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 나온 내털리 데이비스의 <책략가의 여행: 여러 세계를 넘나든 한 16세기 무슬림의 삶 >(푸른역사, 2010)에 이어서 이번주에도 화제의 책은 16세기를 다루고 있다. 야마모토 요시타카의 <16세기 문화혁명>(동아시아, 2010). 뤼시엥 페브르의 <16세기의 무신앙 문제>(문학과지성사, 1996)까지 '16세기 3종 세트'로 묶고 싶은 생각마저 든다(아, '16세기 한 방앗간 주인의 우주관'을 다룬 <치즈와 구더기>를 포함하여 미시사 책들이 몇 권 더 있긴 하다). <16세기 문화혁명>은 두툼한 분량의 무게감 그대로 '눈부신 역저'라 불릴 만한데(나는 내주에나 좀 읽어볼 참이다) 일단은 소개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경향신문(10. 03. 06) 과학혁명 디딤돌 놓은 16세기 장인과 기능공들

이건희 전 삼성 회장의 “천재 1명이 10만명을 먹여살린다”는 수년전 발언을 떠올려 본다. 당시 ‘천재경영론’으로 명명되면서 널리 회자됐던 발언에 깔린 지극히 엘리트주의적인 사고방식은 사실 뿌리가 깊고 지배하는 영역도 넓다.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도 예외가 아니다. 역사를 만들어가는 것은 결국 소수의 천재들이라는 사고방식이다. 



근대과학의 역사 역시 갈릴레이, 뉴턴, 케플러, 베이컨 등 걸출한 천재들로부터 출발한다. 이들은 17세기 유럽에서 살았다. 그래서 17세기를 과학혁명의 세기라고 부른다. 전작 <과학의 탄생>(일본 제목은 ‘자력과 중력의 발견’)으로 찬사를 받았던 지은이는 후속작에 해당하는 이 책에서 17세기 과학혁명 이전에 초점을 맞췄다. 17세기 천재들의 업적에 가려 조명을 받지 못했던 16세기의 장인·기능공 등 ‘민중’들이다.

 

거칠게 말해 중세과학과 근대과학의 가장 큰 차이점은 머리와 몸으로 대비된다.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받은 중세 시대 학자들은 실험 등 경험을 통해 얻은 지식은 참된 지식이 아니라고 했다. 진리를 머리로 탐구하는 것만이 진정한 학문이라고 봤던 것이다. 르네상스 시대 상아탑에 갇힌 학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대학에서 교육을 받은 의사들은 고전에 나오는 인체의 구조나 생명의 원리 등 이론만 외우고 읊조렸을 뿐이다. 실제 수술이나 조제를 하는 사람들은 천대받았다.

그러나 16세기 장인·기능공들은 ‘고귀한 언어’ 라틴어와 고전은 배운 적 없었지만 몸을 움직여 현장에서 체득한 지식을 축적하고 스스로 느낀 궁금증을 실험으로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라틴어가 아닌 속어(고국언어)로 글을 썼다. 당시 유럽에서 융성한 목판 인쇄술은 미술, 건축, 의학, 군사학, 기계학, 천문학, 지리학 등 모든 분야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이뤄진 ‘문화혁명’을 전파했고 후세가 이를 확인할 좁다란 통로를 남겼다.

물론 이들에게 한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들은 실험을 통해 비교하고 검증하고 자신의 가설을 입증시켰지만 근대과학에서 가장 중요하게 취급받는 ‘이론화’까지는 나가지 않았다. 반면 17세기 학자들은 이들이 멈춘 곳에서 출발했다. 앞서 기능공들을 업신여기던 아카데미즘이 아카데미 바깥에서 이룩된 지식과 방법론을 재빨리 흡수해 이론화함으로써 과실을 따먹었다는 것이다. 

 

천재와 영웅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존재라 하더라도 받아줄 대지가 없었더라면 천재란 존재할 수 없다. 결국 지은이가 말하고자 한 것도 이것이다. 그는 이탈리아, 독일, 프랑스, 영국의 잊혀졌던 방대한 역사적 기록들을 하나하나 이어 붙여 ‘민중들의 르네상스’를 온전히 복원시켰다. 르네상스에서 근대로 이어지는 시기의 유럽 문명사에 대한 통찰을 제공하는 이 책은 ‘명저’의 대접을 받을 가치가 충분해 보인다.(김재중기자)  

10. 03. 05.  

P.S. 최근 일본소설들이 다시 강세를 보이고 있지만, 이번주에는 인문교양서에도 '일본책'이 여럿이다. '일본류'라 할 수 있을까? 가라타니 고진의 <일본근대문학의 기원>(도서출판b, 2010)이 가라타니 고진 컬렉션' 네번째 책으로 출간됐다(전체 일곱 권 가운데, 이제 두 권을 남겨놓고 있다. 나머지 한 권은 <근대문학의 종언>). 

    

지난 2007년 첫 권이 나온 이래 해마다 한권씩 나오고 있는 페이스인데, 짐작엔 올해는 한 권 정도 더 나올 듯싶다. 그건 <일본근대문학의 기원>은 이 컬렉션 '전담역자' 조영일씨의 번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1997년에 나온 민음사판의 역자 박유하씨가 이 '개정 정본판'의 번역을 다시 맡았고, 가라타니의 수정판을 "예전 번역을 일일이 대조하고 전면적으로 수정했다." 한일병합 100년을 맞는 해이라 그 의미가 더 도드라진다. 가라타니 컬렉터인 나로선 바로 손에 들 수밖에 없는 책.  

그리고 '재일 조선인' 서경식 교수와 일본의 재독 '경계인' 다와다 요코가 주고받은 서신을 묶은 <경계에서 춤추다>(창비, 2010)도 눈에 띄는 책이다. 두 사람이 2007년에 잡지 <세카이(世界)>에 열가지 주제를 놓고 편지를 주고받았다고. 간단한 소개기사는 이렇다.   

‘재일조선인’ 서경식 교수는 깊고 넓은 안목으로 디아스포라(이산·離散)를 천착한 글로 한국에 널리 알려진 저술가다. 다와다 요코는 1982년부터 독일에서 살며 일본어와 독일어로 다양한 글을 발표해 많은 상을 받은 소설가다. 그의 글이 한국에 소개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둘은 ‘경계인’으로서 다중정체성을 공유하고 있다. 하지만 이력이 다른 만큼 사유와 글쓰기 방식도 다르다. 서경식 교수는 이렇게 요약했다. “나는 사고방식이나 이야기를 진행해가는 방식이 세로방향이 되는 경향, 그것도 위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아래로 향해가서 구멍을 파는 경향이 있지만 그녀는 그것을 가로방향으로 열어간다. ‘모으기’에 응하는 ‘흩어놓기’라고나 할까.” 뿌리를 파고드는 서경식의 글이 깊은 가을 밤 비에 흠뻑 젖은 듯한 스산함을 일깨워준다면, 맺힌 것 없이 이리저리 옮겨다니는 다와다 요코의 글은 신록으로 내닫는 해사함이 있다. 집·이름·고향에 대한 ‘두 사람’의 상념이 빚어내는 차이의 무늬는 아름다우면서도 아프게 시리다.(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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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16세기 직인, 지식사회에 도전하다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3-15 17:36 
    이번주 한겨레21에 실은 서평기사를 옮겨놓는다. 야마모토 요시타카의 <16세기 문화혁명>(동아시아, 2010)을 다루고 있다. 이미 일간지 리뷰들에서도 크게 주목받은 책이지만, 초점을 조금 달리하여 한번 더 언급하게 됐다. 대단한 역작이어서 제쳐놓기가 어려웠다.    한겨레21(10. 03. 22) 16세기 직인, 지식사회에 도전하다  마르크스는 <자본>에서 “16세기에 세계무역과 세계시장이 형성된
 
 
2010-03-06 02:1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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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06 07: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푸른바다 2010-03-06 11:22   좋아요 0 | URL
아직 완독하지 못한 구판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을 갖고 있는 상황에서 신판을 구매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이 드네요^^ 강한 구매 충동을 느끼면서도, 언제 읽으려나 하는 현실론이 가로막는 군요^^

로쟈 2010-03-07 09:38   좋아요 0 | URL
새로 들어간 글들도 있어서 저자의 '확정본'이기도 해서 무시하기도 좀 어렵습니다.^^;
 

어제 학교에 가보니 <공간>(3월호)이 강사실 책상에 놓여 있었다. 서평란에서 프랑수아 줄리앙의 <무미예찬>(산책자, 2010)을 다루었는데, 여기에 옮겨놓는다. 다사다난하다 보니 두 주 전에 쓴 글도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공간(10년 3월호) 무미예찬 

무미예찬(無味禮讚). 그러니까 ‘맛없음’에 대한 예찬이다. 말이 안 되는가? 그런 염려는 저자도 염두에 두고 있다. “처음에는 역설로만 여겨질 것이다. 무미(無味)를 예찬한다는 것, 맛이 아니라 맛없음을 높이 평가한다는 것은 우리가 느끼는 가장 즉각적인 판단에 위배되는 일이다.”라고 처음에 적고 있기 때문이다. 주의할 점은 그가 말하는 ‘우리’의 정체성이다. 프랑스의 저명한 중국학자인 저자에게서 ‘우리’란 일차적으로 프랑스인이고 서구인이다. 따라서 무미에 대한 그의 예찬이 ‘즉각적인 판단에 위배’된다는 판단은 한국인 독자라면 보류해야 할 판단이다. 그럼에도 ‘무미예찬’에서 어떤 역설을 감지한다면, 그만큼 우리의 미각과 사고가 서구화되었다는 반증으로 보아도 틀리지 않겠다.   

우리말로 ‘무미’라고 옮겨진 단어는 저자가 불어로 ‘fadeur’(영어로는 ‘blandness’)라고 옮긴 중국어의 ‘담(淡)’이다. ‘담백하다’고 할 때의 ‘담’으로 묽다, 싱겁다, 부드럽다, 자극이 적다 등의 의미를 갖는다. 저자가 보기엔 이 ‘담=무미’가 중국의 문화와 미학적 전통에서 중심적인 가치이자 바탕을 이루는 가치다. “그것은 유(儒)․불(佛)․선(仙) 모든 사상의 지원을 받으며, 시, 음악, 회화 등 다양한 예술에 공통된 이상을 환기한다.” 이러한 주장을 저자는 강하게 논증하지 않고 여러 예시를 통해서 담백하게 그려내고자 한다. 의미를 직접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우러나게’ 하는 것이 또한 무미의 기술이다.   

담의 소리, 담의 느낌, 담의 그림과 시 등 “은미(隱微)하면서도 아주 구체적인 것”으로서의 무미함에 대해 살펴나가는 저자가 무미의 전범으로 예시하는 것은 중국 원나라 때의 화가 예찬(倪瓚)의 문인화다. 그림의 전경에는 잎이 성글고 가느다란 나무들이 몇 그루 서 있는 것이 전부다. 듬성듬성한 바위들이 물가의 윤곽을 드러내고 그 텅 빈 공간 건너편에 야트막한 언덕들이 밋밋한 원경을 이룬다. 네 개의 기둥으로 버텨놓은 초막이 아래쪽에 있지만 인기척은 전혀 없다. 전체적으론 윤곽선들조차 분명치 않을 정도로 연한 먹물로 그려졌다. 그래서 “도무지 사람의 눈길을 끌고 유혹하는 것이라고는 없지만, 그런데도 이 풍경은 풍경으로서 충만하게 존재한다.” 바로 무미의 풍경이다.  

화가 예찬은 나이 사십대까지는 막대한 재산 덕분에 지극히 고상한 세계에서 유유자적한 삶을 살았다고 한다. 하지만 몽골 지배기로 접어들면서 그는 모든 재산을 버리고 생애의 마지막 몇 십 년은 방랑으로 소일하며 무엇에도 구속받지 않는 초연한 삶을 살았다. 그가 평생 그린 풍경의 무미함은 곧 ‘무미한 삶’이라는 그의 이상을 표현한 것이기도 하다고 저자는 덧붙인다. 풍경의 무미함이 내적 초탈함이란 삶의 태도와도 연결되는 것이다. 그렇듯 ‘담’은 주체와 객체를 구별 없이 가리킨다.     

무심하고 무감각하며 무위(無爲)한 것이 삶의 기조가 된다고 하면, 이러한 태도는 서양의 주류적 가치관과 대비된다. 가령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러나 소금이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겠느냐?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밖에 던져져 사람들의 발에 밟힐 따름이다.”라고 제자들을 다그친 예수의 경우와 비교해볼 수 있다. 확실한 자기 ‘맛’을 드러내는 것, 곧 주장과 분별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것이 서양의 미덕이라면 중용적 태도를 이상으로 간주한 중국인들의 생각은 달랐다.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남들과 다르게 살려고 하는 것이나 기적을 행하려 하는 것, 그럼으로써 후세가 자기에 대해 말할 거리가 있게 하려는 것이야말로, 내가 가장 삼가는 것이다!”    

바로 그런 관점에서 “군자의 사귐은 물과 같고, 소인과의 사귐은 단술과 같다”는 교훈도 나온다. 남에게 잘 보이려 할 뿐인 소인과 달리 군자는 말보다 행동을 중요시하며 말을 행동으로 뒷받침할 수 없을 때에는 남을 위하는 척하지 않는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담백함’이 시(詩)․서(書)․화(畵)를 평가하는 기준일 뿐만 아니라 인재의 자질을 판단하는 잣대이기도 했다는 점이다. “대체로 사람의 재질에서 가장 높이 평가되는 것은 균형과 조화이다. 그런데 성격이 균형 잡히고 조화롭기 위해서는 반드시 평범하고 담백하며 아무런 맛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 그 이유다. 때문에 어떤 사람을 판단할 때는 평범함과 담백함이란 자질을 먼저 고려한 후에야 그가 총명한지 따졌다. 한 가지 덕목에만 빠지지 않아야 모든 덕을 지닐 수 있고, 또 그래야지만 공직생활에서 부닥치게 되는 가변적 상황에 적절하게 대처할 수 있으리라고 본 것이다.  

그런 시각에 공감하게 되면 “완벽한 성격에는 이렇다 할 성격이 없으며, 충만함은 곧 평범함이다.”란 말도 더 이상 역설이 아니다. 왜 그런가? 모든 자질을 고루 갖춘 사람이라면 어떤 특징도 다른 특징보다 두드러지지 않을 것이므로 그의 사람됨은 남 보기에 특기할 만한 점이 없을 테니까. 마찬가지로, 저자의 ‘무미한’ <무미예찬>을 특기할 만할 것이 없는 책이라고 평한다면 최고의 칭찬이 될 것이다.  

10. 03. 05. 

 

P.S. 개인적으론 프랑수아 줄리앙의 책을 접한 지는 몇 년 됐다. <운행과 창조>(케이시, 2003)란 책을 도서관에서 발견하고 그의 다른 책들을 바로 검색하여 <불가능한 누드>(2007)란 책의 출간을 한 출판사에 제안한 바도 있다(이 책이 나의 첫 소장품이다). 나는 <무미예찬>이 번역된다는 소식을 듣고 한동안은 <불가능한 누드>가 나오는 걸로 혼동하고 있었다. 제목은 선정적일지 몰라도 중국 미술에 대한 책이다. 그의 최신간 또한 중국 미술을 다룬 <위대한 이미지에는 형태가 없다>(2009)이다. 이 두 권 정도는 더 번역되도 좋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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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05 17:5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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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05 23:2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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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빛, 내 허리의 불꽃"
안나 카레니나와 비인칭적 열정

저녁강의가 있어서 늦게 귀가해보니 식탁에 이번달 <출판저널>(3월호)이 놓여 있다. 원래는 지난달에 실렸어야 할 '로쟈가 읽은 책 속의 한 장면' 원고가 한달 늦춰졌고, 이번이 마지막 글이 됐다. 나대로의 '이어 읽기'로 나보코프의 <롤리타>를 다루고 있는데, 4월호 원고까지 썼더라면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이 이어질 참이었다. 그래도 원고 부담이 하나 줄어서 다행이다. 참고로, 서두에서 언급한 나코보프의 <안나 카레니나>론은 범우사판 <안나 카레니나>에 일부 발췌 수록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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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저널(10년 3월호) 내 인생의 빛, 내 허리의 불꽃, 나의 죄, 나의 영혼 롤-리-타! 

톨스토이의 열렬한 예찬자로 러시아의 망명작가 나보코프를 빼놓을 수 없다. 러시아문학의 선구자인 푸슈킨과 레르몬토프를 제쳐놓는다는 단서를 달고서, 그가 꼽은 가장 위대한 러시아 작가는 1위가 톨스토이, 2위가 고골, 3위는 체호프, 그리고 4위가 투르게네프 순이다. 무슨 학교 석차 같은 인상을 주지만 도스토예프스키와 살티코프가 교무실로 찾아와 항의하더라도 하는 수 없다고 말한다(그는 도스토예프스키를 이류작가로 평가 절하한다).   

그럼 나보코프가 생각하는 톨스토이의 걸작은 무엇인가? 당연히 <안나 카레니나>이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가장 위대한 단편소설로 덧붙여 거명하고는 있지만, <안나 카레니나>에 대한 나보코프의 예우는 파격적이다. 고골부터 고리키까지 여섯 명의 러시아 작가와 그 대표작을 다룬 <러시아문학 강의>에서 그가 <안나 카레니나> 해설에 할애한 분량이 전체의 1/3이나 될 정도다. 하지만 이런 선택이 나보코프의 독단은 아니다. 지난 2007년 영어권의 대표적 현역 작가들이 뽑은 최고의 문학작품으로도 <안나 카레니나>가 선정됐기 때문이다. 2위는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였으며, 3위는 다시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그리고 4위가 나보코프의 <롤리타>였다. 이 정도 순위라면 나보코프도 유감스럽지는 않았을 법하다.  

<롤리타>의 작가는 어떤 이유에서 <안나 카레니나>를 높이 평가했을까? 사실 그가 정리한 작품의 도덕적 ‘메시지’는 상식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레빈과 키치의 결혼이 육체적 사랑뿐만 아니라 형이상학적인 사랑, 그리고 자기희생과 상호존중에 기반하고 있는데 반해서 안나와 브론스키의 관계는 오직 육체적 사랑에만 기초하고 있으며 바로 거기에 파국이 깃들어 있다고 나보코프는 지적한다. 육체적 사랑에만 한정되면 사랑은 불가불 이기적인 형태로 귀결되며 창조 대신에 파멸을 초래한다는 것이 톨스토이의 교훈이다. 그리고 “이 핵심을 예술적으로 가능한 한 명확하게 제시하기 위해서 톨스토이는 비범한 형상의 흐름 속에서 안나-브론스키 커플의 육체적 사랑과 레빈-키치 커플의 진정한 기독교적 사랑을 생생하게 대조시켰다”는 것이 나보코프의 평가다.   

그런 ‘메시지’의 차원에서 보자면, 사실 <롤리타>는 <안나 카레니나>와는 대척점에 놓인 작품이다. 물론 <롤리타>도 도덕적 교훈을 전달하려는 모양새는 갖추고 있다. 살인 혐의로 체포돼 재판을 받던 ‘험버트 험버트’가 관상동맥 혈전증으로 사망하기 직전에 남긴 원고를 출간하면서 쓴 서문에서 편집자인 존 레이 주니어 박사는 이 작품이 과학적 중요성과 문학적 가치를 가질 뿐더러 “우리에게 더 중요한 것은 그 책이 진지한 독자에게 끼칠 윤리적 영향력이다”라고 일러주고 있으니까. 하지만 존 레이 박사가 가상의 인물일 뿐만 아니라, 문학작품을 윤리적 잣대로 재단하는 입장이야말로 나보코프에겐 언제나 통렬한 조롱의 대상이었다. 때문에 “<롤리타>는 우리 모두가 한층 조심스럽게 더 큰 비전으로 더 나은 세대를 더 안전한 세상에서 키워내도록 경종을 울릴 것이다.”란 서문의 마지막 문장은 작가의 아주 짓궂은 아이러니로 읽어야 한다.   

하지만 이 아이러니는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고, 순진한 독자들에게 존 레이는 작가인 나보코프와 동일시되었다. 그들은 ‘저자의 목적은 무엇인가’를 질문했고, 작품의 ‘메시지’를 끄집어내기 위해 애썼다. 또 작품에서 ‘도덕적 경종’을 찾지 못한 이들은 작가를 비난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바보 같은 비난’을 보다 못한 나보코프는 ‘<롤리타>라고 제목이 붙은 책에 관하여’란 작가의 말을 후기로 붙였다. 그로선 아주 예외적인 일이다. “어느 나라나, 사회계급 또는 저자에 관해 알기 위해서 소설을 읽는 것은 유치한 일”이라는 것이 나보코프가 독자들에게 던진 일갈이다.   

나보코프는 어떤 작가였던가? 그 자신에게서 정의를 찾자면, “나는 책을 쓰기 시작할 때 이 책을 끝내버리겠다는 것 외에 달리 생각이 없는 그런 작가이다.” 그런 의사를 존중하자면, “롤리타, 내 인생의 빛, 내 허리의 불꽃, 나의 죄, 나의 영혼. 롤-리-타. 혀끝이 입천장을  세 단계로 톡톡 치며 내려오면서 세 번째에는 이빨에 가닿는 여정. 롤. 리. 타.”라고 시작한 소설을 마무리하는 <롤리타>의 마지막 문장들은 주의 깊게 음미할 필요가 있다. 작가는 이렇게 끝냈다.  

“그리고 클레어 큐를 동정하지 말아라. 사람은 그와 험버트 험버트 사이에서 어느 쪽을 선택해야만 했고, 또 험버트가 몇 달이라도 더 살기를 원했다. 그렇게 해야 험버트가 너를 후세 사람들의 마음속에 심어놓을 게 아니냐. 나는 들소와 천사들, 오래가는 그림물감의 비밀, 예언적인 소네트, 그리고 예술이라는 피난처를 생각한다. 그리고 이것이 너와 내가 나눌 수 있는 단 하나의 불명성이란다, 나의 롤리타.” 

‘롤리타’란 이름의 호명에서 시작된 소설은 ‘나의 롤리타’를 다시 호명하는 것으로 끝난다. 그리고 이 여정에 불멸성을 부여하는 것이 바로 ‘예술이라는 피난처’이다. 그런데, 그 ‘피난처’는 누가 창조한 것인가? 험버트의 수기로 돼 있지만, 험버트는 ‘나’라는 1인칭으로도, ‘험버트’라는 3인칭으로도 불린다. 그것은 이 작품에서 험버트 험버트가 작가이자 동시에 주인공이기도 하다는 걸 암시한다. 저자 행세를 하고 또 저자를 참칭하지만, 그는 한갓 꼭두각시이자 허수아비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누가 진정한 저자이고 신인가? 험버트가 자기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또 다른 허수아비, 곧 유사 작가인 클레어 킬티보다 몇 달 더 살게 만든 ‘사람(One)’, 바로 숨겨진 저자 나보코프다. 그렇듯 나보코프는 등장하지 않으면서도 이 작품에 자신의 인장(印章)을 새겨 넣는다.   

<안나 카레니나>를 끝낸 이후에 소설 쓰기를 중단한 지 오래인 톨스토이가 만년의 어느 울적한 날 아무 책이나 한 권 꺼내들고 중간부터 읽기 시작했다. 너무나 재미있어서 표지를 보았더니 자신이 쓴 <안나 카레니나>였다고. 자신의 작품과도 멀어진 불우한 톨스토이를 보여주는 에피소드일까? 정반대다. 톨스토이가 진정한 예술가이자 그 자신이 곧 예술이었다는 걸 웅변해주는 에피소드이다. 나보코프는 자신이 좋아하는 이 에피소드의 톨스토이이고자 했다. 

10. 03. 04.   

P.S. <롤리타>의 영어본과 러시아어본을 자세하게 비교해서 읽어볼 기회가 생겼는데, 나중에 보다 본격적인 <롤리타>론도 쓰게 되면 좋겠다. 아래는 러시아어 문고본의 표지다...    

Обложка Набоков В. Азб.(К) Набоков Лолита. (м/о)до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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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3-04 0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강의 중에 안건데 선생님 기억력이 엄청나다는 걸 알았어요^^ 일주일을 행복하게 해 줄 멋진 강의 잘 들었어요.. 오래 오래 이어졌으면 좋겠는데...

그런데 롤리타가 멋진 가요? 선생님이 몰입하시는 것 같네..

로쟈 2010-03-05 00:42   좋아요 0 | URL
흠, 기억력이 엄청나다는 사실은 저도 처음 알게 되네요.^^; 강의가 재미있으셨다니 다행입니다. 몇 분씩은 재미있어 합니다.^^

2010-03-04 09: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3-05 00: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3-04 13: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3-05 00: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중지성의 정원(다지원)의 제안에 따라 '레닌 재장전하기'란 기획강좌에 참여하게 됐다. 빌미가 된 건 물론 <레닌 재장전>(마티, 2010)의 출간이며 공동 번역자 가운데 다섯 명이 강사로 참여하고(알라디너 람혼님도 포함돼 있다), 조정환, 정남영 선생이 '네그리의 레닌'과 '루카치의 레닌'을 보충한다. 관심있으신 분들은 둘러보시길 바란다(http://daziwon.net/second_2010/10489).    

[기획] 레닌 재장전하기 

강사  조정환, 이현우, 한보희, 정병선, 최정우, 정은경, 정남영
개강  2010년 3월 29일부터 매주 월요일 저녁 7시30분 (7강, 91,000원)

강좌취지

최근 알랭 바디우, 슬라보예 지젝, 프레드릭 제임슨, 테리 이글턴, 토니 네그리 등 세계에서 손꼽히는 비판적 지식인들의 레닌에 대한 해석을 모은 책 『레닌 재장전』(마티, 2010)이 출간되었다. 저자들은 어떻게 레닌이란 이름으로 모이게 되었을까? 레닌이 오늘날 우리에게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이는 곧 우리 시대에는 어떠한 혁명이 가능한가를 묻는 일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2010년 2분학기, 레닌을 재장전하고, 새로운 사유와 세계의 가능성을 함께 모색해 보자.

1강  네그리의 레닌_강사 조정환 [2010 년 3월 29일] 

2강  레닌주의적 제스처와 포퓰리즘_강사 이현우 [2010 년 4월 5일]  

3강  레닌과 변증법의 프락시스(Praxis) _강사 한보희 [2010년 4월 12일] 

4강  캘리니코스의 레닌주의: 21세기의 사회주의_강사 정병선 [2010년 4월 19일] 

5강  레닌 주위의 레닌주의(들) - 포스트모던과 정치적인 것 [2010년 4월 26일]   

6강  『무엇을 할 것인가?』 에서 자생성(stikhiinyi)개념의 쟁점_강사 정은경 [2010년 5월 3일] 

7강  루카치의 레닌_강사 정남영 [2010년 5월 10일]

참고문헌

* 『레닌 재장전』, 다니엘 벤사이드 외 지음, 이현우 외 옮김, 마티,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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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가게재습격 2010-03-02 23:24   좋아요 0 | URL
도서관에서 책을 한 번 들춰본적이 있는데요. 어휴...너무 어려워서 더 읽을 엄두가 안 나더군요. 강의라면 표면적이나마 책을 이해하고 가야 건질(?)수 있는게 많을 텐데, 책에서부터 주눅이 드니 감당이 안 됩니다. 건강하시죠?^^ (괜히 댓글을 달아 초를 친듯한 느낌이...후덜덜합니다.^^;;)

로쟈 2010-03-02 23:37   좋아요 0 | URL
비교적 쉬운 글들도 있습니다. 바디우부터 읽으신 건가요? 캘리니코스나 이글턴, 지젝 등은 어렵지 않습니다...

빵가게재습격 2010-03-10 01:29   좋아요 0 | URL
가물가물한데요. 알랭 바디우가 맞는 것 같습니다...--;;;

2010-03-03 03: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3-03 08: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철학자 강신주의 <철학 VS 철학>(그린비, 2010)은 '3월의 읽을 만한 책'으로 꼽아놓기도 했고 알라딘에서야 따로 소개가 필요없지만, 저자 인터뷰기사를 자료삼아 스크랩해놓는다. '우리 몸에 맞는 철학'이란 문제의식을 저자는 강조하고 있다.   

경향신문(10. 03. 02) “동서양철학도 우리 몸에 맞아야”  

소장 철학자 강신주씨(43)는 철학자이면서도 적지 않은 ‘팬’을 확보하고 있다. 대학에서의 공식 직급은 ‘시간강사’이지만 강단에 얽매이지 않는다. 대중의 눈높이에 맞춘 강연, 동서양 철학사상을 끌어다가 일상의 현실에 대입시킨 저술로 그는 인문학, 특히 철학에 관심있는 독자들에겐 꽤나 유명한 저술가다.

 

강씨가 최근 ‘동서양 철학의 모든 것’이라는 대담한 부제가 달린 <철학 vs 철학>(그린비출판사)을 출간했다. 단독 저서로는 14번째의 책이다. 이 책은 본문만 820여쪽, 인명사전·개념어사전·더 읽을 책 등 부록을 합하면 900쪽이 넘는다.   

철학사의 고전 요한네스 힐쉬베르거의 <서양철학사>, 펑유란(馮友蘭)의 <중국철학사>를 서가에서 밀쳐버린다는 목표에서 출발한 <철학 vs 철학>은 구성부터가 독특하다. 1부 서양편, 2부 동양편으로 나누어 사물의 본질·행복·사유재산·사랑·언어·윤리·깨달음 등 56개 주제를 세우고, 해당 주제에 서로 대립적인 시각을 보인 동서양 철학자 112명을 등장시켰다. 각 장은 해당 주제에 대한 문제 제기에 이어 2명의 철학자를 소개하고, 마지막에는 강씨의 해설과 비평으로 구성돼 있다. 그래서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도 되고, 끌리는 주제부터 뽑아서 읽어도 된다.

철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한 지난 20년 동안의 모든 것을 이 책에 쏟아부었다는 강씨. 지난달 26일 그가 기획위원으로 일하고 있는 출판기획집단 ‘문사철(文史哲)’ 사무실에서 만난 강씨는 두 눈이 빨갛게 충혈돼 있었다. “개념어사전을 만드느라고 20일 동안 컴퓨터에 매달려 있었더니 탈이 나고 말았습니다. 안과에 갔더니 결막염이라고 하더라고요.”

한국의 철학계에 던져지는 비판 가운데 흔한 것이 저자는 없고, 평론가·수입상만 넘쳐난다는 것이다. 강씨 역시 그 비판에 동조했다. “외국의 사상을 수입하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닙니다. 그러나 옷을 수입한다면 긴 곳은 자르고, 짧은 곳은 이어서 우리 몸에 맞게 해야 하는데 선배들은 긴 옷을 그대로 입고 다녔어요. 오히려 옷을 건드리면 안된다고 했죠.”

강씨는 <철학 vs 철학> 역시 “평론가적 글쓰기의 완결판”이라고 했다. 하지만 20년 공부의 매듭을 짓고 새로운 공부의 출발점으로 삼은 이 책에서 동서양 철학을 ‘우리의 것’으로 재창조하는 가능성을 탐색했다. “신채호 선생이 ‘석가가 들어오면 조선의 석가가 되지 않고 석가의 조선이 되며, 공자가 들어오면 조선의 공자가 되지 않고 공자의 조선이 된다’고 개탄한 적이 있습니다. 이 말을 빌리자면 서양철학 혹은 서양철학의 우리가 아니라 우리의 서양철학 혹은 우리의 동양철학이 되어야 합니다.”

강씨는 이것이 실제로 가능하다고 강조한다. 오히려 철학의 주변부에서 살아온 우리만이 할 수 있는 작업이라고 했다. 강씨는 책의 서두에 “우리는 서양철학의 중심지도 아니고 동양철학의 중심지도 아닌 제3의 공간에서 살아왔다. 이런 악조건이야말로 우리에게 더없이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제3의 시선으로 인류의 철학사를 다시 조망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라고 썼다.

강씨가 강조하는 또 다른 하나는 자유와 희망, 미래에 대한 비전을 심어주고 삶에 변화를 가져다 줄 수 있는 철학이다. “철학은 인간에게 미래와 희망을 심어주는 부류와 우울하고 체념하게 만드는 부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양쪽을 모두 보여주고 그들로 하여금 논쟁을 하도록 함으로써 전자를 제 위치에 복원시키고자 했습니다.”

책을 집필하는 동안엔 사흘 글을 쓰고 하루는 등산을 한다는 강씨는 “<철학 vs 철학>의 에필로그까지 쓰고 나니 허탈감과 함께 ‘이제 뭘하지?’ 하는 두려움이 들었다”고 말했다. 엄살이 섞여 있는 듯했다. 그의 머리와 몸은 이미 올 여름 1차분이 출간될 <제자백가> 시리즈로 옮아가고 있었다.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사상가들을 12권으로 총망라하는 큰 작업이다.(김재중기자) 

10. 03. 01. 

 

P.S. 저자의 책이 14권이라고 하는데, 내가 둘러본 건 절반쯤 되는 듯싶다. 제일 처음 읽은 건 <노자: 국가의 발견과 제국의 형이상학>(태학사, 2004)으로 저자가 장자 철학 전공이며 대단히 활달한 문제의식과 문체를 갖고 있다는 걸 알았다(속되게 말하면 그는 '장(자)빠'이고 '노(자)까'이다). 연이어 읽은 게 <장자 & 노자>(김영사, 2006)이고, <장자, 차이를 횡단하는 즐거운 모험>(그린비, 2007)은 출판사의 의뢰로 출간 이전에 읽어본 기억이 있다.  

 

저자는 <공자 & 맹자>(김영사, 2006), <회남자 & 황제내경>(김영사, 2007) 등의 책도 썼는데, 두 사람을 대조시키는 아이템은 이 시리즈를 쓰면서 착안한 것이 아닐까 싶다. 전환점이 아니었을까 싶은 책은 <철학, 삶을 만나다>(이학사, 2006)이다. 평이한 제목 때문에 별로 주목하지 않다가 나는 나중에야 장서에 포함시키게 됐다.  

 

실제로 <철학, 삶을 만나다>란 저작 자체가 대중 강의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듣기에 저자는 대학 바깥에서 오히려 더 유명한 철학자이다. 그런 강의와 연계하여 낸 책들이 <상처받지 않을 권리>(프로네시스, 2009), <철학적 시읽기의 즐거움>(동녘, 2010) 등으로 계속 이어지고 있다. 이달에도 그의 강의는 아트앤스터디 인문숲(http://www.artnstudy.com/inmoonsoop/Lecture/default1003.asp?lessonidx=off_sjooKang02) 등에서 접할 수 있다. <제자백가> 시리즈의 일부도 포함하고 있는 강의인 듯하다.  

P.S.2. 한편, 인터뷰 내용에서 흥미를 끌면서 핵심적인 대목이라 생각되는 것은 이런 주장이다.   

"우리는 서양철학의 중심지도 아니고 동양철학의 중심지도 아닌 제3의 공간에서 살아왔다. 이런 악조건이야말로 우리에게 더없이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제3의 시선으로 인류의 철학사를 다시 조망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서양철학도 아니고 동양철학도 아닌 '제3의 공간'과 '제3의 시선'이 과연 가능한지, '서양철학' '동양철학'이란 이분법이 유지될 수 있으며 실체가 있는 것인지 의문이지만 여하튼 저자의 작업구도는 그러하다. 그리고 이것은 짐작에 연세대 철학과의 스승인 박동환의 계보를 따른 것이다. 박동환 교수는 단촐하게도 <안티호모에렉투스>(길, 2001), <동양의 논리는 어디에 있는가>(고려원, 1993), <서양의 논리, 동양의 마음>(까치, 1987) 등 세 권의 저서만을 남겼는데, 읽은 지 오래됐지만 나로선 서양/동양, 논리/마음이라는 이분법이 투박하게 여겨졌고, <안티호모에렉투스>에서 주창하는 '3표이론'이 괴이하게 생각됐다.  

하지만 <철학적 시읽기의 즐거움>을 보면 저자는 21명의 한국 시인들과 짝지은 철학자들 가운데 한국인으로는 '오직 박동환 한 명'만을 포함시키고 있다! 한국인으로서 20세기에 철학자라고 할 만한 사람이라곤 박동환 한 명뿐이라는 뜻도 된다(<철학 VS 철학>의 마지막 장은 '한국에서 철학은 가능한가?'란 주제로 '박종홍과 박동환'을 대질시킨다. 박종홍은 소위 '서울대 철학'의 태두다). 이를 '입증'하듯 <안티호모에렉투스>에서 한 대목을 인용했다.  

서양철학에 대해서도 동양철학에 대해서도 한국 사람은 다만 관망하고 모방할 뿐인 그래서 만들지 못하는 주변의 제삼자다. 오늘 벌어지는 현대 철학자들 사이의 논쟁은 주변에 놓인 자에게는 구경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주변에 놓인 자는 일시적으로 실현된 패권의 진리가 아니라 그것이 모두 무너져 흩어진 다음에도 남아 있을 원자의 진리를 구한다. 패권의 진리를 거부하는 그는 생명의 원자, 다름 아닌 모나드 곧 생명 개체의 깊이에 새겨진 억 년의 경험과 기억을 감각에 다가오는 영원의 접점, 현재에서  재현한다.

철학에서 한국인은 제삼자이고 주변인이다, 그는 패권의 진리를 거부한다, 정도가  내가 읽을 수 있는 문장이고 나머지는 요령부득이다. 이 정도면 나는 철학의 경지를 넘어선다고 생각한다. 저자의 풀이는 이렇다.  

"박동환은 한국인이 항상 주변에 놓여 있는 제3자였다고 이야기합니다. 그에 따르면 동양철학을 대표하는 중국철학이 한반도에 들어왔을 때 한국인은 그것을 관망하고 모방할 뿐이었습니다.(...)그렇지만 박동환은 중국철학과 서양철학에 대한 한국인의 태도 이면에는 더 심오한 것이 있었다고 강조합니다. 일시적으로 번갈아가며 패권을 잡은 역사적 진리들이 아니라 영원히 지속될 생명의 논리를 한국인들이 따라왔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기서 박동환은 한국인이 가진 집요한 생명력의 기원을 찾습니다. 모든 도시의 철학, 모든 문명의 패권이 소멸해도 한국인은 도시 바깥의 논리, 즉 생명체가 가진 근원적인 삶의 논리를 체현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서양철학과 동양철학으로 대변되는 도시의 논리는 문명이 붕괴되었을 때 꿈처럼 사라질 것입니다. 그렇지만 박동환에 따르면 한국인의 삶과 사유 속에 흐르는 생명의 논리는 문명이 붕괴되어도 유지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410쪽) 

'철학적 시읽기'란 타이틀에 걸맞게 시적인 문장으로 구성돼 있지만 나로선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이다(나는 한국인이 아닌가?). 열심히 등산을 하여 저자와 같은 수준의 '고도감'을 확보하기 전까지는 아마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역시나 연세대 철학과를 나온 김상봉 교수 또한 <나르시스의 꿈>(한길사, 2002)에서 20세기의 한국인 철학자로 함석헌과 함께 박동환을 꼽은 바 있다. 철학자 박동환에 대해 호의적인 편인데, 그럼에도 <안티호모에렉투스>에 대해선 신랄하게 비판한 바 있다. 오래 전 기사를 옮겨놓는다. 제삼자이자 구경꾼의 눈으로 보기에 철학자들의 세계는 오묘하고도 오묘하다...   

교수신문(02. 06. 03) 철학자들의 논쟁이 아름다운 『안티호모에렉투스』

작년 초반에 아무런 장식도 없고 저자의 이름도 밝히지 않은 ‘안티호모에렉투스’라는 철학책이 발간됐다. 저자는 박동환 전 연세대 교수(철학)로 저자가 바라보는 독특한 개념의 철학사가 집약된 책이다. 지금 이 책이 잔잔한 화제를 낳고 있다. 아니 화제라기보다, 이 책을 둘러싼 팽팽한 긴장의 광경을 연출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적절할 것 같다. 지난 22일 문예 아카데미에서 박동환 교수와 김상봉 교수가 바로 이 책 ‘안티호모에렉투스’를 놓고 열띤 논쟁을 벌였다. 박 교수의 저작에 김상봉 교수가 날카로운 비판을 가한 것.

3표 이론으로 정리한 세계 철학사
박 교수 스스로 정립한 평생의 철학적 물음은 과연 동양(철학)은 서양(철학)과 다른 논리구조를 갖고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집약될 수 있다. 서양철학과는 다른 동양의 논리구조가 무엇인지, 더 나아가 중국철학과도 다른 한국인의 사유구조가 무엇인지 밝히는 것이 평생의 과제였던 것이다. 박 교수는 이런 사유를 집약해 ‘3표’라는 독특한 개념으로 세계 철학사를 재규정했다. 여기서 ‘표’란 한 문화에서 “명백한 지향의 표적 또는 탐구의 공통 준거가 되는 것”을 말한다.

거칠게 3표 이론을 요약하자면, ‘1표’는 고대 그리스에 샘을 두고 있는 서양철학을 ‘2표’는 고대 중국에서 연원한 중국철학을, ‘3표’는 “철학사 없는” 유럽과 중국 이외의 지역 사람들의 사유를 의미한다. 그에 따르면 서양문명의 모임살이의 형식은 ‘正體爭議’이며, 중국철학의 그것은 ‘集體不爭’이다. 정체쟁의란 동일성을 보존하고 모순을 배제함으로써 존재의 자기 일관성과 동일성을 보존한다는 것이고, 이것이 서양철학의 근본 기반이 된다. 집체부쟁이란 동일성의 원리와 반대로 모든 개별자의 존재 의미가 개체가 놓여 있는 배경인 “분리 불가능한 집체 관계” 속에서 규정된다는 것이다. 저자는 바로 이런 개념 규정을 통해 동일성의 법칙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호모에렉투스’라 불리는 고생인류가 등장한 시기부터 이미 인간의 의식 속에 자리 잡았다고 주장한다. 이쯤 되면 이 책의 낯선 제목도 이해가 될 듯 하다.

박 교수의 論究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이런 철학과는 다른 한국의 철학을 개념화하고자 한다. 한국 철학은 3표로 분류되는데, 여기서 3표의 존재방식은 바로 ‘붙음살이’이다. 이는 자연생태의 존재방식으로 이들에게는 해답의 논리는 없으나 ‘물음의 논리’가 있다. 세계를 동일성의 법칙이나 相反常性의 논리로써 파악하는 대신 이들은 세계를 하나의 암호상자로 이해하면서 끊임없이 그 “암호상자로부터 오는 신호음에 귀를 기울인다.” 철학이 일찍 성립한 서양 혹은 중국과는 다르지만, 그 이외 사람들에게도 삶의 양식이나 삶의 전략이 있다는 것이다. 그에게 철학이란 ‘생명형태’의 한 가지일 뿐임을 알 수 있다.  



양심과 절망 사이의 긴장 부재
김상봉 교수 역시 우리들 자신이 누구인가를 탐구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이고 또 그를 위해서는 우리와 타자의 차이를 밝혀야 한다는 점에는 박 교수와 견해를 일치한다. 그러나 박 교수의 논의에 대해 “주체의 개념을 무책임하게 포기했고, 타자의 개념에 문제가 있다”라고 비판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안티호모에렉투스’의 문제는 주체뿐 아니라 타자도 없다는 데 있다는 것. 이런 문제 때문에 우리 삶의 양식을 도시 문명 밖에 두는 비약을 범했고, 비판의 대상으로 떠오른 인간의 자기중심주의가 ‘왜’ 문제임을 말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김 교수의 문제제기는 더욱 근본적인 곳을 향한다. “박 교수의 이전 사유에는 ‘절망의 철학’과 ‘양심의 논리’가 조화와 균형을 이루고 있었으나, ‘안티호모에렉투스’에는 더 이상 양심과 절망 사이의 긴장된 균형이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서는 오직 절망의 의식만이 과도하게 극단화돼 있고, 양심은 자연적 필연성에 짓눌린 절망의 의식 아래서 철저히 침묵하고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저자에게서 실천적인 측면이 사라지고 형식적인 논의만 남는 것이 아니가하는 우려다.

이런 논평자의 해석에 대해 박 교수는 3표에서 발생하는 타자 이해방식을 친절하게 다시금 설명했다. “3표의 타자 대응 또는 방식은 생명의 고유한 탐구 활동에서 일어나는 것”이며, “개체들은 그 출연 시점으로부터 지금까지 그의 운명을 결정하는 힘, 타자에 대해 도전하며 그것을 통제하려는 노력을 했지만, 근본적으로 대결할 수 없고 통제할 수 없으며 인식할 수 없는 힘 [ ]으로서 받아 들인다.” 즉 3표에 타자 인식이 없다는 것은 잘못된 비판이라는 설명이다. 인간 삶의 실천적인 측면을 결코 간과하고 있지 않다는 대답도 저자는 빠뜨리지 않았다. 저자인 박 교수는 윤리·도덕의 실천에 앞서 현상을 있는 그대로 분석하려는 시도를 앞세웠던 것으로 보인다. 객관적이고 비판적인 개념화 작업을 우선하고 그 이후 실천적인 부분을 논의해야 한다는 것이 박 교수의 입장이다.

철학 뿐 아니라 모든 학문에서 학문의 실천적 책임과 이론화 작업의 간극은 주요한 화두로 인식돼 왔다. 박동환 교수와 김상봉 교수의 논쟁도 이런 측면에서 그 맥락을 같이 하고 있다. 덧붙인다면, 퇴임 선배 철학자가 세대와 위계를 뛰어넘어 젊은 철학자의 비판을 겸허하게 수용하면서, 자기 물음을 발전시켜나가는 이 광경이 우리 학계의 논쟁 문화를 한 계단 더 성숙하게 만드는데 ‘아름다운’ 기여를 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지속적인 논쟁을 통해 자기 사유의 주름을 다듬겠다고 밝힌 박 교수가 앞으로 어떤 방식으로 논의를 재구성할 것인지 궁금하다.(이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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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고세운닥나무 2010-03-02 0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동환은 근래 <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을 보며 알게 됐는데,문장의 난삽함이 요설의 지경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는 현대한국철학사를 말할 때 김영민과 그의 스승인 윤노빈을 꼽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윤노빈의 저서가 그의 기구한 인생 때문에 한 권만 우리에게 남아있지만 그 책이 주는 무게감은 소홀히 여길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연세대 철학과 출신들에 너무 후한 점수를 주는 것 같기도 하구요. 위 책에서 김상환 교수를 격찬하던데, 김상환도 연세대 출신이죠.

로쟈 2010-03-02 23:03   좋아요 0 | URL
기회가 되면 한번 읽어봐야겠군요. 김상환 교수의 책은 저도 좋아합니다...

비로그인 2010-03-02 0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경제쪽에 우석훈이 있다면 철학쪽엔 강신주라고 해야겠네요. 그 다산성은 정말 오묘합니다. 제가 아는 로쟈님 광팬이 문학쪽에서 로쟈님도 제몫하시길 바란다네요. 후끈한 찜질방 열기만 못해도 끈끈하게 성원을 보탠다고.

로쟈 2010-03-02 23:10   좋아요 0 | URL
끈끈한 압력 같은데요.^^;

mirror 2010-03-02 07: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국 철학계의 문제는 수입상과 평론가들만 넘쳐나기 때문이 아닙니다. 수입과 평론조차도 제대로 못해왔기 때문에 문제인 것입니다. 게으른 학자들은 아예 공부를 안 하고, 좀 부지런하고 재주가 있는 학자들은 한가지 분야에 천착할 생각을 하지 않고, 대가인양 여러가지 잡다하게 건들다가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한 것이 지금까지의 상황이었습니다. 90년대 이후에서야 기본에 충실하는 학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죠. 이것은 철학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닐 것입니다. 거의 모든 인문사회과학들이 다 그러하죠. 우리는 이제서야 기본을 조금이나마 따라가고 있는데, 박종현 선생의 플라톤 번역이라던가, 백종현 교수의 칸트 번역이 그런 실례들입니다. 고전들의 번역조차 제대로 안 되어 있는데, 무슨 독창적 철학입니까? 아마도 동양철학의 번역이 서양철학의 번역보다 상황이 더 낫다고는 말 못할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동서양 철학을 통합한다고요? 희망과 미래를 주는 철학이라고요? 아마추어 문필가들이나 하는 소리들입니다. 대중들을 상대로 글을 쓰는 사람은 그에 맞게 말하면 됩니다. 대중용 작가가 대가인양 떠벌이는 것은 과대광고입니다. 김용옥의 과오는 대중작가이자 엔터테이너로서의 본분을 망각하고 자신이 아주 대단한 철학자인양 과대광고를 했다는데 있습니다. 김용옥처럼 동양철학자들은 가끔 망상에 빠지는 것이 특기인가 봅니다. 자신의 본분에 맞는 광고멘트를 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리고 박동환 교수는 연대교수였고, 김상봉 교수도 연대에서 학부 석사까지 했습니다. 당연히 재학 당시 박동환은 연대 교수였죠.
박정희와 전두환의 우리식 민주주의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김일성의 우리식 사회주의라는 것도 있었고, 지금도 현재진행형입니다. '우리식'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것 중 긍정적 평가받는 것이 있나요? 특히 이념이나 제도 중 그런 것이 있기나 합니까? 기술적으로 우리 상황에 맞추는 것 이외에 이념이나 제도를 우리식이라는 서술어를 붙여서 수정한 것은 대개 부정적인 결과만을 낳았습니다. 계파 보스 몇몇이 모여서 총리를 결정하는 일본식 민주주의란 열등한 민주주의 형태일 뿐, 서구식 민주주의에 대한 대안이 되지 못했습니다.
'우리식' 철학이라는 것이 왜 있어야 하나요? 기원 다시 말해 '원조'라는 것에 광적인 집착을 보이는 것은 한국사람들 특징인데, 이것은 부정적인 결과는 낳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철학에서 우리식 찾는 것은 반도체와 자동차에서 다른 나라를 앞지르듯이 다른 나라에서 그런 상품 내놓으니까, 우리도 내놓아야 한다는 경쟁논리까지 더해진 것 같아, 더욱 괴이합니다. 철학과 이념에서마저 우리식을 즐겨찾는 이 집착의 끝이 무엇이 될지 참으로 걱정입니다.

로쟈 2010-03-02 23:14   좋아요 0 | URL
저는 철학 문필가의 대중적 글쓰기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백종현 교수의 말대로 전문철학은 '소수'가 하는 것이니까요. 다만, 대단한 '한국철학'이 가능할 것처럼 자부심을 가질 만한 단계인가에 대해서는 회의적입니다. 일단 '한국어'가 그러한 철학적 사유를 감당할 수 있는지, 그런 한국어를 우리가 갖고 있는지 의문이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