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여행
김훈 지음, 이강빈 사진 / 생각의나무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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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나는 김훈의 애독자다. 그의 이미 쉰을 넘긴 나이가 되었다는 사실이 그다지 실감이 나지 않는다. 이미 고등학교 때부터 한국일보 지면에 실렸던 그의 문학기행을 챙겨 읽곤 했었다. 그가 유난히 기행문/여행문에 강하다는 사실은 짐작하고 있었지만, 이번에 펴낸 <자전거 여행> 그 압권이라 할 만하다. 물론 책에 실린 글들 중 절반 이상을 나는 이미 신문 지면에서 읽었었지만, 한데 모아놓으니까 그 파워가 막강하다. 그가 그 막강한 파워를 가지고도 백전백패를 운운하며 책 머리에 내세우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살아서 아름다운 것들은 나의 기갈에 물 한 모금 주지 않았다. 그것들은 세계의 불가해한 운명처럼 나를 배반했다. 그러므로 나는 가장 빈곤한 한 줌의 언어로 그 운명에 맞선다.나는 백전백패할 것이다.

내가 그의 운명에 공감할 수 있는 것은 나 자신도 무수한 패배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사람도, 아름다운 풍광도, 더듬거리는 언어로는 한순간도 더 붙들어 들 수 없었다! 오래 전 얘기지만, 10월에 영동고속도로를 따라가다 창문 밖으로 비치는 빨갛게 물오른(?) 단풍들을 보며 아찔했던 기억이 있다. 나는 3초 이상 창밖을 내다볼 수 없었다. 내가 감당하기엔 너무나 아름다웠기에...(릴케의 천사들이 그리 아름다웠나?) 그 아름다움과의 싸움은 비전 없는 싸움이다.

문장가(!) 김훈이 그 비전없는 싸움에 목을 매고 있는 것은 그가 허무주의자이기 때문이리라. 그리하여 백전백패했으되, 그가 잃을 것은 별로 없으리라는 생각도 든다. 이런 생각을 하면, 그의 더 많은 패전보들을 기다리게 되는 심사에 부담이 좀 준다.

그가 낸 책을 거의 다 사모았으니 그의 자전거 값 월부 말고도 다른 씀씀이에 도움이 되었을지 모르겠다. 어느 책에서 그는 아들에게 사내는 돈을 벌어야 한다고 잔뜩 훈계를 하고 있었는데, 얼마전 딸아이가 생기면서 나 또한 그 훈계를 뒤집어쓰게 되었다. 아무리 허무주의자라도 돈과의 싸움에서마저 백전백패하는 것은 좀 이미지가 구겨지는 일인데...

한마디만 더. 김훈의 책을 읽는 가장 좋은 장소는 어디일까? 내 경험에 의하면 저녁시간에 좀 한산한 시내버스이다. 나는 십년도 더 전에, <풍경과 상처>에 맨처음 실린 글이 책으로 묶이기 전에 바로 그 저녁 버스 안에서 읽었고, 읽으면서 황홀했다. 지방 소도시에서 방위생활을 하다가 퇴근길에 서점에 들러서 산 책의 말미에 그 글이 붙어 있었다. 그 사이에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던 것인지. 나는 <자전거 여행>의 마지막 부분을 에어콘이 안 나와 창문을 열어 놓고 달리는 저녁 버스의 형광등 불빛 아래서 읽었다. 창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책장을 넘기며 그의 글들을 읽을 때, 나는 이 세상에 그만 안 있어도 좋을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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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여우 창비시선 163
안도현 지음 / 창비 / 199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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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시인 안도현이 어느 새 중견이 되었다. 대여섯 권의 시집을 낸 시인이지만, <연어>나 <관계>, <짜장면> 같은 소위 '어른을 위한 동화'들로 이름을 널리 알리고 있지만, 그의 본업은 시라는 걸, 그는 시인으로서 이 세상의 '중심'이라는 걸 이 시집은 여실히 증명한다. 거의 맨마지막에 놓인 시, <세상의 중심을 향하여>에서 그는 이렇고 적는다.

나를 세상의 중심으로 알고
퇴근 때마다 내 품으로 안겨드는 딸아, 그리고 아들아
이 아비는 목욕탕에 갈 때마다 남의 등을 밀어주기 전에
먼저 내 배꼽에 낀 때를 없애는 일에 몰두하였단다

하지만, 그가 여러 시들을 통해 벌이고 있는 일들은 단지 그 자신의 배꼽에 낀 때를 없애는 일 이상이다. 그는 시집을 낼 때마다 우리들의 등을 사정없이 밀어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의 중심을 향하여/ 자꾸 날아가려고' 하는 새들이 '중심의 괴로움'(김지하)에 시달리 때, 자기 자신만을 믿는 안도현은, 시만을 믿는 안도현은 그대로의 중심에서 여유롭고 넉넉하다. 자신을 버리는 자만이 세상의 중심에 선다는 것을 그는 이미 알고 있는 것이리라. 가령, 시집의 맨처음, 강물 속으로 무작정 뛰어드는 '어린 눈발들'을 안타까워 하는 강의 마음은 곧장 시인의 마음일 테다. 사실 이 한편만으로도 이 시집은 빛나지만, 이런 짧은 시 한편을 맛보기로 읽어도 보람이 있다(<3월에서 4월 사이>)

산서고등학교 관사 앞에 매화꽃 핀 다음에는
산서주조장 돌담에 기대어 산수유꽃 피고
산서중학교 뒷산에 조팝나무꽃 핀 다음에는
산서우체국 뒤뜰에서는 목련꽃 피고
산서초등학교 울타리 너머 개나리꽃 핀 다음에는
산서정류소 가는 길가에 자주제비꽃 피고

이 시가 아니면 '산서'마을에 꽃피는 소식을 접할 길이 있었을까? 매화꽃, 산수유꽃, 조팝나무꽃, 목련꽃, 개나리꽃, 도 자주제비꽃과 인사라도 나눌 기회가 있었을까? 해서 언제, 그 마을에 내려갈 기회가 행여 생긴다면, 우리는 구면의 꽃들을 보게 될 것이다. 아, 물론 3월과 4월 사이에... 시인이여, 이 무더운 7월과 8월 사이에는 어떤 꽃들과 사연들을 만나게 되는지요? 나는 다음 시집을 기대해 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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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과 텍스트의 정치학
TORIL MOI / H.S MEDIA(한신문화사) / 199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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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다른 많은 유행사조와 마찬가지로 페미니즘도 자생적인 사조라기보다는 수입 사조이다. 포스트 모더니즘과 비슷한 시기에 상륙하여 많은 문제거리들을 제기하며 소위, '이념'과 '운동'의 새로운 관심사를 형성하였다. 한때 '한국문학에서의 포스트 모더니즘'(이걸 포더니즘이라고 줄여 부르자는 이도 있다) 운운하는 담론들이 유행했듯이, '한국 문학에서의 페미니즘'도 유행을 탔고, 나는 페미니스트이다, 아니다라는 식의 정체 폭로도 잇달았으며, 그런 건 진정한 페미니즘이 아니다 라거나, 진짜 페미니즘은 이런 거다라는 식의 선언적인 주장도 간간히 들려 왔다.

그래서? 이제 페미니즘이란 말은 더이상 우리에게 낯설지 않으며, 페미니스트란 말이 남녀 모두에게 미묘한 반감 같은 걸 불러일으키면서도, 우리 사회의 여성 문제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키는 데 어느 정도 기여한 바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겠다. 하지만, 페미니즘이란 표제로 출간된 그 많은 책들이 과연 얼마나 읽혔으며, 얼마나 이해되었고, 이 세계/사회에 대한 우리의 인식 지평을 확대하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되었을까? 더 나아가 그럴 만한 책들이 과연 있었을까? 묻게 될 때, 얼른 떠오르는 책이 있던가? 개인적으로 문학비평과 이론에 관심을 두고 있지만, 적어도 페미니즘과 관련하여 이거다,라고 추천할 만한 책은 얼른 입에 떠올려지지 않는다. 그런데, 프랑스 페미니즘에 관한 저작으로 유명한 토릴 모이의 이 책은 아마도 그런 종류의 책에 현재로선 가장 근접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일단 페미니즘의 역사와 이론에 대한 저자의 이해와 분류는 매우 간명하다. 그래서 이해가 용이하다. 서론에 밝힌 바대로, 버지니아 울프를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현단계 페미니즘은 영미쪽이냐 프랑스쪽이냐가 갈린다(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는가?). 저자의 주장을 단순화시켜 말하면, 영미쪽은 남녀간의 차이보다는 동일성에 초점을 맞추고(그래서 차별의 철폐와 권익 증진에 관심을 둔다), 프랑스쪽은 남녀간에 차이에 초점을 맞추면서 가부장적 사회체제를 대체할 만한 모성적/여성적 공동체(혹은 정치)를 대안으로 모색한다. 크리스테바 전문가답게 저자는 물론, 프랑스쪽의 해체론적/정신분석적 페미니즘쪽으로 약간 기운다(역자들은 이에 대해 유보적인 입장을 표하고 있다). 이러한 구도에 따라 상이하게 나타나는 이론적 관심사를 저자는 실제 문학비평/이론 분야에 한정하여 요령있게 설명하고 있다.

저자의 입장에 동의하든, 안 하든, 페미니즘 문학론에 대한 개관으로서 아주 유용해 보인다. 조금 과장하면, 표준적인 교과서라 할 만하다. 문제는 이제 우리의 현실, 우리의 문학에 얼만큼 생산적으로 적용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리라. 굳이 문학쪽에 관심을 둔 독자가 아니더라도, 페미니즘의 여러 '풍경들'을 둘러보는 데 좋은 길잡이가 될 수 있을 듯하다. 번역도 잘 읽히는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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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의 성과 권력
권택영 지음 / 문예출판사 / 199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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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 읽기의 첫번째 단계는 물론 직접 프로이트를 읽는 것이다. 아주 드물게, 독어본을, 아니면 표준판 영어본을, 그도 아니면 가까이에 있는 우리말 프로이트 전집을 읽는 것. 그의 <꿈의 해석>(1900)이 나온 지 이제 딱 100년이 되었다. 우리의 경우, 이미 몇몇 출판사에서 프로이트와 정신분석학 붐을 조성하기 위해 많은 애를 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프로이트의 혁명성(!)은 많은 이들에게 그다지 실감되고 있지 않는 듯하다. 그저 상식 퀴즈에서나 '무의식-프로이트-오이디푸스 콤플렉스'짝으로 이해될까. 아직은 가깝고도 먼 프로이트...

저자인 권택영 교수는 프로이트와 라캉의 정신분석학, 혹은 욕망 이론을 줄기차게 강의하고 또 소개하는 역할을 해왔다. 이 책은 그러한 저자의 여정에 있어서 중간 매듭 정도의 의미를 갖는 듯하다. 저자의 시각에 의해 정리되고 재구성된, 간결한 프로이트를 우리는 이 책에서 만날 수 있다. 프로이트의 성이론의 혁명성과 보수성이 이후의 정신분석학자들과 페미니스트들에 의해서 어떻게 수용되고 또 변형되었는지 저자는 특유의 스타카토 문체를 통해서 친절하게 설명하고 안내한다. 그러면서 은유나 환유, 나르시스적 주체 등에 대한 생각도 덧붙이고, 탈식민주의 이론가들의 프로이트 읽기도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이 책은 저자의 총체적인 프로이트 읽기/해석의 예비적인 밑그림이 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저자는 맺음말에서 '더 좋은 글을 위한 초석일 뿐'이라고 적고 있다.) 다만, 프로이트를 처음 읽는 초보 독자들에게는 더디 읽히는 면도 있을 듯하다.

욕심을 낸다면, 해체론 시대의 프로이트나 탈식민주의의 프로이트를 잘 조명해 주는 글들이 번역되는 가운데, 이 책이 놓였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작품(텍스트)은 없고 작품(텍스트) 비평만이 앞서는 우리의 풍토는 아무래도 바람직해 보이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옥의 티라고 할 만한 오타 하나. 117쪽에서 '말하기보다 글쓰기를 우월하다고 본 서구 형이상학 체계'는 물론 '글쓰기보다 말하기를 우월하다고 본 서구 형이상학 체계'의 오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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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의 종말
존 호건 / 까치 / 199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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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류의 책들을 보다 보면, 세계적인 과학자들의 면면보다도, 그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인터뷰하고, 주요한 업적들을 깔끔하게 소개해주는 저널리스트들이 더 대단해 보인다. 이 책의 저자인 존 호건도 그런 '대단한 사람'에 속한다.

지난 세기말에 나온 책이지만, 21세기를 맞은 현재에도, 과연 과학이 무얼 더 알 수 있으며, 우리가 알 수 있는 과학적 지식에는 한계가 있는가라는 도발적인 물음은 여전히 유효하다. 또 그것이 이 책을 읽는 일차적인 흥미가 된다. 영문학 전공자답게 인문학에 대해서도 해박하다는 것이 저자를 더욱 믿음직하게 하며, 문체도 좋고 번역도 우수하다. 요컨대, 나무랄 데 없는 책이다.

저자는 대학 시절, 인문학의 '반어적'(ironic) 성격에 실망하여 자연과학의 확실성과 무제한적 발전에 기대를 걸었지만, 그 자신이 이제는 과학의 미래에 대해서 회의적이게 된 상황을 서두에서 밝히고, 그러한 물음의 해답을 동시대의 여러 과학자들에게서 구하려고 한다. 물론 그 해답은 무 자르듯이 단번에 결판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여전히 과학의 미래와 장래성(?)에 낙관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더이상 주요한 과학적 업적은 기대할 수 없다고 회고조에 빠지는 이들도 있다. 어쨌거나 석학들의 머릿속을 회람하면서, 그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살아갈까 하고 평소에 호기심을 가져본 독자들에게 더없이 요긴한 보고서라고나 할까.

역자인 김동광(과 과학세대)을 비록하여 이인식, 최재천 등의 저널리스트, 혹은 전공자들의 활동이 우리 나라에서도 활발해 지고 있다. 전문 과학자들과 일반 독자들을 연결시켜주는 이런 '제 3의 문화' 전도자들이 좀더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그래서 언젠가는 우리도 이렇게 외쳐봤으면. 과학 저널리즘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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