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토텔레스 경제를 말하다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42
홍기빈 지음 / 책세상 / 200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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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몇 년 전부터 서울대학교 경제학과의 일부 교수들이 교육 내용을 하버드의 경제학과와 똑같이 만들자고 주장하는 믿기지 않는 소문이 있다고 한다. 저자가 전하고 있는 소문이다. 저자는 왜 그런 주장이 터무니 없으며 무책임한 주장인지(더불어 무식한 주장인지) 이 책을 통해서 설득력있게 밝혀놓고 있다. 그 일부 교수들에겐 아마도 '다른 경제학'에 대한 상상력이 부족했던 것이리라.

비교문학과에 재직중인 철학자 로티의 출세작 <철학과 자연의 거울>(왜 <철학 그리고 자연의 거울>이란 어색한 제목을 달고 출간됐는지 모를 일이다)을 읽으며, '철학이 가지 않은 길'에 생각이 미친 일이 있다. 인식론 중심의 철학, 즉 철학을 자연의 거울로 정향시키고자 했던 근대 철학의 기획이 필연적인 것이 아니었다면, 그래서 전혀 다른 철학이 가능했다면, 그 다른 철학은 어떤 것이었을까라는 생각 말이다. 그 생각은 즐거움과 씁쓸함을 동반한 것이었는데, '이렇지 않을 수도 있었다!'라는 것이 즐거움의 내용이라면, '근데, 이렇게 되고 말았어!'라는 게 씁쓸함의 내용이었다.

그런 즐거움과 씁쓸함을 신진 경제학도의 도발적인 문제제기를 담은 이 책을 읽으면서도 다시 한번 느꼈다. 그리고 그 가지 않은 길을 떠올렸다. 이번엔 경제학이 가지 않은 길! 그 길은 어떤 길인가? '경제학의 근본적 재구성'(10쪽)의 길이다. 그리고 그 길은 '경제 발전, 대량 소비, 산업 고도화, 자본 축적 등을 신봉하고 있는 현대의 경제적 패러다임이 주관적, 객관적 한계에 직면할 날이 다가오고 있다는 징후가 도처에 나타나고 있다'(162쪽)는 진단에서 떠올려지는 길이다. 저자는 그 길의 안내자로서 '경제학자' 아리스토텔레스를 내세운다.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르면, 인간 욕망의 무한성과 재화의 희소성이라는 현대 경제학의 두 전제는 상대화된다. 즉 전혀 다른 경제학이 가능한 것이다!

그 다른 경제학을 프락시스의 경제학이라고 이름붙일 수 있을까? 아리스토텔레스가 '무언가를 생산하는 행위'라고 정의한 포이에시스가 가치합리성이 배제된 목적합리적 행위라면, 프락시스는 '행위 그 자체를 목표로 하는 행위'로서 그 자체로 즐거움을 지향하는 행위이다. 즉 행복한 생활을 구성하는 행위이다. 그리고 단적으로 말해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보기에 '인생은 포이에시스가 아니라 프락시스이다'(112쪽) 그런데 그동안 우리는 포이에시스, 포이에시스적 경제학(=돈벌이 경제학)에 얽매여 살아왔던 것이다(우리는 시적인 삶을 살아왔던가?!). 그것이 저자가 부추기는 반성의 내용이다.

책의 마지막 장에서 저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후예들을 간략하게 거론한다. 거기엔 마르크스와 베블린, 폴라니, 그리고 케인스 등의 이름이 등장한다. 그리고 물론 저자 자신이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저자에 대한 기대의 표시이다. 경제사상사의 윤곽이 아닌, 박진감 있는 프락시스 경제학의 그림을 마저 완성할 책임이 그 후예들에게는 있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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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체비평 - 이론과 실제
크리스토퍼 노리스 지음, 이현주 옮김 / H.S MEDIA(한신문화사) / 199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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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크리스토퍼 노리스의 <해체비평 Deconstruction: Theory and Practice>의 증보판(1991)을 번역한 것이다. 1982년에 나온 초판이 해체비평 혹은 해체론에 대한 입문서 역할을 톡톡히 해냈기 때문에 노리스는 비평가로서의 명성도 얻게 되었다. 하지만, 그에 따른 오해도 만만찮아서 저자는 이 증보판에는 특별히 후기를 달아서 그간의 오해에 대한 답변을 시도하고 있기도 하다.

입문서이긴 하지만, 저자의 독자층으로 간주하는 이들은 현대 문학이론의 최신경향에 관심을 가진 대학생/대학원생이거나 대학교수일 듯싶다. 따라서 문학이론에 대한 사전지식이 없이는 읽어내기가 수월찮다. 게다가 우리말 번역 또한 깔끔한 것은 아니어서 '이게 과연 입문서가 맞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해체비평에 대해 좀 아는 사람에게는 별로 새로운 내용이 없어 보이고, 문외한에게는 불친절해 보인다.

번역의 문제. 가령, '전환사'(혹은 '전이사')로 옮겨지는 야콥슨의 shifter 같은 용어가 '이동장치'(15쪽, 142쪽)로 옮겨진다거나, 바타이유의 '일반경제'가 '보편경제'로 옮겨지고(96쪽), 'answerable style'이 어느 곳에서는 '어울리는 문체'로 또 다른 곳에서는'책임있는 문체'로 표기되고 있다. 프로이트의 위상학 topology(혹은 위상심리학?)이 '지역행동 심리학'(155쪽)으로 번역된 것도 이해하기 힘들다.

그럼에도 그냥 읽어나간다면, 해체비평의 '실제'에 대항하는 6장(미국의 해체비평)이 그런 대로 읽을 만하다. 주로 예일학파의 비평가들의 실제비평과 데리다와 오스틴/써얼의 논쟁을 다루고 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책에서 가장 훌륭한 부분은 본문이 아니라 참고문헌이다. 거의 60쪽에 달하는 목록은 해체비평의 현황에 대한 풍족한 눈요기를 제공한다 (메뉴만으로 배가 부르다?). 게다가 원어 그대로를 싣고 있어서 번역의 문제도 제기되지 않는다... 노리스의 책으로는 <데리다>(시공사)도 번역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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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리다와 예일학파 - 모더니티총서 7
페터 지마 지음, 김혜진 옮김 / 문학동네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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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미학>의 저자로 잘 알려진 페터 지마의 이 책은 데리다의 해체론과 '예일 마피아'라 불리는 그 미국식 적용(예일학파)에 대한 가장 뛰어난 입문서로서 읽힌다. 지마는 이미 여러 저작들을 통해 문학이론 분야에서의 뛰어난 '지도 제작자'로서의 면모를 보여왔는데, 그가 그리고 있는 해체론의 지도 또한 명쾌하고 일목요연하다. 게다가, 막힘이 없는 훌륭한 번역에도 크게 빚지고 있을 테지만(몇 군데 오타가 흠이지만), 재미있다!

물론 이 책은 대중적인 교양서는 아니다. 데리다의 몇몇 저작이 국내에 소개돼 있지만, 아직까지도 해체론은 일종의 '막가파식 무정부주의'로 치부되기도 한다. 게다가 여기서 다루어지고 있는 예일학파 구성원들의 저작은 해롤드 블룸의 경우를 제외하곤 거의 소개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입문서이긴 하지만, 문학비평과 이론에 상당한 관심을 갖고 있지 않은 독자에게는 다소 난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냥 '읽기'이론으로서의 해체론이란 게 어떤 것이고, 그것은 어떤 사상적 계보와 관련되어 있으며, 그것이 개개 비평가들에게 어떤 식의 변주를 얻고 있는가에 대해 약간의 흥미를 갖고 따라가 본다면 의외의 소득을 얻을 수도 있다.

먼저, 해체론은 해체(구성)론이다. 그건 일종의 번역론이고, 언어의 이동건축술이다. 번역론으로서의 해체론은 번역불가능성을 전제로 한다. 그것을 칸트미학의 어법으로 표현하자면, '예술작품은 개념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 된다. 예술작품에 대한 개념적 이해 혹은 규정은 반드시 그 잉여(나머지)를 남기게 된다는 것. 따라서 모든 이해는 불충분하며 언제나 아포리아(불가해한 곤경)에 직면하게 된다. 그 아포리아를 데리다는 윤리적인 유희의 공간으로 만들고 폴 드 만 같은 비평가는 (이해의) 마비의 장소로 지목한다. 이러한 해체론의 선구적 계보로 지마가 제시하는 것은 칸트미학과 슐레겔의 낭만주의, 청년헤겔파, 그리고 니체이다. 사실 이러한 해체론의 윤곽은 그의 주저 <문예미학>에서 이미 암시되었던 것이기도 하다.

지마는 해체론적 전략에 비교적 호의적이면서도 때론 비판의 칼날을 감추지 않는다. 그 비판은 저자가 주장하고 있는 텍스트사회학적 입장에서 도출된다. 저자는 예술작품의 미적 자율성을 옹호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이 사회학적 규정과 양립할 수 있음을 줄곧 논증해 왔는데, 해체론은 그러한 사회학적 규정 혹은 사회 비판(헤겔과 하버마스 계보)에 무기력하다는 것이 비판의 핵심이다. 그리하여 저자인 지마에게서 문예미학, 혹은 문학이론은 칸트와 헤겔 사이,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해체론과 비판이론 사이의 변증법적 지양이어야 한다. 그런 맥락에서 지마는 이 책에서 아도르노의 문학론을 이전의 저작들에서보다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기도 하다.

지마는 몇 년 전에 방한하여 국내 대학에서 특별강연을 하기도 했다. 알아듣지도 못하는 그의 독어강연을 들으며 그때 받은 인상은 그가 훤칠하면서도 소탈한 유럽 신사라는 것이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도 그런 인상을 다시 떠올려볼 수 있었다. 더불어 오스트리아(중부유럽의 중립국)에 있는 대학에 오래 재직하고 있으면서 독어/독일철학, 불어/프랑스철학에 동시에 정통하다는 점이 그의 중립적인(지양적인!) 문학이론을 낳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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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학 - 호라티우스 시학.플라톤 시론
아리스토텔레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문예출판사 / 199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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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요 때문에 시학을 다시 읽게 되었다. 물론 이 서평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 아니라 그 우리말 번역이다. 손명현 선생의 번역 이후로 <시학>은 적어도 너댓 종 이상의 우리말 번역본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천병희 선생의 번역은 그 중 가장 표준적이라 할 만하다. 기본적으로 희랍어 원전을 번역했다는 점에서도 그러하고, 권위있는 역자의 자세한 주석이 달려 있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쉽게 읽히는 건 아니다. 대개의 고전이 그러하듯이 <시학> 또한 널리 알려져 있으면서도 거의 안 읽히는 책의 하나이다. 아마도 아리스토텔레스가 다루고 있는 작품들 가운데 대부분이 이미 전승되고 있지 않다는 데 가장 큰 이유가 있을 듯하다. 더불어 강연을 옮긴 것이어서 군데군데 곁가지 이야기들이 많이 들어가 있는 것도 독해를 까다롭게 한다.

즉 저자인 아리스토텔레스와 우리 시대 독자들이 공유할 수 있는 문화적 바탕이 충분하지 않은 것이고, 따라서 그에 대한 우리의 이해 역시 빈약하기 마련인 것이다. 고전 문헌학도가 아닌 이상 방대한 주석을 따라가면서 자구 하나하나를 음미해 볼 만한 처지도 못되는 것이고(예림기획에서 나온 주석본이 좀 도움이 된다).

다만, 시학의 줄거리를 간추려 보고, 그것이 문예비평사에서 갖는 의의만큼은 우리가 충분히 헤아려볼 수 있다. 가령, 아리스토텔레스가 비극의 요소들 중에서 왜 플롯을 가장 강조하여 설명하고 있는가(사실 플롯론이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비극의 정의는 무엇이고 그것은 어떤 기능을 갖는가, 비극은 왜 역사보다 더 철학적인가 하는 등의 문제들에 답해볼 수 있는 것이다. 그나마 이 정도의 작업이 가능할 수 있는 것도 이 정도 수준의 번역이 있기 때문이리라.

더불어 이 책은 호라티우스의 <시학>과 함께 플라톤의 <국가> 중 시론에 해당하는 부분(시인추방론이 역설되고 있는 부분)을 옮겨 놓고 있어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누구와 대결하고 있고, 또 그의 생각이 어떻게 후대에 이어지는가를 살펴볼 수 있도록 했다. 때문에 여전히 일반 독자들에겐 잘 읽히지 않을 책이지만, <시학>에 대한 가장 표준적인 번역본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영혼의 대하여>에 얼마 전에 번역 출간되었는데, 과연 아리스토텔레스의 또 다른 주저인 <형이상학>은 언제쯤 우리말 번역본을 얻을 수 있을지 자못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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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합니다 - 정현종 대표시집
정현종 지음 / 찾을모 / 199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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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 서른 셋에 낸 첫시집 <사물의 꿈>을 제외한 모든 시집을 나는 갖고 있다. 시집뿐만 아니라 몇 권의 시론집과 산문집 또한. 그 시편들과 글들의 대부분을 읽었을 테니까 나는 시인의 팬이면서 애독자라 불려도 좋을 것이다. 그런 시인이 재작년에 환갑을 맞았고, 몇 권의 책이 기념으로 나왔는데, 이 육필시집 또한 그런 연관으로 나온 것이 아닌가 싶다(때문에 이 시집은 말의 좋은 의미에서 장서용이다).

이미 활자를 통해서 한번쯤 읽은 시들이지만, 육필로 읽는 시들은 새로운 감흥을 준다. 나는 정현종 시의 특징이 독특한 호흡, 혹은 걸음걸이에 있다고 생각하는데, 날아가는 듯한 그의 필체는 유난히 그의 걸음걸이가 그렇지 않을까 하는 연상을 갖게 한다.

그 한결같은 걸음걸이로 시인은 시집의 첫머리에서 '외출'하여 페테르부르크의 한 소극장에서 '사랑은 나의 권력'이라고 속삭이는 걸로 시집을 마무리한다. 아니 그 말은 시인의 말이 아니라 시인의 사랑이 시인의 귀에 속삭인 말이다. 시인은 그 사랑의 귀에 이렇게 속삭인다. '내 권력이 약해지지 않도록/ 내 권력이 약해지지 않도록'

그런 속삭임도 이 시집에선 모두 걸음걸이로 바뀌어져 있다. 그의 마지막 걸음걸이는 이렇게 읽힌다. '사랑이여/ 우리의 권력이 약해지지 않도록!' 시여, 우리의 막강한 권력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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