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시안에서 이달의 '3인 1책 전격수다'를 발췌해놓는다. 이달의 책은 위화의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문학동네, 2012)였다. 좌담은 지난달에 이루어졌으니 '10월의 책'인 셈이다. 전문은 프레시안에서 읽으실 수 있다(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50121109135120§ion=04).
프레시안(12. 11. 09) 여객기 사주는 부모 vs. 바나나 못 사줘 자살한 부모, 여기는 어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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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우 : 위화의 책이 중국 이해에 요긴하게 도움과 자극을 주는 책이라는 데 대체적인 합의가 된 것 같습니다. 인상적이었던 부분들을 각자 꼽아본다면 어떤 게 있을까요.
김용언 : 전 '산채' 편이요. 하지만 실은, 이 개념을 제대로 이해했는지 확신이 잘 안 서요.(웃음)
이권우 : '짝퉁'이죠.(웃음)
이현우 : 짝퉁보다는 조금 더 넓죠.
김용언 : 한국도 불법 복제 문제가 심각하지만, 중국에서의 어마어마한 스케일의 해적판을 보면서 사실 좀 경멸하는 마음이 있었어요. 카피라이트에 대한 개념이 저렇게까지 없을 수가 있을까 그렇게만 생각했는데, 위화가 얘기하는 산채는 꽤 복잡한 상황을 한꺼번에 다루더라고요. 해적판이나 짝퉁이라는 좁은 의미도 지칭하지만 동시에 통제의 손길이 가 닿지 못하는 무정부주의적 상황도 얘기하잖아요. 권위를 조롱하고 풍자할 수 있는 영역을 그 안에서 확보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의미까지 담아내고요.
저로서는 사실 이 부분에 100퍼센트 동의할 순 없었는데, 어쨌든 '산채'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중국의 현재도 이해하기 힘들겠다는 건 확실했어요. 대중문화를 예로 들더라도, 한국이나 일본의 콘텐츠들을 서슴없이 전유하며 드라마, 광고, 영화로 쏟아내는 걸 이해하려면 '산채'를 알아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이현우 : 본인 인터뷰 얘기도 하잖아요. 하지도 않은 인터뷰가 실려서 기자에게 항의했더니 아주 당당하게 '산채판' 인터뷰라고 해서 할 말을 잃었다고. (일동 웃음) 위화의 통찰에 따르면 이런 상황이 가능한 게 역시 문화대혁명이 배경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라고 하지요. 문화대혁명이 부정적인 결과들을 많이 낳았고 역사적 재앙으로 기록되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완전하게 부정할 수만은 없는, 나름대로 역사적 의의를 갖고 있는 사건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강자 집단에 대한 약자 집단의 혁명 행위로 재해석할 수 있다는 거지요.
그리고 그 의의가 현재 중국의 개방 정책 이후 급속한 경제 발전에도 영향을 준다는 시각이 흥미로웠습니다. 마오와 마오 이후의 시대, 즉 마오의 시대를 부정했던 덩샤오핑의 시대로 딱 잘라서 나눌 수 없다는 겁니다. 두 가지가 그렇게 상반되는 게 아니며, 문화대혁명과 이후 경제혁명 사이의 연속성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게 위화의 주장입니다. 310쪽을 한번 볼까요.
"내가 오늘날의 중국을 얘기하면서 자꾸 문화대혁명 시기로 돌아가는 이유는 이 두 시대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회의 형태는 이미 판이하지만 일부 정신적 내용은 여전히 놀라울 정도로 닮은꼴이다. 예컨대 우리는 전민운동(全民運動) 방식으로 문화대혁명을 진행한 데 이어 똑같이 전민운동 방식으로 경제발전을 진행해왔다."
이에 대한 자세한 예시는 '혁명' 편에 잘 나와 있습니다. 1950년대 대약진운동 시기 국가의 지도하에 철강 제련에 대대적으로 동원되던 풍경이 1990년대 경제발전 시기에 되풀이됩니다. 농민들이 다시금 흙으로 제작한 용광로에서 철광석을 제련하는 식으로 엄청나게 많은 철강을 만드는 풍경으로요. 다른 어떤 나라에서도 가능하지 않은, 설명할 수 없는 생산 방식이 중국에서는 일어났다는 거지요. 그런 태도나 방식, 인민들의 의식의 기원이 문화대혁명에 있다는 설명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이권우 : 말씀하신대로 '산채'는 굉장히 중요한 챕터입니다. 위화가 보기에 중국 현대사는 '극단의 시대'였어요. 그 극단의 한쪽은 정치적 열망, 또 한쪽은 경제적 열망이죠. 310쪽에 보면 "1980년대의 중국 사회에서는 돈을 벌려는 광적인 열기가 혁명의 광기를 대신하면서 순식간에 무수한 민영기업이 생겨났다"는 대목이 나오는데, 책 전체를 통틀어서 이 같은 생각이 계속 반복돼요. 203쪽에서는 "중국은 정치가 모든 것을 주도하는 마오쩌둥의 흑백시대에서 덩샤오핑의 경제지상주의 컬러 시대로 접어들었다"라고도 하고요. 톈안먼 사건을 분기점으로 정치 과잉 시대에서 경제 과잉 시대로 넘어갔다는 건데, 이 과잉이라는 연속성의 배경이 결과적으로는 강자 집단에 대한 약자 집단의 혁명 행위라는 거죠. 어떤 면에서는 한국의 박정희, 전두환 시대와 참 비슷했던 것 같아요.
이현우 : 스케일 차이는 확연히 있지요. 마오쩌둥 키드들은 '사령부를 타도하라'라는 지도 하에 권력자들을 무너뜨리잖아요. 당 간부들까지도 어린 청년들에게 비판과 숙청의 대상이 되는데. 이런 경험을 했던 세대가 인류사에서 또 있었을까 싶은 겁니다. 1966년 문화대혁명이 처음 시작될 때 각 지방으로 흩어진 홍위병의 숫자만 1천 몇 백만 명인데, 그만한 스케일로 기존의 질서와 가치를 완전하게 전복하라는 혁명을 수행했던 나라가 또 있을까요? 한국 역시 박정희 시대나 전두환 시대에 그만큼 완벽하게 위로부터의 명령에 스스로를 일치시키진 않았잖아요?
이권우 : 과잉이라는 점에서 비슷한 것 같아요. 한국도 박정희, 전두환 시대의 정치 과잉이 90년대 넘어오면서 경제 과잉으로 넘어가니까요.
김용언 : 마오주의는 68혁명 이후 프랑스 쪽에서 특히 중요하게 이슈화됐던 걸로 아는데요.
이권우 : 네. 미셸 푸코 같은 경우 본인이 마오주의자는 아니었지만 마오주의 운동집단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었습니다.
이현우 : 알랭 바디우도 마오주의자이지요.
김용언 : 제 궁금증은 이겁니다. 80년대 한국의 학생운동은 왜 마오주의를 배척하고 러시아 쪽 사상을 더 가깝게 받아들였던 걸까요?
이현우 : 80년대 대학가 운동권들 사이에는 러시아 편향이 분명 있었어요. 레닌주의가 적통이론이고 마오주의는 변형으로 여겨졌는데, 모리스 마이스너의 책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김수영 옮김, 이산 펴냄)를 보면 레닌주의와 마오주의의 차이에 대해 잘 정리돼 있습니다. 1960년대 중·소 영토 분쟁이 있을 때 중국과 소련 사이가 약간 틀어졌어요. 중국은 소련이 수정주의라, 소련은 중국이 교조주의라고 비판했죠. 흐루시초프 시절 미국에 대해 좀 더 유화적인 태도를 취한 데 반해 중국은 훨씬 강경한 태도를 가졌고 거기서 의견 차이가 빚어졌지요.
양쪽의 가장 큰 차이는 인민에 대한 기대감이 전혀 달랐다는 점입니다. 레닌주의의 관점은 여전히 지식인 중심주의였죠. 엘리트가 농민들과 인민들을 계도하고 그들을 이끌고 나가야 한다는 쪽이고요. 마오주의는 정반대로 엘리트에 대한 신뢰가 없었던 거죠. 문화대혁명이 가능했던 것도 인민들에게 직접 봉기하라는 교시를 내렸기 때문이고요.
김용언 : 홍위병의 구호가 '조반유리(造反有理: 반역은 정당하다)'였지요.
이현우 : 네. 엘리트 계층이 계몽하는 게 아니라, 인민들이 직접 엘리트를 타도할 수 있다고 부추겼던 거지요. 그런 기대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걸 한국 상황에 적응해보면, 80년대에도 여전히 엘리트 중심주의가 있었어요. 농활을 생각해봐도 민중은 여전히 계도의 대상이었고요. 80년대 후반부터 소위 '학출'이라는 말이 사라지면서 그런 분위기가 바뀐 것 같은데요. 학출이라는 말 자체가 함축하는 바가, 대학생 지식인 계급이 먼저 각성해서 아직 각성되지 않은 민중을 계몽한다는 프레임이지요. 그 전제는 마르크스주의 혁명론을 따릅니다. 공산주의 혁명 이전에 부르주아 혁명이 먼저 일어나야 한다는 논의요. 따라서 인민들에게는 부르주아적 교양이라는 게 필요하며, 그걸 경험한 다음 사회주의로 넘어가는 거죠.
마오가 생각한 문화대혁명은 그런 부르주아 단계를 건너뛰어서 전근대 전통 사회에서 바로 공산주의 유토피아 사회로 넘어갈 수 있다는 거대한 실험이었던 것 같아요. 우리가 참조할 수 있는 20세기 혁명론은 레닌주의와 마오주의인데, 둘 다 실패했지만 오늘날 반면교사가 됐죠. 그런 면에서 무작정 부정하는 게 아니라 유익한 교훈으로 삼을 수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이권우 : 위화가 문화대혁명을 바라보는 시선은 마오쩌둥의 실책이라고 보는 쪽 같습니다. 계급을 타도하자고 했는데 계급에 뭐가 있었던가? 과연 타도할 계급이 있긴 했던 건가? 허수아비를 세워놓고 찌르라고 했던 건 아닌가? 하는 시선을 느꼈습니다. 모옌의 <개구리>에서도 문화대혁명 시절에 벌어진 엄청난 테러들이 역사책을 뛰어넘는 수준으로 세밀하게 묘사되는데, 이건 말 그대로 도가니에요. 모든 것들이 융해되고 인간의 모든 속성이 다 드러나죠.
이현우 : 여러 문제점이 노출된 실패한 혁명이라는 건 잘 알려진 부분이고 그에 대한 부정으로 덩샤오핑의 개혁 개방 노선이 나오긴 했지만, 그 이면에 문화대혁명의 경험이 각인되어있다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중국 문화대혁명과 정치의 아포리아>(그린비 펴냄)를 쓰신 백승욱 교수의 책도 대중이 정치적 주체가 될 수 있는가 라는 주제에 대한 탐구잖아요. 문화대혁명은 그 주제를 실험해본 사례가 되고요.
이후에 얘기된 거지만, 마오가 당시 권력 핵심에서 비껴나 있었는데 다시 그것을 강화하기 위해 이런 과격한 방식을 채택했다는 해석도 나오지요. 아마도 문화대혁명 말기에는 마오 스스로도 대중의 요구를 감당할 수 없었던 것 같아요. 공산당 권력 자체를 무력화하는 수준까지 나갔기 때문이죠.
김용언 : 사실 당시 내걸었던 '사령부를 포격하라', '반역은 옳은 것이다'라는 표어가 궁극적으로는 공산당 최상층까지 타도하라는 지시일 텐데요.(웃음)
이현우 : 아마도 마오 생각엔 '나만 빼고'가 아니었을까요?(웃음) 굉장히 거대한 역사의 실험이었고 많은 교훈을 주기 때문에, 그냥 실패했던 참담한 재앙으로만 격하하기에는 그 의미가 크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 287쪽을 보겠습니다.
"공산당이 이끈 지난 60여 년의 역사를 돌이켜보면서 나는 마오쩌둥의 문화대혁명과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이 중국의 풀뿌리 계층에 거대한 기회를 두 차례 가져다주었다고 생각한다. 문화대혁명은 정치 권력의 새로운 분배라고 할 수 있고, 개혁개방은 바로 경제 권력의 재분배였던 셈이다."
오늘날 빈부격차가 엄청나긴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말 그대로 인민들에게 부의 기회를 준 거기도 하잖아요. 100만 명 이상의 억만장자가 있다고 하죠. <중국을 읽다 1980-2010>(카롤린 퓌엘 지음, 이세진 옮김, 푸른숲 펴냄)를 보면 80년대 초의 상하이와 지금의 상하이 사진이 실려 있어요. 80년대 초의 상하이는 음…, 우리 개항기 무렵의 인천항 비슷해요. 아무것도 없어요. 지금은 마천루 숲이죠. 30년 만에 그런 변화가 있었다는 거예요. 문화대혁명에 대한 철저한 부정 속에서 그게 가능했던 게 아니라, 문화대혁명의 에너지가 자본주의 시장 경제와 만나면서 그런 결과를 가져왔다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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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11.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