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의 <예외상태>(새물결, 2009)와 <목적 없는 수단>(난장, 2009)이 최근에 출간됐지만, 리뷰기사는 아주 드물게 뜨고 있다. 이번주 대학신문의 서평란에 실린 '조르지오 아감벤의 신간을 읽는다'를 옮겨놓는다. 그 드문 서평기사 가운데 하나이다.   

대학신문(09. 11. 21) 행복한 삶의 패러다임으로 도래해야 할 정치

먹고 사는 문제에 매달리다 보니 정치에는 다들 관심이 없다. 경제를 살려야 한다는 긴급조치가 진정한 행복에 대한 사유를 무화시키면서 오히려 우리의 삶을 한갓 생존에 지나지 않는 ‘벌거벗은 생명’으로 만들고 있는 건 아닌지 의문이다. 과연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며 행복한 삶인가? 행복한 삶이란 도대체 어떻게 해야 가능한 것인가? 이탈리아 철학자 조르지오 아감벤(사진)은 우리가 더 이상 묻지 못하고 있던 이 궁극적인 삶의 문제를 정면으로 제기한다. 진정한 정치적 행위란 바로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마련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호모 사케르」 연작을 통해 혜성처럼 등장해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아감벤은 전 지구적 차원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정치적 사건들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보여주면서 정치적 사유의 기존 개념들을 전복적으로 재해석하며 새로운 정치철학의 패러다임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주목받고 있는 철학자다. 그의 독창적인 사유의 배경에는 푸코, 데리다, 낭시, 바디우, 네그리를 비롯해 하이데거, 벤야민, 슈미트, 아리스토텔레스에 이르는 방대한 사유의 교류와 깊이가 깔려 있음은 물론이다.

최근 번역·출간된 『예외상태』(2003)는 「호모 사케르」 연작 중 Ⅱ-1권에 해당한다. Ⅰ권 『주권과 벌거벗은 생명』에서는 삶을 포획하는 권력 장치가 감옥에서 수용소로 이행하면서 ‘호모 사케르’와 같은 벌거벗은 생명을 산출하는 것이 주권의 본질임을 밝혔다면, 『예외상태』에서는 법과 폭력의 관계 속에서 삶을 벌거벗은 생명으로 환원시키는 ‘예외상태’라는 장치야말로 국가주권과 법치의 통치 패러다임이라는 것을 드러낸다.  

대외전쟁이나 내전 같은 비상시국에서의 긴급조치나 계엄령처럼, 예외상태란 정상시에 작동하던 법의 효력을 정지시켜 살아있는 자들을 아노미적 공간 속에 놓으면서 동시에 법의 힘에 포획시키는 주권권력의 정치적 장치다. 법 안에 법의 공백을 놓는 예외상태의 역설적 구조에 포획된 생명은 법질서 바깥으로 배제된 채로 법의 힘 안에 포섭되는 벌거벗은 생명이다. 주권권력은 벌거벗은 생명과의 이런 배제적 포함 관계 속에서 삶을 통치하는 생명정치를 실행한다. 문제는 이런 예외상태가 더 이상 잠정적인 예외조치가 아니라는 데 있다.  

나치 독일의 전체주의 국가든 부시 정권의 민주주의 국가든 예외상태는 사실상 모든 국민국가의 정상적인 통치 패러다임으로 작동한다는 것이 아감벤의 분석이다. 예외와 정상규칙의 식별불가능성은 아노미를 창출해 법질서를 확정하려던 예외상태의 기능을 멈추게 하고, 결국 최종적인 법질서의 작동을 무화시켜 순수한 폭력의 아노미 지대로 들어서게 한다. 국가의 법이 폭력으로부터 삶을 보호한다는 것은 허구인 셈이다. 아감벤은 마치 위기를 기회로 전환시키 듯, 삶을 헐벗게 만드는 주권권력의 기계 장치(예외상태)가 작동 정지되는 곳에서 오히려 ‘진정한 예외상태’에 돌입할 수 있는 전회(轉回)의 가능성을 본다.  

진정한 예외상태란 법이 삶 자체와 구별되지 않고, 법과 삶의 배제적 포함 관계 자체가 무화되며, 거꾸로 법이 단지 삶의 사용 방식에 지나지 않게 되는 상태, 즉 법 바깥으로의 자발적인 내버려짐과 더불어 삶이 자기 고유의 잠재성을 회복하는 상태다. 이는 법을 정립하거나 보존하려는 목적에 더 이상 사용되지 않는 순수한 수단을 통해서만 도달될 수 있다. 법과 삶 사이의 새로운 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이 ‘목적 없는 수단’이란 무엇인가?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아감벤의 정치철학적 사유 전체를 압축해 놓은 짧은 논문들의 모음집 『목적 없는 수단』(1996)을 참조해야 할 것이다. 『예외상태』 보다 훨씬 이전에, 『호모 사케르』Ⅰ권(1995)과 거의 동시에 출간된 이 저서는 현재 진행형인 「호모 사케르」 연작의 주제들과 공명하면서 그 전체적인 기획을 예견할 수 있게 할 뿐 아니라 장차 도래할 공동체를 위한 아감벤의 새로운 정치패러다임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아감벤에 의하면 ‘난민’, ‘수용소’, ‘인민’, ‘경찰’, ‘스펙터클 사회’ 등은 국가-국민-영토의 삼위일체에 근거하는 국가주권의 한계를 드러내면서 도래할 정치공동체의 가능성을 여는 요소들이다. 국민국가체계에서 수용할 수 없는 무국적 비시민들의 전세계적인 양산이나 이들을 통제하기 위한 수용소의 확산은 결국 안정적인 예외상태의 실현 지대를 확장시킬 뿐이다. 특히 국가형태의 최종 단계라 할 수 있는 스펙터클 국가에서는 현실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을 불가능하게 하며 소통 가능성으로서의 언어활동 자체가 소통을 가로막는 결과를 산출하게 만든다.  

생물학적 생명과 정치적 실존, 소통 불가능한 것과 소통 가능한 것, 규칙과 예외, 난민과 시민이 더 이상 식별불가능하게 되는 어두운 지대의 확장 속에서, 아감벤은 국가주권으로 표시되는 어떤 역사적 시대의 마감을 예감하며 동시에 새로운 삶의 비국가적 정치의 가능성을 본다. ‘자연스런 몸짓’, ‘순수한 언어활동’, ‘삶-의-형태’. 이것들이야말로 진정한 정치의 영역인 ‘목적 없는 수단’의 요소들로서 회복돼야 할 것들이다.  

국가주권과 법에 의해 정해진 목적(내용, 코드, 문법)을 실현하는 수단이기 이전에, 그 어떤 목적에도 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사용’을 주장할 수 있는 순수한 상태의 몸짓과 언어활동은 ‘공통적인 것’으로서 소통가능성 그 자체이기에 장차 도래할 공동체의 기초가 된다. 무엇보다 인간은 정해진 동일성과 정체성이 없는 순수 잠재성의 존재다. ‘삶-의-형태’는 자신의 형태와 분리될 수 없는 삶으로서 벌거벗은 생명이 아닌 잠재적 역량으로서의 삶, 목적 없는 순수 수단으로서 무한한 가능성을 실험할 수 있는 삶이다. 이 삶의 역량을 완성하고 소통하는 데 도달하는 삶. 이것이 아감벤이 말하는 충족한 삶이고 행복한 삶이다.

아감벤에 따르면, 진정한 정치적 행위는 법을 정립하고 보존하려는 목적에서 벗어나 국가주권을 구성하는 폭력과 법의 연결을 해체하고 국가주권이 분리시킨 다양한 형태의 벌거벗은 생명들을 다시 묶어 ‘삶-의-형태’로 재구성하는 것이다. 도래할 정치 역시 국가의 정복이나 통제를 위한 싸움이 아니라, 인류의 잠재적인 역량을 목적 없이 사용할 수 있게 하기 위한 국가와 비국가(인류) 간의 투쟁이 된다. 그렇다면, 벌거벗은 생명으로부터 행복한 삶으로의 이행을 위해 진정한 정치적 행위가 시작돼야 할 곳은 거대한 국가의 통치 기계와 맞서고 있는 바로 우리의 용산, 거기가 아닐까.(김재희_대진대 학술연구교수)  

09. 11. 22. 

P.S. 마지막 멘트와 관련하여 '작가선언 69'에서 엮어낸 용산참사 헌정문집 <지금 내리실 역은 용산참사역입니다>(실천문학사, 2009)가 근간 예정이라는 것도 적어둔다. 표지는 아래 두 가지 시안 가운데 하나로 결졍될 예정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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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벌거벗은 생명 VS 목적 없는 수단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09-11-23 20:45 
    이번주 한겨레21에 실은 서평기사를 옮겨놓는다. 아감벤의 <목적 없는 수단>(난장, 2009)을 다루고 있다. '정치에 관한 11개의 노트'란 부제대로 책은 저자가 발전시켜나가게 되는 철학적 구상의 노트이면서 독자에겐 아감벤의 전체적인 철학적 기획을 일별하게 해주는 조감도이다. 병렬적인 구성이긴 하나 '기 드보르를 추모하며'란 헌사가 시사해주듯이 '<스펙터클의 사회에 관한 논평>에 부치는 난외주석' 같은 글이 큰
  2. "이것은 정말 거꾸로 된 세상"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09-12-06 08:00 
    '작가선언 6ㆍ9'에서 펴낸 용산참사 헌정문집이 출간됐다. <지금 내리실 역은 용산참사역입니다>(실천문학사, 2009). 근간예정이란 소식은 아감벤에 관한 페이퍼 말미에 적어둔 적이 있다. 표지는 검은색과 노란색, 두 가지 시안 가운데 노란색이 선택된 듯하다(나도 바라던 바다). 예상보다 두툼한 책이 출간됐는데, 2009년의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상처이자 사건으로 용산참사에 대한 기억과 분노가 책으로 엮어진 것을 다행
 
 
펠릭스 2009-11-23 1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왠지 노랑바탕이 더,,,

로쟈 2009-11-23 21:53   좋아요 0 | URL
저도 그렇긴 한데, 첫번째 표지가 낫겠다는 분들이 더 많은 듯해요...

펠릭스 2009-11-23 22:09   좋아요 0 | URL
예,,첫 번째는 검정 상복을 입은 여자분의 심장을 드려다 보이는 상징성있어
강한 인상을 주기도 합니다.
 

지젝의 책 <처음엔 비극으로, 다음엔 소극으로>(2009)를 알라딘에서 주문해놓고 검색해보다가 유익한 동영상을 보게 됐다. 'Democracy Now!'라는 뉴스 프로그램의 10월 15일 인터뷰인데, 육성과 함께 인터뷰 내용도 같이 나와 있어서 현 세계정세에 대한 '서구에서 가장 위험한 정치철학자'(the most dangerous political philosopher in the West)의 생각이 무엇인지 엿볼 수 있다(http://www.democracynow.org/2009/10/15/slovenian_philosopher_slavoj_zizek_on_the). 지젝은 DN!과는 작년에도 인터뷰를 가진 적이 있다.  

 

Slovenian Philosopher Slavoj Zizek on Capitalism, Healthcare, Latin American “Populism” and the “Farcical” Financial Crisis  

JUAN GONZALEZ We continue on the subject of the financial crisis with a man the National Review calls “the most dangerous political philosopher in the West.” The New York Times calls him “the Elvis of cultural theory.” Slovenian philosopher and public intellectual Slavoj Žižek has written over fifty books on philosophy, psychoanalysis, theology, history and political theory. His latest, just out from Verso, is called First as Tragedy, Then as Farce. It analyzes how the United States has moved from the tragedy of 9/11 to the farce of the financial meltdown.

Žižek’s latest offering, also excerpted in the October issue of Harper’s Magazine, opens with the words, quote, “The only truly surprising thing about the 2008 financial meltdown is how easily the idea was accepted that its happening was unpredictable.” He goes on to recall how the demonstrations against the IMF and the World Bank over the past decade all protested the ways in which banks were playing with money and warned of an impending crash. They were met with tear gas and mass arrests.

AMY GOODMAN: The message, he writes, was, quote, “loud and clear, and the police were used to literally stifle the truth.”

Well, Slavoj Žižek addressed a full house at Cooper Union here in New York City on Wednesday night and joins us now in our firehouse studio.

Welcome to Democracy Now! 



SLAVOJ ŽIŽEK: Thanks very much. It’s my pleasure.

AMY GOODMAN: It’s good to have you with us. Relate the protest to the—

SLAVOJ ŽIŽEK: You are even better than Fox News, which I usually watch. More amusing.

AMY GOODMAN: Relate the protests to the meltdown and why—how it was predictable.

SLAVOJ ŽIŽEK: No, what interests me is, for example, Paul—sorry, Paul Krugman said basically the same thing, which tells us a lot about how ideology works today. He said, what if we make a mental experiment, and all the leading bank people, managers and so on, were to know how it would end two years ago? He said, let’s not delude ourselves; there would have been no change. They would have acted in exactly the same way.

This brings me, as a psychoanalyst, into the play, because I think this makes us aware as to what extent our everyday dealing is controlled by what in psychoanalysis we call the mechanism of fetishist disavowal. “Je sais bien, mais quand même…” “I know very well, but…” You know, we can know very well the possible catastrophic consequences, but somehow you trust the market, you think things will somehow work out, and so on and so on. It’s absolutely crucial to analyze this, not only in economy, but generally. This is the focus of my work: how beliefs function today. What do we mean when we say that someone believes?

So that I don’t get lost, let me tell you a wonderful story, which is my favorite story. I quote it also in the book. You know Niels Bohr, Copenhagen, quantum physics guy. You know, once he was visited in his country house by a friend who saw above the entrance a horseshoe, you know, in Europe, the superstitious item allegedly preventing evil spirits to enter the house. And the friend, also a scientist, asked him, “But listen, do you really believe in this?” Niels Bohr said, “Of course not. I’m not an idiot. I’m a scientist.” Then the friend asked him, “But why do you have it there?” You know what Niels Borh answered? He said, “I don’t believe in it, but I have it there, horseshoe, because I was told that it works even if you don’t believe in it.”

That’s ideology today. We don’t believe in democracy—nobody. You make fun of it and so on, but somehow we act as if it works. It’s a very strange situation, because there are—some of us old enough still remember them, old days when the public face of power was dignity, belief. And privately you mocked it, you made fun, and so on, no? Now we are, I think, approaching a very strange state, where the public face of power is becoming more and more openly indecent, obscene. Look at Sarkozy in France. Look at Berlusconi in Italy, who is systematically undermining, for over five years now, the minimum of dignity of the state power. I mean, you are again and again surprised how is this possible. You know, after those sex scandals, two weeks ago, his lawyer, Berlusconi’s lawyer, made a public official statement, where he said that the claims that Berlusconi is impotent are lies and that Mr. Berlusconi is ready to prove this in court. Now, how? How—what did he mean? You know, there is a level of obscenity, but this shouldn’t deceive us. We really live in cynical times, not just in this cheap sense they don’t take themselves seriously, but in the sense that—how should I put it?—the ironic self-undermining, making fun of yourself, is in a strange way part of the game. It’s as if the system can function even if it makes fun of itself.

JUAN GONZALEZ Well, I’d like to ask you, you say you are also critical of the progressive or the left response here. You say in your article in Harper’s, “There is a real possibility that the primary victim of the ongoing crisis will not be capitalism but the left itself, insofar as its inability to offer a viable global alternative was again made visible to everyone.” Could you elaborate?

SLAVOJ ŽIŽEK: I am a radical leftist. I like to call myself, in a very conditional way, a communist even. But I think one should, as a leftist, really concede the amount of the defeat of the left in the last twenty years. That’s the sine qua non condition of a possible review. So, yes, apart from very sympathetic things suggested by people like Stiglitz, Krugman, which are basically a return to Keynesian welfare state, and apart from some interesting—but I don’t think they are the solution—economic ideas, like the basic income or so-called renta básica in Brazil, basic rent, which is a utopia of its own, I think, I sometimes, apart from this, have a strange paranoiac idea that maybe this crisis was manufactured so that people will see that even if there is a crisis, the left really doesn’t have a global answer.

I see—what worries me is two things about the left. First, it’s more and more legalistic moralization. You know, it’s kind of a pure form of protest against injustice. Then the only thing you can do is legal forums and so on. In this sense, many of the ex-leftists are getting depoliticized. They no longer ask the truly basic questions. Like even now, all the outcry was, “Oh, those bank profiteers,” and so on. I totally agree with what we just heard. But don’t you think that the truth is a little bit more complex, in the sense of—you know much more about this than me, but the way I see it is that one of the roots of the present crisis is not just greed. It’s that after the digital bubble at the beginning of our millennium, the idea was how to keep prosperity, how to keep economy alive. And it was, as far as I remember, even a little bit of a really bipartisan decision: let’s make it easier in real estate, and so on, to keep it moving. So, you know, there is a structural problem beneath all this psychological topic of the greedy bankers, which is, that’s how capitalism works, my God, which is why even concerning our beloved model—Bernard Madoff, no?—I didn’t like it how they focused on him. Wait a minute. He was just the radical version of where the system is pushing you. Now, I’m not saying—I’m not crazy—“which is why we need to nationalize all banks and introduce immediately socialist dictatorship" or what. What I’m just saying is, let’s not get rid of the problem by too easily making it into a psychological problem. You know, you can be an evil guy, but there must be very precise institutional, economic, and so on, coordinates, background, which allows you to do what you do.

The second thing, I also didn’t like the cry shared by left and right-wing populists of “help the Main Street, not the Wall Street.” Well, sorry, but those bank managers who emphasized, in capitalism there is no Main Street without Wall Street. In today’s industry, because of the competition and immense investment into new inventions and so on, without large accessibility, availability of credits, there is no prosperous Main Street. So this is a false choice. So, again, with all respect for the left and so on, I think we should avoid quick moralization, if we mean it seriously.

AMY GOODMAN: You write, “Is the bailout then really a ‘socialist’ measure? If it is, it takes a peculiar form: a ‘socialist’ measure whose primary aim is to help not the poor but the rich, not those who borrow but those who lend.”

SLAVOJ ŽIŽEK: Yeah. I mean, this is my whole thesis, that capitalism always was socialism for those who are on the top. This is the basic paradox of it, no?

AMY GOODMAN: What about healthcare?

SLAVOJ ŽIŽEK: Oh, now you touch my favorite topic. You know why? Because I think that here we see, when people—when I write on ideology, and people laugh at me—“Haha, didn’t you know this? We live in post-ideological era.” No, here you see ideology in its material force. We can—we should distinguish here two levels. On the one hand are those ridiculous right-wing paranoias, which, incidentally, I like to listen. They amuse me, you know, like that Sarah Palin idea of death panels. Some mysterious bureaucracy will decide, does your uncle live or not. That’s funny, I hope; at least for the time being, we can laugh at it. But then—

JUAN GONZALEZ Not in a big part of America, unfortunately.

SLAVOJ ŽIŽEK: Yeah, yeah, yeah. But then the real problem, where the Republican critique of healthcare plan really works is by appealing to this basic gut notion of freedom of choice. And I think this is a problem; we have to confront it. The first we should make it clear is that in order to exercise the freedom of choice—one has to repeat this again and again—an extremely—to really exercise this, an extremely complex network of social, legal regulations, even, I would say, ethical rules, which are somehow accepted, and so on, has to be—have to be here. In other words, often less choice, at least less public choice, at a certain level means more choice at a different level.

Let me return precisely to healthcare. My idea is that healthcare should be at a certain level, like water and electricity. You can also say that you usually don’t choose your water supplier, no? OK, now we can play the Republican game and say, “What a horrible terror! They are depriving us of the fundamental choice to choose the water supply.” But we somehow accept that there are some things where it is much more practical that you are able to count on them. Sorry, but I gladly refuse the big freedom to choose my water supplier, the same as for electricity, although there things can get more tricky. Why not add to this series health? Europe demonstrates it can be done effectively, not to diminish our freedom, but to leave you much more space of much more greater actual freedom, and so on.

So, you see, this is the danger of this ideology of choice, because, you know, this is, in one sense, a central category today. There is an old Marxist card, which is played again and again, of we are only offered false choices, not real choices, like Pepsi or Coke, whatever, instead of the real choices. OK, there is a truth in it. But there is also another problem of ideology of choice, that often we are bombarded by choices—you really are free to choose—without being given the proper background to make a reasonable choice. John Gray, the British cynical skeptic, whom I otherwise admire, wrote very nicely that we are today more and more forced to act as if we are free. And this causes a lot of anxiety and so on. You know, one should be very specific apropos of choices. I’m all for the freedom of choice. I would just like to see the small—those, you know, in the footnote, the small print, what are the precise conditions of choice, and so on and so on.

And so, again, although I have no illusions about what Obama can do and so on, I am still proud that already before elections I supported him, although this had no great impact here, of course. But in contrast to my very more radical leftist friends whose motto was “he’s just a nice human face on the same imperialism,” “he will even serve better the interest of capitalism,” or whatever, no, I think we see now, apropos the healthcare reform, that we are fighting the central battle here.

JUAN GONZALEZ I’d like to ask you, in terms of the somewhat pessimistic view you have of how the response to the crisis has been, there seems to be, continues to be, an entire continent that is heading in a somewhat different direction, South America and Latin America, in general.

SLAVOJ ŽIŽEK: Here comes my critical leftism.

JUAN GONZALEZ Well, I’d love hear it, in terms—because there does seem to be in many of these areas, while the rest of the world is—the gap is increasing, at least there are governments throughout Latin America that are trying to decrease the gap and take a different role.

SLAVOJ ŽIŽEK: They are trying. Are they really doing it? You know, I am—this is my skeptic. Some people already accuse me of being a covert neoconservative for what I will say now. Let’s not have any illusions. I claim that much of the attraction of the recent wave, Hugo Chavez and so on, of Latin American populism comes from this old desire of the left. Let’s be clear, many leftists today in the United States are relatively well-paid academics who fight all the dirty department career war, but they like to feel warm in their hearts. So it’s good to have as far away as possible another country where you can sympathize. “Oh, but things are really happening there.” You know, at some point in the ‘30s it was Soviet Union, Cuba, Chinese Cultural Revolution, Nicaragua. I’m afraid now that it is Venezuela a little bit. And I don’t buy the standard liberal critique, Chavez dictator and so on.

I just think Chavez started well. He did something of world historical importance. As far as I know, he was the first one of truly trying to mobilize people who were in favelas and so on, who were excluded from the public domain. He really tried to bring them into the political process. I claim if we don’t find a way to do this, we are slowly approaching a kind of a new apartheid society, where we will live in a kind of a permanent low-level civil war, where we will have some kind of irrational explosions like in France, the car burning in the Paris suburbs.

On the other hand, I’m a little bit more pessimistic as to what in the long term he will really achieve. I think he is now losing his way approaching this standard Latin American populism, where he, because of the oil wealth, is allowed to play the game of fiddle with oil, fiddle with money. I think, if you ask me, a much more interesting phenomenon is Bolivia. It’s much more authentic. They’re really being forced to invent something new. I always think that the genuinely utopian moments are not when you are doing OK and why not even better, are when you are in a deadlock. Then, in order even to survive normally, you are forced to invent something. But I thought you would say entire—so, no, I don’t see too much hope in Latin America.

But I see more hope at this moment with you in United States than with Europe. Europe is now, I think, in great decline. I had some hopes about Europe. Why? Because, to put it very simply, it still looks that we have two models now which are in competition, if I simplify the analysis very much: the Anglo-Saxon liberal market model and what we poetically call capitalism with Asian values, which means authoritarian capitalism. This is what every leftist, as I repeat it, should worry about, because let’s concede to the devil what belongs to the devil. Wasn’t it that, ’til recently—I’m sorry to tell you again, as a strange communist, you will say—there was one good argument for capitalism? After. It may have been that capitalism needed dictatorship for ten, twenty years—Chile, South Korea—but when things started to move, capitalism always engendered a push toward some kind of democracy. No longer. I claim that what is now emerging in the Far East started—it started in Singapore, this kind of so-called, again, authoritarian capitalism. I think something new is emerging: a capitalism even more dynamic—

AMY GOODMAN: Ten seconds.

SLAVOJ ŽIŽEK: —than our own, but which, even in long term, doesn’t need democracy.

AMY GOODMAN: Slavoj Žižek, Slovenian philosopher, psychoanalyst, cultural theorist. His latest book is First as Tragedy, Then as Farce

09. 10.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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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18 22: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0-18 22: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Dieyoung 2009-10-19 2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문단의 주장은 티베트에 관한 글과도 상통하는군요. 한국을 언급한 게 의미심장하군요. 아마도 많은 한국 사람들이 1~20년 안에 일어날 일이 아닌 현재 진행형의 것이라고 생각할 것 같지만..

로쟈 2009-10-20 23:35   좋아요 0 | URL
책을 오늘 받았는데, 생각 같아선 한달음에 읽고 싶어지네요. 한국어본도 곧 나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2009-10-20 23: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0-20 23: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펠릭스 2009-10-21 0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단락에서,
싱가포르에서 시작되었다는 자본주의 형태가 '유교적 자본주의'를
의미하는 것일까요?

로쟈 2009-10-21 00:19   좋아요 0 | URL
네, 권위주의적 자본주의가 좋게 말해서 유교적 자본주의죠...
 

지젝의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그린비, 2009)에 대한 고명섭 기자의 서평기사를 옮겨놓는다. 지난주에 출간된 책이지만, 분량 때문인지 한 템포 늦추어 다루고 있다. 아직 읽을 짬을 못 내고 있지만, 나도 서평을 써봐야 하는 책인지라 요긴한 참조가 된다. 사실 책의 몇몇 부분은 그간에 다른 책들, 특히 '레볼루션 시리즈'(프레시안북)의 서문을 통해서 이미 읽은 것이기도 하다. 분량은 부담스러울 테지만, 놓치면 후회할 만한 책이다. 아래 기사를 통해서도 짐작해볼 수 있지만, 순수하게 '재미'라는 척도만 가지고도 책은 베스트셀러감이다. 

한겨레(09. 09. 19) 가난한 이들의 해방은 어떻게 이룰까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는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의 최근작이다. 2008년에 나온 이 책은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는’ 지젝의 급진적 견해가 다른 어떤 책에서보다 과격하고 선명하게 드러나 있다. 머리말에서 지젝은 말한다. “이 책은 일말의 거리낌도 없이 보편적 해방을 위한 투쟁이라는 메시아적 관점에 선다.” 많은 진보주의자들이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언’ 주장을 비웃지만, 지젝이 보기에, 후쿠야마의 테제는 지금의 세계 현실에 대한 정확한 진단이다. 진보·좌파가 저마다 대안을 이야기하지만, 그 대안이란 것들이 근본적 변혁을 포기한 채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맴돌고 있기 때문이다. 지젝은 이 ‘상식의 한계선’을 돌파하려면 ‘신념의 도약’, 다시 말해 그 상식의 지평에서는 광기로밖에 보이지 않는 ‘잃어버린 대의에 대한 믿음’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지젝이 이 책에서 굳건한 연대의식을 보이는 철학자 알랭 바디우의 발언은 지젝의 관점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우리는 대중적 규율을 필요로 한다. 더 나아가 ‘아무것도 갖지 못한 자들은 오직 자신의 규율만 가지고 있다’라고 말할 수도 있다. 가난한 사람들, 아무런 재정적·군사적 수단도, 아무런 권력도 갖지 못한 사람들, 그들이 지닌 것은 규율과 단결력뿐이다.” 지젝은 이런 ‘스파르타적’ 요소야말로 변혁의 거점이라고 말한다. “스파르타의 군사적 규율 안에는 해방적인 고갱이가 있다. 그래서 트로츠키가 ‘전시공산주의’의 어려운 시기에 소비에트연합을 ‘프롤레타리아 스파르타’라고 부른 것도 이상할 게 없다.”

이런 주장에 당장 ‘전체주의·근본주의 아니냐’는 힐난이 날아들 것이 분명하다. 지젝은 이런 비난 앞에서 물러나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전체주의’라는 비난이 두려워 근본적 변혁을 회피해서는 진정한 해방의 지평을 열 수 없다는 것이 지젝의 신념이다. 그런 신념에 입각해서 그는 스스로 ‘악몽의 호러쇼’라고 부르는 이름들을 차례로 불러낸다. 진리를 앞세워 폭력과 공포를 휘둘렀던 혁명적 실험들, 곧 프랑스혁명의 자코뱅, 러시아혁명과 스탈린 체제, 마오쩌둥의 문화혁명이 여기서 적극적으로 또는 긍정적으로 참조된다. 이 실험들이 실패했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거기에는 분명히 ‘해방적 고갱이’가 있었다는 것이 지젝의 판단이다. “우리는 더러운 물과 함께 아이까지 버려서는 안 된다.”    
 
지젝은 여기서 머물지 않는다. 그는 20세기 최악의 정치적 악몽이라 할 히틀러의 나치즘까지 적극적 검토의 대상으로 세운다. 그가 보기에 나치즘은 단순히 정치적 일탈이나 변종이 아니었다. 나치즘의 핵심 요소들은 좌익 혁명운동에서 빌려온 것들이었다. 그 안에는 근본적 변혁에 대한 열망이 있었다. 지젝은 벼랑까지 사고를 밀어붙인다. “미친 주장일지 모르지만, 히틀러의 문제는 충분히 폭력적이지 않았다는 데 있다.” 부연하면, “나치즘은 충분히 극단적이지 않아서 현대 자본주의 사회공간의 근본 구조를 파괴하는 용기를 내지 않았다. 이 때문에 나치즘은 유대인이라는 창조된 외부의 적을 파괴하는 데 몰두한 것이다.” 히틀러는 과격해서 비난받는 것이 아니라 비겁해서 비난받는다.

지젝은 나치즘 문제를 숙고하기 위해 ‘나치 참여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를 끌어들인다. 많은 하이데거 연구자들이 하이데거 철학이 나치즘과 무관하다거나, 그가 한때 나치였지만 실체를 알고 거리를 두었다거나, 처음부터 나치가 아니었다거나 하는 식으로 그를 변호한다. 그러나 지젝은 하이데거는 나치였을 뿐만 아니라, 나치에 참여했을 때 올바름에 가장 가까웠다고 말한다. “하이데거가 가장 많이 틀렸을 때, 다시 말해 그가 나치에 참여했을 때, 그는 가장 진실에 근접했다.” 하이데거는 나치를 통한 근본적 변혁에 몰두했다는 것이다. 그 변혁의 내용이 좌익적 변혁과 그다지 다르지 않았음을 지젝은 일화를 들어 말한다. “1968년 독일 학생운동 대표가 하이데거를 방문했을 때, 하이데거는 자신은 학생들의 의견에 전적으로 공감하며 그들이 하고 있는 일은 비록 정치적 입장은 다르지만 1933년 프라이부르크대학 총장으로 있을 때 하이데거 자신이 하고자 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지젝은 이렇게 파시즘을 뒤집어 해석하면서, 자유주의자들이 ‘파시즘적인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들, 곧 총체성·규율·집단성 같은 것들이 애초에 파시즘과는 무관한 것들이라고 강조한다. “파시즘은 그것의 본디 창조자인 노동자들의 운동으로부터 그것을 훔쳐내서 자기화한 것이다. ‘원파시즘적’ 요소들 중 어느 것도 그 자체로 파시즘적인 것은 없다.” 일본 파시즘의 원형으로 묘사되는 ‘죽음을 초월한 사무라이 정신’도 파시즘과 관련이 없다. “우리는 이것을 파시즘적 군사주의의 일환으로 비난할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혁명적인 입장의 구성요소로 간주해야 한다.” 지도자라는 범주도 “대의를 향한 열광을 촉발하는 데” 꼭 필요한 요소라고 그는 말한다. 파시즘 운동의 특수한 접합이 이 모든 것들을 파시즘적인 것으로 비틀었을 뿐이다.  



지젝은 이런 검토 위에서 과거 혁명들이 수행했던 것들, 다시 말해, 진리의 정치, 당-국가-지도자 정치, 그리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다시 과감하게 실험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그런 정치를 수행하고 있는 사례가 있는가? 지젝은 우고 차베스(사진) 베네수엘라 대통령을 지목한다. 차베스의 정치는 여러 가지 약점과 결점이 있지만, ‘자기 몫이 없는 자들’ 곧 빈민들과의 특권적 연대라는 방식으로 민주주의 형식 안에서 일종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실험하고 있다는 것이다.(고명섭 기자) 

09. 09.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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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onta 2009-09-19 2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 프롤레타리아혁명은 요구해도 다시말해 노동계급의 규율성과 단결을 이야기해도 당과 (중앙집권적) 국가는 필요없다고 이야기하는 아나키스트들은 뭔가요?

2. 지젝이 이야기하는 급진적이고 폭력적인 변혁을 복지시스템이 비교적 잘 갖추어진 서유럽의 사람들이 원할것 같지는 않은데 말이죠. 즉 현실성이 없는 이야기라는 점. 물론 베네주엘라처럼 빈부격차가 극심해서 빈곤층이 혁명을 일으켜도 하등 이상할 게 없는 곳에서 차베스가 인기있는 곳은 이와는 다른 이야기고..차라리 제도적 틀 내에서의 급진적 변화를 요구하는 발리바르식 접근법이 서유럽이나 자본주의가 발달한 여타 국가들에서는 더 가능성있는 변혁의 방법은 아닐지.

3. 아무리 "대의"가 본질적 변혁을 위해서 필요하다고는 하나 수백만명의 생명을 앗아간 히틀러나 스탈린을 본받아야 한다는 주장은 개인의 자유나 생명 혹은 인권보다 대의가 더 중요하다는 이야기인데 이것은 마치 "주체"라는 대의를 추종하는 북한이 남한보다 낫다라는 것과 무엇이 다른 건지.

윗 서평을 읽고 드는 몇가지 궁금증을 적어봤습니다.


로쟈 2009-09-19 21:42   좋아요 0 | URL
지젝의 요지는 서문만 읽어도 알 수 있습니다. "'잃어버린 대의 옹호'의 진정한 목적은 스탈린주의나 테러를 옹호하는 게 아니라, 너무나 손쉽게 제출된 자유-민주주의적 대안을 문제삼는 것이다." 소련(북한)이 미국(남한)보다 낫다는 것이 아니라 소련(북한)의 실패를 딛고 앞으로 나가야 한다는 것이죠. 진지하게 일독해볼 시간은 우리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yoonta 2009-09-19 2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과거와 단절하는 근본적 변혁을 위해서는 소위 낭만적인 "아름다운 영혼"보다는 강철같은 규율이 필요다하는 이야기였었나요? 그러기 위해서 참조하는 것이 스탈린, 레닌이고 혹은 히틀러라는 이야기겠지요. 그리고 그것이 (구사회주의의) "실패를 딛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주장이라는 것은 이해합니다만 그 실패의 주요한 원인이 규율을 강조했을 때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권력의 집중 혹은 관료화라고하는 회피하기 힘든 문제인데 이것 때문에 결국 구사회주의가 실패했던 원인이기도 하지요.

결국 노동자나 피억압계층/계급의 자율성을 최대한 살리면서 동시에 그로부터 발생하는 권력이 당이나 관료시스템에 돌아가지 않게끔 하는 장치가 전제되었을 때에만 "규율"이나 "대의"가 근본적 변혁을 위해 올바르게 작동될 것으로 개인적으로 생각하는데요. 이와 관련된 (권력의 집중과정에서 발생하는 혁명의 아포리아와도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이 지젝에게는 있는지요? 만약 없다면 이것이 없이 어떻게 실패를 반복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수 있다는 것인지 저로서는 회의적입니다만.

로쟈 2009-09-19 22:34   좋아요 0 | URL
yoonta님은 성공한다는 확실한 보장이 있을 경우에만 판돈을 걸겠다는 입장이신 거 같습니다.^^; 지젝의 입장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과감히 실패함으로써 앞으로 나갈 수 있다는 것이구요. 바디우를 인용하면, "탈존재보다는 재앙이 낫다"는 게 이 '전체주의' 철학자들의 생각입니다...

yoonta 2009-09-20 0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성공한다는 보장이 있을 경우에만 판돈을 건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과거의 실패를 거울삼아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고민해 보아야 할 지점이라는 것이 바로 그 지점이라는 것이지요. 실패를 두려워해서 하지 말자는게 아니라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반드시 고민해봐야 할 지점이라는 겁니다. 자본주의와 단절하기 위해서는 근본적 변혁이 필요하다는 점에서는 동의하지만 그 방법에 있어서 의견을 달리 한다는 것이지요.

바디우의 플라톤주의나 지젝의 헤겔주의 혹은 라캉주의는 저도 상당부분 동의하고 긍정합니다만 현실에서의 정치적 운동이라는 것은 이런 원칙적 대의 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전략과 전술없이는 그냥 구호에 그칠 뿐이기 때문이지요. 아니면 극단적 테러가 되거나..얼마전 본 <바더마인오프>라는 독일적군파 이야기를 그린 영화를 보면서 다시한번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아무리 "대의"가 올바르다고 해도 그것을 추구하기 위한 과정을 다수 대중이 수용하지 못한다면 소수의 테러가 될 뿐이다라는 것을 말이지요. 알카에다와 같은 회교근본주의자들의 문제점도 거기에 있는 것이겠고요. 똑같은 정치적 폭력이더라도 다수 대중의 동의를 얻어서 진행된 프랑스 혁명때의 자코뱅파라던지 러시아 혁명에서의 볼세비키들이 그들과 다른 점은 대중들의 동의를 기반으로 그것을 시행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는 것이라고 본다면 문제는 어떻게 그들에게 대의를 위한 동의를 획득할 것인가가 되어야 겠는데요. 그러기 위해서는 다시 반복하지만 구체적힌 현실과의 접점이 요구된다는 겁니다. 구체적인 정치적이고 현실적인 조건에 기반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한국사회에서 지젝식의 레닌주의적인 사회주의 혁명을 하자고 외치면 누가 거들떠나 보겠습니까? 아무리 그것이 "대의"로서는 원칙적으로 올바르다고 하더라도요. 오늘날 소위 좌파진영에서 정치운동을 하는 사람들의 고민들이 대부분 이런 지점에 있는 것이겟지요. 원칙이나 대의가 어떤 것인지는 알지만 현실을 위해서는 타협하지 않을수 없다는 현실. 그래서 정치는 때로는 정치적 반대파와 타협하기도 해야하는 기술이라고도 이야기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런 현실적인 문제점들을 다 거세하고 지젝은 때로는 뭐랄까 너무 나이브한 원론만 이야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지젝의 비판이 포스트주의에 대한 비판은 될수 있을지 모르지만 예컨대 '진보신당'에 대한 비판은 될수 없다고 그래서 저는 생각한 답니다.

2009-09-20 09: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펠릭스 2009-09-20 16: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젝은 첨병-담론(제가 만든 말)을 이끌어 내려 합니다.
이즘의 원형을 내재한 역사의 건에서 재사용(reuse)이 아닌
순도 높은 재활용(recycle)의 가치를 찾자고 합니다.

그것은 '신념의 도약'이라는. 즉 역사적 '상식의 한계선'을
돌파함인데, 역사의 인큐베이터 밖에서 쉽지 않는 접점(실전부대)을 찾아야 합니다.

예로, 우울증 환자을 위해 항우울증치료제가 시판됩니다.
뇌의 행복물질인 '세로토닌(serotonin)' 재활용(recycle) 유도 보호제입니다.
부작용은 적지만 극심한 우울증 환자에게는 3주이상 투약이 필요합니다.

또한 우리 몸에 수분이 부족하면 배설물에서 물을 재흡수합니다.
소장의 경우는 80% 물을, 대장은 물 이외를 재흡수 하지 않습니다.
실패한 역사는 대장안으로, 그 안에서 생명수를 재흡수하자 합니다.

로쟈 2009-09-20 23:43   좋아요 0 | URL
재미있는 비유십니다.^^

펠릭스 2009-09-27 22:32   좋아요 0 | URL
레닌의 아버지는 장학사이자 대지주였군요.
빈권층과 특권층의 연대, 즉 지젝은 NGO운동도 한계가 있다는 주장일까요?
 
'프랑켄슈타인' 다시 읽기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에 대한 글을 옮겨놓고 나니까 지젝의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그린비, 2009)에서 <프랑켄슈타인>을 다룬 부분이 생각나 마저 읽었다. 책의 2장 '이데올로기의 가족신화'의 한 절이 <프랑켄슈타인>을 다루고 있는데, '프랑켄슈타인의 역사와 가족'이 그 타이틀이다. 원문은 'History and family in Frankenstein', 그러니까 '<프랑켄슈타인>에 나타난 역사와 가족' 정도로 이해하는 게 좋겠다. 질 메네갈도가 편집한 논문모음집 <프랑켄슈타인>(이룸, 2004)에 더 집어넣고 싶을 정도로 역시나 명쾌하고 자극적이다.  

  

지젝은 <프랑켄슈타인>에 대한 표준적인 맑스주의적 비판(비평)을 재검토한다. 그 비판의 요지는 이 작품이 "진정한 역사적 지시대상을 지우기(혹은 억압하기) 위해 불투명한 가족-섹슈얼리티 네트워크에 초점을 맞춘다는 것이다. 즉, 역사는 가족 드라마로 외현화되고, 보다 큰 사회-역사적 경향(혁명적 테러의 '괴물성'으로부터 과학기술 혁명의 충격을 향한 경향)은 빅터 프랑켄슈타인이 아버지, 약혼자, 괴물 자식과 겪는 갈등으로 왜곡되면서 반영/상연된다는 것이다."(115-6쪽) 

그러니까 이 작품의 진짜 지시대상은 '역사'이지만, 저자는 그것을 '가족 드라마'로 바꿔치기했다는 것. 이때 역사는 프랑스 혁명 이후의 흐름을 가리키는 "보다 큰 사회-역사적 경향"이다. 이 경향의 내용은 원문이 "larger socio-historical trends(from the 'monstrosity' of revolutionary terror to the impact of scientific and technological revolution)"이므로 "'혁명적 테러의 '괴물성'으로부터 과학기술 혁명의 충격을 향한 경향'이라고 옮긴 건 부정확하다. 여기서 'from A to B'는 '-로부터 -를 향한'이 아니라 '-에서 -까지'라는 종류를 가리키기 때문이다('trends'가 복수형이니까). 고쳐 말하면, "혁명적 테러라는 '괴물'에서 과학기술 혁명이 가져온 충격까지 당대의 보다 넓은 사회역사적 흐름"이 <프랑켄슈타인>의 원 지시대상이다. 

'표준적인 비판'이란 단서에서 알 수 있지만, <프랑켄슈타인>이 프랑스 혁명이 낳은 혼란(괴물로서의 무질서)을 염두에 둔 작품이라는 점은 이미 잘 알려진 것이다(프랑스혁명에 대한 에드먼드 버크의 주된 시각이기도 하다). 한데, 지젝의 독해에서 내가 배운 것은 이것을 콜리지(코울리지)의 상상력론과 연관지어 설명하고 있는 점. 콜리지는 상상(imagination)과 공상(fancy)을 구분하는데, 그에 따르면 "상상력은 유기적이고 조화로운 신체를 발생시키는 창조적 힘인 반면에 공상은 서로 어긋나는 파편들의 기계적 조합을 표현한다." 따라서 "공상의 생산물은 아무런 조화로운 통일성도 없는 괴물 같은 조합"이며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이야말로 이러한 공상의 산물이다. 그리고 이 '괴물 이야기'로서의 <프랑켄슈타인>에는 괴물성이란 주제가 다양한 차원에서 관통하고 있다.   

(1)첫번째 차원에서 빅터에 의해 생명을 부여받은 괴물은 조화로운 유기체가 아니라 부분 기관들의 기계적 구성물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빅터는 시체 조각들을 짜깁한 후 전기충격을 가해서 새로운 생명체를 만들어낸다.    

(2)다음 차원은 소설의 사회적 배경으로, 사회의 괴물적 해체는 사회적 불안과 혁명으로 나타난다. 괴물성의 출현과 함께 조화로운 전통사회는 산업화된 사회로 바뀐다. 그 속에서 사람들은 이기적 인간관계에 따라 기계적으로 상호작용하는 개인들로 해체되어, 보다 큰 단위의 '전체'를 느끼지 못할뿐더러 가끔씩 폭력적 반란에도 참여한다. 근대 사회는 압제와 무정부 상태를 왔다갔다 한다. 근대 사회에서 일어날 수 있는 유일한 통일성은 난폭한 권력에 의해 강제된 인공적인 통일성이다. 

즉 사회적 차원에서 근대 사회는 '공상의 공동체'라고 말할 수 있다. 한편 이 대목에서 '괴물성의 출현과 함께'라고 옮긴 건 착오인데, 'with the advent of modernity'를 잘못 본 것이다. '근대의 도래와 함께"라고 교정되어야 한다.   

(3)마지막 층위로, 이질적인 파편들과 서사 양식들과 성분들로 구성된, 흉물스런 괴물처럼 비일관적인 소설 자체가 있다.  

즉, <프랑켄슈타인>이란 소설 자체가 이런저런 파편들을 짜깁한 듯한 '공상'의 산물이라는 것. 사실 작품을 읽은 독자라면 <프랑켄슈타인>이 문제적인 작품이긴 하지만 걸작이라고 하기엔 뭔가 부족하다는 걸 느낄 것이다. 어느 연구서에선가는 "영문학사에서 가장 문제적인 B급 소설"이라고 평해놓았다.  

지젝은 이 이 세 가지에다가, 소설에 의해 환기된 해석의 차원을 네번째 괴물성의 차원으로 추가한다. "괴물이 의미하는 것, 괴물이 상징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사회적 혁명의 괴물성, 아버지에 항거하는 아들의 괴물성, 근대 산업의 괴물성, 비성애적 재생산의 괴물성, 과학 지식의 괴물성을 의미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조화로운 전체를 이루지 않고 단지 나란히 병치되는 복수의 의미를 갖게 된다. 즉, 괴물성의 해석은 해석의 괴물성(공상)으로 귀결된다."(117쪽) 다시 말해서, 이 작품에 대한 유기적이면서 정합적인 해석은 가능하지 않다는 것.  

다시 반복하자면, "<프랑켄슈타인>은 자신의 진정한 초점을 다루지 않았다. 대신 그것을 탈정치화된 가족 드라마 내지 가족 신화로 표현했다." 이미 에드먼드 버크 같은 당대의 보수주의 논객은 프랑스의 혁명 체제를 '집단적인 부친 살해 괴물'이라고 경고했고, 이러한 "혁명의 여파 속에서 메리 셸리는 혁명과 아버지 살해의 상징적 등가를 홈드라마로 축소시켰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러한 '축소'의 불가피성이다. "하지만 <프랑켄슈타인>은 왜 자신의 진정한 역사적 지시대상을 모호하게 표현해야 했을까?" 

지젝의 대답은 이렇다: "왜냐하면 그 진정한 초점/주제(프랑스 혁명)와의 관련성 자체가 참으로 모호하고 모순적이기 때문에, 가족 신화의 형식 자체가 이런 모순을 중화시켜서 한 가지 이야기 속에 양립 불가능한 관점들을 동시에 환기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프랑켄슈타인>은 레비-스트로스적 의미에서의 신화, 즉 실재적 모순의 상상적 해소이다."(119-20쪽) 더불어, 이러한 해소는 <프랑켄슈타인>의 다양한 변주(영화화)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보리스 카를로프(칼로프)가 괴물을 연기한 가장 유명한 프랑켄슈타인 영화인 제임스 웨일 감독(번역엔 '제임스 웨일즈'로 오기됐다)의 <프랑켄슈타인>(1931)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이지만, 영화화된 <프랑켄슈타인>은 대개 원작의 가장 중요한 특징을 제거했다. '주체화된 괴물'이란 특징이다. 혁명을 괴물로 상징화하는 것, 곧 '혁명의 괴물성'이란 모티브는 전형적으로 보수주의적인 요소이지만,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은 그런 보수주의로만 규정되지 않는다. 이 작품에선 괴물이 직접 말을 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관점에서, 자신의 목소리로. "이것은 표현의 자유를 극단적으로 밀고 나간 자유주의적 태도이다."  

자신의 창조주이자 아버지인 프랑켄슈타인에게 괴물은 무어라 말하는가? "괴물은 우리에게 자신의 반역과 살인은 타고난 것이 아니라 학습된 것이라고 말한다. 버크처럼 괴물을 악의 화신으로 보는 것과 달리 이 피조물은 프랑켄슈타인에게 "나는 자비롭고 선하게 태어났습니다. 불행이 나를 악마로 만들었습니다"라고 말한다. 놀랍게도 괴물은 철학자의 말로 항변한다. 그는 전통적인 공화주의자의 논리로 자신의 행위를 변호한다."(122쪽) 

지젝은 괴물의 이러한 형상화를 작가가 어머니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에게 받은 영향일 것이라고 지적한다. 울스턴크래프트는 <프랑스 혁명의 기원과 과정에 대한 역사적이고 도덕적인 관점>(1794)이란 저작에서 버크 류의 보수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바대로 모반(혁명)의 괴물성에는 동의하지만 동시에 이 괴물들이 사회적 산물이라고 주장했다. 즉 그들은 구체제의 압제와 실정과 독재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메리 셸리가 직면했던 모순은 '압제와 무정부' 사이의 모순이었다. "질식할 것처럼 압제적인 집과 그걸 파괴하려는 시도의 살인적 결과 사이의 모순". 지젝의 결론은 이렇다. "그녀는 이 모순을 해소할 수도 없었으며 정면으로 응시할 의지도 없었다. 그녀는 오직 그것을 가족 신화로 이야기할 수 있을 뿐이다." 

09. 09.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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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14 12: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9-14 13: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번주 신간 가운데 단연 눈에 띄는 책은 지젝의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그린비, 2009)이다. 이건 이 서재를 자주 드나드는 분들에게는 새삼스러운 일도 아닐 것이다. 나름대로는 '지젝 전도사' 비슷한 일을 그간에 해왔기 때문이다. 두께가 만만찮지만 지젝 '전문' 번역자의 솜씨인 만큼 읽기는 수월하지 않을까 싶다. 반가운 마음으로 리뷰기사도 챙겨놓는다.  

 

경향신문(09. 09. 05) 자본주의 시대, 다시 혁명을 말하다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적 승리를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징후는 무엇일까. 그것은 최근 20~30년 동안 자본주의라는 용어 자체가 ‘실질적’으로 흔적을 감췄다는 사실이다. 몇몇 고루한 마르크스주의자를 빼곤 자본주의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이제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은 반(反)세계화 혹은 반신자유주의라는 용어에 바통을 넘겨준 형국이다. 반세계화는 제국주의를 겨눈다. 노동착취 같은 자본주의 매커니즘을 타도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오히려 ‘제국 미국’을 적으로 삼는 경향이 농후하다.  



저자는 이러한 반세계화를 자본주의의 교묘한 기획으로 파악한다. 자본주의가 자신에게 돌아올 칼끝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전략의 일환이라는 것이다. 심지어 좌파로 분류되는 철학자 상당수도 자본주의 전략의 유혹에 굴복하고 있다는 사실이 저자의 해부로 드러난다. 자크 랑시에르와 안토니오 네그리도 여기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래서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 개념을 비웃는 것은 쉽다. 하지만 오늘날의 지배적인 경향은 ‘후쿠야마적’이다”라는 지젝의 주장에 설득력을 부여한다. 자유민주주의적 자본주의는 유토피아 논의를 압도하는 듯 보인다. 민주주의와 평등에 대한 논의가 자본주의라는 블랙홀에 빨려들어가는 현실에서 지젝은 ‘혁명’이라는 카드를 꺼낸다. 혁명은 우리가 잃어버린 ‘대의(Cause)’ 가운데 하나라는 것이다.

책은 자본주의의 실질적 비판이 여전히 필요하며 혁명의 중요성 또한 시대착오적인 것이 아니라고 강변한다. 저자는 ‘디카페인화된 혁명’ 즉 ‘혁명 없는 혁명’을 제시하는 어설픈 좌파나 자유주의자의 논리적 무기력함을 예리하게 간파한다. 지젝은 마르크스 사상과 로베스피에르의 ‘폭력적 혁명’을 옹호한다. 폭력은 유혈 충돌이나 물리적 테러 같은 의미가 아니다. 그가 말하는 폭력은 단번에 비민주적인 것을 제압할 수 있는 방식에 다름아니다. 바스티유 감옥으로 돌진하듯이 말이다.

자유주의적 관용보다 적대감이 중요하다는 주장도 그런 맥락에서 읽힌다. 책은 자유민주주의의 대안에 대한 모색이다. 동시에 자본주의 체제 아래서 자신이 서있는 자리, 즉 계급적 시선을 거두지 말라는 주문이기도 하다.(서영찬기자) 

09. 09.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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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2009-09-05 1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사의 블랙홀에서 흥미(과거픽션)을 풀어내는 소설가처럼
자본주의라는 블랙홀에서 민주주의와 평등을 구출하려는 "지젝"의 "혁명"
(대의중 하나,비민주주의 단번 제압용)은 미래픽션(유토피아의 논의) 이라
생각됩니다.

로쟈 2009-09-05 09:16   좋아요 0 | URL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라, 는 게 혁명의 요구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