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동네 블로그에 연재하는 '로쟈의 스페큘럼' 두번째 이야기를 일부 발췌해놓는다. 전문은 http://cafe.naver.com/mhdn/15668 에서 읽어보실수 있다. 제목은 '사랑의 길'이라고 붙어 있는데 이야기의 빌미가 된 뤼스 이리가레의 책 제목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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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마금속을 찾으러’ 가는 여정도 물론 ‘막연한’ 목적은 품고 있다. 나는 지난주에 이리가레의 <사랑의 길>(동문선, 2009)을 구입했고, 어제는 도서관에서 영역본(The Way of Love)도 대출했다. 그것이 시작이자 종점이 되리라는 예감 때문이었다. 2002년에 나온 이 책은 국내에 소개된 이리가레의 저작 가운데 가장 최근의 것인데, 이리가레는 서문에서 책의 목적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이 책은 특히 어떤 식의 언어 사용을 통해 우리 사이의 사랑의 실천으로 존재할 수 있거나 존재해야 할 것을 예견하고자 한다. 말하자면 우리 사이의 사랑의 지혜를 준비하는 것인데, 이 영역은 서구철학이 스스로를 정의해 왔던 바의 지혜, 특히 정신적 지혜보다 더 중요하지는 않을지라도 그만큼 핵심적인 영역이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 사이의 사랑의 지혜(wisdom of love between us)’를 준비하는 게 목적이라는 것이다. 알랭 핑켈크로트의 에세이 제목이기도 한 ‘사랑의 지혜’는 ‘철학’(=필로소피아)의 어원이 되는 ‘지혜의 사랑’, ‘지혜에 대한 사랑’을 뒤집어 놓은 거울상이다. 즉, 그것은 철학의 거울상이자 ‘다른 철학’이다.(...)
흠, ‘무릎과 무릎 사이’로 시선을 모아놓고 ‘다른 철학’으로의 여정을 떠들게 되면 어디서 ‘연장’이나 날아오는 게 아닐까? 아직은 ‘우리가 남이가’ 따위의 호소도 먹히지 않을 텐데 말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 사이’는 아직 ‘냉정한’ 사이다. 그러니 나는 뭔가를 ‘더 말해야’ 할 것 같다. 무엇에 대해서? 가슴에 대해서! ‘가슴과 가슴 사이’에 ‘스페큘럼’을 갖다 대지는 않겠지만, 시선이 꽂히게 한다는 점에서는 ‘무릎과 무릎 사이’와 닮았다. 동물행동학자 데즈먼드 모리스도 여성의 가슴은 엉덩이를 모방해 진화했다고 주장하지 않았던가. 그 가슴과 가슴 사이를 가리키는 영어 단어가 ‘클리비지(cleavage)’다. 화학에서의 ‘분열’, 생물학에서의 ‘난할(卵割)’을 뜻하기도 하므로 한국어 ‘가슴골’보다는 용례가 다양하고 고상하다. 고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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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때인가 ‘cleavage’란 단어를 처음 보고 ‘감동’했는데,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는 그런 ‘사이’를 지칭하는 단어가 존재한다는 점(사실대로 말하면 그 ‘사이’에 주목한 것은 ‘cleavage’란 단어를 접한 이후다), 그리고 둘째는 전혀 야하지 않다는 점. ‘야하지 않다’는 인상이야 생소해서 그럴 수도 있지만 우리의 ‘가슴골’과 비교할 때 적어도 ‘노골적’이진 않다. 이 여성적 ‘가슴골’과 대비되는 것은 무엇일까? 남성의 ‘등판’ 혹은 ‘등짝’이 아닐까? 정색하고 말하자면, 나는 ‘남성적 주체성’과 ‘여성적 상호주체성’의 대비가 이 ‘등판’과 ‘가슴골’을 통해서 신체적으로 구현된다고까지 말하고 싶을 지경이다!(...)
10. 06.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