린들 로퍼의 평전 <마르틴 루터 - 인간, 예언자, 변절자>(복있는사람)가 나온 걸 계기로 루터 평전들을 모아서 보고 있다(루터와 비스마르크와 히틀러의 평전을 동시에!). 2017년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많은 책이 나왔고 나도 루터와 종교개혁에 관한 책을 꽤 많이 사들였다. 밑줄긋기는 미국 역사학자 스콧 헨드릭스의 <마르틴 루터>(Ivp) 머리말의 두 대목이다.

지금 우리 시대에 루터가 중요한 것은 그가 이룬 것 때문이라기보다는 그가 꿈꾼 것 때문이다. 루터는 단순히 교회를 개혁한 사람이 아니라 종교를 개혁한 사람이었다. 그는 나쁜 종교를 새로운 신앙으로 대체했으니, 이는 편협한 교리와 도덕 대신 자유와 정의를 소중히 여기는 신앙이었다. 

루터는 열심히 믿고 기도하기만 하면 치유와 성공을 약속하는 그런 신앙의 주창자가 아니었다. 루터에게 신앙이란 잘 개발시켜야 할 원자재 같은 것이 아니라 선물이었으며, 그것도 그 일부만 오래 이어지는 그런 것이었다. 신앙은 단순히 개인적 견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복지를 위한 공적 헌신까지 포괄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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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회가 이러한 방식으로 작동하도록 만들어진 경우, 우리는 그것을 불평등의 재생산이 제도화 institutionalized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게 만들어진 사회적 규칙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소수에 지나지 않는 경우, 우리는 불평등의 재생산이 정상화 normalized었다고 말할 수 있다. 제도화된, 즉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방식으로 정착되어버린 행동 양식들은 비유하자면 불평등을 고착시키는 게임을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9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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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의 문학의 기원, 그 글쓰기의 기원은 외부의, 낯선 세계를 향한 강렬한 그리움이었던 듯하다. 낯익은 내부, 강변의 정적, 그 결핍을 보상해줄 낯선 외부를 향한 동경이 그의 글쓰기의 기원이었을것이다. 이같은 판단에 대한 직접적인 증거가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그 자신이 쓴 편지 형식의 글 「어떤 일본인 벗에게」(『낯선 신을찾아서』, 일지사, 1988)일 것이며, 마산상업학교 시절, 문학에 열중하던 그 시기의 초입에 "전시물자가 산적한 마산 부둣가에 나아가 친구들과 밀항을 꿈꾸고 있곤 했다"는 술회는 그 간증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그 외부의, 낯선 세계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1936년생으로, 세 누나 밑의 외아들인 그가 국민학교에 들어가기 전, 국민학교에 다니던 둘째누나의 교과서 속에는 무엇이 들어 있었을까.
그것은 강변의 버드나무집 소년이 매일 보고 듣는 농사 짓는 아버지와 불심이 깊은 어머니‘들‘의 세계와는 정녕 다른, 일문으로 씌어진 이방의 세계, "참으로 희한한 글자와 그림"의 세계였다. 그와 같은 연장선에 놓인 이방의 노래가 유년의 그에게 달라붙어 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여기서 일제말 천황제 파시즘의 논리를 운위하는 비약은 삼가는 것이 좋겠다. 영문으로 씌어진 소설 ‘나부랭이‘와 잡지들이 또한 그의 의식 성장의 한켠에 자리를 잡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때 중요한 것은 논리가 아니라 이미지, 그 낯선 세계들의 이미지이다. 그 자신이 "신국神國 일본을 위한 교육은, 저에게 논리가 아니라 생리적 감각의 수준이었지요"라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319-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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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는 자유시의 이념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급격하게 운율을 상실해왔다. 자유시는 마치 운율로부터의 ‘자유‘를 추구하려는 듯 운율에서 멀어져왔다. 그리하여 산문과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절제되지 않은 사변적 진술들이 확산되고 있다. 현대시의 흐름은 표면적으로 볼 때 운율의 체계나 규율이 약화되어 왔다. 그러나 성공적인 시들의 경우 대부분 운율에 대한 섬세한 고려와 적극적 활용을 보여준다. 시가 산문과 구분되는 언어예술의 한 절대적 지점인 한, 운율에 대한 인식 없이 제대로 창작하거나 항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운율을 무시하는 것이 자유시의 지형에 상응한다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자유시는 운율을 새롭게 창조하는 방식이지 전적으로 부정하는 방식이 아니다. 자유시 운율의 진정한 묘미는 의미와 호응을 이루며 끊임없이 새로워질 수 있는 창조의 가능성에 있다. 의미와 호응하고, 더 나아가 새로운 의미를 산출하는 개성적인 운율이야말로 자유시 운율의 이상이라 할 만하다.(이혜원, ‘현대시의 운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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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들이 왜 감정 기복이 심하고, 충동적이고, 쉽게 지루해하는지, 그리고 왜 쉽게 감정을 표출하고, 말대꾸를 하고, 어른이 하는 말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지, 그리고 약물과 알코올이 왜 그리도 위험한지, 10대들이 음주, 운전, 성 등에 대해 왜 그렇게 어리석은 판단을 내리는지에 대해 진정으로 이해하려면 그들의 뇌회로를 들여다보아야 한다. 성호르몬 분비의 증가는 사춘기가 시작되고, 아직은 진짜 ‘어른‘이 아니지만 아이에서 성적으로 성숙한 존재로 가는 생리적 변화가 일어남을 알리는 생물학적 지표다.
10대의 뇌에서 일어나는 일 중 일부는 호르몬으로 설명이 가능하지만 그보다 훨씬 많은 것이 작용하고 있다. 10대의 뇌는 뇌 영역들 사이에서 새로운 연결이 구축되고, 수많은 화학물질, 특히 뇌의 전령사‘인 신경전달물질neurotransmitter 이 밀려든다. 청소년기가 진정 경이로운 시기인 이유도 바로 이것이다. 덕분에 뇌의 유연성과 성장으로 놀라운 성취를 이룰 수 있는 능력이 커져 청소년들에게 새로운 기회의 창이 열린다. 하지만 유연성, 성장, 활력은 양날의 칼이다. 자극에 민감한 열린 뇌는 스트레스, 약물, 화학물질, 그리고 수많은 환경적 변화로 인해 부정적인 영향을 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청소년들의 뇌는 과도하게 활성화되어 있는 경우가 많아서 그런 영향이 결국에는 성인의 경우에서보다 훨씬 극적이고 심각한 문제를 낳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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