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성이 까다로운 편도 아니고 특별한 미식가도 아니어서 내가 좋아하는 식단은 저렴하면서도 나름대로 노하우가 느껴지는 식당의 음식들이다. 20년이 넘게 먹어온 대학 식당에서도 가끔 '감동'하며 밥을 먹을 때가 있고, 5000원짜리 칼국수나 김치찌개, 청국장, 곱창전골 등에서 지극한 만족감을 맛보기도 한다(값비싼 음식들도 더러 먹어보았지만 그저 '호사로군!' 할 따름이다).

파리가 들어간 수프도 후루룩 먹어치우는 고골 소설의 주인공만큼은 아니지만 나 역시도 먹는 일에 목숨 걸지는 않는 편이다('다 먹자고 하는 일이지!'란 말을 나도 덩달아 내뱉곤 하지만 진심을 담아서 말한 적은 한번도 없다). 몸에 해롭지 않고 특별히 불편하지 않은 수준에서 만족하는 편이며 가끔씩 누리는 호사에 감사할 따름이다(비록 정신의 양식에 관해서라면 분에 넘치는 욕심을 부리는 편이지만). 

지난달인가 가정의 화목을 위해서 본 <앤티크> 같은 영화가(고급 케이크가 잔뜩 나오는 영화다) 취향에 맞지 않는 건 그런 때문이다(영화를 보며 딴생각을 하기도 하고 졸기도 했다). 굳이 안 볼 이유까지는 없지만 <식객> 같은 영화도, 드라마도 나는 보지 않았다. 그러니 아무리 '책의 바다'에서 매일같이 허우적거린다고 해도 요리책에 눈길이 가지 않는 건 당연하다(요리책만큼 눈밖에 나 있는 책은 처세서 정도다).

갑자기 '서론'을 늘어놓은 건 그런 내가 관심을 갖게 된 요리책이 있기 때문이다! <늑대를 요리하는 법>. 제목이 좀 특이한데, 저자는 MFK 피셔이고, 아직 번역되지 않은 책이다(그래서 '세계의 책'으로 분류한다). 제목에서 '늑대'는 '굶주림과 가난'을 뜻한다고 하므로 풀어서 말하자면 '굶주림과 가난을 요리하는 법'이다(우리말로는 <쥐를 요리하는 법>이라고 해야 할까). 나 같은 사람도 눈길을 끌게 만드는 이 흥미로운 책을 소개해준 기사를 옮겨놓는다. 책은 빨리 번역되면 좋겠다(저자의 다른 몇몇 책들도 입맛을 돋군다)...   

 

한겨레(08. 12. 23) 굶주림과 가난을 요리하는 법

연말이라 모임이 잦다. 주로 저녁식사들인데, 다양한 사람들과 시리즈로 저녁을 먹다 보면 같이 먹는 사람에 따라 음식 맛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꽤 드라마틱하게 체험할 수 있다. 왜 달라지는지 이유가 많겠지만, 그중에서도 상대방이 갖고 있는 음식에 대한 절실함이 한몫한다. 먹고 싶은 것을 다 먹고 사는 사람들이나 음식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에겐 평소의 부족함이 주는 음식에 대한 흥분감이란 게 별로 없고 심지어 권태감마저 느낄 수 있다. 달걀이 귀할 때 먹던 삶은 달걀의 맛과 요즘 느끼는 맛이 같을 수 없듯이, 음식에 대한 기본적 ‘허기’가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과의 식사는 다른 경험이 될 수밖에 없다.

요즘 읽는 책 중에 MFK 피셔가 쓴 <늑대를 요리하는 법>(사진)이란 책이 있다. 전쟁으로 궁핍할 무렵인 1942년 나온 책이라 더 감칠맛 나게 읽힌다. 미국에서 쓰는 표현 중에 “늑대가 문간에 들이닥치다”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 늑대란 굶주림과 가난을 뜻하는데, 늑대를 제목의 일부로 사용한 이 책은 곤궁한 시대에 먹고사는 일을 은유 삼는 문학적 요리책이자 특별한 음식 에세이다.

여기에 이런 얘기가 나온다. 전쟁 중이라 설탕과 버터를 배급받아 생활해야 했던 젊은 주부들이 모여앉아 어떻게 설탕과 버터를 거의 쓰지 않고 케이크를 만드는지 서로 묘안을 자랑했다. 이를 옆에서 듣고 있던 피셔의 할머니가 이렇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 나는 평생을 전쟁통 예산으로 아껴가며 살아왔다. 부엌에서 상식적으로 하는 일이 어려울 때나 스타일리시해진다는 건 이제야 알았구나.”

전후 미국엔 풍요와 잉여가 사람들의 생활과 의식 속에 깊게 배어버렸다. 음식도 부족함을 아는 사람과 함께 먹어야 맛있는 걸 보면, 부족함이 없다는 건 뭔가 균형이 깨진 상태라는 것 아닐까. 마찬가지로 결핍을 모르는 사람들 속에 살다 보니 나도 결핍에서 충족으로 넘어갈 때 생기는 즐거움을 감지하는 감각기관 자체가 퇴화하는 게 아닌가 싶을 때가 있다. 피셔 할머니의 말씀처럼 가난은 가난할 때만 상대하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건 삶 속에 항상 있는(혹은 있어야 하는) 가난과 결핍을 ‘어떤 스타일’로 다스리는 것이다. 즉 ‘늑대’를 피하기만 할 게 아니라 맛있고 아름답게 요리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19세기의 미국 사상가 랠프 월도 에머슨은 “창조적 경제 운용은 훌륭함을 낳는 연료가 된다”고 했다. 더하거나 새로운 것만 찾는 것이 꼭 창조적인 건 아니다. 있던 것을 빼고 모자람을 즐기는 것 또한 멋지고 흥미로운 삶을 사는 한 방법일 수 있다.(박상미/화가·작가)

08. 12. 22.

P.S. 안 그래도 요즘 잔뜩 눈독을 들이고 있는 책이 부르디외가 편집한 <세계의 비참>(동문선, 2002) 시리즈다. 세계의 비참을 말해주는 방대한 사례집인데, 부르디외와의 대담에서 귄터 그라스는 모든 나라가 이런 책을 한권씩 갖게 된다면 좋겠다고 했다. 나도 동감이다(내기로만 한다면 어디 한 권뿐이겠는가!). '늑대를 요리하는 법'의 재료로서 더할 나위가 없지 않나 싶다...

 

내가 아는 범위 내에서 '세계의 비참'과 유사한 컨셉의 책으론 '세계화 시대 비정규직 사람들 이야기'를 다룬 <부서진 미래>(삶이보이는창, 2006)가 있다. 노동운동가 하종강의 책들도 같은 범주로 묶을 수 있겠다. '굶주림과 가난을 요리하는 법'에 맞추자면, 이거 무지하게 식욕을 돋구는 책들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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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23 01: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2-23 01: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Trotzky 2008-12-23 02:27   좋아요 0 | URL
읽어야 할 넘들은 쌓이고 쌓이지만... 그래도 읽고 싶고 눈앞에 쌓아두고 "언젠가는 읽고 말꼬야~~!" 하는 넘들의 리스트를 쌓아올리는데 너무 많은 도움을 받는군요.

로쟈 2008-12-23 09:12   좋아요 0 | URL
그 도움이 고민거리가 되진 않으셨으면...^^;
 

지난봄 방한하기도 했던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의 <글로벌 위험사회>가 내년 6월경 한국어로도 출간될 예정이라고 한다. 역자인 박미애 박사가 '글로벌 위험사회'에 대한 그의 생각을 미리 정리해주고 있는 기사가 있기에 옮겨놓는다. 아주 오랜만에 '세계의 책' 카테고리에 넣어둔다.  

중앙대 대학원신문(08. 12. 11) 글로벌 리스크는 세계시민사회를 도래시키나

울리히 벡의 신간 <글로벌 위험사회>(Weltrisikogesellschaft)가 지난해 독일에서 출간되었다. 전세계를 사로잡고 있는 불안을 ‘글로벌 리스크’라는 개념으로 설명하는 벡의 논의를 통해, 오늘날 세계적 위기를 타파할 해결책을 모색해본다. <편집자주>

미국의 비우량담보대출 사태로 촉발된 경제위기의 한파가 전세계를 뒤덮고 있다. 그 끝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 결정적인 해결책이 마땅히 없다는 사실이 사태를 더욱 암울하게 만들고 있다.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몇 개국에 국한되었던 90년대 아시아 금융위기와 달리, 현재의 경제위기는 유럽의 최북단 조그만 섬나라 아이슬란드에 이르기까지 예외를 두지 않고 무차별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위기의 파괴력을 피해갈 수 있는 곳, 그 영향으로부터 안전한 곳은 이 지구상 어디에도 없다. “우리 모두가 글로벌 위험지대에 앉아 있다”는 독일 사회학자 울리히 벡의 진단이 어느 때보다 현실감과 설득력을 얻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1986년 11월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사고가 일어난 지 7개월 후 벡은 <위험사회>를 출간했다. 당시 서구사회를 사로잡고 있던 불안과 불편함을 ‘리스크’라는 개념으로 적확하게 포착한 그의 분석은 30여 개 국어로 번역되었고, 이제 사회학의 고전으로 자리 잡았다. 현대사회는 스스로 생산한 위험에 직면해 있지만, 이 위험을 이슈화하고 논의함으로써 성찰적이게 된다는 근본 명제로 벡은 산업적 현대와 구분되는 제2의 현대를 기록하는 한편, 현대 안에 내재된 자기혁신의 힘을 강조했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2007년 벡은 과거의 진단을 한층 강화하고 확대하여 ‘글로벌 위험사회’를 논한다. 세계화의 영향으로 그동안 재앙과 리스크 역시 세계화되었고, 이에 대한 분석을 위해서는 리스크와 ‘위험’, 리스크와 ‘재앙’을 구분하는 개념의 세분화와 국민국가적 관점에서 초국가적 관점으로의 시각 전환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9.11사태로 서구 민주주의의 자기신뢰를 파괴한 국제적 테러리즘, 쓰나미와 카트리나로 현실화된 기후재앙, 지금까지 위력을 떨치고 있는 국제적 금융위기와 같은 ‘큰 리스크’가 현대사회의 근본 토대와 인간 실존의 자명성을 파괴할 수 있다는 위기의식이 저자로 하여금 이 책을 쓰게 했다고 말한다.

재앙 시나리오가 현실이 된다면
지구온난화로 인해 도쿄와 런던이 바다 밑으로 가라앉을 수 있는 가능성, 유전공학의 획기적 발전이 가져올 인간형질의 변화, 언제 어디서든 누구나 희생자가 될 수 있는 테러공격 등 벡이 책 서두에 극적으로 묘사하는 재앙의 시나리오는 묵시론적 종말의 무시무시한 예언을 연상시킨다. 19세기 말 선배들을 쫓아 벡 역시 세계몰락의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계몽된 성찰적 현대성 속에 더 이상 자기극복의 힘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역시 인간의 감수성을 연마하고 행위를 이끌어내기 위한 수단으로 (한스 요나스가 말한 의미에서) ‘공포의 발견술’을 사용하는 것인가?

지난해 독일에서 <글로벌 위험사회>의 출판 이후 나온 비판 중 하나는 이처럼 “광야에서 외치는 예언자” 같은 태도, 벡이 ‘연출하는’ 재앙 시나리오의 과장된 측면을 겨냥했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은 현재 전세계를 공포 속에 몰아넣고 있는 글로벌 경제위기의 현실 속에서 무색해진다. 글로벌 차원에서 전개되는 새로운 ‘큰 리스크’는 우리가 이제까지 사용했던 합리적 위기대처 수단만으로, 즉 지식이라는 의미에서의 성찰만으로 극복할 수 없으며, 그것이 오히려 또 다른 리스크와 재앙을 불러올지 모른다는 그의 주장이 현실에서 검증되고 있기 때문이다. “정보의 성찰적 습득은 금융시장을 불안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으며”, “글로벌 금융위기에 대한 글로벌 성찰이 총체적 경제파국으로의 추락을 불러오는 원인 가운데 하나가 될 수 있다”는 벡의 말은 리스크를 줄이려는 시도가 또 다른 리스크를 불러온 작금의 금융위기에 그대로 적용된다.   

벡이 <글로벌 위험사회>에서 말하는 리스크는 재앙이 아니라 ‘재앙의 예상’이다. 원자력발전소가 폭발하거나 테러공격이 발생하거나 금융위기가 발생함으로써 리스크가 현실이 되는 순간, 리스크는 재앙으로 변한다. 리스크는 우리를 위협할 수 있는 미래의 사건이지만, 일어날 경우 경제적으로 보상할 수도, 기술적으로 되돌릴 수도 없는 재앙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에 막아야 한다. 대량학살 무기가 테러리스트들의 수중에 떨어지면, 때는 이미 늦다. 기후재앙으로 해수면이 높아진다면, 때는 이미 늦다. 그러므로 아직 존재하지 않는 미래를 현재에 선취하여 그것을 근거로 결정을 내려야만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것을 막기 위해,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을 토대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역설과 딜레마가 글로벌 리스크 안에 내재해 있는 것이다.

리스크를 함께 관리하는 세계시민사회
그러므로 글로벌 위험사회는 인류를 ‘전부 아니면 무’라는 상황 앞에 세우는 사회이며, ‘우리가 모르는지도 모르는 것’에도 불구하고 예측하고 행동해야 하는 사회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벡은 바로 이런 절체절명의 상황으로부터 ‘세계주의’의 계기가 나온다고 생각한다. 그 원인과 영향을 어느 한 지리적 장소나 공간으로 제한할 수 없고, 그 결과를 원칙적으로 계산할 수 없으며, 그 피해를 보상할 수 없는 글로벌 리스크는 지구촌 주민 모두에게 한 배를 타고 있다는 의식을 심어주며, 원하든 원치 않든 문화적 타자를 자신의 지각 속에 포함시킬 것을 강요한다. 종교, 피부색, 국적, 삶의 상황, 과거와 미래가 서로 다른 사람들은 모두의 실존을 위협하는 글로벌 리스크의 강요로 인해 하나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글로벌 위험사회에서 세계주의는 비록 강요된 세계주의라 하더라도, 규범적 원칙일 뿐 아니라 현실이 된다. 

한편 먼 타자를 가까운 내부 타자로 수용하고, 문화적 타자에 대한 인정을 긍정적 가치로 해석하는 세계주의는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세계 내의 불평등에 대한 강한 감수성과 인식을 함축한다. 글로벌 리스크는 모든 사회 계층에, 모든 국가에 똑같은 정도의 피해를 주는 것은 아니다. 허리케인 카트리나는 무엇보다 뉴올리언스의 흑인 거주 지역을 황폐화시켰고, 기후재앙이 일어난다면 현재 지구상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에 속하는 사하라 사막과 히말라야 지역이 가장 큰 피해를 입을 것이다. 또한 글로벌 경제위기는 누구보다 서민계층을 힘들게 한다. 대부분의 경우 리스크를 결정하는 것은 선진국이고 리스크 결정에 따른 위험의 피해를 입는 것은 후진국이라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리스크 관리를 위한 세계시민사회의 필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벡이 세계주의에 대한 요청으로 지향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세계시민사회’와 ‘글로벌 통치’이다. 우리 모두가 비자의적으로 세계위험공동체의 구성원이 된 이상 ‘지구적 책임윤리’를 발전시켜 국민국가의 틀 안에서는 불가능한 해결책을 함께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벡은 비정부조직들과 사회운동들이 서로 연합한 초국가적 제도를 염두에 두고 있는 듯하다. 우리가 현재 직면하고 있는 금융위기가 국가간의 경계를 무의미하게 만든다는 사실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처럼, 우리는 점차 (국적이 무엇이든 관계없이) 세계시민이 될 수밖에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세계시민사회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을 보일지, 또 글로벌 통치가 어떻게 실현될 수 있는지는 여전히 하나의 과제로 남는다. 벡은 언뜻 글로벌 리스크를 연출하는 경고자의 역할에만 충실한 듯 보이지만, 미래 세계시민사회의 구축을 위해서도 글로벌 위험사회에 대한 철저한 현실인식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박미애/ 독일 아우크스부르크대학 사회학 박사)

08. 12. 17.

P.S. 영어본으로는 <세계위험사회>란 책도 지난 1999년에 출간된 바 있다. 작년에 나온 독어본 <글로벌 위험사회>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 모르겠다. 업그레이드 버전일까?.. 내친 김에 울리히 벡이 지난 가을 한겨레에 기고한 칼럼도 옮겨놓는다.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어서다.

한겨레(08. 10. 24) 세계 위기 ‘국경없는 대응’ 필요/ 울리히 벡

공산주의를 혐오하고 중국식 체제와도 거리를 두어온 서구의 복음 원리, 즉 자유시장 경제가 하룻밤 사이에 허공으로 사라졌다. 열광적인 개종자라도 되는 듯 설쳐대는 은행가들은 정작 이윤은 자기네들이 챙기면서 손실은 ‘국유화’하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때론 조롱거리로, 때론 악마 취급을 당하면서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했던 중국식 국가계획경제가, 이제 자유방임을 외쳐대던 앵글로색슨 사회의 중심부에 발을 들여놓게 되는 것일까? 글로벌 금융위기가 몰고 온 세계정치의 대변혁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비상 상황이 닥칠 것이란 ‘기대’는 전세계의 국경 없는 대응을 요구하고 있다. 비상 상황은 더 이상 일국 단위가 아닌 범지구적인 사건이다. 세계 경제위기, 기후 변화, 테러리즘 등 ‘세계적 위기’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사회적, 공간적, 시간적인 의미에서 비상상황의 ‘탈국경화’ 가 진행된다는 데 있을 것이다.

세계정치 무대에서 새로운 금융정책의 장이 지금 그리고 바로 여기서 열리고 있다는 점에서, 비상 상황은 ‘사회적’으로 탈국경화되고 있다. 이는 가장 좋은 구제방안을 둘러싼 각국 정부의 경쟁에서 잘 드러나는데, 고든 브라운 영국 총리처럼 경쟁의 승자에게는 국내외적으로 불사조처럼 정치적으로 재도약할 수 있는 기회가 열리고 있다. 그간의 완고한 국제정치 룰을 변화시키려는 권력 게임은 국내정치와 국제정치 사이에서, 또 글로벌 경제와 정치, 초국가적 기구들 사이 등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이 게임에서는 누구도 혼자서만 승리를 챙길 수는 없다. 마치 한 나라의 정부가 글로벌한 테러리즘과 맞서 싸울 수 없듯이, 한 나라 정부가 혼자 힘으로 기후변화와 맞서 싸울 수 없고, 한 나라 정부 혼자서 금융시장의 대파국에 대처할 수 없다.

비상 상황은 ‘공간적’으로도 기존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극도로 상호의존적인 세계에서 금융 리스크란 계산될 수도, 만회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국민국가가 중심이 된 ‘첫번째 근대’의 공간에서도 가끔씩 나타나는 대규모 피해를 완전히 피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 피해는 적어도 만회할 수 있는 것이었고, 실제로 각국은 그 피해를 (예를 들어 금전적인 수단을 통해) 어느 정도 되돌려왔다. 그러나 만일 세계 금융 시스템이 붕괴된다면, 지구상의 기후가 되돌릴 수 없을 만큼 변화한다면, 테러조직이 대량살상무기를 손에 쥐게 된다면, 때는 이미 늦다. 이처럼 인류가 맞닥뜨린 질적으로 새로운 위협 앞에서 더 이상 ‘만회’의 논리는 설 자리가 잃게 되고, 대신 ‘예방’의 원리가 그 자리를 꿰찬다.

마지막으로 비상 상황의 ‘시간적’ 탈국경화는 앞서 말한 위험의 계산 불가능성에서도 잘 나타난다. 모든 이들은 바로 눈앞에서 나타나는 현상들을 보며 으레 파국의 악순환이 이제는 그 정점에 도달한 것이라 믿고 싶어한다. 미처 생각지 못했던 더 나쁜 상황이 비로소 자신들 눈앞에 닥쳐 그 희망이 산산조각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세계 금융 시스템에서 ‘악성’ 신용이란, 마치 끝없는 폭설 속에서 일어나는 눈사태와 비슷하다. 즉 사람들은 리스크의 존재는 알지만, 언제 어디서 눈덩이가 무너져내릴지는 결코 알 수 없다. 이처럼, 모든 이들을 나락으로 몰고가려 위협하는 각종 위험에 대한 인식은 그 위험에 맞선 대항 행동을 촉발시키는 동력이 된다. 일국 차원의 정치공간에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던 일들이 이제 세계정치 차원에서 가능해지는 것이다.

하지만 역사를 되돌아볼 때, 글로벌한 위험에 대한 인식은 만만찮은 대가를 치러야했다. 보통은 극히 짧은 기간 동안만 그 인식이 작동했기 때문이다. 매스미디어를 통한 위험의 ‘지각’(수용)이 절대적 힘을 발휘하다보니, 세계무대 차원에서 글로벌 위험에 맞서려는 시도의 유효기간도 미디어의 관심에만 크게 휘둘려왔다.

오늘날 동시대인들을 두렵게 만드는 것은 우리들의 물질적 상호의존성의 망이 망가질 수도 있다는, 그래서 세계 위험사회의 민감한 작동기제가 아예 붕괴할 수도 있다는 우려다. 베버와 푸코 같은 이들에게는 공포의 시나리오였던 ‘다스려지는 세계’, 곧 통제 합리성이 지금 이 순간 금융위기의 잠재적 희생자들에게 하나의 동아줄이 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런 역설적 상황에서도 한가지 분명한 것은 지금은 어찌됐든 국민국가의 이기주의가 제 스스로를 위해서라도 범세계주의자(코스모폴리탄)로 탈바꿈해야한다는 점일 게다. 물론, 이는 파국에 대한 ‘기대’로부터 얻을 수 있는 가르침의 수많은 가능성 중 하나일 뿐이다. 또 다른 가능성이란 이런 움직임이 전혀 일어나지 않는 것일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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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글로벌 위험사회와 세계시민주의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9-29 21:39 
    몇 권의 신간과 함께 오늘 주문한 책은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의 <글로벌 위험사회>(길, 2010)다. <위험사회>(새물결)의 문제의식을 더 확장한 걸로 보이는데, 소개기사를 보니 글로벌 리스크를 통제하기 위한 방책으로 벡은 세계시민주의에 주목한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관심을 갖고 있는 주제이기도 해서 챙겨놓는다.  한겨레(10. 09. 30) "글로벌화된 리스크 세계시민주의가 통제가능” 

매주 주말 북리뷰에서 '처리'해야 할 책들이 몇 권씩은 된다. 이번주엔 리하르트 다비드 프레히트의 <나는 누구인가>(21세기북스, 2008)도 그 중 하나다. 생소한 저자나 흔한 책 제목은 전혀 눈길을 끌지 않지만, '독일 아마존 베스트셀러 1위'라는 광고문구는 호기심을 유도한다. 독일 사람들이 열광(?)하는 책은, 특히나 철학책은 어떤 것일까, 란 궁금증. 저자는 학술 저널리스트라고 한다(흠, 저널리즘적인 '글발'에 기댄 책인가? 하지만 철학박사이기도 하다). 국역본은 저자의 사진을 띠지에 크게 박아놓았는데, 젊은 저자의 '외모'로도 승부를 보려는 심산인가 보다. 아동틱한 독어판의 표지와 대비된다...

경향신문(08. 10. 11) '나’라는 존재를 어떻게 볼 것인가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와 뇌신경과학자 안토니오 다마시오는 서로 가는 길은 달랐지만 가고자 하는 곳은 같았다. 연구 분야는 달라도 그들은 평생 ‘나라는 존재를 규정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매달렸다. 데카르트가 찾은 인간이해의 열쇠가 ‘이성’이었다면 다마시오가 발견한 답은 ‘감정과 느낌’이었다. 그런데 우리가 흔히 철학이라 부르는 학문은 데카르트를 논하고 이성에 천착할 뿐 다마시오를 거론하거나 감정을 중시하지 않는다. 독일의 학술저널리스트 리하르트 다비트 프레히트(사진)가 볼 때 인간을 이해하는 데 이성과 감정 가운데 어느 하나가 우위에 있다고 단정하기 어렵다. 오히려 이성과 감정을 아울러야 ‘나라는 존재’가 더 선명하게 보인다.



철학은 뇌신경과학의 성과를 쉬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그래서 철학과 뇌신경과학은 따로 논다. 심리학, 생물학에 대한 철학의 태도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저자는 우리가 배워왔던 철학의 틀만으로 인간 이해에 다가갈 수 없다고 여긴다. 책은 ‘육체적인 나’에서 ‘도덕적인 나’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나에 대해 질문하고 대답을 구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우리는 왜 남을 돕는 것일까’ ‘도덕은 타고 나는 것일까’ ‘조물주는 계시는가’ 등 살면서 한번쯤은 부닥쳐 봤을 법한 질문 34가지가 흥미롭게 펼쳐진다.

저자는 기존 철학 교육이 불만이었다. 지나치게 사상의 역사적 서술에 치우쳐 있기 때문이다. 철학 교육이 학생의 지적 창의성과 사색을 북돋우기보다 암기 능력만 키워주는 아카데미즘에 빠져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고루하지 않은 철학 입문서를 쓰고 싶었다. 이 책은 그런 고민의 산물이다. 다양한 학문과 주제를 넘나들며 철학의 원초적 질문들을 능수능란하게 다룬다. 흡사 딱딱한 철학 개론서에 강렬한 한 방 펀치를 날리는 듯하다.

가령 미국 TV시리즈 <스타트렉>의 등장인물 미스터 스폭을 통해 ‘감정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명쾌한 설명을 나열한다. 스폭은 감정이 거세된 채 이성적 사고만 하는 외계인이다. 저자는 스폭을 통해 감정과 이성의 차이·양면성을 알기 쉽게 드러낸다. 그러나 결코 유치하지 않고 논리가 정연하다. 또한 동물도 고통받지 않을 권리가 있다고 주장한 피터 싱어를 통해 ‘동물을 먹어도 될까’라는 윤리적 질문에 다가간다. 고래의 고통을 꼼꼼하게 설명하면서 환경보호론에 담겨 있는 철학적 질문을 더듬어보기도 한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34가지 질문을 따라가다 보면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해답이 어렴풋이 손에 잡힐지도 모르겠다.

저자가 취하는 철학의 태도는 ‘장르 파괴’이자 통섭이다. 철학 고유의 문제의식만으로 인간을 온전히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에 학문의 경계는 무의미하다. 소유욕에 대해 성찰할 때 게오르크 짐멜 못지않게 로빈슨 크루소를 주목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안락사, 배아 복제, 자살 등 사회적 문제에 대한 성찰도 적지 않다. 이 책이 여타 철학 개론서와 다른 점이다.

이 책은 지난해 독일에서 철학 입문서로는 드물게 베스트셀러에 등극, 1년간 45만부가 팔려나갔다고 한다. 풍부한 일화를 통해 철학에 쉽게 다가가게 만드는 글솜씨가 인정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고학년 논술교재로도 괜찮을 듯하다.(서영찬기자)

08. 10. 12.

P.S. 독일에서도 인정받은 글솜씨가 어떤 것인지 한번 '구경'해봐야겠다. 타이틀만 놓고 보자면 개인적으로 더 관심이 가는 책은 작년에 같이 나온 책 <Lenin kam nur bis Lüdenscheid>이다. 좌파 가정에서 자란 자신의 어린시절을 다룬 자서전인 듯싶다(영화로도 만들어졌다고 한다. http://www.lenin-film.de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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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h.의 생각
    from sanghyun's me2DAY 2008-10-13 02:59 
    철학 교육이 학생의 지적 창의성과 사색을 북돋우기보다 암기 능력만 키워주는 아카데미즘에 빠져 있다는 것이다.
 
 
hahaha 2008-12-12 18:18   좋아요 0 | URL
이 영화 보고 싶네요! /ㅅ/ 언젠가 들어오려나?

로쟈 2008-12-12 23:29   좋아요 0 | URL
네, 재미있을 듯싶어요...
 

피에르 바야르의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을 읽고 있다(http://blog.aladin.co.kr/mramor/1928797). 읽어야 할 너무 많은 책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겪는 피로를 잠시 씻어주는 책이다. 비록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을 나름대로는 아주 열심히 실행하고 있지만 말이다(저자가 전제하고 있다시피 어떤 책에 대한 독서와 비독서를 구분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읽은 책이라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우리는 책을 읽어나가는 중에도 앞에서 읽은 것을 망각하기 시작하니까). 사실 비독서는 오히려 독서의 한 가지 방식이다. 그래서 비독서는 '독서의 부재', 즉 책에 대한 무관심과는 전혀 종류가 다르다. 무질의 <특성 없는 남자>에서 저자가 인용하고 있듯이 당신이 3백 50만권의 장서를 갖고 있는 도서관의 사서라면 '훌륭한 사서'가 되는 비결은 제목과 목차 외에는 책을 절대로 읽지 않는 것이다. 비독서야말로 '비정한 독서'이면서 '슬픈 독서'가 아닐까? 

내가 읽지 않은 허다한 책들의 목록에 레비스트로스의 <신화학>도 들어 있다. 네 권으로 이루어진 이 방대한 저작은 지난 세기의 가장 탁월한 구조주의 인류학자가 20년을 공들여 쓴 것이다(그는 20년 동안의 오전 시간을 순수하게 이 시리즈에 바쳤다. 그 자신의 회고에 따르면 가장 행복했던 시간들이었다). 불어본은 물론이지만 나는 <신화학>의 영어본은 갖고 있지 않다(이건 비용도 만만찮은 문제이다). '신화학'을 나의 잠정적인 마지노선으로 정해두었기 때문이다. 비독서의 마지노선. 하지만 독서와 비독서의 경계가 흐려지고 있는 만큼 나의 전선도 유명무실해지고 있다. 해서 '여생의 책'으로나 분류해놓은 책을 생각보다 일찍 집어들게 되었다(러시아어본을 구할 수 있다는 사정과 무관하지 않다).

레비스트로스에 대한 마빈 해리스의 강력한 비판(<문화유물론>)에 따르자면 <신화학>에서 레비스트로스는 그저 '생각하기에 좋은 것(good to think)'을 차려놓았는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레비스트로스가 평생에 걸쳐 애호하던 서양 클래식 음악에 가깝다. 그럼에도/그렇기 때문에 메이저리그의 야구경기나 프리미어리그의 축구경기를 보듯이 <신화학>을 읽을 수 있는 게 아닌가 싶다(혹은 아무 페이지나 펼쳐놓고 '감상'할 수 있는 게 아닌가 싶다). 그래서 '여생의 책'이고 '여생을 준비하는 책'이다. 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 같은 현실에서 잠시 여생을 꿈꾸어본다. 불과 몇 년 전 소개기사를 태곳적 기사인 양 옮겨놓는다(아래는 러시아어본 레비스트로스 선집 <가면의 길>의 표지). 

한겨레(05. 08. 08) 레비-스트로스, 그 ‘지성의 빙산’ 을 캐다

구조주의 이론을 개척한 프랑스 사상가 끌로드 레비-스트로스의 <신화학1-날것과 익힌것>(한길사)이 국내 처음으로 번역·출판됐다. 책을 번역한 임봉길 강원대 교수의 표현을 빌자면, “새로운 것을 알고자 하는 각오와 지식에 대한 호기심이 있고 인내심이 있는 독자”라면 두 팔을 벌려 반길 소식이다. 다만 “그냥 한번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으로 생각한다면 실망할 가능성이 크다.”

<…날것과 익힌것>은 모두 네 권으로 이뤄진 <신화학> 시리즈 가운데 첫번째 책이다. 출판사 쪽은 ‘꿀에서 재로’, ‘식사예절의 기원’, ‘벌거벗은 인간’ 등의 부제가 붙은 나머지 세 권을 앞으로 매년 한 권씩 차례로 번역할 계획이다(예정대로라면 올해 완간되어야 한다!).

그동안 국내에 번역 소개된 레비-스트로스의 저술로는 <슬픈 열대>(한길사) <보다 듣다 읽다>(이매진) <가까이 그리고 멀리서>(강) 등이 있다(*기사를 처음 읽었을 때도 떠올린 것이지만 <야생의 사고>가 누락됐다). 인류학적 기행문(<슬픈 열대>)이거나 각 예술장르에 대한 사색을 담고 있거나(<보다 듣다 읽다>) 사상적 편력을 돌아보는(<가까이 그리고 멀리서>) 저술들이다. 그의 지적 배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긴 하지만, 그 ‘정수’를 전하기엔 아무래도 부족함이 있다. 반면 레비-스트로스의 본격 연구서인 <친족의 기본구조>를 비롯해 <오늘날의 토테미즘> 등은 아직 번역되지 못했고, <구조인류학>은 1950년대에 잠시 출판됐다가 절판된 상태다(*오류이다. 1950년대에 나온 건 <구조인류학>의 불어본이고 국역본은 지난 1983년에 나왔었다).

그러니까 90년대 이후 한국 지성계를 휩쓸고 있는 구조주의 이론가 가운데, 유독 레비-스트로스만은 자크 라캉, 루이 알튀세르, 미셀 푸코 등과 전혀 다른 ‘대접’을 받았던 셈이다. 레비-스트로스의 난해한 이론 전개와 다양한 문화권을 넘나드는 해박한 지식이 번역을 어렵게 만든 가장 큰 이유였다(*국내에 필요한 만큼의 번역 인력이 있는지 의문이다). 그런 면에서 세계적으로도 영어판·프랑스어판만 존재했던 <신화학>이 이번에 국내에 소개된 것은 그 의미가 적지 않다. 명성은 있는데 그 실체는 분명치 않았던 레비-스트로스를 제대로 이해할 조건이 마련됐기 때문이다.

<신화학> 시리즈는 레비-스트로스가 1950년부터 시작해 1970년에 집필을 마친, 말 그대로 기념비적 저작이다. 남·북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신화 800여개를 서로 교차시키며 신화에 대한 논리·수학적 분석을 시도했다. 이를 통해 개별 신화의 감춰진 의미와 전체로서의 신화의 실체를 드러냈다. ‘현상 뒤에 숨은 보다 근본적인 실체로서의 구조’를 파악하려는 그의 방법론은 방대한 이 저술의 전체를 관통한다. 오케스트라 연주의 각 악장을 차용한 서술 방식은 ‘구조 속에서 비로소 분명해지는 개별의 실체’에 대한 레비-스트로스의 혜안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신화학 1>은 이 여름이 다 가기 전에 한번쯤 도전해볼만한 학술서다.

08. 02. 24.

P.S. 레비스트로스의 육성은 여러 인터뷰를 통해서 들어볼 수 있다(http://www.youtube.com/watch?v=u73chpnKKhQ 등). 레비스트로스의 책을 영어본이나 러시아어본으로 여러 권 갖고 있지만 그래도 또 탐나는 것의 하나는 2006년에 새로 나온 러시아아본 <신화학>이다. 차례대로 네 권의 표지이다(영어본 표지는 단색에 제목만 박혀 있어서 멋이 없다). 







이 네 권을 서가에 꽂아놓으면 이렇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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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 2008-02-24 12:36   좋아요 0 | URL
부질없는 욕망처럼 보이긴 한데, 펭귄문고같이 이쁜 책들 보면 정말 읽게될 일 없을것 같으면서도 사버리게 됩니다. 위의 책들도 정말 디자인의 승리로군요. ^^;

로쟈 2008-02-24 21:41   좋아요 0 | URL
가격도 저렴합니다. 11,000-12,000원. 제일 두꺼운 4권은 좀 비싸서 그 두배 정도.

드팀전 2008-02-25 09:14   좋아요 1 | URL
책 모양이 예쁘군요.

로쟈 2008-02-25 17:09   좋아요 0 | URL
저 정도면 소장해둘만 하지요. '장식'으로라도.^^

2008-02-25 16: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2-25 17: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2-25 18: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연세대 대학원신문에서 한 서평기사를 옮겨온다(http://www.dambee.net/news/read.php?section=MAIN&rsec=MAIN&idxno=8070). 피에르 바야르라는 한 프랑스 비평가의 책 두 권에 대한 서평으로 '어느 ‘탐정 비평가'의 새로운 책 읽기'란 타이틀이 붙어 있다. 최근에 읽은 서평들 가운데 가장 신선하며 흥미롭다. 가령, '독서와 비독서의 경계'에 관한 고민 같은 건 아주 실제적이기도 하다. 오래전에 읽은 작품에 대해 강의해야 할 때 맞부딪치는 문제이기도 하고, 또 학생들의 독서 여부를 평가해야 할 때 봉착하는 딜레마이기도 하다(어느 정도 읽은 것을 읽었다고 평가해야 하는가?). 거기에다 바야르의 '탐정 비평'도 매우 흥미롭다. 그의 책들이 대거 소개되면 좋겠다...

 

 

 

 

 

 

 

 

연세대 대학원신문(157호) 독서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편집광적이고 망상적인 독서

●피에르 바야르(Pierre Bayard)
 『책을 읽지 않고 이야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Comment parler des livres que l’on n’a pas lus?)』(Editions de Minuit, 2007)
 『누가 로저 애크로이드를 죽였는가?(Qui a tue Roger Ackroyd?)』(Minuit, 1998)

책읽기의 괴로움, 책은 꼭 다 읽어야 하는 것일까?
지식인 집단의 착각 혹은 위선 한 가지. 우리는 끊임없이 진리, 지식에 대한 자발적 선의지를 상정한다. 지식의 추구는 그 자체로 즐거운 것이고 독서는 일종의 연애이며 자신을 풍요롭게 하는 데 도움이 된다. 기타 등등. 하지만 들뢰즈가 지적하는 것처럼 “어떻게 한 초등학생이 단번에 라틴어에 숙달되게 되는지, 어떤 기호(記號)들이 (사랑이나 고백하기조차 창피한 욕구로 인해) 그의 배움에 도움을 주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다.

거꾸로 짝사랑이든 지적 스노비즘이든 이러한 개인적 동기부여를 얻지 못할 때 우리의 독서 경험은 흔히 생각보다 괴롭고 지루한 일이 되곤 한다. 더구나 (21세기 초반의 대한민국에서는 너무나 낯선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대부분의 문명사회에서 일정 수준의 고등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교양’이라는 명목으로 수백수천권의 필독서를 읽을 의무, 책을 끝까지 다 읽을 의무, 책에 대해 이야기를 하려면 먼저 끝까지 다 읽고 얘기해야할 의무 같은 구속에 짓눌려 있는 것이 사실이다.

결국 책이라는 것, 독서라는 것은 많은 사람에게 커다란 스트레스를 주는 부담스러운 일이 되며 그 중 가장 무시무시한 것은 역시 ‘읽지 않은 책’의 존재이다. 하지만 모든 책을 읽을 수 없는 것도 자명한 노릇이고 습관이 되면 곤란하겠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책을 읽지 않고 읽은 척 떠들어야할 상황도 있는 것이다. 도발적인 주제와 제목 선정으로 악명 높은 프랑스의 문학 이론가 피에르 바야르가 올해 초 펴낸 『책을 읽지 않고 이야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는 독서 행위를 둘러싼 이러한 작은 오해와 환상들을 폭로하면서 독서에 대한 새로운 개념 정의를 시도하는 책이다.

하지만 분명 이론적 작업임에도 불구하고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 이 저작은 책을 안 읽어도 된다는 이론적 면죄부로 해석될 여지가 충분히 있고 그 때문에 출간 즉시 언론의 주목을 받아 순식간에 베스트셀러로 등극한 동시에 (슈퍼마켓과 공항 서점에까지 깔렸다고 한다) 학계에서는 필요 이상의 가혹한 비난을 받아 저자를 곤혹스러운 상황에 빠뜨렸다. 다행히 독서와 교양에 대한 죄의식이나 부담감이 전무한 나라에 살고 있는 우리로서는 오히려 이러한 선정적 논란에 휩쓸리지 않고 객관적으로 이 책의 논의를 따라갈 수 있을 것이다.



독서와 비독서의 모호한 경계
저자는 책의 1부에서 ‘안 읽은 책’의 여러 양상을 검토하고 있는데 (모르는 책, 훑어본 책, 본 적은 없고 들어만 본 책, 읽었는데 잊은 책 등) 여기서는 기본적으로 ‘읽은 책’(독서)과 ‘안 읽은 책’(비독서)의 구별이 생각만큼 분명하지 않다는 점을 밝히려 하고 있다. 읽다가 만 책은 읽은 책인가 아닌가? 책의 몇 퍼센트를 읽어야 읽은 책이라고 할 수 있을까? 어려워서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책은 무엇인가? 오래 전에 읽어 다 잊어버린 책, 심지어 읽었다는 사실조차 잊은 책은 펼쳐본 적도 없지만 대충 들어 개요를 알고 있는 책과 무슨 차이가 있을까? 더구나 모든 책은 읽고나면 즉시 점진적 망각의 대상이 되게 마련이고 심지어 책을 읽는 동안에도 망각은 벌써 진행 중이게 마련인데. (보르헤스가 들려주는 푸네스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 지속적 망각이 없는 완전한 기억은 실질적으로 전적인 무의미를 만들 뿐이다).

결국 우리가 책들과 맺는 관계는 결코 연속적이고 동질적인 과정이 아니고 투명한 지식의 장소도 아니며 기억의 여러 파편이 섞여 있는 공간, 이 책에서 읽은 구절과 저 책에서 읽은 구절이 맥락에서 분리되어 유령처럼 배회하고 서로 결합하고 혼동되는 ‘변신-분리-합체’의 공간이다. 따라서 우리의 독서 경험은 대부분이 ‘철저한 완독’과 ‘아예 들어보지도 못한 책’의 중간에 있고 이 중간 지대에는 위에서 언급한 네 가지 양상으로 환원될 수 없는 수많은 단계와 가능성이 있다.

더구나 애초에 꼼꼼한 완독이 어려운 작품도 있다. 바르트의 지적처럼 “묘사 · 설명 · 고찰 · 대화를 건너뛴다고 해서 큰일이 나는 것은 아니다(아무도 우리를 감시하지 않는다) …… 누가 프루스트를, 발자크를, 『전쟁과 평화』를 한자 한자 다 읽었단 말인가?” 이렇게 독서와 비독서의 구별이 애매해진다면 거꾸로 독서 자체의 규정도 어려워지며 결국은 텍스트의 개념 역시 교란될 수밖에 없어 문학 텍스트는 유동적이고 불안정한 사물이 된다.

문학 텍스트는 유동적이고 불안정한 사물, 텍스트를 창조하라
그래서 바야르는 이러한 기억/망각의 문제를 텍스트 자체의 지위에 관한 논의로 이끈다. 아무리 텍스트를 꼼꼼히 읽더라도 우리는 일부만을 기억할 수밖에 없고 기억하는 부분들, 개요는 사람마다 다르므로 텍스트는 결코 단일한 대상이 아닌 것이 된다. 특히 문학 텍스트의 경우 그 근본적 다의성으로 인해 한 명의 독자가 그 다양한 의미망을 모두 알 수도 없고 설사 안다고 해도 그에 대해 말하는 순간에는 기껏해야 한두 개의 의미망밖에 실현시킬 수 없으므로 상황은 더 복잡해진다.

원론적으로 말해 애초에 글로 된 텍스트는 조각이나 그림과는 달리 우리가 그것에 대해 기억하지 않고 말하지 않는다면 존재한다고 할 수가 없다. 바야르가 기대고 있는 미셸 샤를르(Michel Charles)의 해석학적 구조주의의 입장을 따를 경우 글이란 언어 기호로 되어 있고 그것을 읽는 사람이 독서 행위를 통해 그것을 음성과 의미로 실현시키지 않을 경우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잉크로 더럽혀진 종이 뭉치일 뿐인 것이다.

더구나 문학 작품은 우리가 사는 세계처럼 완전한 세계가 아니어서 묘사하는 세계에 대해 일련의 단편적 정보만을 제공할 뿐이고 이 정보들은 독자의 개입 없이는 충분할 수 없다. 문학 작품에서 우리가 한 인물에 대해 접하는 것은 여러 개의 문장뿐이다. 하지만 험버트가 롤리타의 눈썹을 언급하지 않는다고 해서 롤리타가 눈썹이 없는 소녀라고 생각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렇듯 문학 텍스트란 독자의 보충 없이는 불완전한 파편들의 공간일 뿐이어서 텍스트의 문면을 넘어서는 독자의 상상과 해석은 나이브한 문학소녀들이나 저지르는 주제넘은 투사 독서가 아니라 텍스트가 텍스트로 존재하는데 필수불가결한 구성적 요소이다. 그런데 (그 자체로는 언제나 모자란) 텍스트를 보충하는 이러한 독서 작업에는 개인적 경험, 세계관, 우리가 속한 문화적 틀이 동원될 수밖에 없다보니 주관적 · 사회적 필터와 무관한 객관적 독서란 현실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한 마디로 말하면 내가 읽는 카다레의 『부서진 사월』은 당신이 읽는 『부서진 사월』과는 다른 텍스트이다. 결국 존재하는 것은 단일한 텍스트가 아니라 독자의 수만큼이나 많은 다수의 텍스트이며 텍스트의 단일성은 주어진 사실이 아니라 구축해야할 픽션이다. 더구나 책을 처음에서 끝으로 나가는 진행 방향으로 읽는 선조적 독서 말고도 다양한 다른 독서/비독서 방식이 있고 (읽다 관두기, 뒤쪽부터 보기, 훑어보기, 필요한 챕터만 찾아 읽기, 이곳저곳을 뒤지며 마구잡이로 읽기, 구입해서 책장에 꽂아두고 언젠가는 보겠다고 다짐하기 등등) 그 방식들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독서 경험을 결정하는 다음에야.

물론 피에르 바야르가 대중을 독서의 중압감에서 해방시키려고 이 책을 쓴 것은 아니다. 기본적으로 텍스트, 책, 독서 등에 대한 지나치게 이상화된 관념이 문학 이론 자체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보니 완전히 폐기할 이유는 없지만 경직된 면이 없지는 않은 개념들을 더 세련되게 다듬기 위해 개별 독자의 실제적 구체적 독서 경험을 끊임없이 참조하면서 (텍스트의 모든 굴곡에 일일이 반응하는 모범적인 모델 독자를 세운 것은 에코와 문학 구조주의의 훌륭한 업적이지만 텍스트의 모든 단어를 하나하나 다 기억하고 있고 책을 읽다가 잠깐 화장실에 가지도 않는 독자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 한계를 보여주려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묵직한 이론적 논의에도 불구하고 미디어와 대중의 호감을 얻을 수 있었던 이 책의 실용적 조언들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으리라. 책을 읽지 말라고 하는 것은 아니지만 ‘선조적 완독’이 아닌 책을 읽는 다양한 방식을 시험해보라고, 창조성과 즐거움을 잃을 정도로 부담감을 갖고 책을 읽지는 말라는 조언 말이다(바야르는 한 대담에서 ‘끝없이 읽기만 하고 논문 집필을 결코 시작하지 못하는 박사과정 학생들의 병리학적 증상’을 언급한다). 너무나 당연한 얘기지만 결국 읽지 않을 책이 있다는 것을, 읽을 시간이 없는 책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작품의 신성함을 부인하는 ‘비평적 개입주의’  
바야르는 최근에 있었던 한 대담에서 자신의 모든 저작은 아무리 사소한 이론적 결함도 트집을 잡으면서 억지스런 논리를 끝까지 밀어붙이는 편집증적 서술자를 내세운 픽션 작품이라고 밝힌 적이 있는데 (보통은 이런 개념의 극한을 탐구하는 훌륭한 기제로 사용되지만 『책을 읽지 않고…』의 경우처럼 오해를 받기도 했던) 이러한 역설적 서술자의 역할이 가장 빛을 발한 것은 그의 출세작인 『누가 로저 애크로이드를 죽였는가?』일 것이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고전 『로저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에 대한 해석서인 이 책에서 바야르는 ‘지금까지 비평가들은 문학을 해석하는데 그쳐왔다.

이제는 문학을 뜯어고칠 때이다’라는 제라르 쥬네트의 모토를 따라 작품의 자기완결성을 상정하는 수동적 비평이 아니라 작품의 신성함을 부인하는 ‘비평적 개입주의(interventionnisme critique)’를 주창한다(이러한 개입주의는 위고, 모파상, 프루스트, 뒤라스 등 대가들이 써낸 졸작의 실패 원인을 분석하고 개선을 위한 처방을 제시하는 『망친 작품을 어떻게 개선할 것인가』(Minuit, 2000)에서 가장 극단적으로 나타나며 스토리라인과 무관해 보이는 여담으로 가득한 프루스트 책에서 여담을 실제로 제거할 경우 어떤 일이 생기는지를 검토하는 『주제 이탈 - 프루스트와 여담』(Minuit, 1996)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의미의 다의성, 해석의 다양성이라는 구호가 문학 비평에서 유행한지도 이미 수십 년이 되었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것은 추상적 차원에 머물고 있고 기껏해야 작품의 작은 디테일 차원에 적용되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바야르는 이 유명한 추리소설을 빌어 작품의 플롯, 줄거리, 결말 자체도 완전히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기실 추리소설이란 원칙적으로 가장 열려 있는 서술문학 장르이다. 작품이 진행되는 동안 ‘일어난 사건’(범죄와 그 주변 상황)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여러 인물의 시각에서 제시되며 개별 인물 자체도 자신의 해석을 여러 차례 수정한다.

그러므로 추리소설은 단일한 플롯에 대한 여러 개의 버전을 내부에 갖고 있는 장르이다. 하지만 작품 마지막에 이르러 탐정이 다른 모든 해석의 선(線)들, 가능한 모든 스토리라인을 폐기하고 단 하나의 ‘옳은 추리’, 확고부동한 진실을 제시하는 관습 때문에 추리소설은 거꾸로 가장 닫힌 내러티브 양식이 된다. 바야르가 도전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바야르는 『로저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의 말미에 에르큘 포와로가 밝히는 살인의 진상과 범인의 이름이 과연 옳은지를 재검토한다. 분명 텍스트에는 포와로의 최종 설명과는 다른 식으로 해석될 수 있는 부분들이 있고 포와로의 논리에는 결함이 없지 않다. 그래서 바야르는 적지 않은 이론적 우회를 거치면서 공식적인 작품의 결말을 폐기하고 포와로가 지목한 범인이 사실은 누명을 쓴 것이며 왜 그가 억울한 처벌을 받아들이게 되었는지를 성공적으로 설명한다. (바야르가 말하는 편집증적 서술자가 실행하는 ‘망상적 독서’가 바로 이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추리소설이므로 이러한 해석은 작품 전체의 줄거리가 완전히 달라지는 결과를 낳는다. 바야르는 이 책의 서론에서 『애크로이드』 이외의 다른 추리소설도 마찬가지로 진범을 다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며 (실제로 이 책에서는 크리스티의 다른 작품 몇 개의 진범을 새롭게 폭로한다) 추리소설이 아닌 작품에 나오는 의문사도 마찬가지로 재수사를 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라퐁텐의 우화에서 숱하게 죽어나가는 주인공들(동물들)의 진정한 사인(死因)은 무엇인지, 춘희의 죽음이 진짜 자연사인지, 『제르미날』의 광산 참변의 진짜 흉수는 누구인지도 질문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히는데 바야르는 실제로 다음 저작인 『햄릿 사건 수사』(아마 지금껏 나온 바야르의 책 중 가장 이론적인 저작일 것이다)에서 셰익스피어의 고전으로까지 ‘탐정 비평(critique policier)’의 영역을 넓혀 햄릿왕의 살인범이 동생 클로디어스가 아니라는 점을 밝히고 왜 햄릿이 그토록 복수를 미루고 망설였는지를 해명한다.

물론 한 인터뷰에서 밝힌 것처럼 바야르 자신이 애크로이드의 살인범이 셰퍼드 의사가 아니고 햄릿왕의 살인범이 클로디어스가 아니라고 실제로 믿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러한 편집광적 역설과 망상적 독서가 문학과 텍스트와 독서에 대해 가져다주는 이론적 함축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니다.(이충민│프랑스 빠리 8대학 불문과 박사과정 재학중)

08. 01. 11.

P.S. 찾아보니 바야르의 책들 가운데서는 서평에서 다뤄진 책 두 권만 영역돼 있다. <책을 읽지 않고 이야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는 국내에도 곧 소개될 예정이라고 한다... 그 후 1년만에 두 권이 모두 출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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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1-11 23: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1-11 23: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1-11 23: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1-11 23: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람혼 2008-01-12 04:30   좋아요 0 | URL
두 책 바로 '찜'했습니다. 어서 주문하고픈 마음입니다.^^
여담이지만, 아직 애크로이드 사건을 읽지 않으신 분께는 살짝 '스포일러'의 기능을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잠시 들었습니다...ㅎㅎ

로쟈 2008-01-12 09:22   좋아요 0 | URL
그런 걱정은 하지 못했군요.^^ 곧 번역돼 나온다고 하니까(읽어본 분에 따르면 아주 재밌다고 합니다) 기대를 걸어봅니다...

jalousies 2008-01-13 08:25   좋아요 0 | URL
뉴욕 타임즈가 선정한 2007년 100권의 책에도 포함되었다고 합니다. (http://www.nytimes.com/2007/12/02/books/review/notable-books-2007.html?_r=1&oref=slogin) 며칠전에 그의 저서 한권이 또 발간되었더군요. 이번에는 코난 도일의 소설에 대한 책이네요. (http://www.leseditionsdeminuit.eu/f/index.php?sp=liv&livre_id=2562)

로쟈 2008-01-13 09:56   좋아요 0 | URL
네, 영어권에도 활발하게 소개되겠군요. 최근에 접한 가장 흥미로운 비평가입니다...

코르타사르 2008-01-13 14:29   좋아요 0 | URL
정말, 간단한 소개와 제목만으로도 굉장히 흥미로운 책들이 많네요.
로쟈님 말씀대로 그의 책들이 대거 소개, 아니 대거 번역되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로쟈 2008-01-13 21:43   좋아요 0 | URL
^^

2008-01-15 16: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1-16 10: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린(隣) 2008-01-18 02:44   좋아요 0 | URL
재밌군요. 여기 지도교수의 세미나 중에 이 분이랑 함께 여는 세미나가 있어 한달에 한번 뵙는 분인데, 이렇게 페이퍼에서 보니 색다르군요. 앞으로 귀를 쫑긋 세워 들어봐야겠습니다.^^

로쟈 2008-01-18 22:41   좋아요 0 | URL
예, 쫑긋 세우셨다가 이 동네에도 전해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