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한 번뿐인 삶 VS 영원회귀
출판저널(1월호)에 실은 '로쟈가 읽은 책 속의 한 장면'을 옮겨놓는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를 다루고 있다.
출판저널(10년 1월호) '결혼'과 '불륜' 사이에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테레사가 예고도 없이 토마스를 찾아 프라하에 온 날 그녀가 겨드랑이에 끼고 있던 책은 <안나 카레니나>였다. 덕분에, 두 사람이 친구에게서 얻은 강아지의 이름이 ‘카레닌’이 됐다. 처음에 토마스는 ‘톨스토이’라 부르자는 제안을 하지만, 테레사는 암캉아지이기 때문에 ‘안나 카레니나’가 더 낫겠다고 한다. 하지만 토마스는 강아지의 장난기 있게 생긴 얼굴에는 ‘카레닌’이란 이름이 더 적당하다면서 카레닌으로 정한다. 남자 이름이 붙여진 때문인지 카레닌은 토마스보다 테레사를 더 따른다. 그리고 쿤데라는 두 사람의 전원생활과 카레닌의 죽음을 다룬 소설의 마지막 장 제목을 아예 ‘카레닌의 미소’라고 붙인다. 작가 톨스토이와 그의 걸작 <안나 카레니나>에 대한 오마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안나 카레니나>의 애독자 쿤데라에게 ‘책 속의 한 장면’을 골라달라고 하면 어떤 선택을 할까? 아마도 안나의 자살 장면을 꼽지 않을까 싶다. 이미 에세이집 <소설의 기술>에서 “안나 카레니나는 왜 스스로 목숨을 끊는가?”란 물음을 던지고 “전혀 뜻밖의 충동”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그는 답한 적이 있다. “이것은 그녀의 행위가 뜻 없는 짓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이 뜻은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인과성 너머에서 찾아진다.”는 것이 그의 견해다.
또 다른 에세이집 <커튼>에서는 이 장면에 대한 조금 더 자세한 설명을 내보인다. 요지는 안나가 자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브론스키와 재회하기 위해서 기차역으로 가지만 플랫폼에서 갑자기 브론스키와 처음 만나던 날 기차에 깔려죽은 인부를 기억해내고서야 비로소 자신도 무엇을 해야 할지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즉 그녀는 자살을 통해서 자신의 사랑 이야기에 아름답고 완전한 형식을 부여하고자 했다. 그런 의미에서 안나의 자살은 도덕적 자살이 아니라 심미적 자살이다. 그녀는 자살을 통해 삶을 응징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구제하려고 했던 것이다. 안나의 이러한 자살은 분명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령>에 등장하는 키릴로프의 자살과 대비된다. 그 차이를 쿤데라는 <소설이 기술>에서 이렇게 대비시킨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자기 논리의 끝까지 가기를 고집하는 이성의 광기를 포착한다. 톨스토이는 그 반대다. 그는 비논리적인 것, 비합리적인 것의 개입을 드러내 보여준다.”
이 ‘비논리적인 것’ 혹은 ‘비합리적인 것’은 소설에서 어떤 생기의 ‘과잉’으로 묘사된다. 브론스키가 기차역에서 안나와 처음 조우하는 장면에서 그가 갖는 느낌을 묘사한 대목을 보라. “마치 과잉된 뭔가가 그녀의 몸속에 넘쳐흐르다가 그녀의 의지에 반해서 때론 그 눈의 반짝임 속에, 때론 그 미소 가운데 나타나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일부러 눈 속의 빛을 꺼뜨리려 했다. 그러나 그 빛은 그녀의 의지를 거슬러 그 엷은 미소 속에서 반짝반짝 빛을 냈다.” 이렇듯 브론스키를 매혹시킨 것은 그녀의 의지에 반하여 흘러넘치던 생기였고 ‘과잉된 뭔가’였다. 그것은 안나라는 ‘주체’를 넘어선 어떤 것이면서, 안나라는 ‘장소’에서 일어나는 비인칭적 생명의 운동이다.
안나의 그러한 생기는 오빠의 가정불화를 중재하기 위해 갔던 모스크바에서 오랜만에 활짝 꽃피지만 남편이 있는 페테르부르크로 다시 돌아온 이후에는 자취를 감춰버린다. “그녀는 옷을 벗고 침실로 들어갔다. 하지만 모스크바에 머무는 동안 그녀의 눈동자와 미소에서 뿜어져 나온 생기는 더 이상 그녀의 얼굴에서 찾아볼 수 없었고, 오히려 지금은 그녀 안의 불꽃이 꺼져 버렸거나 어딘가 멀리 숨은 것처럼 보였다.” 말하자면 카레닌과의 결혼생활이 그녀에겐 ‘살아있는 삶’이 아니라 ‘죽어있는 삶’이었던 것이다. 삶과 죽음 사이의 선택이라면 따로 고민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브론스키와의 만남 이후에 안나에게 가로놓인 건 ‘도덕적이지만 죽어있는 삶’(결혼)과 ‘부도덕하지만 살아있는 삶’(불륜) 사이의 양자택일이다. 그녀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혹은 어떤 선택을 해야만 할까?
안나의 곤경을 가장 잘 말해주는 건 그녀의 소망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꿈이다. 브론스키와 남편 사이에서 갈등하던 그녀는 밤마다 같은 꿈을 꾸는데, 꿈속에서는 두 사람 모두가 그녀의 남편이고 두 사람이 동시에 그녀에게 애무를 퍼붓는다.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그녀의 손에 입을 맞추고 울면서 이렇게 말했다. ‘아아, 난 지금 정말 행복하오!’ 그리고 알렉세이 브론스키도 거기에 있었으며 마찬가지로 그녀의 남편이었다.” 두 명의 알렉세이 모두 만족스럽고 행복하다면 이보다 더 간단한 해결책이 없을 테지만, 그것은 불행하게도 안나의 꿈속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현실의 안나는 결국 남편에 대한 의무 대신에 브론스키에 대한 열정을 선택하고, 이 선택은 그녀를 사회적으로 고립시킨다. 비밀스런 불륜은 당시 러시아 상류사회에서 흔한 일이었지만 문제는 안나가 자신의 불륜을 굳이 숨기고자 하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그러한 솔직함을 사교계는 용납하지 않았다. 더불어, 사교계는 안나가 갖고 있는 대단한 열정, 혹은 두 사람 몫의 생기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사실 꿈속에서처럼 두 남자, 두 명의 알렉세이에게서 동시에 사랑받기 위해서라면 안나 또한 두 사람 몫의 열정을 갖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브론스키의 아이를 낳은 후 산욕열로 죽어가던 안나가 열에 들떠서 남편 카레닌에게 이렇게 고백하는 장면을 보라. “내 안에 다른 여자가 있어요. 난 그녀가 무서워요. 그녀는 그 남자와 사랑에 빠졌어요. 그래서 난 당신을 증오하려고 했지만, 그래도 예전의 나를 잊을 수 없었어요. 그 여자는 내가 아니에요. 지금 내가 진짜예요.”
말하자면 두 명의 안나가 있는 셈이다.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던 안나는 카레닌에게 용서를 구하고, 한술 더 떠서 곁에 있던 브론스키까지 용서해달라고 부탁한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브론스키에게는 “얼굴을 보여줘요. 이분을 봐요. 이분은 성자예요”라고 말한다. 브론스키는 고뇌와 수치로 얼굴이 일그러지고, 카레닌은 눈물을 흘리며 브론스키에게 손을 내민다. 예사 소설이라면 이러한 화해의 장면으로 마무리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안나는 의사들의 예측과 달리 되살아난다. 그리고 다시금 전혀 ‘다른 여자’가 된 안나는 브론스키와 함께 아예 외국여행을 떠나버리며, 소설은 아직도 절반의 이야기를 남겨놓게 된다. 안나 스스로도 주체할 수 없는 생기 혹은 과잉의 자기운동이라고 할 수 있을까. 쿤데라가 ‘자살의 산문성에 대한 톨스토이의 탐구’라고 부른 <안나 카레니나>는 ‘비인칭적 열정’의 자기전개를 다룬 드라마이기도 하다.
10. 01. 06.
P.S. 알다시피 <안나 카레니나>는 여러 차례 영화화됐는데, 러시아에서 제작된 <안나 카레니나>(1967)는 http://www.youtube.com/watch?v=BCO2NimE3I8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