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달 '사람과 책'(100호)의 '로쟈, 고전과 만나다' 꼭지를 옮겨놓는다(미처 퇴고하지 못했던 부분은 교정했다). 지난달 말에 마감을 넘겨 촉박하게 쓴 기억이 있다. 플라톤의 <국가>에 대해서 몇마디 적었는데, 짧은 분량에 개괄적인 내용을 담으면서도 상식적인 중언부언은 피하고자 했지만 뜻대로만 되지는 않았다. 몇 가지 꼬투리는 다음 기회를 위해서 남겨놓았다. 시간이 없어서 2차문헌은 따로 언급하지 않았지만 강의 때는 김영균의 <국가>(살림, 2008)과 숀 세이어즈의 <플라톤 국가 해설>(서광사, 2008)을 주로 참고했다.

 

 

사람과 책(12년 10월호) 올바름에 관한 철학

 

대선을 두어 달 앞둔 정치의 계절인 만큼 정치철학의 고전도 만나보는 게 좋을 듯싶어 이달에는 플라톤의 <국가>(서광사)를 읽어보기로 한다. 초면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낯익은 체하기도 뭐하다. 데면데면한 고전이라고 할까. 고전은 으레 ‘다시 읽어야 하는 책’이지만, 동시에 ‘다시 읽어도 다 못 읽는 책’이다. 읽다가 중간에 덮는다는 뜻이 아니다. 마지막 책장을 넘기고 나서도 여전히 읽을거리가 남는다는 얘기다. 때문에 전체를 일독한 다음에는 주요한 대목들에 대한 재독과 정독이 필요하다. 고전 독서는 품이 많이 드는 독서다.


<국가>는 세 시기로 나눈 플라톤의 대화편 가운데 중기에 속하는 작품이다. 초기 대화편들은 소크라테스의 철학적 행적을 재구성하고 있기에 ‘소크라테스적 대화편’이라고도 부른다. 어떤 개념이 문제를 정의하고 논박하는 내용이 많으며 주로 짧은 문답법 위주로 돼 있다. 당시 소피스트들의 대중연설 방식 대신에 소크라테스가 선호한 것은 단답식 문답법이었다. 자신은 무지한 자로 자처하면서 연속적인 질문을 통해 상대방이 무지를 자인하게끔 하는 것이 소크라테스의 전형적인 수법이다. 제자들은 그러한 수법에 경탄을 아끼지 않았지만 그의 논적들은 그런 방식을 아주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전체 10권으로 이루어진 <국가>에서 제1권은 그러한 문답법으로 구성돼 있으며 나머지 제2권부터 제10권까지는 소크라테스가 제자들의 질문에 길게 답하는 형식이다. 이런 구성방식의 차이 때문에 1권과 나머지 대목이 쓰인 시기가 다르다고 보는 학자도 있다. 전체적으론 젊은 소피스트 트라시마코스와의 논쟁 위주로 돼 있는 1권의 요지를 뒤이은 2-10권이 자세하게 보충하면서 한 번 더 반복하는 식이다. 대화적 형식을 갖추고는 있지만 소크라테스의 일장연설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며, 그런 점에서 초기 대화편과는 달리 플라톤의 관점과 색깔이 많이 투영돼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소크라테스라는 대역을 통해서이긴 하지만 스승인 소크라테스의 그늘에서 벗어나 자신의 목소리를 본격적으로 내기 시작하는 게 플라톤의 중기와 후기 대화편들이다. 즉 <국가>에서 소크라테스는 곧 플라톤 자신이기도 하다. 


<국가>라는 명칭을 갖고는 있지만 주로 다루는 주제가 ‘올바름(정의)’의 문제이기에 <국가>에는 ‘올바름에 관하여’란 부제가 붙여지기도 했다. 애초에 발단은 트라시마코스가 올바름이란 더 강한 자의 편익에 불과하다는 주장을 펼침으로써 소크라테스를 자극한 데 있었다. 그의 주장을 소크라테스는 올바르지 못함이 올바름보다 더 이득이 되며, 올바르지 못한 사람의 삶이 올바른 사람의 삶보다 더 낫다는 주장으로 받아들인다. 그와는 반대로 올바른 사람이 행복하며 올바르지 못한 사람은 불행하다는 게 소크라테스의 주장이다. 하지만 올바름이 올바르지 못함보다 더 나은 것이라는 주장은 곧바로 쉽게 수긍하기 어렵기에 소크라테스는 이를 입증하고 설득하기 위해 굉장히 긴 설명을 동원하는 수밖에 없다. <국가>가 여느 대화편들의 몇 배에 해당하는 분량을 갖게 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올바름이 올바르지 못함보다 더 낫다는 주장을 펼치기 전에 필요한 것은 올바름에 대한 정의다. 무엇이 올바름인가를 먼저 물어야 하는 것이다. 특이한 것은 소크라테스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취한 절차다. 올바름에는 개인의 올바름과 국가의 올바름, 두 가지가 있을 터인데, 한결 규모가 큰 올바름을 이해한다면 작은 형태의 올바름도 쉽게 이해할 수 있으리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곧 국가의 올바름을 알게 되면 개인의 올바름은 자연스레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국가의 올바름과 개인의 올바름 사이의 유사성을 전제로 하는데,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자면 결코 자명한 전제가 아니다(가령 라인홀드 니버의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가 말해주듯이 개인과 사회의 도덕성이 불일치하는 경우도 우리는 얼마든지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럼에도 일단 소크라테스의 주장을 따라가자면, 그는 국가를 구성하는 세 계층이 각자의 역할과 직분에 충실할 때 국가가 올바른 상태에 놓인다고 말한다. 생산자와 전사, 그리고 통치자가 그 세 계층이며, 절제와 용기와 지혜가 그들이 가져야 할 각각의 미덕이다. 이러한 미덕을 갖추고 각자가 자신에게 맞는 일을 하는 것이 훌륭한 나라의 조건이고 특징이다. 국가의 올바름이 그렇게 가능하다면 개인의 경우는 어떤가. 소크라테스는 우리의 혼 또한 국가와 마찬가지로 세 부분으로 구성돼 있다고 주장한다. 욕구와 격정, 그리고 이성이 그 세 부분이며 이는 국가를 구성하는 세 계층에 대응한다. 올바른 국가의 경우처럼 우리 자신 안에 있는 각 부분이 제대로 일을 하게 되면 올바른 사람이 된다. 반대로 올바르지 못한 사람이란 혼을 구성하는 각 부분들이 서로 참견하거나 간섭하면서 내분을 불러일으킨 상태다. 결국 올바름은 훌륭한 상태로서 혼의 건강을 뜻하며 올바르지 못함은 나쁜 상태로서 혼의 질병을 가리킨다. 

 


올바름이란 주제에 한정하여 <국가>의 주장을 간추리면 그렇다. 하지만 대개의 고전이 그렇듯이 <국가>에도 흥미를 끄는 곁가지 이야기들이 포함돼 있다. 국가와 개인에서 올바름이란 무엇인가를 설명한 소크라테스가 올바른 정체(政體)와 대비되는 잘못된 정체들에 대해서 설명하려고 할 때 제자들은 수호자 계층(전사와 통치자)의 처자 공유 문제, 출산과 양육 문제에 대해 더 자세히 설명해달라고 요청한다.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좀 망설이다가 자신의 견해를 세 가지 파도에 견주며 밝힌다. ‘파도’란 비유는 파격적인 주장에 대한 암시다


첫 번째 파도는 여성도 수호자로 임명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소크라테스는 여성도 남성과 똑같이 양육되고 교육을 받아 동등한 정치적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당시 아테네 민주정에서 여성과 노예에게는 참정권이 부여되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러한 남녀 평등적 사고는 충분히 파격적이다. 소크라테스가 드는 비유로 치면 이것은 레슬링 도장에서 여자가 남자들과 똑같이 옷을 벗고 운동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연적 이치에 따라서 여성에게도 남성과 동일한 자격이 부여돼야 한다고 믿는다. 어떤 이치인가? 전사 계층이 가져야 할 성향의 모델이 되는 감시견의 경우 암컷과 수컷은 그 역할에서 차이가 없다. 즉 양떼를 보살피는 일을 암컷도 할 수 있다면 여성도 전사로서 자기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것이 자연적 이치다.


두 번째는 더 큰 파도다. 소크라테스는 수호자 계층의 경우 모든 처자식을 공유하고 개인적인 동거는 금지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조치의 목적은 무질서한 성적 관계를 갖지 못하게끔 하기 위해서다. 성에 대한 전체주의적 통제를 연상시키는데, 기본 발상은 우생학적인 고려에 근거를 둔다. 가령 사냥개의 경우에 좋은 혈통끼리 짝짓게 하여 최선의 새끼들을 얻으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도 최상의 통치자들을 얻어내기 위해서는 함부로 짝을 짓게 하면 안된다. 따라서 최선의 남자들이 최선의 여자들과 가능한 한 자주 성적 관계를 갖게 하고, 변변찮은 남자들은 변변찮은 여자들과 더 드물게 성적 관계를 갖도록 해야 한다. 남녀가 정해진 축제 기간에 추첨을 통해서 만나게 돼 있지만, 그러한 우생학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정교한’ 추첨방식이 필요하다고 소크라테스는 말한다. 그렇게 가장 사적인 가족마저도 공유의 대상이 된다면 모든 시민이 국가를 위해 더 굳건하게 단결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문제는 이 두 가지 파도보다도 훨씬 더 강력한 세 번째 파도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철학자가 국가를 통치해야 하다는 이른바 ‘철인통치론’이다. 통치자가 갖춰야 할 덕목이 지혜인 만큼 ‘지혜를 사랑하는 자’로서 철학자가 통치에 적합할 것이라는 점은 당연해보이지만, 철인통치론이 남녀평등론이나 처자공유론보다도 더 파격적인 주장으로 간주된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소크라테스의 이런 주장에 대해 사람들이 웃통을 벗어던지고 달려들 것이라는 응답은 당시 아테네에서 철학자가 가졌던 부정적 평판을 짐작하게 한다. <국가>에 대한 흔한 상식은 철학자가 통치하는 이상국가론을 펼친 책이라는 것이지만, 정작 플라톤 자신이 그러한 ‘올바른 국가’의 실현가능성에 대해서 과연 얼마나 확신한 것인지는 수수께끼로 남는다. 이번에도 <국가>를 다 못 읽는 이유다.


12. 10. 08.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뽀미 2019-10-09 2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로쟈이십니다. 철저히 독자를 매료시키심...

birdy30 2019-10-14 2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지금 국가를 읽고있는데, 만약 플라톤의 국가가 실현가능하다해도 이번 생에선 그 국가의 국민은 되고싶지않다는 생각이 드네요. 3천년 뒤에 새로운 혼으로 다시 태어날땐 맘이 바뀔지도 모르겠으나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