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 인사회(인문사회과학출판인협의회)에서 올해 처음 제정한 '올해의 책' 선정에 참여했다. 60여 회원사(출판사)에서 추천한 3종의 책들 가운데 1, 2차 선정과정을 통해서 최종적으로 10권의 책을 다른 선정위원분들과 함께 골랐다. 그 리스트를 만들어둔다.


10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장 지글러 지음, 유영미 옮김, 우석훈 해제, 주경복 부록 / 갈라파고스 / 2007년 3월
9,800원 → 8,820원(10%할인) / 마일리지 490원(5% 적립)
2007년 12월 10일에 저장
구판절판
만들어진 신- 신은 과연 인간을 창조했는가?
리처드 도킨스 지음, 이한음 옮김 / 김영사 / 2007년 7월
29,000원 → 26,100원(10%할인) / 마일리지 1,450원(5% 적립)
양탄자배송
내일 밤 11시 잠들기전 배송
2007년 12월 10일에 저장

슬럼, 지구를 뒤덮다- 신자유주의 이후 세계 도시의 빈곤화
마이크 데이비스 지음, 김정아 옮김 / 돌베개 / 2007년 7월
15,000원 → 13,500원(10%할인) / 마일리지 750원(5% 적립)
양탄자배송
내일 아침 7시 출근전 배송
2007년 12월 10일에 저장

소금꽃나무
김진숙 지음 / 후마니타스 / 2007년 5월
12,000원 → 10,800원(10%할인) / 마일리지 600원(5% 적립)
양탄자배송
내일 아침 7시 출근전 배송
2007년 12월 10일에 저장



10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웽스북스 2007-12-10 15:05   좋아요 0 | URL
올해의 베스트셀러 목록보다 오천배쯤 마음과 공감이 가는 목록입니다 ^^ 읽지 못한 것들이 많고, 미처 몰랐던 것들도 있어 맘속에 꼭꼭 챙겨놨습니다 ^^

로쟈 2007-12-10 16:18   좋아요 0 | URL
인사회측에서 좋아하겠습니다.^^ 저도 안 읽은 책들이 많습니다.^^;

stella.K 2007-12-10 15:17   좋아요 0 | URL
앗, 나도 리스트로 쓸 걸... 괜히 페이퍼로 썼나 봐요. 후회 급물살!ㅜ.ㅜ

로쟈 2007-12-10 16:19   좋아요 0 | URL
저는 페이퍼로 쓰고 싶어도 그럴 여유가 없어서요.--;

프레이야 2007-12-10 16:02   좋아요 0 | URL
앗, 3권만 있네요.

로쟈 2007-12-10 16:19   좋아요 0 | URL
저도 소장도서는 3권입니다.^^

조선인 2007-12-10 22:40   좋아요 0 | URL
저도 3권이네요. 소금꽃나무, 평화의 얼굴,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게다가 3권 중 2권이 차력도장 추천도서라는 게 으쓱합니다. ㅎㅎ

로쟈 2007-12-10 22:43   좋아요 0 | URL
차력도장의 정체가 궁금합니다.^^

2007-12-11 09: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2-11 12: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중어 글쓰기에 대한 김윤식 교수의 저작들 리스트를 만들어둔다. 다음 학기 강의 아이템 중의 하나여서 겨울방학에 좀 읽어두어야겠다.


13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내가 살아온 20세기 문학과 사상- 갈 수 있고, 가야 할 길, 가버린 길
김윤식 지음 / 문학사상사 / 2005년 4월
25,000원 → 22,500원(10%할인) / 마일리지 1,250원(5% 적립)
2007년 12월 10일에 저장
절판

이광수의 일어 창작 및 산문
김윤식 지음 / 역락 / 2007년 11월
10,000원 → 9,500원(5%할인) / 마일리지 500원(5% 적립)
*지금 주문하면 "6월 19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2007년 12월 10일에 저장

일제말기 한국 작가의 일본어 글쓰기론
김윤식 지음 / 서울대학교출판부 / 2003년 8월
17,000원 → 17,000원(0%할인) / 마일리지 850원(5% 적립)
2007년 12월 10일에 저장
품절
일제말기 한국인 학병세대의 체험적 글쓰기론
김윤식 지음 / 서울대학교출판부 / 2007년 6월
15,000원 → 15,000원(0%할인) / 마일리지 750원(5% 적립)
2007년 12월 10일에 저장
품절


13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람혼 2007-12-10 03:47   좋아요 0 | URL
이중어 글쓰기를 둘러싼 김윤식 선생의 최근 연구는, 로쟈님께서 올려주신 <일제 말기 한국 작가의 일본어 글쓰기론>과 <해방공간 한국 작가의 민족문학 글쓰기론> 두 권을 정점으로 어느 정도 일단락을 본 감이 있으나, 이와 관련해 몇 권의 책들을 더 추가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일단 <한일 근대문학의 관련양상 신론>(서울대학교출판부, 2001)이 가장 먼저 추가되어야 할 듯한데요, 이 책의 1부 1장(한국 근대문학사의 두 시각)과 2장(한일 이중어 글쓰기의 역사성), 2부 1장(조선 작가의 일어 창작에 대한 한 고찰) 등이 특히 '요주의 대상'이라는 생각입니다. 덧붙여, 김윤식 선생이 오래 품은 주제 중의 하나인ㅡ따라서 선생의 여러 책에서 다양한 형태로 반복되고 있는ㅡ나카노 시게하루(中野重治)와 임화(林和) 사이의 '주고받기' 형식에 대한 연구 또한 이중어 글쓰기라는 문제 지형 안에서 빠트려서는 안 될 문제라는 생각입니다. 또한 영어, 독어로 씌어진 한국 작가들의 작품을 다루고 있는 <발견으로서의 한국 현대문학사>(서울대학교출판부, 1997)의 4부 7장, 그리고 민족어와 인공어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한국 근대문학 연구 방법 입문>(서울대학교출판부, 1999)의 6, 7장 또한 이와 관련하여 덧붙여둘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더불어, 이미 거의 <일제 말기 한국 작가의 일본어 글쓰기론>을 통해 소화된 내용이지만, <김윤식 선집 7>(솔, 2005)도 이중어 글쓰기와 관련해서 갈무리해 두어야 할 책으로 생각됩니다. 개인적으로는 이중어 글쓰기의 문제에 있어서 김사량만큼 문제적이고 매력적인 작가를 만나보지 못한 듯합니다. 김사량의 작품에는 항상 한 번 더 시선을 주게 되고 왠지 짠한 '공감'의 감정들을 느끼게 되곤 합니다. 이중어 글쓰기와 관련된 강의를 하신다니 참으로 반가운 마음이 들면서, 기회가 되면 '도강'을 하고 싶은 생각을 품게 됩니다.^^

로쟈 2007-12-10 08:23   좋아요 0 | URL
도강은 제가 해야겠습니다.^^ 사실은 '한국문학과 디아스포라'란 주제를 떠올리다가 우연히 '이중어 글쓰기'에까지 생각이 미치게 됐습니다. '글쓰기론'이란 타이틀의 책들을 우선적으로 올리다 보니 몇 권은 빠뜨리게 됐는데, 덕분에 챙겨둡니다.^^
 

지난주에 나온 책들 가운데 알라디너들에게 (적어도 페이퍼상으로는) 가장 각광을 받은 책은 샹탈 무페의 <정치적인 것의 귀환>(후마니타스, 2007)인 듯하다(국내에선 '무프'라고도 표기돼 왔다). 작년에 <민주주의의 역설>(인간사랑, 2006)을 읽으면서 이 책의 원서 또한 복사해둔 것 같아 기억을 돌이켜보았지만 어느 구석에서 찾을 수 있을지는 엄두가 나지 않는다(순서로 치자면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 <정치적인 것의 귀환>의 후속작이 <민주주의의 역설>이다). 아무려나 (뒤늦게라도) 정치의 계절에 나온 주요한 이론서로서 꼽아둘 만하다. 한겨레의 리뷰(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255635.html)가 가장 자세하므로 참조해볼 수 있겠고 여기서는 무페 읽기의 리스트를 추려서 '세계의 책'으로 분류해놓는다. 역시 한겨레의 기사를 참조하여 몇 마디 덧붙인다.

한겨례(07. 12. 08)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접점을 찾다

샹탈 무페는 1990년 한국어로 번역된 바 있는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한국어판 제목 ‘사회변혁과 헤게모니’)으로 우리에게 알려진 정치철학자다. 그의 지적 동업자인 에르네스토 라클라우와 함께 써 1985년에 출간한 이 책에서 무페는 자신의 새로운 민주주의 전략을 처음 제출했다. 그 전까지 마르크스주의 안에서 자신의 이론을 구상했던 무페는 이 책을 통해서 마르크스주의와 사실상 결별했다. ‘포스트마르크스주의’ 이론가라는 호칭은 이때 붙여졌다. 그의 새 민주주의 전략은 ‘급진적이고 다원주의적인 민주주의’로 요약할 수 있다.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에서 무페와 라클라우는 마르크스의 경제결정론을 거부하고, 그 대신에 그람시의 헤게모니 개념을 받아들였다(*이 책에 대한 수요가 있음에도 다시 출간되지 않는 건 이상한 일이다. 이 책에 대한 간단한 언급은 '라클라우-라캉-지젝'(http://blog.aladin.co.kr/mramor/1033614)을 참조). 두 사람은 그람시의 헤게모니를 통해 마르크스주의적 계급투쟁이 다양한 사회적 대립를 구성하는 하나의 층위일 뿐이며, 사회에는 다양한 투쟁들이 경합하고 있음을 포착했다. 이 경합하는 투쟁들을 일시적이고 불안정하지만 공동전선으로 모을 수 있는데, 그 공동전선을 구성하는 담론적 힘이 헤게모니다.

이 책에 이어 나온 것이 <정치적인 것의 귀환>인데, 여기서 무페는 민주주의의 갈등적이고 투쟁적인 성격을 강조하면서, 그 불확정적인 긴장 속에서 경제적 평등의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민주사회주의’ 혹은 ‘자유사회주의’의 가능성을 발견한다. 이 새 기획은 프롤레타리아라는 단일한 주체를 거부한다는 점에서 기존의 마르크스주의적 사회주의와는 완전히 다르며, 또 자유주의 이념을 긍정한다는 점에서 기존 좌파의 반자유주의적 기획과도 다르다. 무페는 자유를 절대화하는 전통의 자유주의와도 거리를 두고 사적 소유를 옹호하는 경제적 자유주의와도 절연한다는 전제 위에서 개인의 자유와 인격의 자율을 인정하면서 평등의 이상을 추구하는 것을 민주주의의 목표로 제시한다. 이 책에 이어 무페는 ‘정치적인 것’의 개념을 더욱 숙고해 <카를 슈미트의 도전>(1999) <민주주의의 역설>(2000) <정치적인 것에 대하여>(2005) 같은 책으로 펴냈다.(고명섭 기자)

07. 12. 09.

P.S. <카를 슈미트의 도전>(1999)는 무페의 편저이고 국역본이 나와 있는 <민주주의의 역설>(2000)과 함께 모두 버소(Verso)출판사에서 출간됐다. 그다지 두껍지 않은 책이므로 국내에도 소개될 수 있을 듯하다(물론 슈미트의 <정치적인 것의 개념>(법문사, 1992) 등과 같이 나와야겠다).

무페의 최신간인 <정치적인 것에 대하여>(2005)는 '행동하는 지성'(Thinking in action) 시리즈의 한권이다(이 시리즈는 동문선에서 여러 권 출간된 바 있다). '입문서'격으로 가장 적합하지 않나 싶다. 기사에서 언급되지 않은 책으로는 <정치와 열정>(2002)이 있다. 그녀의 홈피를 찾으니(http://www.wmin.ac.uk/sshl/page-2486) 이 책은 무료로 다운로드된다(http://www.wmin.ac.uk/sshl/PDF/Mouffe%20PDF%20.pdf). 아침부터 좋은 횡재이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yoonta 2007-12-09 15:11   좋아요 0 | URL
<헤게모니와 사회주의전략>은 저도 재발간되었으면 하는 책입니다. 오늘날의 급진정치의 방향성과 관련해서 상당히 중요한 이야기를 하는 책이더군요. 다만 원문의 난해함때문인지 기존의 번역본은 오역이 좀 보이던데 이런 점 수정해서 다시 나왔으면 하네요.

로쟈 2007-12-09 15:44   좋아요 0 | URL
네, 다시 나오면 좋겠고, 다시 나올 거라고 기대합니다...

람혼 2007-12-10 03:50   좋아요 0 | URL
저 역시나, 기대합니다.^^
 

오랜만에 교수신문에서 기사를 옮겨온다(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15258). '영화비평 쇠퇴론'에 대한 현장 평론가의 비판을 담고 있다. 필자는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로 활동하고 있는 평론가 유운성씨이다. 관심이 가는 주제여서 읽어보고 스크랩해둔다. 이 주제에 관해 씌어진 글들 가운데 가장 '정확'한 게 아닌가 싶다(동업자들끼리는 상식일지 몰라도). 적어도 가장 깔끔하게 씌어졌다.

교수신문(07. 12. 03) "'침묵’은 적극적인 비평적 제스처다”

동시대 영화비평이 점점 영향력을 잃어가고 있다고들 말한다. 영화비평이라는 것이 (예컨대 한때의 문학비평에 맞먹을 만큼의) 대단한 영향력을 지녀본 적도 없는 이곳에서, 벌써 그것의 쇠퇴에 관한 소문이 떠도는 건 좀 이상하게 느껴진다. 나는 여기서 영화비평의 쇠퇴 운운하는 이들이 과연 어떤 이들인가에 대해 생각해보고 싶다. 그들이 짐짓 취하는 애도의 제스처는 사실 그 이면의 음험하기 짝이 없는 미소를 은폐하기 위한 假裝(가장)일 수도 있지 않을까.

1990년, 영화비평은 興했는가
정작 쇠퇴한 대상은 존재하지 않는데도 쇠퇴를 애석해하는 것은 과장을 섞어 말하자면 亡者(망자) 없는 장례식장에서 목 놓아 곡을 하는 행위와 다를 바 없다. 곡이란 슬픔의 전염을 위한 감상적인 의식에 불과하며 슬픔의 최면술을 위해서라면 장시간 곡을 대신해 줄 이를 돈을 주고 사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 한국 영화비평의 쇠퇴에 대해 말한다는 건 가짜 장례식장의 텅 빈 관에 눕힐 만한 시신을 찾아 헤매는 우스꽝스러운 작업이 돼 버리기 십상이다. 그러니 다시 물어보자. 장례식을 마련해 두고 시신을 찾아다니는 암살자들은 과연 누구인가를.

1990년대는 한국에서 영화문화가 급부상한 시기로 일컬어진다. 불완전하나마-특히 번역의 질이라는 측면에서-유용한 영화관련 서적들이 조금씩 출판되기 시작했고, 새로운 영화전문지들이 창간됐고, 비디오 대여점들은 호황을 누렸고, 예술영화관들이 문을 열었으며, 영화학교 및 대학 영화과엔 신입생들이 몰렸고, 학생영화 및 독립단편영화 제작의 붐이 일었으며, 지금은 아시아 제일의 영화제로 성장한 부산국제영화제가 출범했다.

돌이켜보면 1990년대는 바야흐로 영화적 교양이 문화적으로 인정받기 시작한 시기였지만, 정작 그러한 교양의 범위와 역사성을 생각해보는 작업은 다소 거추장스러운 일로 여겨진 시기이기도 했다. 알프레드 히치콕이 영화형식의 실험가로 추앙받은 반면 존 포드는 오직 서부극, 그것도 <수색자>의 존 포드로만 논의됐다. 이른바 현대영화라는 것이 할리우드 영화로 대표되는 고전영화에 대한 반발에서 유래한 것이라기보다는 고전영화를 다른 시간에 다른 공간에서 영화적으로 ‘번역’하려는 지난한 시도의 산물이었다는 인식 같은 건 전혀 들어설 여지조차 없었다.

1960년대 프랑스 누벨바그 영화들이나 오손 웰스의 <시민 케인>이 ‘전복적인’ 작업으로 오해되고, 레오스 카락스의 <퐁네프의 연인들>이 예술영화로 선전되는가 하면, 러시아 영화감독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구도자적 풍모와 망명의 삶에서 ‘진정한’ 예술가의 모델을 발견하는 등, 지금 보면 어처구니없다고 생각될 정도의 믿음이 가능했던 것도 1990년대가 영화적 교양의 범위와 역사성을 누구도 자문해보지 않는 시기였기 때문이다.

교사·교도관의 비평과 왜곡된 교양주의
이런 상황에서 영화비평은 크게 두 갈래의 흐름으로 나뉘어졌다. 첫 번째는 敎師(교사)의 비평이라 칭할 만한 것이다. 영화를 ‘읽기’ 위한 고유한 독법이 있으며(시네마 리터러시), 한 편의 영화 이면에는 다양한 숨은 의미들이 있다는(징후와 해독) 주장은 이들 교사들이 즐겨 설파하는 강령이었다. 교사의 비평이 1990년대 영화문화에 적잖이 기여한 것도 사실이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철학도나 문학청년으로 이전 시기를 보냈던 이들이 영화교사의 길을 택하면서 성립된 것이란 점에서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영화를 읽는 법을 가르치기 전에 들여다보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는 점을 간과했던 것 같다. 상황이 반대였더라면 우리는 영화적 서커스에 불과한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엔 볼 것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금방 깨달을 수 있었을 것이다.

두 번째는 교도관의 비평이다. 영화작품과 영화관련 서적의 수입 및 소개가 제한적인 상황에서, 지금 이곳에서 당신들이 보고 있는 것이 다가 아니며 그것들을 뛰어넘는 빼어난 작업들이 저기 바깥에 얼마든지 있음을 역설하는 전문가들의 존재는 쉬이 사람들의 이목을 끌게 마련이다. 물론 이는 한국 영화문화라는 특정한 울타리의 경계를 인식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지만 그것이 1990년대의 영화광들을 사로잡았던 왜곡된 교양주의-예컨대 “너, 이 영화 봤어? 그럼 이 영화는?”이라는 식의-와 조우함으로써 초래된 폐해도 적지 않다.

영화적 교양은 영화작품의 내면화와 수용의 과정을 통한 세계의 재인식이 아니라 상상적 라이브러리의 항목을 늘려가는 작업으로 그릇되게 정의됐다. 또한 영화비평의 교도관들에게 중요한 것은 바깥의 존재를 역설하는 것이지 바깥으로 향하는 문을 열어젖히는 것이 아니다. 만일 그 문이 열린다면 그들은 서둘러 또 다른 울타리를 기어이 만들어내고야 만다. 이 왜곡된 시도는 다음과 같은 신념을 정당화한다. 한 편의 영화는 아직 그것이 소개되지 않았을 때에만 가치 있는 것이라는. 예컨대 타르코프스키 영화예술의 위대함을 역설하던 많은 이들은 정작 <희생>이 극장에서 개봉되고 나자 그에 대해 말하기를 중단했다.

여하간 이건 다 옛날이야기일 뿐이다. 새로운 세기에 접어든 이후 한국의 영화문화는 빠르게 변모해갔다. 영화관련 문헌들에 대한 접근이 용이해지면서 우리는 영화비평계의 교사들의 한계를 깨닫게 됐고 예술영화관 및 시네마테크의 설립과 다운로드를 통한 영화감상이 보편화되면서 교도관들의 울타리 또한 점차 무력해졌다. 영화전문지들은 점점 독자를 잃어갔고, 동네마다 있던 비디오 대여점들은 차례로 문을 닫았으며, 예술영화를 본다는 건 더 이상 유별난 일이 아닌 것으로 여겨지게 됐다. 반면 영화학교는 여전히 인기를 끌고 있으며 각종 영화제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있다.

나는 리뷰어와 영화학자 사이에 위치한 영화비평가의 작업은 일차적으로는 통찰, 수사, 품격 그리고 나아가 취향과 윤리적 입장이 어우러질 때 가장 이상적인 결과물을 낳는다고 본다. 리뷰어가 정보를 전달하는 이라면 영화비평가는 취향에 근거해 판단을 내리는 자이다. 영화학자가 분석과 논리에 기댈 때 영화비평가는 자신의 윤리적 입장을 내세워야 한다. 하지만 취향과 윤리적 입장이 모호했던 교사와 교도관의 비평은 그 변종들에 의해 삽시간에 대체됐다.

점점 암호해독자의 작업에 가까워지던 교사의 비평은 적절히 수사를 구사해가며 ‘제법 품격을 갖춘 보도자료’에 가까운 글을 써내는 영화기자들의 글쓰기에 자리를 내주어야 했다. 교도관들의 울타리는 영화제 카탈로그와 예술영화관의 팜플릿, 그리고 국내외 인터넷 사이트의 정보전달력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단적으로 말해 영화비평은 광고들에 의해 대체되기에 이른 것이다. 그 사이에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은 비평적 자질을 갖춘 영화비평가들이 등장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불행히도 그들은 너무 늦게 도착했다. 그들의 비평적 글쓰기는 광고성 글쓰기로 가득한 영화전문지 편집자들에게 남은 한 줌의 부채감을 위무하기 위한 것일 따름이었다. 

암살과 자살
그리고 바로 이 때, 영화비평의 쇠퇴 운운하는 자들이 하나둘씩 늘어가기 시작했다. 그들이 누구인가를 파악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무엇보다 비평이 광고로 대체되기를 원하는 자들이 있다. 그들은 비판조차도 광고로 활용될 수 있음을 누구보다 잘 안다. 사실 자신이 동의할 수 없는 영화에 영화비평가가 가할 수 있는 최선의 공격은 비판이 아니라 그걸 완전히 무시하고 침묵하는 것이다. 전체적인 조망이 불가능할 정도로 영화에 관한 담론이 넘쳐나는 시대엔, 침묵은 비평적 소임의 방기가 아니라 사실 적극적인 비평적 제스처 가운데 하나로 간주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서도 위장된 비판의 게임에 뛰어드는 건 사이비 비평가에게나 어울리는 일이다.

마지막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비평이 대중들로부터 멀어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 아니냐는 식의 물음에 답해야 할 것 같다. 발터 벤야민은 비평가에게 있어서 상급심은 대중이 아니라 동료들이라고 쓴 적이 있다. 한국 영화비평이 독자를 잃어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대중이 비평으로부터 멀어져가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예술로서의 비평은 대중과 거리를 두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이제는 영화비평가들조차 동료들의 비평을 읽지 않는다는 사실을 드러낼 뿐이다. 특정한 영화에 대한 찬반양론이 영화비평가들 스스로의 세계관과 윤리적 입장을 건 진검승부가 아니라 영화잡지 편집인이나 텔레비전 프로그램 기획자의 머리에서 출발하는 이벤트로 전락하고 만 것도 그 때문이다. 이건 암살자들의 추적에 자살로 대응하는 것과 같다.(유운성_영화평론가)

97. 12. 09.

P.S. 필자의 다른 글들을 찾아보다가 지젝의 <진짜 눈물의 공포>에 대한 짧은 리뷰가 있기에 옮겨놓는다.

씨네21(04. 06. 11) 박진감 넘치는 키에슬로프스키 읽기

폴란드의 영화감독 키에슬로프스키는 (적어도 개인적으로는) 한동안 잊고 있었던 이름이다. 우리에게 가장 먼저 찾아온 그의 영화는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이었고 이 영화는 1990년대 한국의 영화광들에게 깊은 울림을 선사했던 예술작품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뒤이은 삼색 연작은 잠깐 동안 관심의 대상이 되기도 했지만 전체적으로는 실패로 간주되었고 곧 잊혀졌다. 물론 마땅히 걸작으로 불려야 할 <십계> 연작이 소개되기도 했지만 그다지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한편 폴란드 내에서는 한때 참여적 다큐멘터리와 극영화들을- 예컨대 <야간경비원의 시선>이나 <카메라광> 같은 영화들- 만들던 키에슬로프스키가 후기에 가서 점점 심리적이고 종교적이며 형이상학적인 영화들을 만드는 것에 대해 만만찮은 비판들이 가해지기도 했다고 한다.



슬라보예 지젝의 <진짜 눈물의 공포>(The Fright of Real Tears | 슬라보예 지젝 지음 | 오영숙 외 옮김| 울력 펴냄)는 이러한 키에슬로프스키의 영화, 무엇보다 그의 후기작들에 대한 정치한 구원비평으로도 읽힐 수 있지만(특히 3부), 지젝의 목표는 좀더 광범위하고 야심적이다. 바로 전반적인 인문학적 사유의 위기와 함께 난관에 봉착한 영화이론을 대안적인 라캉적 독해를 통해 구원해내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해체주의/페미니즘/포스트-마르크스주의/정신분석/문화이론 등의 ‘이론’(Theory)과 데이비드 보드웰과 노엘 캐롤을 수장으로 하는 인지주의적 ‘포스트-이론’ 내지는 ‘탈-이론’(Post-Theory)의 ‘사이’에서 키에슬로프스키를 읽어내고 있다. 이 책의 부제가 ‘이론과 포스트-이론 사이의 키에슬로프스키’가 된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확실히 지젝의 이 저서에 자극제가 되었던 것은 <소셜 텍스트>에 게재된 유명한 패러디논문 사건으로 물의를 빚었던 앨런 소칼의 저서 <지적 사기>와 정신분석학적 영화이론에 반기를 들고 나선 보드웰과 캐롤의 편저 <포스트-이론> 같은 책들로 인해 빚어진 좌파이론가들 내부의 위기감과 반감이었을 것이다. 지젝은 특유의 정교하고도 유머 넘치는 문장, 그리고 재해석된 헤겔적 개념들을 통해 경험주의적 이론이 가정하는 보편성의 허구를 논박하는가 하면, 이제는 낡은 것으로 치부되고 있는 정신분석학적 봉합(suture)이론을 새롭게 조명하는 놀라운 솜씨를 보여준다. 언뜻 딱딱하기만 한 이론서일 것도 같지만 책에 언급된 (그리고 이제는 국내에서도 대부분 쉽게 구할 수 있는) 영화들을 함께 보면서 찬찬히 논의를 따라가다보면 이만큼 박진감 넘치는 이론서도 따로 없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유운성/ 영화평론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격주간 북매거진 SKOOB 11호에 기고한 글을 옮겨놓는다. 책은 아직 받아보지 못해서 어떻게 편집/교정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원고와 큰 차이는 없을 거 같고, 다만 목차를 보니 타이틀은 '왜냐고 물으신다면에 관한 합리성의 두 가지 잣대'로 붙여졌다(보통 원고의 제목은 편집자들이 붙인다). 지난달에 출간된 <왜 버스는 세대씩 몰려다닐까>(한겨레출판)와 <왜 사람들은 이상한 것을 믿는가>(바다출판사), 두 권에 대한 간략한 리뷰가 나의 몫이었는데, 후자는 관심을 갖고 있던 책이었기에 덥석 청탁에 응했다. 더불어 아주 짧은 분량이기도 했고. "주요 온라인 서점의 상위 5% VIP 고객 중 선착순 5만 명에게 격주로 배포되는 프레스티지 도서문화잡지"이기에 접하지 못할 분들이 많을 것이므로 공개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책이 와서 찾아보니 제목은 '세상은 아무 죄가 없나니'이고, '왜냐고 물으신다면...'이 부제이다).   

스쿱(11호) 왜냐고 물으신다면에 관한 합리성의 두 가지 잣대

리처드 로빈슨의 <왜 버스는 세대씩 몰려다닐까>(한겨레출판)와 마이클 셔머의 <왜 사람들은 이상한 것을 믿는가>(바다출판사)는 부피는 서로 달라도 유사한 제목으로 흥미를 끄는 책 두 권이다. 저명한 과학저술가인 두 저자는 각각 ‘머피의 법칙’과 ‘사이비 과학’에 과학적 설명이라는 합리성의 잣대를 갖다 댄다. 그리고 ‘세상’은 실상 아무 죄가 없으며 문제는 ‘우리’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밝혀준다.

인간은 복잡하고, 변덕스럽고, 우연적인 세계에서 끊임없이 의미와 패턴을 찾으러 다니는 동물이다. 그러한 속성이 진화과정에서 우리에게 유리한 기제로서 유전되었다. ‘얄미운 짓’을 하는 사물들에 대한 짜증과 이상한 것들에 대한 믿음은 그런 기제에 의해 양산된다. 하지만 이 기제는 완벽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수유를 하지 않는 남자에게도 젖꼭지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합리적 명분보다는 진화론적 타산을 따른다. 물론 젖꼭지는 수유를 하는 여자들에게만 필요하지만 자연의 입장에서는 남자와 여자의 유전적 구조가 다르게 재구성하기보다는 남자가 불필요한 젖꼭지를 갖도록 하는 것이 훨씬 쉽고 ‘비용’이 덜 든다.

자몽 즙이 튀면 왜 꼭 눈 속으로 들어가는가? 실제로 즙이 눈 속으로 들어갈 확률은 매우 희박하지만 한번이라도 그런 경험을 갖는다면 우리의 뇌는 언제나 그 기억을 환기시킨다. 불운이 언제나 세 가지씩 짝을 지어 다니는 것도 마찬가지다. 불운은 조금씩 꾸준히 찾아오지만 기억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다른 기억들과 연계되면서 ‘세 가지’ 불운을 부지런히 찾아낸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세대씩 몰려다니는 버스는 조금 다른 성격의 사례다. 이 경우는 잘못 계산한 것이 아니라 과학적 근거를 갖는 것이기 때문이다. 첫 번째 버스가 승객을 태우는 동안 두 번째 버스와의 거리는 더 가까워지는 식이 되기에 결과적으로는 세대씩 몰려다니게 되기 때문이다. 

‘세 대의 버스’와 ‘세 가지 불운’에 대한 사고는 각각 인과적 사고와 마술적 사고로 대비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이 마술적 사고가 남자의 젖꼭지처럼 불가피한 산물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비판적 사고와 패턴 찾기가 필요하기 때문에 마술적 사고와 미신을 가진다. 둘은 서로 떼어놓을 수 없다.”고 ‘회의주의자’ 마이클 셔머는 말한다. 우리 뇌의 ‘믿음 엔진’은 야누스의 얼굴을 갖고 있는 것이다. 

과학의 세기라고는 하지만 아직도 미국인의 96퍼센트가 신의 존재를, 90퍼센트가 천국의 존재를, 그리고 79퍼센트가 기적을, 72퍼센트가 천사의 존재를 믿는다고 답했다. 목록을 좀 달리하면 우리도 크게 다르지는 않을 듯싶다. 비록 중세 유럽에서보다는 훨씬 덜 미신적이지만 현대인들 또한 여전히 미신적인 것. 그런 미신의 폐해를 완전히 제거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줄여나가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우리 자신을 좀더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07. 12. 08.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빙과 2007-12-09 0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쉽게도 제가 가지고 있는 것은 10호네요. 이번에 책을 사면 11호가 배달될런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칼 세이건부터 시작해서 미국의 과학 저술가들은 이런 류의 책을 많이 쓰는 것 같습니다. 그만큼 미국의 믿음이 강력하다는 반증일까요?

로쟈 2007-12-09 07:30   좋아요 0 | URL
저도 10호를 갖고 있는데요.^^; 미국이 종교성이 강한 국가이긴 하지만 회의주의가 발달이 그와 인과적인 관계가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왜냐면, 우리고 왼갖 것들을 많이 믿지만(성장신화를 비롯하여) 과학적 회의주의는 미진하지 않나 싶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