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도를 기다리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3
사무엘 베케트 지음, 오증자 옮김 / 민음사 /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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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콜.. 한동안 오증자 교수의 절판된 <고도를 기다리며>를 찾으러 다녔었는데, 민음사에서 '예쁘게' 책이 나왔다. 무엇보다도 한국어로 안심하고(!) <고도를 기다리며>를 읽을 수 있다는 건 얼마나 큰 즐거움인가!

고작 네 명의 등장인물들이 나오는 이 무채색의 희비극을 읽으며 나는 베케트가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경계에 놓인다는 주장에 대해 생각했다. 아마도 '부질없는(혹은 어이없는) 기다림'이란 표현이 그 경계를 표시하는 말이 될 수 있을까? 어떤 궁극적 의미에 대한 기다림이 모더니즘과 배를 맞대고 있다면, 그것의 부질없음을 늘어놓는 수다는 포스토모더니즘의 정신과 손잡고 있다. '이 모든 혼돈 속에서도 단 하나 확실한 게 있지. 그건 고도가 오기를 우린 기다리고 있는 거야.'(134쪽)라는 똑똑한 블라디미르의 말이 이 극 전체를 잡아두고 있지만, 확실한 건 기다림의 대상이 아니라 기다림 자체일 뿐이라는 걸 그는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지루하다고 말한다.

2막의 끝에 이르러 그는 '이 모든 게 어느 정도나 사실일까?'(152쪽) 회의하며, 무덤 위에서 아이를 낳는 산모들을 떠올린다. 하지만 그의 일시적인 깨달음이 구원을 가져다 주는 것은 아니다. '이 이상은 버틸 수가 없구나'까지 가 보지만, 고도의 전갈을 전하는 소년이 등장하자, 이 모든 일들이 되돌이표처럼 '다시 시작'된다는 걸, 다시 시작되어야 한다는 걸 그는 체념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러한 체념으로부터 우리가 과연 얼마나 도주해 왔는가를 점검해 보는 것이다.

마치 시지프의 신화처럼 반복되는 (부조리한) 일상 속에서 어떠한 신화적 기다림에도 의탁하지 않은 채 과연 우리는 스스로의 삶을 선택하고 이 단속순환적인 세계의 문밖으로 외출할 수 있는가? 그럴 준비를 하고 있는가? 이어지는 작품인 <승부의 종말>에서 베케트는 그 외출(떠남)의 가능성에 대해서 회의적이지만, 과연 우리는 어떠할까? 과연 우리의 게임도 끝난 것일까? 베케트의 깊게 패인 주름을 들여다 보면서 나는 아직도 그 해답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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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심리학 하룻밤의 지식여행 4
딜런 에반스 지음, 이충호 옮김, 오스카 저레이트 그림 / 김영사 / 200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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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인간 심리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져보지 않은 독자가 있을까? 그러한 관심이 정작 프로이트나 라캉을 읽는 일에까지 이어지는 경우는 드물다 하더라도, 하여간에 자신의 '생짜' 겸험을 토대로 우리는 적당한 민간심리학 정도는 들먹일 수 있다. 걔는 그런 콤플렉스야라든가, 쟤는 그런 심보(심사)였던 거지, 하는 식으로. 하지만 별로 믿을 거 없어 보이는 이런 심리학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는 것이니 우리는 타고난 심리학자들이기 때문이다. 즉 우리의 심리적 상태라는 것은 우리가 임의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장구한 세월에 걸쳐 우리의 DNA 속에 각인돼 있는 것이다. 그것을 겉으로 드러내어 논리적으로 객관화시키는 것이 바로 진화심리학의 작업이 아닌가 싶다.

그 진화심리학에 대해 저자는 '미래에는 그것을 더이상 진화심리학이라고 부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냥 심리학이라고 부르게 되겠지요'(172쪽)이라고 결론적으로 자신있게 말한다. 그리고 그 자신감이 전혀 근거가 없는 게 아니라는 걸 독자들은 이 책을 '하룻밤'만에 읽어가면서 깨닫게 된다. 원리는 단순하다. '유전적 이득'이라는 키워드를 사용하여 잘 계산하기만 하면 된다. 우리가 왜 잘 생기고 예쁜 남자/여자를 좋아하며 배우자를 선택하기 위해서 어떤 점들을 고려하는가 하는 것이 일목요연하게 계산된다. 이러한 모든 것들이 구체화된 게 불과 10년 정도의 기간이라는 게 놀랍다. 아마도 진화심리학은 다윈의학, 사회생물학과 함께 21세기의 가장 중요한 지적 자극원이 되지 않을까 싶다.

결말 부분에서 저자는 진화론과 진화심리학에 대한 오해에 대해서 간단하지만 요령있게 해명하고 있다. 문제의 원흉은 다윈이 아니라 허버트 스펜서를 대표로 하는 사회적 다윈주의자들이라는 것. 그런 점에서 보면 나치에 의해 곡해되었다는 점에서 다윈은 니체를 빼닮았다. 이젠 그들에게 들씌어진 오해의 거죽들을 들춰내야 할 시점이 아닌가 싶다. '진화심리학을 비판한 사람들이 진화심리학을 유전자 결정론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틀린 것이지만, 역사에 비추어 볼 때 그들의 두려움은 충분히 이해가 된다.'(170쪽) 이젠 그 비판하는 사람들이 이해해야 할 차례가 아닐까? 한편으로 이러한 류의 교양 시리즈들은 구미의 출판역량을 한없이 부럽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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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
프란츠 카프카 지음, 이재황 옮김 / 문학과지성사 / 199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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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이나 <성>을 읽고서 도대체 이 작자는 어떤 사람이었을까라는 궁금증을 가졌던 독자라면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는 더없이 요긴한 자료이다. 작가가 육성으로 고백하고 있는 아버지와의 관계(나는 이것이 그의 문학의 기원이라고 생각하는데)는 너무나 적나라해서 그의 '벌거벗은 영혼'을 훔쳐보는 듯한 죄의식(!)마저 느끼게 한다. 거기에 비하면 카프카 문학의 온갖 해설서들은 왜소하고 초라하게 보일 지경이다.

그의 문학이 부조리한가? 그의 '원체험'으로 제시되고 있는 이런 장면은 어떤가. 아주 어린 나이의 카프카는 한밤중에 일어나 물을 달라고 칭얼거린다. 하지만, 엄한 자수성가형 아버지는 그를 파블라취(복도)로 끌고 나가 혼자 세워두는 벌을 준다. '한밤중에 물을 달라고 졸라댄다는 것이 터무니없게도 보이지만 저로서는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는 것, 그리고 그만한 일로 집밖으로 내쫓겨야 한다는 것이 참으로 끔찍한 일이었다는 것, 저로서는 이 두 가지를 어떻게 연결시켜야 할지를 몰랐습니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나서까지도 저는 고통스러운 관념 속에 시달려야 했습니다.'(26쪽) 바로 여기에 <법 앞에서>의 카프카, <성> 앞에서의 K의 모습이 아른거리지 않는가. 이러한 체험의 제시는 너무도 노골적이어서 얼핏 그의 문학 전체를 싱겁게 만들어버린다(적어도 덜 신비롭게 만든다).

그런 아버지 밑에서 카프카가 할 수 있었던 일이란 자신이 아버지가 되든가 가능한 멀리 아버지로부터(아버지란 자리로부터) 도주하는 것이었으리라. '결혼하고, 가정을 이루고, 애가 생기면 낳고, 그애들이 이 험한 세상 속에서 잘 건사하고, 나아가 바른 길로 좀 이끌어주기도 하는 등의 일은 한 인간이 대체적으로 해낼 수 있는 최대한'(130쪽)이라고 그는 생각하지만, 그것은 그의 길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결혼을 하고 가장이 되는 일은 '아버지가 이루신 최고의 것'이었기 때문이고, 그 자신은 그 아버지를 결코 능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즉 결혼은 '아버지의 고유한 영역'(148쪽)이므로 그에게는 막혀 있는 것이다. 그의 가슴 저미는 상상을 보라.

'때때로 저는 세계 지도가 펼쳐져 있고 그 위에 아버지가 사지를 쫙 뻗고 누워 계신 모습을 상상해봅니다. 그러면 마치 저한테는 아버지가 가리고 계시지 않거나 아버지의 손이 미치지 않는 지역만이 저의 생활 공간이 될 수 있을 것처럼 여겨져요. 그런 지역을 결코 많을 수 없으며 무엇보다 결혼은 그런 지역에서 벗어나 있습니다.'(148쪽) 그리고 그 많지 않은 지역이 바로 문학의 공간이었으며, 그 공간을 방어하기 위해 카프카는 전력을 기울이고 많은 것을 희생한다. 이러한 고백을 담고 있으니 일컬어 '카프카 문학의 기원'이라 하여도 결코 모자람이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을 쓰는 일은 저의 의무입니다. 아니 그 일을 지키고, 제가 막아낼 수 있는 어떠한 위험도, 나아가 그런 위험의 기미조차 그 일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에 제 인생의 성패가 걸려 있다고 할 수 있지요.'(151쪽) 그의 일기들도 곧 완역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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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호학이란 무엇인가
김경용 지음 / 민음사 / 199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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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초판이 나왔을 무렵, 나는 대학원에서 문체론과 문학이론 강의를 듣고 있었다. 여러 기호학자들의 이름을 눈동냥으로 알고 있었고, 에코의 <기호학 이론>(영역)도 읽어봤기 때문에 기호학이 낯설지 않았는데(에코의 책은 결코 입문서가 아니다!), 그럼에도 제대로 된 기호학 입문서, 혹은 교재에 대한 갈증은 남아 있었다. 번역서 가운데, 테렌스 혹스의 <구조주의와 기호학>은 입문서로서는 그 중 낫지 않을까라는 게 혼자 생각이었다. 그런데, 한국어로 된 그럴 듯한 입문서가 나왔고, 게다가 제법 재미가 있었다. 그것이 <기호학이란 무엇인가>였다.

하지만, 모든 교재에 유효기간이 있듯이, 이 책에 대한 흥미도 곧 가셔버렸는데, 뭔가 흥미있는 이야기를 시작하려다 만 듯한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한 친구가 책을 빌려가서 반납하지 않았어도 구태여 되찾으려고 하지 않은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러다가 갑자기 기호학을 '사용'할 일이 생겨서 다시 이 책을 구입했는데, 어느새 12쇄를 찍고 있었다. 어느 서평에서 이 분야의 '가장 재미있는 책'이라고 소개한 걸 보면, 이 분야의 다른 책들이 얼마나 고리타분하고 재미없는가(!)를 알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입문서로서 말이 좀 많은 게 흠이긴 하지만 기호학의 요모조모에 대해서 친절하게 소개하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다. 다만 미국대학에서 커뮤니케이션과 기호학을 가르친다는 저자의 배경 탓인지 다루어지는 소재와 텍스트들이 우리 주변의 것이 아니라는 게 마음에 걸린다. 이를테면, 번역서와 같은 인상을 주는 것이다. 후반부로 갈수록 내용에 탄력이 붙지만, 우리에게 낯선 텍스트들의 분석은 어느 정도 재미를 반감시킨다. 참고문헌에 한국어 논저가 한 권도 들어가 있지 않은 것도 그렇고. 따라서 기호학 입문서이긴 하지만, 한국 문학과 문화를 기호학적으로 읽어내는 데는 그다지 친절한 안내서는 아닌 듯싶다.

근래에 존 피스크가 쓴 <커뮤니케이션학이란 무엇인가>를 읽으면서(이 책의 절반 이상이 기호학에 관한 내용이다) 잘 쓴 교재가 어떤 것인가에 대해 강한 암시와 자극을 받았다. 아마도 이 책과 보완적으로 읽힐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한국 문화를 텍스트로 한 기호학 입문서는 언제쯤 읽어볼 수 있을까 하는 바람을 아직은 놓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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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0-07-12 15: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하, 커뮤니케이션학이란 무엇인가...이거 문고본으로 나와서 냉큼 샀었는데, 절반이상이 기호학에 대한 내용이었군요! <기호학이란 무엇인가> 저도 재미나게 있었더랬습니다~ 여튼 [~란 무엇인가]라는 개론적인 제목을 갖는 책을 많이 갖고 있는데, 이런 류의 책 중에서 <논리학이란 무엇인가>와 더불어 그 학문의 입문서 구실을 가장 적절히 하는 책인거 같습니다^^
 
인간 본성에 대하여 사이언스 클래식 23
에드워드 윌슨 지음, 이한음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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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전에 나온 자서전 <자연주의자>(민음사)를 읽으며 '개미학자'이자 '사회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에 대해서 조금 자세하게 알게 됐지만, 그와의 만남은 그보다 몇 년을 더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3인의 과학자와 그들의 신>(정신세계사)이란 책에서 다루고 있는 3인의 과학자 중의 한 명이 에드워드 윌슨이었던 것이다. 그 책을 읽은 이후 나는 그에 관한 모든 책들을 검색했고, 복사했고 사들였다...

해서 번역서든 원서이든 내가 갖고 있지 않은 그의 책은 데뷔작인 <곤충의 사회들>과 공저로 나온 또다른 책 한두 권뿐이다. 민음사에서 나온 <사회생물학>을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사서 읽고(물론 서론과 결론만) 오탈자를 지적하는 편지를 출판사에 보내기도 했다. 그래서 '너무 늦었다'는 <인간 본성에 대하여>에 대한 글에 감히(?) '에드워드 윌슨과 나'란 제목을 붙인다.

사실 이 책 동안 비교적 얇은 원서의 복사본을 <프로메테우스의 불>이란 책과 함께 나는 가지고 있다. 물론 읽을 틈을 내진 못했지만, 대략적인 내용의 윤곽은 잡고 있었는데, 짧은 시간에 번역본을 통독하면서 그 윤곽이 크게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한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굳이 읽을 필요가 없는 책이기도 하다. 리차드 도킨스의 책들도 열심히 읽은 나로서는 그리고 마빈 해리스의 <문화유물론>까지 읽은 나로서는 이 책의 내용이 한걸음 더 나아간 것처럼 보이지 않는 것이다. 물론 1978년에 나온 책이니까 좀 옛날 책이긴 하다!

상식적으로 보이는 책의 내용이 불만섞인 서평들을 적잖게 거느리고 있는 걸 보면, 아직도 우리 사회엔 '너무 빨리' 책이 나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적대적인 동료인 스티븐 제이 굴드가 <사회생물학>을 평하며 생물학적 '잠재론'과 '결정론'으로 자신과 윌슨을 구별지었지만, 그가 '유전자는 문화를 가죽끈으로 묶어놓고 있다. 끈은 상당히 길지만, 가치들은 자신들이 인간의 유전자 풀에 미치는 결과에 따라서 불가피하게 속박될 것이다'(233쪽)는 주장에까지 반대하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아마 둘 사이에 의견 차이가 있다면 그 끈의 길이에 대해서일 것이다.

윌슨은 문화의 다양성과 상대성에 대해서 부인하지 않는다. 다만 그것이 유전적 이익과 무관할 수 없음을 강조하고 있을 따름이다. 적어도 이 정도는 이제 상식으로 대우받아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진정한 프로메테우스적 과학정신은 인간에게 물리적 환경을 지배할 몇 가지 수단과 지식을 줌으로써 인간을 해방시키는 것을 의미한다'(285쪽)는 결론적인 '희망'에 동의하지는 않더라도 말이다.

게놈 프로젝트의 결과들이 밝혀지고 있고 그에 대한 해석들이 분분하다. 스티븐 제이 굴드는 단백질을 만들어내는 유전자 수가 생각보다(10만-14만개) 적다(3만5천-4만개)고 하여 의기양양해 하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유전자의 주도권(결정권이 아니다!)마저 의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문제는 'After Wilson'이어야 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 책은 우리가 완성해야 할 '진화 서사시'의 결론이 아니라 서장이다. 그 첫걸음마저 긴가민가하기에는 갈길이 너무 멀다. 에드워드 윌슨과 같은 탁월한 길잡이가 있을 때 발길을 좀더 재촉해야 하지 않을까? 너무 늦지 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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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4-06-11 17: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Thanks for inf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