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보문고의 '사람과 책'에서 '로쟈, 고전과 만나다' 꼭지를 옮겨놓는다. 러셀의 <행복의 정복>을 골랐다. 행복론에 관한 책들이 여럿 눈에 띄기에 '원조'가 될 만한 책이 무엇일까 생각하다(오래 생각할 것도 없었다) 손에 든 것으로 러셀의 책으론 국내에서 가장 많이 읽히는 책이기도 하다. 최근에는 <러셀의 행복철학>(빅북, 2012)이란 책도 출간됐는데, 미리 나왔더라면 도움을 받았을 뻔했다.

 

 

 

사람과 책(12년 11월호) 자신을 벗어나야 얻을 수 있는 행복

 

이달의 고전으로 고른 것은 버트런드 러셀(1872-1970)의 <행복의 정복>(1930)이다. 철학자 러셀을 대표할 만한 저작은 아니지만, <서양철학사>나 <철학의 문제들> 등을 제치고 국내 독자들에게 가장 많이 읽히는 책이다. 프롬의 <사랑의 기술>과 함께 그런 관심의 상당 부분은 제목에 빚지고 있는 듯하다. 그렇다고 내용과 무관한 현혹적인 제목이 붙어 있는 건 아니다. 사랑이란 감정의 상태가 아니라 기술이라고 말하는 <사랑의 기술>과 마찬가지로 <행복의 정복>은 행복이란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노력을 통해 정복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흔한 통념대로 인생의 목표가 행복이라면, <행복의 정복>이야말로 필독의 고전이 될 만하지 않을까.

 

 


개인적으로 러셀의 책을 처음 만난 건 대학 1학년 때였다. 강의시간에 <서양철학사>(집문당)를 소개받고 두 권짜리 번역본에서 현대철학을 다룬 하권만 읽은 기억이 있는데 시인 바이런을 다룬 장이 인상적이었다. 철학사 책에서 칸트와 헤겔 등과 나란히 바이런을 다룬 건 러셀만의 독특한 안목과 파격을 보여준다. 박영문고로 나온 <결혼과 도덕>, <인간사회개조론> 외에 <종교는 필요한가>(범우사)와 <철학의 문제들>(서광사)이 학부시절에 읽은 책들이다. 그 이후에도 러셀의 책들은 간간히 구입했지만 <행복의 정복>에 대한 특별한 인상은 갖고 있지 않다.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처럼 문고판 대역본을 통해서 접한 기억만 있다.

 

집착을 줄여 얻은 행복
사실 젊은 시절에 행복론을 들먹이는 건 좀 어울리지 않는 일이기도 하다. 중학교 때 물리시간에 ‘질량 보존의 법칙’이란 걸 배운 이후로 나는 ‘행복량 보존의 법칙’ 같은 것도 있을 거라고 단정했다. 일정량의 행복이 보존되는 만큼 내가 남들보다 더 행복하면 그만큼 다른 사람은 불행해지는 거라고 생각했다. 굳이 남들보다 불행해지고자 애쓰지는 않았지만 과도한 행복은 경계 대상이었다. 그래서 행복하지도 불행하지도 않은 상태가 적당하다고 여겼다. 러셀의 진단에 따르면 행복이 바람직한 것이라는 확신을 나는 갖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거꾸로 불행에 대해서는 은근한 지적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자기만의 행복 추구를 은연중에 거부하고 무시했기 때문이다.

 


러셀은 잠을 설친 사람들이 그렇듯이 불행한 사람들 또한 늘 자신이 불행하다는 사실을 자랑한다고 꼬집는데, 내가 그런 격이었다. 그는 그런 태도를 꼬리 잃은 여우가 하는 자랑에 비유한다. 이솝우화에 나오는 이 여우는 다른 여우들에게도 꼬리가 없는 편이 훨씬 낫다고 주장하다가 결국 망신만 당한다.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다면 일부러 불행을 택할 이유가 없다는 게 러셀의 생각이다. 그럼에도 불행을 고집하려 한다면 <행복의 정복>은 읽을 필요가 없는 책이다(아니다, 거꾸로 받아들이면 ‘불행의 탐닉’으로도 읽을 수 있다!).    

 

 

 

흥미로운 건 러셀 자신도 젊은 시절에는 행복주의자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애초에 행복하게 태어나지 않았다는 게 그의 고백이다. 어렸을 때 즐겨 부르던 찬송가가 ‘세상에 지친 이 몸에 죄로 된 짐을 지고’였고, 다섯 살 때는 만약 일흔까지 산다고 하면 겨우 인생의 14분이 1을 버틴 셈이니 여생이 얼마나 지루할까 고민에 휩싸였다. 삶을 증오하던 사춘기에는 늘 자살을 꿈꾸었지만 수학을 좀더 알고 싶다는 욕구로 버텨냈다고 한다. 나중에 화이트헤드와 공저한 <수학의 원리>나 간추려 쓴 <수리철학의 기초>는 그런 인내가 아니었다면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랬던 그가 노년에 이르러 삶을 즐기게 됐다. 어떤 비결인가. “이렇게 삶을 즐기게 된 비결은 내가 가장 갈망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내서 대부분은 손에 넣었고, 본질적으로 이룰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는 깨끗하게 단념했기 때문이다”라고 그는 말한다. 더 압축하면 비결은 자신에 대한 집착을 줄였다는 데 있었다. 그런 직접적인 경험과 관찰을 통해서 러셀은 불행으로 고통 받는 많은 사람들이 충분히 행복해질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된다. 그 믿음이 사람들의 상식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책의 집필 동기다. 

 

외부에 대한 관심이 행복의 비결
물론 모든 불행에 대한 처방을 제안하고 있지는 않다. 러셀은 행복이 부분적으로는 외부적 환경에 달려 있다는 점도 놓치지 않는다. 개인적 심리도 그 외부적 환경에 속하는 사회제도의 산물일 때가 많다. 따라서 행복을 증진시키려면 의당 사회제도의 변혁이 필요하지만 <행복의 정복>은 그 부분까지 다루지는 않는다(그 이 문제에 대해서는 <결혼과 도덕>이나 <사회개조의 원리> 같은 책에서 다루었다). 문제는 외부적 요인이 충족되었을 때에도 행복하지 않은 경우다.

 

“일용할 양식과 몸을 누일 곳을 확보할 수 있을 정도의 충분한 소득, 일상적인 육체활동이 가능할 정도의 건강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분명한 외적 원인이 없이도 불행하다면 어째서 그런가? 러셀은 이런 불행은 대부분 세계에 대한 그릇된 견해, 잘못된 윤리와 생활습관에서 비롯된다고 본다. 그런 불행은 사회제도의 변혁까지 가지 않고서 개인의 힘으로도 좌우할 수 있다. 무엇이 불행의 원인인지 깨닫고 개선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런 발상에 따라 러셀은 <행복의 정복>을 ‘불행의 원인’과 ‘행복의 원인’, 두 부분으로 구성한다. 그가 보기에 불행의 원인은 단순하다. 아무 이유 없이 불행해 하면서 그 불행의 원인을 우주의 본질로 돌리는 ‘바이런적 불행’에서부터 경쟁, 권태, 피로, 질투, 죄의식, 피해망상, 여론에 대한 공포까지 여러 가지 원인을 제시하고 있지만 불행의 원인을 뭉뚱그리자면 한마디로 자기 자신에 대한 과도한 관심과 몰입이다.

 

러셀에 따르면 자기 몰입에는 죄인과 자기도취에 빠진 사람, 과대망상증에 빠진 사람, 세 유형이 있다. 죄의식에 사로잡혀서 끊임없이 자신을 탓하는 유형이 죄인이다. 자기도취형은 죄인형과는 반대로 자신을 찬미하며 남들에게도 항상 찬미를 받고자 한다. 자기도취형이 남들에게 매력 있는 사람으로 비치길 갈망한다면 과대망상형은 권력을 가진 사람, 그래서 남들이 두려워하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 하지만 이런 자기중심성은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없다. 아무리 역사상의 위인이라 하더라도 전지전능한 존재는 아니므로 언젠가는 극복할 수 없는 장애에 부딪칠 수밖에 없다. 러시아 원정에 나섰다가 패배하고 결국엔 세인트헬레나로 유배당한 나폴레옹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자기중심성이 불행의 주된 원인이라면 우리는 열정과 관심을 자기 내부가 아닌 바깥에 쏟는 것만으로도 행복을 성취할 수 있다. 러셀이 보기에 “행복한 사람은 자유로운 애정과 폭넓은 관심을 가지고 객관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렇다고 도덕가들이 얘기하듯이 자기부정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저 관심을 외부로 돌리기만 하면 된다. 이타적일 필요도 없다. 가령 도덕가들은 사랑은 이기적이어서는 안 된다고 충고하지만 러셀은 그것이 어떤 한도를 넘어설 만큼 이기적이어서는 안 된다는 정도의 제한으로 받아들인다. 자신의 행복을 포기하고 상대방의 행복을 바라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행복의 비결은 단순하다. 되도록 폭넓은 관심을 가지는 것, 그리고 관심을 끄는 사물이나 사람들에게 되도록 따뜻한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세상에 대한 열정 그리고 흥미로운 삶

러셀은 열정과 사랑, 가족, 일, 일반적 관심사, 노력과 체념 등을 ‘행복의 원인’으로 열거하는데, 궁극적으로 필요한 것은 자기 자신에게만 관심을 두는 내향성의 극복이다. 왜 내향적인 성향이 문제가 되는가. 러셀은 이런 이야기를 들려준다. 옛날에 소시지 기계가 두 대 있었다. 돼지고기를 원료로 해서 소시지를 만들어내는 기계다. 이 중 한 대는 돼지에 관심이 많아서 엄청난 양의 소시지를 생산했지만, 다른 한 대는 “돼지가 나한테 무슨 소용이람?”이라고 말하며 시큰둥해 했다. 이 기계는 돼지에 대한 관심을 끊는 대신에 자신의 내부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기계는 작동을 멈췄다. 하지만 아무리 연구해보아야 이 기계는 자신의 내부가 공허하고 어리석은 것으로 여겨졌다.

 

이 두 기계의 차이가 열정을 갖고 있는 사람과 열정을 잃은 사람 간의 차이라고 러셀은 말한다. 우리의 마음은 소시지 기계와 같아서 외부 세계로부터 원료가 공급되지 않으면 일을 할 수 없다. 우리가 열정을 가질 수 있는 대상은 무궁무진하다. 다른 조건이 비슷하다면 어느 것 하나에라도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훨씬 더 세상에 잘 적응할 수 있고 흥미로운 삶을 살 수 있다. 거기서 더 바란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이 이상한 행성과 이 행성이 우주 안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대해 더 많은 지식을 습득하고 인류사의 원대한 조망 속에서 살아간다면 개인적으로 어떤 운명을 산다고 해도 강한 행복감이 곁을 떠나지 않을 것이라는 게 러셀의 행복론이다.

 

12. 11. 17.

 

 


P.S. 행복관의 역사에 관해서는 시셀라 복의 <행복한 개론>(이매진, 2012)가 유용하다. 프로이트의 <문명 속의 불만>과 러셀의 <행복의 정복>을 비교한 장도 포함돼 있는데, 이 두 책은 같은 해에 출간됐다. 제니퍼 마이클 헥트의 <행복이란 무엇인가>(공존, 2012)과 엘리자베스 파렐리의 <행복의 경고>(베이직북스, 2012)도 행복론과 관련하여 참고할 만한 책. <행복의 경고>는 이번주에 주문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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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에서 이달의 '3인 1책 전격수다'를 발췌해놓는다. 이달의 책은 위화의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문학동네, 2012)였다. 좌담은 지난달에 이루어졌으니 '10월의 책'인 셈이다. 전문은 프레시안에서 읽으실 수 있다(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50121109135120§ion=04).

 

 

 

프레시안(12. 11. 09) 여객기 사주는 부모 vs. 바나나 못 사줘 자살한 부모, 여기는 어디?!

 

(...)

 

이현우 : 위화의 책이 중국 이해에 요긴하게 도움과 자극을 주는 책이라는 데 대체적인 합의가 된 것 같습니다. 인상적이었던 부분들을 각자 꼽아본다면 어떤 게 있을까요.

 

김용언 : 전 '산채' 편이요. 하지만 실은, 이 개념을 제대로 이해했는지 확신이 잘 안 서요.(웃음)

 

이권우 : '짝퉁'이죠.(웃음)

 

이현우 : 짝퉁보다는 조금 더 넓죠.

 

 

김용언 : 한국도 불법 복제 문제가 심각하지만, 중국에서의 어마어마한 스케일의 해적판을 보면서 사실 좀 경멸하는 마음이 있었어요. 카피라이트에 대한 개념이 저렇게까지 없을 수가 있을까 그렇게만 생각했는데, 위화가 얘기하는 산채는 꽤 복잡한 상황을 한꺼번에 다루더라고요. 해적판이나 짝퉁이라는 좁은 의미도 지칭하지만 동시에 통제의 손길이 가 닿지 못하는 무정부주의적 상황도 얘기하잖아요. 권위를 조롱하고 풍자할 수 있는 영역을 그 안에서 확보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의미까지 담아내고요.

 

저로서는 사실 이 부분에 100퍼센트 동의할 순 없었는데, 어쨌든 '산채'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중국의 현재도 이해하기 힘들겠다는 건 확실했어요. 대중문화를 예로 들더라도, 한국이나 일본의 콘텐츠들을 서슴없이 전유하며 드라마, 광고, 영화로 쏟아내는 걸 이해하려면 '산채'를 알아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이현우 : 본인 인터뷰 얘기도 하잖아요. 하지도 않은 인터뷰가 실려서 기자에게 항의했더니 아주 당당하게 '산채판' 인터뷰라고 해서 할 말을 잃었다고. (일동 웃음) 위화의 통찰에 따르면 이런 상황이 가능한 게 역시 문화대혁명이 배경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라고 하지요. 문화대혁명이 부정적인 결과들을 많이 낳았고 역사적 재앙으로 기록되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완전하게 부정할 수만은 없는, 나름대로 역사적 의의를 갖고 있는 사건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강자 집단에 대한 약자 집단의 혁명 행위로 재해석할 수 있다는 거지요.

 

그리고 그 의의가 현재 중국의 개방 정책 이후 급속한 경제 발전에도 영향을 준다는 시각이 흥미로웠습니다. 마오와 마오 이후의 시대, 즉 마오의 시대를 부정했던 덩샤오핑의 시대로 딱 잘라서 나눌 수 없다는 겁니다. 두 가지가 그렇게 상반되는 게 아니며, 문화대혁명과 이후 경제혁명 사이의 연속성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게 위화의 주장입니다. 310쪽을 한번 볼까요.

 

"내가 오늘날의 중국을 얘기하면서 자꾸 문화대혁명 시기로 돌아가는 이유는 이 두 시대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회의 형태는 이미 판이하지만 일부 정신적 내용은 여전히 놀라울 정도로 닮은꼴이다. 예컨대 우리는 전민운동(全民運動) 방식으로 문화대혁명을 진행한 데 이어 똑같이 전민운동 방식으로 경제발전을 진행해왔다."

 

이에 대한 자세한 예시는 '혁명' 편에 잘 나와 있습니다. 1950년대 대약진운동 시기 국가의 지도하에 철강 제련에 대대적으로 동원되던 풍경이 1990년대 경제발전 시기에 되풀이됩니다. 농민들이 다시금 흙으로 제작한 용광로에서 철광석을 제련하는 식으로 엄청나게 많은 철강을 만드는 풍경으로요. 다른 어떤 나라에서도 가능하지 않은, 설명할 수 없는 생산 방식이 중국에서는 일어났다는 거지요. 그런 태도나 방식, 인민들의 의식의 기원이 문화대혁명에 있다는 설명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이권우 : 말씀하신대로 '산채'는 굉장히 중요한 챕터입니다. 위화가 보기에 중국 현대사는 '극단의 시대'였어요. 그 극단의 한쪽은 정치적 열망, 또 한쪽은 경제적 열망이죠. 310쪽에 보면 "1980년대의 중국 사회에서는 돈을 벌려는 광적인 열기가 혁명의 광기를 대신하면서 순식간에 무수한 민영기업이 생겨났다"는 대목이 나오는데, 책 전체를 통틀어서 이 같은 생각이 계속 반복돼요. 203쪽에서는 "중국은 정치가 모든 것을 주도하는 마오쩌둥의 흑백시대에서 덩샤오핑의 경제지상주의 컬러 시대로 접어들었다"라고도 하고요. 톈안먼 사건을 분기점으로 정치 과잉 시대에서 경제 과잉 시대로 넘어갔다는 건데, 이 과잉이라는 연속성의 배경이 결과적으로는 강자 집단에 대한 약자 집단의 혁명 행위라는 거죠. 어떤 면에서는 한국의 박정희, 전두환 시대와 참 비슷했던 것 같아요.

 

이현우 : 스케일 차이는 확연히 있지요. 마오쩌둥 키드들은 '사령부를 타도하라'라는 지도 하에 권력자들을 무너뜨리잖아요. 당 간부들까지도 어린 청년들에게 비판과 숙청의 대상이 되는데. 이런 경험을 했던 세대가 인류사에서 또 있었을까 싶은 겁니다. 1966년 문화대혁명이 처음 시작될 때 각 지방으로 흩어진 홍위병의 숫자만 1천 몇 백만 명인데, 그만한 스케일로 기존의 질서와 가치를 완전하게 전복하라는 혁명을 수행했던 나라가 또 있을까요? 한국 역시 박정희 시대나 전두환 시대에 그만큼 완벽하게 위로부터의 명령에 스스로를 일치시키진 않았잖아요?

 

이권우 : 과잉이라는 점에서 비슷한 것 같아요. 한국도 박정희, 전두환 시대의 정치 과잉이 90년대 넘어오면서 경제 과잉으로 넘어가니까요.

 

김용언 : 마오주의는 68혁명 이후 프랑스 쪽에서 특히 중요하게 이슈화됐던 걸로 아는데요.

 

이권우 : 네. 미셸 푸코 같은 경우 본인이 마오주의자는 아니었지만 마오주의 운동집단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었습니다.

 

이현우 : 알랭 바디우도 마오주의자이지요.

 

김용언 : 제 궁금증은 이겁니다. 80년대 한국의 학생운동은 왜 마오주의를 배척하고 러시아 쪽 사상을 더 가깝게 받아들였던 걸까요?

 

이현우 : 80년대 대학가 운동권들 사이에는 러시아 편향이 분명 있었어요. 레닌주의가 적통이론이고 마오주의는 변형으로 여겨졌는데, 모리스 마이스너의 책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김수영 옮김, 이산 펴냄)를 보면 레닌주의와 마오주의의 차이에 대해 잘 정리돼 있습니다. 1960년대 중·소 영토 분쟁이 있을 때 중국과 소련 사이가 약간 틀어졌어요. 중국은 소련이 수정주의라, 소련은 중국이 교조주의라고 비판했죠. 흐루시초프 시절 미국에 대해 좀 더 유화적인 태도를 취한 데 반해 중국은 훨씬 강경한 태도를 가졌고 거기서 의견 차이가 빚어졌지요.

 

양쪽의 가장 큰 차이는 인민에 대한 기대감이 전혀 달랐다는 점입니다. 레닌주의의 관점은 여전히 지식인 중심주의였죠. 엘리트가 농민들과 인민들을 계도하고 그들을 이끌고 나가야 한다는 쪽이고요. 마오주의는 정반대로 엘리트에 대한 신뢰가 없었던 거죠. 문화대혁명이 가능했던 것도 인민들에게 직접 봉기하라는 교시를 내렸기 때문이고요.

 

김용언 : 홍위병의 구호가 '조반유리(造反有理: 반역은 정당하다)'였지요.

 

이현우 : 네. 엘리트 계층이 계몽하는 게 아니라, 인민들이 직접 엘리트를 타도할 수 있다고 부추겼던 거지요. 그런 기대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걸 한국 상황에 적응해보면, 80년대에도 여전히 엘리트 중심주의가 있었어요. 농활을 생각해봐도 민중은 여전히 계도의 대상이었고요. 80년대 후반부터 소위 '학출'이라는 말이 사라지면서 그런 분위기가 바뀐 것 같은데요. 학출이라는 말 자체가 함축하는 바가, 대학생 지식인 계급이 먼저 각성해서 아직 각성되지 않은 민중을 계몽한다는 프레임이지요. 그 전제는 마르크스주의 혁명론을 따릅니다. 공산주의 혁명 이전에 부르주아 혁명이 먼저 일어나야 한다는 논의요. 따라서 인민들에게는 부르주아적 교양이라는 게 필요하며, 그걸 경험한 다음 사회주의로 넘어가는 거죠.

 

마오가 생각한 문화대혁명은 그런 부르주아 단계를 건너뛰어서 전근대 전통 사회에서 바로 공산주의 유토피아 사회로 넘어갈 수 있다는 거대한 실험이었던 것 같아요. 우리가 참조할 수 있는 20세기 혁명론은 레닌주의와 마오주의인데, 둘 다 실패했지만 오늘날 반면교사가 됐죠. 그런 면에서 무작정 부정하는 게 아니라 유익한 교훈으로 삼을 수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이권우 : 위화가 문화대혁명을 바라보는 시선은 마오쩌둥의 실책이라고 보는 쪽 같습니다. 계급을 타도하자고 했는데 계급에 뭐가 있었던가? 과연 타도할 계급이 있긴 했던 건가? 허수아비를 세워놓고 찌르라고 했던 건 아닌가? 하는 시선을 느꼈습니다. 모옌의 <개구리>에서도 문화대혁명 시절에 벌어진 엄청난 테러들이 역사책을 뛰어넘는 수준으로 세밀하게 묘사되는데, 이건 말 그대로 도가니에요. 모든 것들이 융해되고 인간의 모든 속성이 다 드러나죠.

 
이현우 : 여러 문제점이 노출된 실패한 혁명이라는 건 잘 알려진 부분이고 그에 대한 부정으로 덩샤오핑의 개혁 개방 노선이 나오긴 했지만, 그 이면에 문화대혁명의 경험이 각인되어있다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중국 문화대혁명과 정치의 아포리아>(그린비 펴냄)를 쓰신 백승욱 교수의 책도 대중이 정치적 주체가 될 수 있는가 라는 주제에 대한 탐구잖아요. 문화대혁명은 그 주제를 실험해본 사례가 되고요.

 

이후에 얘기된 거지만, 마오가 당시 권력 핵심에서 비껴나 있었는데 다시 그것을 강화하기 위해 이런 과격한 방식을 채택했다는 해석도 나오지요. 아마도 문화대혁명 말기에는 마오 스스로도 대중의 요구를 감당할 수 없었던 것 같아요. 공산당 권력 자체를 무력화하는 수준까지 나갔기 때문이죠.

 

김용언 : 사실 당시 내걸었던 '사령부를 포격하라', '반역은 옳은 것이다'라는 표어가 궁극적으로는 공산당 최상층까지 타도하라는 지시일 텐데요.(웃음)

 

이현우 : 아마도 마오 생각엔 '나만 빼고'가 아니었을까요?(웃음) 굉장히 거대한 역사의 실험이었고 많은 교훈을 주기 때문에, 그냥 실패했던 참담한 재앙으로만 격하하기에는 그 의미가 크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 287쪽을 보겠습니다.

 

"공산당이 이끈 지난 60여 년의 역사를 돌이켜보면서 나는 마오쩌둥의 문화대혁명과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이 중국의 풀뿌리 계층에 거대한 기회를 두 차례 가져다주었다고 생각한다. 문화대혁명은 정치 권력의 새로운 분배라고 할 수 있고, 개혁개방은 바로 경제 권력의 재분배였던 셈이다."

 

오늘날 빈부격차가 엄청나긴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말 그대로 인민들에게 부의 기회를 준 거기도 하잖아요. 100만 명 이상의 억만장자가 있다고 하죠. <중국을 읽다 1980-2010>(카롤린 퓌엘 지음, 이세진 옮김, 푸른숲 펴냄)를 보면 80년대 초의 상하이와 지금의 상하이 사진이 실려 있어요. 80년대 초의 상하이는 음…, 우리 개항기 무렵의 인천항 비슷해요. 아무것도 없어요. 지금은 마천루 숲이죠. 30년 만에 그런 변화가 있었다는 거예요. 문화대혁명에 대한 철저한 부정 속에서 그게 가능했던 게 아니라, 문화대혁명의 에너지가 자본주의 시장 경제와 만나면서 그런 결과를 가져왔다는 거죠.

(...)

 

12. 1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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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한겨레의 '로쟈의 번역서 읽기'를 옮겨놓는다.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문학사상사)에 부록으로 실려 있는 '일본인은 어디에서 왔는가'를 읽고 들춰본 <새로 쓴 일본사>(창비, 2003)의 내용을 정리해본 것이다. 일본의 선사시대에 관한 마땅한 자료가 더 있는지 궁금하다. 한편 다이아몬드의 일본인 기원론은 보급판(1999)에는 실려 있지 않고 하드카바판(2005)에만 들어 있다. 문학사상사의 개정증보판에 따르면 이 원서 증보판은 2003년에 처음 나온 것으로 돼 있다. 어쨌든 내가 갖고 있는 보급판에는 빠져 있어서 아쉽다...  

 

 

 

한겨레(12. 11. 10) 한일 과거사 해법, 뿌리부터 캐볼까

 

‘서울대 대출도서 1위’란 타이틀 덕에 새삼 베스트셀러로 떠오른 재러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 개정증보판에는 ‘일본인은 어디에서 왔는가’란 논문이 부록으로 들어 있다. 일본인 조상은 누구인가라는 문제를 다룰뿐더러 “한국인과 일본인은 성장기를 함께 보낸 쌍둥이 형제와도 같다”는 결론 또한 주목할 만하다. 고대사에 관한 한 양국의 시각이 많이 엇갈리는 터여서 3자적 입장에 놓인 지은이의 객관적 논증은 좋은 참조가 된다.

 

일본인의 기원에 대한 일본 학자들의 견해가 궁금해서 펼쳐본 책이 현역 연구자들이 공동집필한 개설서 <새로 쓴 일본사>(창비, 2003)이다. 적은 분량은 아니지만 단권으로 일본사 전체를 서술하고 있기에 ‘일본인의 기원’에 관해서는 많은 분량이 할애돼 있지 않다. 물론 그럼에도 기본시각은 확인해볼 수 있다.

 

 

 

일본 선사시대와 관련하여 쟁점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토기를 사용했지만 수렵채집 단계에 머물렀던 조몬인과 벼농사를 시작한 야요이인의 관계다. 책에는 “오랫동안 식료채집을 기본으로 하는 조몬 문화가 계속되다가 2000여년 전에 마침내 농경사회가 성립한다”고 개략적으로 서술돼 있다. 하지만 조몬 문화와 야요이 문화의 경쟁·이행관계에 대해서는 명확한 언급이 없다. 벼농사는 일본 외부로부터 유입된 것이다. 동아시아의 경우 중국 양쯔강 하류에서 처음 벼농사가 시작됐으며 한반도를 거쳐서 일본열도에 전해졌다. “야요이 도작의 직접 루트는 한반도 남부였다”고 일본 학자들도 기술한다. 문제는 어떻게 전해졌는가이다.

 

다이아몬드는 일본사의 결정적인 두가지 변화로 1만2000년 전께 토기를 발명하면서 조몬인들이 급격하게 늘어난 것과 기원전 400년께 한반도 남부로부터 새로운 생활양식(농경)이 들어오면서 두번째 인구폭발이 일어난 것을 든다. 조몬인이 한반도 이주민으로 대체된 것인지, 단지 그들로부터 기술만 습득한 것인지가 관건이다. 대략 세가지 학설이 나뉜다. 첫번째 학설은 조몬인이 점차 현대 일본인으로 진화했다고 보며, 두번째 학설은 야요이 문화가 농업 기술을 가진 한반도 도래인들이 대량 이주한 결과 생겨났다고 본다. 그리고 세번째 학설은 적은 수의 식량생산 이주자들이 건너갔지만 인구가 조몬인들보다 훨씬 빨리 불어나서 곧 그들을 압도했을 거라고 본다. 비슷한 양상의 변화를 보여주는 세계 다른 지역 역사를 고려하면 두번째나 세번째 학설이 더 타당하다는 게 그의 견해다.

 

<새로 쓴 일본사> 지은이들은 벼농사 문화를 전한 이들을 ‘도래계 야요이인’이라고 부르면서 “본토에서는 도래계인과 조몬계인의 혼혈이 진행되었고, 그 결과 현대의 본토인을 형성했다”고 정리한다. 하지만 다이아몬드에 따르면 야요이인 두개골이 현대 일본인과 가장 닮았으며 도래계 야요이인과 조몬인의 혼혈은 현대 아이누인과 유사하다. 형질인류학적으로 현재 본토인은 1억2000만명 이상이고 아이누인은 2만4000명이 남아 있는 정도다. 다이아몬드가 한국인과 일본인이 ‘쌍둥이 형제’와 같다고 한 이유다. 이런 시각은 한일간 과거사의 상처와 영토 분쟁을 좀 다르게 바라보도록 해주지 않을까.

 

12. 11.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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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달 책&(412호)에서 '로쟈의 주제별 도서소개'를 옮겨놓는다. 문화대혁명 관련서들을 다루려고 했는데, 자연스레 '그 이후'까지 언급하게 됐다. 안 그래도 중국에서는 오늘 18차 당대회가 개막해서 오는 14일까지 이어진다고 한다. 중국의 현재를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문화대혁명을 전후로 한 중국현대사에 눈길을 주어봄직하다. 위화의 책이 좋은 출발점이다.

 

 

 

책&(12년 11월호) 중국의 문화대혁명과 그 이후

 

중국 작가 모옌의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경제뿐 아니라 중국의 문학 또한 세계적 주목거리가 됐다. 중국문학의 힘은 무엇일까. 모옌, 쑤퉁과 함께 동시대 중국문학 3대 작가로도 꼽히는 위화의 에세이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문학동네, 2012)는 그 힘이 파란만장한 중국 현대사에 대한 성찰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인상을 깊게 해준다. 그 역사는 크게 구분하자면 마오쩌둥의 정치혁명(문화대혁명)과 덩샤오핑의 경제혁명(개혁개방)으로 나눠지는 역사다. 중요한 것은 이 두 혁명 사이의 단절 못지않은 연속성이다. 오늘의 중국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중국현대사의 핵심적 사건으로 문화대혁명을 간과할 수 없는 이유다.  


1949년 마오쩌둥의 공산당은 국민당의 오랜 투쟁 끝에 승리하여 중국대륙에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했다. 하지만 그것으로 마오의 혁명이 종료된 것은 아니었다. 무장투쟁을 동반하지 않을 뿐 혁명은 항구적인 것이어야 한다고 마오는 믿었다. 대약진운동(1958-1960)과 문화대혁명(1966-1976)이 바로 그러한 혁명의 정점이었다. 그렇지만 1976년 마오가 세상을 떠나고 뒤이어 덩샤오핑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혁명의 시대는 사라진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사실 지난 30여 년 동안 이루어진 경제기적에서도 혁명은 사라지지 않았다. 단지 환골탈태하여 다른 형태로 모습을 드러냈을 뿐”이라는 게 위화의 주장이다. 아니 그렇게 지적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고 그는 전한다. 


일례를 들어보자. 개혁개방 첫해인 1978년 중국의 철강생산량은 3천만 톤 남짓이었다. 하지만 불과 2년 뒤에 3천 7백만 톤을 넘겨 세계 5위를 기록하더니 1996년 이후에는 부동의 세계 1위를 지키고 있다. 2008년에는 철강생산량이 5억 톤을 넘어 전 세계 생산량의 32퍼센트까지 차지하게 됐다. 이는 세계 2위에서 8위까지 국가들의 생산량을 다 합친 것보다 많은 양이라고 한다. 말 그대로 놀라운 고속성장이다. 이러한 성장 이면에는 대약진운동 시기의 경험이 깔려 있다. 당시 중국 전역 도시 마당과 농촌 들판에는 소형 용광로가 설치되어 인민 모두가 철강을 제련하는 일에 동원되었다. 영국을 따라잡고 미국을 추월해야 한다는 열기가 충천했다.

 

이러한 상황은 1990년대에 한 번 더 벌어진다. 농민들이 철강노동자로 변신하여 간이 용광로에서 제작한 쇳물을 레미콘차량에 싣고 철강공장에 갖다나름으로써 생산량을 두 배 이상 늘릴 수 있었다. 과거와 다른 것은 농민들이 정치적 구호가 아닌 돈을 위해서 철강제련에 나섰다는 점이다. 위화는 마오쩌둥의 문화대혁명과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이 중국 인민, 혹은 ‘풀뿌리’ 계층에게 두 차례 기회를 가져다주었다고 말한다. 문화대혁명이 정치권력의 새로운 분배였다면 개혁개방은 바로 경제권력의 재분배였다.


이 ‘두 중국’에 대한 자세한 기술은 미국의 중국사학자 모리스 마이스너의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이산, 2004)에서 읽을 수 있다. 저자는 1986년에 펴낸 책의 2판에서 덩샤오핑이 시작한 개혁을 평가하면서 중국의 관료집단체제가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길, 모두를 가로막는 장벽이 될 거라고 보았으나 1998년에 펴낸 3판에서는 공산주의 국가가 오히려 중국 자본주의를 촉진하는 핵심요체였다고 견해를 수정한다. 저자의 비교분석에 따르면 애초에 마오는 레닌과 달리 자본주의 문화가 사회주의 건설의 전단계라고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서양 부르주아 문화와 자본주의 방식이 중국의 유교적 봉건문화만큼이나 유해하다고 판단했고 문화대혁명은 이 두 가지 악영향을 모두 제거하기 위한 시도였다. 물론 이 시도의 밑바탕에는 노년에도 최고 권력자의 자리를 계속 유지하고자 했던 마오의 권력욕도 깔려 있었다. 

 

 


1966년 마오가 ‘사령부를 포격하라’는 대자보를 붙이고 톄안먼 광장에서 수십만의 홍위병을 사열하면서 시작된 문화대혁명은 중국 전역을 광풍으로 뒤덮었다.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더 멀리 간다>가 이 시기에 성장기를 보낸 위화의 문화대혁명 체험담이라면 천이난의 <문화대혁명, 또 다른 기억>(그린비, 2008)과 션판의 <홍위병>(황소자리, 2004)은 홍위병들의 체험적 회고록이다. 거기에 학술적인 조명까지 얹자면, 백승욱의 <중국 문화대혁명과 정치의 아포리아>(그린비, 2012)는 문혁을 주도했던 조반파의 이론적 배후 천보다의 사상을 집중적으로 검토함으로써 보다 일반론적인 차원에서 문화대혁명이 제시하는 이론적 아포리아를 탐구하는 책이다. 그에 따르면 대중, 혹은 인민이 스스로 정치적 주체가 될 수 있는 가능성과 그 난점을 동시에 보여준 것이 문화대혁명이 머금고 있는 이론적 아포리아다.

 

 


‘인민의 아버지’였던 마오 이후의 시대는 문화대혁명의 광기와 과오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그것이 펼쳐놓은 가능성의 공간에서 시작되었다. 그렇게 해서, 위화의 표현에 따르면 “정치가 모든 것을 주도하는 마오쩌둥의 흑백시대에서 덩샤오핑의 경제지상주의 컬러시대로 접어들었다.” 무엇이 얼마나 달라졌는가. 1980년부터 2010년까지 30년간 고속성장기 중국대륙에서 벌어진 핵심 사건들에 대해서는 카롤린 퓌엘의 <중국을 읽다 1980-2010>(푸른숲, 2012)이 가장 잘 정리해준다.

 

12. 11.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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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주간경향(1000호)의 북리뷰를 옮겨놓는다. 가나자와 사토시의 <지능의 사생활>(웅진지식하우스, 2012)의 내용을 몇가지 간추렸다. 진화심리학에서 바라본 지능 문제가 흥미로워서 고른 책이었다. 저자의 책으론 <처음 읽는 진화심리학>(웅진지식하우스, 2008)이 더 소개돼 있다. 앨런 밀러와 공저한 책으로 요긴한 진화심리학 입문서. 대학 교재용으로 많이 읽히는 책은 물론 데이비드 버스의 <진화심리학>(웅진지식하우스, 2012)이다.

 

 

 

주간경향(12. 11. 13) 진보주의자가 지능이 높다?

 

20년 정도의 짧은 역사를 갖고 있지만 진화심리학은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있는 분야이며, 국내에도 적잖은 관련서가 출간돼 있다. <지능의 사생활>은 가나자와 사토시의 신작으로 지능 문제를 진화심리학적 관점에서 바라본 흥미로운 책이다. 원제는 ‘지능의 역설’이다.

 

저자는 진화심리학의 몇 가지 원칙을 소개하고 지능에 대한 일반적인 오해를 불식시킨 다음에 본격적으로 ‘지능의 역설’을 파헤친다. 어떤 역설인가. “지능이 높은 개인들은 진화가 우리에게 설계해놓지 않은 부자연스러운 선호와 가치관을 갖고 지지할 가능성이 더 높다”는 역설이다.

 

 

먼저 지능에 대한 오해를 해소할 필요가 있다. 저자는 IQ검사가 문화적으로 편향돼 있다거나 IQ가 환경에 의해 결정되며 교육을 통해서 높일 수 있다는 식의 주장을 반박한다. 그에 따르면 IQ검사는 객관적이며 혈압이나 체중 측정 이상의 정확도를 갖는다. 혈압이나 체중이 문화적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듯이 IQ 또한 그렇다. 또한 지능은 주로 유전자에 의해 결정된다.

 

유전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은 지능이 우리의 생존과 번식에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어떤 특성의 유전 가능성과 적응성은 일반적으로 반비례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지능은 장구한 기간 아프리카 사바나에서 수렵채집 생활을 한 우리 조상들에게는 진화적으로 새로운 아주 협소한 영역에서만 도움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진화적으로 익숙한 문제들에 대해서는 굳이 높은 지능이 필요하지 않으며, 지능이 높다고 해서 지능이 낮은 개인보다 문제를 더 잘 해결하는 것도 아니다. 지능이 높을수록 상식이 부족한 경우가 많으며 결혼과 번식이라는 진화적으로 익숙한 영역에서는 특별히 유리하지도 않다.

 

문제는 지난 1만년 동안 우리의 환경이 아주 급격하게 달라지면서 지능이 다른 심리기제들보다 중요하게 됐다는 점이다. 곧 지능이 낮은 개인은 지능이 높은 개인보다 진화적으로 새로운 상황을 이해하고 처리하는 데 더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지능과 정치의 관계를 예로 들어보자. 소규모로 무리를 지어 수렵채집 생활을 했던 진화의 역사 대부분 동안 우리 조상들이 평등주의적이고 민주적이었다 하더라도 보통선거권이나 비례대표제 같은 현대 대의민주주의의 장치들은 진화적으로 새로운 것이다. 그에 비하면 세습군주제에 대한 욕구가 차라리 진화적으로 익숙하다. 즉 우리의 뇌는 대의민주주의에 맞게끔 진화하지 않았다. 지능의 역설에 따르면 이런 경우 지능이 높은 개인과 집단이 반대 경우보다 대의민주주의에 대한 욕구와 수용력이 더 크다. 달리 말하면 인구의 평균지능이 높을수록 그 정부는 더 민주적이다.

 

정치적 진보주의와 보수주의에도 지능의 역설은 적용된다. “유전자적으로 무관한 다른 사람들의 복지에 대한 진정한 관심과 이들 타인의 복지를 위해 사적 자원의 많은 부분을 내놓는 자발성”으로 진보주의를 정의한다면 이것은 진화적으로 새로운 것이다. 우리의 뇌는 완전히 낯선 불특정 다수에게까지 이타적으로 행동하도록 설계돼 있지 않다. 즉 진보주의는 진화한 인간의 본성에 속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러한 정치이념을 받아들이려면 평균보다 높은 지능이 필요하다. 실제로 ‘아주 보수적’인 미국 청년과 ‘아주 진보적’인 미국 청년이라는 범주의 청소년기 IQ를 조사해보니 전자가 평균 94.82점이었던 데 비해 후자는 106.42였다. 여기서 11점은 작지 않은 차이며, 통계학적으로 유의미하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진보는 인간에게 부자연스러운 이념이지만 “평균지능이 높은 국민일수록 소득세를 더 많이 내고 소득분배가 더 평등하다”는 사실이 지능의 역설이다.

 

12. 11.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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