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에서 와다 하루키 교수의 칼럼을 옮겨놓는다. 매우 흥미로운 지적들을 담고 있다. 일본 NHK에서는 러일전쟁을 다룬 시바 료타로의 대작 소설 <언덕 위의 구름>을 방영중이라고 하는데, 그와 관련하여 '조선병합'의 문제까지 짚어보고 있다(우리 TV에서는 어떤 특집들을 준비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시바의 소설은 찾아보니 <언덕 위의 구름>(전10권, 명문각, 1991)으로 출간된 바 있지만 현재는 절판된 상태다. 때도 때인 만큼 일본을 알기 위해서라도 다시 출간되면 좋겠다. 와다 하루키 교수의 신간과 함께.  

 

경향신문(10. 02. 02) 조선병합과 일본인의 역사관   

지난해 12월 일본 공영방송 NHK는 드라마 <언덕 위의 구름> 제1부를 5주에 걸쳐 방영했다. 이는 작가 시바 료타로의 장편소설을 드라마화한 것이다. 메이지유신 100년을 맞아, 러일전쟁에 이르는 메이지시대 일본을 그린 소설 <언덕 위의 구름>은 1968년 봄 산케이신문 연재를 시작으로 이듬해 단행본으로 출판됐다. 해전의 전략·전술을 수립한 해군 형과 기병대 소속 동생, 또 같은 고향 출신인 문학가 등 세 주인공이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시바는 제1권의 맺음말에서 이 소설의 주제를 설명하고 있다. “이 긴 이야기는 일본 역사상 유례없는, 행복한 낙천주의자들의 이야기다.” 일본 국력 증강과 러시아와의 전쟁을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한 군인 2명과 문학가의 이야기는, 똑같이 ‘언덕 위의 구름’만을 바라보며 죽을 힘을 다해 언덕을 오른 고도성장기의 일본인들이 본받아야 하는 대상으로 받아들여졌다. 이 소설은 2000만부가 팔리며 초대형 베스트셀러가 됐다. 

그러나 시바는 집필 과정에서 러일전쟁에서 우세승을 거둔 일본이 전후에 언덕을 내려오기 시작하더니 결국엔 굴러 떨어지는 최후를 내다봤다. 러일전쟁 개전 전날 밤까지를 그린 제2권의 맺음말에서 작가는 전후 일본의 변화를 예리하게 꿰뚫었다. “요컨대 러시아는 패할 수밖에 없는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고, 일본은 뛰어난 계획성과 적군의 이런 사정 때문에 아슬아슬한 승리를 줍다시피한 게 러일전쟁이다. 전후 일본은 이 냉철한 상대적 관계를 국민에게 가르치려 하지 않고 국민 또한 그것을 알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전쟁을 절대화하고 일본군의 신비적인 강인함을 신앙처럼 믿게 해 민족적 치매 상태에 빠졌다.” 



러시아와의 해전에서 승리한 주인공은 연합함대의 관람식에 참석하지 않고 고향 친구의 무덤을 찾는다. 이것이 소설의 마지막 장면이다. 시바는 소설에서 포츠머스 조약의 내용뿐 아니라 조약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 일으킨 ‘히비야 방화사건’도 다루지 않았다. 마치 전후 일어난 일은 모두 괴로운 것뿐이므로 말하고 싶지 않다는 듯.  

 

<언덕 위의 구름>은 72년에 신문 연재가 끝나고 같은 해 단행본 제6권이 출간되면서 완결됐다. 시바는 ‘낙천주의자의 이야기’를 쓰려 했지만 작품을 완성했을 때의 기분은 매우 암울했다. 러일전쟁의 승리는 그로부터 40년 후의 일본 패전을 초래했다고 시바는 생각한 것이다. 96년에 세상과 이별을 고한 시바는 생전에 <언덕 위의 구름>의 드라마화를 거절했다. 그 작품이 드디어 드라마로 만들어졌다. 소설 판권을 가진 출판사와 NHK 출판부는 시바와 관련한 잡지 특집호와 책을 각각 출간했다.

뜨거운 관심이 집중되는 한편으로 드라마화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한국병합 100년을 맞는 시점에 시작해 2011년까지 방영하는 것은 의도적인 게 아니냐는 비판적 시각이 그것이다. 앞서 조선 역사에 정통한 학자 나카쓰카 아키라는 시바의 역사인식에 의문을 제기한 책을 지난해 8월에 내놨다. 그는 시바가 메이지시대는 좋았지만 쇼와시대는 좋지 않았다는 기계적인 역사관을 세웠다며 <언덕 위의 구름>이 ‘조선’을 다루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아울러 청일전쟁 때 일본군이 저지른 조선왕궁 점령과 동학농민군 몰살작전, 그리고 민비(명성황후) 살해사건 등을 무시한 채 메이지시대 일본을 얘기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실은 필자도 시바의 <언덕 위의 구름>을 의식해 일본이 러일전쟁을 어떻게 일으켰는가라는 주제로 한 책을 구상해왔다. <러일전쟁 기원과 개전> 상권을 지난해 12월18일 출간한 것은 NHK의 드라마 방영을 염두에 뒀기 때문이다. 하권은 오는 23일 나올 예정이다. 필자의 기본적인 문제의식은 러시아와 싸우는 것이 숙명적이고 국민적인 과제였다고 판단한 일본인이 전쟁을 위해 필사적으로 준비했다는 것이 역사의 진실이라 보고, 그러한 인식은 역사적으로 옳았는지를 묻는 것이다. 시바는 이렇게 말했다. “러시아제국은 이미 시베리아를 손에 넣고 연해주와 만주를 넘어 조선에까지 그 여세를 몰아가고 있었다. 일본은 절실했다. 조선을 차지한다기보다 조선을 다른 강국에 빼앗기면 일본 방위가 위태해지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러시아가 조선을 침략하려 했고 일본은 러시아에 조선을 빼앗기는 것을 허용할 수 없었다는 게 시바의 생각이다. 일본은 조선을 지배하에 놓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일본은 유신에 따라 자립의 길을 선택한 이상 타국(조선)을 괴롭혀 국가 자립을 꾀해야만 했다. 일본은 이러한 역사적 단계로서 조선을 고집하지 않으면 안된다. 만약 이를 버리면 조선뿐 아니라 일본도 함께 러시아에 먹히고 만다.”

이렇게 말한 시바는 작품에서 조선 자체에 대해선 아무것도 쓰지 않았다. “한국은 어쩔 도리가 없다. 500년 역사를 이어온 이씨 왕조의 질서는 이미 노화됐기 때문에 한국 자신의 의사와 힘으로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할 능력은 전혀 없다고 말하는 편이 낫다.” 시바는 이것만 언급했다. 또한 동학농민군과 관련해 서술한 전봉준이 이 소설에 등장하는 유일한 조선인 이름이다. 청일전쟁 전부터 러일전쟁에 이르기까지 왕의 자리를 지켰던 고종에 대해선 이름조차 나오지 않는다. 더군다나 그의 왕비이자, 왕궁 안에서 일본인에게 살해된 민비의 얘기는 찾아볼 수 없다. 시바는 러시아의 위협만을 강조한다. “러시아의 태도에는 변호해야 할 부분이 전혀 없다. 러시아는 일본을 의식적으로 죽음에 몰아넣고 있었다. 일본은 궁지에 몰린 쥐가 됐다. 사력을 다해 고양이를 무는 것밖에는 도리가 없었다.”

시바의 이런 시각은 60년대 일본인의 견해이자 실제로 러일전쟁을 경험했던 당시 일본인의 역사관이었다. 그 시대 일본인은 신문을 통해 한국에서 벌어진 일을 매일 접하고 있었다. 1면 톱기사로 한국 정치 이야기를 다루는 일이 흔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인은 한국인의 마음을 이해하지 않았다. 이 점에서 시바의 소설 세계는 당시 일본인의 인식과 궤를 같이 한다.

메이지시대 일본인 인식 해체필요
필자가 러시아 문서관에서 자료를 꼼꼼하게 살핀 결과 얻은 결론은 이렇다. 일본인은 문명개화, 부국강병의 길로 나아가기 위해 대외팽창이 필요하다고 보고 조선에 대한 야망을 품었다. 이웃 국가를 지배하고 침략하는 것은 비정상적 행동이라고 판단한 일본인은 러시아가 조선을 침략하려 하기 때문에 이를 저지하기 위해 일본이 조선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즉, 러시아 침략설로 자신들의 조선 침략을 의식적·무의식적으로 정당화한 것이다. 고종은 1880년대 중엽 청나라와 일본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러시아를 방패로 삼아 저항했다. 철저하진 못했지만 러시아는 ‘일본이 조선을 보호국으로 삼는 것을 승인하는 협정은 맺지 않는다’는 태도를 고수해, 중립국이 되겠다는 한국의 뜻을 지지했다. 러일전쟁의 기원은 이러한 3자 관계 속에 있다. 이처럼 역사를 새롭게 직시하면서 시바와 메이지시대 일본인의 역사인식을 해체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언덕 위의 구름’이 이웃 국가의 병합으로까지 치달은 심각한 과정을 누구나 확인할 수 있다.

TV 드라마 <언덕 위의 구름> 제1부는 노력한 흔적이 엿보였다. 민비 살해사건은 사진을 이용해 설명했다. 그렇다고 문제시되는 시바의 역사관이 드라마에 노출되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를 본 시청자가 어떻게 생각할지가 관건이다. NHK에서는 지난해 특별 프로그램 <일본과 조선 2000년>을 통해 고대부터 이어져온 양국 관계의 역사를 진지하게 재평가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침략과 통신사 얘기를 다룬 내용이 인상적이었다. 오는 4월부터는 새 프로그램 <한국병합 100년>에서 고종 시대부터 지금까지의 문제점을 되짚는다. 이러한 노력으로 일본 국민이 역사인식을 새롭게 고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필자의 책도 이런 변화에 일조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10. 02. 02. 

 

P.S. 칼럼을 읽고 나니 1910년의 한일병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1905년의 러일전쟁부터 알아두는 게 필수적이란 생각이 든다. 관련서들이 몇 권 출간돼 있는데, 언제 한번 도서관 나들이를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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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조선/한국의 입장에서 일본 근대의 계기로서의 서양 제국주의 비판을 어떻게 볼 것인가?
    from 혼자 사는 남자가 조용히 공부하는 곳 2010-02-03 16:49 
    로쟈 님이 옮겨 놓은 와다 하루키의 칼럼을 가지고 현재 새움에서 근동이물 세미나를 같이 하고 있는 네오풀 님과 리플을 좀 길게 나눈 리플을 옮겨 놓아 본다. 원래 리플이 붙기 시작한 곳은 지갱프(http://cafe.naver.com/think2wice/1367)이고 새움 근동이물 세미나 게시판(http://club.cyworld.com/51536042187/130358493)에 대화를 이어나갔다. 이미 뒤늦었지만 그냥 블로그에는 닉네임으로 옮겨 놓..
  2. 근대와 근대극복 사이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2-06 21:11 
    출간시에 주목하지 않았다가 뒤늦게 관심을 갖게 되는 책들이 있다. 오늘 관내 도서관에서 대출한 고사카 시로의 <근대라는 아포리아>(이학사, 2007)도 그런 책이다. 필요 때문에 일본 근대사와 근대문학에 관한 책들을 주섬주섬 모아서 읽으려고 하는데, 이 책은 동아시아의 근대에 관한 상당한 다양한 주제들, 혹은 난제들을 다루고 있어서 지난주부터 새삼 주목하게 됐다.   경향신문(07. 11. 2
 
 
푸른바다 2010-02-02 17:02   좋아요 0 | URL
고려대 한승조 교수가 조선이 러시아가 아닌 일본에 병합된 것이 축복이라는 글을 썼다가 문제가 된적이 있었는데, 그의 관점이 아마도 시바 료타로로 대표되는 일본인들의 시각과 비슷했던 것 같군요.
동아시아 근대사는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앞으로 한중일 3국의 관계도 재정립될 텐데, 기존의 낡은 시각으로는 새로운 변화들을 이해하고 선도하기 힘들지 않을까 싶습니다. 새로운 시각 속에서 남북문제와 친일파 문제도 해결해 나가야 할 듯 합니다...
가라타니 고진의 <역사와 반복>을 읽었는데, 참신한 시각이 돋보이더군요. 전적으로 그의 의견이 옳은 것은 아니겠고 앞으로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겠지만 좋은 참고는 되리라 생각합니다.

로쟈 2010-02-03 09:33   좋아요 0 | URL
참고할 책들이 몇 권 나와 있다는 건 이번에 알게 됐는데, 올해 좀더 나오면 좋겠어요...

노이에자이트 2010-02-02 21:07   좋아요 0 | URL
<언덕위의 구름>은 시중에 번역본이 있습니다.동서문화사 박재희 번역 <대망> 제 30권 째부터 시바 료타로 장편이 몇 개 있는데 <언덕 위의 구름>도 있습니다.길지만 박진감있는 좋은 작품입니다.아마 <대망>이라는 제목때문에 야마오카 소하치 것만 있는 줄 아는 사람이 많을 거에요.

로쟈 2010-02-03 09:32   좋아요 0 | URL
좋은 정보네요.^^ 한데, 그게 완역인가요? 분량이 다 들어갈 성싶지 않은데요...

노이에자이트 2010-02-03 16:18   좋아요 0 | URL
완역입니다.제1권은 청일전쟁부터 나옵니다.러일전쟁에 관해서는 전쟁 직전 제정러시아 말기의 궁중암투와 동아시아 정책이 상당히 자세합니다.전쟁 장면에서는 위에 소개한 쿠로파트킨이 참가한 전투도 자세히 나옵니다.

로쟈 2010-02-04 09:36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책이 상당히 두꺼울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