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만큼이나 우중충한 기분이 계속되고 있는데, 과거 일기를 잠깐 들춰보다가 딱 10년 전 기록을 발견하고 약간의 감상에 젖는다. 우연찮게도 어제 귀가길 좌석버스에서 읽은 책이 가라타니 고진의 <정치를 말하다>(도서출판b, 2010)였는데, 10년 전에 읽던 책도 고진이었다. 그해 봄 <탐구> 시리즈를 읽었던 듯하다. 고골 작품에 대한 강의를 하게 돼 있는 일정도 얼추 비슷하다. 그러고 보면 10년간 크게 달라진 것도 없는 모양이다. 그사이에 <이것이냐 저것이냐>만 재출간됐는데, 낮에 찾아서 조금 들춰보고 싶다. 잠시 시간여행을 해본다... 

 

00. 3. 21
고진의 책으로 <탐구2>를 읽고 있다. 에세이식이지만, 이론적인 논의라서 찬찬히 집중해서 읽어야 한다. 현대 서양철학의 중요한 주제에 대한 비서양권의 개입으로선 유례없이 탁월하다는 느낌을 준다. 김상환 교수의 리뷰는 고진의 특장과 ‘자만’을 잘 지적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그의 글은 유혹적이다. 타자와 텍스트의 바깥을 말하는 부분에서 그가 약간은 과장하고 있지 않나 하는 느낌은 갖는데, 어쨌든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서 자신만의 힘(논리)으로 밀고나가는 모습은 인상적이다.   

아침신문 문학기행란에 윤대녕의 <상춘곡>이 실렸다. 읽어보진 않았지만, 선운사 동백을 다룬 작품이다. 문득 모든 일에서 떠나버리고 싶어 하루종일 아무일도 하지 않았다.  

선운사 골째기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안했고
막걸리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 것만 상기도 남었습디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었습디다

어딘가 목이 쉬어 남아 있는 날들이 나를 어지럽게 하였다...  

키에르케고르(1813-1855) 42세의 죽음. <이것이냐, 저것이냐>(1843) 30세부터 굉장한 다작, 다산성의 저자. 물론 고진의 키에르케고르 읽기에 이끌려 다시 집어들었다.  

내일 강의는 고골의 <외투>이다. 딱히 더 준비할 건 없지만, 버만의 <현대성의 경험>에서 고골에 관한 장(주로 <넵스키 거리>를 다루고 있다)을 읽고, 연구서에서 부분부분, 그리고 작품을 다시 읽고 있다. 그런데 벌써 2시다. 세상이 무언가 달라졌으면 싶은데, 참...  

10. 03. 21.  

P.S. 오늘 아침부터 듣는 노래는 빅토르 최(키노)의 '이상한 이야기'다(http://www.youtube.com/watch?v=p8j7z1NiLmQ). 그의 노래 가운데 자주 듣지 않았던 곡들에 요즘은 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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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가게재습격 2010-03-21 0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운사 동구>네요. 선운사에 가 보신적이 있으신가요? 묘하게도 시인들은 비슷한 걸 선운사에서 보더군요. 대학에 있을때 가본 일이 있는데, 저는 최영미 시가 먼저 떠오르더군요.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님 한번 생각할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그대가 처음

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

잊는 것 또한 그렇게

순간이면 좋겠네




멀리서 웃는 그대여

산 넘어가는 그대여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

- <선운사에서>


...그래도 그 '육자배기 가락'이 더 마음속에 남긴 합니다. 사랑보단 추억이 잔상을 길게 남기듯이.

로쟈 2010-03-21 10:25   좋아요 0 | URL
아주 오래전 한번 갔었죠. 선운사엔. 동백꽃은 보지 못했어요...

2010-03-22 00: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10-03-21 0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을 읽고 문득 생각이 나 파일을 뒤져보니, 저는 2000년 10월 4일자로 고진의 책들을 읽고 느낀 감상을 적었더군요... 10년이 지났네요(저는 좀 모자란 10년이긴 하지만)... 공연히 감상적이 되는군요 ㅋㅋ 황사가 심한 하루였는데 감기 조심하시구요^^*

로쟈 2010-03-21 10:24   좋아요 0 | URL
고진과 함께한 10년이네요.^^

2010-03-21 01: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3-21 10: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3-21 05: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3-21 12: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10-03-21 14: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옛날이라면 옛날 일기군요. 컴퓨터에 쓰셨던가요? 아니면 따로 일기장 같은 것에 손으로 쓰셨던가요?
전 요즘 고민이 생겼어요. 옛날 일기장과 앞으로의 일기를 어떻게 '안전'하게 보관할까 하고요... 자료소실로부터의 안전과 의처증이 심한 배우자로부터의 안전이 두 변수입니다. 남의 일기 본다고 남편한테 소리지를 수도 없고...
로쟈님의 비결을 전수해 주시면 안 될까요? ^^

로쟈 2010-03-22 11:38   좋아요 0 | URL
컴퓨터에 쓴 거죠. 비결이라면 일기를 쓰지 않는 것이죠.^^; 저도 안 쓴 지 오래됐습니다...

베토벤 2010-03-21 1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기억에 고진 책중에서 '탐구1,2'가 가장 잘 안읽혔던 책 같습니다. ㅎ

윤대녕의 상춘곡 마지막 구절은 연애할 때 많이 써먹곤 했지요.

"당신은 여인이니 부디 어여쁘시기 바랍니다'

로쟈 2010-03-22 11:37   좋아요 0 | URL
저는 제일 처음 읽은 게 <탐구>였는데요.^^

사과나무 2010-03-22 1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윤대녕의 <상춘곡>은 제가 본 사랑소설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작품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 작품 때문에 저는 윤대녕을 주목하게 되었지요. 다시 보면 사뭇 다른 느낌을 줄지도 모르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