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 독서평설>(7월호)에 실은 갑론을박 꼭지를 뒤늦게 옮겨놓는다. 배송과정에서 책이 유실되는 바람에 지면의 글은 확인하지 못했다. 최종 교정본을 올려놓는 것이라 실제 지면의 연재와는 약간 다를 수도 있다.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을 고른 건 나름대로 '납량특집'이라고 생각해서였다. 

고교 독서평설(09년 7월호) 공포 소설의 고전, <프랑켄슈타인> 다시 읽기 

괴물이 아닌 창조자, 프랑켄슈타인
‘프랑켄슈타인’이란 말을 들으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일단 프랑켄슈타인을 소재로 한 대중 영화들 덕분에 괴물의 형상을 떠올리기 쉽다. 시체 조각들을 긁어모아 거기에 생명력을 불어넣어 만든 인조인간 말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영화사상 가장 널리 알려진 괴물’의 이름이 프랑켄슈타인이라고 오인하곤 한다. 그런데 메리 셸리(1797~1851)의 원작 『프랑켄슈타인』(1818, 원제는 ‘프랑켄슈타인 또는 현대판 프로메테우스’)에서 ‘프랑켄슈타인’은 그 괴물이 아니라 창조자의 이름이다.  

하지만 문화사적 기억 속에서 이 ‘창조자’와 그가 이름을 붙여 주지 않은 ‘창조물’은 서로 분리되지 않고 마치 하나인 것처럼 붙어 다닌다. 그래서 우리는 이 작품을 ‘프랑켄슈타인이 만들어 낸 괴물’에 관한 이야기인 동시에, ‘프랑켄슈타인이라는 괴물’에 관한 이야기로도 읽게 되는 것이다. 이 두 이야기가 함축하는 바는 무엇일까? 먼저 저자인 메리 셸리의 삶과 이 작품의 탄생 배경에 대해서 조금 알아 두는 게 좋겠다. 『프랑켄슈타인』의 창조자답게 결코 평범하진 않은 이야기다.   



『프랑켄슈타인』의 탄생
메리 셸리는 1797년 영국의 저명한 철학자 윌리엄 고드윈(1756~1836)과 여권주의자 메리 울스턴크래프트(1759~1797)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부모는 모두 당대의 유명 인사였다. 어머니 울스턴크래프트는 여성에게도 남성과 동등한 사회적 기회가 부여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여성의 권리 옹호』(1792)의 저자였다. 이 책은 ‘근대 최초의 페미니즘 저작’이라고 찬사를 받는 고전이다. 그녀는 공화국 시민이 되는 것이 좋은 엄마가 되는 것보다 중요하다고 여겼고, 결혼은 합법적인 매춘에 불과하다는 독설을 퍼붓기도 했다. 하지만 태어날 아이를 위해서 1797년에 고드윈과 결혼했으며, 5개월 뒤에는 딸 메리를 낳았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녀는 산후 합병증으로 곧 세상을 떠났고, 그 바람에 메리는 아버지와 계모 슬하에서 성장하게 되었다. 메리는 어릴 적부터 다방면에 걸쳐 아버지의 장서를 탐독했는데, 탁월한 문필가 부모의 딸답게 글쓰기를 즐겼다.  

아버지가 사회적 명사였던 만큼 그녀의 집에는 많은 손님이 드나들었는데, 그중에는 고드윈을 숭배했던 시인 퍼시 비시 셸리(1792~1822)도 있었다. 그 당시 셸리는 첫 번째 결혼 관계를 정리하지 못한 유부남이었다. 하지만 사랑에 빠진 그들은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동거에 들어갔고, 1816년 마침내 결혼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메리 울스턴크래프트는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셸리’가 되었다. 그녀가 자신의 이름에 ‘고드윈’이란 아버지의 성(姓) 대신 어머니의 성 ‘울스턴크래프트’를 넣은 데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읽을 수 있다. 실제로 그녀가 가장 즐겨 찾아 책을 읽던 장소는 어머니의 무덤가였다.    

메리 셸리가 『프랑켄슈타인』을 쓰게 된 것은 우연한 계기를 통해서였다. 1816년 여름, 유럽 여행을 하던 중 셸리 일행은 스위스에서 당대를 대표하는 시인 바이런(1788~1824)과 어울리게 된다. 비가 많이 오는 날씨 탓에 갇혀 지내야 했던 그들에게, 바이런은 각자가 초자연적인 이야기, 곧 ‘유령 이야기’를 써 보자고 제안한다. 이야기를 궁리하던 중에 메리는 갈바니(1737~1798)의 실험과 생명의 본질 같은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다. 그 당시 이탈리아의 의학자인 갈바니는 전기 자극을 통해 죽은 개구리의 다리가 움직이는 현상을 발견하여 화제를 모았다. 일부에서는 죽은 시체도 전기 자극으로 움직이게 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런 발상에서 영감을 얻은 메리는 어느 날 자신의 피조물 앞에서 공포를 느끼는 창조자에 대한 악몽을 꾸었고, 이것이 『프랑켄슈타인』의 직접적인 출발점이 되었다. 이 작품에서 주인공 빅터 프랑켄슈타인은 생명이 없는 육체에 생명을 불어넣기 위해 2년 가까이 노력한 끝에 결국 생명을 창조하는 데 성공한다(그의 이름은 ‘빅터(Victor)’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나 흉측하고 혐오스러웠다. 그가 꿈꾸었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괴물’이었던 것이다. 그에겐 아름다운 꿈 대신에 공포와 역겨움이 엄습해 온다. ‘괴물’을 창조하고 나서 그가 꾸는 악몽은 그런 점에서 매우 암시적이다.  

“사실 잠이 들긴 했지만 사나운 꿈에 시달렸다.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건강한 모습으로 잉골슈타트 거리를 걷고 있었다. 놀랍고 반가운 마음에 그녀를 껴안았는데 나의 첫 번째 입맞춤에 그녀의 입술은 죽음의 납빛이 되었다. 그녀의 모습이 변하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내 품에는 죽은 어머니의 시체가 안겨져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생전에 어머니가 ‘선물’로 데려온 고아 소녀로, 남남이긴 해도 프랑켄슈타인에게는 동생과 다름없는 존재였다. 그런데 나중에 두 사람은 연인 사이로 발전한다(1818년에 발간된 『프랑켄슈타인』에서는 사촌동생으로 설정되어 있었다). 어머니는 성홍열에 걸린 엘리자베스를 간호하다가 세상을 떠나는데, 그녀가 남긴 유언은 두 사람의 결혼이었다. 그렇기에 프랑켄슈타인의 악몽에서 엘리자베스와 어머니가 차례로 등장한 것이다. 

엘리자베스에게 하는 입맞춤이 새로운 생명 창조에 대한 프랑켄슈타인의 열망과 상응한다면, 죽은 어머니의 시체는 자신의 피조물에 대한 환멸과 공포를 상징한다. 실상 새로운 생명은 그가 엘리자베스와 결혼하면 얻을 수 있었을 테고, 또 그것이 자연의 법칙에도 부합한다. 하지만 작품의 부제대로 ‘현대의 프로메테우스’가 되고자 한 프랑켄슈타인은 여성의 몸을 빌리지 않고 스스로가 생명의 창조자가 되고자 한다. 그 결과는 그가 견딜 수 없을 만큼 섬뜩하고 소름 끼치는 것이었다. 결국에는 그의 아내 엘리자베스마저 괴물에게 잃고 말았기 때문이다. 이것이 프랑켄슈타인의 인간 창조가 거둔 비극적 결말이다.  



프랑켄슈타인, 괴물과 마주하다
소설로서 『프랑켄슈타인』은 액자형 이야기 구조를 가지고 있다. 가장 바깥의 이야기는 북극의 새로운 항로를 발견하기 위해 탐험에 나선 로버트 월튼 선장이 누이에게 보내는 편지로, 항해 일지와 같은 형식으로 되어 있다. 그는 북극을 지나가기 위해 항해하던 중 프랑켄슈타인을 만나서 그가 창조해 낸 괴물 이야기를 듣는다. 이때 프랑켄슈타인은 복수를 위해 그 괴물의 뒤를 쫓게 되기까지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런데 그 프랑켄슈타인의 이야기 속에서는 다시 괴물이 등장하여 자신의 이야기를 그의 창조자에게 들려준다. 곧 전체적으로는 괴물이 프랑켄슈타인에게, 프랑켄슈타인은 월튼에게, 월튼은 누이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식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렇게 중층으로 이루어진 이야기 구조는 이 공상적인 이야기에 사실감을 부여해 준다.   

전체 이야기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것은 프랑켄슈타인과 괴물의 만남이다. 괴물은 자신을 창조해 놓고도 혐오하며 방치한 창조자 프랑켄슈타인에게 복수를 결심한다. 그리고 프랑켄슈타인은 그의 피조물이 자기 가족과 친구를 해쳤다는 사실을 알고는 그를 제거하려고 한다. 서로가 서로를 찾는 셈인데, 이 둘의 조우 장면에서 괴물은 그의 창조자에게 이렇게 호소한다. “제발, 프랑켄슈타인. 다른 사람한테는 잘해 주면서 나만 짓밟지 말아 주시오. 나는 당신의 정의를, 당신의 너그러움과 애정을 받아야 마땅하오. 당신의 피조물이잖소. 나는 당신의 아담이어야 했지만 타락한 천사가 되었고, 당신은 아무 죄도 없는 나를 기쁨에서 몰아내었소.”   

괴물이 ‘아담’과 ‘타락 천사’를 비유로 든 것은 그가 밀턴(1608~1674)의 『실낙원』을 감동적으로 읽었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실낙원』은 『성경』의 「창세기」를 바탕으로 하여 쓴 방대한 서사시다. 괴물은 프랑켄슈타인이 쓴 실험 기록, 곧 자신의 탄생 과정에 관한 기록을 모두 읽었다고 말하면서 자기가 느낀 역겨움과 참담함을 토로한다. 그러고는 프랑켄슈타인에게 항의한다. “저주받을 창조자! 왜 당신조차 역겨워 고개를 돌릴 소름 끼치는 괴물을 만들었는가? 신은 자신의 형상을 본떠 인간을 아름답고 매력적으로 만들었건만 내 모습은 추잡한 인간의 모습이고, 인간과 비슷하기 때문에 더욱 끔찍해졌다.”  

여기서 괴물은 신의 창조와 프랑켄슈타인의 창조를 대조시키면서 그를 원망한다. 프랑켄슈타인은 생명 창조라는 신의 영역을 넘겨다보고 도전한 셈이지만, 자신도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혐오스러운 결과만을 얻는다. 그리고 이 점은 그와 유사한 야망을 갖고 있는 분신적인 인물 로버트 월튼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월튼 또한 누이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프로메테우스적인 야망을 털어놓는다. 그는 북극 근처의 항로를 발견하여 수개월씩 걸리는 대륙 간 여정을 단축하거나 자력의 비밀을 밝혀내려 한다. 그리고 이러한 업적이 전 인류에게 헤아릴 수 없는 혜택을 줄 수 있으리라고 장담한다. 하지만 그의 고백대로 가끔씩은 자신이 가장 불행한 사람처럼 느껴지는데, 그것은 그의 성공을 기뻐해 줄 사람도 없고, 괴로울 때 격려해 줄 사람도 없기 때문이다. 프랑켄슈타인과 마찬가지로 월튼 또한 자기만의 광기에 사로잡혀 있는 인물인 것이다.    

배가 빙산에 갇혀 있던 중에 프랑켄슈타인을 만난 월튼은 ‘친구’를 만난 듯이 반가워하지만, 그의 탐험에 동원된 선원들은 점차 인내심의 바닥을 드러낸다. 선원들은 더 이상의 무모한 항해를 포기하고 남쪽으로 되돌아가자고 요구한다. 프랑켄슈타인은 월튼과 선원들에게 끝까지 곤경과 죽음에 맞서 싸우고 영웅이 되어 돌아가라고 독려한다. 그러나 결국 빙산에서 풀려난 월튼의 배는 기수를 고향인 잉글랜드로 돌린다. 이는 월튼에겐 인류에 이바지한 사람으로서 명예를 얻겠다는 희망을 포기한 결정이지만, 선원들은 그의 결정을 반긴다. 프랑켄슈타인과 윌튼은 똑같이 프로메테우스적인 야망을 실현시키고자 했지만, 이 지점에서 둘의 운명은 갈라진다. 그리고 사실 월튼이 보내는 편지의 수신자인 누이 ‘사빌 부인(Mrs Saville)’은 프랑스 어에서 ‘그의 고향(Sa ville)’이란 말과 음성적으로 유사하다. 그래서 그의 누이가 있는 잉글랜드로의 회항은 그의 귀향이자 여성의 품으로의 귀환이기도 하다. 

프로메테우스 신화의 새로운 뒤집기
잘 알려진 대로, 그리스 신화에서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을 위해 신들의 화덕에서 불을 훔쳐 전해 주고, 인간은 이를 바탕으로 문화를 발전시킨다. 한편으론 그가 진흙으로 인간을 만들어서 인간이 신성을 가지게 되었다고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의 창조자다. 물론 이 때문에 코카서스 산정에 포박되어 제우스가 보낸 독수리에게 매일 간을 쪼이는 고통을 당하지만, 대신에 그는 신에 대한 반항과 인간에 대한 사랑을 상징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영웅성’은 많은 시인과 작가에게 영감을 주었다.  

메리의 남편 셸리 또한 예외가 아니어서, 『해방된 프로메테우스』(1820)에서 그는 자신이 시를 통해 새로운 세계와 인간을 창조하는 창조자임을 자임하였다. 그 당시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들이 가졌던 ‘새로운 인간’에 대한 비전을 그 또한 공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내인 메리에게도 큰 영향을 준 『해방된 프로메테우스』에서 퍼시 셸리는 프로메테우스를 사탄과 동일시하고, 프로메테우스와 제우스의 싸움을 한 개인(시인)의 내적 드라마로 변모시킨다. 프랑스 혁명(1789)이 진행 중인 시기여서 이 내적 드라마는 ‘정치 우화’적 성격을 겸하고 있었다. 새로운 질서에 대한 시인의 열망과 정치적 희원(希願, 앞일에 대한 바람)을 적극적으로 형상화해 놓았던 것이다. 

그러나 퍼시 셸리의 창조자-시인의 형상이 프로메테우스와 사탄을 결합한 거라는 데 주의해야 한다.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들지 않는가? 어째서 그런가? 다음의 표를 함께 살펴보자.   


 


그리스 신화


기독교 신학


최고신


제우스


하느님


반항자


프로메테우스


사탄

그리스 신화(헬레니즘)의 제우스는 기독교 신학(헤브라이즘)에서 하느님에 대응하고, 프로메테우스는 사탄에 대응한다. 하지만 가치론적 위계에서 이들은 결코 동일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 않다. 헤브라이즘에서는 ‘하느님(+)/사탄(-)’이라는 가치론적 위계가 설정되지만, 헬레니즘에서는 ‘제우스(-)/프로메테우스(+)’로 전도되기 때문이다. 이렇듯 상반된 가치론적 형상을 가진 두 존재를 ‘반항자’라는 성격에만 초점을 맞추어 동일시하게 되면, 곧 ‘프로메테우스(+)=사탄(-)’이 되어 버린다. 이는 인간을 하느님이 아닌 사탄이 창조한 것이 되니 중대한 신성 모독이 아닐 수 없다. 남편이 서문을 쓰기도 한 『프랑켄슈타인』에서 메리 셸리는 혹 그러한 프로메테우스 신화에 대해 또 한 번의 새로운 뒤집기를 시도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영웅 신화’의 폐해에 대한 경고
그녀의 프랑켄슈타인 이야기가 프로메테우스에게서 끌어 오고 있는 것은 ‘한 영웅의 인간 창조와 그로 인한 주변의 평범한 인간들의 피해’라는 신화소다. 어쩌면 그녀는 아버지 고드윈이나 남편 셸리가 추구했던 그 당시의 급진적 이상주의에 대해 암묵적인 비판을 시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메리 셸리는 천재 시인이었지만 오만하고 과시적이었던 남편에게서 지식인의 이면을 목격하기도 했고, 이념이 얼마나 사람에게 깊은 상처를 남기는지도 직접 체험했다. 그런 그녀의 『프랑켄슈타인』이 프로메테우스라는 헬레니즘 ‘영웅 신화’를 다시 쓰면서 그것의 폐해를 경고하는 일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09. 09.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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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프랑켄슈타인의 역사와 가족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09-09-13 17:51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에 대한 글을 옮겨놓고 나니까 지젝의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그린비, 2009)에서 <프랑켄슈타인>을 다룬 부분이 생각나 마저 읽었다. 책의 2장 '이데올로기의 가족신화'의 한 절이 <프랑켄슈타인>을 다루고 있는데, '프랑켄슈타인의 역사와 가족'이 그 타이틀이다. 원문은 'History and family in Frankenstein', 그러니까 '<프랑켄슈타인>에 나
 
 
펠릭스 2009-09-14 0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랑켄슈타인'의 원조 발상은 개구리의 다리 근육에 대한 전기 자극이며,
유추 발상은 '사람의 시신 근육'에서의 동일한 상상입니다.
'신종플루'는 돼지(Mixing Bowl)에 의한 변종 바이러스입니다. 또한
카프카의 '변신'은 사람이 벌레로, 단군신화는 곰이 사람으로 변종되었습니다.
인간에게는 스토리를 변종시키는 본능이 있는가 봅니다.

로쟈 2009-09-14 13:17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이야기를 꾸며내는 재능이 다른 동물들과의 차이죠...

카스피 2009-09-14 18: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기 저도 책 읽기 전에는 괴물 이름이 프랑켄슈타인인줄 알았죠 ^^;;;

로쟈 2009-09-15 20:02   좋아요 0 | URL
그게 '괴물'은 이름이 없어서 더 혼동되는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