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의 문제와 관련하여 파농의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을 뒤적이다가 리스트를 만들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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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의 철학- 지배와 저항의 논리
사카이 다카시 지음, 김은주 옮김 / 산눈 / 2007년 7월
12,000원 → 10,800원(10%할인) / 마일리지 6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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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
프란츠 파농 지음, 남경태 옮김 / 그린비 / 2004년 8월
12,000원 → 10,800원(10%할인) / 마일리지 6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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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검은 피부, 하얀 가면- 포스트콜로니얼리즘 시대의 책읽기
프란츠 파농 지음, 이석호 옮김 / 인간사랑 / 1998년 3월
15,000원 → 14,250원(5%할인) / 마일리지 430원(3%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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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나는 내가 아니다- 프란츠 파농 평전
패트릭 엘렌 지음, 곽명단 옮김 / 우물이있는집 / 2001년 9월
11,000원 → 9,900원(10%할인) / 마일리지 5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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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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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주간논평으로 기고한 글을 옮겨놓는다(http://weekly.changbi.com/blog_post_192.aspx). 내가 주문받은 것은 '인문서 번역의 실태와 문제점'을 짚어보는 일이었고 마침 최근 출간된 <번역비평>을 읽고 있었기에 그걸 실마리 삼아 몇 자 적은 글이다. 새삼스럽지 않은 얘기를 '진지하게' 늘어놓아 멋쩍긴 하다. 그리고 최종원고를 보낸 지 한 시간만에 글이 올라와 놀랍기도 하고(!). 

창비주간논평(07. 12. 04) 한국의 인문서 번역현실과 그 적들

최근에 나온 《번역비평》(고려대학교출판부) 창간호를 흥미롭게 읽었다. 작년에 발족한 한국번역비평학회의 연간 학술지이다. 지난 10월 영미문학연구회의 정기학술대회에서도 '번역과 영미문학의 미래'라는 주제가 다뤄진 걸 보면, 번역에 대한 한국 지식사회의 문제의식은 어느 때보다도 널리 공유되고 있는 듯하다. 여기에는 인터넷을 통해 활성화된 번역비평과 작년에 불거진 대리번역 파문 등도 한몫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번역비평》과 학술대회 발표문들을 읽으며 새삼스레 들여다보게 되는 것이 우리의 우려할 만한 번역현실이다. 사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박상익 교수가 《번역은 반역인가》(푸른역사 2006)를 통해서 신랄하게 고발하고 비판한 바 있다. 그대로 옮겨보면, "우리가 읽는 책의 태반은 번역서이다. (…) 그러나 현실을 돌아보면 우리의 번역문화는 척박하기 그지없다. 예나 지금이나 오역과 비문으로 가득한 번역서들은 독자들에게 좌절과 환멸을 수시로 안겨주고 있으며, 동서양의 주요 고전들 중 상당수는 아예 번역·소개조차 안되어 있는 것이 현실이다."    



번역에 적대적인 한국현실

이러한 현실이 끌어안고 있는 여러 고질적인 문제들은 번역 자체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 안팎의 문제들이다. 일부에서는 오역 집어내기에만 열중하는 번역비평의 비생산성을 꼬집기도 하지만, 사실 "오역과 비문으로 가득한 번역서"라고 할 때 '오역'이란 말이 가리키는 것은 대부분 무지와 무성의에서 비롯된 단순오역들이다. 가령 기표(signifier)와 기의(signified)를 서로 바꿔 옮긴다거나 라깡의 '대학담론'(discourse of University)을 '우주에 대한 강좌'로 옮기는 식이라면 독자의 '좌절과 환멸'은 불가피하다. '직역이냐 의역이냐' 혹은 '충실성이냐 가독성이냐'란 '고상한' 번역학적 논란이 우리의 현실에 잘 부합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러한 것이 번역 텍스트의 문제라면, 보다 근본적인 것은 그러한 번역을 양산해내는 번역의 컨텍스트 문제이다. 그래서 《번역비평》에서도 특히 공감하며 읽은 글들은 '번역출판과 현장'의 목소리들이었다. 무엇이 문제인가? "번역이 중요하다 말하지 말라"라고 일갈한 출판평론가 표정훈의 말을 빌리면, "번역료가 번역에 적대적이며, 서평의 제도와 현실이 번역에 적대적이며, 번역을 위한 자료 접근 및 이용의 현실이 번역에 적대적이고, 번역의 지형도가 번역에 적대적이고, 학문 제도와 구조가 번역에 적대적"인 현실이 문제다. 이것이 현재 한국에서 번역과 번역자가 처한 상황이다. 이만하면 총체적으로 적대적인 상황 아닌가? 



인색한 번역료, 척박한 서평문화

번역료가 번역에 적대적이란 사실은 인문서 번역의 경우 더욱 실제적이다. 표정훈은 매절번역료 원고지 1매당 4,000원 혹은 인세율 5%를 기준으로 번역료 수입을 계산했지만, 요즘 인문서 번역의 대세인 인세계약을 기준으로 하면 저작권이 있는 도서의 경우 보통 역자가 받을 수 있는 최대치는 6~8%이다. 정가 20,000원인 책 2,000부를 초판으로 찍는다고 할 때, 역자의 손에 떨어질 수 있는 최대 수입은 240~320만원이 되는 셈이다. 물론 인문학 석․박사 학위를 가진 '고급인력'이 최소한 두세 달을 꼬박 투자하여 얻을 수 있는 수익으로서는 결코 내세울 만한 수준이 못된다. 게다가 고급 인문서의 독자층이 갈수록 엷어지고 있는 현실은 사정을 더욱 나쁘게 만든다. 이런 상황에서 생계를 박차고 '불만의 번역자'를 자처하고 나설 인문학도들이 얼마나 될 것인가? 물론 한국학술진흥재단 등에서 동서양명저 번역사업을 지원하고는 있지만, 박상익 교수의 지적대로 이 사업에 배정되는 1년 예산은 서울 강남의 아파트 한채 값에 불과하다. '언 발에 오줌 누기'란 표현이 과하지 않다.

번역서 서평문화도 척박하긴 마찬가지다. 표정훈의 비교에 따르면, 북리뷰의 프론트면의 서평 양에서 《뉴욕타임즈》가 국내 신문보다 3배 많다. 이런 서평란이 《뉴욕타임즈》에서는 30~40면으로 이루어져 있는 데 반해서, 국내 주요 신문은 5~8면이다. 게다가 씨스템상으로 책을 꼼꼼히 읽고 평할 만한 충분한 시간이 주어지지 않는 상황에서 양산되는 국내의 서평들이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만족스러울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한국출판인회의나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같은 유관기관에서 문제가 많은 오역서를 '이달의 책'으로 선정하는 코미디가 간혹 벌어지는 것도 이런 사정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논문과 달리 서평은 학술업적으로 인정되지 않기 때문에, 중요한 학술·교양서적이 번역되어도 이에 대한 본격적인 서평이 관련 학술지에서조차 잘 다루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설사 다루어진다고 해도 '한국적인' 인간관계가 고려되는 탓에 실질적인 '번역비평'이 이루어지는 일은 매우 드물다. 돈독한 인간관계 속에서 번역문화만 낙후돼가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번역문화'라면 과연 어떻게 개선해가야 할 것인가?



한권의 번역서를 책임진다는 자세로

'가난한' 번역자들이 자주 겪는 것이지만 번역을 위한 자료 접근의 어려움에 대해서는 대학도서관이나 공공도서관 이용의 편익을 최대한 확대하는 방안을 고려해봄직하다. 하지만 고전 번역서들의 번역이 아직 미흡하여 '지식의 지형도'를 제대로 그려볼 수 없다는 불만은 인과응보이기에, 현재로선 감수하는 수밖에 없겠다. 단, 지금 세대가 여전히 필요한 번역에 손을 놓는다면 그러한 불만을 다음 세대에까지 또 물려주는 도리밖에 없다. 어려운 처지에 놓인 건 분명하지만 인문학자나 인문학도 들이 저마다 한권의 번역서는 책임진다는 각오로 발벗고 나서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발바닥에 땀을 좀 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번에 새로 발족한 한국고전번역원에서 우리의 고전과 각종 관찬사료 들의 번역을 체계적으로 추진한다고 하는데, 관계자에 따르면 고전문헌 가운데 우선적으로 6,400여 책을 번역자를 양성해가며 다 번역하려면 40년 정도 걸릴 것이라고 한다. 2003년에 창립된 한국키케로학회에서 30권으로 기획하고 있는 키케로전집 번역에는 50년이 소요될 예정이라고 한다. 각 학회나 전공분야에서 그 정도의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고 향후 반세기 정도 혼신의 열정을 쏟아붓는다면 일찍이 '번역대국'의 길에 들어선 일본과의 격차를 좀 줄일 수도 있지 않을까.  

번역의 컨텍스트를 바꿔나가야

물론 열정만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그러한 계획이 실현되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번역의 중요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합의다. "번역이 힘든 건데, 그럼 일본어·영어로 읽으면 쉽지 않은가?" 혹은 "앞으로 100년을 내다본다면 한국어는 경쟁력이 없다"라는 인식과 판단이 한국어 번역에 대한 우리 사회의 지배적 태도가 된다면, 인문고전 번역의 미래는 없다. 이미 자연과학에서 한국어가 학문어로서의 의미를 상실한 것처럼 인문학에서도 한국어는 변방의 언어, 기지촌의 언어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과연 인문학도 자연과학과 마찬가지로 언어의 국적을 갖지 않는 것일까?).

대학강단에서도 영어가 공용어로 '강요'되고 있는 징후적인 현실은 분명 번역에 그리 우호적이지만은 않다. 그럼에도 그것이 우리가 바라는 미래상이 아니라면, 번역을 구조적으로 배제하며 번역업적의 평가에는 인색하기 짝이 없는 학계의 제도와 관행을 이제부터라도 바꾸어야 한다. 대학원생들에게 과제로 제출받은 원고를 짜깁기하여 교수 이름으로 내던 관행부터 타파되어야 하는 것이다(이런 관행에 익숙한 이들이 번역을 학술업적으로 인정할 리는 없지 않은가?). 번역 텍스트를 교정하고 번역을 둘러싼 현실적 조건, 곧 번역의 컨텍스트를 탈바꿈시켜야 한다. 이것이 바뀌지 않는다면 다음 세대에도 독자들의 좌절과 환멸은 지속될 수밖에 없다. "너희가 한국어를 믿느냐?"는 시험에 계속 들지 않을 수 없다. 과연 무엇이 우리의 현실이어야 할까.

07. 12.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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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한국어다운 번역에 대한 고민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09-07-05 21:27 
    계간 <황해문화> 여름호에 실었던 서평을 옮겨놓는다. 지난봄에 여러 차례 언급한 바 있는 이희재의 <번역의 탄생>(교양인, 2009)에 대한 서평을 청탁받고 쓴 것이다.      황해문화(09년 여름호) 한국어다운 번역에 대한 고민 번역현실에 대한 고민  “우리가 읽는 책의 태반은 번역서이다.(...) 그러나 현실을 돌아보면 우리의 번역문화는 척박하기 그지없다. 예나 지금
 
 
소경 2007-12-04 1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원에 읽다 흥미가 달아 올랐는데, 막상 댓글 적으려 하니 사그라져 버리는 군요 ^^:;

로쟈 2007-12-04 21:40   좋아요 0 | URL
그냥 '상식'을 확인하면서 행동을 촉구하는 글 정도로 생각해 주세요.^^

사량 2007-12-04 2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번역비평>이 알라딘 책 소개에는 계간지라고 나오는데, 로쟈님은 연간지라고 말씀하시네요. 어느 쪽이 정확한가요?

로쟈 2007-12-04 21:39   좋아요 0 | URL
책에 연간지라고 돼 있습니다. 학술지가 계간지로 나오긴 힘들 것 같고, 그래도 영향력이 있으려면 반년간지도 정도는 돼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2007-12-04 21: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2-04 21: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slapphappy 2007-12-05 0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이 번역하신 인문서를 알려주세요.

로쟈 2007-12-05 08:36   좋아요 0 | URL
저도 몇 권을 하고는 있습니다.^^;

누에 2007-12-28 2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혹시 괜찮은 번역어 사전은 없으려나요.

로쟈 2007-12-28 21:58   좋아요 0 | URL
'번역어사전'이란 건 어떤 걸 말씀하시나요? 번역학 용어사전 같은 건가요? 그런 건 안 나와 있는 거 같습니다(통역사전 같은 건 있고요)...

누에 2007-12-29 17:54   좋아요 0 | URL
철학이나 정신분석 등의 번역서에서 역자들이 택한 번역어들에 대해서 좀 자세히 살펴볼 수 있는 자료가 부족해서 말이죠...

로쟈 2007-12-29 18:23   좋아요 0 | URL
그건 책마다, 철학자마다 다를 거 같은데요. 요즘은 그런 책들이 나오기도 하는데, 말미에 번역용어 해제와 대조표들이 덧붙여진다면 도움이 될 거 같습니다...

가명 2019-12-04 17: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은 상황이 변화했나요 문외한이 여쭙습니다

로쟈 2019-12-04 17: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현황파악이 정확히 안되지만 나아졌기를 바랍니다.~
 

예전에 쓴 시 한 편을 또 옮겨놓는다. 아마 20대 중반이나 끄트머리쯤에 쓰지 않았을까 싶은데, 사실 시라는 건 핑계이고 순전히 마지막 구절 때문에 쓴 것이다. 한때 '탱자 가라사대' 같은 개그 코너도 유행하던 시절이 있었다는 걸 곁다리로 떠올려본다. 

  

탱자나무 옆에서

탱자나무는 말이죠, 운향과에 딸린 갈잎 넓은 잎의 작은큰키나무라는군요. 작은큰키라는 것이 탱자나무가 작은 것도 있고 큰 것도 있다는 말인지, 아니면 탱자나무가 작지도 않고 크지도 않다는 말인지는 알 수 없지만요, 탱자나무의 줄기는 높이 2m쯤이고 녹색이며 모가 지고 5cm가량 푸른 가시가 나있다는군요. 그러고도 사전에는 몇 줄이 더 씌어 있는데요, 탱자나무는 5월에 잎보다 먼저 흰 다섯잎꽃이 잎사귀에서 하나씩 피고요, 가을에 직경 3-5cm의 둥근 장과가 노랗게 익는데, 향기가 난다는군요(아마 탱자향일 테지요). 그리고 또 탱자나무는 말이죠, 울타리 대용으로 흔히 심고요, 탱자나무의 열매는 약재로도 쓰고요, 또 탱자나무는 우리나라의 중부 이남에서 가꾼다고 하는군요(그리고 옆에 탱자나무가 그려져 있어요). 이것이 말하자면 탱자나무 일반에 관한 사전적인 지식인데요, 사실 이런 거야 아실 만한 분은 두루 아실 얘기가 아닐까요. 또 어지간한 국어사전이나 식물사전에서 ‘탱자-나무’를 찾으면 무척이나 자세하게도 설명되어 있을 텐데요, 그래, 왜 이런 자리에서 탱탱거리느냐고 불만이 많으시다면, 그저 더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다만 왜 하필, “탱자나무 옆에서 울었단다”는 말이, 그렇게도, 제 마음을, 울리는 것인지요?

07. 12. 04.

P.S. 옮겨놓고 보니 초겨울에 어인 탱자 타령인가 싶다. '탱자'와 관련하여 떠오르는 또다른 시제(詩題)는 '탱자탱자'이다. 그게 어원적으로 '탱자'와는 무슨 관련이 있는지 모르겠으나 차라리 이 계절과는 맞는 듯도 싶다. 더불어 탱자나무 옆에서 우는 팔자와 탱자탱자하는 팔자가 사뭇 대조되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그래서 말하건대, '맨손'과 '맨션'이 있는 것처럼 세상엔 '탱자'와 '탱자탱자'가 있다. 그냥 그렇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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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2-04 01: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12-04 08:26   좋아요 0 | URL
별말씀을요.^^

수유 2007-12-04 1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어서 탱자탱자 해야 할텐데...언제나 오려나..요.

로쟈 2007-12-04 13:33   좋아요 0 | URL
금방일 텐데요.^^

2007-12-04 16: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2-04 16: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번 학기 대학신문에 연재되었던 '21세기의 사유' 정리 인터뷰에 며칠전 응했다. 이메일과 전화 질문들에 답하는 것이었는데, 시간상 충분하게 답변을 하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아래 기사(http://www.snu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6102)를 보니 내가 제일 많이 떠든 것으로 돼 있다(내가 제일 순진했었나 보다). 흥미로운 건 인터뷰 내용 일부는 내가 실제로 한 말이 아니라는 점. 나의 '배역'에 맞춰 더 추가된 대목도 있다. 그냥 '대본' 정도라고 보면 되겠다.  

대학신문(07. 12. 03)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21세기의 사유’

그동안 『대학신문』은 ‘21세기의 사유들’이라는 제목으로 현존하는 사상가들이 현 시대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살펴봤다. 연재기획의 마지막회로 그간의 논의를 정리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이를 통해 연재에서 다루어진 주요 사상가들이 만나고 갈라지는 지점을 짚어보고 나아가 철학이 사회와 맺어야 할 바람직한 관계를 모색했다.

◆‘21세기의 사유들’ 연재에 대해 평가해 달라

진태원: 독자들에게 현대사상의 진로를 개척하고 있는 사상가들을 소개하는 유익한 자리였다. 사상가 선별작업은 무난했지만 에티엔 발리바르나 지그문트 바우만 등에 대한 소개가 빠져 조금 아쉬웠다.

이현우: 연재된 10명 모두 세계적 명성을 얻고 있는 인물이다. 다만 유럽대륙 인물이 8명에 달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선정된 인문(*인물)이 지나치게 서구에 편중돼 있다. 남성과 여성의 비율이 9:1이었다는 점도 아쉬움으로 남는다.

조현준: 내년에 서울에서 세계철학대회가 열린다. 시의적절한 기획이었다고 생각한다. 이번 기획은 최근 실용주의 및 물질주의적 합리성이 확산되면서 발생한 인문학 위기에도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지금의 대학생은 공교육의 위기와 값비싼 사교육이라는 이중 부담 속에 대학에 진학한 만큼 자아성취욕구와 현실적 실용성에 대한 기대가 높다. 하지만 ‘88만원 세대’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젊은 세대의 미래가 밝지만은 않은 상황이다. 이런 때일수록 조금 더 여유를 가지고 앞날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이런 것이 모두 철학의 힘이며 인문학이 지니는 장기적인 가치다. 이번 기획을 통해 철학에 대한 독자들의 인문학적 관심이 깊어졌기를 소망한다.

◆10명 사상가들의 지적 지형도를 그려본다면

이현우: 슬라보예 지젝을 중심으로 몇 가지 부분을 짚어볼 수 있다. 지젝은 주디스 버틀러나 조르지오 아감벤, 알랭 바디우, 자크 랑시에르, 안토니오 네그리 등과 교분을 갖고 있었고, 또한 서로 협력하는 만큼 충돌했기 때문이다.

조현준: 젠더에 관해 지젝과 버틀러는 서로 다른 입장을 취한다. 버틀러는 『의미를 체현하는 육체』, 『권력의 심리양태』에서 지젝의 지적 토대라고 할 수 있는 자크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비판한 반면 지젝은 『까다로운 주체』에서 거꾸로 버틀러를 비판한다. 버틀러는 사람들이 두 개의 성별만을 ‘연기’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여러 가지 성별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지젝은 구조적으로는 남성과 여성이라는 두 개의 성별만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버틀러의 입장에서 보면, 지젝이 현실의 여성이나 동성애자가 겪는 억압을 해결하려는 성의 정치학에는 관심이 없고 현실의 억압상태를 설명하는 데에만 치중하고 있다고 비판할 수 있다.

이현우: 버틀러는 젠더에 대해 역사적으로 형성된 개념일 뿐 젠더의 ‘근원적’ 진리는 없다는 식이지만 지젝은 그 역사성 자체가 진리라고 말한다고 볼 수 있다. 비유하자면 버틀러의 퀴어(queer) 이론은 다신교, 지젝의 정신분석학은 유일신교다. 유일신교가 ‘신과 자신’과의 차이를 보여주듯 지젝은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말하기 때문이다.

조현준: 지젝은 인간의 보편심리를 도출하려는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기반으로 하고 버틀러는 보편 문법이 역사적인 ‘권력 역학’ 속에서 사후적으로 구성되는 메커니즘을 밝히고자 하는 푸코의 계보학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차이가 생긴다. 결국 그들의 사상이 상충되는 것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서로 입지와 관점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이현우: 지젝과 네그리에 대해서도 이야기할 수 있겠다. 지젝은 네그리의 저서 『제국』의 서평을 썼다. 지젝은 서평에서 네그리의 현실 진단의 충실성에 대해서는 인정한다. 하지만 지역공동체에 대한 강조 등의 처방이 실제적으로 얼마나 실천가능할지에 대해 의문을 품는다.

윤수종: 학자에게 처방까지 요구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다. 현실적인 측면에서 어려움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네그리는 다양한 사회운동에 기대를 걸고 있다. 사회가 나아갈 긍정적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 비록 어려울지라도, 다양한 자율운동이 국가의 지배구도를 깰 수 있는 유력한 길이라고 생각한다.



이현우: 한편 지젝은 바디우와는 공유하는 부분이 있다. 바디우는 『성(聖) 바울』에서 유물론적 시각으로 새로운 ‘바울 읽기’를 시도했고 지젝은 『죽은 신을 위하여』에서 이를 지지한다. 지젝은 바울을 레닌에 비유하면서 기독교의 ‘사랑’은 지배이데올로기에 종속돼있는 개념이 아니라 혁명적인 개념이라고 말한다.

홍기숙: 바디우에게 바울은 마르크스보다는 레닌, 프로이트보다는 라캉에 가까운 이미지다. 그런 맥락에서는 바디우와 지젝이 확실히 공유하는 부분이 있다. 그러나 바디우의 논의가 여러 각도에서 전개되는 반면 지젝은 바디우의 생각을 특히 정치학의 맥락에서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다.

◆각 사상가의 시각에서 한국의 정치현실을 바라본다면

진태원: 랑시에르라면 한국사회를 ‘기득권자들의 노골적인 금권적-엘리트주의가 지배하는 사회’로 볼 것 같다. 그는 아직도 정당한 자기 몫을 배분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세계 각지에 존재하고 있다고 지적된다. 여기에는 우리나라의 미등록이주노동자, 혼혈인 등도 해당된다. 이들과 함께한다는 연대의식을 국민 모두가 갖출 때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다는 그의 주장은 지금의 한국사회에 가장 필요한 말이 아닐까.

이현우: 지젝도 비슷한 지적을 할 것 같다. 그는 『이라크』 등의 저서를 통해 국민이 자신들의 민주주의를 위해 다른 계층을 착취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꼬집은 바 있다. 그에 의하면 국민이 민주주의를 운영하고 유지하려면 영토와 자본, 문화 등 많은 비용이 지출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비용은 민주주의에서 특정 계층을  배제함으로써 마련된다. 따라서 지젝은 민주주의를 유지하기 위해 ‘특정한 배제’가 불가피하다는 점에서 민주주의의 한계를 지적한다.



나종석: 회슬레는 국가단위의 민주주의를 부정한다. 보편주의자인 그는 전세계 60억 인구가 민주주의라는 하나의 가치 아래 모일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면서 ‘세계공화국’이 그 대안이 되지 않을까 추측한다. 좀 더 넓은 단위의 민주주의체제를 모색해야 할 때가 아닐까.



조영일: 한국정치의 다른 문제에 눈을 돌려보자. 우리사회에서 선거에 나선 후보들은 정책을 앞세우기보다 서로의 약점을 공격하기 일쑤다. 정치무대 배후에서는 소위 줄서기가 횡행하고 있고 박스 가득 정치자금이 오고간다. 이러한 것들이 모두 선거로 인해 나타나는 사회적 낭비에 해당한다. 이를 매우 비효율적이라고 본 가라타니 고진은 고대 그리스처럼 선거에 추첨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시대에 철학은 무엇이어야 할까

홍기숙: 철학은 그 시대를 담지 않으면 존립할 수 없다. 적어도 철학자라면 항상 이 시대의 정치, 문화를 비롯한 사회현실에 발을 딛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는 ‘지금’과 ‘여기’를 중요시하는 바디우의 생각이면서 동시에 나의 생각과 일치하는 부분이다.

나종석: 그런 맥락에서 철학과 환경의 관계를 짚어볼 수 있지 않을까? 지금 유효한 환경철학은 생태계 속 모든 생명체의 가치를 동등하게 바라보는 심층생태주의다. 인간의 가치도 단지 한 종(種)으로서의 가치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 관점에 다르면 인간이 멸종하더라도 이는 자연스러운 현상이기 때문에 별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못하게 된다. 회슬레는 이 부분에 이의를 제기하며 인간중심주의와 심층생태주의 사이에서 제3의 길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평소에는 자연과의 공존을 추구하면서도 갈등상황에서만큼은 위계질서를 인정하자는 것이다.

조영일: 한편 세계적으로 지식생산구조가 변화하는 조짐이 감지된다. 대학을 벗어난 공간에서 철학적 논의가 이뤄지고 수준 높은 강의가 인터넷 상에 공개되는 현상들이 모두 이러한 움직임들이다. 아마도 미래에는 학문을 하는 새로운 방식이 출현할지도 모르겠다.

이현우: 대학은 특수한 정치공간, 소수 엘리트계층 배출공간으로서의 성격을 잃은 지 이미 오래다. 그간 지녔던 독자적인 지식생산구조조차 허물어지는 판국이다. 대신 기업체 등의 의뢰를 받아 그들의 구미에 맞는 지식결과물을 생산하는, 이른바 ‘대학이 자본주의의 물결에 잠식당하는 현상’이 진행되고 있다. 이 추세대로라면 더 이상 한국에서 유효한 철학적 담론을 기대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조영일: 이제는 철학이 소수의 전문적 지식인들만 접근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문학평론가면서  철학적 사유들을 내놓는 가라타니 고진과 같은 사람들이 많이 나와야 한다. 외국철학자의 용어를 어떻게 번역할까 하는 문제는 상대적으로 사소한 문제일 수 있다. 이제는 모두가 자신의 학문의 틀을 벗어나 다른 학문의 경계를 넘나들어야 할 때다.

이현우: 학문의 경계를 넘나드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다. 더불어 현대사회에서는 사유를 하는 사람의 범주를 구획할 필요가 없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리처드 도킨스, 다니엘 데넷, 스티븐 핀커 등 대중적인 과학자는 물론, 시인과 작가 등 모든 사람이 사유주체가 될 수 있다.

※이 기사는 개별적으로 이뤄진 인터뷰를 좌담 형식으로 재구성한 것입니다.(인터뷰 및 정리: 문승기 기자, 이진환 기자)

■인터뷰에 응해주신 분들
나종석(연세대ㆍ철학과 강사), 윤수종(전남대ㆍ철학과 교수), 이현우(서울대ㆍ노어노문학과 강사), 조영일(문학평론가), 조현준(한국여성문화이론연구소 연구원), 진태원(서울대ㆍ철학과 강사) (가나다 순)

07. 12.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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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7-12-03 0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재미있게 읽었습니다.책읽고 싶어지게 만드네요.^^

로쟈 2007-12-03 13:13   좋아요 0 | URL
제가 주로 하는 일이죠.^^;

이잘코군 2007-12-03 1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그분은 이제 한국에 돌아오셔서 강의 나가시나보군요! 알라딘에 계시는 로쟈님 말고 다른 분. 인터뷰 재밌게 읽었습니다.

로쟈 2007-12-03 13:13   좋아요 0 | URL
네, 활발하게 활동하시더군요.^^

2007-12-03 19: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12-03 23:22   좋아요 0 | URL
제 경우엔 철학책을 문학책처럼 읽는 편인데요. 문학적인 철학자들을 좋아하고요(사르트르나 데리다 같은).^^
 

오늘처럼 흐린날에(원고 때문에 하루종일 집에 있어서 바깥 날씨가 정확히 어땠는지는 모르겠다) 어울리겠다 싶어서 유튜브에서 찾아 들은 노래는 러시아의 전설적인 그룹 키노(리더가 '빅토르 최'이다)의 '슬픔'(Pechal)이다. 여가수 젬피라가 키노에 대한 오마주로 부른 '슬픔'과 번갈아가면서 듣는다. 키노의 노래는 마지막 콘서트(1990) 실황이다.

-키노의 '슬픔' http://www.youtube.com/watch?v=Qi042YL9ZOI, 아니메 버전은 http://www.youtube.com/watch?v=-aO3EdHtrXM, 그리고 윤도현 밴드가 리바이벌해 부르기도 한 키노의 대표곡 '혈액형' http://www.youtube.com/watch?v=1HKXMBfDxR0. 빅토르 최가 주연을 맡기도 했던 영화 <바늘>에 삽입된 '혈액형'은 http://www.youtube.com/watch?v=dFUUTE58nDQ.

-젬피라의 '슬픔'은 http://www.youtube.com/watch?v=ukyvI_T9zpA, 내가 좋아하는 젬피라의 노래는 '안녕' http://www.youtube.com/watch?v=ba14p-hic3I.

07. 12. 02.

P.S. '슬픔'이란 주제로 얼른 생각나는 시들은 정현종의 시편들인데, 그 중 가장 코믹한 것은 '사람으로 붐비는 앎은 슬픔이니'란 시이다(사진은 모스크바의 지하철 에스컬레이터).

안다고 우쭐할 것도 없고
알았다고 깔깔거릴 것도 없고
낄낄거릴 것도 없고
너무 배부를 것도 없고
안다고 알았다고
우주를 제목소리로 채울 것도 없고
누구 죽일 궁리를 할 것도 없고
엉엉 울 것도 없다
뭐든지간에 하여간
사람으로 붐비는 앎은 슬픔이니
그게 활자의 모습으로 있거나
망막에 어른거리는 그림자거나
풀처럼 흔들리고 있거나
그 어떤 모습이거나
사람으로 붐비는 앎은
슬픔이니...

나는 '슬픔'이 사람으로 붐비는, 지랄 맞은 인문학의 숙명이라고 생각한다. 그게 활자의 모습으로 있거나 그 어떤 모습이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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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da 2007-12-02 2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래 너무 좋네요. 삼 년 전에 여의도역 공중화장실 쓰레기통에 버린 슬픔이 다시 환생한 것 같은 기분이에요.. 러시아어가 이렇게 매력적이군요. :)

로쟈 2007-12-02 23:46   좋아요 0 | URL
'러시아제' 슬픔입니다. 노래들이 요란하지 않아서 제 취향에도 맞습니다.^^

2007-12-03 18: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12-03 23:23   좋아요 0 | URL
내가 사랑했던 도시여 안녕, 이런 식입니다. 맘에 드신다니 저도 좋군요.^^

소경 2007-12-03 1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사 찾으려 검색하다 보니, 진짜 '전설'로써(빅토르 최 중심이지만) 그룹에 대해 읽을 것이 많네요.

로쟈 2007-12-03 23:24   좋아요 0 | URL
'전설'이자 '신화'죠. 아직도 추모하는 팬들이 많은. 저도 그의 전기를 갖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