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휴의 후유증인지 숭례문 화재의 여파인지 머리는 무겁고 가슴은 답답하다. 주기적인 우울증인지도 모르겠다. 원래 '시인을 위한 물리학'이란 제목의 페이퍼를 쓸 생각이었으나(이런 일과 욕심에서 언제쯤 해방될 수 있을까?) 시간도 없고 기력도 부족해서 <롤리타>에 관한 것으로 방향을 틀었다. 강의준비를 겸하여 몇 자 적어두는 것이기도 한데, 국역본 첫문단의 오류에 관한 것이다.

 

 

 

 

알다시피 이 작품은 이렇게 시작한다. 제레미 아이언스 주연의 <롤리타>(1997) 서두(http://www.youtube.com/watch?v=8D_Bo0UFxq4)를 먼저 참조하시길. 주인공 험버트 헙버트(제레미 아이언스)의 나레이션으로 시작되는데, 특이하게도 이 영화에서는 소설의 처음 문단과 두번째 문단 순서가 바뀌어서 나온다. 여기서 읽을 건 유명한 첫문단이다. 같은 대목을 관련서들에서는 어떻게 옮기고 있는지 비교해보겠다.  

"롤리타, 내 삶의 빛이요, 내 생명의 불꽃. 나의 죄, 나의 영혼. 롤-리-타. 세 번 입천장에서 이빨을 톡톡 치며 세 단계의 여행을 하는 혀끝. 롤. 리. 타."(<롤리타>, 민음사, 15쪽)

"롤리타, 내 삶의 빛이요, 내 생명의 불꽃. 나의 죄, 나의 영혼. 롤-리-타. 입천장을 세 번 굴러 세 번째는 이를 톡 치는 혀끝. 롤. 리. 타."(<롤리타>, 이룸, 47쪽)

"롤리타, 내 인생의 빛, 내 사타구니의 불길, 나의 죄이자 나의 영혼이여, 롤-리-타. 나의 혀끝은 입 천장에서 세 번을 움직여 그 이름을 두드린다. 한번씩 움직일 때마다 혀는 아래로 내려와 마지막 세번째는 이를 건드린다. 롤. 리. 타."(<아주 특별한 책들의 이력서>, 31쪽)

이 한 문단에서만 '롤리타(Lolita)'란 이름이 세 번 반복되는데, 말 그대로 '롤리타'란 이름을 어떻게 발음하느냐에 초점이 맞춰지고 있다. 이건 말 그대로 '유희적인' 시작이다.  "내 삶의 빛이요, 내 생명의 불꽃"이라는 거창한 '호명'과 롤리타란 이름이 입안에서 어떻게 발음되는가에 대한 묘사/음미가 병치되고 있는 것이다. 잔뜩 무거운 분위기로 처연하게 시작한 에드리안 라인의 <롤리타>가 막바로 이러한 나레이션으로 시작할 수 없었던 이유도 거기에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와 달리 나보코프는 이렇게 대놓고 시작한다.

"Lolita, light of my life, fire of my loins. My sin, my soul. Lo-lee-ta: the tip of the tongue taking a trip of three steps down the palate to tap, at three, on the teeth. Lo. Lee. Ta."

이 서두가 의미심장한 것은 작품의 맨마지막 문장과도 호응하기 때문이다. <롤리타>는 어떻게 끝나는가? "그리고 이것이 너와 내가 나눌 수 있는 단 하나의 불멸성이란다, 나의 롤리타."(422쪽) 원문은 "And this is the only immortality you and I may share, My Lolita." 이 서두와 결어 사이의 여정(trip)이 바로 <롤리타>의 여정이며 그것은 또한 '불멸성'에 이르는 여정이다. 그리고, 그 여정이 혀끝(tip)의 이동으로 대변될 수 있는 '언어적 여정'이라는 데 이 소설의 비밀이 놓여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물론 그 비밀에 대해서 자세히 늘어놓을 자리는 아니고, 인용한 국역본의 번역에서 문제가 되는 것만 살피도록 한다. 먼저 사소한 불만을 적자면 "롤리타, 내 삶의 빛이요, 내 생명의 불꽃. 나의 죄, 나의 영혼."이라는 첫마디가 나는 나보코프의 원문처럼 동사가 빠진 명사구 형태로만 제시되는 게 더 적절하다고 본다. '내 삶의 빛이요'라는 식으로 늘어지는 게 개인적으론 마음에 들지 않는다. 세번째 제시한 번역에서처럼 "롤리타, 내 인생의 빛, 내 사타구니의 불길" 하는 식이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이 경우엔 왜 잘 나가다가 "나의 죄이자 나의 영혼이여"라고 늘어진 것인지?). 즉, 내가 원하는 건 "롤리타, 내 인생의 빛, 내 허리의 불꽃, 나의 죄, 나의 영혼."하는 식으로 옮기는 것이다.

 

 

 

 

'허리'라고 옮긴 'loins'는 원래 '허리'란 뜻이다. 내가 갖고 있는 주석본 <롤리타>(신아사, 1997)에서 윤효윤 교수에 따르면 "문학에서 말하는 loin은 '허리'를 의미하기보다 생명 또는 생식기를 의미"한다. '생명'이나 '사타구니'란 의역은 그래서 가능하다. 나는 다만 그런 걸 감안하면서도 ' 내 허리의 불꽃' 정도로 옮기는 게 나보코프의 짓궂은 취향에 더 어울리지 않을까 싶다(러시아어본에서도 그냥 '허리'를 뜻하는 단어가 쓰였다).  

그리고 두번째 마디. "롤-리-타. 세 번 입천장에서 이빨을 톡톡 치며 세 단계의 여행을 하는 혀끝. 롤. 리. 타."라고 번역됐는데, '롤-리-타'를 발음해 보면 바로 알 수 있지만 '세 번 입천장에서 이빨을 톡톡 치면서"는 발음할 수 없다. 정상적인 경우 'Lo-Lee'를 발음할 때는 혀끝이 이빨이 닿지 않기 때문이다. 그 발음의 과정을 풀어서 번역한 것이 "나의 혀끝은 입 천장에서 세 번을 움직여 그 이름을 두드린다. 한번씩 움직일 때마다 혀는 아래로 내려와 마지막 세번째는 이를 건드린다."이다. 이게 혀끝의 여정이다. 'Lo'를 발음할 때는 입천장을 치고, 'Lee'를 발음할 때는 약간 앞쪽으로 내려온다. 그리고 'Ta'를 발음할 때 비로소 혀끝은 이빨을 톡 치게 된다.

나대로 다시 옮기면, "롤리타, 내 인생의 빛, 내 허리의 불꽃, 나의 죄, 나의 영혼. 롤-리-타. 혀끝이 입천장을  세 단계로 톡톡 치며 내려오다가 세번째에는 이빨에 가닿는 여정. 롤. 리. 타." 그런 여정의 끝에 네가 있다. 롤리타, 내 인생의 빛, 내 허리의 불꽃, 내 허벅지의 경련, 내 발가락의 가려움, 아무도 가려주지 못할 나의 슬픔, 나의 공허, 롤. 리. 타...

08. 0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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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나보코프와 예술이라는 피난처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3-04 00:17 
    저녁강의가 있어서 늦게 귀가해보니 식탁에 이번달 <출판저널>(3울호)이 놓여 있다. 원래는 지난달에 실려야 할 '로쟈가 읽은 책 속의 한 장면' 원고가 한달 늦춰졌고, 이번이 마지막 글이 됐다. 나대로의 '이어 읽기'로 나보코프의 <롤리타>를 다루고 있으며, 4월호 원고까지 썼더라면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이 이어질 참이었다. 그래도 원고 부담이 하나 줄어서 다행이
 
 
2008-02-12 03: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2-12 03: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8-02-12 10:02   좋아요 0 | URL
저도 파일은 없고 프린트된 것만 갖고 있었습니다. '활력소'를 이런 곳에서 찾으시면 안되는데요.^^;

parksang 2008-02-12 14:19   좋아요 0 | URL
색깔 구분 안된 뒷부분 번역문 몹시 맘에 드네요.

로쟈 2008-02-12 17:20   좋아요 0 | URL
^^;

2008-02-12 16: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8-02-12 17:20   좋아요 0 | URL
저도 후보들을 더 생각해봤지만 대체할 만한 게 떠오르지 않네요.^^;

섬나무 2008-04-14 10:06   좋아요 0 | URL
문장의 미세한 결을 드러내는 솜씨로 보면 로쟈님은 인문학 번역보단 문학류 번역에 적합하신것 같습니다.^^ 롤리타를 읽으면서 저 롤리타 발음에 대한 묘사를 따라하다가 어떻게 이빨을 세 번이나 치나? 하면서 다른 뜻의 표현일거라 생각했어요. 세번째에는 이빨에 가닿는 여정.롤.리.타. 확연해지고 한결 좋네요. 그런데 저렇게 세 군데의 책을 모두 읽어보시나요? 역시 보통의 열정은 아닙니다. 검은 글씨 두 줄은 '롤리타'의 전부네요.

로쟈 2008-04-14 23:58   좋아요 0 | URL
개인적으론 문학작품 번역이 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문체'도 옮겨야 하기 때문에요.^^;

섬나무 2008-04-15 18:43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문자 번역이 아니라 문체를 번역하고 싶은 로쟈님의 부담이야 이해되는데요 로쟈님의 깊은 감수성이면 충분히 가능해보입니다. 어쩌면 숨은 능력을 발휘하지 않고 있는 건지도 모르지요.^^

로쟈 2008-04-15 21:43   좋아요 0 | URL
사실 제가 맡은 번역들도 문학쪽이 더 많습니다.^^;

섬나무 2008-04-16 11:20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러시아문학 쪽인가요? 번역작품들을 알려주시는 게 불법은 아닐테니 소개해주시면 좋겠는데요......

로쟈 2008-04-17 23:41   좋아요 0 | URL
물론 러시아문학쪽이구요, 내년쯤부턴 나올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