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테르부르크의 대가
존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책세상 / 200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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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공의 작가 쿳시가 난데없이 1869년의 러시아 작가 도스토예프스키를 호출한다. 해외여행 중이던 도스토예프스키는 의붓아들 파벨의 죽음을 통고받고 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온다. 그리고 아들의 죽음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음모론을 쿳시-도스토예프스키는 교묘한 문학론으로 치환한다. 이것이 소설의 뼈대이다.

쿳시의 문학론은 일견 단순하다. 작가는 글쓰기를 위해서 모든 사람들 배반하고 또 영혼을 팔아먹는 작자라는 것. 그 배반의 맛은 식초맛인가, 쓸개맛인가? '이제 그는 그것의 맛을 느끼기 시작한다. 그것은 쓸개즙 맛이다.'(328쪽) 그렇다면 이 소설의 제대로 된 독법은 그 쓸개즙 맛을 얼마만큼 따라가느냐에 달려 있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책을 읽고난 감상은 다소 씁쓸했다...

실제 도스토예프스키의 의붓아들 파벨(1848-1900)은 소설에서 그려지는 네차예프 사건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그리고 도스토예프스키는 1869년에 페테르부르크에 간 일도 없다. 그렇다면 소설의 마스터(대가)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소설에서 작가 쿳시의 마스크이자 대행자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실제로 작가 쿳시는 아들을 자살로 잃었다고 한다. 아들의 죽음에 처한 한 작가가 그 비탄과 분노를 어떻게 떠밀어낼 것인가 하는 절박함이 이 소설에 형식을 부여하고 있다. 하지만, 그 형식은 다소 늘어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일단 '죽은 아이에 대한 슬픔은 끝이 없는 법이다'(103쪽)는 것이 전제이다. 하지만 결국 작가는 '죽은 아이를 살려낼 수 없다'(313쪽)는 것이 결론이다. 쿳시-도스토예프스키는 끊임없이 자신의 아들을, 아들의 영혼을 불러내고자 하지만, 그것은 불가항력적으로 불가능하다. 그에게 남겨져 있는 일은 다만 아들의 죽음을 수습하면서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그것이 이른바 배신의 글쓰기이다. 그런데 죽음의 의미는 '죽을 때까지 서로의 적인 아버지와 아들'(314쪽) 사이에서 생성된다. 여기서 '내' 아들의 죽음은 그 구체성을 상실하는 대신에 보편성을 획득한다.

그렇다면 러시아라는 시공간은 사실 이 소설에서 그다지 특별한 의미를 부여받지 못하며 플롯 또한 마찬가지이다. 소설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죽음에 대한 사변적인 푸닥거리이다. 그것은 여자들이 갖고 있는 굉장한 비밀로서의 울음을 갖고 있지 못한 사내들의 신음 소리이기도 하다.

아들의 죽음 이후에도 살아야 하는 아버지-작가란 무엇인가? 영혼을 단념한 존재들 아닌가! 소설은 그런 존재들이 가진 '고통의 무딘 부재'에 대해 이빨 사이로 새는 듯한 문장들로 서술하고 있다. 그것은 씁쓸한 쓸개즙 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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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를 위한 역사인가
케이스 젠킨스 지음, 최용찬 옮김 / 혜안 / 199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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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역사학자인 저자 젠킨스는 소위 포스트모던 역사연구의 권위자로 인정받고 있다 한다. 몇몇 관련 서적에서 그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었으니까 허언은 아닌 것 같고, 실제로 이 책은 대단히 재미있게 씌어져 있다. 원제는 <역사를 다시 생각하기Rethinking History>. 그것이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란 제목으로 번역된 것은, 다분히 E. 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를 의식해서이다. 카의 책이 소위 모던 역사학 입문의 정수를 요약하고 있다면, 젠킨스의 책은 포스트모던 역사학의 윤곽을 그려보이고 있다.

책은 서문과 세 개의 장으로 구성돼 있다. 1장에서는 '역사란 무엇인가'란 주제를 재검토한다. 저자의 시각은 '역사는 이론이고 이론은 이데올로기적이며 이데올로기는 바로 물질적 이해일 뿐이다'(62쪽)란 말로 요약될 수 있을 터이다. 그는 대학제도 안에서 만들어지는 역사만들기(making histories)의 관행에 대해서 의심하며 '공식적' 역사에 대해 의문을 던진다. 그리하여 '역사란 무엇인가'에 대해 그가 내리는 답은 간단하다. '역사란 역사가들이 만들어낸 것이다!'

2장에서는 역사담론의 근본문제들이 다루어진다. 과연 역사는 사실인가 해석인가를 놓고 이런저런이 토론이 벌어진다. 그에 대한 저자의 입장은 이번에도 간단하고 명확하다. '모든 역사는 과거 사람들의 마음의 역사가 아니라 역사가의 마음의 역사'(121쪽)라는 것. 따라서 역사는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적인 것이다(근래 파문을 일으키고 있는 일본의 역사 교과서는 이에 대한 비근한 예이다).

3장은 포스트모던 세계의 역사연구에 대한 조감이자 저자의 결론이다. 그는 회의주의, 좀더 심하게 말해 허무주의가 우리 시대(=포스트모던)의 지배적인 지적 전제임을 인정하고, 거기에서 다양한 역사만들기의 가능성을 타진해 보고자 한다. 요컨대 그는 역사인식에서의 허무주의를 긍정적으로 수용하고자 한다.

아주 간명하지만, 대단히 유익한 책이다. 하지만, 이 책의 만듦새는 낙제에 가깝다. 좀더 본때있게 만들어졌다면, 더 많이 읽힐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책장을 볼 때마다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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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의 잔인한 손
프란시스 베이컨 지음 / 강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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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 베이컨이 죽음이 저자인 아솅보에게 알려진 것은 1992년 4월의 마지막 화요일 오후였다. 그는 '나쁜 소식'을 듣자 마자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오! 저런, 그럴 수가.... 그렇게 착한 사람이!'였다. 그리고 이 미완의 대담집이 출간됐다. 원제는 <프란시스 베이컨: 미셀 아솅보와의 대담>.(베이컨은 데이빗 실베스터와의 대담도 남기고 있다.)

책을 구성하고 있는 것은 아솅보와의 세 차례에 걸친 대담이다. 그 속에서 베이컨은 회화에 대한 자신의 확고한 주관을 거침없이 토로하며, 문학과 음악, 그리고 사진, 영화 등 주변 예술 장르와 자신의 관계, 교우관계, 삶의 이력과 예술관 등을 털어놓는다.

모든 뛰어난 예술가들이 다 그런 건 아니지만, 그는 비교적 뛰어난 언변을 자랑한다. 가령 서문격으로 옮겨진 글에서 밀란 쿤데라도 인용하고 있는 그의 말들: '분명히 우리는 육신입니다. 우리는 미래의 시체인 셈이죠. 나는 푸줏간에 갈 때마다, 짐승 대신에 내가 걸려 있지 않음을 알고는 늘 놀라곤 하지요.' 그의 그런 말들이 '급진적 유물론자'라는 평을 만들어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말들을 좋아하는 나 또한 굳이 분류하자면 급진적 유물론자에 가까울 모양이다.

다른 책에 들어 있는 거지만, 베이컨은 '우리의 삶에는 아무 의미가 없다.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삶에 의미를 부여할 따름이다'라는 투의 말을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대상이 아닌 사물을 그리고자 했던 세잔의 계보에 속하는 듯하다. 사과를 그려놓고, '사과가 되라!'는 주문을 외쳤다던 세잔이 들뢰즈의 말대로 사과-신체를 그렸다고 하면 베이컨은 고기로서의 인간-신체를 그린 것. 그건 다르게 말하면 인간의 종언이 아닐까? 인간의 종언을 예시하는 예술들. 그런 의미에서 쿤데라는 베케트와 베이컨을 나란히 놓는다.

'두 사람은 예술사에서 무엇인지 모를 동일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것은 무엇일까? 두 사람은 아마도 드라마 예술의 최후의 단계, 혹은 회화사에서 최후의 단계에 위치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베이컨은 유화 물감과 붓을 표현의 언어로 사용한 마지막 화가 가운데 한 사람일 것이기 때문이다.'(24쪽)

이 마지막 화가에게 있어서 그림은 우연성의 도박이었다. 지저분하기로 악명 놓은 자신의 작업실에서 그는 자신의 작업이 뭔가를 성취하기로 기대했는데, 그 성취란 것은 언제나 우발적인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보면, 대부분 실패했다고 자인하는 그이지만 아주 불운했던 것은 아니다. 왜 그런가하는 점은 대담을 직접 읽어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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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컨: 회화의 괴물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84
크리스토프 도미노 지음 / 시공사 / 199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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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컨'이란 이름을 듣고 가장 먼저 연상되는 것이라면 돼지 뱃살을 훈제한 바로 그 베이컨일 것이다. 거기에 인문학적 소양이 좀 있고 약간 배가 부른 사람이라면 영국의 경험철학자 프란시스 베이컨을 떠올려볼 수도 있겠다. 나는 오래 전에 '아는 것이 힘!'이라는 붉은 고딕체 페인트 글씨가 흰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 고등학교를 3년 동안 다닌 적이 있다. 그 학교 또한 한국의 대부분의 고등학교와 마찬가지로 베이컨 계열의 학교였던 것...

자, 여기까지가 '베이컨'이란 기호가 가지고 있는 외연적 내포적 의미들이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나에겐 돼지고기 베이컨을 물리치고 '베이컨'의 외연적 의미(디노테이션)를 차지하고 있는 강적이 등장했으니 그가 바로 '회화의 괴물' 프란시스 베이컨(1909-1992)이다. 철학자 베이컨과 동명이인이겠거니 했는데, 알고 보니 베이컨 가문의 후손이고, 프란시스란 이름을 그의 아버지가 일부러 붙여 주었다고 한다. 이 베이컨이 가장 좋아하는 작가에 셰익스피어가 있는데, 한때는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을 철학자 베이컨이 쓴 게 아닐까 하는 의혹이 있었던 만큼 그의 셰익스피어 선호에는 농담 반 진담 반의 이유도 있는 셈이다...

아일랜드 태생으로 한번도 미술교육을 받아보지 못했던 베이컨은 엄마의 속옷을 입어 봤다가 열여섯 살에 집에서 쫓겨난다.(나중에 그는 동성연애자가 된다.) 그리고 전전했던 여러 직업 가운데는 요리사도 포함돼 있다고 하니 그의 생활고를 짐작케 한다. 하지만, 1927-1929년 사이의 파리 생활을 통해 그는 인생의 전환기를 맞게 되고 자수성가한 화가가 된다(그는 20세기에 가장 잘 팔린 화가의 한 사람이다).

여기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던 인물이 바로 파블로 피카소(정확히는 그의 그림들). 미술의 문외한인 나로서는 처음 그의 그림들을 보고(들뢰즈의 <감각의 논리>에서 처음 보았는데) 입체파라고 해야 하나, 표현주의라고 해야 하나 헷갈렸는데, 그건 좀 무식한 생각이었고, 그의 비틀린 육체의 형상들은 좀더 고차원적인 의미를 갖는다는 걸 이 책을 통해 알 수 있었다. 들뢰즈의 표현을 빌면, 그는 형상적인 것에서 '형상'(Figure)을 빼내고자 한다. 더 쉽게 말하자면, 그는 외치는 사람들이 아니라 외침 그 자체를 그리고자 한다. 한 대목을 인용하자면:

'베이컨에게 이 고통받는 육체는 보편적 존재의 체험과 자기 자신의 삶의 경험을 뒤섞어준다. 너무나 자주 그려진, 고통의 보편적 상징으로서의 예수의 이미지와 푸줏간의 도마 앞에서, 그리고 쉽게 부패하는 고기 앞에서 느끼는 구체적 감각이 그 안에 섞여 있다. 가죽이 벗겨지고 피 흘리고 퍼렇게 멍든 그 육체를 그려 베이컨은 고집스럽고 친절하게 이를 일깨우려 한다. 베이컨의 잔혹함은 모든 애정이나 감정뿐 아니라 혐오스러움마저 초월한 바로 이 급진적인 유물론에서 나온다.'(90-93쪽)

다시 들뢰즈의 말을 빌면, 현대 회화는 두 가지 조건에 직면해 있다. 우선 사진이 회화적이고 자료적인 기능을 떠맡게 되었고, 다음으로 작품에 회화적 의미를 부여했던 종교로부터 자유로워졌다. '이처럼 종교적 감정을 거부하고 사진에 포위당한 현대 미술은 회화에 잔존해 있는 것으로 보이는 비참한 영역인 '구상성'과의 관계를 끊어야'(121쪽) 했으며 추상회화는 그 사례이다. 그리고 베이컨이 제시하는 건 그 또다른 사례이다. 그 또다른 사례에 대한 입문서로서 이 책은 더할 나위없다. 134개의 각종 도판과 사진이 그 증거이다. 그래서 아쉥보와의 대답집 <화가의 잔인한 손>과 더불어 적극 추천할 만하다. 그 대담집에 있는 거지만, 베이컨은 영화감독도 되고 싶었다고 한다.

어쨌거나 베이컨의 그림들은 강렬한 몰입의 기회를 제공해 준다. 그리고 '느끼는 것이 힘!'이란 걸 정말 느끼게 해준다. 이것이 내가 돼지고기 베이컨이나 철학자 베이컨보다 화가 베이컨을 더 좋아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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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와 황홀 - 우리시대의 지성 5-014 (구) 문지 스펙트럼 14
송상일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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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고한 평론가 김현의 글 어디에선가 송상일이란 이름을 본 적이 있다. 퍽 상찬했던 거 같고, 종교적이라는 얘기도 붙어 있었던 거 같다. 그리고는 한 세기가 지났다! 김현이 작고한 지도 10년이 넘었고! 아주 드물게 보는 송상일의 이번 에세이집은 그런 기억들을 떠올려 주었다. 아주 황홀하게!...

<책머리에서> 저자는 '시간의 틈새들을 훔치듯 낚아채며 썼다. 그래서 천식 앓는 문장이 되었다.'고 미리 겸양조(혹은 변명조)의 문장을 쓰고 있지만, 가끔 천식을 앓는 나는 아직 그와 같은 문장, 천식 앓는 문장(!)을 쓰지 못한다. '천식 앓는 문장'이란 표현에서도 짐작되는 바이지만, 책은 산문(어떤 논변)이라기보다는 시이다. 그리고 저자가 줄곧 국가와 대응시키면서 옹호(?)하고 있는 것도 역시 시이다. 그는 시로써 시를 옹호한다. 일종의 동어반복인데, 그의 말을 빌면, 시는 동어반복의 운명으로써 모든 '있는 것들'에 저항한다. 아니 본때를 보여준다. 마치 논개의 낙법처럼...

<국가와 황홀> <존재와 무> <제유> 세 개의 장과 보탬말, 그리고 부록(<똥 이야기>)으로 돼 있는 이 책을 지난 한주 아주 아껴서 읽으며 나는 한 가지 의문을 풀 수 있었다. 그것은 내가 간혹 왜 시도 때도 없이 (허)무에 직면하는가, 혹은 그에 포박당하는가 하는 것이었는데, 저자에 의하면 나에겐 아무래도 '시인'될 기질이 있는 모양이다!

그에 의하면, 시는, 그리고 시인은 존재가 아닌 (허)무에 들려 있는 존재(또 존재?)이다. 시인은 미래를 가늠하지 않으며(계산하지 않으며) 따라서 어떠한 생산적 활동과도 무관하다. 에로스(생식적 섹스)와 무관한 에로틱(생식 없는 섹스)이 그러하듯이. 그리하여 생식 없는 섹스에 몰두할 때, 즉 에로틱에 몰입할 때, 그리고 시를 쓸 때, 우리는 얼빠진 존재들이다. 저자는 이 얼빠진 존재의 위엄에 대해서 아주 우아하면서도 튼튼한 문장들로 말한다. 그 점이 맘에 든다...

황홀은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는 것이니, 이 책에서 국가/황홀이란 이분법이 결국 무얼 생산했느냐고 묻는 것은 번지수를 잘못 짚은 것이리라. 다만, 읽고 기뻐하며 가까이 둘 일이다. 이런 문단 하나만으로도 이 책은 제값을 다하고 있으니까...

'정액을 소비하는 동물은 시를 쓰는 동물밖에 없다. 정액의 낭비는 유별나게 인간적인 행위이다. 그런 점에서 금욕주의는 동물적인 데가 있다.'(34쪽) 우리 주변엔 부자 동물과 가난한 동물 들이 얼마나 많은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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