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세대 대학원신문에서 한 서평기사를 옮겨온다(http://www.dambee.net/news/read.php?section=MAIN&rsec=MAIN&idxno=8070). 피에르 바야르라는 한 프랑스 비평가의 책 두 권에 대한 서평으로 '어느 ‘탐정 비평가'의 새로운 책 읽기'란 타이틀이 붙어 있다. 최근에 읽은 서평들 가운데 가장 신선하며 흥미롭다. 가령, '독서와 비독서의 경계'에 관한 고민 같은 건 아주 실제적이기도 하다. 오래전에 읽은 작품에 대해 강의해야 할 때 맞부딪치는 문제이기도 하고, 또 학생들의 독서 여부를 평가해야 할 때 봉착하는 딜레마이기도 하다(어느 정도 읽은 것을 읽었다고 평가해야 하는가?). 거기에다 바야르의 '탐정 비평'도 매우 흥미롭다. 그의 책들이 대거 소개되면 좋겠다...

 

 

 

 

 

 

 

 

연세대 대학원신문(157호) 독서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편집광적이고 망상적인 독서

●피에르 바야르(Pierre Bayard)
 『책을 읽지 않고 이야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Comment parler des livres que l’on n’a pas lus?)』(Editions de Minuit, 2007)
 『누가 로저 애크로이드를 죽였는가?(Qui a tue Roger Ackroyd?)』(Minuit, 1998)

책읽기의 괴로움, 책은 꼭 다 읽어야 하는 것일까?
지식인 집단의 착각 혹은 위선 한 가지. 우리는 끊임없이 진리, 지식에 대한 자발적 선의지를 상정한다. 지식의 추구는 그 자체로 즐거운 것이고 독서는 일종의 연애이며 자신을 풍요롭게 하는 데 도움이 된다. 기타 등등. 하지만 들뢰즈가 지적하는 것처럼 “어떻게 한 초등학생이 단번에 라틴어에 숙달되게 되는지, 어떤 기호(記號)들이 (사랑이나 고백하기조차 창피한 욕구로 인해) 그의 배움에 도움을 주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다.

거꾸로 짝사랑이든 지적 스노비즘이든 이러한 개인적 동기부여를 얻지 못할 때 우리의 독서 경험은 흔히 생각보다 괴롭고 지루한 일이 되곤 한다. 더구나 (21세기 초반의 대한민국에서는 너무나 낯선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대부분의 문명사회에서 일정 수준의 고등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교양’이라는 명목으로 수백수천권의 필독서를 읽을 의무, 책을 끝까지 다 읽을 의무, 책에 대해 이야기를 하려면 먼저 끝까지 다 읽고 얘기해야할 의무 같은 구속에 짓눌려 있는 것이 사실이다.

결국 책이라는 것, 독서라는 것은 많은 사람에게 커다란 스트레스를 주는 부담스러운 일이 되며 그 중 가장 무시무시한 것은 역시 ‘읽지 않은 책’의 존재이다. 하지만 모든 책을 읽을 수 없는 것도 자명한 노릇이고 습관이 되면 곤란하겠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책을 읽지 않고 읽은 척 떠들어야할 상황도 있는 것이다. 도발적인 주제와 제목 선정으로 악명 높은 프랑스의 문학 이론가 피에르 바야르가 올해 초 펴낸 『책을 읽지 않고 이야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는 독서 행위를 둘러싼 이러한 작은 오해와 환상들을 폭로하면서 독서에 대한 새로운 개념 정의를 시도하는 책이다.

하지만 분명 이론적 작업임에도 불구하고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 이 저작은 책을 안 읽어도 된다는 이론적 면죄부로 해석될 여지가 충분히 있고 그 때문에 출간 즉시 언론의 주목을 받아 순식간에 베스트셀러로 등극한 동시에 (슈퍼마켓과 공항 서점에까지 깔렸다고 한다) 학계에서는 필요 이상의 가혹한 비난을 받아 저자를 곤혹스러운 상황에 빠뜨렸다. 다행히 독서와 교양에 대한 죄의식이나 부담감이 전무한 나라에 살고 있는 우리로서는 오히려 이러한 선정적 논란에 휩쓸리지 않고 객관적으로 이 책의 논의를 따라갈 수 있을 것이다.



독서와 비독서의 모호한 경계
저자는 책의 1부에서 ‘안 읽은 책’의 여러 양상을 검토하고 있는데 (모르는 책, 훑어본 책, 본 적은 없고 들어만 본 책, 읽었는데 잊은 책 등) 여기서는 기본적으로 ‘읽은 책’(독서)과 ‘안 읽은 책’(비독서)의 구별이 생각만큼 분명하지 않다는 점을 밝히려 하고 있다. 읽다가 만 책은 읽은 책인가 아닌가? 책의 몇 퍼센트를 읽어야 읽은 책이라고 할 수 있을까? 어려워서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책은 무엇인가? 오래 전에 읽어 다 잊어버린 책, 심지어 읽었다는 사실조차 잊은 책은 펼쳐본 적도 없지만 대충 들어 개요를 알고 있는 책과 무슨 차이가 있을까? 더구나 모든 책은 읽고나면 즉시 점진적 망각의 대상이 되게 마련이고 심지어 책을 읽는 동안에도 망각은 벌써 진행 중이게 마련인데. (보르헤스가 들려주는 푸네스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 지속적 망각이 없는 완전한 기억은 실질적으로 전적인 무의미를 만들 뿐이다).

결국 우리가 책들과 맺는 관계는 결코 연속적이고 동질적인 과정이 아니고 투명한 지식의 장소도 아니며 기억의 여러 파편이 섞여 있는 공간, 이 책에서 읽은 구절과 저 책에서 읽은 구절이 맥락에서 분리되어 유령처럼 배회하고 서로 결합하고 혼동되는 ‘변신-분리-합체’의 공간이다. 따라서 우리의 독서 경험은 대부분이 ‘철저한 완독’과 ‘아예 들어보지도 못한 책’의 중간에 있고 이 중간 지대에는 위에서 언급한 네 가지 양상으로 환원될 수 없는 수많은 단계와 가능성이 있다.

더구나 애초에 꼼꼼한 완독이 어려운 작품도 있다. 바르트의 지적처럼 “묘사 · 설명 · 고찰 · 대화를 건너뛴다고 해서 큰일이 나는 것은 아니다(아무도 우리를 감시하지 않는다) …… 누가 프루스트를, 발자크를, 『전쟁과 평화』를 한자 한자 다 읽었단 말인가?” 이렇게 독서와 비독서의 구별이 애매해진다면 거꾸로 독서 자체의 규정도 어려워지며 결국은 텍스트의 개념 역시 교란될 수밖에 없어 문학 텍스트는 유동적이고 불안정한 사물이 된다.

문학 텍스트는 유동적이고 불안정한 사물, 텍스트를 창조하라
그래서 바야르는 이러한 기억/망각의 문제를 텍스트 자체의 지위에 관한 논의로 이끈다. 아무리 텍스트를 꼼꼼히 읽더라도 우리는 일부만을 기억할 수밖에 없고 기억하는 부분들, 개요는 사람마다 다르므로 텍스트는 결코 단일한 대상이 아닌 것이 된다. 특히 문학 텍스트의 경우 그 근본적 다의성으로 인해 한 명의 독자가 그 다양한 의미망을 모두 알 수도 없고 설사 안다고 해도 그에 대해 말하는 순간에는 기껏해야 한두 개의 의미망밖에 실현시킬 수 없으므로 상황은 더 복잡해진다.

원론적으로 말해 애초에 글로 된 텍스트는 조각이나 그림과는 달리 우리가 그것에 대해 기억하지 않고 말하지 않는다면 존재한다고 할 수가 없다. 바야르가 기대고 있는 미셸 샤를르(Michel Charles)의 해석학적 구조주의의 입장을 따를 경우 글이란 언어 기호로 되어 있고 그것을 읽는 사람이 독서 행위를 통해 그것을 음성과 의미로 실현시키지 않을 경우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잉크로 더럽혀진 종이 뭉치일 뿐인 것이다.

더구나 문학 작품은 우리가 사는 세계처럼 완전한 세계가 아니어서 묘사하는 세계에 대해 일련의 단편적 정보만을 제공할 뿐이고 이 정보들은 독자의 개입 없이는 충분할 수 없다. 문학 작품에서 우리가 한 인물에 대해 접하는 것은 여러 개의 문장뿐이다. 하지만 험버트가 롤리타의 눈썹을 언급하지 않는다고 해서 롤리타가 눈썹이 없는 소녀라고 생각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렇듯 문학 텍스트란 독자의 보충 없이는 불완전한 파편들의 공간일 뿐이어서 텍스트의 문면을 넘어서는 독자의 상상과 해석은 나이브한 문학소녀들이나 저지르는 주제넘은 투사 독서가 아니라 텍스트가 텍스트로 존재하는데 필수불가결한 구성적 요소이다. 그런데 (그 자체로는 언제나 모자란) 텍스트를 보충하는 이러한 독서 작업에는 개인적 경험, 세계관, 우리가 속한 문화적 틀이 동원될 수밖에 없다보니 주관적 · 사회적 필터와 무관한 객관적 독서란 현실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한 마디로 말하면 내가 읽는 카다레의 『부서진 사월』은 당신이 읽는 『부서진 사월』과는 다른 텍스트이다. 결국 존재하는 것은 단일한 텍스트가 아니라 독자의 수만큼이나 많은 다수의 텍스트이며 텍스트의 단일성은 주어진 사실이 아니라 구축해야할 픽션이다. 더구나 책을 처음에서 끝으로 나가는 진행 방향으로 읽는 선조적 독서 말고도 다양한 다른 독서/비독서 방식이 있고 (읽다 관두기, 뒤쪽부터 보기, 훑어보기, 필요한 챕터만 찾아 읽기, 이곳저곳을 뒤지며 마구잡이로 읽기, 구입해서 책장에 꽂아두고 언젠가는 보겠다고 다짐하기 등등) 그 방식들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독서 경험을 결정하는 다음에야.

물론 피에르 바야르가 대중을 독서의 중압감에서 해방시키려고 이 책을 쓴 것은 아니다. 기본적으로 텍스트, 책, 독서 등에 대한 지나치게 이상화된 관념이 문학 이론 자체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보니 완전히 폐기할 이유는 없지만 경직된 면이 없지는 않은 개념들을 더 세련되게 다듬기 위해 개별 독자의 실제적 구체적 독서 경험을 끊임없이 참조하면서 (텍스트의 모든 굴곡에 일일이 반응하는 모범적인 모델 독자를 세운 것은 에코와 문학 구조주의의 훌륭한 업적이지만 텍스트의 모든 단어를 하나하나 다 기억하고 있고 책을 읽다가 잠깐 화장실에 가지도 않는 독자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 한계를 보여주려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묵직한 이론적 논의에도 불구하고 미디어와 대중의 호감을 얻을 수 있었던 이 책의 실용적 조언들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으리라. 책을 읽지 말라고 하는 것은 아니지만 ‘선조적 완독’이 아닌 책을 읽는 다양한 방식을 시험해보라고, 창조성과 즐거움을 잃을 정도로 부담감을 갖고 책을 읽지는 말라는 조언 말이다(바야르는 한 대담에서 ‘끝없이 읽기만 하고 논문 집필을 결코 시작하지 못하는 박사과정 학생들의 병리학적 증상’을 언급한다). 너무나 당연한 얘기지만 결국 읽지 않을 책이 있다는 것을, 읽을 시간이 없는 책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작품의 신성함을 부인하는 ‘비평적 개입주의’  
바야르는 최근에 있었던 한 대담에서 자신의 모든 저작은 아무리 사소한 이론적 결함도 트집을 잡으면서 억지스런 논리를 끝까지 밀어붙이는 편집증적 서술자를 내세운 픽션 작품이라고 밝힌 적이 있는데 (보통은 이런 개념의 극한을 탐구하는 훌륭한 기제로 사용되지만 『책을 읽지 않고…』의 경우처럼 오해를 받기도 했던) 이러한 역설적 서술자의 역할이 가장 빛을 발한 것은 그의 출세작인 『누가 로저 애크로이드를 죽였는가?』일 것이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고전 『로저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에 대한 해석서인 이 책에서 바야르는 ‘지금까지 비평가들은 문학을 해석하는데 그쳐왔다.

이제는 문학을 뜯어고칠 때이다’라는 제라르 쥬네트의 모토를 따라 작품의 자기완결성을 상정하는 수동적 비평이 아니라 작품의 신성함을 부인하는 ‘비평적 개입주의(interventionnisme critique)’를 주창한다(이러한 개입주의는 위고, 모파상, 프루스트, 뒤라스 등 대가들이 써낸 졸작의 실패 원인을 분석하고 개선을 위한 처방을 제시하는 『망친 작품을 어떻게 개선할 것인가』(Minuit, 2000)에서 가장 극단적으로 나타나며 스토리라인과 무관해 보이는 여담으로 가득한 프루스트 책에서 여담을 실제로 제거할 경우 어떤 일이 생기는지를 검토하는 『주제 이탈 - 프루스트와 여담』(Minuit, 1996)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의미의 다의성, 해석의 다양성이라는 구호가 문학 비평에서 유행한지도 이미 수십 년이 되었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것은 추상적 차원에 머물고 있고 기껏해야 작품의 작은 디테일 차원에 적용되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바야르는 이 유명한 추리소설을 빌어 작품의 플롯, 줄거리, 결말 자체도 완전히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기실 추리소설이란 원칙적으로 가장 열려 있는 서술문학 장르이다. 작품이 진행되는 동안 ‘일어난 사건’(범죄와 그 주변 상황)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여러 인물의 시각에서 제시되며 개별 인물 자체도 자신의 해석을 여러 차례 수정한다.

그러므로 추리소설은 단일한 플롯에 대한 여러 개의 버전을 내부에 갖고 있는 장르이다. 하지만 작품 마지막에 이르러 탐정이 다른 모든 해석의 선(線)들, 가능한 모든 스토리라인을 폐기하고 단 하나의 ‘옳은 추리’, 확고부동한 진실을 제시하는 관습 때문에 추리소설은 거꾸로 가장 닫힌 내러티브 양식이 된다. 바야르가 도전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바야르는 『로저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의 말미에 에르큘 포와로가 밝히는 살인의 진상과 범인의 이름이 과연 옳은지를 재검토한다. 분명 텍스트에는 포와로의 최종 설명과는 다른 식으로 해석될 수 있는 부분들이 있고 포와로의 논리에는 결함이 없지 않다. 그래서 바야르는 적지 않은 이론적 우회를 거치면서 공식적인 작품의 결말을 폐기하고 포와로가 지목한 범인이 사실은 누명을 쓴 것이며 왜 그가 억울한 처벌을 받아들이게 되었는지를 성공적으로 설명한다. (바야르가 말하는 편집증적 서술자가 실행하는 ‘망상적 독서’가 바로 이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추리소설이므로 이러한 해석은 작품 전체의 줄거리가 완전히 달라지는 결과를 낳는다. 바야르는 이 책의 서론에서 『애크로이드』 이외의 다른 추리소설도 마찬가지로 진범을 다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며 (실제로 이 책에서는 크리스티의 다른 작품 몇 개의 진범을 새롭게 폭로한다) 추리소설이 아닌 작품에 나오는 의문사도 마찬가지로 재수사를 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라퐁텐의 우화에서 숱하게 죽어나가는 주인공들(동물들)의 진정한 사인(死因)은 무엇인지, 춘희의 죽음이 진짜 자연사인지, 『제르미날』의 광산 참변의 진짜 흉수는 누구인지도 질문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히는데 바야르는 실제로 다음 저작인 『햄릿 사건 수사』(아마 지금껏 나온 바야르의 책 중 가장 이론적인 저작일 것이다)에서 셰익스피어의 고전으로까지 ‘탐정 비평(critique policier)’의 영역을 넓혀 햄릿왕의 살인범이 동생 클로디어스가 아니라는 점을 밝히고 왜 햄릿이 그토록 복수를 미루고 망설였는지를 해명한다.

물론 한 인터뷰에서 밝힌 것처럼 바야르 자신이 애크로이드의 살인범이 셰퍼드 의사가 아니고 햄릿왕의 살인범이 클로디어스가 아니라고 실제로 믿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러한 편집광적 역설과 망상적 독서가 문학과 텍스트와 독서에 대해 가져다주는 이론적 함축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니다.(이충민│프랑스 빠리 8대학 불문과 박사과정 재학중)

08. 01. 11.

P.S. 찾아보니 바야르의 책들 가운데서는 서평에서 다뤄진 책 두 권만 영역돼 있다. <책을 읽지 않고 이야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는 국내에도 곧 소개될 예정이라고 한다... 그 후 1년만에 두 권이 모두 출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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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1-11 23: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1-11 23: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1-11 23: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1-11 23: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람혼 2008-01-12 04:30   좋아요 0 | URL
두 책 바로 '찜'했습니다. 어서 주문하고픈 마음입니다.^^
여담이지만, 아직 애크로이드 사건을 읽지 않으신 분께는 살짝 '스포일러'의 기능을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잠시 들었습니다...ㅎㅎ

로쟈 2008-01-12 09:22   좋아요 0 | URL
그런 걱정은 하지 못했군요.^^ 곧 번역돼 나온다고 하니까(읽어본 분에 따르면 아주 재밌다고 합니다) 기대를 걸어봅니다...

jalousies 2008-01-13 08:25   좋아요 0 | URL
뉴욕 타임즈가 선정한 2007년 100권의 책에도 포함되었다고 합니다. (http://www.nytimes.com/2007/12/02/books/review/notable-books-2007.html?_r=1&oref=slogin) 며칠전에 그의 저서 한권이 또 발간되었더군요. 이번에는 코난 도일의 소설에 대한 책이네요. (http://www.leseditionsdeminuit.eu/f/index.php?sp=liv&livre_id=2562)

로쟈 2008-01-13 09:56   좋아요 0 | URL
네, 영어권에도 활발하게 소개되겠군요. 최근에 접한 가장 흥미로운 비평가입니다...

닉네임을뭐라하지 2008-01-13 14:29   좋아요 0 | URL
정말, 간단한 소개와 제목만으로도 굉장히 흥미로운 책들이 많네요.
로쟈님 말씀대로 그의 책들이 대거 소개, 아니 대거 번역되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로쟈 2008-01-13 21:43   좋아요 0 | URL
^^

2008-01-15 16: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1-16 10: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린(隣) 2008-01-18 02:44   좋아요 0 | URL
재밌군요. 여기 지도교수의 세미나 중에 이 분이랑 함께 여는 세미나가 있어 한달에 한번 뵙는 분인데, 이렇게 페이퍼에서 보니 색다르군요. 앞으로 귀를 쫑긋 세워 들어봐야겠습니다.^^

로쟈 2008-01-18 22:41   좋아요 0 | URL
예, 쫑긋 세우셨다가 이 동네에도 전해주시길...
 

관심도서가 많지 않아서 눈길을 돌리게 된 건 해외신간이다. 중앙일보의 '글로벌책읽기'에 마침 하 진의 신간에 대한 소개가 올라왔기에 옮겨온다. 리안이 미국에서 가장 성공한 중국계 영화감독이라면 하 진은 가장 성공한 소설가라고 할 수 있을 텐데 화려한 수상경력을 자랑하는 그의 소설들이 국내에서도 작년부터 적극 소개되고 있다. 해서 'Free Life'(자유인생)가 원제인 이 신간도 어쩌면 내년에는 구경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672쪽 분량이니까 시일은 좀 소요될 듯하다).

중앙일보(07. 12. 14) [글로벌책읽기] 아들놈이 창피하대, 내가 영어 못해서 …

소설 『기다림』으로 명성을 얻은 중국계 소설가 하진이 새 소설을 출간했다. 중국을 배경으로 했던 전작들과는 달리 이번 소설은 중국인 이민자 가족이 미국에 정착하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 소설은 미국 유학생 부부인 난우와 핑핑이 천안문 사태 직후 미국에 정착하기로 결심하고 3년간 헤어져 있던 아들을 미국으로 데려오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난우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대학원을 그만두고 야간 경비원 등 갖가지 험한 일을 하게 된다. 뭐든 닥치는 대로 일하면서 저축을 위해 극도의 내핍 생활을 하는 부부의 유일한 희망은 아들 타오타오의 교육이다. 난우에게는 결혼하기 전에 사랑하던 여자가 있었고 결혼 후에도 그 여자를 잊지 못하고 있는 것을 부인 핑핑도 잘 알고 있어서 부부 사이는 자주 삐걱거린다. 하지만 둘 다 중국에서 어렵게 데려온 아들을 잘 키우기 위해 자신들의 삶을 희생한다.

보스톤 지역에서 뉴욕으로 가서 브루클린에서 조그만 레스토랑을 열고 다시 아틀란타 교외의 쇼핑 몰 한구석에 중국식당을 가지게 되는 과정은 아메리칸 드림이 어떻게 실현되어 가는가를 잘 보여준다. 이 두꺼운 장편소설은 어떤 면에서 중국인 이민자들의 정착 교본처럼 읽힐 수도 있을 정도로 생활의 세목들을 자상하게 적어놓고 있다. 미숙한 영어 때문에 생기는 일들은 처음에는 코믹하지만 나중에는 가슴을 짓누른다. 그것이 결국 중국문화와 미국문화의 비교로 이어지는 것은 자연스럽다. 난우가 보기에 미국인들은 근면하지만 돈의 노예이자 교양 없는 속물들이다. 하지만 중국에선 날마다 누군가와 싸워야 살아남을 수 있고 뇌물 없이는 되는 일이 없는데다 정부는 국민들을 어린아이 취급하면서 복종만 강요한다. 난우는 자신의 아들이 그런 폭력적 환경을 견디며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

한편으로 경제적 안정을 이루어가면서도 주인공 난우를 앙앙불락하게 만드는 열망이 있는데 그것은 시인이 되는 것이다. 중국에 있는 옛 애인을 그리워하는 마음과 함께 난우를 괴롭히는 시인의 꿈은 이민자가 가지게 되는 이중적 심리 상태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미국에서 살려면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영어다. 하지만 성인이 되어 미국에 온 사람이 영어를 마스터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하진이 인터뷰에서 한말 그대로 이민 생활의 핵심은 “영어를 정복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그것을 계속 배울 것인가 아니면 포기할 것인가”를 정하는 것이다. 영어로 시를 쓰겠다는 난우의 생각은 편집자로부터 “시란 언어 속으로 들어가는 거예요”라는 충고를 듣기에 이른다.

여기다 불쑥 커버린 아들 타오타오는 부모들의 어설픈 영어를 창피해한다. 십대 아이들이 보여주는 일반적인 언행일 수도 있는 일이 이민자 부모들에겐 날카로운 아픔이 된다. 자신들의 삶을 희생해가면서 키운 아들이 미국인처럼 행동하면서 부모와 거리를 두려고 할 때, 부부는 위기에 도달한다. 부부 싸움 끝에 핑핑이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려고 전화를 집어드는데 누르는 번호가 911인 것은 우스우면서도 슬픈 장면이다.

하진의 전작들이 미국 독자들이 원하는 중국에 관한 이야기들이었다면 이번 소설은 자신이 미국에 와서 경험한 것을 적은 자전에 가깝다. 미국 숭배와 영어 배우기 열풍에 대한 적절한 비판으로 읽힐 수도 있는 이 소설은 미국 이민을 꿈꾸는 독자들에게 흥미 있는 이야기일 것이다.(이영준_문학평론가)

07. 12. 15.

 

 

 

 

P.S. 나는 아직 읽어보지 못했지만 하 진의 소설은 대표작 <기다림>을 비롯해서 다섯 권 정도가 번역돼 있다. 디아스포라 문학이란 주제에 관심을 두고 있는지라 <기다림>과 <자유인생> 정도는 읽어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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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전 배송받은 책은 영국의 저명한 극작가 톰 스토퍼드의 <유토피아의 해안>(2007)이다. 연초에 '어느 혁명가의 생애'(http://blog.aladin.co.kr/mramor/1033616)란 페이퍼에서 언급한 적이 있는데, 제1부 '항해(Voyage)', 제2부 '난파(Shipwreck)', 제3부 '구조(Salvage)'로 돼 있고, 전체 공연은 휴식 시간을 포함 12시간이 걸린다는 대작이다. 3부작을 모두 묶은 책은 지난 1월에 나왔지만 저렴한 페이퍼백이 지난 가을에야 나왔고 기다림 끝에 드디어 손에 넣게 되었다.

작년 가을의 기사를 다시 옮기면, "이 작품의 배경은 19세기 제정러시아시대. 유럽이 혁명 분위기에 휩싸여 있던 1833년부터 1866년까지의 30여년 간에 러시아 지식인들이 겪은 대립과 갈등, 좌절, 투쟁, 사랑, 꿈을 그린 것이다. 작품의 주요 등장인물은 급진적 무정부주의자 바쿠닌, 작가 투르게네프, 문학비평가 벨린스키, 혁명적 사상가 알렉산더 헤르젠 등이다."

국내에도 번역/소개되면 좋겠다 싶지만 이런 데 눈독을 들이는 출판사는 드물어서 실현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게다가 한국 독자들이 희곡은 또 잘 안 읽는다). 나야 물론 전공과 관련된 책이기도 하고 강의용 참고서이기도 해서 아무런 망설임도 가질 수가 없지만.

책머리에 실린 감사의 말을 잠시 읽어보니 스토퍼드는 이 '러시아 지성사'를 쓰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준 이로 두 사람을 꼽고 있다. <러시아의 사상가들>의 저자 이사야 벌린과 <낭만적 망명가들>의 저자 E. H. 카이다. 벌린의 책은 늦어도 내년에는 나오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카의 책은 어떤지 모르겠다. 그의 전기 <미하일 바쿠닌>은 곧 새로 번역돼 나오는 걸로 아는데, 이왕이면 이 책도 마저 소개되면 좋겠다(*찾아보니 <낭만의 망명객>(까치, 1980)으로 소개됐었다. 손을 봐서 재출간하면 좋겠다).

거기에 더 보태자면 스토퍼드가 가장 먼저 감사를 표하고 있는 에일린 켈리의 연구서 <또다른 해안을 향하여(Toward Another Shore)>(1998)과 <피안에서의 견해들(Views from the Other Shore)>. <유토피아의 해안>이란 작품명을 들었을 때 제일 처음 떠올린 책들이기도 한데, 실제로 스토퍼드가 여러 가지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말하자면 '자문'역이었던 셈이다. 내년 1학기에는 겸사겸사 이 책들과 씨름하면서 '유토피아의 해안'을 좀 거닐어 봐야겠다...

07. 1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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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에 나온 책들 가운데 알라디너들에게 (적어도 페이퍼상으로는) 가장 각광을 받은 책은 샹탈 무페의 <정치적인 것의 귀환>(후마니타스, 2007)인 듯하다(국내에선 '무프'라고도 표기돼 왔다). 작년에 <민주주의의 역설>(인간사랑, 2006)을 읽으면서 이 책의 원서 또한 복사해둔 것 같아 기억을 돌이켜보았지만 어느 구석에서 찾을 수 있을지는 엄두가 나지 않는다(순서로 치자면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 <정치적인 것의 귀환>의 후속작이 <민주주의의 역설>이다). 아무려나 (뒤늦게라도) 정치의 계절에 나온 주요한 이론서로서 꼽아둘 만하다. 한겨레의 리뷰(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255635.html)가 가장 자세하므로 참조해볼 수 있겠고 여기서는 무페 읽기의 리스트를 추려서 '세계의 책'으로 분류해놓는다. 역시 한겨레의 기사를 참조하여 몇 마디 덧붙인다.

한겨례(07. 12. 08)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접점을 찾다

샹탈 무페는 1990년 한국어로 번역된 바 있는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한국어판 제목 ‘사회변혁과 헤게모니’)으로 우리에게 알려진 정치철학자다. 그의 지적 동업자인 에르네스토 라클라우와 함께 써 1985년에 출간한 이 책에서 무페는 자신의 새로운 민주주의 전략을 처음 제출했다. 그 전까지 마르크스주의 안에서 자신의 이론을 구상했던 무페는 이 책을 통해서 마르크스주의와 사실상 결별했다. ‘포스트마르크스주의’ 이론가라는 호칭은 이때 붙여졌다. 그의 새 민주주의 전략은 ‘급진적이고 다원주의적인 민주주의’로 요약할 수 있다.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에서 무페와 라클라우는 마르크스의 경제결정론을 거부하고, 그 대신에 그람시의 헤게모니 개념을 받아들였다(*이 책에 대한 수요가 있음에도 다시 출간되지 않는 건 이상한 일이다. 이 책에 대한 간단한 언급은 '라클라우-라캉-지젝'(http://blog.aladin.co.kr/mramor/1033614)을 참조). 두 사람은 그람시의 헤게모니를 통해 마르크스주의적 계급투쟁이 다양한 사회적 대립를 구성하는 하나의 층위일 뿐이며, 사회에는 다양한 투쟁들이 경합하고 있음을 포착했다. 이 경합하는 투쟁들을 일시적이고 불안정하지만 공동전선으로 모을 수 있는데, 그 공동전선을 구성하는 담론적 힘이 헤게모니다.

이 책에 이어 나온 것이 <정치적인 것의 귀환>인데, 여기서 무페는 민주주의의 갈등적이고 투쟁적인 성격을 강조하면서, 그 불확정적인 긴장 속에서 경제적 평등의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민주사회주의’ 혹은 ‘자유사회주의’의 가능성을 발견한다. 이 새 기획은 프롤레타리아라는 단일한 주체를 거부한다는 점에서 기존의 마르크스주의적 사회주의와는 완전히 다르며, 또 자유주의 이념을 긍정한다는 점에서 기존 좌파의 반자유주의적 기획과도 다르다. 무페는 자유를 절대화하는 전통의 자유주의와도 거리를 두고 사적 소유를 옹호하는 경제적 자유주의와도 절연한다는 전제 위에서 개인의 자유와 인격의 자율을 인정하면서 평등의 이상을 추구하는 것을 민주주의의 목표로 제시한다. 이 책에 이어 무페는 ‘정치적인 것’의 개념을 더욱 숙고해 <카를 슈미트의 도전>(1999) <민주주의의 역설>(2000) <정치적인 것에 대하여>(2005) 같은 책으로 펴냈다.(고명섭 기자)

07. 12. 09.

P.S. <카를 슈미트의 도전>(1999)는 무페의 편저이고 국역본이 나와 있는 <민주주의의 역설>(2000)과 함께 모두 버소(Verso)출판사에서 출간됐다. 그다지 두껍지 않은 책이므로 국내에도 소개될 수 있을 듯하다(물론 슈미트의 <정치적인 것의 개념>(법문사, 1992) 등과 같이 나와야겠다).

무페의 최신간인 <정치적인 것에 대하여>(2005)는 '행동하는 지성'(Thinking in action) 시리즈의 한권이다(이 시리즈는 동문선에서 여러 권 출간된 바 있다). '입문서'격으로 가장 적합하지 않나 싶다. 기사에서 언급되지 않은 책으로는 <정치와 열정>(2002)이 있다. 그녀의 홈피를 찾으니(http://www.wmin.ac.uk/sshl/page-2486) 이 책은 무료로 다운로드된다(http://www.wmin.ac.uk/sshl/PDF/Mouffe%20PDF%20.pdf). 아침부터 좋은 횡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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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onta 2007-12-09 15:11   좋아요 0 | URL
<헤게모니와 사회주의전략>은 저도 재발간되었으면 하는 책입니다. 오늘날의 급진정치의 방향성과 관련해서 상당히 중요한 이야기를 하는 책이더군요. 다만 원문의 난해함때문인지 기존의 번역본은 오역이 좀 보이던데 이런 점 수정해서 다시 나왔으면 하네요.

로쟈 2007-12-09 15:44   좋아요 0 | URL
네, 다시 나오면 좋겠고, 다시 나올 거라고 기대합니다...

람혼 2007-12-10 03:50   좋아요 0 | URL
저 역시나, 기대합니다.^^
 

'박사 난민'이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다고 한다. 일본 얘기다. 기사를 읽어보니 어쩌면 우리도 곧 그런 지경에 이르지 않을까 우려되기도 한다. 소위 '대학원 육성'이니 '대학원 중심 대학'이니 하는 구호들의 공허한 귀결이 '박사 난민'들의 '박사 알바' 아닐까? 남의 일 같지 않은 노릇이다.

한겨레(07. 12. 04) 일본 ‘박사 난민’ 사회문제로 편의점·술집 ‘박사 알바’ 수두룩

일본에서 ‘박사 난민’이 넘쳐나 사회문제화되고 있다. 대학원에서 어렵게 공부해 박사학위를 따고도 일정한 직장을 잡지 못하고 시간강사나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생계를 꾸려가는 이른바 ‘프리터 박사’가 전국적으로 1만2천명을 넘어서고 있다. 지난 10월20일 출판된 <고학력 워킹푸어-‘프리터 생산공장’으로서의 대학원>(저자 미즈키 쇼도)은 발매 두 달도 못돼 5만5천부의 판매부수를 기록하며 박사 난민의 실태를 드러내는 기폭제가 됐다.

2004년 규슈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리츠메이칸대학 연구원 겸 시간강사’인 저자 미즈키(40)도 1년 계약이 끝나는 내년 봄 이후 어떻게 될지 모르는 신분이다. 그는 <도쿄신문>과 인터뷰에서 “독신이어서 겨우 먹고 살수 있는 정도이다”며 “그나마 시간강사라는 직업이 있으니까 상당히 나은 편이다”라고 쓴 웃음을 지었다. 그가 알고 있는 한 여성 박사(33)는 대학 시간강사 외에도 편의점에서 ‘알바’를 하면 월 15만엔을 벌어 생활비로 충당하고 있다. 선술집 알바나 학원강사를 겹치기로 뛰면서 ‘파친코 프로’가 된 박사도 있다고 한다.

지난해 박사과정 수료자는 과거 최다인 1만5966명이었는데 이 가운데 ‘사망·소재불명자’가 9.2%인 1471명에 이른다는 놀라운 통계결과도 있다. 미즈키는 “우수했던 여성 친구는 어느날 갑자기 연구실에 나타나지 않았다. 어디서 무엇을 하는 지 담당교수도 알지 못한다. 그런 사람을 몇 명이나 알고 있다. 심신에 어딘가 병이 든 사람이 많다. 집안에 틀어박힌 사람도 많다”고 말했다. 박사 1인당을 키우는 데 1억~1억5천만엔의 비싼 국비가 투입되는 점을 고려하면 본인이나 국가나 막대한 손실이다.

박사난민 양산에는 무계획적인 대학원 중점화 정책이 있다는 지적이다. 1991년 당시 문부성이 “세계적인 수준의 교육연구의 진척’으로서 대학원 강화를 표명했다. 이에 따라 도쿄대를 비롯해 많은 대학이 대학원 진학을 생각하지 않은 학생이나 미취업으로 고민하는 학생에게 앞다투어 적극적으로 대학원 진학을 권했다.

1985년 약 7만명이었던 대학원생이 단 20년여만에 두 배가 넘는 16만명으로 부풀어 올랐다. 일본 대학들은 저출산으로 인한 대학진학자 감소를 대학원 진학 증가로 만회한 셈이다. 문부과학성은 넘쳐나는 박사 대책으로 박사학위 취득 이후 대학 등 연구기관에 3~5년간 적을 두고 장려금 등을 받는 ‘포스트 닥터’를 실시하고 있으나 이도 올해 1만5천명이 넘을 정도로 포화상태이다.(도쿄/김도형 특파원)

07. 12. 04.

P.S. 이공계는 사정이 다른가? 대학원 육성/강화로 고급 두뇌를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칼럼도 옮겨놓는다.

매일경제(07. 12. 04) 인재강국으로 가는 길

한국은 고급 두뇌 확보 문제가 심각한 상황이다. 18세 이상 인구 대비 이공계 박사 비중은 유럽연합(EU) 주요 국가가 0.6%인데, 한국은 0.4%에 불과하다. 바이오, 나노 등 미래 유망 산업을 주도할 이학박사 배출 수는 미국에 비해 7%에 불과할 정도로 열악하다. 한국 대학에서 이공계 박사가 100명 나올 때 미국 대학에 유학하여 박사학위를 받은 수가 27.3명이다. 일본 독일 등이 한두 명인 것에 비하면 너무 많은 수다. 그나마 이들 중 절반 가까이가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아 고급 두뇌의 외국 유출은 엄청나다. 외국인 근로자 중 전문 인력 비중은 7.6%로 미국 영국 등 선진국 30~40%와 비교할 때 고급 두뇌의 국내 유치는 형편없다.

한국의 고급 두뇌 문제는 정부와 대학의 공급자 주도 정책에 주로 기인한다. 산업화 시대에 적합한 범용 인재 중심의 양산 정책에만 매달리면서 대학의 질적 경쟁력은 약화되었고, 이공계 인력의 시장 가치 저하, 고급 두뇌 이탈 등 악순환이 거듭되고 있다. 다행히 한국은 교육열이 높고 이공계 인력의 잠재적 풀(Pool)도 충분해 적절한 유인책과 대학의 질적 경쟁력만 확보되면 고급 두뇌 문제는 해결할 수 있다.

첫째, 세계적 수준이 될 가능성이 있는 연구중심대학에 투자를 집중해야 한다. 일찍부터 대학원을 고급 두뇌 산실로 인식한 선진국은 대학원 위주의 연구중심대학을 적극 지원하고 있다. 미국은 전체 대학 중 5%인 연구중심대학이 정부지원 연구비 90% 정도를 가져가고, 과학기술 분야 박사 90% 이상을 배출한다. 특히 최고 교수 확보에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세계적 교수 한 명은 탁월한 연구 성과를 창출하는 것 외에도 고급 두뇌를 끌어 모으는 집적지 구실을 하기 때문이다.

둘째, 이공계 교육 품질을 전반적으로 끌어올려야 한다. 현재 중ㆍ고교 과정 수학ㆍ과학 교육이 시원찮아 대학에서 애를 먹고 있다. 대학의 학부 전공 교육도 부실하여 대학원에서 하는 연구를 따라잡기가 어렵다. 미국도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어 초등학교부터 대학원까지 수학ㆍ과학 교육에 대한 로드맵을 새로 짜고 있다고 하는데 한국도 서둘러야 한다.

셋째, 잠재적 고급 두뇌들에게 다양한 진로 기회와 비전을 제시해 주어야 한다. 미래는 과학기술 기반 사회이기 때문에 이공계 직업 분야 전망이 밝다. 미국은 2014년까지 10대 직업군 중 7개에서 이공계 인력이 핵심을 담당한다고 한다. 이들 직업 성장률은 26%로 평균 15%보다 훨씬 높다. 전통적인 엔지니어링뿐만 아니라 금융공학, U-비즈니스, 디자인, 엔터테인먼트, 특허ㆍ표준 등 창조적 전문 직업 분야에서도 이공계 인력 수요가 급증하고 있다. 정부와 대학은 다양한 전문대학원 설립, 외국 우수대학과 프로그램 제휴 등을 통해 이공계 인력의 다양한 진로 선택을 활성화해야 한다.

넷째, 의학 인력의 적극적인 활용 가능성도 주목해야 한다. 미래 유망 산업은 의학과 관련된 것이 많다. 바이오, 의료기기, 신약 개발, 의료 서비스 등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이들 분야는 의학만으로 되지 않는다. 이학, 공학, 의학이 협업을 해야 한다. 인재가 의학계로 진출하는 것은 시장논리여서 어쩔 수 없다면 이제는 의학인력과 협업을 통해 미래 산업을 이끌어갈 수 있는 길을 적극적으로 모색해야 한다.

다섯째, 이미 육성된 국내외 고급 두뇌 활용도를 높여야 한다. 한국은 박사급 연구 인력 중 70% 정도가 대학에 편중돼 있다. 이들이 학교 바깥 세상과 적극적으로 소통하고 지역과 산업에 실제적인 기여를 하도록 해야 한다. 대학은 지역과 산업에 적합한 실용적 연구를, 기업은 연구 결과에 대한 상업화를, 지역은 이들에 대해 체계적인 지원을 해야 한다. 국내 고급 두뇌 부족분은 세계적 연구소와 연합 프로젝트를 추진하거나 네트워킹을 통해 보충하는 길을 적극 모색해야 한다. 국외 R&D 거점 마련을 통해 현지 고급 두뇌를 활용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고급 두뇌 확보는 정부와 대학만의 일이 아니다. 고급 두뇌를 필요로 하는 기업도 힘을 보태야 한다. 기업은 고급 두뇌 요건을 대학에 구체적으로 주문하고 재정을 비롯한 실제적인 지원을 적극적으로 해야 한다. 무엇보다 총 고용 인력 중 16.8%에 불과한 과학 기술 인력 고용 비중을 선진국 수준인 30%로 끌어올리는 등 과학기술 인력 활용(고용)을 책임져 주어야 한다.(류지성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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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그 2007-12-04 22:29   좋아요 0 | URL
저는 지난주에 대학원 합격하고서 세상 물정 모르고 좋아하고 있었네요... 어째 만만찮은 앞날을 예견하는 듯합니다.^^;

로쟈 2007-12-04 22:31   좋아요 0 | URL
ㅎㅎ 축하합니다. 축하할 일인가는 더 생각해봅시다.^^;

sweetmagic 2007-12-05 01:32   좋아요 0 | URL
박사난민 ㅋㅋㅋ
문제의 심각성을 절감통감합니다.
심신의 어딘가에 병이 생긴다는 말에서는 ..........더 할말도 없습니다요.

로쟈 2007-12-05 08:37   좋아요 0 | URL
자살도 합니다.--;

순오기 2007-12-05 03:56   좋아요 0 | URL
우리도 곧 이렇게 될거라는 위기감이 확~ 느껴집니다.
박사난민보다 박사알바라는 말이 더 피부에 와 닿네요ㅠㅠ

로쟈 2007-12-05 08:37   좋아요 0 | URL
이미 진행되고 있는지도 모르겠네요...

릴케 현상 2007-12-05 11:01   좋아요 0 | URL
석사는 괜찮은거죠^^ 전 2학기까지 마쳐야 '중퇴'로 쳐준대서 버티고 있어요 ㅋ

로쟈 2007-12-06 00:12   좋아요 0 | URL
석사는 사정이 좀 낫겠습니다. 돈이 덜 들어갔으니...

비연 2007-12-05 13:46   좋아요 0 | URL
남의 일이 아니네요..흑흑.

로쟈 2007-12-06 00:13   좋아요 0 | URL
난민공동체라도 만들어야겠습니다.^^;

사량 2007-12-05 23:01   좋아요 0 | URL
저런 책이 '5만 5천부'나 팔리는 나라라면 별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은데요. 정말 아무런 대책 없는 한국에 비하면...-_-;

로쟈 2007-12-06 00:14   좋아요 0 | URL
번역돼 나오면 박사들 호주머니깨나 털어먹겠습니다.--;

자꾸때리다 2007-12-06 12:08   좋아요 0 | URL
어딜가도 이런 소리는 있는 듯 하네요. 의사 선배들도 요즘에 학교 와서 단골 메뉴로 하는 말이 앞으로 의사 수가 '폭증'해서 먹고 살기 힘들 거라고 하던데요.

로쟈 2007-12-06 12:30   좋아요 0 | URL
사실 의사, 변호사야 이전에 너무 많이 '먹었던'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