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자 경향신문의 '문화와 세상' 칼럼을 옮겨놓는다. 어김없이 4주에 한번씩 칼럼을 쓸 차례가 되는데, 오전까지 아무 생각이 없다가 불현듯 '파레토 법칙'이란 게 떠올라서(사실 어제 읽은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에서 힌트를 얻었다) 3시간 동안 꼼지락거리며 쓴 것이다. 파레토에 대해서는 많이 언급들을 하지만 그의 저작은 거의 소개돼 있지 않다는 점도 놀랍다면 놀라운 일이다. 하긴 좀 '식상한' 놀라움이기도 하지만...   

경향신문(10. 07. 20) [문화와 세상] ‘20:80의 사회’

‘파레토 법칙’이라는 게 있다. 경제학 상식이긴 한데, 20%의 원인이 80%의 결과를 가져온다는 내용이다. 이탈리아의 사회학자이자 경제학자 빌프레도 파레토가 발견했다고 하여 그의 이름을 땄다. 일설에 따르면 그는 이 법칙을 개미 관찰을 통해서 착안했다. 경제학자가 어쩌다 개미 관찰까지 하게 됐을까 의문스럽지만, 사과가 나무에서 떨어지는 걸 보고 만유인력을 착상했다는 뉴턴의 ‘전설’도 있으니 넘어가기로 한다. 여하튼 이야기인즉, 파레토가 개미들을 관찰해보니 모두가 열심히 일하는 건 아니더란다. 20%만 열심히 일하고 나머지 80%는 빈둥대며 놀더라는 것이다. 그 일하는 개미 20%만 따로 분리하여 통 속에 넣고 관찰하니까 신기하게도 다시 20%만 일하고 80%는 놀았다. 그럼 빈둥대던 80%를 분리시켜 놓으면? 그중 20%는 ‘정신 차리고’ 또 열심히 일했다. 결과적으론 아주 오묘하게도 항상 20 대 80이 유지됐다. 그래서 ‘법칙’이다. 



이 ‘20 대 80 법칙’은 여러 분야에서 활용된다. 마케팅 쪽에서 “백화점 매출액의 80%는 20%의 단골손님에서 나온다”는 것이 대표적 사례다. 이 법칙에는 정치적 색깔도 보태질 수 있는데, ‘파레토 우파’라고 부를 만한 진영에선 “20명의 엘리트가 평범한 80명을 살린다”고 주장한다. 개미사회에서도 ‘엘리트 개미’와 ‘평범한 개미’가 나뉘는지 모르겠지만, 20 대 80이란 비율의 의미를 그렇게 엘리트주의로 해석하고 정당화한다. “한 사람의 천재가 10만명을 먹여 살린다”는 삼성 이건희 회장의 ‘천재론’은 아예 ‘파레토 극우파’라고 이름붙일 수 있을까.

반면에 ‘파레토 좌파’가 관심을 갖는 건 차등적 소유와 분배 문제다. ‘어떤 사회든 전체 부의 80%는 20%가 소유한다’는 파레토의 통찰에 주목하는 것이다. 이러한 불평등은 전 지구적 자본주의 체제하에서는 더욱 심화되어 세계 인구의 11%를 차지하는 49개 최빈국의 부가 세계 최고 부자 세 사람의 소득 합계 정도에 지나지 않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과연 개미사회에서도 그러한 불평등한 분배와 소유의 독점이 이뤄지는지 의문스러우면서, 동시에 이런 현실이 얼마나 지속가능할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신흥 경제성장국인 중국과 인도, 브라질 등이 미국과 서유럽 수준의 안락함을 누리기 위해서는 지구 3개분의 자원이 필요하다는 지적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그런 우려와 무관하게 바야흐로 ‘20 대 80 사회’가 도래할 것이라 한다. 세계 자본주의 경제는 단지 20%의 노동력만으로 모든 일이 가능해지고, 나머지 80%의 사람들은 쓸모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80%가 노는 사회가 아니라 80%를 놀게 만드는, ‘쓰레기’로 만드는 사회의 도래다. 이미 징후가 없지 않다. 청년실업이 낳은 자조적인 용어 ‘잉여’는 80%의 실존적 위기감을 표현해주고 있지 않은가. 어떤 선택이 가능한가. 20% 안에 들기 위한 경쟁에서 악착같이 승리하는 일? 하지만 개미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이 ‘20 대 80’은 개개인의 능력이나 인격과 무관한 ‘구조적인’ 것이다. 어떤 사회가 80%의 탈락자를 만들어냄으로써만 유지될 수 있다면, 사실 그런 사회체제 자체가 ‘쓰레기’ 아닌가? 자학이야말로 ‘삶의 기쁨’이라고 고집하지 않는 한, 80%가 유의미한 노동에 참여할 수 있는 사회를 ‘유토피아’로 치부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한편으로 ‘20 대 80 사회’가 비관적인 전망만을 제시하는 건 아니다. 20%의 노동력만으로도 경제가 유지된다면, 우리는 적절한 로테이션을 통해서 80%가 놀고 먹을 수 있는 ‘개미들의 유토피아’를 실현할 수도 있다. 우리에게 그럴 용의와 의지가 있는지가 문제다. 

10. 07. 19. 

P.S. 파레토란 이름을 처음 본 건 루이스 코저의 <사회사상사>(일지사, 1978; 시그마프레스, 2003)에서였던 듯싶다. 둘다 절판된 거 같지만, 내가 읽은 건 일지사본이었다. 2003년에 원서의 2판이 나온 걸로 돼 있는데, 번역본도 개정판이 출간되면 좋겠다. 아니, 어쩌면 레이몽 아롱의 <사회사상의 흐름>(홍성사, 1980, 기린원, 1988)이 먼저였는지도 모르겠다. 모두 수준급의 개설서들일 텐데, 지금은 흔적도 찾을 수 없다. 세월의 힘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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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2010-07-20 1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궁금했었는데, 20:80에 대해 확실이 알았습니다. 손부족한 날에 안전한 이사 바랍니다.

로쟈 2010-07-20 13:39   좋아요 0 | URL
맛보기일 뿐이죠. 개미 얘기의 출처가 궁금해서 좀 찾아봤지만, 모두 '일설'에서 그치더군요...

2010-07-20 16: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7-20 17: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루이스 멈퍼드-허먼 멜빌-알베르 카뮈

루이스 멈퍼드의 <유토피아 이야기>(텍스트, 2010)와 박홍규 교수의 <메트로폴리탄 게릴라>(텍스트, 2010) 출간 기념으로 박홍규 교수와의 대담 자리를 갖게 됐다. 도서출판 텍스트의 제안에 따른 것으로 일시는 8월 24일(화) 저녁 7시 30분이고, 장소는 청어람아카데미 지하소강당이다. 알라딘 이벤트는 http://blog.aladin.co.kr/culture/3896091 참조.



10. 07. 19. 

 

P.S. 대담일 바로 전 주에 이사가 예정돼 있어서 아마도 정신이 없을 것 같다. 준비를 잘할 자신은 없고, 다만 <메트로폴리탄 게릴라>, <유토피아 이야기>, <아나키즘 이야기> 세 권은 읽고 갈 계획이다. 혹 대담 행사에 관심을 갖고 계신 분들은 참고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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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7-19 13: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7-19 14: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7-19 14: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7-19 14: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법학자 김두식 교수의 신작 <불편해도 괜찮아>(창비, 2010)는 적어도 알라딘에서는 따로 소개가 필요없는 책이다. 이미 '고정독자'들은 알아서들 충성도를 발휘하고 있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인권 문제를 다룬 책이면서 동시에 '영화책'이기도 하다는 게 이채로운데, 알고 보면 저자도 영화광이라고. 작년 이후 책이 나오는 속도를 보면 서서히 '가속'이 붙는 듯싶은데(물론 안식년 덕분이라곤 하지만), 벌써부터 다음 책이 기대된다. 딸아이가 낼모레 여름방학 캠프에 간다고 들떠 있는 걸 보면서 '지랄 총량 법칙'을 풀이해주는 리뷰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서울신문(10. 07. 17) ‘지랄 총량의 법칙’ 아세요?   

민중의 지혜라는 ‘지랄 총량의 법칙’을 아십니까. ‘불편해도 괜찮아’(창비 펴냄)의 저자 김두식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사춘기가 되면서 ‘이해할 수 없어진’ 딸에 대한 이야기로 책을 시작한다. 김 교수의 딸은 중학교 1학년이 되더니 “엄마 아빠 같은 찌질이로는 살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사사건건 부모와 충돌한다. 저자는 ‘시민들을 위한 싱크탱크’ 희망제작소의 유시주 선생에게 고민을 털어놓았고, 유 선생은 “모든 인간에게는 일생 쓰고 죽어야 하는 ‘지랄’의 총량이 정해져 있다. 어떤 사람은 그 지랄을 사춘기에 다 떨고, 어떤 사람은 나중에 늦바람이 나기도 하지만 어쨌거나 죽기 전까진 반드시 그 양을 다 쓰게 되어 있다.”라고 설명했다. 이혼한 한 배우는 어렸을 때 조신하게 살면 나이 들어서 사고를 치게 된다고 말하기도 했다.  

공부하란 말을 ‘교수답게’ 에둘러서 하던 김 교수는 드라마 ‘네 멋대로 해라’를 보고 부모에게 필요한 것은 자녀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이지 기대나 닥달이 아니란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남주인공 고복수(양동근 분)가 여주인공 전경(이나영 분)이 아버지로부터 뺨을 맞는 광경을 보고 “진짜 아버지 따로 있을 거예요. 무슨 아버지가 이래?”라고 말하는 장면을 보고서다. 이후 김 교수는 딸의 공부에 대한 복잡한 기대를 버리자, 딸의 ‘지랄’도 놀랄 만한 속도로 안정을 찾는다.  

영화광 김 교수는 10여년 전 공부하는 아내를 위해 검사직을 그만두고 2년간 육아와 가사에 전념했다. 이를 두고 많은 사람이 “좋은 남편 만나서 (아내가) 행복하겠다.”라고만 하지, 혼자 2년 반 동안 미국에서 일하고 공부하며 아이까지 키운 아내의 노고는 이야기하지 않더라는 게 김 교수의 고백이다. 결국 자신은 이 땅에서 남자로 태어난 특권을 누리고 있을 뿐이라고.  

‘불편해도 괜찮아’는 이처럼 영화와 드라마, 인권에 대한 이야기가 저자의 인생사와 엮여 소설보다 재미있는 인문교양서가 됐다. 김 교수는 법조계 사람들을 심층 인터뷰한 ‘불멸의 신성가족’, 저자 자신이 기독교도이면서 한국 교회에 신랄한 일침을 가한 ‘교회 속의 세상, 세상 속의 교회’ 등을 쓴 ‘문제적 저자’다. 무엇보다 그의 필력이 지닌 장점은 예민하면서도 무거운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어낸다는 것.  

‘국민드라마’였던 ‘내 이름은 김삼순’에서 현빈이 옛 애인이었던 정려원의 비밀을 알고 뺨을 때리는 장면에서도 사랑과 분노를 따귀로 풀어내는 우리 드라마 작가와 PD의 ‘게으름’을 지적한다. 그러면서 10년간 한국 드라마에서 따귀 때리는 장면만 모아 다큐멘터리를 만들어서 방송국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저자의 생각에는 슬며시 웃음도 난다.   

저자는 미국에서 아이를 키우는 동안 공공도서관에서 ‘보디 히트’ ‘나인 하프 위크’ ‘투 문 정션’ ‘와일드 오키드’와 같은 오래된 영화들을 빌려 보았다고 한다. 한국에서 뭉개진 화면으로만 감상했던 영화들이었다. 그러다 ‘색, 계’를 보게 되었을 때 이제 겨우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초입에 들어섰다고 생각했단다. ‘볼 권리’를 누리며 가슴 벅차오른 감격을 느낀 저자는 가위질은 언제나 절대적으로 위헌이라고 지적한다. 청소년, 성 소수자, 여성, 장애인, 노동자 등의 인권을 영화와 연결지어 흥미진진하게 풀어내는 책은 드라마보다 강한 중독성을 발휘한다.(윤창수기자)  

10. 07. 18.  

P.S. "공공도서관에서 ‘보디 히트’ ‘나인 하프 위크’ ‘투 문 정션’ ‘와일드 오키드’와 같은 오래된 영화들을 빌려 보았다고 한다"는 대목에서 의문. 윌리엄 허트와 캐서린 터너 주연의 <보디 히트>(1981)는 나도 비디오로 본 것 같지만(내가 중학생 때 개봉된 듯싶다), 나머지 영화는 모두 극장에서 봤다(물론 처음에는 가위질 된 걸로, 나중에는 안 잘린 걸로). 저자와는 분명 같은 세대인데 '오래된 영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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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10-07-18 21:57   좋아요 0 | URL
지랄 총량의 법칙은 완전 동감입니다.^^ 저도 사춘기때 그것을 안한 죄로 스무 살때 뒤늦게 부모님께 떨었던 기억이 나네요.

로쟈 2010-07-19 00:44   좋아요 0 | URL
그렇게 생각하면 저도 좀 걱정이네요.^^;

yamoo 2010-07-18 23:20   좋아요 0 | URL
하하하 지랄총량의 법칙이 있었군요..ㅎ 그나저나 영화나 소설에서 가위질은 정말이지 위헌적 소지가 너무나 많습니다. 위원회의 심의(소수)가 모든 사람들의 볼 권리를 박탈하는 것이 왜 위헌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로쟈 2010-07-19 00:45   좋아요 0 | URL
지금은 거의 무력화됐지요...

푸른바다 2010-07-19 14:46   좋아요 0 | URL
나인하프위크는 제가 고등학교 때 상영한게 확실합니다.^^ 고등학교 때 불어 교사가 그 영화를 보고와선 "너희들은 못보지?" 하며 놀렸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 후로 비디오로 보긴 했는데, 그리 인상적인 영화는 아니었던 듯 해요... 비디오도 가위질이 많이 됐었는지 모르지요.^^

델러웨이부인 2010-07-19 14:47   좋아요 0 | URL
제 지랄총량의 끝은 어디일까요.... 무지 오래 살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듭니다.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

지젝의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창비, 2010)를 다시 손에 들고 2부를 읽고 있다. 다른 일들에 밀려 완독하지 못했었는데, 서평을 염두에 두고 마저 읽기로 마음먹어서다. 언론리뷰를 다시 찾아보니까 주로 1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1부 '멍청아, 그건 이데올로기야!'는 세계금융위기와 자본주의 분석에 할애돼 있고, 2부 '공산주의적 가설'은 말 그대로 재발명되어어야 할 공산주의의 그림을 그리고 있다. 가장 자세한 리뷰이면서 동시에 2부의 내용도 챙기고 있는 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책에 대한 관심도 다시금 부추길 겸해서.  

추락하는 여객기 안에서 어떤 자세로 몸을 웅크리느냐는 아무 의미가 없다. 예고된 재난을 외면하는 것은 파국을 막는 데 방해가 될 뿐이다. 슬라보예 지젝은 말한다. “우리는 가능성의 차원에서 우리의 미래가 끝장나게 돼 있다는 것, 파국이 우리의 운명이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러한 인정을 바탕으로 운명 자체를 변화시킬 행위를 수행하는 데 나서야 하며, 그럼으로써 하나의 새로운 가능성을 삽입해야 한다.” 이 그림은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의 원서 표지를 재구성한 것이다.   



경향신문(10. 07. 03) 지금 좌파가 해야할 일은? 

한국의 어느 인문학 독자가 1990년대 말 10년짜리 우주여행이 걸린 복권에 당첨됐다고 치자. 10년 만에 지구로 귀환한 그는 당연히 한국의 서점을 찾을 것이고, 전에 보지 못했던 거대한 괴물과 대면하게 될 것이다. 괴물의 이름은 슬로베니아 출신으로 ‘현존하는 가장 위험한 사상가’로 소개되는 슬라보예 지젝(사진)이다. 1949년에 태어나 현재 슬로베니아의 류블랴나 대학 철학교수인 그는 60여종의 책을 썼는데 국내에 소개된 것은 공저를 포함해 40종 가까이 된다. 2종을 제외하곤 모두 2000년 이후에 번역됐다. 1년에 3~4종씩 소개된 셈인데 외국 사상가 가운데 이처럼 단기간에 여러 책이 집중적으로 번역된 사례가 또 있을까 싶다. 그런데 대중적으로 인기있는 작가라고 해서 대중이 이해하기 쉬운 작가라는 뜻은 아니다. 헤겔과 라캉, 마르크스와 프로이트, 바디우와 랑시에르 등 근현대 서구 사상가들을 종횡으로 가로지르며 쏟아내는 분석과 비평이 어지럽다. 그리고 그의 대표작이라는 책들은 왜 이리도 두꺼운지…. 



지젝이 2009년에 쓴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는 ‘지젝 읽기’에 도전했다가 쓴맛을 봤던 독자들이 눈여겨볼 만한 책이다. 고맙게도(?) 분량이 짧다. 한손에 들어오는 크기의 판형에 본문이 308쪽이다. 그리고 2007~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라는 현재진행형의 현실 문제 분석에서 출발하고 있어 피부에 와닿는 감촉이 까칠하다. 마지막으로 실패한 기획으로 치부되는 공산주의에 관한 새로운 비전을 대담하게 제시하고 있어 왜 그에게 ‘가장 위험한 사상가’란 별명이 붙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그는 이 책에서 2007~2008년의 금융위기를 2001년 9·11테러라는 비극에 이은 희극으로 규정한 뒤 금융위기에 관한 미국 우파와 좌파가 만들어낸 풍경을 분석하고 꼬집었다. 우리가 익히 알듯이 금융위기가 터지자 부시·오바마 행정부는 대대적인 구제금융안을 내놓았다. 그런데 공화당 보수파 정치인들은 이것이 ‘사회주의적’이라며 비난했다. 지젝이 보기에 이런 주장은 모순이자 필연이다. 부자를 망하지 않게 돕는 것에 사회주의 딱지를 붙이고, 마치 전에는 국가의 개입이 없었던 것처럼 비난하는 것은 모순이다. 현실 자본주의에서 금융경제가 붕괴했을 때 실물경제가 타격을 받는 것이 뻔한데 이를 구분해 실물경제를 살려야 한다고 목청을 높이는 것은 기만이다. 한편 위기가 발생할 때마다 자본주의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부차적이고 우연적인 일탈 때문이라고 설명해온 지배이데올로기의 반복이라는 점에서 필연이다.

재미있는 것은 좌파 혹은 진보진영의 반응이었다. 구제금융안을 격렬히 비난하면서 결과적으로 보수파와 같은 자리에 서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오바마 정부를 지지해야 했던 민주당원과 은행 국유화를 대안으로 생각했던 진보인사들은 구제금융안을 적극 지지하고 나섰다. 지젝은 좌파가 보여준 이런 혼란이 위기의 본질과 지배이데올로기의 변주를 파악하지 못한 데에서 기인한다고 비판했다. 자본주의는 언제나 위기를 안고 있는 형식이며, 국가는 자본의 순환을 돕는 상부구조라는 점을 놓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지젝은 현재의 위기가 새로운 공간을 열어줄 것이라는 좌파의 기대를 순진하고도 근시안적인 기대로 치부한다. 그는 오히려 인종차별과 전쟁의 증가, 제3세계 빈곤의 증대, 빈부격차 심화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그가 이 대목에서 ‘현대 자유시장의 역사는 충격 속에 씌어졌다’는 나오미 클라인의 저서 <쇼크 독트린>을 인용한 것은 일리가 있어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좌파가 해야 할 일은 냉소적 현실주의에서 벗어나 자본주의 체제 자체의 결함을 끈질기게 제기하고 지배이데올로기에 맞서는 새로운 서사를 만들고 확산시키는 것이라고 지젝은 말한다. 결국 그가 하고 싶었던 말은 “공산주의가 다시금 문 앞에 와 있다”는 것이다.

그는 ‘실패의 끝지점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출발점으로 돌아가 몇번이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이 ‘새로운 공산주의’를 위한 좌파의 자세여야 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20세기에 등장했던 공산주의와의 결별을 말하는 것이다. 지젝은 우리가 의존할 ‘대타자’는 없다고 주장한다. 역사의 ‘진전’을 담당할 특권계급은 없으며 우리 스스로가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가 말하는 ‘모든 민중의 프롤레타리아화’는 어떻게 가능할까. 지젝은 지적재산권, 개발과 환경파괴, 유전공학 등을 통해 자본주의가 문화와 인간의 내면, 외면을 전면적으로 사유화하고 있다면서 이는 프롤레타리아화 과정에 다름 아니라고 말한다. “세계 자본주의에서 ‘살아 있으면서 죽은 자들’, 신자본주의적 ‘진보’의 뒤에 남겨진 모든 자들, 쓸모없고 무가치하게 된 모든 자들, 새로운 조건에 적응하지 못하는 모든 자들을 재통합하는 기획은 어떠한가?”

현직 대통령을 비판하는 글을 인터넷에 올렸다는 이유로 잡혀가는 대한민국의 현실에서 지젝이 내건 ‘새로운 공산주의의 재발명’이라는 구호 자체가 ‘불온’하게 들릴 수 있겠다. 그리고 그가 열의에 차서, 때로는 환희에 휩싸여 설명하는 공산주의의 새로운 주체와 작동방식을 애써 따라가 보지만 ‘어떻게?’와 ‘과연 그럴까?’란 질문이 떠오르기도 한다. 번역자인 김성호 서울대 영문과 교수는 이런 의문의 원인을 이 책이 가진 ‘애매함’ 때문이라고 말한다. 지젝이 재규정한 프롤레타리아가 구체적으로 누구인가, 다양한 주체들을 어떻게 묶어낼 것인가 등에 대해 애매하게 처리했다는 것이다. 한권의 책에서 구체적인 전략과 전술, 세세한 지침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오히려 급진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행동에 나서는 것이 이 ‘위험한 사상가’의 책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자세로 보인다. 그리고 빠진 ‘구체’를 채워나가는 것은 파국으로 치닫는 세계의 위기를 목도한 모든 이들의 몫일지 모른다.(김재중기자)  

10. 07. 18.  

P.S. 기사에서 역자의 말을 재인용한 '애매함'이 아마도 서평의 시발점이 될 거 같다. 과연 그런가, 다시 생각해볼 작정이다. 한편, 지젝의 신간 <종말의 시대 살아가기>도 지난주에 손에 들었는데, 이 또한 번역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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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사회주의냐 공산주의냐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8-06 16:16 
    기획회의(277호)에 실은 리뷰를 옮겨놓는다. 격주로 쓰는 서평거리로 이번에 고른 건 지젝의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창비, 2010)이다. 리뷰가 별로 없는 책을 고른다는 게 한 가지 원칙이었지만, 이번엔 충분하지 않은 책이란 원칙을 적용했다. 많이 주목받은 편이지만, 그래도 충분한 건 아니라는 게 나의 판단이다. 그렇다고, 이 리뷰가 부족한 부분을 다 채워주는 건 아니다. 나머지는 '당신'의 몫이다(개인적으로 '로쟈
 
 
미지 2010-07-19 0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애매함"을 논하실 서평, 기대됩니다...

2010-07-19 09: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7-19 09: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7-19 09: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7-19 09: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저녁에 당일배송으로 받은 책은 마이클 샌델의 <정의> 펭귄판 원서(2010)와 50% 할인 중인 어슐러 르귄의 <어둠의 왼손>(시공사, 2009), 그리고 영국의 여행기 작가 콜린 더브런의 <순수와 구원의 대지 시베리아>(까치, 2010)다.  

  

더브런의 책은 큰 기대 없이 '시베리아' 여행기라고 하기에, 그리고 마침 당일배송이 되기에 주문한 책인데, 의외의 수확이다. 몰랐지만 저자는 '금세기 최고의 여행기 작가'로도 불리는 인물이고 책은 그의 '최고작'이란 평판도 얻고 있다. 오늘자 한겨레의 '잠깐독서'에서는 이렇게 소개됐었다.  

단순한 여행기가 아니다. 미국과 알래스카를 합한 땅보다 더 큰 시베리아의 역사와 문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당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입체적으로 담고 있다. 지은이는 우랄산맥의 동쪽 시베리아가 시작되는 도시 예카테린부르크에서 출발해 동북쪽 항구도시 마가단에 이르기까지 동서남북 1만2천㎞를 누비며 시베리아를 넓고 깊게 담았다.
책은 잿빛이다. 유배, 수용소, 강제노동, 죽음 등의 단어로 상징되는 역사에다 힘겨운 시기를 지나고 있는 민초들의 육성이 생생하게 실려 있기 때문이다. 여행 당시 러시아는 소련 해체 직후여서 극심한 혼란과 빈곤이 온 나라를 휩쓸고 있었다. 몇달째 월급을 받지 못한 공무원, 예산이 배정되지 않아 잔뜩 화가 난 과학도시의 행정책임자, 일자리가 없어 절망하는 젊은이 등. 러시아정교회의 한 신부는 가난과 혼란을 공산당 통치기인 ‘잃어버린 70년’에서 찾았다. 텅 빈 도시 중심가를 오가는 실업자, 주정뱅이, 성매매를 권하는 여성, 그리고 러시아의 새로운 지배자로 부상하는 마피아 등은 옐친 시대의 아이콘이었다.  
그럼에도 책은 재미있다. 박학다식과 글솜씨는 비운의 역사를 흥미진진한 영화나 드라마로 바꿔놓는다. 독자들은 예카테린부르크에서 러시아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 일가의 비극적 종말을 보고, 중서부 과학도시 아카뎀고로도크에서는 미국을 넘어 세계 제일 강국을 꿈꾸던 소련의 야망을 만난다.

하지만 잠깐 읽고 말 책은 아니어서 책을 손에 드니 부듯하다. 내친 김에 작년에 소개된 <살아있는 길, 실크로드 240일>까치, 2009)도 장바구니에 넣어두었다. 그리고는 저자의 '뒷조사'를 좀 했다. 그건 그의 전작 가운데 <러시아인들 사이에서(Among the Russians )>(1983)가 포함돼 있었기 때문.   

애초에 <다마스쿠스의 거울>(1967), <예루살렘>(1969) 등 중동지역 여행기로 작가의 대열에 선 더브런은 러시아와 중국, 중앙아시아 쪽으로 관심지역을 점점 넓혀갔다. 러시아 지역에 관해서는 소위 '스탄' 지역 여행기 <아시아의 잃어버린 심장>(1994)도 쓴 바 있다. <러시아인들 사이에서>와 <시베리아>(1999)까지 포함하여 그의 '러시아 3부작'이라고 해도 좋겠다.   

  

'컬렉터'의 욕심은 이럴 때 발동하는 것이어서 미국에 가 있는 후배에게 더브런의 책들을 구해달라고 부탁했다(<러시아인들 사이에서>는 알라딘에서 구할 수 없다). 중고서점에는 1-2달러에도 나와 있을지 모르기에. 그리고는 내심 올 여름 휴가지를 시베리아로 정했다.

  

제임스 포사이스의 <시베리아 원주민의 역사>(솔출판사, 2009)와 김창진 교수의 <시베리아 예찬>(이룸, 2007), 그리고 블라디미르 아르세니예프의 <데르수 우잘라>(갈라파고스, 2005)도 아직 안 읽은 책이다(어디다 둔 것일까?). 이 정도만 돼도 시베리아 여행 기분은 충분히 낼 수 있겠다.   

그러고 보니 리처드 워릭의 <시베리아에서 온 엽서>란 책도 올 여름 근간 도서다(나는 번역 초고를 읽고 있다). 이렇게 다 읽고 나면,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시베리아가 그리 낯설지 않을 수도 있겠다. 안녕, 시베리아?..  

10. 07. 17. 

P.S. <순수와 구원의 대지 시베리아>의 역자는 '역자 후기'의 말미에 이렇게 적었다.  

"이 책이 나오는 때가 마침 한여름인지라, 독자들이 이열치열이 아니라 시베리아의 엄동설한으로 제대로 한더위를 이기는 데에 기여할 수 있으리라고 번역자는 자위한다." 

적어도 나에겐 역자의 바람이 헛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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