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교수신문에서 서평위원 칼럼을 옮겨놓는다. 칼럼을 읽고서, 니체의 초인을 '나눔에의 의지를 가진 자', '자발적 가난을 선택하는 자'로 읽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토록 빈번한 오해의 대상이 된 '힘에의 의지'보다 '나눔에의 의지'는 훨씬 더 명쾌하며 의미심장하지 않은지?.. 

 

교수신문(09. 11. 16) ‘자발적 가난’의 지혜

자신의 주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Also sprach Zarathustra)』에서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1900)가 말했던 적이 있다. 우리는 낙타에서 사자로 변해야만 한다고 말이다. 낙타는 수동적인 인간, 따라서 자유롭지 못한 인간을 상징한다. 기존의 공동체가 부여한 규범이나 가치를 하나의 숙명이나 본성인 것처럼 등에 지고 살아갈 때, 우리는 낙타에 다름 아닐 것이다. 바로 여기에 우리는 사자가 될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누가 감히 사자 등에 올라탈 수 있겠는가. 사자의 등에 타려면 우리는 사자를 죽여야만 할 것이다. 오직 그럴 때에만 사자의 시신 위에 우리는 걸터앉을 수 있다. 그래서 사자는 부정의 전사이자 동시에 자유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니체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사자는 최종적으로 어린아이로 변해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의 어린아이는 삶을 긍정하고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위베먼쉬(ubermensch), 즉 초인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사자가 되기 위해서 아직도 우리의 등에는 많은 짐들이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얹혀 있다. 너무나 오랫동안 짐들을 지다보니, 이제 우리는 그것이 짐인지 아니면 나의 몸의 일부인지 헛갈릴 정도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짐들로는 니체는 국가, 종교, 자본을 이야기했던 적이 있다. 그렇다면 사자의 정신을 다시 회복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삶의 태도를 취할 수 있을 것인가. 국가의 부당한 권력에 대해서는 ‘죽음을 두려워하지는 않는 용기’가, 내세를 약속하는 종교의 유혹에 대해서는 ‘삶을 긍정하는 유쾌함’이, 그리고 최종적으로 재산축적을 명령하는 자본에 대해서는 ‘자발적 가난의 행복’이 필요한 법이다.

아마 이 글을 읽은 사람 중 많은 독자들은 ‘자발적 가난’이 ‘행복’일 수 있을까 하고 고개를 갸우뚱거릴지도 모르겠다. 이 점에서 가난을 뜻하는 한자, ‘貧’이란 글자는 많은 것을 생각하도록 한다. 이 빈이란 글자는 나눔을 상징하는 ‘分’이란 글자와 조개 화폐를 상징하는 ‘貝’라는 글자가 합쳐져서 만들어져 있다. 다시 말해 자신이 가진 재산을 나누어주었기 때문에 도래하는 상태가 바로 가난이라는 것이다. 淸貧, 즉 맑은 가난이란 말이 나온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바로 여기에 행복의 비밀이 있다. 자신이 애써 수확한 재산을 아낌없이 나누어주었을 때, 우리는 축적의 행복과는 질적으로 다른 행복을 맛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더 많은 재산을 가지라고 우리를 끊임없이 유혹하는 체제를 말한다. 항상 자본주의는 자본의 양이 자유의 양이라고 사탕발림하며 우리를 미혹의 길로 이끌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빈주머니에 손을 찔러보며 우리는 무엇인지 모를 부자유와 우울함을 느끼곤 한다. 많은 지혜로운 사람들이 이야기하듯이, 결국 자본주의가 말하는 자유는 소비의 자유, 소비할 때 일 순간적으로 찾아오는 덧없는 자유에 다름 아닌 셈이다. 이 점에서 자본주의의 자유는 일종의 마약과 같다. 달콤한 쾌락은 주지만 약효가 떨어지면 우리에게 심한 금단증상을 제공한다는 점은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발적인 가난은 가장 자본주의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으려는 의지이자, 동시에 자본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는 결단이라고 할 수 있다.  



유사 이래 동서양의 많은 철인들은 한결같이 ‘자발적 가난’이 가져다주는 행복을 통찰하고 있었다. 슈마허(E. F. Schumacher)는 『자발적 가난』이란 책으로 진정한 행복의 비밀을 노래했던 많은 철인들의 이야기를 수록하려고 한다. 원제가 더 의미심장하다. ‘작은 것이 많은 것이다(Less is more)’가 원제이기 때문이다.

청빈한 삶을 영위하던 서양의 은둔자들, 노동하지 않으면 먹지도 않겠다고 선언했던 동양의 선사들, 그리고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며 자본주의의 폐단을 지적했던 현대의 사상가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위대한 정신들은 직접 노동하며 남에게 나누어주는 삶, 그래서 자발적으로 가난해질 수밖에 없는 삶에서 가장 인간적인 행복을 발견했다. 혹시라도 자본이란 마약에 아직도 취해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이 책은 진정한 행복을 약속하는 좋은 처방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먹을 것을 친구에게 나누어주는 어린아이의 미소, 니체가 그렇게도 요구했던 초인의 미소는 그렇게 멀지 않은 곳에 있었던 셈이다.(강신주 서평위원/서울대 철학사상연구소) 

09. 1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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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서울비의 알림
    from seoulrain's me2DAY 2009-11-27 15:46 
    나눔의 의지와 자발적 가난 — via 로쟈
 
 
펠릭스 2009-11-16 20:12   좋아요 0 | URL
'빈농(貧農)'의 나눔은 물질과 정신의 경계가 없는듯 합니다. 가난뒤에 어떤 부(富)를 얻었는지 궁금합니다.

로쟈 2009-11-16 21:04   좋아요 0 | URL
타의에 의한, 타율에 의한 가난은 짐이고 구속이죠. 그건 부정적인 것이구요, 다만 뒤집어서 부에 대한 강박을 짐처럼 이고 다닌다면 그 또한 낙타의 삶이라고 해야겠어요...

2009-11-16 22: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1-16 22: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1-16 23: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카스피 2009-11-17 09:30   좋아요 0 | URL
오호 로쟈님 글을 읽으니 갑자기 폴리네시아 원주민이 생각나네요.자발적 가난(청빈)과는 좀 다른 개념인데... 이들은 부를 축적하기 위해 온가족이 정말 밤잠 안자고 열심히 일을 한다고 합니다.그래서 대규모의 부를 축적하면 갑자기 온 마을 사람들한테 그 부를 정말 무상으로 배분한다고 하는군요.그 뒤에 남는 것은 그 사람에게 주민들이 바치는 대인이라는 칭송뿐이라고 하더군요.일종의 명예인데 사람들은 그 명예를 부러워하며 너도 나도 부를 축적하고,대인이라고 명예를 받은이도 그 명예를 지키기위해 또 부를 축적하며 마을 주민들에게 나누워 준다고 합니다.
뭐 사회적 부의 재분배 시스템인데,결국 나눔은 이타적 생각이지만 마음속에 이런 명예욕에 관한 이기적 생각이 있어서가 아닌가 싶은데요

로쟈 2009-11-17 12:22   좋아요 0 | URL
그런 '이기심'이 더 많이 필요합니다.^^
 

번역 교정작업을 하다가 잠시 산책나가는 기분으로 <들뢰즈의 니체>(철학과현실사, 2007)에 소개된 참고문헌에 대해 몇 자 적는다. 흔히 <니체와 철학>이 들뢰즈의 대표적인 니체론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나는 그 책을 한국어로 완독한 이는 많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들뢰즈의 니체>의 역자인 박찬국 교수가 '옮긴이의 글'에서 적어놓은 대로 <니체와 철학>은 "니체의 사상을 어느 정도 숙지하지 않고서는 읽어 나가기 쉽지 않다." 두 종의 국역본이 나와 있지만, 번역 또한 그렇게 녹록하지 않다.   

  

하지만 <들뢰즈의 니체>(원제는 그냥 <니체>)는 들뢰즈가 쓴 니체 해설서로 "니체의 생애부터 짚어 나가면서 니체 사상의 핵심을 간략하면서도 평이하게 소개하고 있"는 책이다. 역자의 기대에 따르면, "짤막한 책이지만 독자들은 들뢰즈가 보는 니체 사상의 요체를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내 생각엔 이조차도 과도한 기대이고, 니체 책 몇 권 정도와는 씨름해본 경험이 있어야 이 '해설서'에서 뭔가 얻을 수 있지 않나 싶다. 가령 니체에 관한 몇몇 평전 정도는 먼저 읽어두는 것이 좋을 듯하다. 나는 개인적으로 자프란스키의 평전 외에 다케다 세이지나 미시마 겐이치 같은 일본 연구자의 책들이 요긴하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우리보다 연륜이 깊은 일본의 니체 연구를 슬쩍 참고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들뢰즈의 니체>에서 개인적으로 흥미로운 건 들뢰즈가 제시한 '독일어 참고문헌'이다. 1960년대 중반에 그가 니체에 대한 재평가를 주도했던 만큼 니체 연구사에 대한 안목이 드러나기 때문. 그래봐야 상식에서  벗어나지 않는, 달랑 네 권의 책을 그는 '참고문헌'에 올려놓았다. 칼 뢰비트의 <니체의 영원회귀의 철학>(1935), 칼 야스퍼스의 <니체>(1936), 오이겐 핑크의 <니체의 철학>(1960),그리고 마르틴 하이데거의 <니체>(1961)가 그 네 권의 책이다. 이 중 국내에 어떤 책이 소개돼 있을까?  

강의록을 묶은 하이데거의 <니체>는 네 권 분량이며(영어본은 두 권짜리로도 나와 있다), 국내에는 두 차례 그 일부가 번역됐다. 박찬국 교수가 옮긴 <니체와 니힐리즘>은 이 중 4권을 옮긴 것으로 나머지 세 권은 1권 '예술로서의 힘에의 의지' 2권 '영원회귀' 3권 '지식과 형이상학으로서의 힘에의 의지'이다(1권이 이성과현실사에서 출간된 적이 있다). 니체를 서구 형이상학의 완성으로 보는 하이데거의 니체론은 많이 회자되지만 정작 그 전모가 번역되지 않은 것은 유감스러운데, 하이데거 전집이 번역되고 있는 만큼 조만간 좋은 소식이 있기를 기대해본다.    

그리고 후설의 제자이자 하이데거의 제자인 오이겐 핑크의 <니체의 철학>. 절판됐지만 국내에는 오래 전에 <니이체 철학>(형설출판사, 1984)으로 소개된 바 있다(책의 소재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나는 지난달에야 입수했다). 하지만 전공자들에게서도 잊혀진 책인지 <우리는 왜 니체를 읽는가>(책세상, 2006)에 수록된 '니체 관련 국내 출판 목록'에도 빠져 있다. 발터 니그의 <예언자적 사상가>(분도, 1973)가 첫번째 연구서로 올라와 있는데, 절판된 건 마찬가지라는 점을 고려하면 너무 무관심한 처사로 보인다. <니이체 철학>을 옮긴 하기락 선생의 니체 연구서 <니체>(1959)와 <니이체론>(1971)이 더 의미가 있을 뿐더러 출간된 것도 그보다는 빠르다.     

고병권의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그린비, 2003)는 추천도서 목록에 핑크의 책도 포함시키고 있는데, 이런 이유에서다.  

핑크 책은 절판되어 도서관이 아니면 구하기가 쉽지 않다. 게다가 학술 서적 읽는 것에 능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이 책의 내용이나 문체에 많은 어려움을 느낄 것이다. 그럼에도 이 책들을 추천하는 건 크게 두 가지 이유에서다. 하나는 이 책들이 니체의 저서들을 두루 섭렵하면서, 부조가 아닌 환조로서 니체의 상을 조각하고 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그렇게 조각된 얼굴이 독특한 표정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핑크는 원래 하이데거의 제자였다. 그러나 그는 하이데거의 니체 해석에 동의하지 않는다. “존재와 생성이 유희로서 파악될 때, 니체는 이미 형이상학에 붙들려 있지 않다.” 유희하는 어린아이를 형이상학자로 볼 수 있는가. 핑크의 주장은 그의 스승인 하이데거의 “니체는 최후의 형이상학자이자 형이상학의 완성자다”라는 평가와 상반된다. 핑크는 니체의 세계관이 그 스승의 우려대로 ‘세계와의 대결과 투쟁’을 부추기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핑크가 그리는 위버멘쉬의 이미지가 그것을 잘 말해준다.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위버멘쉬의 얼굴은 온화한 놀이꾼이지, 폭력을 휘두르거나 기술을 남용하는 거인이 아니다.”  

그에 따르면 유희 속에서 니체 사상을 이해하지 못할 때 권력의지와 영원회귀는 대립과 긴장의 관계로 포착된다. 이때 권력의지는 무언가를 의욕함으로써 무언가를 배제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따라서 그것은 어떤 사물을 다른 사물과 구별시켜 주는 개별화 원리이자, 사물을 유한하게 만들어 주는 원리가 된다. 또한 마찬가지 이유에서 대립과 투쟁을 야기하는 원리이기도 하다. 반면 영원회귀는 이 모든 개별적 형식들을 분쇄한다. 그것은 모든 유한한 것들 속에 들어 있는 무한성이고, 개별적 존재자들을 관통하는 세계이다. 니체는 권력의지와 영원회귀 사이의 긴장을 더 높은 원리인 디오니소스의 유희 속에서 해소한다. 인간이 그 자신의 개별성과 유한성을 극복하고, 자신을 세계를 향해 개방할 때, 비로소 그는 자신도 우주적인 유희를 공연하는 존재임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야스퍼스의 니체론으론 <니체 생애>(까치, 1984)와 <니체와 기독교>(철학과현실사, 2006)가 번역돼 있지만, 정작 더 중요한 <니체>는 아직 소개되지 않았다. <일반 정신병리학> 같은 주저도 번역되지 않은 형편인 만큼 많은 걸 바랄 수는 없겠다.  

 

뢰비트의 <니체의 영원회귀의 철학>도 가벼운 분량이지만 아직 번역되지 않았다. 대신에 <헤겔에서 니체로>(민음사) 같은 책을 통해서 대략의 윤곽을 그려볼 수 있다. 뢰비트의 책으론 <베버와 마르크스>(문예출판사), 오랜만에 재출간된 <지식과 신앙, 그리고 회의>(다산글방) 등이 더 번역돼 있는데, 절판된 <역사의 의미>(문예출판사)도 다시 나오면 좋겠다. 

아무튼 들뢰즈의 <니체>나 <니체와 철학>을 읽기 위해서도 이런 정도의 책들은 '배경'으로 소개됨직하다. 과욕일까?.. 

09. 1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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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15 17: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1-15 18: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mirror 2009-11-15 18:28   좋아요 0 | URL
정확하지 않은 정보가 있군요. 하이데거가 쓴 '니체'라는 책이 영어로만 2권으로 나온 게 아닙니다. 하이데거 생전에 독일어로 2권으로 '니체'라는 책이 출판되었고, 하이데거 사후 전집판으로 4권으로 나온 것이죠. 지금도 하이데거 생전에 나온 2권짜리 '니체'도 여전히 독일어로 판매되고 있습니다. 이와 함께 하이데거 전집에는 니체 대한 책이 몇권 더 있습니다.
그리고 들뢰즈의 '니체'를 읽기 위해서 다른 철학자들의 저서가 필요한 것은 아니죠. 니체의 이해를 위해서 다른 연구서들이 필요한 것 아닐까요? 지나치게 들뢰즈가 슨 '니체'라는 책을 과대평가하는 것 같군요.

로쟈 2009-11-15 18:47   좋아요 0 | URL
책과 권(Volume)은 다른 개념입니다. 영어본으로는 2권짜리, 4권짜리 두 종류가 있습니다. 독어본도 마찬가지인 것 같군요. 2권짜리라고 해봐야 합본 형태이므로. 의미있는 차이라고 여겨지지 않습니다. 니체에 대한 재평가를 가져온 것이 하이데거의 니체론과 들뢰즈 등 프랑스 철학자들의 니체론이라는 건 사실일 뿐이고, 국내에서 들뢰즈의 니체론이 갖는 인지도를 빌미로 독어권의 주요 니체 연구서가 번역되길 기대한다는 바람을 적은 겁니다. 평가야 각자가 하는 것 아닐까요?..

mirror 2009-11-15 19:05   좋아요 0 | URL
2권짜리와 전집판의 목차는 동일합니다. 그러나 내용까지 전혀 차이가 없는 지는 제가 모르겠군요. 두 판을 대조한 분들이 말씀해주셔야 할 듯 합니다.
평가야 각자 해야겠죠. 저의 관점에서는 니체가 들뢰즈에 종속되는 듯한 한국의 상황이 부적절한 듯해서 한 말입니다.

로쟈 2009-11-16 20:53   좋아요 0 | URL
적어도 영어본으론 아무 차이가 없습니다.

푸파이터 2009-11-15 19:04   좋아요 0 | URL
제가 지난 30년 생을 돌아봤을 때, 저에게 가장 깊은 충격과 변화를 주었던 책이 바로 '니체와 철학'입니다. 이 책을 읽었을 당시 저는 군대에 있었는데요. 쉽게 이책저책 고르면서 독서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어서, 니체에 대한 입문서는 전혀 읽지 않은 채 바로 이 책으로 뛰어들었지요(들뢰즈 관련 서적은 '스피노자의 철학'과 탈근대철학 입문서 정도 읽었습니다) 철학을 좋아해서 나름 열심히 찾아보지만 내공은 일천한 공대생이었는데, 그래도 이 책은 정말 열심히 팠습니다. 그 과정에서 많은 깨달음과 희열을 얻었고요.

제 솔직한 생각으로는 다소 힘들더라도 다른 입문서를 접하지 말고 바로 이 책으로 뛰어드는게 최선이라고 봅니다. 니체에 대한 입문서를 먼저 접해보는게 독자들에게 심적 부담은 덜어주는 반면, 그만큼 '니체와 철학'의 정수에서 이르는 길을 막는 보이지 않은 장벽이 될 거라는 느낌이 들어서요. 입문서를 읽고 어느 정도 알았다고 생각해버리는 순간, 니체(들뢰즈)는 그만큼 더 멀어져버릴 것 같습니다. 이 책은 세상을 구성하는 무한소를 직접적으로 다루는 내용이고, 결코 쉬운 길이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거든요.

이상 로쟈님의 서재를 눈팅하는 허접한 한 독자의 생각이었습니다^^;

로쟈 2009-11-16 20:53   좋아요 0 | URL
<니체와 철학>으로 니체 읽기를 시작하는 건 특출하지만 좀 예외적인 경우 같습니다. 보통의 독자들에게 기대하긴 어려울 듯싶어요. 이심전심의 세계가 아니라면요...

mirror 2009-11-15 20:27   좋아요 0 | URL
제가 친분이 있는 니체 전문가 한분으로부터 들은 바로는, 들뢰즈의 '니체와 철학'의 두 개의 한국어 번역본(하나는 영어에서 번역되었고, 하나는 당시 프랑스에서 재학중이던 유학생이 번역했죠.) 모두 신뢰하기가 힘들다는 거였습니다. (이 발언이 근거 없는 명예훼손이 된다면, 곧 지우도록 하겠습니다.) '니체와 철학'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독자의 이해능력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다른 측면에서 그 책 자체에 문제가 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되도록이면 다른 외국어 본으로 독서를 시도하시는 것이 좋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로쟈 2009-11-16 20:51   좋아요 0 | URL
저도 영어본과 러시아본을 대조해보지 않으면 한국어본을 읽기 어렵습니다. 비단 이 책에만 한정된 건 아니지만요...

sophie 2009-11-16 10:57   좋아요 0 | URL
로쟈님이 산책 나가는 기분으로 라는 말에 혹해서 한 번 읽고 나니 산책을 한 번 더 나가야 될 것 같습니다. <니체>라는 제목은 같지만 저자가 달라서 <들뢰즈의 니체>라고 한 것 같은데 그냥 니체라고 해도 좋을 뻔 했습니다. 저자를 확인하고 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인용하신 고병권님이 번역하신 내용은 대명사 '그'를 줄이고 핑크나 하이데거로 대체하면 이해가 한결 쉬울 것 같은데요? 특히 둘째 문단에서 '핑크의 주장은 그의 스승인 하이데거의 ".." '는 '핑크의 주장은 그의 스승인 하이데거가 ".."라고 평가한 것과 상반된다'라고 하면 독자가 이해하기 쉬울 것 같습니다. 전염병인가요? 사실 데리다, 들뢰즈.. 이런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했는지 궁금해 하면서도 제 자신의 게으름 탓으로 한발짝도 다가서지 못했네요. 인용문 마지막에 디오니소스 적 유희는 공감이 갑니다. 두루뭉실 하지요?

로쟈 2009-11-16 20:50   좋아요 0 | URL
권력의지와 영원회귀는 대립/긴장관계에 놓이며 그것의 해결(화해)를 모색하는 것이 차라투스트라(혹은 니체)의 과제가 되는데(승계호 교수의 해석이 자세합니다), 이 대립이 영원회귀에 대한 해설들에서 너무 쉽게 처리되는 감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도 하이데거나 뢰비트의 책이 번역되면 좋겠어요...

펠릭스 2009-11-16 20:23   좋아요 0 | URL
채칙을 맞는 말을 보고 감싸 안은 니체, 자신을 극복해가는 초인은 '그리스인 조르바' 같습니다. 조금 위험도 하지만,,,

로쟈 2009-11-16 20:47   좋아요 0 | URL
키잔차키스가 니체에 심취하기도 해서요...
 

이번주 주요 신간은 역사분야의 책들이다. 대작이 눈에 띄는 건 아니지만 일독해볼 만한 책은 몇 권 된다. 마거릿 맥밀런의 <역사 사용설명서>(공존, 2009)도 그 중 하나다(제목은 얼핏 한윤형의 <뉴라이트 사용후기>를 떠올리게 한다). 원제는 니체의 에세이 제목이기도 한 '역사의 이용과 오용'(The Uses and Abuses of History)이고 국역본의 부제는 '인간은 역사를 어떻게 이용하고 악용하는가'. 소개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국제신문(09. 11. 14) 역사를 악용하며 '역사의 평가' 뒤로 숨은 그들 

옥스퍼드 대학교의 역사학자인 마거릿 맥밀런은 전 미국 대통령 조지 W. 부시가 역사를 오용하고 악용하는 것을 지켜보다가 참다못해 이 책을 쓰게 됐다고 한다. 부시는 스스로를 필요에 따라 헤리 트루먼 대통령에 견주며 자신의 업적을 역사가 판단할 것이라고 거들먹거렸기 때문이다. 부시만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발단은 부시에서 시작됐지만 역사 사용설명서에는 20세기와 21세기를 중심으로 전 세계의 주요 집단, 정치인, 국가가 어떻게 역사를 이용하고 악용했는지를 되돌아보고 있다. '탁월한 이야기꾼'으로 정평이 나 있는 저자는 '역사가 좋게 또는 나쁘게 사용된 수많은 예들'을 방대하면서도 압축적인 사료를 바탕으로 펼쳐보인다. 여기에다 공정한 논평을 가하고 있어 모처럼 울림이 큰 책을 접한 기분이다.

국민 정서와 동떨어진 일을 하면서도 툭하면 "역사가 평가할 것이다"는 말로 핵심을 피해가는 사람들이 많은 우리 사회에서 무척 유용한 책이다. 물론 일부에서 과거의 나쁜 사례를 다시 악용할 목적으로 읽을까 두렵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다.

역사는 '인기 품목'이다. 우리나라만 해도 서점가에는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역사를 소재로 한 베스트셀러가 즐비하다. 텔레비전에서는 최근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선덕여왕'을 비롯해 흥미 위주로 역사를 비튼 사극이 판을 치고 있다. 그뿐인가. 지방마다 앞다퉈 역사를 기념하고 상품화하고 있으며, 이제는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에도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는 현실이다.
   
그런데 '역사가 대중의 화젯거리로 비중이 커지자 전문 역사가들이 대부분 아마추어에게 자리를 내줬다는 사실은 너무나 안타깝다'고 한다. 역사의 인기를 주도하는 사람들은 대개 전문 역사가가 아니라는 뜻으로 읽힌다. 저자는 그래서 아마추어들에게 자리를 내주거나 역사 악용에 동조한 전문 역사가들도 비판하고 있다. 역사를 왜곡하거나 악용하는 주체라면 개인, 집단, 민족, 국가, 이념, 종교에 상관없이 철저하게 비판받아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시각이다.

누가, 왜 역사를 악용하는가. '독재자들은 대개 역사의 힘을 잘 알았다. 그런고로 그들은 과거를 고쳐 쓰고, 부정하고, 파괴하려고 했다'. 너무나 잘 알려진 예를 하나 들어보자. 마오쩌둥은 중국 인민을 새로운 공산주의자로 개조하는 데 방해가 될 만하거나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모든 기념물과 문화유산을 파괴하지 않았는가.

이라크 침공에 앞서 미국의 부시 행정부와 영국의 블레어 행정부는 후세인을 세계에 위협적인 인물로 그려내려고 얼마나 안간힘을 쏟았는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사실 애초부터 사이가 나쁜 후세인(비종교주의자)과 오사마 빈라덴(광신자)이 "관계를 맺고 있다"는 부시와 블레어의 주장은 터무니없는 소리였다. 빈라덴은 이라크인들에게 후세인을 타도하라고 거듭 촉구한 것을 역사가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의 고고학자들이 왕실 무덤을 조사하려는 것을 철저히 차단하고 있는 일은 재미있다. 만약 무덤 조사에서 일본 왕들의 혈통이 이른바 '태양신의 직계'가 아닌 중국이나 한국과의 혼혈로 밝혀질 경우 우익 민족주의의 신화가 무너질 수 있기 때문이란다. 이 부분에 특별히 공감한다. '역사는 변하는 것이 아니다. 역사는 변할 수 없는 과거의 실제 일어난 일이다. 다만 관점에 따라 달리 보일 뿐이다'. 광개토대왕 등 우리가 역사적으로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영웅들은 어쩌면 당시 영토 확장 과정에서 침략과 지배를 당한 사람들에게는 무자비한 정복자였을 수도 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얼마 동안 프랑스와 영국에서 전사자들은 각국의 문명을 지키려고 싸우다 순직한 영웅으로 추앙됐다. 하지만 나중에는 전쟁에 대한 환멸이 커지면서 영국과 프랑스의 대중은 그들을 쓸데없는 싸움박질의 희생양으로 기억하게 됐다'. 시대와 사고방식이 세월에 따라 변하기 때문에 '우리도 세월 따라 기억을 편집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역사의 이름으로 내세우는 거창한 주장이나, 진실을 단정적으로 내뱉는 자들을 경계해야 한다'. 저자가 들려주고 싶은 조언은 바로 이것이다. '역사를 사용하고 즐기되, 언제나 신중하게 다루어라'.(강춘진기자) 

09. 11. 14.    

P.S. 필요 때문에 오늘 오전에 주문하여 오후에 바로 배송받은 책은 영국 셰필드대학의 두 교수가 쓴 <코민테른>(서해문집, 2009). '레닌에서 스탈린까지,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역사'가 부제다. 책의 의의에 대해서는 간단한 소개기사가 잘 정리해주고 있다. 

한겨레(09. 11. 14) 스탈린주의 걷어내고 본 ‘코민테른’

영국 셰필드대학 교수 케빈 맥더모트, 제러미 애그뉴가 쓴 <코민테른>이 번역돼 나왔다. 1996년 영문판 초판이 나온 이 책이 왜 뒤늦게 한국 독자를 만나야 했을까? 더욱이 우리는 이미 몇 권의 ‘코민테른’ 관련 번역서를 갖고 있는 터다.

역자인 대진대학교 황동하 연구교수는 그 이유로 두 가지를 꼽는다. 우선 기존의 번역본은 소련 공산당의 공식 입장으로 일관한 것이거나, 너무 간략한 것뿐이다. ‘세계혁명을 지도할 당’이라는 위상 아래 조직된 코민테른은 1919년 결성부터 1943년 해체까지 6개 대륙의 공산주의 운동을 포괄한 광대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 조직은 점차 후기로 갈수록 ‘세계혁명 추구’가 아니라 ‘유일한 사회주의 조국인 소련 보위’에 치중했다. 이 과정에서 코민테른 정신은 훼손됐다. 기존 번역본은 코민테른의 이런 ‘변질’과 ‘과오’를 덮어버리는 스탈린주의적 해석으로 일관하고 있다는 게 역자의 평가다.

이 책은 그렇다고, “코민테른은 단지 스탈린 외교정책의 가엾은 도구”라는 비공산주의적 견해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소련 해체 이후 해금된 많은 비밀문서들을 참고한 저자들은, 코민테른은 많은 약점이 있었지만 그래도 지역 공산주의 운동에 전술 채택의 자율성이 어느 정도 있었다고 주장한다.

둘째로, 아직 우리 사회에서 변혁에 대한 고민은 현재진행형이라고 믿는 역자는 ‘코민테른’이 “여전히 넘어야 할 산”임을 강조한다. 즉, 가장 폭넓게 공산주의 운동을 포괄했던 코민테른에 대한 평가를, 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피해 가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김보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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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2009-11-14 19:24   좋아요 0 | URL
인생 사용설명서(김홍신), 내몸 사용설명서(오즈), 역사 사용설명서(맥밀런); 누가 '인생'과 '내몸'과 '역사'를 잘 못 사용할 수 있다는 역설이군요.

로쟈 2009-11-15 12:24   좋아요 0 | URL
'사용설명서'들이 그렇게 많이 나와 있는 줄 몰랐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09-11-15 16:26   좋아요 0 | URL
소련 해체 이후 러시아에서는 코민테른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습니까?

로쟈 2009-11-15 16:40   좋아요 0 | URL
하하, 제가 잘 모르는 쪽입니다. 연구가 되고 있는지도 의문이고요. 워낙에 공산주의 전체가 도매급으로 다 넘어가버려서요...

테레사 2009-11-18 10:31   좋아요 0 | URL
조르쥬 페렉의 "인생사용법"도 생각나네요.

로쟈 2009-11-18 19:07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그 책도 있었죠...
 

올해 기념해야 할 연도로 <종의 기원>이 출간된 1859년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1989년을 꼽고 있었지만, 이번주 '뉴스위크(한국판)'를 보니 표지 타이틀이 "베를린 장벽괴는 '1979년 4대사건'이 블렀다"이다. 4대사건이란 덩샤오핑의 미국방문, 대처리즘의 태동, 호메이니의 '이란혁명' 그리고 소련의 아프간 침공 등이다. 이 기사 덕분에 나대로 환기하게 된 사실은 '이란 혁명'과 '아프간 침공'에 대한 책이 드물다는 것.     

뉴스위크의 기고자는 <돈의 역사>를 쓴 하버드대학 역사학 교수 닐 퍼거슨인데, 그에 따르면 1989년은 1979년에 비해 역사적인 비중이 떨어진다. 우리시대의 진정한 추세(중국의 부상, 이슬람의 과격화, 시장 원리주의의 성쇠)는 이미 그 10년 전에 시작됐다고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요지는 "진정한 혁명은 1979년에 시작됐다!"이다. 그의 주장을 좇는다면, 우리는 "우리시대의 진정한 추세"에 대해 절반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소련의 아프간 침공에 대해선 이웅현의 <소련의 아프간 전쟁>(고려대출판부, 2001)이 유일한 참고문헌인 듯싶지만 품절됐고, 이란 현대사와 이슬람 혁명에 대해 자세히 다룬 책도 거의 눈에 띄지 않기 때문이다.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건 유흥태의 <이란의 역사>(살림, 2008)란 문고본이 전부다(물론 범위를 '이슬람사'로 넒히면 책들이 없진 않다). 알라딘에서 검색되는 책에 한정하면 영어권에서도 생각만큼 많은 책이 나와 있진 않다.   

   

그런 생각을 하던 차였는데, 이번주 신간 가운데 <이슬람 혁명의 아버지 호메이니>(한겨레출판, 2009)가 눈에 띄니 반가운 마음이 앞선다. 닐 퍼거슨은 "1979년의 가장 끔찍한 유산은 급진 이슬람주의다. 이 이념은 이란 지도자들뿐 아니라 세계 각지의 테러범과 테러 동조자들이 연결된 복잡하고 실체가 불확실한 네트워크에 자양분을 공급한다."라고 극도로 부정적인 평가를 내렸지만, 그건 미국의 보수적 역사학자의 시각이고, 우리는 우리 나름으로 이란혁명 30주년의 의미를 따져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제비 한 마리가 봄을 가져다주지 않듯이, 책 한권이 우리의 궁금증을 다 해소해줄 수는 없겠지만, 또 한편 시작이 곧 반이므로. 그래서 관심도서로 올려놓으며 관련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한겨레(09. 11. 14) ‘폭풍전야’ 이란서 호메이니를 되새기다 

“너의 모든 말과 행동을 지켜보거라… 나는 더 할 말이 없다… 머무르고 싶은 자는 남아 있고 그렇지 않는 자는 가도록 해라. 불을 끄거라. 나는 자고 싶구나.”

이란의 현대사를 새롭게 쓰면서 파란만장한 삶을 걸어왔던 사람이 남긴 마지막 말이다. 1989년 6월 3일, 병원 침상에 누운 87살의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는 이 말을 끝으로 끝없는 잠에 빠져들었다. 이란의 ‘국부’ 호메이니는 그렇게 떠났지만, “그의 영혼과 흔적은 아직도 이슬람 세계 곳곳에” 남아 있다. 올해는 이란 이슬람혁명 30주년이자, 호메이니 타계 2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이슬람혁명의 아버지 호메이니>는 부제 그대로 ‘호메이니의 삶을 통해 본 이란 현대사’를 다룬 책이다. 우리나라의 대다수 사람들은 호메이니라는 인물, 이란이라는 나라에 대해 잘 모를 뿐 아니라, 왜곡된 정보와 시각을 갖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의 시각으로 전달되는 뉴스와 정보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이란에 대한) 우리의 독자적 시각”을 갖는 것은 테헤란 대학에서 중동정치학을 공부한 한국인 유학생 1호인 유달승 한국외대 교수가 이 책을 쓴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다. 지은이는 “한 개인의 삶은 그 사회의 역사, 문화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며, 1979년 이슬람 혁명이 “아무런 배경도 없이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신학을 공부하고 “절대적 정의가 구현되는 정부”를 꿈꿨던 호메이니는 사회 현실에 눈감는 보수적 이슬람원리주의인 ‘와하비즘’을 비판하면서 정치적 발언을 시작했다. 그에 대한 민중들의 지지가 높아갈수록 팔레비 왕조는 그를 박해했다.

1979년, 호메이니는 오랜 망명생활을 마치고 귀국해 이슬람혁명을 주도했다. 구호는 크게 세 가지였다. 자유, 자주, 이슬람공화국. “이슬람혁명은 반제반봉건 혁명”이었던 셈이다. 특히 이슬람 공화국은 일찍이 없었던 정치실험이자 자존의 청사진이었다. 이란은 이미 1905년 입헌혁명을 시도했을 만큼 중동 아랍지역에서 정치적으로 앞선 나라다. 호메이니의 원대한 꿈도 이슬람 가치와 근대 민주주의 원칙을 결합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국제사회의 힘의 논리는 세계 2위의 원유 매장량과 절묘한 지정학적 위치를 지닌 이란을 가만 두지 않았다. 영국과 미국은 이란의 내정에 끊임없이 개입했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은 민주적으로 선출된 이란 정부를 전복하고 왕정을 부활시키는 쿠데타 공작을 꾸몄다. 호메이니는 “제국주의자들이 장악한 억압 정부를 타도하고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정의로운 이슬람 정부를 건설”할 것을 주창했다. 그 결과 다른 어느 나라보다 강력한 신정체제가 등장하게 된 것은 아이러니다.

딱딱한 정치, 역사, 시사 문제들을 현장중계하듯 생동감 넘치게 서술한 것은 이 책의 미덕이다. 상황에 대한 구체적이고도 사실적인 묘사는 마치 흥미진진한 소설을 읽는 것 같은 감칠맛이 있다. 페르시아어를 쓰는 인도·유럽어족-아랍어를 쓰는 샘족, 조로아스터교-이슬람교, 칼리프-이맘, 시아파-수니파 등 이란과 주변국의 역사·문화적 특징들에 대한 풍부하고 재미있는 배경 지식들도 곁들였다.(조일준 기자) 

09. 11. 14. 

 

P.S. 개인적으로 닐 퍼거슨의 기고문에서 챙긴 것은 소련의 붕괴에 관한 몇 권의 연구서이다. 냉전사의 권위자인 존 루이스 개디스의 책이 표준적이라고 하고, 스티븐 코트킨이 새로운 견해를 제시하고 있는 수정주의자라 한다. 코트킨의 책으론 <저지된 대결전>(2001/2008)과 <비문명사회>(2009) 등이 있다. 전자는 소련이 1970년대를 버텨낸 건 오로지 고유가 덕분이었다고 지적하며, 후자는 서방 지도자는 물론 동유럽 반체제 인사도 소련 붕괴에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고. 흥미를 끄는 내용들이어서 한번 찾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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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슬람, 이슬람혁명, 이슬람여성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1-03-19 09:58 
    대한출판문화협회에서 간행하는 월간 소식지 <출판문화>(544호)에 실은 '이현우의 책읽는 세상'을 옮겨놓는다. 격월로 연재하는 칼럼인데, 이달에는 '책으로 읽는 이슬람 이야기'를 주제로 다루었다. 읽은 책보다는 읽어야 하는 책이 더 많은 분야인데. 아무튼 이번 이슬람 혁명을 계기로 부쩍 읽고 싶은 책이 많아졌다(그래서 관련서들을 한데 모았다). 유엔 안보리가 군사개입을 결의한 리비아의 전황이빨리 호전되기를 기대한다.출판문화(11년 3월호) '
 
 
노이에자이트 2009-11-14 15:16   좋아요 0 | URL
소련붕괴는 레이건 행정부가 중앙정보국 국장 존 케이시와 함께 동유럽 붕괴공작을 통한 성과였다고 주장하는 책이 있습니다.피터 시바르쯔<냉전에서 경제전으로>.폴란드 자유노조 지원을 위해 공작금을 많이 퍼부었고 교황도 개입했다는 내용이죠.재밌는 건 이 책이 좌파의 폭로물이 아니라 우파의 시각으로 쓴 것이라는 것이죠.

로쟈 2009-11-14 17:43   좋아요 0 | URL
왠지 자화자찬일 거 같다는 느낌이 들지만 참고는 해볼 만하겠어요...

펠릭스 2009-11-14 21:16   좋아요 0 | URL
이란이 중동지역(아랍)과 중앙아시아 사이에 위치한 시아파 이슬람국인데도 호메이니가 비아랍국이며 이슬람 순니파가 대부분인 터키에 망명할 수 있었을까요? 또한 유럽의 잠재적 적이라는(유럽공동체 제외) 터키가 중앙아시아 카자스탄에 경제적 지원에(대학지원 등) 적극적이며, 인접한 중국의 서북공정 대상인 위구르족도 11세기부터 이슬람교도들이고 보면 문명탄생지보다는 종교적 연대성이 큰 위협이 되겠는데요.

로쟈 2009-11-15 12:23   좋아요 0 | URL
터키가 그런 면도 있군요. 덕분에 알게 됐습니다...

2009-11-15 11: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1-15 12: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mirror 2009-11-15 18:34   좋아요 0 | URL
이슬람혁명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시각이 왜 보수적 역사학자에만 국한된다고 말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군요. 몇개월전에 있었던 이란의 부정선거와 이로 인해 발생한 시민들의 항거는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이란의 지식인들에게 물어보시죠. 호메이니의 혁명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박사논문을 쓰는 나의 이란인 친구는 현재의 이란 상태에 대해서 절망적이더군요. 모든 측면에서 호메이니의 혁명은 이란을 뒤로 가게 만들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습니다. 그가 이란인들의 생각을 대변하는 것은 아니지만, 몇개월전의 사태로 볼 때, 무시할 수만은 없는 관점이지요. 박정희가 경제에서만 어느 정도의 성과를 거두고 나머지를 압살했다면, 호메이니와 신정정권은 종교만 빼고 나머지를 모두 압살했다고 할 수 있을 터인데, 박정희에 대한 평가가 부정적이라면, 같은 관점에서 과연 호메이니를 높게 평가할 수 있을까요?
'우리 나름대로의 관점'이 반미나 또는 반서구적 가치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듭니다.

로쟈 2009-11-15 19:01   좋아요 0 | URL
이슬람혁명이 부정적인 양상으로 귀결되었다는 것과 급진 이슬람주의를 싸잡아서 테러리즘의 온상이라고 지목하는 것은 다른 문제가 아닐까요? 부시 시절의 명분없는 대테러전쟁도 '미국적 가치'에 비춘다면, 반미적이고 반민주적인, 반서구적 전쟁이었습니다. 그리고 책에 관해서 저는 '우리 나름대로의 관점'보다는 이란 현대사에 관한 책이 나온 것에 더 주목한 것입니다...

mirror 2009-11-15 19:37   좋아요 0 | URL
로자님이 이런 책의 출간을 환영하는 것처럼 저도 그러합니다.
제가 로자님이 사용하신 '극도로 부정적인 평가'라는 표현에 많이 집중한 것 같습니다.
 

함석헌 선생의 <뜻으로 본 한국역사>에 대한 강의를 목적으로 지난주부터 관련서를 대출하고 관련논문과 자료들을 복사했다. 30권 전집으로 갈무리된 그의 삶과 사상을 다 살필 수는 없고, 나의 소임은 <뜻으로 본 한국역사>에 초점을 맞춰서 그의 역사관과 역사철학을 정리하여 전달하는 것이다. 그런 관심에 한정하여 참고한 책들의 리스트를 만들어놓는다. 절판된 책이긴 하나 전체적인 윤곽을 잡는 데 가장 요긴한 책은 서양사학자 노명식 교수가 엮은 <함석헌 다시 읽기>(인간과자연사, 2002)이다. 대표적인 글들을 재수록하고 편자의 해설을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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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2009-11-14 22:05   좋아요 0 | URL
함석헌 선생의 종교적 다원주의와 우리가 더 겪게 될
문화적 다원주의의 대상은 다를까요?

로쟈 2009-11-15 12:25   좋아요 0 | URL
그런 관용적 다원주의와 강한 민족주의의 결합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