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빛, 내 허리의 불꽃"
안나 카레니나와 비인칭적 열정
저녁강의가 있어서 늦게 귀가해보니 식탁에 이번달 <출판저널>(3월호)이 놓여 있다. 원래는 지난달에 실렸어야 할 '로쟈가 읽은 책 속의 한 장면' 원고가 한달 늦춰졌고, 이번이 마지막 글이 됐다. 나대로의 '이어 읽기'로 나보코프의 <롤리타>를 다루고 있는데, 4월호 원고까지 썼더라면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이 이어질 참이었다. 그래도 원고 부담이 하나 줄어서 다행이다. 참고로, 서두에서 언급한 나코보프의 <안나 카레니나>론은 범우사판 <안나 카레니나>에 일부 발췌 수록돼 있다.
출판저널(10년 3월호) 내 인생의 빛, 내 허리의 불꽃, 나의 죄, 나의 영혼 롤-리-타!
톨스토이의 열렬한 예찬자로 러시아의 망명작가 나보코프를 빼놓을 수 없다. 러시아문학의 선구자인 푸슈킨과 레르몬토프를 제쳐놓는다는 단서를 달고서, 그가 꼽은 가장 위대한 러시아 작가는 1위가 톨스토이, 2위가 고골, 3위는 체호프, 그리고 4위가 투르게네프 순이다. 무슨 학교 석차 같은 인상을 주지만 도스토예프스키와 살티코프가 교무실로 찾아와 항의하더라도 하는 수 없다고 말한다(그는 도스토예프스키를 이류작가로 평가 절하한다).
그럼 나보코프가 생각하는 톨스토이의 걸작은 무엇인가? 당연히 <안나 카레니나>이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가장 위대한 단편소설로 덧붙여 거명하고는 있지만, <안나 카레니나>에 대한 나보코프의 예우는 파격적이다. 고골부터 고리키까지 여섯 명의 러시아 작가와 그 대표작을 다룬 <러시아문학 강의>에서 그가 <안나 카레니나> 해설에 할애한 분량이 전체의 1/3이나 될 정도다. 하지만 이런 선택이 나보코프의 독단은 아니다. 지난 2007년 영어권의 대표적 현역 작가들이 뽑은 최고의 문학작품으로도 <안나 카레니나>가 선정됐기 때문이다. 2위는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였으며, 3위는 다시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그리고 4위가 나보코프의 <롤리타>였다. 이 정도 순위라면 나보코프도 유감스럽지는 않았을 법하다.
<롤리타>의 작가는 어떤 이유에서 <안나 카레니나>를 높이 평가했을까? 사실 그가 정리한 작품의 도덕적 ‘메시지’는 상식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레빈과 키치의 결혼이 육체적 사랑뿐만 아니라 형이상학적인 사랑, 그리고 자기희생과 상호존중에 기반하고 있는데 반해서 안나와 브론스키의 관계는 오직 육체적 사랑에만 기초하고 있으며 바로 거기에 파국이 깃들어 있다고 나보코프는 지적한다. 육체적 사랑에만 한정되면 사랑은 불가불 이기적인 형태로 귀결되며 창조 대신에 파멸을 초래한다는 것이 톨스토이의 교훈이다. 그리고 “이 핵심을 예술적으로 가능한 한 명확하게 제시하기 위해서 톨스토이는 비범한 형상의 흐름 속에서 안나-브론스키 커플의 육체적 사랑과 레빈-키치 커플의 진정한 기독교적 사랑을 생생하게 대조시켰다”는 것이 나보코프의 평가다.
그런 ‘메시지’의 차원에서 보자면, 사실 <롤리타>는 <안나 카레니나>와는 대척점에 놓인 작품이다. 물론 <롤리타>도 도덕적 교훈을 전달하려는 모양새는 갖추고 있다. 살인 혐의로 체포돼 재판을 받던 ‘험버트 험버트’가 관상동맥 혈전증으로 사망하기 직전에 남긴 원고를 출간하면서 쓴 서문에서 편집자인 존 레이 주니어 박사는 이 작품이 과학적 중요성과 문학적 가치를 가질 뿐더러 “우리에게 더 중요한 것은 그 책이 진지한 독자에게 끼칠 윤리적 영향력이다”라고 일러주고 있으니까. 하지만 존 레이 박사가 가상의 인물일 뿐만 아니라, 문학작품을 윤리적 잣대로 재단하는 입장이야말로 나보코프에겐 언제나 통렬한 조롱의 대상이었다. 때문에 “<롤리타>는 우리 모두가 한층 조심스럽게 더 큰 비전으로 더 나은 세대를 더 안전한 세상에서 키워내도록 경종을 울릴 것이다.”란 서문의 마지막 문장은 작가의 아주 짓궂은 아이러니로 읽어야 한다.
하지만 이 아이러니는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고, 순진한 독자들에게 존 레이는 작가인 나보코프와 동일시되었다. 그들은 ‘저자의 목적은 무엇인가’를 질문했고, 작품의 ‘메시지’를 끄집어내기 위해 애썼다. 또 작품에서 ‘도덕적 경종’을 찾지 못한 이들은 작가를 비난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바보 같은 비난’을 보다 못한 나보코프는 ‘<롤리타>라고 제목이 붙은 책에 관하여’란 작가의 말을 후기로 붙였다. 그로선 아주 예외적인 일이다. “어느 나라나, 사회계급 또는 저자에 관해 알기 위해서 소설을 읽는 것은 유치한 일”이라는 것이 나보코프가 독자들에게 던진 일갈이다.
나보코프는 어떤 작가였던가? 그 자신에게서 정의를 찾자면, “나는 책을 쓰기 시작할 때 이 책을 끝내버리겠다는 것 외에 달리 생각이 없는 그런 작가이다.” 그런 의사를 존중하자면, “롤리타, 내 인생의 빛, 내 허리의 불꽃, 나의 죄, 나의 영혼. 롤-리-타. 혀끝이 입천장을 세 단계로 톡톡 치며 내려오면서 세 번째에는 이빨에 가닿는 여정. 롤. 리. 타.”라고 시작한 소설을 마무리하는 <롤리타>의 마지막 문장들은 주의 깊게 음미할 필요가 있다. 작가는 이렇게 끝냈다.
“그리고 클레어 큐를 동정하지 말아라. 사람은 그와 험버트 험버트 사이에서 어느 쪽을 선택해야만 했고, 또 험버트가 몇 달이라도 더 살기를 원했다. 그렇게 해야 험버트가 너를 후세 사람들의 마음속에 심어놓을 게 아니냐. 나는 들소와 천사들, 오래가는 그림물감의 비밀, 예언적인 소네트, 그리고 예술이라는 피난처를 생각한다. 그리고 이것이 너와 내가 나눌 수 있는 단 하나의 불명성이란다, 나의 롤리타.”
‘롤리타’란 이름의 호명에서 시작된 소설은 ‘나의 롤리타’를 다시 호명하는 것으로 끝난다. 그리고 이 여정에 불멸성을 부여하는 것이 바로 ‘예술이라는 피난처’이다. 그런데, 그 ‘피난처’는 누가 창조한 것인가? 험버트의 수기로 돼 있지만, 험버트는 ‘나’라는 1인칭으로도, ‘험버트’라는 3인칭으로도 불린다. 그것은 이 작품에서 험버트 험버트가 작가이자 동시에 주인공이기도 하다는 걸 암시한다. 저자 행세를 하고 또 저자를 참칭하지만, 그는 한갓 꼭두각시이자 허수아비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누가 진정한 저자이고 신인가? 험버트가 자기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또 다른 허수아비, 곧 유사 작가인 클레어 킬티보다 몇 달 더 살게 만든 ‘사람(One)’, 바로 숨겨진 저자 나보코프다. 그렇듯 나보코프는 등장하지 않으면서도 이 작품에 자신의 인장(印章)을 새겨 넣는다.
<안나 카레니나>를 끝낸 이후에 소설 쓰기를 중단한 지 오래인 톨스토이가 만년의 어느 울적한 날 아무 책이나 한 권 꺼내들고 중간부터 읽기 시작했다. 너무나 재미있어서 표지를 보았더니 자신이 쓴 <안나 카레니나>였다고. 자신의 작품과도 멀어진 불우한 톨스토이를 보여주는 에피소드일까? 정반대다. 톨스토이가 진정한 예술가이자 그 자신이 곧 예술이었다는 걸 웅변해주는 에피소드이다. 나보코프는 자신이 좋아하는 이 에피소드의 톨스토이이고자 했다.
10. 03. 04.
P.S. <롤리타>의 영어본과 러시아어본을 자세하게 비교해서 읽어볼 기회가 생겼는데, 나중에 보다 본격적인 <롤리타>론도 쓰게 되면 좋겠다. 아래는 러시아어 문고본의 표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