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여름 방한하기도 했던 미국의 고전학자이자 철학자(이자 법학자) 마사 누스바움에 관한 기사가 눈에 띄기에 옮겨놓는다. 개인적으로 관심을 갖고 있는 학자여서 더 많은 책들이 소개되길 바라지만 올해는 별다른 소식이 없었다(유행하는 용어로 하자면 그녀야말로 '통섭형' 학자이다).    

중앙대 대학원신문(09. 11. 04) 예술적 상상력을 가지고 살아가는 삶  

누스바움의 아카데미적 경력의 출발은 서양 고전 철학과 문학이다. 그녀의 박사학위 논문인 <아리스토텔레스의 동물의 운동에 관하여>는 아리스토텔레스 원전을 편집하고, 번역하고, 주석을 붙이고, 해석한 것이었다. 이후 그녀는 그리스 고전 문학,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헬레니즘 시기의 철학을 공부하면서 다양한 정치적 활동과 국제적 활동을 펼쳤다. 페미니스트로서 누스바움은 한낱 고전학자로서 대학 울타리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론을 현실의 영역에 적용하려는 실천적 철학자의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그녀의 활동은 자신이 주장하는 내재적 실재론의 입장에 서는 것이다.  

우리는 사회 현상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관찰자인 인간이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 혹은 세계를 해석하는 방식을 통해 이해하기 마련이다. 이러한 입장은 ‘철학함(philosophiern)’을 결국 공동체에 기초한 언어 사용과 관찰자의 공유된 경험에 한정된 사고방식으로 이해하게 만든다. 다시 말해 다양한 사회 현상을 우리의 관심사와 동떨어진 현상으로 보지 않고 늘 관심과 배려를 보내는 태도가 오히려 세계를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철학적 관심이 그녀로 하여금 인문학적 범주를 넘어 사회과학적 관심의 영역으로 나아가게 해서 여성문제, 경제발전, 법, 윤리, 교육, 인간발전, 성역할, 인권과 같은 폭넓은 사회문제 영역을 탐구하게 했던 것이다.  

공감에서 비롯하는 실천적 지혜
왜 사는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성공적인 삶이란 어떤 것일까.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잘 사는 것(to eu zen)’을 바라고, 그것을 목표로 하고 살아갈 것이다. 사람은 본능적 욕구에 따라서만 살지 않으며 일정한 합리적 원칙과 판단에 따라 행위하려 한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로고스적 동물’이라 정의했다. 여기서 이성이라는 뜻의 그리스어 ‘로고스’는 여러 측면의 인간의 정신 활동을 반영하는 말이다. 인간은 말을 하고, 말을 통해 타자와 의사소통하고, 자신의 욕구와 욕망을 타자에게 내보인다.

인간은 욕구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욕구와 욕망을 통제하는 ‘합리적 선택’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태어났다. 인간은 로고스를 주고받으면서 복잡한 정치 사회인 폴리스를 구성해 살아가기 마련이다. 이런 관점에서 인간이 로고스적 동물이라는 것은 또한 정치적 동물이라는 것을 말한다.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우리의 삶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으며,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인간은 윤리적 인간으로 거듭 태어날 수밖에 없다.

이처럼 인간은 공동체 속에서 선한 자와 악한 자의 감정 상태, 삶에 대한 이해, 동정과 공감, 연민과 같은 복잡한 감정 양태들을 배우고 이해하게 된다. 나아가 이런 감정적, 지각적 균형을 배우면서 도덕판단의 기반이 되는 상상력, 감수성, 통찰력을 통해 자신의 도덕적 의식을 성장·강화해 나간다.

전통적 합리주의자들은 객관주의, 탈맥락주의, 이성중심적 사고를 도덕판단의 기준으로 삼았다. 반면 현대에 들어 포스트모더니즘의 계열의 학자들은 맥락을 강조하고 인간의 감정에 기초한 도덕판단, 공감, 상상력, 언어 등을 더 중시해서 인간의 내재적 감정의 영역을 인간의 이성(로고스)에 연결시키고자 한다. 감정과 이성, 욕구와 윤리가 서로 별개의 영역이 아니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감정이 오히려 이성을 설득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도덕판단, 상상력의 토대가 인간의 지각 영역에 놓여 있다고 해석한다. 이런 점에서 가치판단으로서의 감정의 역할이 인간의 실천적 합리성의 중요한 요인이 된다는 것이다. 감정이란 한낱 몽매하고 불분명하며 모호한 영역의 어두침침한 내면세계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생각과 판단에 의한 구체화된 믿음과 느낌의 혼합’으로 판단의 주체가 된다는 것이다. 이성주의자와 달리 이러한 입장을 취하는 누스바움은 감정이 가치판단에서 중요한 인자가 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인간의 행위 영역 안에 이성의 지배를 받는 욕구의 영역이 있음을 밝히고, 인간의 적절한 행위를 판단하는 실천적 지혜(phronesis)를 강조한 바 있다. 감정은 이성과 대립되지 않는 실천적이고 합리적인 부분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실천적 지혜는 마땅한 때에, 마땅한 방식으로, 마땅한 사람에 대해, 마땅한 목적으로 적절하게 응답하게 만든다. 이러한 인격을 갖출 때 인간은 탁월한 인격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천적 지혜 개념을 바탕으로 적절한 반응을 하는 인간의 감정의 능력을 누스바움은 ‘지각적 균형’이라고 불렀다. 우리는 타자에 대해서 무관심한 극도의 이기적인 합리성에 따라서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적 지혜를 발휘하여 타자에 대해 공감과 연민과 같은 공속의 감정을 함께 나누는 것이다. 인간은 어떤 맥락에 따라 그 상황을 숙고하는 과정을 거쳐 판단하게 된다. 타자의 존재 양식을 인정하는 것도 타자와의 공감을 통해 이루어지고, 서로 간의 정서적 공감을 바탕으로 적절한 행동 양식을 찾아낸다. 그래서 누스바움은 지각적 균형을 갖춘 사람을 ‘예술적 지각을 갖춘 사람’이라고 말한다. 예술적 지각과 상상력은 도덕적 판단을 감소시키는 것이 아니라 더 높은 차원의 도덕성과 개별성에 대한 적절한 반응을 요구하며,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관한 질문에 민감하게 반응하도록 만든다. 요컨대 ‘지각적 균형을 가진 삶’이란 예술적 상상력을 가지고 살아가는 삶을 말하는 것이다.  

 

인간의 욕망을 치료하는 수단, 철학
누스바움은 문학과 예술에 대한 윤리적 비평이 예술의 다양성을 무시하고 엄격한 규범적 잣대로만 작품을 평가해 왔다고 비판한다. 나아가 그녀는 미학적 관심이 실천적 관심인 윤리적 관심과 별개라는 철학적 순수주의를 포기한다. 미적 판단과 윤리적 판단은 결코 충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누스바움은 윤리교육이 문학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말한다. 문학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상상력과 지적 지각, 감성적 지각을 통해 다양하고 복잡한 상황 속에서 자신들의 윤리적 사유와 욕망을 적절하게 표현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스바움은 “만일 철학이란 것이 우리 자신에 대한 지혜를 탐구하는 것이라면 철학은 문학”으로 전환될 필요가 있다는 주장까지 내놓는다. 이런 생각은 이미 <자연의 거울>을 쓴 로티에 의해, 합리성을 강조하는 전통 철학은 문학과 해석학에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고 말해진 바 있다. 

이러한 철학적 관점을 비춰볼 때 누스바움이 포스트모더니즘을 옹호하는 입장에 선 것 같지만, 한편으로는 푸코나 데리다를 비판하기도 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우리가 직면한 현실 문제에 대한 통찰력을 주고 있기는 하지만 주장을 정당화할 만한 역사적으로 정확한 근거나 논리적 뒷받침은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푸코에 대해선 그의 철학적 문제 제기가 어느 정도 가치를 가진다는 점은 수긍하지만 그가 내세운 현대의 ‘성적 범주’에 대한 분석은 그리 설득력을 가지지 못한다고 비판하고 있다.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은 점점 복잡해지는 사회 속에서 왜소화되고 또 경제적 이유를 포함한 여러 이유로 다양한 정신적 질병을 짊어지고 살아가기 마련이다. 인간의 감정은 메말라가고 서로에 대한 공감보다는 미움과 시기 속에서 고독이라는 질병의 늪은 점점 더 깊어만 간다. 누스바움은 철학이란 인간의 욕망을 치료하는 수단이라고 본다. 인간의 감정을 조절하고 치료하는 철학은 인간을 불안정한 정신적 혼란의 상태에서 벗어나 안정의 상태로 나아가게 만든다. 우리의 삶을 이끄는 철학은 유용한 것이어야 한다. 지나치게 합리성, 보편성, 절대성을 추구한 나머지 인간의 감정이 가진 상상력을 고갈시키는 철학은 더 이상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하지 못한다. 문학, 예술적 상상력에 기반한 인간의 삶이야말로 인간이 궁극적으로 바라는 ‘잘 사는 삶’의 목적이 아니겠는가.(김재홍/ 관동대 교양과 교수)    

09. 11. 10.  

P.S. 개인적으로 누스바움에 대한 관심은 아감벤에 대한 관심과 겹쳐 있다. 그건 <뉴레프트 리뷰>(길, 2009)에 실린 맬컴 볼의 글 '생명정치적인 것의 벡터들' 덕분인데, "인간은 본성상 정치적 동물이다"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정치학>)을 제사로 삼은 글의 서두는 이런 것이었다.   

"이 아리스토텔레스의 한 문장에서 주목을 끄는 21세기의 두 가지 이론적 담론이 유래한다. 조르조 아감벤이 주권과 신체의 관계에 입각해 도발적으로 재정식화하는 미셸 푸코의 생명정치, 그리고 아마르티아 센과 마사 누스바움이 발전, 정의와 자유를 평가하고 증진하는 수단으로서 전개하는 능력 접근이 그것이다.(...) 둘 다 일정한 의미에서 생명정치적이며, 동일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들- 인간과 동물, 정치와 자연-을 교차시켜 형성되고 있다. 그러나 두 담론은 1960년대 이후 인문과학에서 개시된 분할의 반대편에 있으며, 그것들을 동시에 볼 수 있는 시각, 그들의 통찰을 통합하거나 비교할 길은 지금 없는 것처럼 보인다."(410쪽)  

그러니까 똑같이 생명정치에 해당하는 담론을 펼치고 있지만 푸코-아감벤과 센-누스바움이 각기 다른 벡터를 가리키고 있다는 것. 이 '태그매치'를 감상하고 정리하고픈 생각을 작년부터 갖고 있었지만 여러 사정상 실현시키지 못했다(맬컴 볼의 글에 대해서도 몇 가지 지적하고픈 게 있었고). 그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누스바움의 저작들이 소개되고 있지 않다는 것. 아마티아 센과 누스바움이 같이 편집한 <삶의 질>(1993) 같은 책을 도서관에서 대출해보기도 했지만, 읽을 시간을 따로 낼 수 없었다(누가 대신 정리해줘도 좋으련만).   

다행히 그 사이에 아감벤의 책은 세 권 더 출간됐고, 앞으로도 10여 권은 더 나올 예정이다. 그에 상응하여 누스바움의 다수 저작 가운데 <정의의 프론티어>(2007)이나 <인간성에서 숨기>(2006) 등 뭐라도 더 소개되면 좋겠다. 오웰의 <1984년>을 다룬 공저로 <'1984년'에 대하여>(2005)도 <1984년> 붐이 이는 김에 번역되면 좋지 않을까 싶고. 그걸 기다리느니 그냥 원서를 구해 읽는 게 빠를 듯싶지만, '삶의 질' 문제를 생각하여 독자의 바람을 그냥 적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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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민주주의를 위한 인문학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1-08-07 10:30 
    어제 배송받은 책의 하나는마사 누스바움의 <공부를 넘어 교육으로>(궁리, 2011)이다. 저자가 2008년 방한한 적이 있고, 그때 한 차례 강의를 들었던 기억이 있다. 미국 인문학계를 대표할 만한 여성 학자인데(고전학을 전공했지만 현재는 시카고대학의 석좌교수로 철학과 법학, 윤리학까지 강의하고 있다)국내에는그간에 단독 저작이 소개되지 않았다(공저만 두 권 나와 있는 듯싶다). 사실은 더 무게 있는 책의 출간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인문학과 시
 
 
hikrad 2009-11-11 22:53   좋아요 0 | URL
저는 'Love's knowledge'가 빨리 번역됐으면 좋겠네요. 도서관에 주문했던 책을 빌려 놓고 보니 묵직한 분량의 압박이...^^ 로쟈님이 좋아하신다던 알렝 핑켈크로트의 '사랑의 지혜'와 비교해 보면 재미있겠네요^^

로쟈 2009-11-13 01:23   좋아요 0 | URL
네, 번역되면 좋을 타이틀이 꽤 많지요. 로스쿨 교양서로도 요긴할 듯싶은데, 아직 별다른 기미가 없는 듯합니다...

Jun 2009-11-12 01:28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처음 인사드립니다. 누스바움은 제가 꾸준히 관심을 두고 있는 철학자인데 이상하게도 한국에서는 그녀의 학문적 명성과 국제적인 활동에 비해 관심이 적은 것 같습니다. 최근에 '붐'이 일고 있는 랑시에르나 아감벤과 같은 학자들과 비교해볼 때 그 불균형이 더 뚜렷해지는데요, 그 이유가 과연 무엇인지, 이에 대한 로쟈님의 견해를 여쭤보고 싶습니다

로쟈 2009-11-13 01:27   좋아요 0 | URL
영미 철학자들이 아무래도 덜 '매력적'으로 여겨지는 듯해요. 푸코, 들뢰즈 같은 '화려함'을 보여주지 못하는 것 같고. 누스바움은 다루는 분야가 넓은 학자여서 얼핏 엄두들을 못내는 듯도 싶습니다...
 

올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헤르타 뮐러의 문학세계를 조명해주고 있는 기사를 대학신문에서 스크랩해놓는다. 필자는 서울대 독문과의 최윤영 교수이다. 올해 출간됐다는 장편소설 정도는 국내에도 바로 소개됨 직하다.   

대학신문(09. 10. 19) 헤르타 뮐러, 침묵과 말하기 사이에서  

헤르타 뮐러(사진)가 2009년 노벨상 수상자로 선정됐다는 소식은 많은 사람들에게 경탄과 놀라움을 불러일으켰다. 루마니아에서 온 조그마한 독일 작가는 한국의 독어독문학계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고 독일에서도 수상을 예상한 사람이 많지 않았다. 응축된 시적 언어와 뛰어난 작품성은 일찍 인정받았지만 특이한 출신배경과 반복되는 소설의 내용(루마니아 전체주의의 압제에 대한 고발), 그리고 지난 10년간 이미 2명의 독어권 작가(독일의 귄터 그라스 1999년, 오스트리아의 엘프리데 엘리넥 2004년)가 노벨문학상을 받은 상황에서 큰 기대를 모으지 못했기 때문이다. 헤르타 뮐러는 노벨문학상을 탄 12번째 여성작가이며 클라이스트상을 위시한 다수의 주요 문학상을 받은 작가다.   

올해 56세인 헤르타 뮐러는 루마니아의 바나트-슈바벤 지방에서 태어났으며 독일어를 사용하는 소수민족에 속한다. 이러한 출신배경과 가족사는 오랫동안 뮐러 작품의 주요 내용을 특징짓는다. 할아버지는 유복한 농부이자 상인이었는데 루마니아 공산주의 정권하에서 재산을 몰수당했다. 어머니는 열여섯 살 때 소련으로 끌려가 강제노역을 했고 아버지는 전직 나치출신으로 트럭 운전사였다.뮐러는 시골 마을에서의 행복한 유년시절이 아니라 쇠락해가는 작은 마을에서의 폐쇄적이며 억압적이고 두려움에 가득 차있던 어린 시절을 회상한다.  

뮐러는 루마니아의 한 대학에서 독문학과 루마니아문학을 전공했고 졸업 후 기계공장에서 통역 일을 했다. 1979년 스파이로 일하라는 루마니아 비밀경찰의 제의를 거부하면서 뮐러의 인생은 궤도에서 벗어난 험난한 길로 바뀌었다. 비밀경찰의 잦은 소환과 가택수색, 그리고 주변세계에서 받은 기생충 같은 인간이라는 모욕 속에서 뮐러는 독일어 개인교습으로 근근이 생계를 이어갔다. 당시 루마니아의 차우셰스쿠 정권에 대한 반감을 키워가던 작가는 자기 확신을 얻기 위해 첫 작품집 『저지대(Nieder-ungen)』를 루마니아에서 출판했다. 이 작품은 작가 나름의 그때까지의 삶에 대한 정리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이제까지의 나의 삶을 철두철미하게 빗어 훑어 내렸다. 작은 마을에서의 유년 시절, 아버지의 나치 경력, 독일 소수민족의 나치 범죄에의 연루, 지금 내가 겪는 독재의 전횡을 말이다.”

1987년 뮐러는 작가인 남편 리하르트 바그너와 함께 베를린으로 이주했고 이후 작가로 유럽 문단에서 주목받게 됐다. 작가에게 독일이라는 공간은 언제든지 소환돼 죽을 수도 있다는 공포에서 벗어나게 해줬지만 한편으로는 자기가 태어난 바나트 지방의 독일어와는 완전히 다른 독일어를 사용하고 다른 세계관과 인생체험을 가지는 사람들의 땅으로 여전히 그를 이방인으로, 고향 없는 작가로 만들었다.  



작가의 경력을 볼 때 큰 전환점이 된 것은 루마니아 차우셰스쿠 정권 치하에서의 자전적 삶의 기록을 많이 담은 장편소설 『마음 속의 동물(Herztier)』의 출간이었다. 이 작품은 대학으로 진학한 여주인공이 일상 삶에서 겪은 정치적 탄압을 묘사했다. 같은 기숙사 방의 친구인 롤라는 자신의 운명인 시골을 벗어나겠다는 일념으로 여러 남자를 만나다 체육선생에게 성폭행을 당한 후 자살한다. 롤라의 기록을 읽은 주인공은 뜻이 맞는 대학생 그레고르, 쿠르트, 에드가와 이 사건을 이야기하게 된다. 이들은 모여 반정부 시를 짓고 자신들이 받는 일상의 정치 억압을 기록하기 시작한다. 결국 비밀경찰에게 이 일이 알려져 거의 모두가 비극적 결말을 맞게 된다.  

이 작품에서 두드러지는 점은 헤르타 뮐러 글의 전체적 특징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바로 완결되지 않은 단편적 구조, 에피소드식 이야기, 그리고 많은 신조어다. 폐쇄적 전체주의 체제하에서 겪은 정치적 탄압과 두려움, 공포 속에서도 작가는 침묵하지 않고 용기를 내 발언하고 있지만 그의 언어는 노골적인 반정치 문학이나 구호문학이 되기보다는 일상 삶 안에서 냉철하고 조용하고 뚜렷한 이미지 언어로 전달된다. 『마음 속의 동물』은 “우리가 침묵하면 속이 편치 않고 우리가 말을 하면 우리는 조롱거리가 된다”는 문장으로 시작하는데 이는 작가의 위치를 잘 드러내 준다.  



올해 출간돼 많은 찬사를 받은 장편소설 『숨 그네(Atemschaukel)』는 이제까지 알려지지 않은 사건, 즉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바로 나치의 후예로서 소련으로 압송된, 7만5천명의 루마니아-독일인들의 운명을 다루고 있다. 독일군에게 피해를 당한 소련을 복구한다는 명목으로 17세부터 45세까지의 루마니아 거주 독일인들이 끌려간 이 사건에 대한 언급은 오랫동안 터부시 돼왔다. 독일인이 가해자가 아니라 소수민족으로서 희생자로 산 삶을 주인공의 내부자 시각에서 그려낸 이 장편소설은 그 치밀한 묘사와 생생한 체험, 집중적인 시적 이미지, 그리고 거리를 두는 문체가 두드러지는데 작가로 하여금 노벨상을 받게 한 역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사건은 작가의 어머니가 실제로 겪은 사건이며 동시에 일찍 사망한 동료 시인 파스티오르의 고통스러운 회상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소련으로 압송된 수용소에서 사람들은 처음에는 개개인의 인생사를 가지고 있지만 수용소를 지배하는 극심한 굶주림과 억압 하에서 힘에 겨운 강제노역을 하면서 한명 한명 동물이 돼간다. 개인들의 회상 속에서 역사를 녹여내는 뮐러의 작품들은 종종 유사한 경험을 담아낸 솔제니친, 임레 케르테스, 프리모 레비와 비교되기도 한다

작가는 유럽, 독일, 그리고 현대 물질세계의 안락함에 적응하지 못하고, 우리가 잊고 있는, 같은 지구에 사는 사람들의 두려움과 공포에 대한 기억을 초지일관 기술한다. 거추장스러운 수사 없이, 강한 시적 이미지를 전달하는 산문 언어로 쓰인 그의 작품은 몰락해간 동유럽 소수민족의 역사에 한정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말대로 “너무 늦은 과거”와 “너무 이른 미래”에 사는, 아직도 다수로 존재하는 ‘벌거벗은’ 사람들의 삶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최윤영_독어독문학과) 

09. 10.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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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2009-10-22 14:32   좋아요 0 | URL
문학이 우리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군요.

로쟈 2009-10-22 22:09   좋아요 0 | URL
네, 소설들이 있어서 다행이예요. 아무래도 시보다는 이해하기가 용이하니까요...
 

교수신문에 실린 해외출판 소식을 옮겨다가 '세계의 책'으로 분류해놓는다. 국내에 <유럽의 발견>(까치글방, 1997)과 <제국의 몰락>(까치글방, 2003) 등이 소개돼 있는 프랑스의 역사학자 엠마뉘엘 토드의 신작 <민주주의 이후>(2008)를 소개하고 있다.   

교수신문(09. 03. 23) [해외 출판 소식] ‘민주주의의 몰락’, 거부할 수 없는 대세?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가 위협받고 있다는 인식은 요즘 누구나 공유하고 있다. 그런데 그 이유가 일시적인 보수 정권의 출현이나 경제위기보다 더 근원적인 어떤 변화와 관련이 있다는 주장이 나왔다. 프랑스의 역사학자이자 인류학자인 동시에 인구학자이기도 한 엠마뉘엘 토드는 최근 저서인 『민주주의 이후』에서 프랑스와 서구 사회를 감싸고 내입해오는 일련의 위기를 진단하면서 다음과 같이 묻는다. “민주주의 시스템의 소멸을 고려해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어떤 시스템이 그것(민주주의)을 대체할 수 있을 것인가” 

 

토드는 1976년 약관 27세의 나이에 『최종적 몰락 : 소비에트의 몰락에 관한 시론』으로 소련의 몰락을 예견하면서 두각을 나타냈다. 이 책에서 토드는 출산율의 저하를 중심으로 다양한 통계 지표를 통해 소련의 역사적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냉정히 기술하면서, 특유의 실증적 성향을 나타냈다. 이후 토드는 한 공동체(국가, 민족, 지역)의 가족 체제 유형이 그 공동체의 정치적, 경제적, 종교적, 문화적 성격을 결정한다는 테제를 내세우며, 이를 입증하는 연구 결과를 잇달아 내놓게 된다. 



가족 모델을 포함한 중층적 체제 분석
그 성과는 다음과 같은데, 일단 1988년에 출간된 『새로운 프랑스』에서는 프랑스 각 지방의 정당 투표율이 그 지방의 대표적인 가족 유형이라는 변수에 종속적이라는 점을 밝혔다. 그리고 1990년 출간된 『유럽의 발명』에서는 유럽 각국과 각 지역의 정치, 경제, 종교적 다양성은 4가지의 대표적 가족 체제(부모-자식 관계의 권위/비권위성, 형제간의 관계의 평등/불평등성의 조합에 의한 4가지)라는 결정인자에서 연유한 것이라는 점을 치밀한 조사를 통해 밝혀냈다.

그의 연구에 따르면 권위적이고 불평등한 가족 체제인 독일은 교육, 경제성장 등에서 높은 성과를 보였지만, 파시즘 등이 자라날 토양을 제공했다. 반면 비권위적이고 평등한 가족 체제인 프랑스 파리 분지와 스페인에서는 무정부주의가 창궐하는 기회를 제공하게 된다.

토드의 연구는 대단한 지적 충격을 안겨 주었고, 사회 현상을 해석하는 근본적인 연구틀을 제공했다는 평을 받았다. 2000년대 들어서 토드는 그간의 연구를 바탕으로 미 제국주의, 세계 경제, 이민자 사회 등 보다 정세적인 문제에 대해 문제작을 내놓으며 학문적인 입지를 더욱 다지기 시작했다.
최근 출간된 『민주주의 이후』역시 그러한 중층적 연구의 결과물로 볼 수 있다. 이 책에서 토드는 프랑스를 중심으로, 오랜 기간의 사회, 정치, 경제적 상황과 가족 구조의 변화를 면밀하게 추적한다. 이를 통해 토드는 종교의 사회적 힘이 ‘공허’에 가까울 정도로 몰락했으며, 교육의 약화로 문화적 비관주의가 지배적이며, 과두제에 가까운 사회 계층화의 재출현, 세계화로 인한 자유교환의 충격, 계급투쟁 격화 가능성 증대 등이 ‘장기적이고 근본적인 경향’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결론을 내린다. 이는 곧 우리가 민주주의로 인식해온 서구의 기존 체제가 근본에서부터 흔들리고 있다는 책의 주제로 이어진다.

토드의 진단이 충격적인 이유는 사르코지의 집권과 같은 일시적이고 정세적인 요인이 아니라, 지난 세기부터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인류학적이고 사회 심층적이며 구조적인 변화를 통해 민주주의의 몰락을 말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예를 들자면, MB 정권이 출현했다는 사실보다도, 그러한 보수 정권을 출현시키게 만든 대중의 의식과 사회, 문화, 정치, 경제적 구조의 심부에 있는 변화가 더 무서운 것과 마찬가지다. 

독자들 찬사와 논란 이어져
충격적인 테마를 다룬 탓인지, 출간된 지 4개월 정도 밖에 안됐지만, 책에 대한 프랑스 독자들의 반향은 뜨겁다. 프랑스 독자 중의 한 명인 뒤께스느와이 씨는 아마존 프랑스의 독자평을 통해 “현상을 바라보고 이해함에 있어 비관습적인 측면을 제공하는 책”이라고 언급하면서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에 나타난 성찰의 부록으로 기입될만하다”고 평하면서 “반드시 읽어야 할 책”으로 꼽았다. 또 리챠드 아페이안 씨는 “사건들을 새로운 빛으로 해명해주고, 사물들을 더 잘 이해하게 해주는 이 책을 읽는다면, 더 이상 기성 미디어와 정당의 바보 같은 이야기를 참을 수 없을 것”이라며 “그러한 참을 수 없음은 고통스러울 것이므로, 이 책을 읽지 말 것”을 역설적으로 권했다.

파리에 거주하는 리티티라는 닉네임의 독자는 “특히 가족모델과 정치모델 사이의 관계를 국가 혹은 지역의 범위에서 설명하는 역사적 분석을 높게 평가한다”면서 “가능한 해결책을 심화시킬 다른 저작이 기대된다”고 밝혔다. 또 발마에 거주하는 장 마리 필로씨는 조금 색다른 평을 내놓았다. 그는 “저작에는 비관주의와 낙관주의가 공존하는데, 낙관주의적 시나리오는 유럽 보호주의의 조숙”을 촉진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를 두고 필로씨는 “현재의 지배적인 관점과 배치되는 것이고, 드문 관점”이라고 지적하면서 “향후 경제적, 환경적 생존 가능성을 염두에 둔 건설적인 토론이 심화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 책은 여러 토론 및 서평 사이트에서도 화제가 됐다. 시사 토론 사이트 중 하나인 지평선에서는 수 십 명의 네티즌들이 책의 논제를 두고 설전을 벌였다. ‘과녁의 심장’이라는 닉네임의 네티즌은 종교에 대한 토드의 주장에 반대하면서 “교황 요한 바오르 2세와 엠마뉘엘 수녀는 종교가 여전히 살아있음을 증명한다. 선에 대한 갈망이 지금처럼 강한 적도 없었다”고 논평했다.

이에 대해 말라킨느라는 네티즌은 “이슬람 혐오증의 증가는 종교적 공백의 징후”라면서 “가톨릭의 붕괴는 거대한 지표의 상실을 야기한 바, 이는 이슬람이라는 새로운 적을 스스로 발명하고자 함에 이른다”고 응수했다. 특히 이는 이민자 수나, 이슬람의 종교 행위가 저하된 시점에서 오히려 인종, 종교적 적대주의가 부상하는 현상을 설명한다는 지적이다. 한편 필립이라는 닉네임의 네티즌도 토드의 주장에 수긍하면서 “우리는 사르코지 및 정부 관료의 문화적 결핍을 겪고 있다. 그들에게 휴머니즘은 없다”고 코멘트 하는 등, 정치는 물론이고, 경제적 보호주의 등 토드가 제기한 다양한 테제가 논의됐다.

또 다른 저명 토론 사이트인 ‘아고라-시민의 미디어’에서는 34년 간 고전 문학 교사로 활동했고, 인권 옹호 협회의 회장인 폴 빌라쉬 씨가 ‘민주주의가 위기에 빠졌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엠마뉘엘 토드만이 아니다’라는 제목의 심층 서평을 게재했다. 이 서평에서 빌라쉬 씨는 “이 책은 미래의 최악을 시사한다”면서 “사르코지 대통령은 토드에게 오늘의 프랑스 사회가 겪고 있는 악의 징후로 나타난다”고 지적했다. 구체적인 예로 그는 토드의 책으로부터 사르코지와 그를 선출한 사회의 5가지 결점을 읽어낸다. △이데올로기적 공허함에 의한 사고의 뒤죽박죽 △지적인 핍진함 △비시민의 배제로 표현되는 공격성 △돈에 대한 사랑 △정서적이고 가족적인 불안정성 등이 그것이다.

토드의 책이 일으키는 이러한 반향은 독보적인 학문적 성과를 통해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프랑스 지식인의 전형적 모습을 보여준다. 연구에 충실하면 상아탑에 안주하거나, 앙가주망을 지향하면 학문적 공력 쌓기에 소홀한 국내 지식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오주훈 기자) 

09. 03.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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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사실 가장 관심가는 책, &lt;민주주의 이후&gt;
    from 자기치유 : I am NOT such a person. 2009-03-28 18:17 
    사실 지난 주 로쟈의 블로그에서 서평과 소개를 읽으며 가장 끌렸던 것은 프랑스 사학자 엠마뉘엘 토드의 를 소개한 글이었다. 개인적으로 관심 가는 주제인 데다가 저자가 지금까지 다양한 주제들을 다룬 새로운 관점의 역사서들을 냈던 엠마뉘엘 토드라는 점, 현재 한국에 적용가능한 시의성을 지닌다는 점, 지적 난이도가 만만치 않을 것 같다는 점 등 여러가지 점에서 호기심이 생겼다. 지금 알라딘에서 검색이 안 되는 것을 보니 아직 출간되지 않은..

어제 비록 올해의 인문사회출판 지형도에 관한 기사와 함께 꽤 긴 출간예정 도서 리스트를 올려놓았지만 그 리스트조차도 사실 전체로 보자면 '일부'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예기치 않은 책들이 얼마든지 더 출간될 것이며 그런 게 이 클렙토크라시('강도정치'란 뜻이라고 한다. http://h21.hani.co.kr/arti/COLUMN/15/24163.html 참조) 시대를 살아가는, 버티게 해주는 몇 안되는 낙이 될 것이다.   

러시아 철학자 미하일 리클린의 <해체와 파괴>(2002)도 그런 예기치 않은 책의 하나다(이 철학자들과의 대담집은 독어로도 번역돼 있다). 짐작엔 이번 봄에 출간될 듯싶은데, 개인적으로도 인연이 없지 않은 책이다. 이 책의 번역 출간을 처음 제의했었기 때문이다. 이후에 떠맡은 일들이 많은 탓에 애초에 맡은 공역에서도 발을 빼고 후배에게 모두 일임해버리긴 했지만, 후배가 보내온 최종 원고를 보고 있자니 그래도 내가 빠진 덕분에 빨리 나오는구나 싶기도 하다.   

우리에겐 생소한 저자 리클린에 대해 소개하는 기사를 역자가 써놓은 게 있어서 미리 '예고편'으로 옮겨놓는다. 저자와 직접 교분도 쌓으면서 번역작업을 진행했기에 좋은 결과물이 나올 것으로 기대한다(*<해체와 파괴>(그린비, 2009)로 출간됐다). 그리고 내친 김에 바라건대, 러시아 철학과 비평의 현재를 보여줄 수 있는 성과들이 앞으로 더 많이 소개되면 좋겠다.        

중대 대학원신문(08. 12. 10)  미하일 리클린, 포스트 소비에트 시대 해체하기

미하일 리클린(1948~ )은 포스트/소비에트 시대의 러시아 사상을 이끌어가는 철학자 중 하나이다. 1977년 구조주의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 ‘공식’ 소비에트 철학의 지침들을 아슬아슬하게 비껴가며 꾸준히 서구 현대철학과 접속함으로써 소연방 몰락 이후 러시아 철학이 서구의 사유와 교통할 수 있는 창구 역할을 해왔다.  

Михаил Рыклин Деконструкция и деструкция. Беседы с философами   

리클린의 <해체와 파괴>

80년대 말 유럽에서 거주할 때 자크 데리다를 비롯해 명망 있는 철학자들과 교우했던 경험도 리클린의 지적 이력을 형성하는 중요한 축이다. <모스크바의 데리다>(1993), <해체와 파괴>(2002)는 그 결산격이다. 자기 사유의 스승으로 메라브 콘스탄티노비치 마마르다슈빌리(1930~1990)와 데리다 두 사람을 꼽는데, 전자가 소비에트 철학의 집대성으로서 ‘사유의 종합’에 역점을 둔다면, 후자는 예의 해체론으로서 리클린의 사유에 가장 큰 이론적 바탕을 이룬다

하지만 단순히 해체론의 연장선에서 리클린의 사유를 비정(比定)하는 것은 오산이다. 우선 리클린은 해체의 이론적 탐구에는 별 관심이 없다. 해체의 큰 틀, 총론은 데리다 자신이 이미 짜놓았으며, 이제 필요한 것은 오히려 각론, 곧 해체의 실천이라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각론을 통해 총론은 꾸준히 재구성되며, 복수적 변환의 과정을 통과한다(그러므로 데리다의 작업도 하나의 ‘각론’일 뿐, 총론 따위는 기획된 적이 없다).  

‘해체의 실천’ 혹은 ‘실천적 해체론’이라 명명할 만한 리클린의 과제는 포스트/소비에트 시대의 문화적 지형을 추적하고 분석하는 데 있다. 질문은 이렇다. “전체주의 사회의 욕망구조는 어떤 것인가?” “그 구조는 어떤 방식으로 사라지지 않고 지속되는가?” 그것은 스탈린 시대에서 지금까지 이어지는 사회적 심성구조에 대한 물음이자 사회 일반의 동력학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리클린에 따르면 러시아 사회는 단절/연속의 동시성으로서 여전히 포스트/소비에트적 구조 위에 놓여 있으며, 해체의 실천은 당연히 정치적 성격을 띠게 된다. 시평집 <환희의 공간: 전체주의와 차이>(2002), <진단의 시대>(2003) 등이 이런 사유의 결과물이다. 

Женщина и визуальные знаки  

안나 알추크 등이 쓴 <여성과 시각 기호>

해체론의 적용은 리클린의 삶을 극적인 ‘실천’의 무대로 이끌어갔다. 2003년 전위예술가이자 비평가인 아내 안나 알추크가 기획한 전시회 <종교 조심!>이 성물모독을 이유로 기소되어 오랜 법정 투쟁을 벌여야 했던 까닭도 여기에 있다. 근 5년간 이어진 지리한 재판은 무혐의로 종결되었으나 리클린은 이론의 바깥, 해체적 실천의 장이 얼마나 험난한 것인지 온몸으로 절감해야 했으며, 올봄에는 안나가 의문의 죽음을 당함으로써 극적인 파국을 맞게 되었다. 어느 대담에서 밝혔듯이 이 과정은 그로 하여금 한 사회의 의식 기저에 완고하게 자리잡은 무의식과의 투쟁이었으며, 해체의 실천은 다양한 전략을 통해 구체적으로 파고들 일이지 결코 일거에 전복적으로 성취될 수 없음을 확인케 해준 ‘수업’에 다름 아니었다.(최진석/ 러시아 국립인문대 문화연구 박사과정) 

09. 01. 16.  

Михаил Рыклин Свобода и запрет. Культура в эпоху террора

P.S. 검색해보니 리클린의 최신간은 작년에 나온 <자유와 금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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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러시아의 지적 전통과 현대 유럽철학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09-09-12 23:15 
    그린비출판사의 블로그에서 리클린의 <해체와 파괴>(그린비, 2009) 역자 인터뷰를 옮겨놓는다(http://greenbee.co.kr/blog/739). 책을 읽는 데 참고가 될 듯싶다. 더불어 블로그의 '인문학 해외통신' 코너에는 역자의 글 '러시아 인텔리겐치아와 사회적 죄의식의 기원'이 연재되고 있는데, 러시아 지성사에 관심을 가진 독자라면 흥미롭게 읽어봄 직하다.     『해체
 
 
드팀전 2009-01-16 17:20   좋아요 0 | URL
로쟈님 혹시 오늘 성대에 가지 않으셨나요?

로쟈 2009-01-16 17:30   좋아요 0 | URL
천리안이신가요?!..

드팀전 2009-01-16 17:41   좋아요 0 | URL
저랑 로쟈님이랑 눈을 마주쳤어요.찰나의 시선교차.
전 로쟈님의 얼굴을 아니까요...스쳐가면서 "아...저 로쟈님 아닌가?" 했지요.
어쨋거나 아주 우연히 만났군요.찰나의 마주침이었지요.

로쟈 2009-01-16 22:17   좋아요 0 | URL
그랬었나요?! 담엔 꼭 아는 체를 해주시길.^^

드팀전 2009-01-16 23:36   좋아요 0 | URL
^^ 광장 뒤에 있는 강의동 앞을 지나가셨어요. 양손에 무언가 복사물을 서너부 들고..거기서 강의하시는 듯. 서로 30센티옆으로 스쳐지나갔습니다.제가 처다봐서 그랫는지 저를 한 번 보시데요...그때는 저도 로쟈님인가 아닌가 확신이 없었거든요.
우연이란게...그냥 마구 벌어지는 일은 아닌가 봅니다. 그렇게 거기서 뵐 줄이야..ㅋㅋㅋ

로쟈 2009-01-16 23:45   좋아요 0 | URL
강의는 아니고요 도서관에서 자료 복사해서 들고 가던 때인가 봅니다. 제가 딴 생각이 많았던지 기억엔 없는데, 근방에 계셨군요.^^;
 

먹성이 까다로운 편도 아니고 특별한 미식가도 아니어서 내가 좋아하는 식단은 저렴하면서도 나름대로 노하우가 느껴지는 식당의 음식들이다. 20년이 넘게 먹어온 대학 식당에서도 가끔 '감동'하며 밥을 먹을 때가 있고, 5000원짜리 칼국수나 김치찌개, 청국장, 곱창전골 등에서 지극한 만족감을 맛보기도 한다(값비싼 음식들도 더러 먹어보았지만 그저 '호사로군!' 할 따름이다).

파리가 들어간 수프도 후루룩 먹어치우는 고골 소설의 주인공만큼은 아니지만 나 역시도 먹는 일에 목숨 걸지는 않는 편이다('다 먹자고 하는 일이지!'란 말을 나도 덩달아 내뱉곤 하지만 진심을 담아서 말한 적은 한번도 없다). 몸에 해롭지 않고 특별히 불편하지 않은 수준에서 만족하는 편이며 가끔씩 누리는 호사에 감사할 따름이다(비록 정신의 양식에 관해서라면 분에 넘치는 욕심을 부리는 편이지만). 

지난달인가 가정의 화목을 위해서 본 <앤티크> 같은 영화가(고급 케이크가 잔뜩 나오는 영화다) 취향에 맞지 않는 건 그런 때문이다(영화를 보며 딴생각을 하기도 하고 졸기도 했다). 굳이 안 볼 이유까지는 없지만 <식객> 같은 영화도, 드라마도 나는 보지 않았다. 그러니 아무리 '책의 바다'에서 매일같이 허우적거린다고 해도 요리책에 눈길이 가지 않는 건 당연하다(요리책만큼 눈밖에 나 있는 책은 처세서 정도다).

갑자기 '서론'을 늘어놓은 건 그런 내가 관심을 갖게 된 요리책이 있기 때문이다! <늑대를 요리하는 법>. 제목이 좀 특이한데, 저자는 MFK 피셔이고, 아직 번역되지 않은 책이다(그래서 '세계의 책'으로 분류한다). 제목에서 '늑대'는 '굶주림과 가난'을 뜻한다고 하므로 풀어서 말하자면 '굶주림과 가난을 요리하는 법'이다(우리말로는 <쥐를 요리하는 법>이라고 해야 할까). 나 같은 사람도 눈길을 끌게 만드는 이 흥미로운 책을 소개해준 기사를 옮겨놓는다. 책은 빨리 번역되면 좋겠다(저자의 다른 몇몇 책들도 입맛을 돋군다)...   

 

한겨레(08. 12. 23) 굶주림과 가난을 요리하는 법

연말이라 모임이 잦다. 주로 저녁식사들인데, 다양한 사람들과 시리즈로 저녁을 먹다 보면 같이 먹는 사람에 따라 음식 맛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꽤 드라마틱하게 체험할 수 있다. 왜 달라지는지 이유가 많겠지만, 그중에서도 상대방이 갖고 있는 음식에 대한 절실함이 한몫한다. 먹고 싶은 것을 다 먹고 사는 사람들이나 음식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에겐 평소의 부족함이 주는 음식에 대한 흥분감이란 게 별로 없고 심지어 권태감마저 느낄 수 있다. 달걀이 귀할 때 먹던 삶은 달걀의 맛과 요즘 느끼는 맛이 같을 수 없듯이, 음식에 대한 기본적 ‘허기’가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과의 식사는 다른 경험이 될 수밖에 없다.

요즘 읽는 책 중에 MFK 피셔가 쓴 <늑대를 요리하는 법>(사진)이란 책이 있다. 전쟁으로 궁핍할 무렵인 1942년 나온 책이라 더 감칠맛 나게 읽힌다. 미국에서 쓰는 표현 중에 “늑대가 문간에 들이닥치다”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 늑대란 굶주림과 가난을 뜻하는데, 늑대를 제목의 일부로 사용한 이 책은 곤궁한 시대에 먹고사는 일을 은유 삼는 문학적 요리책이자 특별한 음식 에세이다.

여기에 이런 얘기가 나온다. 전쟁 중이라 설탕과 버터를 배급받아 생활해야 했던 젊은 주부들이 모여앉아 어떻게 설탕과 버터를 거의 쓰지 않고 케이크를 만드는지 서로 묘안을 자랑했다. 이를 옆에서 듣고 있던 피셔의 할머니가 이렇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 나는 평생을 전쟁통 예산으로 아껴가며 살아왔다. 부엌에서 상식적으로 하는 일이 어려울 때나 스타일리시해진다는 건 이제야 알았구나.”

전후 미국엔 풍요와 잉여가 사람들의 생활과 의식 속에 깊게 배어버렸다. 음식도 부족함을 아는 사람과 함께 먹어야 맛있는 걸 보면, 부족함이 없다는 건 뭔가 균형이 깨진 상태라는 것 아닐까. 마찬가지로 결핍을 모르는 사람들 속에 살다 보니 나도 결핍에서 충족으로 넘어갈 때 생기는 즐거움을 감지하는 감각기관 자체가 퇴화하는 게 아닌가 싶을 때가 있다. 피셔 할머니의 말씀처럼 가난은 가난할 때만 상대하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건 삶 속에 항상 있는(혹은 있어야 하는) 가난과 결핍을 ‘어떤 스타일’로 다스리는 것이다. 즉 ‘늑대’를 피하기만 할 게 아니라 맛있고 아름답게 요리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19세기의 미국 사상가 랠프 월도 에머슨은 “창조적 경제 운용은 훌륭함을 낳는 연료가 된다”고 했다. 더하거나 새로운 것만 찾는 것이 꼭 창조적인 건 아니다. 있던 것을 빼고 모자람을 즐기는 것 또한 멋지고 흥미로운 삶을 사는 한 방법일 수 있다.(박상미/화가·작가)

08. 12. 22.

P.S. 안 그래도 요즘 잔뜩 눈독을 들이고 있는 책이 부르디외가 편집한 <세계의 비참>(동문선, 2002) 시리즈다. 세계의 비참을 말해주는 방대한 사례집인데, 부르디외와의 대담에서 귄터 그라스는 모든 나라가 이런 책을 한권씩 갖게 된다면 좋겠다고 했다. 나도 동감이다(내기로만 한다면 어디 한 권뿐이겠는가!). '늑대를 요리하는 법'의 재료로서 더할 나위가 없지 않나 싶다...

 

내가 아는 범위 내에서 '세계의 비참'과 유사한 컨셉의 책으론 '세계화 시대 비정규직 사람들 이야기'를 다룬 <부서진 미래>(삶이보이는창, 2006)가 있다. 노동운동가 하종강의 책들도 같은 범주로 묶을 수 있겠다. '굶주림과 가난을 요리하는 법'에 맞추자면, 이거 무지하게 식욕을 돋구는 책들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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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23 01: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2-23 01: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Trotzky 2008-12-23 02:27   좋아요 0 | URL
읽어야 할 넘들은 쌓이고 쌓이지만... 그래도 읽고 싶고 눈앞에 쌓아두고 "언젠가는 읽고 말꼬야~~!" 하는 넘들의 리스트를 쌓아올리는데 너무 많은 도움을 받는군요.

로쟈 2008-12-23 09:12   좋아요 0 | URL
그 도움이 고민거리가 되진 않으셨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