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동네 블로그에 연재하는 '로쟈의 스페큘럼' 두번째 이야기를 일부 발췌해놓는다. 전문은 http://cafe.naver.com/mhdn/15668 에서 읽어보실수 있다. 제목은 '사랑의 길'이라고 붙어 있는데 이야기의 빌미가 된 뤼스 이리가레의 책 제목이기도 하다.  

 

‘연마금속을 찾으러’ 가는 여정도 물론 ‘막연한’ 목적은 품고 있다. 나는 지난주에 이리가레의 <사랑의 길>(동문선, 2009)을 구입했고, 어제는 도서관에서 영역본(The Way of Love)도 대출했다. 그것이 시작이자 종점이 되리라는 예감 때문이었다. 2002년에 나온 이 책은 국내에 소개된 이리가레의 저작 가운데 가장 최근의 것인데, 이리가레는 서문에서 책의 목적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이 책은 특히 어떤 식의 언어 사용을 통해 우리 사이의 사랑의 실천으로 존재할 수 있거나 존재해야 할 것을 예견하고자 한다. 말하자면 우리 사이의 사랑의 지혜를 준비하는 것인데, 이 영역은 서구철학이 스스로를 정의해 왔던 바의 지혜, 특히 정신적 지혜보다 더 중요하지는 않을지라도 그만큼 핵심적인 영역이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 사이의 사랑의 지혜(wisdom of love between us)’를 준비하는 게 목적이라는 것이다. 알랭 핑켈크로트의 에세이 제목이기도 한 ‘사랑의 지혜’는 ‘철학’(=필로소피아)의 어원이 되는 ‘지혜의 사랑’, ‘지혜에 대한 사랑’을 뒤집어 놓은 거울상이다. 즉, 그것은 철학의 거울상이자 ‘다른 철학’이다.(...)  

흠, ‘무릎과 무릎 사이’로 시선을 모아놓고 ‘다른 철학’으로의 여정을 떠들게 되면 어디서 ‘연장’이나 날아오는 게 아닐까? 아직은 ‘우리가 남이가’ 따위의 호소도 먹히지 않을 텐데 말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 사이’는 아직 ‘냉정한’ 사이다. 그러니 나는 뭔가를 ‘더 말해야’ 할 것 같다. 무엇에 대해서? 가슴에 대해서! ‘가슴과 가슴 사이’에 ‘스페큘럼’을 갖다 대지는 않겠지만, 시선이 꽂히게 한다는 점에서는 ‘무릎과 무릎 사이’와 닮았다. 동물행동학자 데즈먼드 모리스도 여성의 가슴은 엉덩이를 모방해 진화했다고 주장하지 않았던가. 그 가슴과 가슴 사이를 가리키는 영어 단어가 ‘클리비지(cleavage)’다. 화학에서의 ‘분열’, 생물학에서의 ‘난할(卵割)’을 뜻하기도 하므로 한국어 ‘가슴골’보다는 용례가 다양하고 고상하다. 고상하다?   



고등학교 때인가 ‘cleavage’란 단어를 처음 보고 ‘감동’했는데,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는 그런 ‘사이’를 지칭하는 단어가 존재한다는 점(사실대로 말하면 그 ‘사이’에 주목한 것은 ‘cleavage’란 단어를 접한 이후다), 그리고 둘째는 전혀 야하지 않다는 점. ‘야하지 않다’는 인상이야 생소해서 그럴 수도 있지만 우리의 ‘가슴골’과 비교할 때 적어도 ‘노골적’이진 않다. 이 여성적 ‘가슴골’과 대비되는 것은 무엇일까? 남성의 ‘등판’ 혹은 ‘등짝’이 아닐까? 정색하고 말하자면, 나는 ‘남성적 주체성’과 ‘여성적 상호주체성’의 대비가 이 ‘등판’과 ‘가슴골’을 통해서 신체적으로 구현된다고까지 말하고 싶을 지경이다!(...) 

10. 06.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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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아 2010-06-21 18: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클레비지란 말이 어느새 많이 사용되는데.. 앙가슴이라는 우리 말도 있습니다. 전 클레비지 보다 앙가슴쪽이 더 어감이 좋더군요. (그런데 뭔가 불안한 느낌은...-.-;;; ) 그냥 순수하게 말입니다..

로쟈 2010-06-21 20:32   좋아요 0 | URL
'클레비지'라고 읽으시는군요. 저도 그렇게 적었는데, 편집자가 '클리비지'라고 고쳐놓았어요. 발음이 그렇더라구요. '앙가슴'은 전혀 뜻이 와닿지 않는데요.^^;

조아 2010-06-21 23:13   좋아요 0 | URL
사전적 의미를 보면, 두 젖 사이의 가운데 이니 클리비지와 같은 부분을 말한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죠. 여성만을 대상으로 하는 표현은 아닌것 같지만 서도요.

그래도. 중학생시절 읽던 판타지소설에서 나온 뽀얀 앙가슴이라는 표현이 아직도 기억에 남은 것을 보면.. .. 뭐 때가 그런 떄여서 겠지요...;;

푸른바다 2010-06-21 18: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leavage에 이런 다양한 뜻이 있는 건 잘 몰랐군요.^^ Cleavage는 광물에서 특정한 방향으로 규칙적으로 쪼개지는 현상을을 지칭하기도 합니다.

로쟈 2010-06-21 20:33   좋아요 0 | URL
네, 어원이 쪼개지다 쪽 같아요. 그런 의미가 확장돼 쓰이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중성적이란 인상을 주나 봅니다...

hnine 2010-06-21 2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leavage는 수정난에서 일어나는 '난할'을 뜻하기도 합니다 ^^

로쟈 2010-06-21 23:11   좋아요 0 | URL
네, 그렇더군요. 저도 본문에 적었습니다.^^

hnine 2010-06-22 08:15   좋아요 0 | URL
아이쿠, 그렇네요 ^^
지금 로쟈님 동영상 강의 들으면서 다른 일 하고 있는 중입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의식주로 채워지지 않는 정신적인 잉여 공간, 가난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시네요^^
이리가레의 책 표지는 심장 인가봐요.

로쟈 2010-06-22 15:48   좋아요 0 | URL
네, 표지가 의미심장합니다.^^
 

지난주에 나온 가장 예기찮은 책은 박홍규 교수의 '루이스 멈퍼드 읽기' <메트로폴리탄 게릴라>(텍스트, 2010)와 번역서 <유토피아 이야기>(텍스트, 2010)이다. <예술과 기술>(민음사, 1999)의 저자 정도로만 알고 있던 이 문명비평가의 전모를 소개하고 20대에 출간한 그의 처녀작을 우리말로 옮겨놓은 것인데, 멈퍼드(멈포드)가 자칭한 '제너럴리스트'란 말은 박홍규 교수에게도 더 없이 잘 적용될 듯싶다. 

  

멈퍼드는 '스페셜리스트(전문가)'와 대비하여 '제너럴리스트'를 "개별적인 부분을 상세히 연구하기보다 그러한 파편들을 하나의 질서 있고 의미 있는 패턴 속에 통합하는 것에 더욱 흥미를 느끼는 사람"(<유토피아 이야기>, 17쪽)이라고 정의한다. 박 교수는 이를 '전인(全人)'이란 말로 옮겼는데, 그 자신이 진정한 전인이자 우리시대의 '르네상스인'이라고 해야겠다(대표적인 다작 저술가인 저자는 최근 들어 매년 5권 이상의 저/역서를 출간하고 있는데, 오직 강준만 교수만이 이에 비교될 수 있다).  

자유와 자치, 자연이 아나키즘의 핵심적인 가치라고 지속적으로 주장해온 박홍규 교수는 바로 그런 맥락에서 멈퍼드 또한 '소박주의자'에 '아나키스트'였다고 평한다. 멈퍼드는 어떤 인물이었나?  

루이스 멈퍼드(1895-1990)의 94년 긴 생애는 20세기와 거의 겹친다. 기술적 전문가들에 의한 거대한 물질 만능주의 시대인 20세기에 그들이 섬긴 거대한 권력, 도시, 기계를 비판하고 소박한 자유, 자치, 자연을 존중하는 르네상스적 전인으로서 살다 간 20세기의 대표적인 학자이자 비평가이며 지성인이자 지식인이고 휴머니스트였던 사람이 멈퍼드였다.(<메트로폴리탄 게릴라>, 27쪽) 

"그런 멈퍼드의 삶과 사상을 검토하여 우리의 지적 스승으로 삼고자 이 글을 쓴다"고 저자는 프롤로그에서 밝히고 있다. 멈퍼드는 60년에 걸쳐서 28권의 저작을 남기고 있는데, 저자는 이를 연대별 주제별로 재구성하여 멈퍼드의 사상을 조감할 수 있도록 해준다. 대학도 졸업하지 않고 고정적 직업도 갖지 않았지만 삶과 앎을 일치시키고자 했던 지적 거인이자 '가운을 걸치지 않은 철학자'에 대한 경애감이 없었다면 쓰여지지 않았을 책이다. 덕분에 독자로서는 너무도 편하게 멈퍼드의 '게릴라전'을 관람할 수 있게 됐다(독자의 몫은 이제 그 게릴라전에 '동참'하는 것일까?).     

'르네상스적 제너럴리스트'답게 전방위적 저술을 남기고 있지만 멈퍼드의 저작 목록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건 내겐 <허먼 멜빌>(1929)이다. <모비딕>(1851)의 작가, 그 멜빌 말이다.  

멈퍼드 시대까지도 멜빌은 해양소설을 쓴 비주류 작가로 낮게 평가되었으나 멈퍼드는 멜빌의 개성과 그 발전에 대해 흥미를 기울여 그를 단테와 같은 도덕적 철학자로 평가했다. 멈퍼드는 특히 <모비딕>을 <햄릿>이나 <신곡>과 같이 위대한 작품이라고 평가했다.(147쪽) 

 

멈퍼드가 쓴 <허먼 멜빌>은 300쪽이 넘는 본량의 본격적인 작가론인데, <모비딕> 읽기를 오래 전부터 벼르고 있던 터라 관심을 갖게 된다. 김석희본도 출간된 김에 내년에는 <모비딕>에 대한 강의도 기획하려고 한다(<모비딕>과 멜빌의 책 몇 권을 바로 주문했다). 오래 전부터 도스토예프스키와 멜빌을 비교해보려는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내년에는 '꿈'이 이루어질지도 모르겠다. 참고로, 1977년에 멜빌 협회 명예회장으로 추대됐을 정도로 멈퍼드의 멜빌 연구는 높이 평가됐다고 하며, 멜빌과 함께 그가 찬양한 작가가 <악령>의 도스토예프스키였다고(토마스 만의 <마의 산>도 높이 평가했다고 한다).    

<모비딕> 얘기가 나오니까 떠올리게 되는 작가는 알베르 카뮈다. 그건 지난주에 <페스트>에 대한 강의를 한 때문인데, 이 작품을 구상하는 과정에서 카뮈는 멜빌의 <모디딕>을 사숙한 걸로 돼 있다. "멜빌은 카뮈의 창조를 상징과 신화의 차원으로 승격시키는 데 좋은 길잡이가 될 것"이었다는 게 김화영 교수의 설명이다. <모비딕>을 정독하고 노트했다는 내용은 <작가수첩1>에 들어 있으며, 카뮈의 '허먼 멜빌'이란 짧은 작가론은 <스웨덴연설/문학비평>에 포함돼 있다. 개인적으론 이번에 다시 읽으며 <페스트>가 '카뮈판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란 생각이 들었다(연극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카뮈는 이반 역을 맡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자세한 건 방학때 쓰고자 하는 <페스트>론에 적어두려고 한다. 아무려나 허먼 멜빌을 매개로 루이스 멈퍼드와 알베르 카뮈가 만날 수 있다는 점이 오늘의 발견이다... 

10. 06.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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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루이스 멈포드와 유토피아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7-19 00:40 
    루이스 멈퍼드의 <유토피아 이야기>(텍스트, 2010)와 박홍규 교수의 <메트로폴리탄 게릴라>(텍스트, 2010) 출간 기념으로 박홍규 교수의 대담 자리를 갖게 됐다. 도서출판 텍스트의 제안에 따른 것으로 일시는 8월 24일(화) 저녁 7시 30분이고, 장소는 청어람아카데미 지하소강당이다. 알라딘 이벤트는 http://blog.aladdin.co.kr/culture/3896091 참조.
 
 
노이에자이트 2010-06-20 2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선상반란,특히 노예반란에 관심이 많아 멜빌의 중편'베니토 세레뇨'를 감명 깊게 읽었습니다.추리소설로도 최고입니다.그런데 요즘 번역본이 안 나오더군요.

로쟈 2010-06-20 22:46   좋아요 0 | URL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건 <모비딕>과 <바틀비>, <빌리버드> 정도인 듯해요...

2010-06-20 23: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6-20 23: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푸른바다 2010-06-21 0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석희의 새 번역본 <모비딕>을 서점에서 발견하고 반가운 마음에 집어들었다가 너무 비싼 가격에 그냥 두고왔던 기억이 나는군요.^^ 화려한 일러스트가 포함되긴 했지만 저작권 문제가 없는 소설책 한권에 그토록 비싼 가격을 책정하는 건 좀 문제가 있지 않나 싶더군요. <모비딕> 영어 원본을 읽으려고 시도한 적이 있었는데 참으로 읽기 어려운 영어문장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영미 명작 좋은 번역을 찾아서>를 보면 <모비딕>은 제대로 된 번역본도 없었다는데 김석희 번역본은 어떨런지 모르겠네요...

로쟈 2010-06-21 08:22   좋아요 0 | URL
네, 목돈 들어가는 책입니다. 청소년판으로 나오긴 했지만, 그래도 가장 기대가 되는 번역본이죠...

2010-06-21 09: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6-21 20: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오랜만에 지젝의 기독교론에 대한 글이 눈에 띄기에 자료로 챙겨놓는다. 주로 <죽은 신을 위하여>(길, 007)에 근거하여 '신의 죽음'에 대한 지젝의 해석을 풀이해주고 있다. 지젝 스스로는 '기독교의 도착적 핵심'이라고 불렀던 것이기도 하다.  



중대 대학원신문(10. 06. 03) 초월적 신의 죽음이라는 기독교의 ‘복음’   

자본주의는 그것을 견제할 대항체제를 결여한 채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을 달고 1989년 이후 내내 질주해왔다. 세계를 강타했던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 곳곳에서 국가의 개입을 통해 자본주의를 조정하자는 목소리가 들리지만 여전히 우리를 지배하는 것은 출구가 없다는 느낌과 무력감이다. 지젝을 비롯해 바디우, 아감벤 등의 정치철학자들은 이러한 국면에서 대안을 모색한다. 특히 벤야민이 제시한, 신적 정의를 도입하는 신적 폭력에 의한 역사의 ‘중단/중지’ 논리는 최근 들어 상당한 호응을 얻고 있다. 이러한 문제의식들은 주체의 ‘윤리’에 대해 강조하고, 나아가 세속화 이후 기각됐던 기독교 전통을 재고·재전유한다. 무신론자이자 유물론자인 지젝에게 기독교 전통은 이데올로기적 환상을 돌파하는 주체와 공동체를 구성하는 전복적인 무기다.  

도착이 지배하는 현대 사회
주체의 질문에서부터 시작하자. 주체는 이 세계에서 “당신은 무엇을 원하십니까?(Che Voui?, 즉 이 세상은 나에게 무엇을 원하는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면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질문에 어떻게 답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삶의 지향은 달라진다. 지젝은 기독교를 통해 ‘다른 답변’을 제출하는 주체를 찾아낸 듯하다. 



근대 이후 국가, 신, 도덕, 상징적 법 등 큰타자의 힘은 점점 쇠퇴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지젝은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에서 냉소주의 주체에 대해 지적한다. 사람들은 자본주의에 문제가 많다는 것을 알면서도 체제에 안착한다. 냉소주의는 큰타자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큰타자와 ‘거리를 유지함으로써’ 주체가 현실에 안주(즉 현실로 도피)하도록 하기 때문에 이데올로기적이다.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환상이 가능한 이유는 그것이 향락(Jouissence)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냉소적 주체들은 현대의 소비사회와 전체주의 사회를 가득 채우고 있다. 이들은 초자아의 ‘즐겨라!’라는 향유 명령에 종속되어 있다. 큰타자가 약화된 현실에서의 상징적 법의 기능부전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신이 존재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견해를 입증할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라캉의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이 금지된다”는 말이 진실임을 보여준다.

이러한 곤궁에 대처하기 위해 현대인들이 빠져들게 되는 유혹이 ‘도착(perversion)’이다. 쾌락의 과잉이 주는 위험을 피하기 위해 현대인들은 다시 금지를 도입한다. 사적 영역에서는 새도-매저키즘으로 각자 규제(법)를 발명하고, 웰빙 강박, 카페인 없는 커피, 다이어트와 채식, 육체 접촉 없는 섹스 등 수많은 금지를 만들어낸다. 상징적 법이 작동하지 않으므로 쾌락이 주체를 압도하는 한편, 법을 통해 기존에 얻던 향락(법의 뒷면에서 은밀한 위반을 하면서 얻게 되는 향락, 즉 ‘법의 외설적 보충’)도 사라질 위험에 처한다. 따라서 도착은 “인위적으로 법질서를 세우려는” 시도이자, “법의 위반을 성문화”하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하지만 문제는 도리어 더 커진다. 부시를 위시한 미국 기독교 근본주의 우파들이 행하는 ‘민주주의의 사도되기(이라크 전쟁)’를 떠올려 보자. 민주주의라는 큰타자를 자임하는 행위가 낳은 결과는 불합리한 전쟁이었다. 또한 지젝은 제도기독교가 ‘도착’의 유혹에 빠져 있다고 분석한다. <죽은 신을 위하여>의 부제는 ‘기독교의 도착적 핵심’이다. 지젝의 기독교 수용은 이러한 현대적 주체의 곤궁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된다. ‘기독교의 전복적 핵심’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욥에서 그리스도로 이어지는 유대교에서 기독교로의 이행과정이 보여주는 계시에 있다. 



욥에서 그리스도로
유대교에 대한 지젝의 해석은 욥에 대한 해석에서 나름의 독특성을 보인다. 성서의 <욥기>는 고통의 정당화라는 이데올로기의 기본적인 전략을 폭로하는 “역사상 최초의 이데올로기 비판”이다. 그는 욥이 신의 무능함을 대면하는 유대인의 경험을 대표한다고 보았다. 욥은 자신의 엄청난 고난에 대하여 ‘당신은 무엇을 원하십니까?’라는 히스테리 환자의 질문을 제기한다. 욥은 아마도 지젝이 헤겔에 이어 발견한 또 하나의 숭고한 히스테리 환자라고 할 수 있다. 세 친구들의 그럴듯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욥은 자신의 결백함과 자신의 고통이 지닌 무의미를 고수한다. 인간 욥의 고통과 그로부터 도출되는 신정론적 질문이 야기하는 것은 바로 신의 자기분열이다. 신은 욥의 주장이 옳다고 하면서도, 자신의 무능함을 감추기 위해 ‘코믹물의 요소가 가미된 공포물’을 연출한다. 결국 욥의 시험에서 시험대에 오른 것은 신이었다. 유대교는 이러한 신의 무능함을 숨겨진 ‘유령적 역사’이자 ‘불문율’로, 발설하지 않고 공유하였기 때문에 영토가 없는 가운데서도 종족성을 유지하는 독특성을 성취했다고 지젝은 주장한다. 그렇다면 기독교와 유대교의 차이는 무엇인가.

욥과 유대교는 신의 무능함에도 불구하고 신이 전능한 것 같은 겉모습만은 유지했다. 하지만 기독교, 특히 바울은 신이 자신의 무능을 대면했음을 드러낸다. 더 이상 은밀한 유령적 역사를 보충하지 않는 것이 기독교의 새로움이다. 지젝이 보기에 욥의 자기분열은 신의 자기분열을 예견하는 것이었다. 신의 자기분열은 그리스도의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란 외침에 잘 드러난다. 정통 기독교를 옹호한 가톨릭 추리소설가 G. K. 체스터턴은 <오소독시>에서 이 외침을 ‘신의 무신론적 외침’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그리스도는 욥의 반복이자 급진화다. 십자가에서 죽은 것은 바로 저 너머의 ‘초월적 신’이다. 하지만 십자가에서 죽은 신은 (헤겔의 ‘부정의 부정’을 거쳐) 신자들 가운데 ‘성령’으로 부활한다. 바울에게서 그리스도의 죽음은 비극이 아닌 승리의 소식이 된다. 성령공동체는 사회적 질서의 특수성을 넘어 신자들을 ‘보편적 차원’에 직접 참여케 한다. 주체들은 큰타자의 상징적 허구에 매달리기보다는 실재에 기반하여 성립되며, 타자의 유한성과 연약함에 ‘직접적으로’ 동일시하는 아가페를 성취한다. 성령공동체는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큰타자를 상정하지 않고 환상을 횡단한 ‘분석가 주체’의 공동체이며, ‘법과 위반의 악순환’이라는 교착상태를 뛰어넘어 사랑(아가페)으로 서로 교류한다.  

전복적 기독교는 가능한가 : 욥의 질문을 고수하기
지젝이 시도한 새로운 방식의 기독교 전유는 도착적 주체가 지배하는 현대사회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모색된 것이다. 지젝은 “기독교의 전복적 핵심은 오로지 유물론적 접근을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으며, 역으로 진정한 변증법적 유물론자가 되기 위해서는 기독교적 경험을 거쳐야 한다”고 말하면서, 전복적 기독교(꼭두각시)가 유물론(난쟁이)의 도움 하에 성립될 수 있다고 암시한다.

오늘날 우리는 욥처럼 각자의 고통으로 인해 현 신자유주의적 사회질서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지 못한다. 우리에겐 ‘개인 단위의 성공’의 사다리를 올라가거나, ‘루저’가 되는 두 경로 말고는 선택지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경험 한복판에서 우리는 욥의 질문을 도입해야 할 것이다. “신은(이 폐쇄된 세계는) 나에게 무엇을 원하는가(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우리의 삶을 설명해주는 많은 논리들이 있다. 성공 논리든, 자기계발서든, 명상서든, 제도종교든 이 모두는 욥의 세 친구처럼 우리가 이 세계의 현실로 도피하게 해주는 이데올로기적 설명을 제공한다. 그런데 우리가 만일 세 친구의 설명을 거부하고 욥처럼 자신의 결백성과 고통의 무의미를 고수한다면, 그리하여 인간의 분열에 머무르지 않고(분열된 채로 살아가지 않고) 신을 시험대 위에 올리고 신의 자기분열을 낳는다면, 욥의 시험이 신의 시험을 낳았듯이 현 사회체제를 시험대 위에 올릴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나를 분열시키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분열을 끝까지 추구한다면 화폐가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추상적 보편성’이 시험대에 올라 자기분열하지 않겠는가. 결국 지젝이 말하는 신의 죽음은 자본주의 체제의 중단(중지)을 암시하는 것이 아닐까.(박치현/ 사회학과 강사) 

10. 06. 20.  

P.S. 참고로, 기독교 신학자인 존 밀방크와 공저한 <그리스도의 괴물성>(2009)은 번역본이 나올 예정이다. 아담 코츠코의 <지젝괴 신학>(2008)도 이 주제에 관한 유력한 참고문헌이며, <신학과 정치적인 것>(2005)은 두툼한 학술발표회 논문집으로 크레스톤 데비이스와 존 밀방크, 슬라보예 지젝이 공동 편집자이다. 지젝이 시리즈 편집자인 SIC의 한 권으로 출간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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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교수신문의 'Cogitamus 우리는 생각한다' 코너에 실은 칼럼을 옮겨놓는다. 지난주에 종강을 하면서 느낀 소감을 간단히 적었다. 일정이 취소되긴 했지만 지난 토요일에 한 교양강좌에서 '교양이란 무엇인가'란 주제로 강의를 할 예정이었기도 해서 다시금 교양의 문제를 화두로 다루었다.  

 

교수신문(10. 06. 14) 교양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  

종강 시즌이다. 한 학기 강의를 마무리하면서 다시금 원론적인 질문을 던진다. 교양이란 무엇인가. 러시아문학에 대한 교양강의를 끝내자니 “현대의 교양은 도스토옙스키나 실존철학이 아니라 아인슈타인이고 뇌과학”이라는 일본 저술가 다치바나 다카시의 일갈이 다시금 떠올랐고, 새로운 IT문화가 주도하는 시대에는 문·사·철이 아닌 ‘새로운 교양’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일리가 없지 않다는 생각이 새삼 들어서다. 

일본인 저자들의 책을 뒤늦게 몇 권 펼쳐보았다. 실상 우리가 쓰는 ‘교양’이란 말도 따져보면 일본에서 건너온 말이고, 교양주의의 ‘원조’ 또한 일본의 ‘다이쇼 교양주의’가 아니던가. 부국강병의 논리에 휘둘렸던 메이지 시대와는 달리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기에는 철학이나 문학, 역사 등의 인문서 독서를 강조한 새로운 문화가 고학력 엘리트들을 중심으로 형성되고 그것이 ‘교양주의’라 불리게 된다. 일본에서는 이 새로운 문화적 흐름이 이와나미출판사에 의해 주도됐다고 하여 ‘이와나미 문화’라고도 부르는 모양이다. 가령 ‘세계문학전집’이나 ‘세계사상전집’ 등은 ‘교양주의’의 가장 대표적인 표상이다. 교양의 지표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독서 유무였던 시절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1970년대 대중사회가 성립하면서 이러한 교양주의는 쇠퇴하기 시작한다. 일본의 경우는 ‘지식인 시대의 종언’과 맞물리는 것이 바로 ‘교양주의의 쇠락’이었다. 이런 ‘역사적 교양주의’가 지식대중화사회에서, 그리고 ‘대졸자 주류사회’에서 여전히 예전과 같은 위상과 의의를 보존할 수 있을까? 



도쿄대 교양학부에서 엮은 『교양이란 무엇인가』(지식의날개, 2008)에 실린 좌담에서 교수들이 토로하고 있는 문제의식도 한국 대학의 현실과 별반 다르지 않다. ‘학생생활실태조사’ 설문에서 ‘어떤 고민을 하고 있는가’라는 질문 항목에 대한 대답을 보면, 1960~70년대 학생들이 주로 ‘인생의 의미’라든가 ‘자아의 확립’이라고 적었던 데 반해서 요즘 학생들은 취업이나 졸업, 교우관계 등 고만고만한 문제들을 적어낸다고 하며, 학생들의 이런 고민을 교양학부와 어떻게 연결시킬 것인가가 말하자면 교양학부 교수들의 ‘고민’이다. 거기에 덧붙여, 다이쇼적 교양주의가 너무 근대적인 자의식에만 얽매여 인간의식의 문제에만 초점을 맞춘 탓에 자연과학 쪽 지식은 등한시했다는 지적, 따라서 21세기 교양의 과제 중 하나는 자연과학적인 식견을 어떻게 교양 안으로 도입해 나갈 것인가 하는 문제라는 제안도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인문교양 대신에 과학교양에 압도적인 비중을 할애해야 한다는 다치바나의 주장과도 통하는 대목이다.

『교양이란 무엇인가』가 대학 안의 고민과 모색을 담고 있다면, 대학 밖의 시각은 좀 더 신랄하다. 일본의 경영컨설턴트 오마에 겐이치는 『지식의 쇠퇴』(말글빛냄, 2009)에서 이제 교양은 더 이상 “칸트나 헤겔, 데카르트와 같은 철학자나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와 같은 고전문학을 중심으로 한 문화”가 아니라고 말한다. “마르크스나 케인스와 같은 경제학의 대가나 뉴턴, 아인슈타인과 같은 과학자”도 아니고, “정치학자 마루야마 마사오나 이와나미신서”도 아니다. 과거에는 클래식이나 고전문학, 고전미술에 관한 소양이 비즈니스 생활에서 여권이나 소개장 역할을 했지만 이제는 통하지 않게 됐다는 것이다. 어째서인가.  



이유는 사뭇 단순한데, 이른바 ‘글로벌 리더’들이 전통적인 교양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대신에 그들의 관심은 “당신은 지구시민으로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생각하고 어떤 행동을 하고 있는가?” 같은 문제에 쏠려 있다는 지적이다. 과거에는 문학이나 음악 등에 일반인보다 깊은 조예를 갖고 있는 사람이 교양인의 모델이었지만, 지금은 사회공헌과 환경문제에 대한 관심이 훨씬 더 중요한 척도다. ‘지적기반의 공유’가 교양의 중요한 기능이라면 시대의 변화에 따라 교양의 내용도 달라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철학’과 ‘그리스신화’에 관한 지식 대신 ‘인터넷 사회의 최첨단 동향’이 21세기 교양이라는 지적은 ‘교양이란 무엇인가’란 질문이 왜 다시 던져져야 하는지 시사해준다.

애초에 ‘교양’이란 말의 기원은 독일어 ‘빌둥(Bildung)’이었다. 흥미롭게도 일본 저자들의 교양론은 이 점을 한 번 더 상기시켜준다. 『교양이란 무엇인가』에서 생명과학 전공의 한 교수는 독일 대학에 근무하던 시절 동료들이 일본문화와 문학에 대한 깊이 있는 질문을 자주 던졌던 일을 회상하면서 이른바 교양이 없으면 그들과의 대화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을 통감했다고 고백한다. 오마에 겐이치 또한 ‘지구에 무엇을 돌려줄 수 있는가?’란 현재적 교양의 문제를 가장 열심히 고민하는 사람들이 독일인이라고 말한다. 독일의 경영자들은 뜬금없이 “당신은 터키를 위해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란 질문을 던지는데, 그러한 이슈에 제대로 답하는 것이 그가 생각하는 ‘교양’이다. 시대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교양의 핵심은 ‘독일인의 질문에 답하는 것’인가 보다.  

10. 06.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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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indrenai 2010-06-14 18: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식과 질문을 구별하여, 지식으로서의 교양에 대한 질문과, 질문으로서의 교양에 대한 질문을 구별하여 생각하면 어떨까요. 지구에 무엇을 돌려줄 수 있는가?란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할 수 있으려면 그러한 질문을 구성하고, 자신과 세계에 질문해보았어야 가능한 대답이 아닐까하는 생각입니다.
대답에 있어서 지식이 필요조건이라면, 질문은 필요충분조건이 아닐지.. 그러한 질문을 구성할 수 있는 능력, 성찰을 가능하게하는 능력을 교양이라면, 인터넷 사회의 최첨단 동향으로 지적기반이 바뀌는 것은 교양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있어서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당신은 지구시민으로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생각하고 어떤 행동을 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글로벌 리더들에게 성찰적 질문이 가능하지 않으면, 그러한 질문과 행동은 단순히 보여주기 위한 것이 되는 것은 아닐까요.

로쟈 2010-06-14 19:45   좋아요 0 | URL
네, '질문으로서의 교양'도 교양이지요. 저로선 '공유된 지적기반'으로서 기능했던 '역사적 교양주의'를 문제삼고 싶었어요. '고전'이나 '교양'이라는 이데올로기에 대해서 거리두기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blindrenai 2010-06-14 20:15   좋아요 0 | URL
그래요. 교양을 고전지식만으로 생각하는 경향과 더불어, 단순히 전공과목의 이해를 돕는 전단계로만 생각하는 것도 문제가 있는 것 같아요. 대학에서 학생들이 졸업할때까지 공통적으로 듣는 수업이 교양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오히려 교양교육이 전공보다 더 중요할 수 있으니까요. 문제는 어떤 교양교육이냐일텐데..

로쟈 2010-06-15 12:44   좋아요 0 | URL
교양의 보편성과 함께 그 역사성에도 주목해봐야 하지 않나 싶어요...

노이에자이트 2010-06-17 1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마전 외신을 보니 런던정경대학에서 경제학과를 졸업한 뒤 경제분야 블로그를 운영하는 사람더러 '경제학을 독학으로 공부했다'는 표현을 하더라구요.많은 나라에서 학부졸업은 전공으로 간주하지 않는 것 같은데 실제로 그런가요?

로쟈 2010-06-18 08:57   좋아요 0 | URL
여유있는 나라들에선 대학원부터가 '전공'이라잖아요. 우리야 급하니까 2+2로 했지만요...
 

엊저녁엔 다 아는 바와 같이 남아공 월드컵 조별예선 첫 경기에서 한국이 그리스에 기분 좋은 승리를 거두었다. 우리가 생각보다 강한 건지, 그리스가 생각보다 약했던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리스 감독은 첫 골을 그리스가 넣었더라면 경기의 양상은 달라졌을 거라고 말했다. 지당한 말이다. 축구공은 둥그니까. 그런 불확실성을 다시금 상기시켜준 건 영국과 미국의 경기. 새벽 경기라 직접 보진 못하고 아침에 스코어만 확인했는데, 이 또한 알다시피 1:1 무승부라는 의외의 결과였다. 물론 영국이 승리할 가능성이 거꾸로일 가능성보다는 몇 배 높았지만 결과는 무승부였고, 가장 결정적인 건 어이없는 동점골을 내준 영국 골키퍼의 실수였다. 덕분에 좀더 '유명해진' 로버트 그린은 경기후 인터뷰에서 "이것이 골키퍼의 인생"이라는 매우 담담하면서도 철학적인 소감을 밝혔다. “항상 안정감을 유지하고 어려운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하는 것이 문제다. 하지만 골키퍼의 인생은 그런 것”이라고. 

 

당장은 그가 다음 경기에도 기용될지 미지수인데, 기사를 보다 보니 문득 제임스 설터의 <어젯밤>(마음산책, 2010)에 대한 신형철 문학평론가의 칼럼이 생각났다. '그래, 이제는 돌이킬 수 없다'가 지난주 한겨레21의 칼럼 제목이었다(http://h21.hani.co.kr/arti/COLUMN/130/27484.html). 간단하게 소설 일반론을 먼저 기술하고 그는 이렇게 적었다.   

범박한 일반론이지만 다시 정리해볼 생각을 한 것은 최근에 출간된 제임스 설터의 소설집 <어젯밤>(마음산책·2010) 때문이다. 이 인상적인 책은 사건, 해석, 진실, 단절로 이어지는 저 과정을 놀랍도록 효율적인 방식으로, 짧고 깊게, 단숨에 성취해버린다. 그림자에게 소매치기를 당한 기분이랄까. 1925년생이니 80살이 되던 해에 출간한 책이다. 소설은 통찰력의 산물이고 통찰력은 시간의 선물이라는 점을 되새기게 하는 대목이다. 어쩐 일인지 우리에게는 이 책으로 처음 소개되었지만, 미국에서는 “소설을 찾아 읽는 독자들에게 제임스 설터가 생존한 미국 작가 중 영어를 가장 잘 쓰는 작가라는 사실은 일종의 신념과도 같다”(리처드 포드)는 평을 받는 대가라고 하니, 이제야 읽게 된 게 좀 억울할 지경이다.

열 개의 단편소설 중 ‘포기’와 ‘어젯밤’이 단연 압권이다. ‘포기’에서 잭은 그의 아내와 아이에게 좋은 남편이자 아빠처럼 보인다. 잭의 친구인 시인 데스가 마치 가족의 일원인 듯이 함께 살고 있는데, 평범한 조합은 아니지만 뭐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며 작품을 읽게 된다. 아내의 생일을 맞아 단란한 저녁 식사를 마치고 돌아온 날 밤, 아내가 잭에게 데스에 관해 무언가를 말한다. 다음날 아침, 세상은 완전히 달라진다. ‘어젯밤’의 경우는 더 극적이다. 어젯밤 월터는 죽어가는 아내의 요구로 그녀의 안락사를 도왔다. 그 와중에 무언가가 잘못되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월터의 삶은 무너진다. 두 작품 모두에서 ‘어젯밤’은 사건의 날이다. “그게 무엇이었든 두 사람 사이에 있던 건 사라지고 없었다.”(199쪽)  

"생존한 미국 작가 중 영어를 가장 잘 쓰는 작가"란 표현은 '옮긴이의 말에 인용돼 있는데, 사실 이토록 '대단한' 작가의 이름이 국내에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가 이번에 처음 소개된다는 점이 좀 놀랍다. 하성란 소설가도 "제임스 설터는 너무 늦게 우리 독자에게 왔다. 왜 존 치버나 레이먼드 카버에 가려져 있었는지! 하지만 지금이라도 그의 소설을 읽게 되어 다행이다. 참 다행이다."라고 적었을 정도다. 

책 말미에는 '이 책에 쏟아진 찬사'가 몇 페이지에 걸쳐 나열돼 있는데, "표제작 '어젯밤'은 안톤 체홉의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에 견줄 만한 잊을 수 없는 걸작이며, 이 시대 문단 최고의 단편으로 자리한다."는 평이 눈길을 끈다. 수전 손택도 "제임스 설터는 독서의 강렬한 즐거움을 아는 독자에게 특히 어울리는 작가다"라며 거들었다. 뭐 이 정도면 거의 '협박' 수준이다. 작품을 읽지 않을 재간이 있을까. 역자가 '옮긴이의 말'을 마무리하는 소감은 가히 정점이라 할 만하다.  

"설터의 책을 번역하는 건 호화 저택에서 몸종을 거느리고 사는 기분이다. 아니, 그보단 바닷가에 지은, 커다란 테라스가 있는 집에서 맨발로 뛰어다니며 사치스럽게 산 기분이다. 이제 그 집에서 떠나고 싶지 않다." 

 

해서 '옮긴이의 말' 타이틀이 '호화로운 집에 살다'이다. 대체 어떤 '집'인가 궁금하여 현관 계단까지 갔다가, 책상에 잔뜩 쌓여 있는 책과 일거리를 생각하여 오늘은 이렇게 변죽만 울리기로 했다. 아마도 내일쯤 좌석버스 안에서 읽게 되지 않을까 싶다. 아직 첫 작품도 읽기 전이지만 미리부터 그의 대표작이라는 <가벼운 나날들>이 번역되길 기대해본다. 랜덤하우스의 명편집자 조지프 폭스가 자신이 편집한 책 중에 다음 세대까지 남을 책을 들어달라는 질문에 트루먼 카포티의 <인 콜드 블러드>와 함께 꼽았다는 책이다. 아, 인생은 짧고 읽을 책은 너무나 많도다!..  

10. 06. 13. 

P.S. "생존한 미국 작가 중 영어를 가장 잘 쓰는 작가"란 표현에서 인용한 제목이 잘못 번역된 문장에 근거하고 있다는 지적도 있으므로 참고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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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14 02: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6-14 22: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하이드 2010-06-14 02:24   좋아요 0 | URL
아름다운 영어.가 강조될수록 번역문을 읽을때의 찜찜함도 느는 것 같습니다. 평을 보기 전에 책을 읽을 때는 (물론 개인차가 있겠지만) 위의 평처럼 대단한 느낌은 받지 못했거든요. 카버의 번역본과 원서가 사뭇 다른 느낌이었듯이, 제임스 설터도 그런 작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제임스 설터의 책으로는 국내에 번역된 부인과 함께 쓴 음식 이야기같은 약간은 싱거운(?) 책도 있어요. 마음산책의 인상적인 표지 이야기, 제가 포스팅 했던 것 링크 남겨 봅니다.

http://blog.aladdin.co.kr/misshide/3752917


로쟈 2010-06-14 19:43   좋아요 0 | URL
'아름다운 영어'라기보다는 '간결한 영어' 같습니다. 카버나 치버 계통의...

Kitty 2010-06-14 03:54   좋아요 0 | URL
아름다운 영어...라면 번역가의 두통이 먼저 떠오르는...ㅠㅠ
영어가 수려하고 멋질수록 번역하기는 더 어려운 것 같아요.
그래서 소설 번역하시는 분들이 더욱 대단해보이기도 하고요.

로쟈 2010-06-14 19:42   좋아요 0 | URL
적재적소에 잘 들어맞는 언어를 구사하는 게 사실 작가의 역량이죠...

나비 2010-06-14 22:59   좋아요 0 | URL
좋은 글 감사합니다.
영어 배우는데 나름 열심인 사람입니다. 로쟈 님의 글(http://blog.aladdin.co.kr/mramor/3818074)에 달린 댓글들을 제 블로그(http://blog.jinbo.net/hizino/?pid=37)에 올려도 되는지요?
저작권을 명시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로쟈 2010-06-14 23:01   좋아요 0 | URL
네, 무방합니다.

나비 2010-06-14 23:11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비로그인 2010-06-15 05:06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처음 인사드립니다!
로쟈님의 글은 난해한 개념의 분류와 번역의 문제를 명료하게 해주셔서 이제 막 공부를 시작하는 제게 매우 유익한 길잡이가 되고 있습니다. 실은 그간 곁눈질로 선생님께서 후학들에게 퍼감을 허락하시길래 제 맘대로 선생님의 글을 퍼갔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런데 요사이 몇몇 주제들을 구체화하려다 보니 글을 퍼감을 선생님께 정식으로 허락 받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원서번역의 인용이나 용어 상의 문제가 발생할 경우 꼭 출처를 밝히도록 하겠습니다. 사후 재가를 구하는 것이 되어 좀 민망하지만 그래도 말씀을 드리는 것이 나을 것같아 용기를 내어 댓글을 올립니다. 허락해주시길 바라며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로쟈 2010-06-15 10:30   좋아요 0 | URL
출처만 밝히시면 펌은 다 무방합니다..

비로그인 2010-06-15 11:51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로쟈 2010-06-21 08:23   좋아요 0 | URL
^^

sophie 2010-06-20 23:48   좋아요 0 | URL
로쟈님 어젯밤을 읽어보았습니다. 말씀대로 정말 간결한 문장으로 긴박감을 느끼는 소설의 전개였지요. 근데 다 읽고나서는 '어 모야, 아 짜증나..'라는 말이 절로 나오더군요. 이런 원시적인 반응이라니... 로쟈님은 어떻게 느끼셨는지 궁금하네요. (한 편만 읽고 모라 말하기는 좀 그렇지만 '포기'를 읽을 생각이 들지 어떨지....)

로쟈 2010-06-21 08:23   좋아요 0 | URL
ㅎㅎ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과는 종류가 다른 소설이던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