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사적인 독서>(웅진지식하우스, 2013)의 서문을 옮겨놓는다. 미리보기로도 읽어볼 수 있지만, 이 서재에도 걸어놓는 게 좋을 것 같아서다. 서문을 포함해서 목차의 제목들은 모두 편집자가 붙인 것이다. 여담이지만 책의 처음 가제는 <마담의 서재>였다. 아마 그렇게 결정됐다면 전혀 다른 표지가 나오지 않았을까 싶다...  

 

 

이 책은 일곱 편의 고전에 대한 강의를 묶은 책입니다. 대학 안팎에서 고전에 대한 강의를 여러 해 동안 해오고 있는데, 강의라고는 하지만 실상은 '독서'의 제안이고 권유입니다. 그렇다고 이 자리에서 독서의 가치를 새삼 강조하지는 않으려고 합니다. 책을 읽지 않는 무독서도 하나의 선택이고 그것이 삶의 신조인 분도 계시겠지요. 한편에 독서가가 있다면 다른 편에는 무독서가도 있을 법합니다. 제 관심은 무독서가가 아니라 독서가, 그리고 잠재적 독서가에 가 있습니다. 평소에 책을 좋아하고 독서를 즐기는 분이 독서가라면, 독서의 가치에 공감하고 책을 읽고 싶지만 어떻게 읽어야 할지 자신이 없거나 경험이 부족한 분들을 잠재적 독서가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예비 독서가라고 할까요. 이 강의는 그런 분들을 위한 독서의 시범 같은 것입니다.


잠재적 독서가는 물론이고 아무리 책을 남들보다 많이 읽는 독서가라 할지라도 모든 분야의 책을 두루 망라해서 읽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필독할 만한 고전에 한정하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생독서계획’을 세워야 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입니다. 그래서 길잡이가 될 만한 가이드북이 필요하고 로드맵이 필요합니다. 한정된 시간을 좀 더 유익한 독서에 할애하기 위한 방도이고 곁눈질이지요. ‘나는 이렇게 읽는다’라는 독서의 시범은 그런 용도로서 의의를 갖는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스타일의 독서를 만들어나가는 과정에서 참고해볼 수 있는 것이죠.


주로 문학고전 독서에 관심을 가진 분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하고 그것을 책으로 엮으면서 제가 고심한 것은 ‘규모’입니다. 이 책의 각 장은 대부분 두 시간짜리 강의를 풀어서 편집한 것입니다. 실제 강의한 내용에서 분량을 많이 덜어냈기 때문에 짐작으론 90분 강의 정도의 분량일 듯합니다. 이러한 시간상의 제약과 형식적 제약은 동시에 강의의 조건이기도 한데, 그 정도 분량 안에서 작가와 작품에 대해 요령 있게 소개하고 흥미를 부추김과 동시에 제 나름의 해석을 보태고자 했습니다. 이런 경우, 너무 간략해도 안 되고 너무 자세해도 곤란합니다. 너무 가벼워도 안 되고 너무 무거워도 안 됩니다. 너무 식상해도 안 되고 너무 생경해도 안 되지요. 그러면서 재미도 있어야 하고, 우아하면 더 좋습니다. 그래서 그런 결과를 얻었는지에 대해선 제가 판단할 수 없지만 적어도 그런 걸 염두에 두었다고는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사실 시범 조교의 역할은 절반만 보여주고 나머지 절반은 실제로 해보도록 보조하는 것이죠. 가령 자전거를 탈 때도 처음에는 누가 뒤에서 붙잡아주는 게 필요합니다. 몇 차례 그런 도움을 받게 되면 그 다음에는 스스로 탈 수 있게 되지요. 독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처음에는 어렵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길잡이가 될 만한 책을 읽고 도움을 얻게 되면 곧 스스로 책을 읽어나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한번 읽었던 책이라도 다시 읽고서 새로운 발견을 하거나 더 깊은 이해에 도달할 수도 있습니다. 이 책이 그런 자극과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저로선 최선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책의 제목은 <아주 사적인 독서>로 정했습니다. ‘사적인’이란 말이 여러 가지 뜻을 가질 수 있지만 여기서는 ‘남을 위한 독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한 독서’라는 의미로 쓰고자 합니다.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교양으로서의 독서는 ‘읽은 척 매뉴얼’을 참고하는 것으로도 충분합니다. ‘아주 사적인 독서’는 철저하게 자기 자신을 위한 독서를 가리킵니다. 나의 관심과 열망, 그리고 성찰을 위한 독서입니다. 그런 독서의 과정에서 우리는 고전과 나 사이의 사적이고 은밀한 관계를 각자 만들어나가게 됩니다. 강의에서 간간이 제가 작품에 대한 주관적인 판단이나 견해를 서슴지 않고 제시한 것은 그런 ‘사적인 독서’의 일면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이 책에서 다룬 작품은 <햄릿>부터 <돈키호테>, <파우스트>, <석상손님>, <마담 보바리>, <주홍글자>, <채털리 부인의 연인>까지 일곱 편입니다. 모두 ‘욕망’의 문제를 다룬 작품이라는 게 공통점입니다. 처음에는 그런 순서로 목차를 짜려고 했지만 주인공의 성별에 따라 각각 남성 편(<햄릿>, <돈키호테>, <파우스트>, <석상손님>)과 여성 편(<마담 보바리>, <주홍글자>, <채털리 부인의 연인>)으로 분류할 수 있게 되자 ‘레이디 퍼스트’의 정신에 따라서 여성 편을 앞에 배치했습니다. 어떤 장을 먼저 읽을지에 대한 판단은 전적으로 독자의 몫이지만 제가 권장하고 싶은 것은 ‘여성 편’을 순서대로 읽거나 ‘남성 편’을 순서대로 읽는 것입니다. 가장 유명한 서양문학 고전들에 나타난 여성적 욕망과 남성적 욕망이 어떤 것인지 일람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된다면 저로선 기쁘겠습니다

 

짐작에 푸슈킨의 <석상손님>이 다소 생소할지 모르지만 가장 대표적인 <돈 후안> 텍스트로 고른 것이고, 그렇게 따지면 너무도 유명한 작품들만 모아놓은 셈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실상 이 작품을 모두 읽은 독자는 그리 많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너무도 유명하지만 아무도 안 읽는 책’이 고전이라는 말이 그래서 농담만은 아닙니다(어떤 고전 가이드북은 아예 제목이 <아무도 읽지 않는 책>입니다!). 아무래도 ‘고전’이란 말 자체가 ‘남들은 좋다지만 나와는 무관한 책’, ‘괜히 남들 따라 읽느라고 고생하는 책’이란 인상을 심어주는 게 아닌가도 싶습니다. 그래서 ‘고전에 대한 강의’도 덩달아 ‘나와는 무관한 강의’란 애꿎은 누명을 덮어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강의에서, 그리고 이 책에서 저는 고전을 최대한 우리 가까이에 갖다놓고 싶었습니다. 가까이 갖다놓는다는 게 집 현관에 갖다놓거나 부엌에 갖다놓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작품이 갖는 보편성을 발견한다는 의미입니다. 그 발견은 자기 발견의 구문으로 이루어집니다. ‘나는 햄릿이다’, ‘나는 돈키호테다’, ‘나는 보바리다’라는 식입니다. 이런 작품들을 읽으면서 우리는 각자가 자기 안의 햄릿과 돈키호테와 파우스트와 돈 후안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그 배합비율까지도 예민하게 의식할 수 있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 주인공들이 바로 근대인의 전형적 초상이기 때문입니다. 사정이 그렇다면 이 작품들은 남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의 고뇌와 욕망과 광기와 탄식의 이야기입니다. 저는 그것이 고전이 갖는 현재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칫 진부해보일지도 무르는 주인공들의 물음에 나의 물음이 포개질 때, 고전 독서는 시간이 남아돌 때나 가능한 독서가 아니라 필수적인 독서의 의미를 갖게 될 것입니다. 고전 강사, 곧 '고전을 읽어주는 사람'으로서 제가 기대하는 바이기도 합니다

 

이 책에 수록된 강의는 대부분 제가 개인적으로 6년째 진행해오고 있는 책사랑 강좌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책사랑은 고전 애독자들의 자발적인 독서모임입니다. 매학기 16주씩 커리큘럼을 짜고 매주 수요일 오전에 함께 고전을 읽는 강좌를 지속해온 것이 저에겐 독서의 또 다른 자극이 됐고 공부의 밑거름이 됐습니다. 부족한 점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강의에 참석해준 회원들께 이 자리를 빌려서 깊은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 녹취된 강의를 풀어서 초고를 만들고 편집자로서 책의 꼴을 만들기 위해 애쓴, 게다가 더디게 진행된 교정 작업을 인내해준  박혜정 편집자에게도 특별한 감사를 표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었기에 저에겐 모두가 좋은 인연입니다.  

 

13. 0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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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이은 강의 공지다. 날이 좀 풀리면서 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느끼게 해주는데, 3월부터는 강의만으로도 분주할 듯싶다. 오늘 대구현대백화점에서 1-2월에 진행한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 마지막 강의가 있었고, 3-4월에는 '보르헤스가 초대하는 바벨의 도서관'이란 타이틀의 강의를 진행한다. 보르헤스가 직접 고르고 해설을 붙인 '바벨의 도서관' 시리즈의 여섯 작품을 6주에 걸쳐서 읽어보는 강의다(http://blog.naver.com/hcntculture/130158924413). 일정은 아래와 같다.

 

 

 

보르헤스가 초대하는 바벨의 도서관
금 15:30~17:10 (3/8 개강)

 

3.8 I 에드거 앨런 포 <도둑맞은 편지> - 19세기 최대의 독창가

에드거 앨런 포가 심연의 공포에서 길어 올린 환상

 

 

3.15 I 너새니얼 호손 <큰바위 얼굴> - 미국문학의 뿌리

<주홍글자>로 알려진 호손의 칩거와 몽상에 관한 우화

 

 


3.22 I 허먼 멜빌 <필경사 바틀비> - 미국문학의 고전

삶의 불행과 고독을 관통하는 멜빌의 독특한 상상력

 

 

3.29 I 빌리에 드 릴아당 <지난 파티에서 만난 사람> - 낭만적 상상력, 대담한 풍자

 

 

4.5 I 프란츠 카프카 <독수리> - 20세기 문학의 대표자

세계문학사상 가장 독특한 작가 카프카의 슬픔과 지연의 이중주

 

 

4.12 I 잭 런던 <미다스의 노예들> - 미국문학의 대표자

끝없는 방랑의 작가 잭 런던이 보여주는 극한적 삶

 

 

13. 0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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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공지다. <아주 사적인 독서>(웅진지식하우스, 2013) 출간을 계기로 푸른역사 아카데미에서 '로쟈와 함께 읽는 고전문학' 강의를 진행하게 됐다(http://cafe.daum.net/purunacademy/8Bko/85). 세칭 '저자 직강'이다. 일정은 3월 14일부터 4월 25일까지 7주간 매주 목요일 저녁 7:30-9:30이다. 강의에서 다룰 고전문학 작품들에 관심있는 분들은 참고하시길.

 

 

<강의일정>

3월 14일 ~ 4월 25일 매주 목요일 저녁 7시 30분

 

1. 3/14 내 욕망은 내 것인가 - 《마담 보바리》

 

 

 

2. 3/21 법과 정의를 묻다 - 《주홍 글자》

 

 

3. 3/28 온전한 자신의 발견 - 《채털리 부인의 연인》

 

 

 

4. 4/ 4 너는 누구인가, 그리고 나는 누구인가 - 《햄릿》

 

 

 

5. 4/11 숭고한 광기에 대하여 - 《돈키호테》

 

 

6. 4/18 사람은 무한한 꿈을 가져야만 하는가 - 《파우스트》

 

 


7. 4/25 어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 《석상 손님》

 

 

13. 0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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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리수거를 하고 들어오는 길에 우편함에서 이번달 책&(415호)을 들고 왔다. 지난주에 설 합본호가 나왔기 때문에 주간지들은 내주에나 다시 올 거고, 주문한 책들은 보통 늦은 오후에나, 혹은 다음날 오전에나 배송된다. 이달의 책&에도 어김없이 '주제별 도서 소개'가 실렸다. '로쟈'라는 필명 대신에 본명이 들어갔군(이달부터인지 지난달부터인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이달의 주제로 골랐던 건 '미국헌법'이었다. 다루다 보니 한국 헌법 애기도 조금 들어갔다(지면에 편집자가 잘못 교정한 부분이 있어서 바로 잡는다).

 

 

 

책&(13년 2월호) 미국과 한국의 헌법사

 

최근 미국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하나된 미국’을 역설하며 2기 취임식을 치르고 새로운 임기에 들어갔다. 그런데 그의 취임선서는 두 번 있었다. 헌법이 명시한 취임 날짜는 1월 20일이지만 일요일이어서 백안관에서 먼저 취임선서를 하고 이튿날 국민 앞에서 한 번 더 취임선서를 했다. 언론에서는 이를 비공식 취임식과 공식적 취임식으로 구분하기도 했다. 1789년 첫 대통령 취임식이 열린 이후로 미국 역사상 취임식 날짜가 일요일에 걸린 경우는 이번이 7번째라고 한다.

 

취임식 날짜는 원래 3월 4일이었지만 1933년 제정된 수정헌법에 따라 1월 20일로 바뀌었다. 그날 정오에 대통령은 “나는 성실히 합중국 대통령직을 수행하고 내 능력의 최선을 다해 합중국 헌법을 유지하고 보호하며 보위할 것을 엄숙히 선서합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헌법 2조 1항에 명시된 문구다.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민주정치의 오랜 전통을 이어가고 있는 미국의 헌법은 어떻게 만들어졌고 어떤 특징을 갖고 있으며 우리 헌법과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이달에는 미국 헌법을 다룬 몇 권의 책을 손에 들어보기로 한다.


제일 먼저 눈길이 가는 책은 조지형의 <미국헌법의 탄생>(서해문집, 2012)이다. 제목 그대로 미국헌법의 탄생과정과 그 사상적 연원, 그리고 미국의 헌정 구조에 대해 소개하고 있는 책이다. 저자는 “미국헌법에 대한 체계적 규명, 미국헌법 제정사와 미국헌법의 헌정 원리에 대한 포괄적이며 구체적인 설명을 제시”하고자 했다고 적었다. 저자에 따르면, 미국헌법은 통치를 위한 것이 아니라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것이라는 의미에서 제한헌법(limited constitution)의 정신을 갖는다는 데 가장 큰 특징이 있다. 이 이념은 정부에 부여하는 권한을 명시적으로 열거함으로써 구체화되었는데, 이는 헌법에 명시되지 않은 권력행사는 불법이며 위헌이라는 뜻이다.


미국헌법은 1787년 4개월 반이라는 짧은 기간에 걸쳐 작성되었지만, 실상은 ‘미국혁명’으로 일컬어지는 11년간의 시행착오와 준비기간을 거쳐 제정되었다. 미국의 독립전쟁(1776-1787)을 미국혁명이라고도 부르는 이유는 단순히 식민지 모국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하는 시기일 뿐만 아니라 왕정에서 민주공화정으로 옮겨가는 시기이고 최초의 성문헌법이 제정된 시기이며 동시에 흑인과 여성 등 소수자의 자유와 인권이 신장된 시기이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는 1776년부터 여러 종류의 헌법이 실험됐는데, 미국혁명 초기에는 입법부 중심의 헌법이, 그리고 그 진행과정에서는 최고행정관이 중심이 되는 헌법이 출현했다. 각각의 시행착오는 행정부 우월주의와 입법부 우월주의를 지양한 헌법을 낳게 한다. 더불어 미국헌법은 각 주가 갖는 주권국가로서의 독립성을 인정하면서도 주권국가들의 연합체를 넘어선 정치체를 만들어낸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만들어진 미국헌법은 총 27조의 수정조항을 첨가한 것 말고는 전면적으로 수정된 적이 없다. 이러한 높은 안정성은 권력의 이해관계에 따라 여러 차례 개정된 우리 헌법과 비교된다.


미국헌법과 한국헌법이 사뭇 다르게 보일지라도 서로 무관하지는 않다. 미국헌법이 우리 헌법발전에 끼친 영향 때문에 그렇다. 이상돈의 <미국의 헌법과 대통령제>(소진, 2012)는 미국의 대통령제에 관한 논문을 모아놓은 책인데, 미국식 대통령제와 사법심사제가 우리 헌법에 끼친 영향도 살피고 있어서 흥미를 끈다. 당연한 일이지만 우리의 제헌헌법 제정과정에는 미 군정당국의 영향으로 미국헌법이 많은 영향을 주었다. 유진오 박사의 초안은 양원제 의원내각제 통치구조를 갖고 있었지만 이승만 박사의 주장에 따라 단원제 국회와 대통령제로 바뀌었다.

 

그런데 제1공화국의 제헌헌법이 대통령제를 최종적으로 채택하면서도 대통령이 국회에서 선출되도록 하는 간선제를 도입한 점은 특이한데, 여러 가지 사정이 고려됐지만 저자는 당시 정치권에서 미국의 대통령 선거제도를 간선제라고 잘못 이해한 것도 한몫했다고 본다. 심지어 1952년 발췌개헌을 통해서 간선제가 직선제로 변경되었을 때에도 일부에서는 “미국도 간선제를 채택하였는데 왜 한국이 직선제를 실시하여야 하는가”라고 반론을 제기하기도 했다. 4.19혁명 이후 제2공화국에서는 내각책임제를 채택하는데, 이때는 미국식 대통령제가 완전한 실패작으로 인식되었다. 그리고 제3공화국에서는 일반법원에 위헌법률심사권을 부여하였는데, 사법부가 이를 활발하게 활용하지는 않았더라도 미국의 사법심사제를 도입한 획기적인 사건이었다고 저자는 평가한다.

 

 

 

모든 주제가 그렇지만 미국헌법과 관련해서도 다양한 시각이 존재한다. 미국의 정치학자 로버트 달은 <미국헌법과 민주주의>(후마니타스, 2004)에서 미국헌법이 구조적으로 비민주적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다고 비판하는데, 상원의 불평등한 대표성과 연방대법원의 과도한 법률심사권, 그리고 헌법 개정을 과도할 정도로 제약하는 조항 등이 그가 지적하는 비민주적 특징들이다. 또 찰스 비어드의 <미국헌법의 경제적 해석>(지만지, 2009)은 미국헌법 제정과정에는 동산 소유자·채권자와 소농민·채무자 집단 간의 이익대립이 반영돼 있으며 결국 전자의 이익을 대변하는 경제적 문서로 귀결되었다는 새로운 견해를 제시한다.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는 미국 수정헌법 1조의 역사를 다룬 앤서니 루이스의 <우리가 싫어하는 생각을 위한 자유>(간장, 2010)도 미국헌법을 이해하는 데 요긴한 책이다. 우리 헌법에 대해서도 이렇듯 다양한 시각의 면밀한 조명이 이루어지면 좋겠다.

 

13. 02. 13.

 

 

P.S. 글 마지막에 우리 헌법에 대한 다각적 조명도 이루어지면 좋겠다고 적었는데, 헌법에 관한 교양서들이 없는 건 아니다. 김두식의 <헌법의 풍경>(교양인, 2004/2011), 이국운의 <헌법>(책세상, 2010), 조유진의 <헌법 사용설명서>(이학사, 2012) 같은 책들이다.

 

 

 

좀더 깊이 들어간 책으로는 서희경의 <대한민국 헌법의 탄생>(창비, 2012)도 참고도서다. '고시서'로 분류되는 성낙인의 <헌법학>(법문사, 2013)도 얼마 전에는 구해볼까 하다가 욕심인 듯싶어서 마음을 접었다. 하지만 코세키 쇼오이찌의 <일본국헌법의 탄생>(뿌리와이파리, 2010)은 교양서로 읽어보고 싶다. '다각적인 조명'이라고 할 때 내가 염두에 둔 것은 한미 헌법의 비교뿐 아니라 독일(바이마르)과 일본 헌법과 한국 헌법과의 비교였다. 이를 자세히 다룬 연구서나 교양서가 나오면 좋겠다. 이 분야에 과문하긴 하지만, 설마 이미 나와 있는 건 아닐 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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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사 공지다. 고등학생들의 인문학 공부 모임인 IRIS의 섭외를 받아 이번 주말에 'IRIS 인문비평 포럼'에 참여하게 됐다. 일정과 포럼 개요에 관한 공지를 IRIS 블로그에서 옮겨놓는다(http://blog.naver.com/weareiris?Redirect=Log&logNo=50159409545).

 

일시: 2013년 2월 16일(토) 오후 4:00-7;00

장소: 벙커원(http://bunker1.ddanzi.com/)

 

일정: 4:00-5:30 IRIS 멤버들 강연

        5:40-6:20 '로쟈' 이현우 선생님 강연

        6:20-7:00 이진경 선생님 강연

 

로쟈.jpg굴뚝.jpg

 

기획개요

다른 세계!! 이 얼마나 멋진 말인가! 지난 12월 19일, 우리 모두가 이를 요구하며 투표한 경험이 있기에 더욱 익숙한 개념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수많은 철학자와 정치인, 경제학자와 사회운동가들은 다양한 '살만한 세상들'을 이야기해왔다. 이번 IRIS 인문비평 포럼은 이러한 '다른 세계'라는 큰 주제 하에서 자유롭게 이야기해나가는 논의의 장이다. 인문비평 공공체 IRIS의 멤버들, 서평가 '로쟈' 이현우, 인문학자 이진경 등 많은 분들이 강연하시니 놓치지 마시라!!

 

13. 02. 11.

 

 

P.S. 주최측에서 무얼 염두에 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주제가 '다른 세계를 요구한다'라고 하여 떠올린 책은 예란 테르보른의 <다른 세계를 요구한다>, 토니 주트의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 슬라보예 지젝의 <멈춰라, 생각하라> 등이다. 무슨 얘기를 할지는 당일 IRIS 멤버들의 발표를 들으면서 궁리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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