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쳐뉴스에 작년도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인 김언수의 <캐비닛>(문학동네, 2006)에 대한 소설리뷰가 실렸길래 스크랩해놓는다. 필자는 젊은 평론가 복도훈씨이다. "<캐비닛>과 더불어 한국문학은 이제 또 한 명의 괴물 같은 작가를 갖게 되었다."(류보선)는 평이 있을 만큼 작품은 지난해에 거둔 한국소설의 수확 가운데서도 두드러진 케이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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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쳐뉴스(07. 01. 19) 캐비닛, 소설의 산해경(山海經)
어떤 소설이 좋은 소설일까? 흥미롭고도 진지하며 슬프도록 유쾌한, 지적인 분석과 멜랑콜리한 아포리즘이 결합하는, 옴니버스식 이야기들의 무진장한 꽃다발인『캐비닛』을 읽으면서 내내 품었던 물음이다. 어떤 소설이 좋은 소설일까. ‘구라’가 장난이 아닌『캐비닛』의 서술자가 들려주는, 한순간에 기억을 상실하고 한참 후가 되어서야 남태평양 섬에서 깨어난 한 타임스키퍼에 관한 13호 캐비닛 보고서를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읽고 있다가, 타임스키퍼라는 별종이 백년 묵은 신흥종교인 자본주의라는 제단(祭壇)이 요구하는 불우한 희생양이 아닐까하고 읽던 책을 접고 멍하니 상념에 잠겨 있다가, 13호 캐비닛에서 꺼내어져 마술의 양탄자처럼 펼쳐질 다음 이야기들이 마저 궁금해져 서둘러 책장을 넘기다가, 어느새 몇 쪽 남지 않은 책장의 부피를 못내 원망하며 한편으로는 이게 끝인가, 하고 갸우뚱해가다가, 가까스로 던진, 질문이다. 그리고 소설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도록 만드는 소설이 좋은 소설은 아닐까, 하고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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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캐비닛』은 도대체 어떤 소설인가.『캐비닛』의 한 구절처럼, 이 소설은 인간이라는 마지막 종, 그리고 새로운 종의 탄생 사이에 존재하는 돌연변이들에 대한 믿거나말거나 “인류학 박물지”인가? 아니면 그 온갖 '심토머'(symptomer)에 대한 사회심리학적 해부인가. 그들을 만들어낸, 적어도 IMF 이후 한국사회의 자본주의적 생리학에 대한 풍자와 비판? 심토머들마저 관리하고 화폐로 환산하려는 체계들, 군대, 학교, 회사의 규율들에 대한 저항과 거부? 작가가 생각하는 형식주의적 소설론에 대한 의미심장한 선언적 알레고리? 자본주의적 망딸리떼에 대한 사회심리학적 분석, 허구의 인물인 아랍의사들의 의학논문과 다윈적 진화론, 블랙유머의 대화들, 갖가지 우화와 기담, “이쑤시개의 존재론적 본질”에 대한 에세이적 사변과 시적 아포리즘,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의 곰탕 뚝배기 소설론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것들이 작가 특유의 구라와 능청이라는 긴 대꼬챙이에 줄줄이 북어 엮이듯 엮인『캐비닛』은 이채로운 부분들의 총합이되, 부분으로 환산되지 않으면서도 총합을 뚫고나오는 과잉과 혼돈의 마술램프라고 부를 수 있다.
『캐비닛』이전이라면 누가 상상이나 해봤을까. 8, 90년대의 동사무소에서나 볼 수 있었던, 냄새나는 추리닝과 테니스 양말 한쪽, 바람 빠진 축구공과 기한이 다 된 자료들이 아무렇게나 뒤섞이고 구겨 넣어져 쾅하고 닫힌, 누구도 돌보지 않았던 이 낡아빠진 13호 캐비닛에서 황당무계하면서도 현실적 연관을 놓치지 않는 이야기들이 이처럼 마구 쏟아져 나올 줄이야.『캐비닛』을 읽다보면 주(鴸)라는 새가 나타날 때 그 고을에 귀양 가는 선비가 많아지고 비(蜚)라는 짐승이 지나간 자리에 풀과 물이 말라 천하에 큰 돌림병이 생긴다는 식의 수백의 이야기들이 적힌 중국의 기서(奇書)『산해경(山海經)』을 자꾸만 연상하게 된다. 물론『캐비닛』의 심토머들이 해악과는 거리가 한참이나 멀고 더군다나 상서로운 것과도 아무런 상관이 없는 존재들임은 부언해야겠지만.
『캐비닛』, 21세기 한국판『산해경』에 실린 심토머들은, “진료과목이나 상담분류표” 등 합리성의 잣대로는 분류가 되지 않는 존재들이다. 그들은 분류를 거부한다는 점에서 괴물에 가까운 존재들처럼 보인다. 새끼손가락에서 은행나무가 자라는 문방구 사내, 혀에서 붉은 혀를 내미는 도마뱀이 자라는 여자, 신용이 중요한 자본주의사회에서 시간을 잃어버린 타임스키퍼들, 자신의 분신을 만나는 '도플갱어'들, “시간이 곧 돈으로 환금되는 21세기”에 긴 잠을 자는 '토포러'들, 불행한 기억 대신 행복한 위장기억을 소유하는 '메모리자이커'들, 일명 어지자지 또는 남녀추니로 불리는 '네오헤르마프로디토스', 외계인 무선통신 회원들, 육체를 마음대로 바꾸지만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는 다중소속자들, 머리가 붙은 샴쌍둥이들, 침대 밑에 악어가 숨어있다고 호소하다가 악어에게 실제로 잡아먹힌 망상증적 '블러퍼'들.
그러나『캐비닛』에서 이 돌연변이들, 저마다 증상(symptom)을 호소하는 그들은 괴물처럼 보이지만, 시장이나 체계에 위협적인 존재들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도심에서 외롭게 앓고 미쳐가지만 누구도 돌아보지 않는 지극히 불쌍한 존재들이다. 그들은 우선 ‘앓는’ 자들이다. 소설 후반부의 키메라 파일을 둘러싼 납치와 감금, 탈출의 에피소드가 암시하듯, 심토머들 중 일부는 관리되고 교환되는 최신유전자정보를 소유한 값비싼 상품이지만, 대부분의 심토머들은 상품가치조차 없는, 버려진 존재들이다.『캐비닛』의 서술자이자 주인공 공덕근이 앓는 그들과 직접 만나거나 상담전화를 받고 충고해주는, 그 역시 증상을 가진 존재이면서도 더러 우뚝 서서 혼잣말을 내뱉거나 흥미롭고도 솔깃한 사례들만 소개하거나 둔탁한 사변을 늘어놓는, 다소 아슬아슬하고도 좌충우돌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유사분석가의 캐릭터로 설정된 것은 그 때문이리라.
무엇보다도『캐비닛』의 장점은 활달하게 말할 줄 알면서도 동시에 잘 귀 기울이고 세심히 듣는 소설이라는 특질에 있을 것이다.『캐비닛』은 시장과 체계에 대한, 시장과 체계가 낳은 돌연변이들의 반란을 그린 원한의 이야기라기보다는, 시장의 잉여생산물들, 체계의 폐기물들인 돌연변이들과 함께하면서 그들의 “억지와 하소연”을 듣고 (샴쌍둥이였지만 지금은 혼자 살아가는 “안개꽃 같은 여자”인 안(眼)과의 만남에서처럼) 때론 안아주며 (“먼지 날리는 환풍기 아래에서 밥을 먹는” 거구의 독신녀 손정은과의 관계에서처럼) 때론 안기기도 하는, 위무의 이야기다. 그렇다면, 심토머들의 애환과 울혈, 외로움과 비존재감이 환기시키는 현실의 모습은 어떠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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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해경』이 고대 중국의 한 시대에 대한 우언(寓言)인 것처럼,『캐비닛』은 21세기, 구체적으로는 IMF 이후, ‘주’와 ‘비’가 활개치고 활보하는 한국식 자본주의의 현실에 대한 우화라고 할 수 있다. 종신고용제가 무너지고 비정규직과 실업에 잠식당한 IMF 이후의 한국의 경제적 현실에서 산업예비군이나 임노동자에게 명백하게 드러난 가장 큰 증상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불안일 것이다. 특별히 고용불안만은 아닌 이 불안은 일찌감치 발터 벤야민이 성찰한 것처럼, 자본주의가 앓고 있는 증상 중 하나다.
『캐비닛』에서 타임스키퍼들에 대한 환상적인 이야기는 자본주의가 불안과 걱정을 회피하려는 종교적 강박증과 연결되어 있다는 성찰과 탁월하게 결합한다. 타임스키퍼들은 그들이 시간을 전부 잃어버리기 전까지는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최상의 인간들이지만, 실제로는 불안하기 때문에 자신들의 삶을 특정하게 반복되는 의례와 규칙에 종속시키려 매순간 긴장하고 애쓴다는 점에서 강박증자들과 흡사하다. 그들은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의례와 규칙을 수행하지 않으면 자신의 존재감을 느끼지 못한다. 소설에서 타임스키퍼들이 한 순간에 사라졌다가 어느 날, 전혀 상이한 시공간에서 깨어난다는 사실은 그들의 비존재에 대한 알레고리이다. 자본주의에는 휴일(holiday)이 없다고 말하기는 쉽지만, 오히려 그 반대로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특정 교리도 신학도 모르며 십자가조차 없는 자본주의라는 신흥종교에는 평일이란 없으며, 매일매일은 강박증적 신도들이 극도의 긴장으로 경배와 찬양을 드리는 축제일(holiday)뿐이다. 서술자의 말을 빌면, “에브리데이가 할리데이”인 것이다.
이쯤 되면,『캐비닛』을 자본주의의 증상학으로서의 소설로 정의해도 무방하다.『캐비닛』의 첫 부분, 상피에르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아 상피에르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도둑 루저 실바리스의 일화와 마지막 부분과의 연결은 다소 무리하다싶다. 그렇지만, “개껌이라도 질근질근 씹어 먹고 싶은 지독한 무료함으로” 가득 찬 절해고도(絶海孤島)에 자발적으로 망명, 13호 캐비닛의 자료들을 옮겨 적는 서술자를 묘사하는 마지막 에피소드를 자본주의라는 망망대해로부터 유폐된 자리에서 선언된, 소설쓰기에 대한 작가적 자의식으로 읽어보면 어떨까. 예컨대, 작가와 더불어 이렇게. “곰탕 뚝배기에 냉면을 담아오면 그것은 냉면이 아니다. 그것은 잘못 만들어진 곰탕일 뿐이다.” 바야흐로 독자들은『캐비닛』과 더불어 새로운 소설 종의 탄생을 목도하고 있는 것일까. 아마도.
07. 01.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