뿐이다.

구조화된 이중의 우연성 속에서 이루어지는 정보, 통지, 이해라는 3중의 선택 과정인 소통(Kommunikation)의 과정은 의식체계들에게 귀속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독자적인 실재의 차원, 즉 사회적 체계를 이루게 된다. 그래서 루만은 사회적 체계를 이루는 구성요소가 인간이 아니라 소통이라고 보며, 인간은 사회적 체계와 상호침투할 수는 있지만 환경에 머물게 된다. 이것이 전통적으로 사회적인 것을 다루어온 사고방식과 완전히 달라지는 루만의 전환 지점, 즉 사회적 체계를 창발적 질서로 이해하는 것이다.

포괄적인 사회적 체계인 사회는 그 진화의 초기 단계에 있어서는 그 환경에 있는 인간을 닮은 모습(부족, 혈통 등)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그래서 현대 이전에는 ‘인간적 사회’라는 관념을 갖고서도, 즉 인간 주체나 사물 객체와 다른 사회적 차원을 고민하지 않고도 사회를 묘사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경제, 정치, 법, 학문 등 여러 기능체계로 분화된 현대에 이르게 되면 사회는 더 이상 그 환경에 있는 인간들을 구획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분화 형식을 갖게 된다. 오직 경제인이기만 한 사람도 오직 학자이기만 한 사람도 없다. 경제나 학문과 같은 기능체계의 작동을 설명함에 있어 우리는 더 이상 사회계약론이나 실천이성과 같은 주체철학에 의지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고정된 사회구조 모델을 전제하는 것은 비개연적으로 진행되는 사건의 연속인 소통 과정과 사회의 진화를 설명할 수 없다.

Soziale Systeme. Grundriß einer allgemeinen Theorie

지금까지 간단하게 설명한 것이 루만의 중기 주저작인 『사회적 체계들 Soziale Systeme』의 초반, 특히 이중의 우연성을 다룬 3장에서 이루어지는 사고 전환의 핵심 내용이다. 이러한 전환을 토대로 루만은 기존 사회학과 철학의 개념들인 의미, 소통, 행위, 관찰, 구조, 과정, 인격 등에 모두 새로운 위치값을 부여함으로써 사회적 접촉 일반을 파악할 수 있는 개념틀을 이 책에서 마련한다. 사회학 역사에 있어서나 체계이론 역사에 있어서나 중요한 전환점이 될 수 있는 이 책이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 더 소개하기 전에 왜 내가 한글판의 제목인 ‘사회체계이론’이 아니라 ‘사회적 체계들’이라고 칭하는지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루만 번역서의 문제들

한국에 루만에 대한 소개는 그리 잘 이루어져 있지 않다. 이전에 번역된 저작은 협소한 주제를 다룬 것이었다. 포괄적으로 루만을 다룬 입문서 하나가 번역되긴 했으나, 그조차도 루만의 제자들이 그리 신뢰하지 않는 개론서 전문 저자가 겉핥기식으로 쓴 책이었다. 아직 하버마스의 저작들을 통해 이루어진 루만에 대한 왜곡된 소개, 즉 파슨스의 아류 혹은 기성의 사회질서를 옹호하는 보수적 체계이론 정도로 여겨버리는 인식을 교정할 만한 한글책은 부족하다. 그래서 자기생성(Autopoiesis) 패러다임으로의 전환 이후 1984년에 나온 Soziale Systeme의 번역은 반가운 일이다. 이 책은 루만의 이론사에 있어 사회적 체계 일반을 다룰 수 있는 기초 개념들을 완성한 저작이자, 1997년에 나온 또 다른 주저작인 『사회의 사회』에 이르기까지 계속되는 사회이론 생산의 출발점이었다.

루만은 『사회적 체계들』에서 “이 연구는 사회를 포괄적인 사회적 체계이자 다른 여러 사회적 체계들 중 하나로 이해하는 사회이론을 제공하지 않는다”(독18, 한1:63)고 말한다. 사회적 체계를 다루는데 사회이론을 제공하지 않는다니? 루만은 사회적 체계를 상호작용, 조직, 사회(Gesellschaft)로 분류한다. 이들 사회적 체계는 각각 고유한 작동(Operation) 원리를 갖고 있으며, 그중 사회는 ‘모든 소통을 포괄적인 사회적 체계’로 정의된다. 그래서 기업, 정당, 학교 등에 대한 연구가 조직사회학의 과제라면, 경제, 정치, 교육 등 지역 경계를 넘어 범사회적 소통이 이루어지는 현대 사회의 기능체계들에 대한 연구는 사회이론의 과제가 된다. 따라서 『사회적 체계들』은 아직 본격적인 사회이론을 다루는 책이 아니라 상호작용, 조직, 사회 등 사회적 체계 일반을 다룰 수 있게 하는 기초를 놓는 책이다. 그래서 soziales Sytem은 social system과 ‘사회적 체계’로, Gesellschaftssystem은 societal system과 ‘사회체계’로 구별해 옮겨야 할 필요가 생긴다.

그런데 한글판 옮긴이는 독자들이 읽기 쉽게 ‘사회적-’를 ‘사회-’로 바꾸었고, 그래서 Gesellschaft를 “사회”, “(기능적으로 분화되지 않은) 전체사회”, “공동체” 등 “문맥에 따라 상이한 역동적 번역을 취했다”고 밝힌다. 하지만 이러한 역동적 번역은 사회를 새롭게 정의하고자 하는 루만의 노력을 허사로 만드는 일이다. 분절적으로 분화된 사회에서는 소통들이 전세계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여러 사회들이 있었지만, 기능적으로 분화되어 전세계적으로 소통이 연결되는 현대 사회는 세계사회라고 말하는 루만의 설명법은 위와 같은 역동적 번역 때문에 제대로 전달될 수가 없다.

더구나 ‘공동체’라는 번역은 사회를 결코 인간 공동의 것으로 보지 않는 루만의 의도를 완전히 왜곡하는 것이다. 그래서 내식대로 그대로 옮기면 “사회는 오늘날 분명히 세계사회”(독585)라는 문장은 옮긴이에 의해 “전체사회는 오늘날 분명히 세계공동체”(한2:290)라는 무의미한 문장이 되어버린다. Gesellschaft라는 단어 자체에는 결코 ‘전체’니 ‘공동체’니 하는 함의가 들어있지 않다.

이러한 옮긴이의 몰이해는 제목뿐만 아니라 루만 소개에서도 드러난다. 옮긴이는 1997년에 나온 루만 사회이론의 집대성작인 『사회의 사회』에 대해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는다. 심지어 『사회의 경제』, 『사회의 학문』 등 일련의 사회이론 저작들을 『사회적 체계들』의 각론이라고 말한다. 앞선 설명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루만은 『사회적 체계들』에서 기초 개념을 마련한 후 사회이론 작업은 각론들을 먼저 쓰고 이들의 총론을 마지막에 썼다. 옮긴이가 루만 이론의 체계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인지 『사회체계이론』을 유일한 “결정판”으로 만들어 많이 팔고자 하는 출판사의 책략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런데 사실 이 정도의 문제는 번역의 질에 비하면 아무 문제도 아니다. 연산(Operation), 외율준거(Fremdreferenz) 같은 납득하기 어려운 번역어 선택은 그렇다 치고, 수십 번에 걸쳐 bewa..hren(입증)을 bewahren(보존)으로, Simplifikation(단순화)를 Implikation(함축)으로, Zumutung(요구)를 Vermutung(추측)으로 잘못 읽는 것은 최소한의 정성 부족을 보여준다. 문장 오역도 무수히 많으며, 2권 후반부에 이르면 거의 한 단락에 하나 이상 나온다. 지면의 제약으로 인해 여기서 밝혀둘 것은 독자들이 이 책을 읽으면서 루만을 이해할 수 없는 이유는 원래 어렵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오역의 탓도 크다는 점이다. 독일어를 못 읽는 사람이 지금 이 책을 읽고 싶다면 영역판을 추천한다(*역시나 국역본에 대한 기대는 접어야 하는 것일까?).



『사회적 체계들』의 내용

『사회적 체계들』은 도입과 12개의 장으로 되어 있다. 도입인 ‘체계이론의 패러다임 전환’과 체계와 기능, 체계와 환경을 다룬 1장과 5장은 루만 체계이론이 파슨스와 달리 구조보다는 기능을 우위에 둔다는 점, 생물학자인 마뚜라나가 이룩한 자기생성적 전환을 받아들임으로써 체계 중심이 아닌 세계(체계/환경-차이의 통일) 중심의 이론이라는 점 등을 볼 수 있다. 이는 체계이론이 보수주의로 빠질 수밖에 없다는 오해를 불식시켜줄 것이며, 사회의 환경 문제, 즉 인간의 고통이나 배제 문제나 생태적 위기 문제를 다루는 데서도 큰 잠재력을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

의미를 다루는 2장은 루만 이론의 또 하나의 자원인 후설의 지향적 의미 개념을 어떻게 사회학적으로 수용해 변형시키는지를 볼 수 있다. 루만은 70년대 초부터 의미가 행위나 구조보다 앞서는 사회학의 기본개념이라고 주장해왔고, 이 책에서 의미 개념은 의미를 구성하는 두 가지 체계(의식체계, 사회적 체계)의 다른 자기생성 원리를 밝힘으로써 완성된다. 앞서 말했듯이 3장은 사회적 체계가 고유한 자기생성 체계임을 밝히고 있으며, 4장에서 소통 개념을 해명함으로써 사회적 체계의 구성요소가 소통이지 왜 행위일 수 없는지 밝힌다.

사회적 체계 이론에서 행위 개념과 구조 개념의 위상을 밝히는 4장과 8장은 사회학 논쟁에 매우 중요한 함의를 갖는다. 루만은 행위란 체계가 자기생성의 동일성 지점을 마련하기 위해 소통의 세 가지 선택인 정보, 통지, 이해 중 통지행위 하나로 단순화하는 것이라고 본다. 구조는 사건들의 연쇄인 소통 과정에서 기대를 제약하는 것이지 고정된 실체라고 보지 않는다. 구조는 과도한 임의성을 제약하는 것이지 행태 자체를 규제할 수 없고, 따라서 과정은 구조상 비개연적인 것을 개연적으로 만들 수도 있다. 이렇듯 행위에 대해 소통을, 구조에 대해 사건과 과정을 우위에 둠으로써, 루만은 기든스의 구조화 이론이 행한 행위 중심 사회학과 구조 중심 사회학의 절충이 갖는 한계를 넘어서며, 하버마스의 소통적 행위 이론이 상호이해지향이라는 확인 불가능한 심리상태에 의지함으로써 갖는 한계를 드러낸다.

루만의 체계이론에서 인간의 자리는 어디이며, 개인은 무엇이며, 인간과 사회는 어떻게 서로 영향을 미칠 수 있는가를 밝히는 대목은 6장 상호침투와 7장 심리적 체계들의 개체성이다. 그리고 9장은 헤겔 이래 계속 논쟁이 되어 왔고 오늘날도 기능론 대 갈등론이라는 왜곡된 구도 속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모순과 갈등의 문제를 새롭게 조명하며, 10장은 앞서 말한 세 가지 사회적 체계의 차이를 다루고 있다.

루만은 이 책의 1장을 “다음의 고찰들은 체계들이 있다는 점으로부터 출발한다”고 시작한다. 그리고 이는 실재에 비추어 입증되어야 할 책임을 갖는다고 말한다. 그의 체계가 단순한 분석 모델이 아니라 실재라고 말하는 것이다. 급진적 구성주의 내부에서도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킨 이러한 선언에 대한 해명은 이 책의 맨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이루어진다. 루만에게 세계란 체계상대적인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관찰하는 체계는 자신의 관찰이 가진 맹점을 볼 수는 없으나 볼 수 없다는 사실은 반성을 통해 알 수 있다.

이 책에서 보여주는 세계는 루만이라는 관찰자의 맹점에 묶여있는 것이고 세계는 다르게도 관찰 가능하지만, 누구도 그런 맹점을 벗어난 세계를 알 수 없다. 합리성은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없다는 점을 아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자기지시와 합리성, 그리고 인식론을 위한 귀결들을 다루는 11장과 12장은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장들이지만 과감하게 ‘체계들이 있다’는 선언으로 시작해 체계/환경-구별이 세계 기술에 있어 높은 실적을 낳을 수 있다고 믿는 루만 이론의 전면모는 여기까지 읽어야만 밝혀진다. 그리고 11장의 논의는 체계이론을 통한 사회비판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흐름으로도 이어진다.

Niklas Luhmanns Theorie sozialer Systeme. Eine Einführung.

『사회적 체계들』을 다 읽는 데는 워낙 긴 시간이 걸릴 뿐만 아니라 친절한 입문서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시작하기조차 어렵다. 그래서 좋은 입문서를 추천하자면 독어는 G.Kneer와 A.Nassehi가 함께 쓴 책과 M.Berghaus가 쓴 책을, 영어는 M.King과 C.Thornhill이 함께 쓴 책을 추천한다. 첫 번째 책은 필자의 번역으로 내년 초에 한글판이 나올 것이다.(정성훈 / 서울대 철학과 박사과정 수료)

07. 1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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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07-12-13 0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루만을 전공하는 분께 이야기 들은 바가 있기도 해서, 아직 번역본은 구입하지 않고 있었는데, 역시나 더욱 구입을 망설이게 하는 글입니다.ㅠㅠ

로쟈 2007-12-13 08:41   좋아요 0 | URL
사실 저도 크게 신뢰하지는 않으면서도 책은 덜컥 구입했었는데요, 역시나 문제가 터지는군요.--;

책사랑 2007-12-13 08: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번역 미비에 대해 공감하는 바입니다.

로쟈 2007-12-13 08:39   좋아요 0 | URL
출판계 자체의 검증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게 근본적인 문제 같습니다. 언제나 독자들이 문제를 떠안아야 한다는 건 참...
 

'칸딘스키와 러시아 거장'전 관련기사를 옮겨놓는다. 언론리뷰들이 다소 뒤늦게 뜨고 있는데 늦게라도 많은 이들이 관람할 수 있으면 좋겠다(나는 이달 마지막주에 단체관람할 예정이다). 그래야 러시아 미술을 안방에서 볼 수 있는 기회가 또 생길 것이기에. 그런 계산속으로 기사를 옮겨놓는다.   

경향신문(07. 12. 12) 칸딘스키 보러 갔다가 ‘19세기 러시아’에 빠지다

주최측에서 욕심을 많이 부린 전시다. 이는 단점인 동시에 장점이 됐다. 서울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칸딘스키와 러시아 거장전-19세기 리얼리즘에서 20세기 아방가르드까지’(한·러교류협회 주최)는 제목 그대로 19세기에서 20세기까지의 러시아 미술을 보여주고 있다. 등장한 작가만 54명, 작품은 회화만으로 무려 91점이다. 한국 사람들이 알 만한, 추상화의 선구자 칸딘스키를 제목에 내세웠지만 그의 작품은 4점밖에 안된다. 초기 습작 소품 두 점을 빼면 실질적으론 두 작품에 불과하다. 정작 감동을 주는 작품은 19세기의 그림들이다. 제목이 전시의 진가를 제대로 강조하고 있지 못한 셈이다.



바꿔 말하면 19세기 러시아 그림들을 본 것만으로 전시의 가치는 높다. ‘광대한 국토만큼이나 폭과 깊이를 자랑하는 러시아 미술의 백미’를 볼 수 있다. 19세기 러시아 미술의 특징은 리얼리즘으로 요약된다. 문혜영 큐레이터는 “민중·인간에 대한 관심, 광대한 영토에 대한 사랑이 러시아 미술의 두 가지 특징”이라고 설명한다. 사실주의적인 메시지는 드라마틱한 러시아적 분위기를 담아 회화로 표현됐다. 19세기 작품은 총 63점으로 초상화, 풍경화, 역사화, 풍속화 등 주제별로 구분된 방에서 전시되고 있다.

톨스토이, 차이코프스키 등 예술가들을 주로 그린 것이 특징인 19세기 러시아 초상화는 동시대의 예술적 성취를 자랑스러워하는 사회 분위기를 반영했다. 러시아의 국민화가로 꼽히는 레핀이 인물의 본질을 깊숙이 통찰해낸 작품 ‘작가 고골의 분신’을 비롯해 낭만적 분위기를 가진 대작 크람스코이의 ‘달밤’ 등이 대표작이다. 풍경화에선 러시아 특유의 자연풍경을 아름답고 서정적으로 묘사한 사브라소프, 격정적인 바다의 생명력을 탁월하게 묘사한 아이바조프스키 등 거장들의 작품을 볼 수 있다. 혁명, 빈부격차, 사회부조리 등을 주제로 러시아 미술의 본질적 특징인 ‘사회 참여로서의 예술의 적극적 힘’을 반영한 작품들은 역사화와 풍속화 섹션에서 확인된다.

러시아 회화사 전체의 걸작으로 평가받는 레핀의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 전쟁의 현장을 사실적으로 묘사함으로써 반전 메시지를 전달하는 베레샤긴의 ‘불의의 습격’, 권력자와 무산자의 불평등한 현실을 단순하지만 설득력 있게 보여주는 마소예도프의 ‘지방자치회의 점심식사’ 등은 꼼꼼히 챙겨봐야 할 작품이다. 주제별로 접근하다보면 러시아 미술의 아름다움을 다각도에서 속속들이 볼 수 있게 된다.

20세기 러시아 미술은 유럽 화파와 교류하며 여러 사조를 혼합한 형태로 나타난다. 말레비치, 라리오노프, 곤차로바, 포포바 등 다양한 화풍을 보이는 러시아 아방가르드 작가들의 작품 24점이 경향별로 전시된다. 칸딘스키 작품으로는 완숙기의 걸작 ‘블루 크레스트’와 ‘구성 #223’이 왔다.



전시장 구성은 좋은 편이다. 19세기의 드라마틱한 그림에서 받은 감상의 충격은 20세기의 현대적 그림들을 보며 한숨 돌릴 수 있다. 작품 수가 많기 때문에 작품이 빽빽하게 걸려 있어 감상하기에 다소 숨찬 느낌이다. 그러나 칸딘스키 작품 넉점을 여유있게 배치해 놓은 붉은색 방이 마지막에 있어서 감상을 인상적이면서도 여유롭게 마무리할 수 있다. 작품들은 러시아 양대 국립미술관인 러시아미술관과 트레티야코프미술관에서 왔다. 1996년 ‘일리야 레핀전’ 이후 12년 만에 들어온 러시아 미술전이다. 내년 2월27일까지.(임영주기자)

07. 1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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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07-12-13 14: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꼭 봐야지 하는...전시입니다. 모네마네피카소에 넘 정열을 쏟아붓는 우리네 전시회
(그렇다고 싫다는 건 아닙니다..다만 넘 편중..되었다는 생각이..)에서 이렇게 보기 힘든 전시회를 기획해준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죠..^^

로쟈 2007-12-13 14:16   좋아요 0 | URL
어렵게 성사된, 드문 기회인 건 확실합니다...

소경 2007-12-14 2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겨울날 가마터 발굴장에서 일하는게 초읽기로 다가 왔네요. 어렵지 않게 행사에 문제만 없다면 볼 수 있을 것 같네요. 찬바람에 곡갱이질이나 호미나 삽질에 열정이 붙을 지도. ^^;;

로쟈 2007-12-14 22:37   좋아요 0 | URL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를 들고 가시길.^^

소경 2007-12-14 22:29   좋아요 0 | URL
앗.. 어제 시골에서 김장 도와서 챙긴 돈으로 책을 다량 구입해서 인터넷으로 손쉽게 구입은 무리고, 가기전에 구내 서점에 부탁해서 구해야겠네요. 연모하는 누님이 밥사준다 해서 다음 주에 직행 할 걸 미뤘는데 그게 다행인지 ^^;;, 추천 고맙습니다.

로쟈 2007-12-14 22:38   좋아요 0 | URL
겨울에 땅 파면서 읽기는 가장 좋은 소설이 아닌가 싶습니다.^^
 

한국일보의 '오늘의 책'을 자주 둘러보는 편이다. 12월 13일자는 러시아 출신의 화가 칸딘스키의 <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를 다루고 있다. 칸딘스키의 기일이어서다. 현재 열리고 있는 '칸딘스키와 러시아 거장'전(http://blog.aladin.co.kr/mramor/1726386)에서도 그의 그림을 볼 수 있는 터여서 기사를 챙겨두도록 한다.  

한국일보(07. 12. 13) [오늘의 책<12월 13일>] 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

현대 추상미술의 선구자인 바실리 칸딘스키가 1944년 12월 13일 78세로 사망했다. 러시아 태생으로 모스크바대학에서 법학 정치학 경제학을 공부한 칸딘스키가 미술로 인생의 방향을 튼 것은 30세 때인 1896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프랑스 인상파 회화전에서 모네의 그림 ‘건초더미’를 보고서였다.

그 해 대학교수직 제의를 거절하고 뮌헨으로 가서 그림공부를 시작한 그가 현대예술의 방향마저 바꿔버린 최초의 추상회화 ‘첫번째 추상 수채’를 제작한 것은 44세 때인 1910년이다. 나치에 의해 퇴폐 예술가로 지목돼 작품이 몰수되기도 했던 칸딘스키는 1933년 프랑스에 귀화해 여생을 보냈다.

<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1912)는 칸딘스키의 예술론을 집약한 책이다. 그는 이 책에서 “무릇 예술가의 임무라는 것은 형식을 지배하는 데 있지 않고, 내용에 적합한 형식을 만드는 데 있다”고 선언한다. 존재하는 대상을 구체적으로 모방하고 재현하던 전통적 회화를 벗어나, 예술가의 ‘내적 필연성’에서 우러나오는 형태와 색채로 화면을 채우는 현대예술은 그의 이 선언에서 시작됐다.

이로써 현대예술은 그 자체가 하나의 미적 실체, ‘오브제’가 된다. 예술의 모든 외적인 표현수단이나 형식을 관통하는 예술가의 내적인 울림을 가리키는 말인 ‘내적 필연성’은, 예술에서 중요한 것은 형식이 아닌 정신이라는 칸딘스키의 생각이 담긴 핵심 개념이다. 그에 따르면 “참된 예술작품은 비밀로 가득 차고 수수께끼 같은 신비스런 방식으로 예술가에 의해 생겨난다.”

칸딘스키의 글은 그 자체로 음미할 문학적 향기가 가득하다. 예를 들면 이런 문장. “흰색은 가능성으로 차 있는 침묵이다. 그것은 젊음을 가진 무(無)다. 정확히 말하면 시작하기 전부터 무요, 태어나기 전부터 무인 것이다.”(하종오기자)

07. 12. 12.

P.S. 찾아보니 얼마전 칸딘스키 등이 엮은 <청기사>(열화당, 2007)이 번역돼 나왔다. 국내에서 전시회를 가졌던 것으로 기억돼는데, "청기사(靑騎士, Der Blaue Reiter)는 20세기 유럽 현대예술의 불규칙하고도 혼란스러운 태동을 포착하고 그 산고를 함께하며 새로운 탄생을 널리 선포했던 선구자들의 이름인 동시에, 그들이 1912년에 발간한 예술연감(藝術年鑑)의 제목이자, 그 연감의 주도적인 편집진이었던 바실리 칸딘스키(W. Kandinsky)와 프란츠 마르크(F. Marc)가 중심이 되어 조직한 전시회의 이름이다."

이 청기사파를 소개하는 책으로 <청기사파>(예경, 2007)도 올해 나온 책이고, 하요 뒤히팅의 <바실리 칸딘스키>(마로니에북스, 2007)은 지난 가을에 번역돼 나왔다. 김광우의 <칸딘스키와 클레의 추상미술>(미술문화, 2007)까지 더하면 나름대로 풍족한 읽을 거리다.

Василий Кандинский Точка и линия на плоскости

내가 갖고 있는 러시아어본은 <평면 위의 점과 선>. 우리말로 <점. 선. 면>(열화당)이라고 소개된 책이다. 한데 어느 구석에 있는지 보이지 않는군, 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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샹탈 무페의 <정치적인 것의 귀환>(후마니타스, 2007)이 오늘 배송받은 책들 가운데 하나이다(관련 페이퍼는 http://blog.aladin.co.kr/mramor/1748507). <민주주의의 역설>(인간사랑, 2006)과 함께 뒤적이다가 최근에 출간된 연구공간 수유+너머의 <코뮨주의 선언>(교양인, 2007)에 대한 서평을 읽게 됐다. 무페의 책이 환원불가능하며 제거불가능한 사회적 '적대'를 이론적 입지점으로 삼고 있는데 반해서 '코뮨주의자'들은 '우정과 기쁨의 정치학'을 주장하고 제창한다. 극과 극이라고 할 만하다.

<정치적인 귀환>의 '옮긴이 후기'를 보니 "같은 좌파 탈근대론자들이지만 이들(*라클라우와 무페)의 기획에 명확한 반대의 입장을 취하는 조류도 있다. 특히 들뢰즈는 민주주의의 등가연쇄에 반대하여, 소수적 생성, 직접적인 생산의 힘을 높이 산다."(251쪽)라고 적어놓았는데, '코뮨주의자들'은 달리 '들뢰즈주의자들'이기도 하므로 대립의 구도는 '급진 민주주의 vs. 코뮨주의'이면서 '라클라우/무페 vs 들뢰즈'이기도 하겠다. 하므로 나란히 읽어보는 것도 좋겠다(아직 내게 더 설득력있게 들리는 건 '우정'이 아니라 '적대'다). <코뮨주의 선언>에 대한 리뷰기사를 옮겨놓는다.  

한겨레(07. 12. 13) 코뮨주의, 공산주의와 다른 ‘우정의 정치학’

21세기 한국의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코뮨주의’는 매우 익숙한 단어다. <문화/과학> 동인과 조정환씨로 대표되는 자율주의 평론 그룹, 연구공간 ‘수유+너머’ 등이 이 용어를 새로운 미래사회 모델을 담는 그릇으로 애용하고 있다. 이 용어의 부상은 1990년대 현실 사회주의의 패배와 긴밀히 연동되어 있다. 실패한 체제인 스탈린주의를 떠올리게 하는 공산주의(코뮤니즘) 대신 새로운 개념이 필요했던 것이다. 특히 현실 사회의 코뮤니즘은 물질적 생산과 분배 등 생산력주의에 과도하게 치우치면서 마르크스가 애초 생각한 ‘코뮨’이 주는 상상력을 제약하고 있다는 점도 다른 요인이었다. 마르크시즘을 마르크스주의라고 바꿔 부르듯이, 코뮤니즘을 코뮨주의로 대체시켜 자신들의 미래 변혁 모델을 담은 것이다.

그렇다면 ‘코뮨주의’의 정확한 실체는 무엇인가? 코뮨주의를 표방하는 단체들 가운데 연구공간 ‘수유+너머’가 이 질문에 응답했다. 이 단체가 최근 펴낸 <코뮨주의 선언-우정과 기쁨의 정치학>(고병권·이진경 외 지음, 교양인)은 코뮨주의의 이념적 지향을 정치·철학 등 여러 각도에서 체계적으로 밝히고 있다. 이들은 자신들의 ‘코뮨주의’가 “현실 자체에 대한 변혁의 지향”이라는 점에서 하나의 이념임을 선언한다. 하지만 이 이념은 역사 속에 묻혀버린 ‘공산주의’와 반대물이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로 이질적이다. 코뮨의 정의에서부터 차이는 드러난다. “다양한 차이들, 여러 특이점들이 소통하며 공통된 것을 생산하는 것, 그것을 우리는 코뮨이라고 부른다.”

옛 ‘동지들’처럼 사유화와 자본주의 화폐 경제에 반대하고 혁명을 꿈꾸지만 궁극적 목표로 가는 길은 다르다. 이 책의 부제인 ‘우정과 기쁨의 정치학’이 이를 극명히 보여준다. 기존 마르크스정치학은 모든 차이와 대립을 계급 적대로 환원했다는 점에서 ‘적대의 정치학’이었다는 게 이들의 판단이다. 대신 어감상 정반대인 ‘우정의 정치학’을 내세운다. 적이 아니라 친구에서 시작해야 하며, 부정적 방법이 아니라 긍정적 방법으로 사유하자는 것이다.

“긍정적 감응이 발생하고 지속된다면 경제적 이해관계나 정치적 적대 관계를 가로질러 우정의 관계가 형성된다”고 했다. 경제적 대립이나 정치적 적대조차도 우정을 막는 결정적인 경계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모두가 함께하면서, 좋은 관계를 맺는” 코뮨은 어떻게 달성할 수 있을까? 방법은 일상의 구체적 실험이다. 대중은 “특정한 촉발이 주어지면 갑자기 솟아오르며 거대한 힘과 운동을 만들어 나아가는 자발적 흐름”이라는 것이다.

전위가 아니라 이 ‘자발적 흐름’이 혁명을 만들어나가는 주체라는 설명이다. “대중의 일상적 삶을 바꾸고, 감응과 감각을 바꾸고, 습속의 무의식을 변혁하는 것이 의식화보다 훨씬 더 혁명에 긴요한 직접적 동력”이라고 본다. 이 때문에 에너지, 음식, 정보, 지식, 정서 등을 다른 코뮨과 어떻게 소통할지 고민하는 일상의 대안적 실험이 중요하다. 여러 대안적 실험들을 소통하고 확산시킬 때 “세상이 바뀐다”고 확신하는 것이다.

이들은 또한 국가를 독점의 영역으로 규정하면서 ‘국가적 공공성’이란 개념에 부정적이다. 이런 견해는 혁명에서 국가 권력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문화/과학> 동인의 사유와 크게 다르다. <문화/과학> 동인들은 국가 권력이 엄청난 사회적 자본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민중이 국가 권력을 장악한 뒤 그 기능을 근본적으로 전환시켜야 한다는 견해를 보이고 있다. 즉 아래로부터의 대안사회 건설 원리는 위로부터의 국가 개입과 함께 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고병권 연구공간 ‘수유+너머’ 대표는 “삶 속에는 비자본주의적 요소가 많다”면서 “자본주의적 요소를 줄이고 싸워나가는 일상 속의 대안적 실천이 중요하며 국가가 중요한지 아닌지는 그 이후의 문제”라고 말했다. 고 대표와 이진경 서울산업대 교수는 책 머리말에서 “그렇게 해서 세상이 바뀌겠냐?”라고 묻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답하겠다고 했다.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는 말을 자신의 삶을 바꾸지 않는 변명으로 삼지 말라고. 중요한 것은 당신의 삶을 바꾸는 것이다.”(강성만 기자)

07. 1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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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때리다 2007-12-12 23:10   좋아요 0 | URL
기쁨과 우정의 정치라...왠 뜬구름 잡는 이야기로만 들리네요. 자신이 형제로 삼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세상에는 많다는 마르크스의 말이 떠오르네요. 공상적 사회주의자에 대한 마르크스의 비판을 그대로 덮어씌워도 되지 않을런지

로쟈 2007-12-13 00:57   좋아요 0 | URL
소규모 공동체에서라면 얼마든지 가능한 얘기겠죠...

사량 2007-12-13 01:08   좋아요 0 | URL
'선언'치고는 책이 너무 두껍네요. 400쪽짜리 선언이라...

로쟈 2007-12-13 01:09   좋아요 0 | URL
우정과 기쁨이 넘쳐났나 봅니다...

람혼 2007-12-13 01:55   좋아요 0 | URL
로쟈님의 댓글을 읽고 그만 파안대소하고 말았습니다. 왠지 속이 다 시원하군요.^^

드팀전 2007-12-13 10:29   좋아요 0 | URL
저도 내공이 열나부족하여 '적대'적인가 봅니다.^^

가끔 자기의 삶을 바꾸는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선이나 불교 좋아하시는 분들이 이런 거 좋아라 하시더군요.나도 좋아하긴 하지만 거기까지-것으로 변혁을 상정하는 그 원대한 꿈에 딴지를 거는데..딴지건다고 뭐가 어떻게 달라지겠습니까.염불하는 사람은 계속 염불하고 주기도문외우는 사람은 계속 외워야지...^^

공감하는 내용이 많네요.무페 책은 어떻습니까? 읽기 어려운가요?


로쟈 2007-12-13 14:18   좋아요 0 | URL
<귀환>이나 <역설>이나 비슷한 얘기들이 계속 변주됩니다. 무페는 원서도 평이한 편이어서 읽기 쉽습니다. 국역본 <역설>은 고유명사 표기에 오류가 많고 이물감이 좀 생기는 번역입니다...

드팀전 2007-12-14 09:46   좋아요 0 | URL
ㄳ ㄳ

sommer 2007-12-15 00:05   좋아요 0 | URL
에피쿠로스의 가든과 아리스토텔레스의 폴리스의 차이에 해당할 거 같네요.

로쟈 2007-12-15 10:24   좋아요 0 | URL
수유+너머식으로 말하면 밥을 같이 먹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차이도 될 거 같습니다. '우정과 기쁨'은 '밥상'에서 나오니까요...
 

태안반도의 원유 유출 사고가 점입가경으로 치닫고 있다. 오늘이 고비라고 하는데 현재까지의 기름 오염만으로도 이미 서해안의 생태계를 무너뜨릴 최악의 참사로 기록되는 듯하다. 무엇보다도 방심과 부주의, 행정적 오판과 무사안일이 빚어낸 '인재'라는 것이 안타깝고 답답하고 참담하다(묵시록적인 사건이 아닌가라는 생각마저 든다). 프레시안의 기사를 몇몇 사진과 함께 옮겨놓는다.

프레시안(07. 12. 11) "당신이 사는 곳도 태안반도처럼 될 수 있다"

지난 여름에 태안반도를 여행하고 싶었다. 아내가 오래 전부터 태안을 가고 싶다고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일 저런 일에 치이다가 결국 못 가고 말았다. 얼마 뒤 가로림만을 막고 조력발전을 하겠다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는 기사를 보고 긴장하고 분노했다. 조력발전을 명분으로 가로림만을 방조제로 막아서 개발하겠다는 계획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다면 개발업자들과 지주들은 한몫 단단히 챙기겠지만 가로림만은 크게 훼손되고 말 것이다. 가로림만 조력발전계획은 시화호 조력발전계획, 강화도 조력발전계획 등과 함께 반드시 막아야 할 신개발주의의 개발계획이다. 자연과 문화를 내세우며 자연과 문화를 대대적으로 파괴한다는 점에서 신개발주의는 구개발주의보다 더 교활하고 위험한 개발주의이다. 복원을 내세워서 개발을 강행한 '청계천 복원 사업'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런데 뜻밖의 사고가 태안반도를 덮쳤다. 2007년 12월 7일 아침 7시 15분에 인천대교 공사에 사용되고는 거제로 이끌려가던 거대한 크레인이 유조선을 들이받아 유조선에 구멍이 나서 무려 1만500kl의 원유가 바다로 흘러든 것이다. 이 끔찍한 사고가 일어나고 나흘째인 12월 10일 밤 현재, 태안반도의 바다 8000여ha가 기름으로 뒤덮였고, 양식장이 밀집한 가로림만도 위험하다고 한다.
  
8000ha는 무려 8000만㎡이고, 평수로는 무려 2420만 평이다. 여의도의 27배를 넘는 넓이의 바다가 기름으로 뒤덮인 것이다. 정말이지 끔찍한 대참사가 아닐 수 없다. 기름으로 뒤덮이는 순간, 생명의 바다는 삽시간에 죽음의 바다가 되고 만다. 수많은 생명체들이 기름에 뒤덮여 고통스럽게 허덕이다가 죽는다.
  
1990년 8월에 발발한 걸프전에서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은 쿠웨이트의 유정들을 파괴했고, 이 때문에 많은 원유가 바다로 흘러들어 많은 생명체들이 죽었다. 영문도 모른 채 기름에 뒤덮여 허덕이며 죽어가던 가마우지의 모습은 걸프전의 끔찍한 상징이 되었다. 그런데 지금 아름다운 태안반도에서 똑같은 모습을 보게 되었다. 머나먼 아라비아해에서 벌어졌던 무서운 일이 지금 여기의 생생한 현실이 된 것이다.


  
더욱 무서운 것은 이 대참사가 2차 오염, 3차 오염으로 이어지고, 결국 수십년의 세월이 흘러도 제대로 복원되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기름을 제거하기 위해 뿌린 유화제도 바다에 해롭기는 마찬가지이다. 기름오염은 곧 유화제 오염으로 이어진다. 유화제는 바닥으로 가라앉으면서 바다를 깊이 죽인다. 기름과 유화제는 공기 중으로 날아오르면서 공기도 심각하게 오염시킨다. 이미 태안반도 일대의 공기는 크게 오염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우리는 현대 사회의 위험문제에 대해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수많은 문명의 이기를 사용해서 대단히 편리하고 풍족한 삶을 살고 있다. 그러나 모든 문명의 이기는 자연을 파괴할 수 있으며, 따라서 자연 속의 존재인 우리 자신을 파괴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독일의 사회학자인 울리히 벡은 현대 사회를 아예 '위험사회'라고 부른다. 실로 우리는 편리하고 풍족할 뿐만 아니라 지극히 위험한 사회에서 살고 있다.


  
'위험사회'는 서구의 이야기가 아니라 현대의 과학기술을 사용하는 모든 나라의 현실이다. 그런데 같은 '위험사회'에도 정도의 차이가 있다. 한국은 삼풍백화점 붕괴사고에서 잘 드러났듯이 아주 심한 위험사회에 속한다. 극히 위험한 과학기술을 관리하는 사회체계가 너무나 부실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위험을 가중시키는 부패의 문제도 포함된다. 이런 상태를 개선하고자 정부는 소방방재청을 설립하고, 대대적인 위험대책을 수립했다.
  
정부의 정책이 크게 개선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다시 이런 대참사가 일어난 것이다. 이것은 과연 피할 수 없는 것이었을까? 흔히 '인재'로 표현되는 '위험한 과학기술을 다루는 부실한 사회체계'의 문제는 해결된 것일까? 이제까지 제시된 주민의 증언이나 수사내용으로 봤을 때, 그렇게 보기는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다. 다음과 같이 주민들은 '표박지'가 아닌 곳에 대형선박들을 무단정박했던 사실을 지적하며 '인재'라고 주장했다. 

사고 지점에 가장 인접해 큰 피해를 입은 태안군 소원면 의항리 주민들은 피해가 확산된 것이 어설픈 대처에 따른 '인재'라고 주장했다. 주민들은 배의 주차장과 같은 표박지가 아닌 곳에 유조선과 화물선을 정박해 이 곳을 지나는 배들과 충돌의 위험성이 상존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고 성토했다. 사고 지점은 대산지방해양수산청에서 고시한 표박지와 3마일 떨어진 지역으로 기름유출 대재앙을 불러온 주원인이라고 주장했다.
  
태안군 어선 조합원인 이모(60)씨는 "태안화력에 들어가기 위해 순서를 기다리는 유조선 등이 이번 사고 지점에서 며칠 머물렀다"며 "표박지로 고시한 곳이 아닌 곳에 며칠 동안 정박해 있어 단속을 건의해도 대산해수청은 이를 외면해왔다"고 말했다.('분통을 터뜨리는 주민들', <국민일보>, 2007년 12월 10일)


  
또한 대산해양수산청과 크레인의 예인선 사이에 규정대로 소통이 이루어졌는가, 그리고 양자가 해야 할 일을 제대로 다 했는가에 대해서도 커다란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쉽게 말해서 사고를 막아야 할 당사자들이 제대로 할 일을 했다면, 충분히 막을 수 있는 사고였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앞으로 수사를 통해 더욱 명확히 밝혀지겠지만, 이제까지 드러난 사실은 다음과 같이 너무나 엉터리 같은 것이어서 믿고 싶지 않을 지경이다.
  
해경 조사에서 대산해양수산청 관계자들은 "예인선이 호출에 응답하지 않았고, 크레인을 실은 부선과 예인선을 잇는 와이어가 끊어진 상황도 전혀 보고 받지 못했다"며 예인선 측에 책임을 미뤘다. 이에 대해 예인선 관계자들은 "관제실에서 VHF 16번으로 호출해야 하는데 12번으로 호출하는 바람에 교신이 안됐다"고 주장했다. 관련 법규에 따르면 선박들은 항상 VHF 통신 16번 채널을 켜놓고 항만 당국의 비상호출에 응답해야 한다.
  
그러나 정작 의혹이 쏠리는 부분은 휴대폰 통화 이후다. 관제실과 예인선 선장간 통화가 있은 뒤 1시간 정도면 예인선이 유조선을 충분히 피해 갈 수 있었는데도 그러지 못했다. 만약 이미 예인선과 부선을 잇는 와이어가 끊어져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이었다면 관제실과의 통화 때 이를 보고했어야 하는데 하지 않았다. 이후로도 충돌 때까지 와이어가 끊어졌다는 보고는 관제실에 접수되지 않았다.
  
대산해양수산청도 안이한 대처로 의혹을 사고 있다. 항로 이탈과 충돌 위험을 인지한 뒤 예인선을 VHF로 두 차례나 호출하고, 휴대폰으로 경고까지 했지만 이후로는 충돌 시까지 별다른 확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당시 크레인은 대산해양수산청의 경고에도 불구, 항로를 크게 벗어나 유조선에 더 가까이 접근하고 있었지만 관제실은 뒷짐만 지고 있었다.(''죽음의 바다' 책임회피만 둥둥', <한국일보>, 2007년 12월 9일)
  
삼풍백화점은 왜 붕괴했는가? 붕괴를 막기 위한 여러 제도와 절차가 있었으나 부패로 말미암아 전혀 작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번의 사고에서도 제도와 절차가 멀쩡히 있었으나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그것이 부패 때문인지, 단순한 태만 때문인지, 혹은 그저 실수였는지는 앞으로 밝혀질 것이다. 그러나 기구를 설립하고, 법률을 제정하고, 제도를 마련하는 것으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분명하게 밝혀졌다.


  
인간과 자연에 대한 전체론적 이해를 추구했던 미국의 인류학자 그레고리 베이츤(*베이트슨)은 <정신의 생태학>(*<마음의 생태학>)에서 오늘날 겸손은 도덕적 덕목이 아니라 과학의 요청이라고 지적했다. 핵발전소를 비롯한 현대 과학기술의 위험을 연구한 미국의 조직사회학자 찰스 페로우는 조직적 복잡성 때문에 현대 과학기술의 위험을 완전히 안전하게 관리할 방도는 없다고 결론지었다. 우리는 이러한 위험연구의 성과에 진지하게 귀 기울여야 한다.
  
태안반도의 대참사는 위험사회 한국의 무서운 실상을 확연히 입증하는 생생한 증거로 남을 것이다. 이런 문제의 재발을 막기 위해 우리는 지구 자체를 파멸로 몰아넣고 있는 현대 과학기술의 위험, 이러한 위험을 결코 안전하게 관리할 수 없는 현대 사회체계의 위험에 전면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핵발전정책의 중단, 대형 송전선로 건설의 중단, 그리고 '경부운하' 구상의 폐기 등은 그 구체적 과제의 예이다.
  
낙동강과 한강에서 비슷한 문제가 일어난다고 생각해 보라. 이미 1991년 봄에 낙동강에서는 비슷한 문제가 한 달 새 두 차례나 일어나기도 했다. 위험사회 한국은 파멸을 향해 치달리고 있다. 우리의 과제는 무조건 경제, 무조건 성장이 아니다. 파멸을 향해 치달리는 위험사회 한국의 무서운 실상을 바로잡는 것,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진정한 과제이다.(홍성태/상지대교수)

07. 1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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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 2007-12-11 20:14   좋아요 0 | URL
사진 블록에 가져갑니다..

로쟈 2007-12-11 21:31   좋아요 0 | URL
사진 몇 장은 한겨레에서 가져왔습니다.

살라흐앗딘 2007-12-12 09:29   좋아요 0 | URL
시험공부하다가 잠깐 쉬는 새에 들어왔는데, 맨 위의 바다새 사진을 보니 더 심란하네요;;

로쟈 2007-12-12 22:44   좋아요 0 | URL
주변 어민들의 삶 또한 바다새의 처지와 다를 바 없는 것 같습니다.--;

책사랑 2007-12-13 08:30   좋아요 0 | URL
이런 "위험사회"의 모습이 이제 전세계화되었다는 점이 더 큰 문제인 것 같습니다.
울리히 벡은 이미 그런 것을 간파했던지 올해에 "세계 위험사회"(Weltrisikogesellschaft)라는 책을 독일 주어캄프 출판사에서 펴냈습니다. 2008년 한국어판이 도서출판 길에서
출간될 예정입니다.

로쟈 2007-12-13 08:36   좋아요 0 | URL
책사랑님의 '출판 열정'에 감복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