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

지젝의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창비, 2010)를 다시 손에 들고 2부를 읽고 있다. 다른 일들에 밀려 완독하지 못했었는데, 서평을 염두에 두고 마저 읽기로 마음먹어서다. 언론리뷰를 다시 찾아보니까 주로 1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1부 '멍청아, 그건 이데올로기야!'는 세계금융위기와 자본주의 분석에 할애돼 있고, 2부 '공산주의적 가설'은 말 그대로 재발명되어어야 할 공산주의의 그림을 그리고 있다. 가장 자세한 리뷰이면서 동시에 2부의 내용도 챙기고 있는 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책에 대한 관심도 다시금 부추길 겸해서.  

추락하는 여객기 안에서 어떤 자세로 몸을 웅크리느냐는 아무 의미가 없다. 예고된 재난을 외면하는 것은 파국을 막는 데 방해가 될 뿐이다. 슬라보예 지젝은 말한다. “우리는 가능성의 차원에서 우리의 미래가 끝장나게 돼 있다는 것, 파국이 우리의 운명이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러한 인정을 바탕으로 운명 자체를 변화시킬 행위를 수행하는 데 나서야 하며, 그럼으로써 하나의 새로운 가능성을 삽입해야 한다.” 이 그림은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의 원서 표지를 재구성한 것이다.   



경향신문(10. 07. 03) 지금 좌파가 해야할 일은? 

한국의 어느 인문학 독자가 1990년대 말 10년짜리 우주여행이 걸린 복권에 당첨됐다고 치자. 10년 만에 지구로 귀환한 그는 당연히 한국의 서점을 찾을 것이고, 전에 보지 못했던 거대한 괴물과 대면하게 될 것이다. 괴물의 이름은 슬로베니아 출신으로 ‘현존하는 가장 위험한 사상가’로 소개되는 슬라보예 지젝(사진)이다. 1949년에 태어나 현재 슬로베니아의 류블랴나 대학 철학교수인 그는 60여종의 책을 썼는데 국내에 소개된 것은 공저를 포함해 40종 가까이 된다. 2종을 제외하곤 모두 2000년 이후에 번역됐다. 1년에 3~4종씩 소개된 셈인데 외국 사상가 가운데 이처럼 단기간에 여러 책이 집중적으로 번역된 사례가 또 있을까 싶다. 그런데 대중적으로 인기있는 작가라고 해서 대중이 이해하기 쉬운 작가라는 뜻은 아니다. 헤겔과 라캉, 마르크스와 프로이트, 바디우와 랑시에르 등 근현대 서구 사상가들을 종횡으로 가로지르며 쏟아내는 분석과 비평이 어지럽다. 그리고 그의 대표작이라는 책들은 왜 이리도 두꺼운지…. 



지젝이 2009년에 쓴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는 ‘지젝 읽기’에 도전했다가 쓴맛을 봤던 독자들이 눈여겨볼 만한 책이다. 고맙게도(?) 분량이 짧다. 한손에 들어오는 크기의 판형에 본문이 308쪽이다. 그리고 2007~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라는 현재진행형의 현실 문제 분석에서 출발하고 있어 피부에 와닿는 감촉이 까칠하다. 마지막으로 실패한 기획으로 치부되는 공산주의에 관한 새로운 비전을 대담하게 제시하고 있어 왜 그에게 ‘가장 위험한 사상가’란 별명이 붙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그는 이 책에서 2007~2008년의 금융위기를 2001년 9·11테러라는 비극에 이은 희극으로 규정한 뒤 금융위기에 관한 미국 우파와 좌파가 만들어낸 풍경을 분석하고 꼬집었다. 우리가 익히 알듯이 금융위기가 터지자 부시·오바마 행정부는 대대적인 구제금융안을 내놓았다. 그런데 공화당 보수파 정치인들은 이것이 ‘사회주의적’이라며 비난했다. 지젝이 보기에 이런 주장은 모순이자 필연이다. 부자를 망하지 않게 돕는 것에 사회주의 딱지를 붙이고, 마치 전에는 국가의 개입이 없었던 것처럼 비난하는 것은 모순이다. 현실 자본주의에서 금융경제가 붕괴했을 때 실물경제가 타격을 받는 것이 뻔한데 이를 구분해 실물경제를 살려야 한다고 목청을 높이는 것은 기만이다. 한편 위기가 발생할 때마다 자본주의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부차적이고 우연적인 일탈 때문이라고 설명해온 지배이데올로기의 반복이라는 점에서 필연이다.

재미있는 것은 좌파 혹은 진보진영의 반응이었다. 구제금융안을 격렬히 비난하면서 결과적으로 보수파와 같은 자리에 서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오바마 정부를 지지해야 했던 민주당원과 은행 국유화를 대안으로 생각했던 진보인사들은 구제금융안을 적극 지지하고 나섰다. 지젝은 좌파가 보여준 이런 혼란이 위기의 본질과 지배이데올로기의 변주를 파악하지 못한 데에서 기인한다고 비판했다. 자본주의는 언제나 위기를 안고 있는 형식이며, 국가는 자본의 순환을 돕는 상부구조라는 점을 놓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지젝은 현재의 위기가 새로운 공간을 열어줄 것이라는 좌파의 기대를 순진하고도 근시안적인 기대로 치부한다. 그는 오히려 인종차별과 전쟁의 증가, 제3세계 빈곤의 증대, 빈부격차 심화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그가 이 대목에서 ‘현대 자유시장의 역사는 충격 속에 씌어졌다’는 나오미 클라인의 저서 <쇼크 독트린>을 인용한 것은 일리가 있어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좌파가 해야 할 일은 냉소적 현실주의에서 벗어나 자본주의 체제 자체의 결함을 끈질기게 제기하고 지배이데올로기에 맞서는 새로운 서사를 만들고 확산시키는 것이라고 지젝은 말한다. 결국 그가 하고 싶었던 말은 “공산주의가 다시금 문 앞에 와 있다”는 것이다.

그는 ‘실패의 끝지점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출발점으로 돌아가 몇번이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이 ‘새로운 공산주의’를 위한 좌파의 자세여야 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20세기에 등장했던 공산주의와의 결별을 말하는 것이다. 지젝은 우리가 의존할 ‘대타자’는 없다고 주장한다. 역사의 ‘진전’을 담당할 특권계급은 없으며 우리 스스로가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가 말하는 ‘모든 민중의 프롤레타리아화’는 어떻게 가능할까. 지젝은 지적재산권, 개발과 환경파괴, 유전공학 등을 통해 자본주의가 문화와 인간의 내면, 외면을 전면적으로 사유화하고 있다면서 이는 프롤레타리아화 과정에 다름 아니라고 말한다. “세계 자본주의에서 ‘살아 있으면서 죽은 자들’, 신자본주의적 ‘진보’의 뒤에 남겨진 모든 자들, 쓸모없고 무가치하게 된 모든 자들, 새로운 조건에 적응하지 못하는 모든 자들을 재통합하는 기획은 어떠한가?”

현직 대통령을 비판하는 글을 인터넷에 올렸다는 이유로 잡혀가는 대한민국의 현실에서 지젝이 내건 ‘새로운 공산주의의 재발명’이라는 구호 자체가 ‘불온’하게 들릴 수 있겠다. 그리고 그가 열의에 차서, 때로는 환희에 휩싸여 설명하는 공산주의의 새로운 주체와 작동방식을 애써 따라가 보지만 ‘어떻게?’와 ‘과연 그럴까?’란 질문이 떠오르기도 한다. 번역자인 김성호 서울대 영문과 교수는 이런 의문의 원인을 이 책이 가진 ‘애매함’ 때문이라고 말한다. 지젝이 재규정한 프롤레타리아가 구체적으로 누구인가, 다양한 주체들을 어떻게 묶어낼 것인가 등에 대해 애매하게 처리했다는 것이다. 한권의 책에서 구체적인 전략과 전술, 세세한 지침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오히려 급진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행동에 나서는 것이 이 ‘위험한 사상가’의 책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자세로 보인다. 그리고 빠진 ‘구체’를 채워나가는 것은 파국으로 치닫는 세계의 위기를 목도한 모든 이들의 몫일지 모른다.(김재중기자)  

10. 07. 18.  

P.S. 기사에서 역자의 말을 재인용한 '애매함'이 아마도 서평의 시발점이 될 거 같다. 과연 그런가, 다시 생각해볼 작정이다. 한편, 지젝의 신간 <종말의 시대 살아가기>도 지난주에 손에 들었는데, 이 또한 번역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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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사회주의냐 공산주의냐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8-06 16:16 
    기획회의(277호)에 실은 리뷰를 옮겨놓는다. 격주로 쓰는 서평거리로 이번에 고른 건 지젝의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창비, 2010)이다. 리뷰가 별로 없는 책을 고른다는 게 한 가지 원칙이었지만, 이번엔 충분하지 않은 책이란 원칙을 적용했다. 많이 주목받은 편이지만, 그래도 충분한 건 아니라는 게 나의 판단이다. 그렇다고, 이 리뷰가 부족한 부분을 다 채워주는 건 아니다. 나머지는 '당신'의 몫이다(개인적으로 '로쟈
 
 
미지 2010-07-19 0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애매함"을 논하실 서평, 기대됩니다...

2010-07-19 09: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7-19 09: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7-19 09: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7-19 09: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카테고리를 정리하던 중 비공개로 예전에 스크랩해놓은 글 가운데 '라캉과 라클라우'라는 게 있어서 '로쟈의 지젝'으로 옮겨놓는다. 몇년 전 글이지만 '라캉주의 좌파'에 대해 글을 쓸 일도 있어서 요긴한 참고가 된다. 필자는 스타브라카키스의 <라캉과 정치>(은행나무, 2006)의 역자이며, 주로 라클라우-스타브라카키스와 라캉-지젝의 주장을 대비해서 정리해주고 있다. '정리'라곤 하지만 내용은 다소 전문적이다.      

 

담비(07. 05. 27) 정신분석의 윤리에서 급진적 정치철학으로

스타브라카키스의 저서 『라캉과 정치』의 영어판 부제는 ‘정치적인 것을 사유하기(thinking the political)’이지만 보다 더 정확한 부제를 달면 ‘라클라우와 라캉’ 정도가 될 것이다. 즉 이 저서는 라클라우를 정신분석화하고 있으며, 탈구나 헤게모니와 같은 라클라우의 개념을 통해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정치철학화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두 가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이러한 시도만이 유일한 정신분석학의 정치철학화인가?’ ‘왜 정신분석학인가?’ 왜냐하면 푸코의 권력이론이나 들뢰즈·가따리의 정치이론과 같이 정신분석학에 근거하지 않거나 비판적인 관점을 취하는 급진적인 이론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질문을 던지는 이유는, 그것이 이 저서를 이론과 정치의 공간에서 맥락화하며 그 맥락화 속에서 보다 정확하게 이 저서가 담고 있는 이론적·실천적 함의를 이해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질문과 관련된 논쟁의 결절점을 제공해주는 (곧 도서출판b에서 번역 출간될)『Contingency, Hegemony, Universality』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의 공저자인 라클라우와 버틀러, 지젝은 이 두 가지 질문에 대해서 각기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다. 우선 ‘왜 정신분석학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버틀러와 지젝이 대립하고 있으며, 『라캉과 정치』가 제시하는 결론에 대해서는 라클라우와 지젝이 대립하고 있다. 그리고 이 논쟁들은 라클라우의 입장을 옹호하고 있는 『라캉과 정치』 안에서 다시 반향된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라캉과 정치』를 맥락화하는 데 매우 유용한 논의들을 제공해준다. 우선 스타브라카키스와 지젝의 대립을 보여주는 두 언급을 보자.

급진적 민주주의와 라캉의 윤리
스타브라카키스는 민주주의의 역설로서 ‘동유럽과 남아프리카에서의 민주주의의 성공’과 서구에서의 민주주의에 대한 침울한 실망감을 이야기하고 있는 반면, 지젝은 동유럽에서의 민주주의가 오히려 근본적인 민족주의를 자신의 이면으로서 불러냈다고 지적한다. 이 서로 다른 지적은 두 이론가의 주장 모두 정신분석학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에서 역설적이다.

스타브라카키스는 사회주의를 포함한 모든 유토피아 정치는 전체주의적 폭력으로 귀결될 위험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여기에서 그는 환상과 증상의 변증법이라는 라캉의 정신분석이론에 근거하고 있다. 라캉에 따르면 주체와 대타자는 모두 결핍되어 있기 때문에 주체는 환상을 통해서 대타자의 결핍을 메움으로써 자신의 결핍을 메우려 한다. 이를 라클라우의 용어로 번역하면 적대로 인해 존재하지 않는 사회를 사회적 환상을 통해 부인하려는 시도로 이해될 수 있다. 이때 적대의 한 담지자는 완전한 사회의 실현을 방해하는, 그렇기 때문에 제거되어야 할 방해물(증상)로 환상화된다. 이런 맥락에서 스탈린의 굴락과 나치의 아우슈비츠는 유토피아 정치의 어두운 이면이다.  



그렇다면 이 유토피아적인 환상을 통과하면서도 급진성을 유지할 수 있는 정치적 기획이란 어떤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해 스타브라카키스는 라클라우와 무페의 급진적 민주주의라고 대답하고 있다. 왜냐하면 급진적 민주주의는 사회적 적대와 그로 인한 사회적 탈구의 논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유일한 정치기획이며, 바로 이러한 측면에서 유토피아적인 환상을 가로지르는 유일한 정치기획이기 때문이다. 라캉의 윤리적 행위가 환상의 가로지르기라면, 급진적 민주주의의 토대는 바로 이 윤리학에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이때의 윤리적 행위란 유토피아적인 조화의 윤리학을 넘어선 사회적 결핍의 제도화이며, 라클라우와 무페의 용어로 하자면 민주주의 혁명으로 창출된 권력의 공백을 유지하는 것이다. 이 정치의 유일한 이름은 오로지 라클라우와 무페 식의 헤게모니 투쟁이다.

지젝은 이와 같은 논의는 정치를 자유민주주의적 틀 안에 가두어버리고 진정한 행위를 가로막는다는 점에서 라캉의 윤리적 차원을 잘못 파악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즉 스타브라카키스의 행위란 실재 앞에서의 항상 실패한 행위라는 것이다. 지젝은 행위를 ‘발생한 불가능’으로서 정의한다. 여기에서 불가능성이란 불가능성으로서의 불가능성이 아니라 ‘기존의 사회-상징적 질서의 좌표 내부’에서 불가능한 것이라는 의미이며, 지젝이 예로 들고 있는 것은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경제적 성과가 돌아가는 마이너스 성장률’과 같은 것들이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행위란 사회-상징적 질서의 재정의 과정이다. 이러한 지젝의 논의는 어떤 점에서 라클라우와 버틀러와 다른 것일까? 이 물음에 대답하기 위해 지젝이 제시하는 것은 역사성(historicity)과 비역사적인 중핵 간의 변증법이다. 이 변증법의 제시를 통해서 지젝은 라클라우와 버틀러의 입장을 모두 비판하고 있다. 여기에서 중심이 되는 개념은 바로 ‘보편성’ 개념이다.

텅 빈 보편성과 근본적 불가능성의 문제
라클라우에 따르면 보편성이란 그 내용이 선험적으로 결정될 수 없으며 항상 어떤 특정한 내용에 의해 헤게모니화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즉 이 장소는 헤게모니라는 우연성의 논리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에 계급본질주의와 같은 정치적 본질주의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 그리고 버틀러에 따르면 보편성이란 그 내용이 역사적인 배제/포함의 과정 속에서 결정되기 때문에, 특히 비역사적인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의한 성차의 구별이라는 본질주의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 즉 성차란 섹슈얼리티라는 본질적인 차원이 아니라 젠더라는 수행적 차원에서 사회적으로 구성되며, 이것이 정신분석학적 본질주의를 넘어선 성차의 정치이다.

여기에서 지젝은 어떤 구체적인 역사적 조건 속에서 이들이 말하는 보편성 그 자체가 출현했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즉 성차의 우연성이든 정치의 우연성이든 이 모두는 특정한 역사적 형식이며, 이 형식이 출현하기 위해서 원초적으로 배제되어야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물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또한 이 둘은 텅 빈 보편성을 헤게모니화하는 특수한 내용을 분석할 뿐 이 보편성을 가능하게 했던 근본적인 불가능성을 분석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비역사적이라는 것이다.

지젝은 이 두 가지 관계를 적대와 차이에 종속된 적대(또는 무페의 용어로는 대항의 논리로 번역된 적대)의 변증법으로 파악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근본적인 성적 적대란 ‘실재적으로 불가능한 것’(즉 외상적인 것)이며, 이 실재적 불가능성에 대한 각기 다른 대응을 통해 남/녀의 성차가 상징적으로 구성되고, 또는 이 불가능성의 원초적인 억압을 통해 텅 빈 보편성을 헤게모니화할 수 있는 장이 열린다는 것이다. 지젝의 논점은 정치적 적대 역시 이와 마찬가지의 논리로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며, 결국 이 둘이 누락한 문제는 바로 이 (불)가능성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구조화되는, 즉 사회적인 것을 구조화하는 전체적인 원칙이라는 것이다.

억압된 역사적 유물론의 회귀?
흥미롭게도 지젝의 행위 개념과 정치경제학과 계급투쟁이 지젝의 논의에서 등장하게 되는 것이 바로 이 지점이다. 만약 근대 민주주의가 전근대사회와는 전혀 다른 사회조직화 원리를 가지고 있다면 이것은 정초적 행위를 전제하고 있다는 점이 강조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지젝은 이 근대 민주주의(의 출현의 조건)를 자유와 평등에 대한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의 논의와 연결시키고 있으며, 이와 동일한 논리로 라클라우와 무페의 다양한 주체성에 기반한 포스트모던 정치를 후기 자본주의 논리에 의해 가능한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또한 지젝은 계급투쟁을 라클라우적 용어로 차이의 체계를 가로지르는 적대로 재개념화하며, 이러한 계급적대에 대한 분석의 누락은 포스트모던 정치가 자본주의를 탈정치화하는 징후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이제 지젝은 반자본주의적인 행위를 기존의 상징적 공간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공간, 즉 유토피아(u-topic)를 열어나가는 행위로 정의한다. 그러나 아직 지젝은 이러한 주장에 대한 정교한 이론화 작업을 내어놓고 있지 못하다. 만약 지젝의 입장에 동의한다면, 이것은 우리의 몫으로 남아 있다.(이병주 경희대 신문방송학 강사)  

10. 06. 26.  

P.S. 지젝 자신의 책뿐만 아니라 그의 정치학에 관한 책도 연이어 출간되고 있기에 마지막 문단에서 필자가 제기한 '이론적 작업'에 대한 요구는 재고의 여지가 있다. 여전히 '우리의 몫'으로 남아 있다면 또 애써 궁리해봐야겠고... 한편 지젝의 신작 <종말의 시대에 살아가기>(2010)는 어쩐 일인지 알라딘에서는 검색이 되지 않는다. 하는 수없이 아마존으로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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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27 15: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6-27 15: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미지 2010-06-27 15: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찾아보겠습니다^^

2010-06-28 21: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6-28 21: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오랜만에 지젝의 기독교론에 대한 글이 눈에 띄기에 자료로 챙겨놓는다. 주로 <죽은 신을 위하여>(길, 007)에 근거하여 '신의 죽음'에 대한 지젝의 해석을 풀이해주고 있다. 지젝 스스로는 '기독교의 도착적 핵심'이라고 불렀던 것이기도 하다.  



중대 대학원신문(10. 06. 03) 초월적 신의 죽음이라는 기독교의 ‘복음’   

자본주의는 그것을 견제할 대항체제를 결여한 채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을 달고 1989년 이후 내내 질주해왔다. 세계를 강타했던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 곳곳에서 국가의 개입을 통해 자본주의를 조정하자는 목소리가 들리지만 여전히 우리를 지배하는 것은 출구가 없다는 느낌과 무력감이다. 지젝을 비롯해 바디우, 아감벤 등의 정치철학자들은 이러한 국면에서 대안을 모색한다. 특히 벤야민이 제시한, 신적 정의를 도입하는 신적 폭력에 의한 역사의 ‘중단/중지’ 논리는 최근 들어 상당한 호응을 얻고 있다. 이러한 문제의식들은 주체의 ‘윤리’에 대해 강조하고, 나아가 세속화 이후 기각됐던 기독교 전통을 재고·재전유한다. 무신론자이자 유물론자인 지젝에게 기독교 전통은 이데올로기적 환상을 돌파하는 주체와 공동체를 구성하는 전복적인 무기다.  

도착이 지배하는 현대 사회
주체의 질문에서부터 시작하자. 주체는 이 세계에서 “당신은 무엇을 원하십니까?(Che Voui?, 즉 이 세상은 나에게 무엇을 원하는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면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질문에 어떻게 답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삶의 지향은 달라진다. 지젝은 기독교를 통해 ‘다른 답변’을 제출하는 주체를 찾아낸 듯하다. 



근대 이후 국가, 신, 도덕, 상징적 법 등 큰타자의 힘은 점점 쇠퇴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지젝은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에서 냉소주의 주체에 대해 지적한다. 사람들은 자본주의에 문제가 많다는 것을 알면서도 체제에 안착한다. 냉소주의는 큰타자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큰타자와 ‘거리를 유지함으로써’ 주체가 현실에 안주(즉 현실로 도피)하도록 하기 때문에 이데올로기적이다.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환상이 가능한 이유는 그것이 향락(Jouissence)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냉소적 주체들은 현대의 소비사회와 전체주의 사회를 가득 채우고 있다. 이들은 초자아의 ‘즐겨라!’라는 향유 명령에 종속되어 있다. 큰타자가 약화된 현실에서의 상징적 법의 기능부전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신이 존재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견해를 입증할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라캉의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이 금지된다”는 말이 진실임을 보여준다.

이러한 곤궁에 대처하기 위해 현대인들이 빠져들게 되는 유혹이 ‘도착(perversion)’이다. 쾌락의 과잉이 주는 위험을 피하기 위해 현대인들은 다시 금지를 도입한다. 사적 영역에서는 새도-매저키즘으로 각자 규제(법)를 발명하고, 웰빙 강박, 카페인 없는 커피, 다이어트와 채식, 육체 접촉 없는 섹스 등 수많은 금지를 만들어낸다. 상징적 법이 작동하지 않으므로 쾌락이 주체를 압도하는 한편, 법을 통해 기존에 얻던 향락(법의 뒷면에서 은밀한 위반을 하면서 얻게 되는 향락, 즉 ‘법의 외설적 보충’)도 사라질 위험에 처한다. 따라서 도착은 “인위적으로 법질서를 세우려는” 시도이자, “법의 위반을 성문화”하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하지만 문제는 도리어 더 커진다. 부시를 위시한 미국 기독교 근본주의 우파들이 행하는 ‘민주주의의 사도되기(이라크 전쟁)’를 떠올려 보자. 민주주의라는 큰타자를 자임하는 행위가 낳은 결과는 불합리한 전쟁이었다. 또한 지젝은 제도기독교가 ‘도착’의 유혹에 빠져 있다고 분석한다. <죽은 신을 위하여>의 부제는 ‘기독교의 도착적 핵심’이다. 지젝의 기독교 수용은 이러한 현대적 주체의 곤궁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된다. ‘기독교의 전복적 핵심’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욥에서 그리스도로 이어지는 유대교에서 기독교로의 이행과정이 보여주는 계시에 있다. 



욥에서 그리스도로
유대교에 대한 지젝의 해석은 욥에 대한 해석에서 나름의 독특성을 보인다. 성서의 <욥기>는 고통의 정당화라는 이데올로기의 기본적인 전략을 폭로하는 “역사상 최초의 이데올로기 비판”이다. 그는 욥이 신의 무능함을 대면하는 유대인의 경험을 대표한다고 보았다. 욥은 자신의 엄청난 고난에 대하여 ‘당신은 무엇을 원하십니까?’라는 히스테리 환자의 질문을 제기한다. 욥은 아마도 지젝이 헤겔에 이어 발견한 또 하나의 숭고한 히스테리 환자라고 할 수 있다. 세 친구들의 그럴듯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욥은 자신의 결백함과 자신의 고통이 지닌 무의미를 고수한다. 인간 욥의 고통과 그로부터 도출되는 신정론적 질문이 야기하는 것은 바로 신의 자기분열이다. 신은 욥의 주장이 옳다고 하면서도, 자신의 무능함을 감추기 위해 ‘코믹물의 요소가 가미된 공포물’을 연출한다. 결국 욥의 시험에서 시험대에 오른 것은 신이었다. 유대교는 이러한 신의 무능함을 숨겨진 ‘유령적 역사’이자 ‘불문율’로, 발설하지 않고 공유하였기 때문에 영토가 없는 가운데서도 종족성을 유지하는 독특성을 성취했다고 지젝은 주장한다. 그렇다면 기독교와 유대교의 차이는 무엇인가.

욥과 유대교는 신의 무능함에도 불구하고 신이 전능한 것 같은 겉모습만은 유지했다. 하지만 기독교, 특히 바울은 신이 자신의 무능을 대면했음을 드러낸다. 더 이상 은밀한 유령적 역사를 보충하지 않는 것이 기독교의 새로움이다. 지젝이 보기에 욥의 자기분열은 신의 자기분열을 예견하는 것이었다. 신의 자기분열은 그리스도의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란 외침에 잘 드러난다. 정통 기독교를 옹호한 가톨릭 추리소설가 G. K. 체스터턴은 <오소독시>에서 이 외침을 ‘신의 무신론적 외침’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그리스도는 욥의 반복이자 급진화다. 십자가에서 죽은 것은 바로 저 너머의 ‘초월적 신’이다. 하지만 십자가에서 죽은 신은 (헤겔의 ‘부정의 부정’을 거쳐) 신자들 가운데 ‘성령’으로 부활한다. 바울에게서 그리스도의 죽음은 비극이 아닌 승리의 소식이 된다. 성령공동체는 사회적 질서의 특수성을 넘어 신자들을 ‘보편적 차원’에 직접 참여케 한다. 주체들은 큰타자의 상징적 허구에 매달리기보다는 실재에 기반하여 성립되며, 타자의 유한성과 연약함에 ‘직접적으로’ 동일시하는 아가페를 성취한다. 성령공동체는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큰타자를 상정하지 않고 환상을 횡단한 ‘분석가 주체’의 공동체이며, ‘법과 위반의 악순환’이라는 교착상태를 뛰어넘어 사랑(아가페)으로 서로 교류한다.  

전복적 기독교는 가능한가 : 욥의 질문을 고수하기
지젝이 시도한 새로운 방식의 기독교 전유는 도착적 주체가 지배하는 현대사회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모색된 것이다. 지젝은 “기독교의 전복적 핵심은 오로지 유물론적 접근을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으며, 역으로 진정한 변증법적 유물론자가 되기 위해서는 기독교적 경험을 거쳐야 한다”고 말하면서, 전복적 기독교(꼭두각시)가 유물론(난쟁이)의 도움 하에 성립될 수 있다고 암시한다.

오늘날 우리는 욥처럼 각자의 고통으로 인해 현 신자유주의적 사회질서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지 못한다. 우리에겐 ‘개인 단위의 성공’의 사다리를 올라가거나, ‘루저’가 되는 두 경로 말고는 선택지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경험 한복판에서 우리는 욥의 질문을 도입해야 할 것이다. “신은(이 폐쇄된 세계는) 나에게 무엇을 원하는가(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우리의 삶을 설명해주는 많은 논리들이 있다. 성공 논리든, 자기계발서든, 명상서든, 제도종교든 이 모두는 욥의 세 친구처럼 우리가 이 세계의 현실로 도피하게 해주는 이데올로기적 설명을 제공한다. 그런데 우리가 만일 세 친구의 설명을 거부하고 욥처럼 자신의 결백성과 고통의 무의미를 고수한다면, 그리하여 인간의 분열에 머무르지 않고(분열된 채로 살아가지 않고) 신을 시험대 위에 올리고 신의 자기분열을 낳는다면, 욥의 시험이 신의 시험을 낳았듯이 현 사회체제를 시험대 위에 올릴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나를 분열시키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분열을 끝까지 추구한다면 화폐가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추상적 보편성’이 시험대에 올라 자기분열하지 않겠는가. 결국 지젝이 말하는 신의 죽음은 자본주의 체제의 중단(중지)을 암시하는 것이 아닐까.(박치현/ 사회학과 강사) 

10. 06. 20.  

P.S. 참고로, 기독교 신학자인 존 밀방크와 공저한 <그리스도의 괴물성>(2009)은 번역본이 나올 예정이다. 아담 코츠코의 <지젝괴 신학>(2008)도 이 주제에 관한 유력한 참고문헌이며, <신학과 정치적인 것>(2005)은 두툼한 학술발표회 논문집으로 크레스톤 데비이스와 존 밀방크, 슬라보예 지젝이 공동 편집자이다. 지젝이 시리즈 편집자인 SIC의 한 권으로 출간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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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게르마니아 콜로키움 일정

엊저녁에 중앙게르마니아 콜로키움의 발표가 있었다. '21세기 담론의 지형'이란 전체 주제에서 내가 맡은 건 '슬라보예 지젝의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였다. '슬라보예 지젝과 '잃어버린 대의'에 대한 옹호'라는 발표문 가운데, 마지막 절은 <민주주의는 죽었는가?>(난장, 2010)에 실린 지젝의 글 가운데 후반부를 발췌한 거였다. 따로 주석을 붙일 만한 시간이 없었지만, 그냥 읽어도 대충 지젝의 주장을 따라갈 수 있다. 아이티의 지도자 아리스티드에 대한 얘기가 많이 나오는데, 한 인터뷰에서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지젝은 바로 아리스티드를 꼽은 바 있다. 왜 그런가를 알 수 있게 해주는 대목이다. 더불어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도 읽을 수 있다. 나중에 여유가 되면 주석은 따로 붙여볼 작정이다. 발표문에서는 '지젝과 민주주의'란 제목을 달았지만, 여기서는 책의 실린 제목을 붙여둔다. '민주주의에서 신의 폭력으로'. 아이티의 혁명과 수난의 역사 혁명, 그리고 현실에 대한 개관은 177-180쪽을 참조할 수 있고, 아래는 186-196쪽의 발췌이다.

 

[이제 아이티로 가보면] 라발라스[당]의 투쟁은 원칙주의적인 영웅주의, 그리고 오늘날 할 수 있는 것의 한계를 보여주는 본보기이다. 이 투쟁은 국가권력의 틈새로 물러나 거기서 ‘저항’하지 않고 영웅적으로 국가권력을 장악했다. 자본주의적 ‘근대화’와 ‘구조조정,’ 그리고 또한 탈근대적 좌파의 모든 경향이 자신들에게 맞설 때, 그들은 자신들이 가장 불리할 상황에서 집권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필수적인 구조조정’을 법제화하기 위해 미국과 IMF에 의해 부과한 조치들에 제약당하면서도 아리스티드는 몇가지 정확하고 실용적인 조치를 취하는 정책(학교와 병원 건설, 사회기반시설 확충, 최저임금 인상 등)을 간헐적으로 터져나오는 대중들의 폭력과 결합시킴으로써 군부 패거리들에 맞섰다.  



아리스티드는 간혹 ‘페르 르 브뢴’(대중이 행하는 일종의 자기방어로서, 불타는 타이어를 목에 걸어둬 경찰의 암살자나 정보원을 죽이는 행위이다. 얄궂게도 이것은 포르토프랭스의 타이어 판매업자 이름이었는데, 나중에는 모든 대중의 폭력행사 형태를 뜻하게 됐다)을 묵과하기도 했다. 첨예한 논쟁을 불러일으킨 이 사안으로 인해 아리스티드는 센데로루미노소나 폴포트와 동급 취급을 당했다. 1991년 8월 4일 연설에서 아리스티드는 열광하는 군중에게 “언제, 그리고 어디서 폭력을 사용할지”를 기억하라고 조언했다. 자유주의자들은 즉각적으로 라발라스의 대중적인 자경단 조직(키메라Chimeres)과 악명 높은 뒤발리에 독재정권의 암살조직(통통마쿠트tonton macoutes)를 비교했다. 자유주의자들은 늘 좌파와 우파를 ‘근본주의자’라고 동급 취급하는 전략을 선호한다. [하지만] 아리스티드는 이 자경단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들의 이름[키메라]이 모든 것을 말해줍니다. 자경단에 소속된 사람들은 빈곤 속에서, 심각한 위험상태에서, 그리고 만성적인 실업상태에서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구조적 불의, 체계적인 사회폭력의 희생자들이죠... 그들이 언제나 이 동일한 사회의 폭력으로부터 이득을 얻은 사람들에 맞설 수밖에 없다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이처럼 대중이 절박하게 행사하는 폭력적인 자기방어는 발터 벤야민이 말한 ‘신의 폭력’의 실례이다. ‘선과 악 너머’에 있는 이런 행위는 윤리적인 것을 정치-종교적으로 유예시킨다. 일상의 도덕의식에 비춰보면 지금 언급하고 있는 행위는 살인이라는 ‘부도덕한’ 행위로만 보이겠지만, 그 누구에게도 이 행위를 비난할 권리는 없다. 왜냐하면 이 행위는 국가와 경제가 수년, 수세기에 걸쳐 체계적으로 자행한 폭력과 착취에 대한 응답이기 때문이다. 

일찍이 헤겔 역시 이와 동일한 사실을 지적한 바 있다. 사회(기성의 사회질서)가 어떻게 주체가 자신의 실체적 내용과 인정을 찾게 만드는 궁극의 공간이 되는지, 다시 말해서 어떻게 주관적 자유가 보편적인 윤리의 질서의 합리성 속에서만 스스로를 실현시킬 수 있는지를 강조할 때, 헤겔은 (명시적으로 표현되고 있지는 않지만) 이런 사태의 이면, 즉 이런 인정을 찾지 못한 사람들은 봉기할 권리 역시 갖는다는 사실을 암시했던 것이다. 만일 일군의 사람들에게서 체계적으로 자신들의 권리, 인격적 존엄성이 박탈당한다면, 바로 그 사실 자체에 의해 또한 사회질서에 대한 의무에서도 벗어나게 된다. 왜냐하면 그 질서는 더 이상 그들의 윤리적 실체가 아니니 때문이다.  

“국가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투쟁하거나(그것은 우리가 맞서 싸우던 적과 우리를 똑같게 만든다) 국가로부터 거리를 두는 저항을 위해 후퇴한다”라는 식의 양자택일은 거짓된 것이다. 양자는 다음과 같은 동일한 가정을 공유한다. 즉 국가형태는 우리가 알듯이 여기에 그대로 있기 때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을 장악하거나 그로부터 거리를 취하는 것뿐이다. 이때 우리는 레닌의 <국가의 혁명>이 주는 교훈을 당당하게 되풀이해야 한다. 즉, 혁명의 폭력의 목표는 국가권력을 장악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국가권력을 변형시키고 그 기능방식과 토대와의 관계 등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데 있다는 그 교훈을 말이다. 바로 여기에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핵심 구성요소가 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일종의 (필연적) 모순어법이며, 프롤레타리아트가 지배계급이 되는 국가형태도 아니다. 민중의 새로운 참여형태에 근거해 국가 자체가 근본적으로 뒤바뀔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실제로 갖게 된다. 숙청으로 사회의 전체 구조가 풍비박산 난 스탈린주의의 절정기에 새로운 헌법이 소비에트 권력의 ‘계급적’ 성격이 끝났음을 선포하고(과거에 배제됐던 계급 구성원들에게 다시 투표권이 주어졌다), 사회주의 정권들이 ‘인민민주주의’(이로써 사회주의 정권들이 ‘프롤레타리아트 독재’가 아니었다는 사실이 가장 확실하게 나타난다)라고 불렸던 사실이 꼭 위선이었던 것만은 아닌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렇듯 민주주의가 충분하지 않은 곳에서는 피대표자에 대한 대표의 구성적 과잉이 문제가 된다.

민주주의는 소외를 최소화할 것을 전제로 한다. 권력을 행사하는 자들은 그들 자신과 민중 사이에 재-현을 위한 공간이 최소화될 때에만 민중에게 책임을 질 수 있다. ‘전체주의’에서는 이 거리가 제거되고, 지도자가 민중의 의지를 직접 표현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그 결과는 물론 (경험적으로 확인되는) 민중은 훨씬 더 그들의 지도자에게서 소외된다... 물론 이와 같은 사실이 결코 민주주의를 위하는, 그리고 ‘전체주의’를 거부하는 단순한 이유를 시사해주는 것은 아니다... 권력의 궁극적인 문제는 “권력이 민주적으로 정당성을 갖느냐의 여부”가 아니라 “그 성격의 (비)민주성 여부와 무관하게, 주권권력 자체와 간련된 ‘전체주의적 과잉’의 특정한 성격(‘사회적 내용’)이 무엇이냐?”라는 점이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개념은 바로 이 수준에서 작동한다. 여기서 권력의 ‘전체주의적 과잉’은 ‘몫 없는 자들의 몫’의 편에 서 있는 것이지 위계적 사회질서의 편에 서 있는 것이 아니다. 터놓고 말하면, 그 용어의 완전히 주권적 의미에서 권력을 잡고 있는 것은 ‘몫 없는 자들’이다. 다시 말해서 ‘몫 없는 자들’이 국가적 대표의 공간 자체를 자기들 방식으로 ‘비틀고’ 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란 민주주의의 철폐가 아니라 민주주의를 사용하는 방식이다”라고 썼을 때 로자 룩셈부르크는 민주주의가 서로 다른 정치 주체에 의해 활용될 수 있는 텅 빈 틀(아돌프 히틀러 또한 어느 정도는 자유선거로 집권한 것이었다)이라는 점을 강조하려 했던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룩셈부르크는 이 텅 빈 (절차적) 틀 자체에 ‘계급적 편향’이 기입되어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이다. ‘규칙 변경,’ 즉 선거를 비롯한 여타의 국가기제들뿐만 아니라 정치공간의 논리 전체를 바꾸려는 그들의 움직임이 선거로 집권한 급진좌파를 좌파로 식별할 수 있게 해주는 표식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자신들의 기반인 헤게모니를 보장받으려면 그들은 민주적 형태의 ‘계급적 편향’을 올바르게 직관해 그에 따라야 한다.  

10. 05. 01. 

P.S. 아이티 혁명에 관한 책이 더 출간되면 좋겠다. 현재 소개된 건 <블랙 자코뱅>(필맥, 2007) 정도다. 아리스티드의 책도 더 나오면 좋겠고, 수잔 벅 모스의 <헤겔, 아이티, 보편사>도 소개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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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10-05-02 2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랙 자코뱅의 저자인 제임스에 대해서는 앨릭스 갤리니코스<트로츠키주의의 역사>에 나오니 한번 참고하십시오.제임스 외에도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로쟈 2010-05-02 23:27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덧붙여, 아리스티드가 해제를 쓴 투생의 혁명론까지 '레볼루션' 시리즈에서 나왔으면 좋을 뻔했습니다...

2024-04-04 17: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지젝의 레닌주의와 과거로부터의 교훈
이건희주의를 어떻게 넘어설 수 있는가
로베스피에르부터 마오까지의 혁명적 테러

<레닌 재장전>에 대한 서평을 옮겨놓다 보니 지난 2월 수유너머N에서 가졌던 화요토론회 자리가 생각났다. 안 그래도 토론회 사진이 홈피에 올려져 있다는 얘기를 얼마 전에 들었던 참이어서 들어가봤다(http://nomadist.org/xe/galary/13552). 이런저런 근심으로 무거운 머리를 잠시 내려놓는다(이런저런 근심은 사실 지난 겨울의 무모한 일정이 낳은 후유증이다). 발표문은 이미 두 개의 페이퍼로 정리해놓은 바 있으니 참고하시길.  



10. 04. 15. 

P.S. 레닌주의는 일단 국가권력을 쟁취하고, 이어서 일상의 혁명으로 나아가는 식이지만, 수유너머에 처음 다녀오면서 그 순서를 거꾸로 할 수도 있지 않을까란 생각을 했다. 우리의 일상을 먼저 바꾸면서(공부하는 일상으로!) 시스템을 바꾸는 쪽으로 나아가는 것. 레닌과 마오가 각각 발명한 혁명의 공식을 우리 시대에 맞게 한번 더 발명해야 하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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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4-16 22: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4-16 22:21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