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원보: 168호 영화와 철학 사이 『로스트 하이웨이』― 욕망과 판타지 ‘사이’   


 (Lost Highway, 1997)

 로스트 하이웨이는 욕망과 판타지를 연결하는 동시에 분리하는, 경첩과도 같은 공간이다. 충족될 수 없어 끊임없이 질문하는 욕망과 그것에 대답을 제시하려는 판타지가 겹쳐 있는 곳. 그러나 ‘겹침’은 욕망과 판타지 모두의 결핍을 드러낸다. 욕망으로 환원될 수 없는 간극인 동시에 판타지가 메울 수 없는 ‘사이’. 로스트 하이웨이를 질주(drive)하는 것은 욕망의 원인(Cause), 충동(drive)이다. 충동은 욕망과 판타지 둘 다를 결핍시키는 장애물인 동시에 그들을 가능하게 하는 근원이다. 전반부의 욕망과 후반부의 판타지 ‘사이’에서 ‘상실된’ 그러나 욕망과 판타지 모두를 ‘추동’(drive)하는 힘. 이것이 린치(David Lynch)의 영화가 로스트 하이웨이에서 시작되어 그곳으로 다시 돌아가는 이유이다.  

 

 린치는 욕망과 판타지를 명확히 구분함으로써 오히려 욕망과 판타지의 대립으로 설명할 수 없는 잉여물, 판타지 속에서도 충족될 수 없는 것으로 남아있는 욕망의 ‘원인’을 드러낸다. 프레드(Fred)에게 참을 수 없는 불안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르네(Renee)의 불가해한 욕망이다. 그것은 언제나 프레드가 포착할 수 없는 다른 곳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욕망의 서사를 보여주는 영화의 전반부에서 욕망의 원인은 알 수 없는 소리나 볼 수 없는 어둠과도 같은 대상으로 지시된다. 집의 복도는 어둠 속에 싸여 있어 프레드는 마치 보이지 않는 빈 공간에서 갑자기 출현하는 것처럼 보인다. 자신보다도 더 소중한 아이, 자신의 욕망의 대상원인을 살해하는 메데아 처럼 프레드의 집은 아내를 조각내는 ‘언케니’(uncanny)한 공간이다. 가장 친밀한 집 속에는 알 수 없는 어둠이, 낯선 빈 공간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친밀한 동시에 낯선, 가장 친밀한 곳이기 때문에 더욱 낯설게 보이는 욕망의 공간, 그 불가해함을 견디지 못해 프레드는 판타지로 도피한다.  

 

 욕망의 원인과의 만남을 피하기 위해 프레드는 우선 초자아라는 법을 불러들인다. 프레드에게 배달된, 집의 안과 밖이 찍힌 비디오 테잎처럼 주체의 한가운데에서 이미 주체를 바라보고 있는 외부의 침입자가 바로 초자아이다. 파티장소에서 프레드 앞에 서있는 동시에 프레드의 집에서 그의 전화를 받는 미스터리 맨은 욕망을 법에 종속시켰을 때 생겨나는 부산물이다. 초자아는 위반에의 욕망을 부추기는 법이다. 이제 욕망은 위반에의 욕망으로 축소되고 죄의식이 증가함에 따라 프레드는 욕망의 근원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진다. 죄의식은 욕망의 근원과의 만남에서 생겨나는 불안을 제거하기 위한 베일일 뿐이다. “네가 나를 초대했다”는 미스테리 맨의 말처럼 꿈속에서 프레드는 르네의 모습을 한 미스테리 맨을 본다. 그러나 욕망의 대상 원인은 르네 자신이 아닌 ‘르네 속의 르네를 넘어서는 대상’이기 때문에 르네를 살해함으로써 욕망의 불가해성이 해결되지 않는다. 이것이 프레드가 더욱 더 강력한 판타지를 필요로 하는 이유이다.  

 

 판타지 속에서 프레드는 피트(Pete)로 변신하고 르네는 앨리스(Alice)가 된다. 판타지는 타자의 욕망의 근원, 비밀에 대한 답변을 제공하고자 한다. 르네의 욕망을 알지 못하는 프레드와는 달리 피트는 앨리스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고 그것을 충족시킨다. 맥고완(Todd McGowan)의 말대로 앨리스는 피트가 자신의 향유를 공유할 수 있도록 해준다. 그러나 판타지 역시 가장 성공하는 것처럼 보일 때 자신의 실패를 드러낸다. 피트의 머리에 난 상처는 판타지로 봉합할 수 없는 욕망의 근원, 라깡적 의미의 외상적 실재이다. 피트 역시 에디(Eddy)라는 초자아적 아버지에게 의존함으로써 욕망으로부터의 피난처를 찾는다. 에디의 금기 속에서만 그는 앨리스를 소유할 수 있고 자신의 사랑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그러나 에디 역시 맥고완의 말대로 타자의 즐김을 바라보기만 할뿐 여성의 향유를 알지 못하는 포르노그라퍼일 뿐이다. 외설적인 법 속에 스스로의 욕망을 소외시키는 피트의 결핍과 에디라는 외설적 아버지의 결핍이 겹칠 때 피트는 다시 프레드로 바뀐다. 앨리스라는 욕망의 근원에 너무 가까이 갔을 때, 판타지를 가능하게 하는 거리가 상실된다. “너는 결코 나를 가질 수 없어” 앨리스는 처음부터 없었다. 아버지는 이미 항상 죽어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프레드는 이제 ‘딕 로랑(에디)은 죽었다’고 말할 수 있다. 영화의 첫 장면, 인터폰에서 흘러나오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던 프레드는 이제 인터폰에 대고 외친다. 불가해한 욕망을 불러 일으켰던 메시지는 판타지나 초자아의 법을 횡단한 후에 주체화된 형태로 되돌아온다. 피하고자 했던 곳으로 다시 돌아오는 반복의 움직임은 그러나 욕망의 곤궁에 대한 해결책이 아닌 또 다른 곤궁만을 보여준다. 판타지의 횡단은 판타지의 바깥이 없다는 것을 고지할 뿐이다. 이것이 다시 프레드가 로스트 하이웨이로 나서는 이유이다.


민승기 / 영어학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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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보:169호 영화와 철학 사이 | 『마이너리티 리포트』― ‘행위’의 가능성,

민승기 / 영어학부 겸임교수


라깡이 즐겨 인용하던 농담, “나에게는 세 명의 형제가 있지요, 폴, 어니스트, 그리고 나.” 세 명의 형제가 있다고 ‘말하는 나’와 ‘형제 속에 포함되어 있는 나’의 분열. ‘나’는 둘이자 하나이며 바깥이자 안이다. 형제들을 구성하는 요소인 동시에 요소의 집합 속에서 드러날 수 없는 빈 공간. 그러나 빈 공간은 요소가 볼 수 없는 형태로 이미 요소 안에서 발생하고 있다. 바깥에서 포함됨으로써 안의 일관성을 와해시키는 빈 수레와도 같은 ‘말하는 나.’ 단순히 음식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무’를 먹음으로써 욕망 자체의 결핍을 드러내는 거식증처럼 마이너리티 리포트는 예언들의 집합을 내부적으로 절개하는 ‘틈’이자 그것을 완결시키는 빈 공간이다.  
 

 『마이너리티 리포트』에서 ‘말하는 나’는 미래를 예언하는 예지자들이며, 예언들의 집합을 탈주체화된 (중립적인) 지식 체계로 바꾸어놓는 것은 범죄 사전 예방국이다. 예지자들의 꿈 속에서 드러나는 것은 미래에 발생할 살해 장면이다. 무의식은 영상 이미지로 바뀌어 화면 속에 나타나고 살해자와 희생자의 이름이 공에 기입된다. 미래는 온전하게 재현될 수 있어 지배가능한, 이미 존재하는 지식 체계이다. 반면 예지자들은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살인 예정자들을 체포하던 앤더튼이 스스로 살인 예정자가 되어 쫓길 때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기 위해 납치한 여성 예지자는 “이 일이 현재 속에서 발생하고 있는가?”라고 묻는다. 샤프(Matthew Sharpe)의 말대로 예지자들이 ‘알고’ 있다는 것(그러나 예지자들 자신에게 미래는 무의식적인 것으로 남아있다)을 ‘아는’ 그래서 미래의 지식을 활용하여 살인을 예방하는데 성공하는 것은 사전 예방국이다. 그러나 예지자들과 사전 예방국은 서로를 빗겨간다. 예지자들의 예언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예방국이 그것을 인지할 수 없거나 예언이 이루어지지 말아야 한다. 인지가 살해를 방지함으로써 미래를 바꾸어놓기 때문이다. 예언을 발화하는 주체인 예지자들이 발화 내용을 알지 못하거나, 그것에 개입하지 않을 때에만 미래는 조작하거나 방지할 수 있는 프로그램으로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라깡의 농담에서 보듯 발화행위 주체는 발화내용 주체와 이미 겹쳐 있다. 행위는 발화내용 속에서 비가시적인 것으로 남아 내용 자체의 결핍을 드러낸다. 예지자의 주체적 개입은 예방국이 의존하는 예측가능한 미래의 ‘틈’을 드러낸다. 마이너리티 리포트는 예측가능한 지식을 중지시킴으로써 지식으로 재현할 수 없는 잉여물로서의 미래를 드러낸다. 그것은 지식이 포착하지 못했던 것이 미래적인 것으로 다시 돌아오는 사건, 기원적 살해이다.   


여성 예지자의 개입에 의해 드러나는 기원적 살해는 사전 예방국이 성립하기 위해 억압되어야 했던 최초의 사건, 예지자들이 이렇게 이용되는 것을 반대했던 어머니의 살해이다. 폭력을 방지하기 위한 제도를 설립하기 위해 동원되는 폭력. 벤야민의 말대로 법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폭력이다. 어머니 살해는 단순히 현재가 지배할 수 있는 미래가 아니라 완전히 현실화될 수 없는 것(기억될 수 없는 상처)으로 다시 돌아옴으로써 사전 예방 체계 자체의 결핍을 드러낸다. 다른 두 명의 예지자의 예언을 탈구시키는 여성 예지자의 마이너리티 리포트는 필연적인 미래에 틈을 내어 자유의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지식이 예측할 수 없는 주체적 행위는 우연적이며 예측불가능한 결과를 낳는다. 탈주체화된 형태로 존재하는 예지자들이 예정된 살해 이상의 것(예를 들어 살해하지 않을 가능성)을 예측할 수 없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마이너리티 리포트를 통한 주체적 개입은 중립성을 표방하는 지식이 이미 폭력에 의해 오염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앤더튼은 자신이 죽이기로 되어 있는 아들의 살해범을 쏘지 않음으로써 주체적 중지, 사전 예방 체제로부터의 ‘분리’를 획득한다.   


 
 (Minority Report, 2002) 

쫓는 자가 쫓기는 자가 될 때, 살해자들의 명단 ‘바깥’에서 ‘안’으로 편입될 때, 지젝의 말대로 스스로를 바깥에서 안으로 편입시킬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앤더튼은 프로그램된 미래를 변경할 수 있는 것이다. 사전 예방국 책임자가 예지자들의 어머니를 살해한 사건은 예방국을 가능하게 해주는 폭력이자 그것의 결핍을 드러내는 우연적 행위이다. 책임자가 죽이기로 예정되어 있는 앤더튼 대신 스스로를 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마이너리티 리포트는 단순히 지식의 결핍을 뜻하지 않는다. 지식이 증가하면 채워질 수 있는 결핍이 아니라 존재론적으로 탈구되어 있는 틈. 주체라 불리는 무가 지식이 지배할 수 없는 공백으로 세계 속에 이미 기입되어 있다. 잉여물로 더해져 세계의 결핍을 드러내는 빈 공간, 바로 여기서 자유로운 행위의 가능성이 생겨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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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보: 167호 영화와 철학사이 『도그빌』― 예증과 오만 ‘사이’ 

민승기 / 영어학부 겸임교수



(Dogville, 2003)

자신의 의지와 판단을 내세우기 위해 권력을 이용하는 갱스터 아버지를 피해 머물 곳을 찾던 그레이스가 도그빌로 들어온다. 도그빌 사람들이 타자를 수용하고 환대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를 알고 싶어하던 탐은 그레이스라는 명백한 예증을 갖게 된다. 아버지의 오만에 반대하여 타인의 행동들에 대한 판단을 중지시킨 그레이스는 타인에의 절대적 노출을 통하여 스스로를 선물로서 내어준다. 그러나 은총(grace)은 치욕(dis-grace)과 같아지고, 선물(gift)은 독(gift)이 되며, 부분으로서의 예(example)는 전체를 보증하기는커녕 공동체를 망가뜨리는 잉여물로 기능한다. 그레이스라는 여분이 도그빌에 편입될 때 공동체의 결핍이 드러나는 것이다. 덧셈과 뺄셈이 같아지고 잉여가 곧 결핍이 되는 이상한 셈법, 이것이 『도그빌』의 세계이다. 손님을 잡아먹는 환대를 행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주인-괴물처럼 도그빌은 오갈데 없는 그레이스를 결코 변제될 수 없는 채무로 묶어 완전히 고갈시킨다. 그레이스에게 현상금이 부과되고 거기에 따른 위험 부담의 증가가 그녀를 전적인 향유의 대상으로 바꾸어 버리기 때문이다. 할 필요가 없던 일을 행하던 잉여 대상으로서의 그레이스는 이제 마을 남자들의 성적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소유물이 되어버린다. 반면 그레이스는 이 폭력적 환대에 한없는 용서로 대꾸한다. 무한한 용서가 불러일으키는 위험을 깨닫게 된 도그빌은 그레이스를 찾는 갱들을 다시 불러들이고 그레이스는 다시 아버지와 만나게 된다. 오만에 관한 긴 토론 이후에 그레이스는 마을을 불태워 버리라고 명령한다. 한없는 용서를 갑작스럽게 중지시키는 폭력적 행위는 이 영화의 해석자들을 당혹스럽게 한다. 그레이스의 행위는 지젝의 말대로 도그빌에 대한 복수일 뿐인가? 그것도 스스로 부정했던 아버지의 권력을 다시 빌려오는 내적 위반에 불과한? 아니면 키에자의 말대로 용서라는 환상 자체를 횡단하는 윤리적 행위일 수 있는가?

 

탐은 예증을 위해 모든 것을 이용한다. 그레이스를 도그빌에 계속 잡아두는 이유도 그녀가 환대의 가능성을 실험하기 위해 이용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예이기 때문이다. 예증은 자신이 이미 가지고 있는 생각들을 확신하고 그것을 마을 사람들에게 설득하기 위해 사용되는 것이다. 예측할 수 없는 새로운 가능성을 제거하여 기존 지식을 공고히 하는 절차라는 점에서 예증은 폭력적이다. 경제의 바깥에 있던 잉여물로서의 그레이스를 경제적 대상으로 환원시켜 그녀의 독특성(singularity)을 제거하려는 시도. 그러나 탐이 추구하는 보편적인 선은 잉여물로서의 독특성 없이는 불가능하다. 교환될 수 없는 불가능한 대상, 선물-그레이스가 탐의 예증을 가능하게 해주는 동시에 불가능하게 한다. 탐이 그녀를 ‘이용’했다고 고백할 때 예증은 권력이 된다. 그레이스라는 잉여물을, ‘그녀 속의 그녀 이상의 것’을 관찰하고 증명함으로써 유용한 대상으로 바꾸어버릴 때 탐은 갱스터 아버지와 같아진다.

 

그레이스의 용서 역시 희생양 팬터지를 넘어서지 못한다는 점에서 오만이다. 탐의 예증과는 다르게 그레이스는 기존 지식을 중지시켜 그것의 결핍을 촉발(provocation)시킨다. 노부스의 말대로 그녀는 스스로 눈이 멀어있다는 사실을 지금껏 인정하고 있지 않던 잭 매카이가 자신의 결핍을 고백하게 하기도 하고 건강염려증에 걸려 있는 탐의 아버지가 사실은 매우 건강하다는 것을 드러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타자에 대한 그레이스의 무조건적 수용이 도그빌이 단순하고 정직하고 선량한 사람들이 모여사는 것이 아니라 이미 타락한 공간이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게 한다. 희생양 팬터지를 통해서, 희생양으로 인정받기 위해 그레이스는 도그빌의 결핍을 메꾸고 있는 것이다. “용서하기 때문에 오만하다구요?”라고 항변하는 그레이스의 말이 이것을 증명한다. 데리다의 말대로 스스로를 베풀 수 있는 예외적 공간을 획득할 때, 예외적 권리가 될 때 은총은 권력이 된다. 그것은 기존 질서의 결핍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질서를 더욱 공고히 하는 예외적 주권으로 행사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그빌을 모두 불태움으로써 희생양 팬터지라는 예외적 공간을 제거할 때 비로소 주권 없는 은총이 가능해진다. 그녀는 먼저 모세라는 개를 쏘아서 예로 삼으라는 아버지의 예증을 이제 거절할 수 있다. 파괴를 더욱 자비로운 파괴로 보답하는 포틀래치가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축적할 수 없는 선물은 파괴를 통해서만 그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이다. 예증과 오만 ‘사이’에서, 예증과 오만 둘 다를 결핍시키는 재 속에서 모세의 울부짖음이 들려온다. ‘도그빌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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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07. 08. 11) 神과 인간, 유물론적 접근

오늘날 믿음은 “부인되거나 치환된 형태로만 존재한다.” 부인이 갖는 거리가 종교를 문화로 치환하지만 문제는 냉소적 거리가 늘 ‘정말로 믿고 있는 타자’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믿음에 대한 아이러니한 거리가 은밀한 믿음을 필요로 하는 이율배반과 마주하여 슬라보이 지젝은 다시 칸트의 질문을 반복한다. ‘믿음이란 가능한가?’ “우리가 정말로 믿지는 않으면서도 실천하는 모든 것”이 문화라면, 그러나 이 문화가 ‘정말로 믿고 있는 타자’에 자신의 믿음을 전가하고 있다면 믿음은 문화의 가능조건인 동시에 불가능조건이 아닐까?

지젝에게 믿음은 ‘정말로 믿고 있는 타자’가 존재하지 않을 때 비로소 시작되기 때문이다. 기독교적 경험이 필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결핍 없는 초월적 실체로서의 신이 아닌 십자가 위의 예수, ‘어찌 저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절규하는 “믿지 않는다고 가정된 주체”인 그리스도의 회의와 불신에 동참하는 것이 믿음이기 때문이다. 타자의 결핍과 스스로를 동일시하는 이 불가능한 경험이 오직 유물론적 접근을 통해서만 이해될 수 있음을 입증하기 위해 쓰여진 책이 바로 ‘죽은 신을 위하여’이다.



‘꼭두각시와 난쟁이’란 원제에서 보듯 지젝은 여기서 발터 벤야민(‘역사철학테제’)을 반복하고 있는데, 두 번 읽기로서의 반복은 정신분석학적 읽기의 주요한 방법론이기도 하다. 반복적 읽기 속에서 드러나는 것은 대립구조 속에서 포착될 수 없는 ‘사이공간’이다. 유물론과 신학, 인간과 신의 사이공간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유물론도 신학도 아닌 “생성 중인 종교”, 인간도 신도 아닌 괴물로서의 예수이다. 자신의 고통이 의미없음을 고집하는 욥.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욥의 결핍이 아닌 신의 결핍이다. 초월적이고 예외적인 공간에 거주하던 실체로서의 신이 역사 속으로 타락하여 십자가에 못박힌 주체가 될 때 사랑이 시작된다. 타락이 구원과 같아질 때, 결코 다가설 수 없던 신이 이미 우리의 이웃일 때 유물론적 신학이 발생하는 것이다.

키에르케고르의 ‘생성 중인 기독교’는 사도 바울의 마치-아닌-듯한 태도(as if-not)로 반복된다. ‘마치 법을 지키지 않는 듯이 법을 지키라’는 바울의 명령은 법과 초자아의 악순환을 벗어날 것을 지시하고 있다. 위반에의 욕망을 부추기는 초자아는 죄의식을 통해 주체를 지배하는 권력 기제이기 때문이다. 위반하기 위해 금기를 필요로 하는, 구원을 위해 타락을 필요로 하는 법의 도착적 구조를 벗어나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

지젝에게 유물론적 신학은 곧 정신분석학이 된다. 정신분석학 역시 타자의 내부적 결핍을 지시하는 주체의 가능성을 문제삼고 있기 때문이다. 욥의 의미없는 고통처럼 의미로 구성된 우주 속에서 주체는 자신의 고유한 장소를 갖지 못한다. 기표 속에 있지만 의미를 부여받지 못하는 빈 공간으로서의 주체는 그러나 기표 체계를 가능하게 해주는 조건이다. 칸트의 추상적 보편성과 헤겔의 구체적 보편성을 구분해주는 것은 바로 이 기표화할 수 없는 기원적 빈 공간의 포함 여부이다. 보편/특수의 대립구조로 설명할 수 없는 사이공간을 지젝은 특이성(singularity)이라 부르는데, 특이성을 포함한 보편성이 바로 구체적 보편성이다. 그러나 특이성의 포함은 보편성의 내재적 분열을 초래한다. 이제 보편성은 특수성 속으로 하강하여 특수한 요소들 속의 간극, 특수성도 보편성도 아닌 특이성이 된다.

기독교는 특이성으로서의 주체의 공간을 포함할 때 유대교의 추상적 보편성을 넘어선다. 타자의 결핍을 알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그것을 감추고 있는 유대교와 달리 기독교는 인간도 신도 아닌 예수라는 특이성의 주체를 드러낸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배설물과도 같은 주체로서 예수는 신의 결핍, 체스터톤의 말대로 “스스로에게 버림받은 신”을 지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신교는 특수하고도 다양한 요소들을 폭력적으로 통합하는 일의성이 아니라 니체의 정오처럼 자신의 내재적 결핍을 보여주는 둘로서의 하나, 하나로서의 둘이다. 다신교는 내재적 분열을 외재적 차이로 환원시킴으로써, 다시 말해 불가능성을 다양성으로 치환함으로써 의미의 불가능성을 피해가는 방어기제이다.

일신교의 혁명은 다양성으로 환원될 수 없는 불가능성을 말하는 유대교에서 시작된다. ‘뿌리없음’, 상징질서로부터의 절대적 분리를 보여주는 유대교는 그러나 메시아를 여전히 ‘미래에 오는 자’로 상정하여 그와의 만남을 끊임없이 연기한다. 기독교는 ‘이미 항상 와있는’ 메시아를 이야기함으로써 신을 상징질서 속으로 끌어내린다. ‘아직 오지 않음’과 ‘이미 항상 와있음’의 간극 속에서 사랑의 윤리학, 곧 정신분석학이 시작된다.(민승기|경희대 겸임교수·영문학)



» 한스 홀바인 작 <죽은 그리스도>(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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