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신간들에 대한 언론 리뷰들 가운데 가장 그럴 듯했던 건 클로테르 라파이유의 <컬처코드>(리더스북, 2007)에 대한 것이다. 경제경영서로 분류되니까 평소에 내가 관심을 갖는 분야는 전혀 아닌데, 내용상으로 치자면 문화인류학서로 분류해도 되는 게 아닌가 싶다.

Clotaire Rapaille

 

 

 

 

 

저자 자신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정신분석학자이자 문화인류학자이며 마케팅 구루"라고 하지 않는가. 애당초 소르본느대학에서 문화인류학 박사를 받았다고 한다(사진을 보니 호남형의 멋쟁이다). 원서는 랜덤하우스에서 나온 모양인데 아예 홈피(http://www.randomhouse.com/broadway/culturecode/index.html)까지 마련해두고 있다. 저자만큼이나 세계적으로 유명한 책인가 보다. 하긴 지난주에 나온 책인데 알라딘에만 리뷰가 다섯 편이 올라와 있다. 팔리는 책은 팔리는 것일까, 아니면 특별한 마케팅 기법이 있는 것일까. 나는 리뷰 정도만을 그냥 읽어둔다(책은 나중에 도서관에나 들어오면 빌려봐야겠다).

경향신문(07. 01. 20) 미국이 싫어하는 말 ‘유혹’

왜 미국 사람들은 축구보다 야구에 열광할까? 왜 일본의 이혼율은 그렇게 낮을까? 왜 이탈리아 남자들은 여자들을 쉽게 유혹할까? 세계 제1위 화장품 회사인 로레알은 미국 시장에서 마케팅을 펼치면서 중대한 결정을 내렸다. 그것은 이제까지 프랑스에서 오랫동안 고수해왔던, 관능적이고 유혹적인 콘셉트의 광고를 포기하기로 한 것이다. 대신 미국에서는 로레알 제품을 쓰는 이유가 남성을 유혹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감을 갖기 위한 것이란 점을 강조했다. 그리고 이 전략은 큰 성공을 거뒀다.

성공의 비결은 ‘컬처코드’에 있었다. 컬처코드란 ‘특정 문화에 속한 사람들이 일정한 대상에 부여하는 무의식적인 의미’를 뜻한다. 저자에 따르면 미국인의 컬처코드는 ‘조종’이다. 개척정신과 반항심리가 강한 미국인들은 조종당한다고 생각하면 이를 매우 불편하게 여긴다. 그리고 이들에게 유혹이란 곧 ‘조종’의 느낌이다. 따라서 로레알은 유혹이란 콘셉트를 포기하고 코드에 부합하는 마케팅을 함으로써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이다.

미국인이 축구보다 야구에 열광하는 이유도 컬처코드에서 찾을 수 있다. 가정은 미국문화에 있어 가장 강력한 원형이다. 미국에서 가장 성스러운 의식인 추수감사절 만찬은 반드시 온 가족이 함께 모인 가운데 어머니의 집에서 치러진다. 따라서 미국의 국민적 오락인 야구가 세 개의 누(壘)와 하나의 홈으로 이뤄진 것은 우연이 아니다. 미국에게 가정(홈)은 가장 강력한 이미지이며, 야구에서 점수를 얻는 유일한 방법은 홈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이는 미국에서 패밀리 레스토랑이 인기를 끌게 된 것과도 무관치 않다.

저자의 분석에 따르면 부진을 면치 못하던 현대차가 미국에서 극적인 성장을 거둘 수 있었던 것도 미국인의 ‘개척자’ 코드에 부합하는 판매전략 때문이었다. 그들은 3년마다 새 자동차를 시험해 보기 원하며, 5년마다 새 텔레비전을 구입하려 한다. 따라서 미국인들은 완벽한 제품을 원하지 않는다. 대신 제품이 위기에 닥쳤을 때 이를 극복해줄 훌륭한 서비스에 더 민감하다. 현대차는 긴급출동 서비스와 대체차량 제공 등 최고의 서비스로 저가제품의 가치를 극적으로 높였다. “우리 자동차는 완벽하거나 특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러분의 자동차를 계속 달리게 할 것입니다.” 현대차의 이런 메시지는 미국인의 코드를 만족시켰고, 이후 판매량은 극적으로 성장했다.

컬처코드라는 문화적 무의식은 전 세계 모든 인류의 행동과 삶의 방식을 바라보는 새로운 안경이다. 그리고 동시에 비즈니스의 성공을 위한 결정적 단초를 제공하기도 한다. 저자는 문화인류학과 정신분석학과 마케팅의 만남이 빚어낸 독특하면서도 혁신적인 방법을 통해 세계를 새로운 방식으로 볼 수 있는 시각을 제공해 주고 있다.(정유진 기자)

07. 06. 20.

P.S. 다른 리뷰에서의 들고 있는 사례: "프랑스인들은 우아한 만찬 장소에서도 거침없이 섹스 이야기를 한다. 그러나 돈 이야기를 하는 건 천박한 짓으로 여긴다. 미국은 반대다. 미국인들은 격식을 차려야 하는 자리에서 섹스 이야기를 잘 꺼내지 않는다. 그러나 돈에 관한 이야기라면 밤을 새워 해도 괜찮다."(매일경제)

 

 

 

 

이제 나의 관심은 두 가지이다. 한국인의 컬처코드와 러시아인의 컬처코드를 자세하게 다룬 책은 없는가, 하는 점. 그러고 보면, 진중권의 신간 <호모 코레아니쿠스>(웅진지식하우스, 2007)이 이런 류의 책이 아닐까 싶다. 혹은 작년말에 나온 강준만의 <한국 생활문화사전>(인물과사상사, 2006)이 이런 류에 들까. 아쉬운 건 러시아다. 아직도 <굿모닝 러시아>(지호, 2004) 외에, 문화사로서 <나타샤 댄스>(이카루스미디어, 2005) 외에 러시아 문화코드에 관한 '확실한' 책이 눈에 띄지 않는다. 거기에 문화인류학과 문화기호학적 분석까지 가미한 책이 올해는 출간되었으면 좋겠다(그게 비즈니스에도 도움이 된다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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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 2007-01-20 20:11   좋아요 0 | URL
<나타샤 댄스>란 어떤 책일까.. 제겐 노래가 있는데 말이지요. 러시아 문화사로서의 <나타샤 댄스>, 제목이 재미있고 흥미롭습니다.

로쟈 2007-01-20 23:58   좋아요 0 | URL
잘 씌어진 러시아 근대 문화사입니다. 아직 품절되지 않았다면 장서용으로 구입하시길.^^

sommer 2007-01-21 16:01   좋아요 0 | URL
'컬쳐코드'를 '오브제 a'를 통한 집단적 주이상스로 옮겨도 무방하겠네요. 여기다 그 구멍들은 다시 자본으로 귀환한다는 것, 이 지점에 '시차적 관점'의 지젝이 잠시 정박해 있는 것 같습니다.

로쟈 2007-01-21 17:14   좋아요 0 | URL
‘특정 문화에 속한 사람들이 일정한 대상에 부여하는 무의식적인 의미’란 설명이 더 쉬운데요.^^
 

밤참을 먹고 몇 자 적는다. 주로 라면을 먹다가 요즘은 (칼로리를 고려해) 잔치국수로 메뉴를 바꾸었다. 메뉴는 바뀌었을지라도 변함없는 건 식후엔 일하지 않는다는 것. 그게 게으른 자의 최소조건이다(내가 가끔 놀란 건 나보다 게으른 이들이 의외로 많다는 사실이다. 물론 나는 그들을 존경하지 않지만). 토요일자 신문들의 북리뷰나 훑어보다가(다행히도 이번 주엔 나를 곤혹스럽게 하는 책들이 별로 없다. 두껍고 비싸지만 꼭 갖고/읽고 싶은 책들 말이다). 해서 그냥 하던대로 경향신문의 연재 '작가와 문학 사이'나 옮겨놓는다. 필자가 심진경씨인 것으로 보아 어쩌면 이 란은 2인 로테이션으로 돌아가는지도 모르겠다.

경향신문(07. 01. 20) [작가와 문학 사이](3)박민규-우주에서 ‘지구의 일상’을 보다

박민규에게 소설가란 이를테면 ‘딴따라’에 가깝다. 진지한 예술가의 이미지를 찾기가 쉽지 않다. 그는 좋아하는 포르노스타와 프로레슬러의 이름 열 두 개 정도는 기본으로 외울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예순살까지만 소설을 쓰다가 그 다음부터는 전직 소설가 기타리스트로 살고 싶어 하는 소설가다. 그는 마음에 안 드는 세상을 향해 “조까라마이싱”이라고 외치기도 한다.

그러나 실제 그는 포르노스타처럼 대범하지도 프로레슬러처럼 폭력적이지도 않다. 그는 지나치게 수줍어하고 온순한 것처럼 보인다. 심지어 그는 성실하다. “술, 마시지 않는다. 담배, 피우지 않는다. 인간, 가까이하지 않는다.” 게다가 아내를 도와 집안일도 잘한다. 그런데 그는 어떻게 ‘무규칙 이종 소설가’가 된 것일까. 어쩌자고.



그는 “멸망한 인류의 문명을 발견한 한 마리의 침팬지가 된 마음으로 글쓰기에 임한다”고 한다. 그렇다. 그에게는 침팬지의 마음이 중요한 것이다. 침팬지의 마음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우선 박민규가 애호하는 영화 ‘혹성탈출’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인류와 지구의 멸망 이후를 생각하는 마음이다. 그때 인간은 더 이상 사유의, 행위의 주체가 아니다. 그래서 그의 소설에는 유독 인간 아닌 것들이 자주 등장한다. 그 목록을 열거해보면 대충 다음과 같다. 냉장고(‘카스테라’), 대왕오징어(‘대왕오징어의 습격’), 개복치(‘몰라 몰라, 개복치라니’), 너구리(‘고마워, 과연 너구리야’), 기린(‘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 핑퐁(‘핑퐁’). 심지어 화성인, 금성인도 등장한다. 박민규는 이렇게 무생물계, 동물계, 탁구계, 그리고 우주계의 관점을 취함으로써 인간계를 낯설고 기이한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이러한 방법론을 우리는 통칭 우주론적 전략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탐사선 보이저 1호가 명왕성 부근에서 촬영한 사진에서 지구는 단지 희미한 빛을 내는 ‘창백한 푸른 점’처럼 보인다. 우주인의 시각에서 봤을 때 지구는 그저 하찮은, 없어져도 그만인, 선도 아니고 면도 아닌 하나의 점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니 ‘핑퐁’의 결말처럼 이 지구가 언인스톨되거나 소멸된다 한들 그것은 아무 의미 없는 사소한 일일지도 모른다. 우주인이 보기에 말이다.

이러한 우주론적 시각은 당연한 말씀이지만, 우리 지구인의 고통스러운 현실을 상대적으로 축소시키고 약화시킨다. 악다구니 같은 일상을 뛰어넘는 무한광대한, 그래서 순결한 우주적인 것을 일상적, 속물적 삶과 견줌으로써 지금, 현실은 순간적이나마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될 수 있다. 박민규의 인간혐오증(그는 ‘핑퐁’에서 “인간은 싫다. 차라리 양이라면 나는 즐거이 관계를 맺었을지도 모른다”고 주장한다)은 크게 보면 세계전복의 망상으로까지 이어지지만, 작게 보면 비참하고 힘든 현실을 견딜 수 있게 하는 자기위안의 방법론이기도 한 것이다.

이러한 시각의 반전은 지구내적인 삶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박민규 소설에서 일반적으로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일은 하찮게 다루어지거나 반대로 하찮은 것들은 오타쿠적 탐구를 통해 우주에 맞먹는 의미를 부여 받는다. 흔한 사물인 냉장고는 오사리잡탕의 세계를 쓸어 담는 거대한 그릇으로 팽창하거나 반대로 그렇게 뒤섞인 세계는 카스테라로 압축되기도 한다.(‘카스테라’) 냉장고와 카스테라라니. 초현실주의자들의 ‘우산과 재봉틀의 만남’에 비견될 만한 이 기이한 조우를 통해 우리가 자못 거대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세계는 작은 중고 냉장고의 세계 속에서 카스테라로 포맷된다.

그러니 낡아빠지고 물빠진 스웨터를 입었다고 괴로워하지 말라. 우리에게는 냉장고와 카스테라만 있으면 될지니. 아니면 탁구대와 라켓, 공만 있으면 될지도. 그것도 아니면 쿨 앤 더 갱의 셀러브레이션을 들으면 될까. 그러면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있게 될까. 어쨌든 박민규는 고시원과 아르바이트와 왕따와 꼴찌들에게 행복이란 ‘놀랍게도 따뜻한’ 카스테라 맛일지도 모른다고, 그러니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고 말하는 듯하다. 박민규는 카스테라를 좋아한다.(심진경|문학평론가·서울예대 강사)

07. 01. 19.

P.S. 나도 카스테라로 바꿀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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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da 2007-01-20 1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제..발 그것만은...

로쟈 2007-01-20 1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래도 아니겠죠? 호박파이라면 또 모르겠지만...
 

컬쳐뉴스에 작년도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인 김언수의 <캐비닛>(문학동네, 2006)에 대한 소설리뷰가 실렸길래 스크랩해놓는다. 필자는 젊은 평론가 복도훈씨이다. "<캐비닛>과 더불어 한국문학은 이제 또 한 명의 괴물 같은 작가를 갖게 되었다."(류보선)는 평이 있을 만큼 작품은 지난해에 거둔 한국소설의 수확 가운데서도 두드러진 케이스이다.

컬쳐뉴스(07. 01. 19) 캐비닛, 소설의 산해경(山海經)

어떤 소설이 좋은 소설일까? 흥미롭고도 진지하며 슬프도록 유쾌한, 지적인 분석과 멜랑콜리한 아포리즘이 결합하는, 옴니버스식 이야기들의 무진장한 꽃다발인『캐비닛』을 읽으면서 내내 품었던 물음이다. 어떤 소설이 좋은 소설일까. ‘구라’가 장난이 아닌『캐비닛』의 서술자가 들려주는, 한순간에 기억을 상실하고 한참 후가 되어서야 남태평양 섬에서 깨어난 한 타임스키퍼에 관한 13호 캐비닛 보고서를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읽고 있다가, 타임스키퍼라는 별종이 백년 묵은 신흥종교인 자본주의라는 제단(祭壇)이 요구하는 불우한 희생양이 아닐까하고 읽던 책을 접고 멍하니 상념에 잠겨 있다가, 13호 캐비닛에서 꺼내어져 마술의 양탄자처럼 펼쳐질 다음 이야기들이 마저 궁금해져 서둘러 책장을 넘기다가, 어느새 몇 쪽 남지 않은 책장의 부피를 못내 원망하며 한편으로는 이게 끝인가, 하고 갸우뚱해가다가, 가까스로 던진, 질문이다. 그리고 소설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도록 만드는 소설이 좋은 소설은 아닐까, 하고 생각해본다.

 

 

 

 

 

 

 

 

그럼『캐비닛』은 도대체 어떤 소설인가.『캐비닛』의 한 구절처럼, 이 소설은 인간이라는 마지막 종, 그리고 새로운 종의 탄생 사이에 존재하는 돌연변이들에 대한 믿거나말거나 “인류학 박물지”인가? 아니면 그 온갖 '심토머'(symptomer)에 대한 사회심리학적 해부인가. 그들을 만들어낸, 적어도 IMF 이후 한국사회의 자본주의적 생리학에 대한 풍자와 비판? 심토머들마저 관리하고 화폐로 환산하려는 체계들, 군대, 학교, 회사의 규율들에 대한 저항과 거부? 작가가 생각하는 형식주의적 소설론에 대한 의미심장한 선언적 알레고리? 자본주의적 망딸리떼에 대한 사회심리학적 분석, 허구의 인물인 아랍의사들의 의학논문과 다윈적 진화론, 블랙유머의 대화들, 갖가지 우화와 기담, “이쑤시개의 존재론적 본질”에 대한 에세이적 사변과 시적 아포리즘,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의 곰탕 뚝배기 소설론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것들이 작가 특유의 구라와 능청이라는 긴 대꼬챙이에 줄줄이 북어 엮이듯 엮인『캐비닛』은 이채로운 부분들의 총합이되, 부분으로 환산되지 않으면서도 총합을 뚫고나오는 과잉과 혼돈의 마술램프라고 부를 수 있다.

『캐비닛』이전이라면 누가 상상이나 해봤을까. 8, 90년대의 동사무소에서나 볼 수 있었던, 냄새나는 추리닝과 테니스 양말 한쪽, 바람 빠진 축구공과 기한이 다 된 자료들이 아무렇게나 뒤섞이고 구겨 넣어져 쾅하고 닫힌, 누구도 돌보지 않았던 이 낡아빠진 13호 캐비닛에서 황당무계하면서도 현실적 연관을 놓치지 않는 이야기들이 이처럼 마구 쏟아져 나올 줄이야.『캐비닛』을 읽다보면 주(鴸)라는 새가 나타날 때 그 고을에 귀양 가는 선비가 많아지고 비(蜚)라는 짐승이 지나간 자리에 풀과 물이 말라 천하에 큰 돌림병이 생긴다는 식의 수백의 이야기들이 적힌 중국의 기서(奇書)『산해경(山海經)』을 자꾸만 연상하게 된다. 물론『캐비닛』의 심토머들이 해악과는 거리가 한참이나 멀고 더군다나 상서로운 것과도 아무런 상관이 없는 존재들임은 부언해야겠지만.

『캐비닛』, 21세기 한국판『산해경』에 실린 심토머들은, “진료과목이나 상담분류표” 등 합리성의 잣대로는 분류가 되지 않는 존재들이다. 그들은 분류를 거부한다는 점에서 괴물에 가까운 존재들처럼 보인다. 새끼손가락에서 은행나무가 자라는 문방구 사내, 혀에서 붉은 혀를 내미는 도마뱀이 자라는 여자, 신용이 중요한 자본주의사회에서 시간을 잃어버린 타임스키퍼들, 자신의 분신을 만나는 '도플갱어'들, “시간이 곧 돈으로 환금되는 21세기”에 긴 잠을 자는 '토포러'들, 불행한 기억 대신 행복한 위장기억을 소유하는 '메모리자이커'들, 일명 어지자지 또는 남녀추니로 불리는 '네오헤르마프로디토스', 외계인 무선통신 회원들, 육체를 마음대로 바꾸지만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는 다중소속자들, 머리가 붙은 샴쌍둥이들, 침대 밑에 악어가 숨어있다고 호소하다가 악어에게 실제로 잡아먹힌 망상증적 '블러퍼'들.

그러나『캐비닛』에서 이 돌연변이들, 저마다 증상(symptom)을 호소하는 그들은 괴물처럼 보이지만, 시장이나 체계에 위협적인 존재들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도심에서 외롭게 앓고 미쳐가지만 누구도 돌아보지 않는 지극히 불쌍한 존재들이다. 그들은 우선 ‘앓는’ 자들이다. 소설 후반부의 키메라 파일을 둘러싼 납치와 감금, 탈출의 에피소드가 암시하듯, 심토머들 중 일부는 관리되고 교환되는 최신유전자정보를 소유한 값비싼 상품이지만, 대부분의 심토머들은 상품가치조차 없는, 버려진 존재들이다.『캐비닛』의 서술자이자 주인공 공덕근이 앓는 그들과 직접 만나거나 상담전화를 받고 충고해주는, 그 역시 증상을 가진 존재이면서도 더러 우뚝 서서 혼잣말을 내뱉거나 흥미롭고도 솔깃한 사례들만 소개하거나 둔탁한 사변을 늘어놓는, 다소 아슬아슬하고도 좌충우돌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유사분석가의 캐릭터로 설정된 것은 그 때문이리라.

무엇보다도『캐비닛』의 장점은 활달하게 말할 줄 알면서도 동시에 잘 귀 기울이고 세심히 듣는 소설이라는 특질에 있을 것이다.『캐비닛』은 시장과 체계에 대한, 시장과 체계가 낳은 돌연변이들의 반란을 그린 원한의 이야기라기보다는, 시장의 잉여생산물들, 체계의 폐기물들인 돌연변이들과 함께하면서 그들의 “억지와 하소연”을 듣고 (샴쌍둥이였지만 지금은 혼자 살아가는 “안개꽃 같은 여자”인 안(眼)과의 만남에서처럼) 때론 안아주며 (“먼지 날리는 환풍기 아래에서 밥을 먹는” 거구의 독신녀 손정은과의 관계에서처럼) 때론 안기기도 하는, 위무의 이야기다. 그렇다면, 심토머들의 애환과 울혈, 외로움과 비존재감이 환기시키는 현실의 모습은 어떠한 것일까.  

『산해경』이 고대 중국의 한 시대에 대한 우언(寓言)인 것처럼,『캐비닛』은 21세기, 구체적으로는 IMF 이후, ‘주’와 ‘비’가 활개치고 활보하는 한국식 자본주의의 현실에 대한 우화라고 할 수 있다. 종신고용제가 무너지고 비정규직과 실업에 잠식당한 IMF 이후의 한국의 경제적 현실에서 산업예비군이나 임노동자에게 명백하게 드러난 가장 큰 증상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불안일 것이다. 특별히 고용불안만은 아닌 이 불안은 일찌감치 발터 벤야민이 성찰한 것처럼, 자본주의가 앓고 있는 증상 중 하나다.

『캐비닛』에서 타임스키퍼들에 대한 환상적인 이야기는 자본주의가 불안과 걱정을 회피하려는 종교적 강박증과 연결되어 있다는 성찰과 탁월하게 결합한다. 타임스키퍼들은 그들이 시간을 전부 잃어버리기 전까지는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최상의 인간들이지만, 실제로는 불안하기 때문에 자신들의 삶을 특정하게 반복되는 의례와 규칙에 종속시키려 매순간 긴장하고 애쓴다는 점에서 강박증자들과 흡사하다. 그들은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의례와 규칙을 수행하지 않으면 자신의 존재감을 느끼지 못한다. 소설에서 타임스키퍼들이 한 순간에 사라졌다가 어느 날, 전혀 상이한 시공간에서 깨어난다는 사실은 그들의 비존재에 대한 알레고리이다. 자본주의에는 휴일(holiday)이 없다고 말하기는 쉽지만, 오히려 그 반대로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특정 교리도 신학도 모르며 십자가조차 없는 자본주의라는 신흥종교에는 평일이란 없으며, 매일매일은 강박증적 신도들이 극도의 긴장으로 경배와 찬양을 드리는 축제일(holiday)뿐이다. 서술자의 말을 빌면, “에브리데이가 할리데이”인 것이다.

이쯤 되면,『캐비닛』을 자본주의의 증상학으로서의 소설로 정의해도 무방하다.『캐비닛』의 첫 부분, 상피에르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아 상피에르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도둑 루저 실바리스의 일화와 마지막 부분과의 연결은 다소 무리하다싶다. 그렇지만, “개껌이라도 질근질근 씹어 먹고 싶은 지독한 무료함으로” 가득 찬 절해고도(絶海孤島)에 자발적으로 망명, 13호 캐비닛의 자료들을 옮겨 적는 서술자를 묘사하는 마지막 에피소드를 자본주의라는 망망대해로부터 유폐된 자리에서 선언된, 소설쓰기에 대한 작가적 자의식으로 읽어보면 어떨까. 예컨대, 작가와 더불어 이렇게. “곰탕 뚝배기에 냉면을 담아오면 그것은 냉면이 아니다. 그것은 잘못 만들어진 곰탕일 뿐이다.” 바야흐로 독자들은『캐비닛』과 더불어 새로운 소설 종의 탄생을 목도하고 있는 것일까. 아마도.

07. 01.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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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아이즈 2007-01-19 2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의 중편 '프라이데이와 결별하다'를 관심있게 읽은 독자로서 기대가 되긴 하는데, 이상하게도 클릭이 더뎌지네요.

로쟈 2007-01-20 14: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럼 뭐 아껴두시죠.^^
 

인터넷 한겨레에 들어갔다가 우연히 띈 글을 옮겨놓는다. '한겨레 필진'인 박노자 교수의 '만감: 일기' 한 꼭지이며 '박노자 글방'에 올려져 있다. 제목은 좀 길어서 축약해놓았다.

박노자 글방(07. 10. 19) 제정 러시아 ㅡ 대한제국을 식민화할 구체적인 계획은 있었는가?

오늘 모스크바에 있는 한 선배로부터 새해 선물 (?)로 러시아의 한국학 원로 보리스 박 선생의 역작, (<러시아와 조선>, 증보판, 모스크보, 2004)를 즐겁게 받았습니다(*'모스크보'는 '모스크바'의 오타이겠다? 한데, 제목을 굳이 <러시아와 한국> 대신에 <러시아와 조선>이라고 할 필요가 있을까? '대한제국'만 하더라도 '조선'은 아니지 않나? ). 1970년대에 나온 제1판이야 저희들의 교과서이었지만 증보판을 거의 처음으로 봤어요(*520쪽의 두툼한 책이다. 2004년이면 나도 모스크바에 있을 때인데, 어디에 숨어 있었던 것일까?).

Россия и Корея

저는 이 책을 보면서 한 가지 궁금증을 풀려고 했어요. 요즘 한국 보수의 일각에서는, "러시아도 대한제국을 식민화하려 했으니 일본이 러일 전쟁을 발발시켜 한반도 점령한 것이 일종의 자위권 행사"니 "일본에게 먹힌 것이 마음 아프지만 그 대신에 러시아에게 먹혔으면 결국 공산화됐을 것"이니 제정 러시아의 "한반도 점령 의도" 관련의 발언들이 많고, 대체로 일본과 동격으로 보려 하더랍니다.

여기에서 일단 한 가지 밝혀둘 것은, 제가 러시아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제정 러시아를 합리화하거나 정당화할 추호의 의도는 없습니다. 저는 이와 같은 문제에 있어서는 "자기 나라 제국주의부터 공격하라"는 레닌적인 "혁명적 반제주의" 입장에 있고, 지금도 이라크 독립 운동을 지지하는 한편 체첸의 독립 운동도 동시에 지지합니다. 그런데 그건 그렇지만 제정 러시아는 정말로 대한제국의 식민화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이 있었는가요?

물론 제정러시아는 대한제국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침략적 외세이었음은 두말 할 것은 없지요. 그 전에도 별나별 짓거리를 다 했었지만 1900년에 이범진 공사의 집요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범진이 원래 친러적 성격의 인물이었지만 그래도 망국을 좌시할 수 없는 애국자이었지요) 압록강 근방에서의 벌목 이권을 억지로 따내고, 1903년부터 용암포에 군인들을 침투시켜 사실상 대한제국의 영토 주권을 침범한 것은, 역시 엄연히 역사적 사실이지요. 그리고 1903년에 일본과 만한교환을 논했을 때에 "한반도에서 39선 이북에서 중립 지대를 설치해 일본 군대를 주둔하지 말 것"을 조건을 달아 "한반도에서의 일본의 우월적 지위"를 수긍하려 했었지요.

결국 일본은 이 조건을 거부해 전쟁으로 갔었지만 만의 하나에 이토 히로부미 의견대로 러시아와 타협했다면 아마도 39선 이북에서의 러시아의 경제적 침투부터 만만치 않았을 걸요. 이외에는 알렉세에브 총독과 같은 그 당시 러시아의 고관대작들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한반도까지의 유라시아의 문명화의 사업"을 운운하면서 결국 러시아가 이기기만 한다면 한반도도 마땅히 러시아 영향권에 들어가야 할 것임을 시사했었지요.

그런데, 39선 이북 지역의 중립화 요구와 그 지역에의 경제적 침투 계획 (한반도 분단의 아주 거친 청사진이라 할까요?), 마산포와 목포에서의 부동산 사들이기 (해군 기지 때문에), 그리고 모호한 "러시아 영향권에의 한반도 편입" 이야기는 사실이었지만 여태까지의 연구 결과들을 신뢰한다면 "한반도 식민화"의 어떤 구체적인 계획도 러시아의 고문서 보관소에서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1898년에 주한 러시아 공사의 함경도 병합 관련 의견서, 1899년3월18일의 알렉산드르 미카일로비치 대공의 한반도 이북 지역 "경제적 장악" 관련 의견서 정도는 거기에서 찾아낼 수 있는 "계획서"의 전부입니다. 물론 연구자들의 의도적인 은폐나 문서 보관의 부실성 등을 생각해볼 수도 있지만, 일단 1900-1904년간의 한반도에서의 러시아의 정책 흐름으로 봤을 때에 아마도 대일 승리시에도 계속 이용익, 이범진과 같은 친러파 대리인들을 내세워 고종에게 따낼 것 따내고 그랬을 것 같습니다. 영국이 결사적으로 반대하는 상황에서는 식민화는 물론 한반도의 보호국화마저도 제정 러시아로서는 이득에 비해 손실이 너무 많이 가는 무리수이었을 걸요.

물론 러시아가 착해서 그런 것이 아니고 영국 등의 유럽의 매이저들에 비해 형편없이 약해서 그랬던 것이지요. 국제적인 약탈 행위를 벌였을 때에 러시아가 영-불-독에 비해 양심적인 적은 없었지만 일단 산업적 기반과 재정이 약한데다 파리 시장에서 늘 돈을 꾸어 적자를 메꾸는 주제에 눈치 볼 게 하도 많았지요. 그래서 "일본에 안먹혔으면 러시아에 먹혔으리라"와 같은 일부 수구주의자의 주장에는, "러시아가 일본보다 좋은 게 없었지만 일단 패권 국가 영국과 신흥 패권 국가 후보생 미국의 친구는 러시아가 아닌 일본이었기에 러시아의 승산이 어차피 적었으며, 러시아가 이긴다 해도 영국 등의 압력이 계속돼 아마도 계속 고종의 정권을 이용하여 간접적 영향력 행사했을 가능성이 적지 않다, 그리고 구체적인 식민화 계획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라고 답할 수 있을 듯합니다.(*방점은 '아직'에 있는 것인가?)

07. 01. 19.

Корея в огне войны

P.S. 내친 김에 러시아의 대표적인 인터넷서점 오존(www.ozon.ru)에서 '한국(корея)'을 검색해봤다. 음반과 DVD까지 다 포함해서 74종의 목록이 뜬다(엉뚱한 책들이 껴 있기 때문에 진짜 관련서의 숫자는 이보다 훨씬 적다). 최근에 나온 책들을 훑어보다가 가장 흥미를 느낀 건 '20세기의 역사' 시리즈의 하나인 <전쟁의 포화 속의 한국>(2005)이다. 544쪽의 두툼한 책이고 발행부수는 1,000부. 제목 그대로 1950-53년까지의 한국전쟁을 다루고 있는데, 저자 3인이 모두 러시아학자들이다. 그간의 '비밀'에 대해서도 이제는 말할 수 있게 됐다는 소개도 포함돼 있기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져볼 만한 책이다. 한데, 오존에는 품절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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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을 조금 일찍 먹고 돌아오니 책상에 작은 소포가 놓여있다. 물론 책이다(오늘도 세 개를 받았다). 아마존에서 온 걸 뜯어보니 얼마전에 소개한 바 있는 지젝의 <라캉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2007)가 들어 있다(*들은 바로는 국역본이 곧 나온다고 한다).

이미지보다 별로 크지 않은 '포켓북'이다(한동안 전철에서 읽을 책이 정해졌다!). 지난 3일에 주문을 했으니까 보름 정도 걸린 셈이다. 책값보다 배송비가 더 비싸니 배보다 배꼽이 더 큰 경우이지만(합계 21.9불이다), '지젝'이라서 참아두기로 했다(이 시리즈의 최신간은 '사르트르'와 '보부아르'이며 나는 도서관에 구입신청을 했다).  

Этика психоанализа. Семинары. Книга 7. (1959-60)

이런 입문서들이 대개 그렇듯이 색인 앞에 붙은 마지막 장은 추천도서 목록이다. 라캉에 대해서라면 물론 <에크리>와 <세미나>를 읽어야 한다. 지젝의 권고는 반드시 둘다 읽어야 한다는 것인데, 어느 하나만 읽어서는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을 거라는 게 지젝의 설명이다. 그러니까 둘을 겹쳐서, 잇대서 읽어야 하다. 사위인 밀레르가 편집하고 있는 라캉의 <세미나>는 국내에 단 한권도 출간돼 있지 않지만 불어로는 절반 이상이 출간됐으며 영어로는 1-2년의 터울을 두고 계속 번역되고 있다. 러시아어로 가장 최근에 나온 건 <세미나7: 정신분석의 윤리>(2006)이다.

 

 

 

 

지젝의 설명에 따르면 예컨대 이 <세미나7>과 <에크리>에 실려 있는 '칸트와 함께 사드를' 같은 글을 같이 읽어야 한다는 것(물론 우리로선 그런 수고를 할 필요가 없다. <세미나>건 <에크리>건 번역돼 있지 않으니까. 몇 편의 글이 <욕망이론>(문예출판사, 1994)으로 번역돼 있으나 불어본 <에크리> 이상으로 읽기 어렵다(이루어지지 않는 게 욕망이라지만 라캉 읽기에 대한 욕망만큼 이를 실증해주는 게 또 있을까?). 거기에 비하면 지젝은 얼마나 경쾌하며 이해하기 쉬운 것인지!

이어서 지젝이 제시하는 최고의 2차 문헌들(지젝은 이하의 책들을 화끈하게 'the best'라고 소개한다). 몇 권은 그래도 국내에 소개돼 있어서 나의 손끝이 가볍다. 제일 먼저, 가장 짧은 최고의 입문서는 숀 호머의 <라캉 읽기>(은행나무, 2006). 그리고 라캉 임상에 관한 최고의 입문서는 브루스 핑크의 <라캉의 정신의학>(민음사, 2002)과 다리언 리더의 <왜 여자들은 부치는 편지보다 더 많은 편지를 쓰는가?>(1996). 목록에서 내가 안 갖고 있는 유일한 책이다(몇 달전에 도서관에 주문해놓았지만 아직 들어오지 않았다). 다리언 리더는 국내에 소개된 <라캉>(김영사, 2002)의 저자이다.

 

 

 

 

라캉과 철학에 대한 에세이는 조안 콥젝의 <나의 욕망을 읽어봐>(1994)와 알렌카 주판치치의 <실재의 윤리>(도서출판b, 2004). 콥젝의 책은 아직 번역되지 않았지만 <여자가 없다고 상상해봐>와 함께 근간 예정인 것으로 안다(콥젝의 글은 <성관계는 없다>에서 읽어볼 수 있다).  

그리고 사회문화적 현상에 대한 최고의 라캉주의적 독해는 에릭 샌트너의 <나만의 사적인 독일>(1996)과 믈라덴 돌라르의 <단지 목소리뿐>(2006). 돌라르는 알다시피 지젝의 단짝으로 지젝과 함께 슬로베니아의 이론정신분석학회 최초의 멤버 2인 중 한 사람이다. 

거기에 아직까지는 라캉에 관한 최고의 전기로 꼽히는 루디네스코의 <자크 라캉>(새물결, 2000). 이만한 분량으로는 유일한 전기가 아닌가 싶기도 한데, 지젝에 따르면 몇몇 논란이 될 만한 해석에도 불구하고 가장 방대한 전기적 자료를 제공해주는 책이라고.   

마지막으로 라캉에 관한 최고의 웹사이트, 는 여전히 www.lacan.com 이다.

07. 01. 19.

P.S. 지젝 스스로가 자신에 대해 말하는 건 겸연쩍은 일이었겠지만, 내가 꼽는 최고의 라캉 입문서는 물론 지젝의 책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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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osculp 2007-01-19 2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교보문고는 이용안하시나요. 교보에서 주문하신 라캉책 12000원에 뜨는데요.

로쟈 2007-01-19 2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럴 땐 제가 성미가 급해서 바가지를 쓰기도 합니다.--;

에바 2007-01-19 2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다리던 페이퍼였는데 드디어 책이 도착했군요. 저는 일단 학교 도서관에 신청해 두었는데 책이 도착한 듯 싶습니다. 추가 페이퍼도 기다리겠습니다.^^

로쟈 2007-01-19 2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가 페이퍼는 에바님이 쓰셔도 좋을 듯한데요.^^

기인 2007-02-21 1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갑니다. 다시 라깡을 공부하게 될 수도.. 왜냐하면 다시 알튀세를 공부하게 ‰映?때문이죠. 이는 다시 제임슨을 공부하기 시작했기 때문인데. 결국 그 라깡으로 간다면!!! -_-; 최대한 알튀세에서 멈추는 것이 목표입니다.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