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의 뉴스메이커는 단연 '설화'로 방문진 이사장직을 사퇴한 김우룡 전 이사장이다. 고려대학생 김예슬씨의 대학 거부선언의 여파가 채 가라앉기 전에, 타이밍상 마치 대학사회의 문제제기를 무력화시키려는 '음모'가 아닌가 싶을 정도의 파괴력으로 모든 이슈를 잠식해버렸다. 아마 내주에도 여진은 계속될 듯싶은데, 어떤 사태였는지 잠시 짚어본다. 먼저 진원지인 '신동아'와의 인터뷰 내용. 

김우룡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의 전격 사퇴를 몰고 온 ‘신동아’ 4월호 인터뷰는 어떤 내용인가. 문제가 되는 대목은 “김재철 신임 MBC 사장이 ‘큰집’에 불려가 조인트를 까이면서 ‘MBC 좌빨’을 척결했다”는 것이다.

김 이사장은 김 사장의 선임 이유를 묻는 신동아 기자의 질문에 “가장 중요한 것은 방문진과 조율할 수 있는 사람이냐는 겁니다. 쉽게 말해, 말귀 잘 알아듣고 말 잘 듣는 사람이냐는 게 첫 번째 기준이었다는 겁니다”라고 답했다.

그는 “김 사장이 임명된 이후 갈등이 더 커지고 있다”는 지적에 “럭비공이 하나 들어와서…”라고 말끝을 흐린 뒤 관계회사 사장단, 임원 인사가 논란을 일으켰다는 점에 대해서는 “어제(3월 8일)부터 대학살이 시작됐죠. 공정방송을 실현하고 무능한 사람을 정리하고, 특정 정권에 빌붙는 사람을 척결한다는 의미에서는 80점 정도는 되는 인사라고 평가합니다”라고 말했다.

이어 “이번 인사는 김재철 사장 (혼자 한) 인사가 아닙니다. 처음에는 김 사장이 좌파들한테 얼마나 휘둘렸는데. 큰집도 (김 사장을) 불러다가 ‘조인트’ 까고 (김 사장이) 매도 맞고 해서 (만들어진 인사입니다)”라고 덧붙였다.

김 이사장은 또 “김 사장이 큰집에 갔다 왔느냐”는 물음에 “큰집에 들어갈 수 있어? 밖으로 불러내서…(김 사장이) 좌파들 끌어안고 가려고 얼마나 노력했는데, (이번 인사로) MBC 좌파 대청소는 70~80% 정도 정리됐습니다”라고 밝혔다.

신동아 기자가 “김재철 사장이 청소부?”라고 재확인하자 김 이사장은 “(내가) 청소부 역할을 해라(하니까). 그러니까 김재철은 청소부 역할을 한 거야. 그 점은 인정을 해야 돼요. 물론 김재철이 안 하려고 했지, 그걸로 (김재철 사장은) 1차적인 소임을 한 거야”라고 전했다.

“언제 김 사장에게 그런 뜻을 전했나”라는 질문에는 “대체적인 그림은 만나서 그려줬지. 둘만 만난 일은 없지만, 사장으로 선임하자마자 바로 불러서 얘기했어요. 김 사장은 내 면전에서는 ‘걱정하지 마시라’고 했고. MBC 내의 ‘좌빨’ 80%는 척결했다(고 생각합니다). 다행인 건 임기가 1년이라는 것이고, 본인이 재선을 위해서 혼신의 힘을 다할 것이라는 겁니다”라고 답했다.

엄기영 사장의 사퇴가 사실상 예정됐던 일이냐는 물음에 김 이사장은 “내가 사실 지난해 8월 27일 엄 사장을 해임하려 했어요. 하지만 정무적인 판단으로 미룬 겁니다. 전략이었죠. 솔직히 2월 말까지는 버틸 줄 알았어요. 그때까지도 안 나가면 해임하려고 했어요. 어차피 내보내려 했는데 자기 발로 걸어 나갔으니 120% 목표 달성한 거죠”라고 강조했다.(국민일보, 10. 03. 20)

이 문제에 대해선 야당이나 '정상적인' 언론의 시각보다 여당이나 수구언론의 반응이 더 궁금한데, 동아일보의 사설은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  

MBC 대주주인 방송문화진흥회(방문진)의 김우룡 이사장이 사퇴 의사를 표명했다. 김 이사장은 월간지 신동아 4월호에 실린 인터뷰에서 김재철 MBC 사장의 관계회사 인사에 대해 “큰집도 (김 사장을) 불러다가 ‘쪼인트’도 까고 해서 (만들어진 인사다). 김재철(사장)은 (내가) 청소부 역할을 해라 (하니까) 청소부 역할을 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김 이사장의 발언을 담은 신동아 보도는 MBC 인사에 대한 방문진 관여의 적정성 여부, 외세의 압력 의혹 등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김 이사장은 발언에 책임을 지고 물러났지만 이 때문에 이른바 ‘노영(勞營)방송’이라는 지적을 받고 있는 MBC 개혁이 흔들려선 안 될 일이다. 그의 발언은 자신을 과시하느라 ‘오버’한 대목도 적잖아 보인다.

그의 발언 내용을 살펴보면 과연 방문진 이사장을 할 만한 인물이었는지 의문이 생긴다. 애당초 방문진 이사장 선정이 잘못된 인사였던 셈이다. ‘쪼인트도 까고…’ ‘개망신’ ‘좌빨’ 같은 말은 대학교수 출신의 방문진 이사장이 한 말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천격(賤格)이다. 이런 사람에게 사회의 품격을 선도해야 할 공영방송의 경영을 감독하게 하고 인사권을 맡겼다니 이 정부 인사가 참으로 실망스럽다.

김 이사장의 발언 가운데 사실 여부를 가려야 할 것도 있다. ‘큰집’에서 김 사장을 불러다가 인사를 지시했다는 내용은 권력 기관이 인사에 개입한 듯한 인상을 준다. 노무현 정부의 방송사에 대한 ‘코드 인사’를 비판했던 현 정부가 같은 전철을 밟았다면 가벼운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박선규 청와대 대변인은 “청와대에서 그런 일을 하고 있지 않다”고 부인했다. 김 이사장의 발언 중에는 엄기영 전 사장 등 당사자들의 말과 배치되는 내용도 있다.

노조가 좌지우지하는 MBC의 폐해를 바로잡기 위해 방문진의 인사권 행사가 필수적인 상황에서 김 이사장의 발언이 돌출했다. 김재철 사장을 압박해 황희만 보도본부장과 윤혁 TV제작본부장의 교체를 관철한 노조가 이번 사태로 힘을 받아 개혁을 저지하고 나설 소지가 있다. 김 사장이 자신의 방에 들어가기 위해 본부장 인사를 노조와 협상한 것은 인사권을 포기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런 사람에게 MBC의 제자리 찾기와 노영방송 탈피를 기대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MBC 개혁의 주체는 방문진이 될 수밖에 없다. 방문진 이사회는 MBC 바로 세우기 작업에 차질을 빚어서는 안 될 것이다.(동아일보, 10. 03. 21)

핵심은 '큰집'과의 연결고리를 차단하기 위한 '김우룡 잘라내기'인데, "그의 발언 내용을 살펴보면 과연 방문진 이사장을 할 만한 인물이었는지 의문이 생긴다. 애당초 방문진 이사장 선정이 잘못된 인사였던 셈이다. ‘쪼인트도 까고…’ ‘개망신’ ‘좌빨’ 같은 말은 대학교수 출신의 방문진 이사장이 한 말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천격(賤格)이다. 이런 사람에게 사회의 품격을 선도해야 할 공영방송의 경영을 감독하게 하고 인사권을 맡겼다니 이 정부 인사가 참으로 실망스럽다."란 대목은 한겨레나 경향의 비판보다도 한 걸음 더 나간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런 '천격'의 인사가 사실은 동아일보 예찬론자였다.  

"나는 동아일보를 한국의 얼굴이라고 생각한다. '더 타임스'가 곧 영국이라면 '뉴욕타임스'는 미국의 상징이다. 그 긴 역사에 왜 굴절과 파행이 없었겠는가. 그러나 동아는 일제와 자유당 정부, 유신과 군사정권 동안 줄곧 민족의 표현기관으로서 민주주의를 지지하고 문화주의를 제창해 왔다."  

또한 동아일보의 칼럼 기고자이기도 했다. 언론의 역할에 대한 김우룡 교수의 '원론'은 이랬다. 믿어지지 않을 만큼 천격의 인사라는 건 동아일보 스스로도 '검증'을 못했던 모양이다.  

"언론은 시민의 삶의 질을 높이는 데 기여해야 한다.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데 이바지해야 한다. 또 언론은 국민이 스스로 판단하고 자유스러워질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 언론은 보도하고 판단은 독자가 하는 것이다. 권력을 감시하고, 정부의 실정을 비판하는 것이 언론의 본분이다. 비록 정부정책에 반하더라도 언론은 올바른 여론을 반영해야 한다. 비판과 반대는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두 축이 아니던가." (동아일보, 04. 10. 21)

   

흥미로운 것은 원로 언론학자 김우룡 '교수'의 주저들이 미디어윤리에 관한 것이라는 점('비언어적 커뮤니케이션'의 대표적인 사례가 '쪼인트 까기'인 모양이다). 나는 '사회적 불의'를 냉철하게 보도(폭로)함으로써 '언론인의 직업윤리'를 지킨 신동아 기자가 올해의 기자상 후보로 손색이 없다고 생각한다(김우룡 교수가 생각하는 '언론인의 직업윤리'는 어떤 것인지 아직 확인해보지 못했지만). 기자나 데스크는 무슨 생각(계산)을 했던 것인지 궁금하기도 하고.  

이번 사태를 두고 '변듣보'란 별칭이 더 익숙한 변희재 미디어워치 발행인은 이렇게 정리했다. '김재철 배신+김우룡 자폭 = 방문진 침몰'.(그러니까 문제는 '배신'과 '자폭'이다. 솔직하게도 그는 사건의 실체를 부정하진 않는다!) 그가 생각하는 수습책은 무엇인가?  

문제는 과연 김우룡 이사장의 폭탄 발언으로 시작된 MBC 사태를 어떻게 수습할 수 있냐는 것이다. 일단 방송통신위는 곧바로 신임 이사장을 선임해야 한다. 김재철 사장이 방문진 무력화를 선언했고, MBC노조의 기세가 등등한 상황에서 새로운 이사장이 취임해도 손 쓸 방법은 전혀 없어 보인다. 유일하게 취할 수 있는 방법은 신임 이사장 선임 직후, 자신이 약속한 공약을 모두 내평겨쳐버리고 MBC노조와 손을 잡아버린 김재철 사장에 대해 “사장의 인사권을 지키지 못했다”는 명목으로 즉각 해임시키는 방안이다.

그러나 김재철 사장을 임명한 뒤, 초상식적인 배신행보에도 아무런 제동을 걸지 못했던 현재의 방문진 이사진의 구조 상 이를 시행하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결국 이대로 가게 되면, MBC노조는 김재철 사장을 꼭두각시처럼 부리며, 이미 모든 동력을 상실한 방문진을 무시한 채, 엄기영 사장 시절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수준으로 MBC를 장악해나갈 가능성이 높다. 특히 친노좌파 세력들이 사활을 걸고 있는 지자체 선거 때, MBC는 특정 정파의 기관 방송으로 전락될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선택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은, 방문진이 김재철 사장을 즉각 해임시키지 못한다면, 여권 성향의 이사 전원이 방문진 이사직을 사퇴하는 것이다. 방문진 이사들이 이사장의 과오 전체를 함께 책임져야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애초에 지난 8월 방문진 이사진이 구성될 때, 김우룡 이상 및 여권 이사 6인은 한 팀으로 움직여왔다. 물론 김우룡 이사장의 수많은 문제점에 대해 방문진의 젊은 이사들은 최선을 다해서 제동을 걸기도 하고, 비판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이사들은 이사장을 제대로 보필하지 못한 부분에 대한 인간적 책임마저 면책될 수는 없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방문진의 여권 성향 이사 6인이 물러나고, 새로운 이사 6인이 선임된다 하더라도, 현 사태를 조기에 수습할 수 있을지도 장담하기 어렵다. 이번 방문진과 MBC 사태에서 드러났듯이, 이른바 중도우파 세력 내에서 지금과 같은 엄중한 상황에서 과감하게 국민을 설득하여 김재철 사장을 해임시키고, 공청회를 거쳐 새 신임 사장 임명을 강행할 수 있을 법한 실력과 용기를 갖춘 인물을 찾기란 쉽지 않다. 방문진에 들어가자마자 ‘조인트’와 ‘큰집’ 논란에 휘말리며, MBC노조와 친노좌파세력의 집중 공격을 받으며, 기존의 방문진 이사들과 같이 개혁의 칼을 모두 빼앗기고 무력화될 우려가 너무 크다.(뉴데일리, 10. 03. 21)

그의 핵심적인 주장은 "방문진이 김재철 사장을 즉각 해임시키지 못한다면, 여권 성향의 이사 전원이 방문진 이사직을 사퇴"하라는 것. 원래 방문진 이사직에 바짝 욕심을 내던 처지에서 보면, 여권 성향 6인이 물러나고 새로운 이사가 선임되는 '사태'는 그로선 한 자리 차지할 수도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될 것이다. 머리란 어떻게 돌아가는가를 잘 보여주는 사례인데, 정말로 세상이 그렇게 돌아가는 것인지는 두고 보면 알겠다... 

10. 03.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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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바다 2010-03-21 10:12   좋아요 0 | URL
신동아는 동아일보보다는 나름 자율성이 있는 모양입니다. 고등학교 때 신동아를 열심히 읽으며 정치의식을 키웠던 기억이 새롭네요. 그나저나 변희재가 벌써 방문진 이사를 노릴만한 '짠밥'이 되는 모양이죠?^^ 그의 언행을 보면 가끔 '이해'보다는 정신분석학적 '해석'의 대상이라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그들의 '말'들만 보면 김재철 사장이 마치 엘살바도르의 로메로 주교인양 보이는 군요. 그럴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이는데 호들갑들을 떠는 걸 보면 그들 나름대로 불안하기는 한 모양입니다.

로쟈 2010-03-21 10:19   좋아요 0 | URL
'기존의 방문진 이사들' 같은 인사로는 안된다고 힌트를 주고 있지요. '짠밥' 말고 다른 고려가 필요하다는...

노이에자이트 2010-03-21 15:39   좋아요 0 | URL
경솔하게 입을 놀리는 성격은 아무리 많이 배우고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드러나기 마련입니다.하고 싶은 말은 해야 한다고 하는 이들은 정말 곤란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로쟈 2010-03-22 11:41   좋아요 0 | URL
아마도 술자리에서 실언을 한 듯싶은데, 결과적으론 당사자의 '자폭'이 국민에 대한 '헌신'이 됐습니다. 한겨레나 경향도 못하는 일을 신동아는 해냈구요...

mediocris 2010-03-22 09:27   좋아요 0 | URL
김우룡의 발언은 그쪽 집단(글이든 말이든 계몽하려고 대드는)의 뻔한 천격을 드러낸 것에 불과하다. 김우룡 따위 가벼운 혓바닥이 물러나는 것이야 너무도 당연하다 해도 왜 ‘야당이나 정상적인 언론’(이라니?)과 비교되는 수구언론의 반응까지 궁금하실까? 김우룡 같은 자들에게 핍박을 받기 때문에 정상적인 언론이란 말일까? 노조를 손보겠다고 약속하고서도 노조에게 항복했대서 조인트 까이는 김재철과 군림하는 노조가 있기 때문에 정상적 언론이란 말일까? 악의 희생으로 정화 의식만 치르면 모두가 선이 된다는 말인가?

로쟈 2010-03-22 11:39   좋아요 0 | URL
'정상적인' 언론이라면 '큰집'의 개입을 문제삼아야겠지요. '설화'를 문제삼을 게 아니라...

mediocris 2010-03-24 08:15   좋아요 0 | URL
혹시나, 그러나, 역시나... 많은 책을 읽는다는 게 무슨 의미?

하영-이룰수없는아련한첫사랑- 2010-03-23 16:57   좋아요 0 | URL
신동아 기자가 사실을 사실 그대로 써줘서 고맙다면 그동안 다른 기자들은 만들고 꾸미고 정화하느라 애를 먹었던 걸까요?
본인의 저런 얘기가 기사화 될 것이라고 예상 못했다는 건 상식에 맞지 않고(신동아 게재를 위한 인터뷰였으니까요) 어떻게 인터뷰 자리에서 저러한 발언을 할 수 있었는지~아무리 고민해 봐도 무슨 생각으로 발언한 건지(심지어는 실수인지, 혹시나 의도적인 건지마저도 혼란스럽네요)도무지 상상이 되지 않는 건 저뿐인가요...
 

날씨만큼이나 우중충한 기분이 계속되고 있는데, 과거 일기를 잠깐 들춰보다가 딱 10년 전 기록을 발견하고 약간의 감상에 젖는다. 우연찮게도 어제 귀가길 좌석버스에서 읽은 책이 가라타니 고진의 <정치를 말하다>(도서출판b, 2010)였는데, 10년 전에 읽던 책도 고진이었다. 그해 봄 <탐구> 시리즈를 읽었던 듯하다. 고골 작품에 대한 강의를 하게 돼 있는 일정도 얼추 비슷하다. 그러고 보면 10년간 크게 달라진 것도 없는 모양이다. 그사이에 <이것이냐 저것이냐>만 재출간됐는데, 낮에 찾아서 조금 들춰보고 싶다. 잠시 시간여행을 해본다... 

 

00. 3. 21
고진의 책으로 <탐구2>를 읽고 있다. 에세이식이지만, 이론적인 논의라서 찬찬히 집중해서 읽어야 한다. 현대 서양철학의 중요한 주제에 대한 비서양권의 개입으로선 유례없이 탁월하다는 느낌을 준다. 김상환 교수의 리뷰는 고진의 특장과 ‘자만’을 잘 지적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그의 글은 유혹적이다. 타자와 텍스트의 바깥을 말하는 부분에서 그가 약간은 과장하고 있지 않나 하는 느낌은 갖는데, 어쨌든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서 자신만의 힘(논리)으로 밀고나가는 모습은 인상적이다.   

아침신문 문학기행란에 윤대녕의 <상춘곡>이 실렸다. 읽어보진 않았지만, 선운사 동백을 다룬 작품이다. 문득 모든 일에서 떠나버리고 싶어 하루종일 아무일도 하지 않았다.  

선운사 골째기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안했고
막걸리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 것만 상기도 남었습디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었습디다

어딘가 목이 쉬어 남아 있는 날들이 나를 어지럽게 하였다...  

키에르케고르(1813-1855) 42세의 죽음. <이것이냐, 저것이냐>(1843) 30세부터 굉장한 다작, 다산성의 저자. 물론 고진의 키에르케고르 읽기에 이끌려 다시 집어들었다.  

내일 강의는 고골의 <외투>이다. 딱히 더 준비할 건 없지만, 버만의 <현대성의 경험>에서 고골에 관한 장(주로 <넵스키 거리>를 다루고 있다)을 읽고, 연구서에서 부분부분, 그리고 작품을 다시 읽고 있다. 그런데 벌써 2시다. 세상이 무언가 달라졌으면 싶은데, 참...  

10. 03. 21.  

P.S. 오늘 아침부터 듣는 노래는 빅토르 최(키노)의 '이상한 이야기'다(http://www.youtube.com/watch?v=p8j7z1NiLmQ). 그의 노래 가운데 자주 듣지 않았던 곡들에 요즘은 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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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가게재습격 2010-03-21 0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운사 동구>네요. 선운사에 가 보신적이 있으신가요? 묘하게도 시인들은 비슷한 걸 선운사에서 보더군요. 대학에 있을때 가본 일이 있는데, 저는 최영미 시가 먼저 떠오르더군요.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님 한번 생각할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그대가 처음

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

잊는 것 또한 그렇게

순간이면 좋겠네




멀리서 웃는 그대여

산 넘어가는 그대여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

- <선운사에서>


...그래도 그 '육자배기 가락'이 더 마음속에 남긴 합니다. 사랑보단 추억이 잔상을 길게 남기듯이.

로쟈 2010-03-21 10:25   좋아요 0 | URL
아주 오래전 한번 갔었죠. 선운사엔. 동백꽃은 보지 못했어요...

2010-03-22 00: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10-03-21 0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을 읽고 문득 생각이 나 파일을 뒤져보니, 저는 2000년 10월 4일자로 고진의 책들을 읽고 느낀 감상을 적었더군요... 10년이 지났네요(저는 좀 모자란 10년이긴 하지만)... 공연히 감상적이 되는군요 ㅋㅋ 황사가 심한 하루였는데 감기 조심하시구요^^*

로쟈 2010-03-21 10:24   좋아요 0 | URL
고진과 함께한 10년이네요.^^

2010-03-21 01: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3-21 10: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3-21 05: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3-21 12: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10-03-21 14: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옛날이라면 옛날 일기군요. 컴퓨터에 쓰셨던가요? 아니면 따로 일기장 같은 것에 손으로 쓰셨던가요?
전 요즘 고민이 생겼어요. 옛날 일기장과 앞으로의 일기를 어떻게 '안전'하게 보관할까 하고요... 자료소실로부터의 안전과 의처증이 심한 배우자로부터의 안전이 두 변수입니다. 남의 일기 본다고 남편한테 소리지를 수도 없고...
로쟈님의 비결을 전수해 주시면 안 될까요? ^^

로쟈 2010-03-22 11:38   좋아요 0 | URL
컴퓨터에 쓴 거죠. 비결이라면 일기를 쓰지 않는 것이죠.^^; 저도 안 쓴 지 오래됐습니다...

베토벤 2010-03-21 1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기억에 고진 책중에서 '탐구1,2'가 가장 잘 안읽혔던 책 같습니다. ㅎ

윤대녕의 상춘곡 마지막 구절은 연애할 때 많이 써먹곤 했지요.

"당신은 여인이니 부디 어여쁘시기 바랍니다'

로쟈 2010-03-22 11:37   좋아요 0 | URL
저는 제일 처음 읽은 게 <탐구>였는데요.^^

사과나무 2010-03-22 1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윤대녕의 <상춘곡>은 제가 본 사랑소설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작품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 작품 때문에 저는 윤대녕을 주목하게 되었지요. 다시 보면 사뭇 다른 느낌을 줄지도 모르지만요^^!
 

이번주에는 눈길을 끄는 교양 교양과학서도 여럿 눈에 띈다. 그중에서 한권만 골라야 한다면, 영국의 수학자 이언 스튜어트의 <아름다움은 왜 진리인가>(승산, 2010). 대칭성과 방정식이란 주제를 다루고 있는 수학책인데, 오래전에 나온 <자연의 수학적 본성>(동아출판사, 1996)을 떠올리게 한다(<자연의 수학적 본성>은 <자연의 패턴>(사이언스북스, 2005)로 재출간됐다). 고등학교 때 이런 책을 접했더라면 수학에 좀더 친근함을 느꼈을는지도 모르겠다. 소개기사를 옮겨놓는다.

 

한겨레(10. 03. 20) 나비도 방정식도 ‘대칭’이라 아름답다

팔랑거리는 나비가 아름답다면, 그 두 날개가 대칭을 이루기 때문일 것이다. 복잡한 수식으로 채워진 방정식이 아름답다면 그것은 ‘등호’(‘=’·‘이퀄’)를 가운데에 두고 등가의 두 값이 팽팽히 긴장한 채 대칭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의 얼굴도, 인간의 몸도, 그 가운데를 위아래로 죽 내리긋는 선분을 상상할 때 좌우 대칭하고 있지 않은가. 가장 아름다운 얼굴은 완벽한 대칭이라는 견해도 있다. ‘대칭’(對稱·symmetry)은 ‘자기 닮음’이다. 이를 확장하면 ‘반복적 자기 닮음’이다. 인간은 대칭을 이룬 건물을 아름답다 느끼며, 자기 자신을 닮은 인간을 사랑한다. 인간의 유전자 속에는 ‘대칭은 아름답다’는 명제가 각인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영국의 수학자 이언 스튜어트가 쓴 <아름다움은 왜 진리인가>(2007년)는 수학자들의 방정식 정복 과정을 톺아봄으로써 오늘날 물리학과 우주론을 구성하는 개념들 중 하나로 떠오른 ‘대칭’이라는 복잡한 주제를 독자의 흥미를 돋우는 글솜씨로 펼쳐놓는다. 자연의 패턴을 비롯한 대칭성 연구로 이름난 학자인 지은이는 수학에서 왜 아름다움은 반드시 참인지, 수학적 공식의 아름다움은 왜 자연과 우주의 아름다움에 곧장 맞닿아 있는지를 드러내 보인다.

방정식만 해도 시쳇말로 ‘해골이 복잡’해지는데, 알면 알수록 더 복잡한 ‘대칭’이론까지 알아야 할 까닭은 무엇인가. 지은이의 말을 따르면 대칭이란 자연 혹은 우주, 곧 물리적 세계를 보는 심오한 방식인바, 그 길로 가는 초입에서 맞닥뜨리는 것이 바로 방정식이다.

먼 옛날 3000여년 전에 유프라테스 강가 바빌로니아 문명의 수학자들이 2차방정식을 푼 이래, 인류는 끈질기게 방정식을 발견하고 풀어왔다. 고대 그리스 기하학을 집대성한 유클리드의 가장 큰 업적은 수학적 증명의 개념을 도입했다는 데 있다. 또한 유클리드는 증명이란 반드시, 이미 참으로 간주된 어떤 명제들로부터 시작되는데 그 명제들은 증명될 수 없다는 점을 깨달았다. 증명의 시작점은 증명되지 못한다는 ‘역설’이다. 중세 유럽의 암흑기엔 페르시아의 시인 우마르 하이얌이 유클리드 기하학을 바탕으로 3차방정식의 해법을 발견했으며, 르네상스 수학자들은 3차와 4차방정식을 (증명은 못했지만) 풀어낸다.

인류의 방정식 정복의 여정은 그러나 5차방정식에서 멈추었다. 5차방정식은 250년 가까이 풀리지 않았다. 이 문제는 프랑스 대혁명기 급진 혁명사상가이자 결투를 벌이다 21살에 숨진 천재 수학자 에바리스트 갈루아(1811~32)에 의해 비로소 ‘해결’됐다.

갈루아 이전에도 일부 5차방정식의 근(해)이 존재함은 알아냈는데, 문제는 ‘그 방정식의 근을 수학공식, 곧 대수(代數)공식으로 표현할 수 있는가’였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1828년 열일곱 살이던 갈루아는 어떤 5차방정식은 풀리는 데 반해 다른 5차방정식은 풀리지 않는다면 그 둘을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인지를 생각했다. 그는 이것이 ‘방정식이 지니는 대칭’에서 비롯됨을 발견했다. 요컨대 일반적인 5차방정식은 그것이 부적당한 종류의 대칭을 가졌기 때문에 근호(=루트)로 풀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6차, 7차 등등 5차 이상의 방정식에서 다 적용된다. 이 해답이 수학과 물리학의 진로를 바꾸어놓았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5차방정식을 풀 수 없는 이유를 이해하여 갈루아가 발견한 ‘대칭’으로부터 수학의 대확장이 시작된다.

갈루아에게서 시작되어 이후 더 촘촘해진 ‘대칭’이란 무엇인가. 대칭은 그 대상의 구조를 보존하는 변환이자 치환이며, 사물을 재배열하는 방식이다. 5차방정식은 풀 수 없다는 갈루아의 발견은 바로 ‘군’론(group theory)으로 나아간다. ‘군’은 대칭을 나타내는 언어다. 주어진 대상의 대칭들을 모두 뭉뚱그려 ‘군’이라 부른다. 대칭이란 아이디어는 완전히 새로운 물리학의 창을 열었으니, 갈루아의 ‘군’론은 19세기 후반 들어 수학자 마리우스 솝후스 리가 생각해낸 연속적인 무한군, 곧 ‘리군’(Lie group)으로 발전한다. 이 ‘리군’이 현대 물리학의 화두인 시간, 공간, 물질의 심층구조와 관련이 있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따라서 지은이는 ‘대칭’이 자연과 우주, 그 물리적 세계의 비밀을 풀 수 있는 ‘만물 이론’에 이르는 길을 안내해 줄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현대 물리학의 두 기둥, 곧 상대성이론과 양자론은 이론적으로 서로 충돌하는데, 이 두 체계를 넘어 시공간에 대한 새 이론을 세우는 데 ‘군’론이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20세기 초, 두 이론을 통합하려 했던 아인슈타인의 시도는 실패했지만, 역사학도 출신 물리학자 에드워드 위튼(59)은 리군의 대칭 개념을 발전시킨 초대칭 개념(=양자장론)을 통해 양자론과 상대성이론의 조화를 시도하고 있다. 상대성이론과 양자론을 통일하는 과정은 그저 난해한 수학적 과제를 푸는 문제일 수 있다고 지은이는 말한다.(허미경 기자) 

10. 03. 19.  

P.S. <아름다움은 왜 진리인가>와 경합을 벌인 책은 후쿠오카 신이치의 <동적평형>(은행나무, 2010)이다. 저자는 <생물과 무생물 사이>(은행나무, 2008) 이후에 연이어 소개되고 있는 일본의 생물학자이자 과학저술가다. 안드레스 에드워즈의 <지속가능성 혁명>(시스테마, 2010)과 함께 나중에 실물을 확인해봐야겠다. 일단은 소개기사를 챙겨놓는다.    

경향신문(10. 03. 20) 당신이 먹은 음식이 당신 몸의 분자가 된다

쇤하이머란 과학자가 이런 실험을 한 적이 있다. 동물의 소화과정을 보기 위해 단백질에 포함된 중질소에 표시를 한 뒤 쥐에게 먹였다. 중성자가 8개인 중질소는 양성자 7개, 중성자 7개로 된 일반 질소에 비해 미량으로 존재하지만 무거워서 질량분석계로 측정해보면 쉽게 찾을 수 있다. 쇤하이머는 단백질은 아미노산으로 분해돼 우리 몸을 움직이는 연료가 될 것이고, 중질소는 대부분 배설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실험 결과는 의외였다. 배설된 투여량은 27%에 불과했고, 나머지 질소는 모두 몸속에 흡수됐던 것이다. 실험 결과는 우리 몸이 꾸준히 분해, 합성하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새 손톱이 헌 손톱을 밀어내듯이 끊임없는 분자의 교환작용이 일어나고 있고, 우리 몸을 이루는 분자는 어제와 오늘이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먹는 음식이 바로 내가 된다는 것’이다. 분자생물학자인 작가 후쿠오카는 이런 의미에서 ‘생명이란 동적인 평형 상태에 있는 시스템’이라고 규정한다. 따라서 환경은 항상 우리 몸속을 관통하고 있고, 우리 몸도 환경의 일부라고 설명한다.

 

이 책 전반에 흐르는 주제는 동적 평형이지만 우리 주변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소재를 예로 들어 쉽게 풀어준다. 이를테면 똑같은 양의 음식을 섭취하더라도 조금씩 나눠먹을 때보다 한 번에 많이 먹을 때 체중이 늘어나는 원인, 먹는 콜라겐이 피부 탄력에 효과를 줄 수 없는 이유, 나이가 들수록 세월이 빨리 흐르게 느껴지는가에 대한 과학적 견해, MSG가 들어간 음식을 왜 맛있다고 느끼는가에 대한 분석을 중학생 정도의 과학상식만 있으면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한다. 눈여겨볼 것은 첨단 분야의 과학자인 작가가 심장은 펌프이고, 신체는 그 부속이라는 데카르트의 기계론적인 생명관에 반대하는 것이다. 줄기세포를 배양해 우리 몸의 기관을 따로 만들어 불치병을 고치겠다는 생각에 대해서도 작가는 비판적이다. 생명을 기계론적으로 조작하기 불가능한 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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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바다 2010-03-20 10:26   좋아요 0 | URL
5차 방정식의 일반해가 불가함을 최초로 증명한 사람은 노르웨이의 아벨로 알고 있었는데 갈루아만 언급된 것은 좀 이상하군요. 책에도 그렇게 되어 있는지, 아니면 기자가 갈루아만 뽑아 낸건지 궁금하군요. 아벨이나 갈루아 모두 위대한 수학자이지만 5차방정식은 아벨, 군론은 갈루아 이런 연상이 일반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로쟈 2010-03-21 10:27   좋아요 0 | URL
둘다 관련된 것 같아요...
 

이번주에 나온 책들 가운데 관심도서는 정치학과 교양과학서쪽이다. 두 개의 페이퍼로 갈무리할 작정인데, 일단 정치분야의 책으로 먼저 꼽을 수 있는 건 가라타니 고진의 대담집 <정치를 말하다>(도서출판b, 2010). 고진 입문서로도 제 격일 듯싶은 책의 리뷰기사를 챙겨놓는다. 

 

경향신문(10. 03. 20) 그대, 왜 침묵하는가? “데모크라시의 길은 직접민주주의 뿐” 

일본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비평가이자 사상가 가라타니 고진(69)이 국내에 본격 소개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부터였다. 근대문학이 정치·사회·윤리적 역할을 떠맡았지만 이제 근대문학의 그런 역할은 끝났다는 주장을 담은 그의 저서 <근대문학의 종언>은 2000년대 한국 문학계에 큰 논쟁거리를 제공했다.

여기저기 그를 인용한 글들이 자주 보이기에 그가 쓴 책을 처음 집어들었던 게 10년 전쯤이었다. <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이산)이었는데 한마디로 잘못된 선택이었다. 일본에서 신좌익운동이 붕괴한 70년대에 쓰여진 이 책은 식상할 대로 식상해진 마르크스 해석을 대체하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했다는 극찬을 받았다고 하는데 에세이 형식이라고는 하지만 당시 나의 지적수준으로선 요령부득이었던 것이다. 
 
며칠 동안 이 책을 잡고 끙끙대다가 던져버린 뒤로 나에게 가라타니는 요령부득인 상태로 계속 남아 있었다. 지난해 일본에서 출간된 대담집을 번역한 <정치를 말하다>는 나처럼 ‘가라타니 읽기’에 도전했다가 실패를 경험한 사람이거나 처음 입문하려는 독자에게 꼭 알맞은 책이다. 학생운동에 투신했던 대학 시절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그가 걸어온 사상적 궤적을 대화체로 풀어냈기 때문이다. 그가 60년대 일본을 격렬하게 달궜던 ‘안보투쟁’을 어떻게 바라봤고, 왜 경제학을 공부하다 영문학으로 전공을 바꾸었으며, 어떻게 문학평론가가 됐다가 결국 문학을 포기했는지, 단체를 만들고 사회참여를 하다가 왜 단체를 해산해 버렸는지 등을 열정적으로 설명했다.

자연스럽게 그가 썼던 책들에 대한 요약과 부연이 담겨 있어 해당 책을 본격적으로 읽기 전에 논지를 파악하는 데에도 유용하다. 자본주의에서 중요한 것은 마르크스가 주목했던 생산과정이 아니라 유통과정이라는 분석, 국가를 경제적 하부구조에 의해 규정되는 상부구조로 다루는 기존 마르크스주의와 달리 ‘국가는 다른 국가에 대하여 존재한다’는 등 그의 독특한 시각들 말이다.

제목에도 나와 있듯 가라타니가 이번 책에서 던진 주요 메시지는 정치와 민주주의, 평화다. 가라타니는 90년대에 만개한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외적으로는 제국주의, 내적으로는 전제주의로 귀결됐다고 보았다. 그는 특히 일본사회에서 노조가 파괴되고 대학이 민영화되면서 중간세력이 없어졌고 전제사회가 됐다고 말한다. 대의제 민주주의는 개개인이 투표를 통해 주권자로서의 권리를 행사한다고 하지만 이는 곧 개인에게 가능한 것은 대표자를 뽑는 것뿐이다. 
 
가라타니는 전제주의에서 벗어나는 길은 대의제 이외의 정치적 행위를 찾는 것이라면서 ‘데모’, 다른 말로 하자면 직접민주주의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대의제란 대표자를 뽑는 과정입니다. 그것은 민중이 참여하는 데모크라시가 아닙니다. 데모크라시는 의회가 아니라 의회 바깥의 정치활동, 예를 들어 데모 같은 형태로만 실현된다고 생각합니다.”

문학비평지 ‘비평공간’을 창간했다가 닫아버리고 새로운 ‘혁명운동’으로 생각하며 ‘생산·소비협동조합운동(NAM)’을 조직했다가 일거에 해산해 버린 이유에 대한 설명도 흥미롭다. “어차피 끝날 거라면 아직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쪽보다 그만두는 쪽이 좋다고 생각”해 그랬다는 것이다. 가라타니에 천착해 한국 기성문학계를 끊임없이 비판하고 있는 역자 조영일은 이에 대해 “실패가 아니라 엘리트의 자기우상화에 대한 강력한 거부였던 셈”이라며 “가라타니는 민주주의에 대한 입장을 그 자신에게도 철저하게 적용한 것”이라고 해석했다.(김재중기자)  

10. 03. 19. 

P.S. 가라타니 고진의 민주주의론과 견주어 볼 만한 책은 영국의 정치학자 데이비드 헬드의 민주주의론이다. 두툼한 교재용 책 <민주주의의 모델들>(후마니타스, 2010)도 이번주 신간이다(<민주주의 모델>(인간사랑, 1989)이라고 출간됐던 책의 개정판 새번역이다). 간단한 리뷰기사를 옮겨놓는다. 

세계일보(10. 03. 20) 민주주의에 대한 진지한 성찰 '민주주의의 모델들'

현재 지구상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국가는 스스로 민주주의 국가임을 자처한다. 하지만 민주주의를 자칭하는 정권의 말과 행동이 늘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민주주의의 역사 역시 마찬가지다. 민주주의 사상이 우리에게 정치적인 것에 대한 열정과 영감을 불러일으킨다면, 민주주의의 실제 역사는 끊임없이 우리를 당혹스럽게 한다.

런던정치경제대학교 정치학부 교수가 쓴 ‘민주주의의 모델들’은 그간 역사적으로 등장했고 실험되었던 다양한 민주주의의 이념들과 구체적 실천의 내용들을 유형화·모델화함으로써, 각 모델들이 이런 질문에 어떻게 답하고 있으며, 그 한계는 무엇인지를 묻는다. 그리고 이를 통해 역사적으로 제도화되고 관성화된 민주주의의 의미에 파열을 내고, 우리가 잊고 있거나 새롭게 추가되어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 질문한다.

마침, 오늘의 한국 사회는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를 경험하고 있다. 정부에 대한 민주적 선출, 여야 간의 정권 교체, 진보 정당의 의회 진출 등 민주주의의 형식적 조건 내지 절차는 어느 정도 완성 단계에 도달해 있다. 하지만 치열한 다툼과 희생을 통해 이룩하고자 했던 ‘민주주의’와 현실의 ‘민주주의’ 사이의 간극에 대한 우려로 가득 차 있다. 나아가, 이상적 모델로서의 민주주의와 현실의 작동 방식으로서의 민주주의 사이의 간극으로 혼란을 겪고도 있다.

민주주의는 하나의 이상적 모델로 구현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그렇기에 역사상 존재해 왔고, 이론적으로도 일정한 체계를 갖춘 여러 모델을 비판적으로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민주주의의 열 가지 모델을 살펴보고 있는 이 책은 그 필요에 적절히 부응하고 있다.

저자는 우리나라보다 앞서 비슷한 문제에 직면했던 사회들에서 전개되었던 깊은 사색의 결과물들을 통해 과도기적 혼란을 겪고 있는 우리가 민주주의에 대한 좀 더 진지한 성찰의 계기를 마련해 줄 것을 기대하고 있다.(조정진기자)  

P.S.2. 약간 학술적인 책으론 러셀 달튼의 <시민정치론>(아르케, 2010)도 신간이다. "지난 수십 년에 걸쳐 서구 대의민주주의 국가 시민들의 정치참여 행태를 경험적 자료를 사용하여 분석해낸 비교연구서"로 "한국의 민주화 이후의 시대를 사는 '정치적으로 세련된' 시민들이 자신의 정치행태를 비교ㆍ평가하고 성찰하기 위해 읽어야 할 시민정치 교과서이며, 아울러 정치학도와 선거전문가, 정당관계자에게는 필독서"리고 소개된다. 부제는 '선진산업민주주의 국가의 여론과 정당'. 작년에 나온 키이스 포크의 <시티즌십: 시민정치론 강의>(아르케, 2009)와 짝이 될 만하다. '시민정치'가 새로운 화두인가? 두 책의 원서는 아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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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서울비의 알림
    from seoulrain's me2DAY 2010-03-20 13:16 
    [책] 가라타니 고진의 민주주의론 — via 로쟈
  2. 가라타니 고진 다시 읽기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4-12 19:47 
    격주간 기획회의(269호)에 실은 전문가 리뷰를 옮겨놓는다. 가라타니 고진의 대담집 <정치를 말하다>(도서출판b, 2010)을 다루고 있다.   기획회의(10. 04. 05) 가라타니 고진 다시 읽기 “일본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비평가이자 사상가”, 가라타니 고진을 소개하는 문구이다. <정치를 말하다>는 이 걸출한 비평가이자 사상가의 궤적을 한 눈에 일별하도록 해주는 대담집이다. 대담이라는 형식의 성격상 ‘대
포퓰리즘의 근거와 자유주의의 가장자리

지방선거를 앞둔 때문인지 정치 관련서가 많이 나오고 있는데, 정치인들이 홍보용 책자도 있지만 정치이론서나 비평서도 드물지 않다. 인터넷 논객으로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는 안병길 박사의 <약자가 강자를 이기는 방법>(동녘, 2010)도 그런 범주에 속한다. '대통령도 모르는 자유민주주의 바로 알기'가 책의 부제인데, 대략 '자유민주주의를 옹호하는 법'으로도 읽힌다. 포퓰리즘에 관한 참고사항이 있어서 메모해두려고 하는데, 일단은 소개기사를 하나 스크랩해놓는다.   

파이낸셜뉴스(10. 03. 11) 자유·권리 지키려면 ‘귀차니즘’을 버려라 

자유는 만물의 창조주인 하나님이 인간에게 내린 가장 소중한 선물이자 어떠한 경우에도 침해될 수 없는 가장 근본적이고 고귀한 가치다. 그러하기에 이러한 자유가 박탈됐을 때 인간은 목숨을 걸고 항거해왔고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민주주의는 이러한 희생의 대가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고귀한 자유민주주의를 오늘날 우리는 제대로 이해하고 이를 온전한 모습으로 지켜나가고 있는 걸까.

미시간 주립대 및 서울대학교 국제지역원 교수를 지낸 안병길 박사는 최근 저술한 ‘약자가 강자를 이기는 법’을 통해 엉터리 자유민주주의와 권위주의가 판을 치고 있는 현실에 대해 경종을 울리며 자유민주주의를 올바로 이해함으로써 우리의 자유와 권리를 온전히 지켜나갈 수 있다고 역설하고 있다. 우파는 좌파를 빨갱이, 좌빨, 친북이라고 매도하고 좌파는 우파를 수구, 꼴통으로 몰아세우며 자신이 속한 정파만이 정의롭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것은 자유민주주의의 탈을 쓴 권위주의에 불과하다.

교육에 있어서도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원리나 개념보다는 공동체주의에 기본을 둬 애국심과 준법정신을 강조하고 개인의 자유와 권리가 마치 사회불안 요인인 것처럼 가르치고 있는데 이것은 권위주의와 연결될 수 있다고 저자는 우려한다. ‘착하게 살아라’는 식으로 절대적 도덕 가치를 기준으로 교육하는데 그것보다는 자유민주주의의 원리를 제대로 가르쳐서 왜 그렇게 살아야 자신에게 더 이로운지 깨우치게 해줘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자유주의의 인간 바탕은 그냥 백지로 봐야 한다고 말한다. 백지 안에 무엇을 채워 넣든 그것은 각 개인의 자유로 일단 존중해야 한다. 따라서 인터넷 상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인신공격, 심한 욕설 등의 행위가 나쁘다는 것은 사회적 공감대가 있는 것이지 사람이 궁극적으로 나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자신의 의견과 다른 상대방에 대해 선악의 잣대를 갖다 대 상대방을 악으로 보는 것은 권위주의적인 발상이다. 실제로 많은 사람이 타인에 대해 아무 근거도 없이 틀렸다 나쁘다는 식으로 평가한다. 그러나 이것은 방종이지 결코 자유가 아니다.

그렇다면 자유와 방종의 차이는 무엇일까. 로빈슨 크루소처럼 외딴 섬에서 혼자 살고 있다면 ‘자유=방종’이라는 결론을 내려도 무방하다. 그러나 두 사람 이상이 모여 사는 사회에서는 방종은 상대방의 저항에 직면할 수 있다. 내가 한 행동이나 말이 상대방에게 피해를 주었다면 상대방 역시 나에게 똑같이 대응할 수 있다. 따라서 사회구성원 각자는 게임이론에서 볼 수 있듯이 주어진 상황에서 자신의 행복을 극대화하기 위해 합리적인 선택을 하게 되고 이것이 스스로의 행동을 절제하는 자율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한편으로 상대방의 방종에 대해 저항하지 않으면 상대방은 이것을 자신의 자유로 생각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자유민주주의의 가면을 쓴 권위주의자들에 의해 자신의 권리가 침해를 받고 있을 때 저항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대체로 권위주의자는 자신들이 어떤 권위가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에 자유주의자들보다 강하다.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가 적극적으로 참여해 힘을 모아야 한다. 적극적인 참여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우리 사회 전반에 만연해 있는 ‘귀차니즘’을 버리고 자신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하는 방종에 대해 용기를 내 맞서야 한다. 그냥 귀찮아서 봐준다는 식으로 방종을 내버려 두면 ‘엉터리 자유’가 우리와 우리의 후손들을 억압하게 된다고 저자는 강조한다.(최종옥 북코스모스대표) 

10. 03. 19.  

P.S. 책은 자유주의에 대한 원론적인, 상식적인 옹호론으로 보인다. 물론 한국사회가 그런 상식이 통용되지 않는 사회이기에 저자가 '귀차니즘'을 물리치고 저술에까지 나선 것이겠다. 덧붙여, 포퓰리즘에 관한 참고사항이라고 한 건 저자가 추천한 윌리엄 라이커의 <자유주의 대 집체주의>(1982), <정치적 조작술>(1986) 두 권이다. 라이커는 저자의 박사학위논문 지도교수(가 아니라 은사라 한다). 'populism'을 '집체주의'라고 옮긴 건 특이한 선택으로 보이는데, 선례가 있는지 모르겠다. 내 생각에 '집체주의'는 '집단주의'와 동의어로 보통 'collectivism'의 번역어로 쓰기 때문이다. 그 <자유주의 대 집체주의>에  대한 간단한 소개는 이렇다. 

책 제목에서 암시하는 바는, 집체주의를 경계하면서 자유주의를 잘 운영해야 한다는 뜻이다. 라이커 교수가 설명한 자유민주주의의 요체는 무엇일까? '돌고 도는 세상'이라는 표현에서 유추할 수 있다. 필자는 '자유민주주의에는 절대적인 정답이 없다'로 표현하고 싶다. 상대적으로 더 옳은지 아닌지를 따지는 것이지, 만병통치약 같은 정치제도는 이 세상에 없고, 그런 것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엉터리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그런 엉터리가 좋아하는 이념이 집체주의라는 것이다.(193-4쪽) 

 

그런 맥락에서 저자는 포퓰리즘뿐만 아니라, 루소의 사상에 기원을 두고 있는 모든 유형의 공동체주의에 대해서도 의혹의 시선을 던진다. 그래서 박세일 교수 등의 <공동체 자유주의>(나남, 2008) 주장에 대해서도 "좋은 것이 좋은 것"이라는 주장에 불과하다고 평한다. "공동체라는 상위 개념을 두는 것 자체가 진정한 자유주의에 어긋난다"는 것이 저자의 기본 입장이자 신념이다. 일종의 자유지상주의인데, 영국의 또 다른 정치철학자 퀜틴 스키너의 자유론과는 대비되는 것이어서 비교해 봄직하다(물론 더 큰 차이는 '진리의 정치'를 주장하는 '레닌주의'와의 차이다).   

  

이번주 신간 가운데는 지식인들의 비판에 맞서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지식인과 자본주의>(부글북스, 2010), 국가와 시민이 빈곤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가를 다룬 <빈곤에서 권력으로>(이매진, 2010) 등이 관심을 끄는 책들이다. 주말 북리뷰들이 뜨면 책의 정체가 조금 분명해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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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조부 2010-03-20 01:43   좋아요 0 | URL
이 책 읽고 싶은 마음이 드는데요?

근데 안병길씨가 인터넷 논객으로도 활동하는줄은 몰랐네요~

로쟈 2010-03-20 09:18   좋아요 0 | URL
주로 이준구 교수의 홈피에서 활동하는 분이라네요.

안병길 2010-04-10 15:36   좋아요 0 | URL
안병길입니다. 제 책에 관심을 보여주셔서 매우 감사합니다. ^^

라이커 교수님은 제 은사님이지만, 지도교수는 아닙니다.
국제정치학자 Bruce Bueno de Mesquita 교수님이 박사논문 지도를 하셨습니다.

Populism을 집체주의로 번역한 것은 라이커 교수님의 저서에서 설명한
Populism의 적당한 표현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로쟈 2010-04-11 23:26   좋아요 0 | URL
아, 제가 넘겨짚었나 보네요.^^; 수정했습니다. '집체주의'는 혼동의 여지가 있는 듯해서요. 아시다시피 요즘은 그냥 포퓰리즘이라고 많이 쓰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