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보문고의 '사람과 책'에서 '로쟈, 고전과 만나다' 꼭지를 옮겨놓는다. 러셀의 <행복의 정복>을 골랐다. 행복론에 관한 책들이 여럿 눈에 띄기에 '원조'가 될 만한 책이 무엇일까 생각하다(오래 생각할 것도 없었다) 손에 든 것으로 러셀의 책으론 국내에서 가장 많이 읽히는 책이기도 하다. 최근에는 <러셀의 행복철학>(빅북, 2012)이란 책도 출간됐는데, 미리 나왔더라면 도움을 받았을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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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책(12년 11월호) 자신을 벗어나야 얻을 수 있는 행복
이달의 고전으로 고른 것은 버트런드 러셀(1872-1970)의 <행복의 정복>(1930)이다. 철학자 러셀을 대표할 만한 저작은 아니지만, <서양철학사>나 <철학의 문제들> 등을 제치고 국내 독자들에게 가장 많이 읽히는 책이다. 프롬의 <사랑의 기술>과 함께 그런 관심의 상당 부분은 제목에 빚지고 있는 듯하다. 그렇다고 내용과 무관한 현혹적인 제목이 붙어 있는 건 아니다. 사랑이란 감정의 상태가 아니라 기술이라고 말하는 <사랑의 기술>과 마찬가지로 <행복의 정복>은 행복이란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노력을 통해 정복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흔한 통념대로 인생의 목표가 행복이라면, <행복의 정복>이야말로 필독의 고전이 될 만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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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러셀의 책을 처음 만난 건 대학 1학년 때였다. 강의시간에 <서양철학사>(집문당)를 소개받고 두 권짜리 번역본에서 현대철학을 다룬 하권만 읽은 기억이 있는데 시인 바이런을 다룬 장이 인상적이었다. 철학사 책에서 칸트와 헤겔 등과 나란히 바이런을 다룬 건 러셀만의 독특한 안목과 파격을 보여준다. 박영문고로 나온 <결혼과 도덕>, <인간사회개조론> 외에 <종교는 필요한가>(범우사)와 <철학의 문제들>(서광사)이 학부시절에 읽은 책들이다. 그 이후에도 러셀의 책들은 간간히 구입했지만 <행복의 정복>에 대한 특별한 인상은 갖고 있지 않다.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처럼 문고판 대역본을 통해서 접한 기억만 있다.
집착을 줄여 얻은 행복
사실 젊은 시절에 행복론을 들먹이는 건 좀 어울리지 않는 일이기도 하다. 중학교 때 물리시간에 ‘질량 보존의 법칙’이란 걸 배운 이후로 나는 ‘행복량 보존의 법칙’ 같은 것도 있을 거라고 단정했다. 일정량의 행복이 보존되는 만큼 내가 남들보다 더 행복하면 그만큼 다른 사람은 불행해지는 거라고 생각했다. 굳이 남들보다 불행해지고자 애쓰지는 않았지만 과도한 행복은 경계 대상이었다. 그래서 행복하지도 불행하지도 않은 상태가 적당하다고 여겼다. 러셀의 진단에 따르면 행복이 바람직한 것이라는 확신을 나는 갖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거꾸로 불행에 대해서는 은근한 지적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자기만의 행복 추구를 은연중에 거부하고 무시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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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셀은 잠을 설친 사람들이 그렇듯이 불행한 사람들 또한 늘 자신이 불행하다는 사실을 자랑한다고 꼬집는데, 내가 그런 격이었다. 그는 그런 태도를 꼬리 잃은 여우가 하는 자랑에 비유한다. 이솝우화에 나오는 이 여우는 다른 여우들에게도 꼬리가 없는 편이 훨씬 낫다고 주장하다가 결국 망신만 당한다.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다면 일부러 불행을 택할 이유가 없다는 게 러셀의 생각이다. 그럼에도 불행을 고집하려 한다면 <행복의 정복>은 읽을 필요가 없는 책이다(아니다, 거꾸로 받아들이면 ‘불행의 탐닉’으로도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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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건 러셀 자신도 젊은 시절에는 행복주의자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애초에 행복하게 태어나지 않았다는 게 그의 고백이다. 어렸을 때 즐겨 부르던 찬송가가 ‘세상에 지친 이 몸에 죄로 된 짐을 지고’였고, 다섯 살 때는 만약 일흔까지 산다고 하면 겨우 인생의 14분이 1을 버틴 셈이니 여생이 얼마나 지루할까 고민에 휩싸였다. 삶을 증오하던 사춘기에는 늘 자살을 꿈꾸었지만 수학을 좀더 알고 싶다는 욕구로 버텨냈다고 한다. 나중에 화이트헤드와 공저한 <수학의 원리>나 간추려 쓴 <수리철학의 기초>는 그런 인내가 아니었다면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랬던 그가 노년에 이르러 삶을 즐기게 됐다. 어떤 비결인가. “이렇게 삶을 즐기게 된 비결은 내가 가장 갈망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내서 대부분은 손에 넣었고, 본질적으로 이룰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는 깨끗하게 단념했기 때문이다”라고 그는 말한다. 더 압축하면 비결은 자신에 대한 집착을 줄였다는 데 있었다. 그런 직접적인 경험과 관찰을 통해서 러셀은 불행으로 고통 받는 많은 사람들이 충분히 행복해질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된다. 그 믿음이 사람들의 상식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책의 집필 동기다.
외부에 대한 관심이 행복의 비결
물론 모든 불행에 대한 처방을 제안하고 있지는 않다. 러셀은 행복이 부분적으로는 외부적 환경에 달려 있다는 점도 놓치지 않는다. 개인적 심리도 그 외부적 환경에 속하는 사회제도의 산물일 때가 많다. 따라서 행복을 증진시키려면 의당 사회제도의 변혁이 필요하지만 <행복의 정복>은 그 부분까지 다루지는 않는다(그 이 문제에 대해서는 <결혼과 도덕>이나 <사회개조의 원리> 같은 책에서 다루었다). 문제는 외부적 요인이 충족되었을 때에도 행복하지 않은 경우다.
“일용할 양식과 몸을 누일 곳을 확보할 수 있을 정도의 충분한 소득, 일상적인 육체활동이 가능할 정도의 건강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분명한 외적 원인이 없이도 불행하다면 어째서 그런가? 러셀은 이런 불행은 대부분 세계에 대한 그릇된 견해, 잘못된 윤리와 생활습관에서 비롯된다고 본다. 그런 불행은 사회제도의 변혁까지 가지 않고서 개인의 힘으로도 좌우할 수 있다. 무엇이 불행의 원인인지 깨닫고 개선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런 발상에 따라 러셀은 <행복의 정복>을 ‘불행의 원인’과 ‘행복의 원인’, 두 부분으로 구성한다. 그가 보기에 불행의 원인은 단순하다. 아무 이유 없이 불행해 하면서 그 불행의 원인을 우주의 본질로 돌리는 ‘바이런적 불행’에서부터 경쟁, 권태, 피로, 질투, 죄의식, 피해망상, 여론에 대한 공포까지 여러 가지 원인을 제시하고 있지만 불행의 원인을 뭉뚱그리자면 한마디로 자기 자신에 대한 과도한 관심과 몰입이다.
러셀에 따르면 자기 몰입에는 죄인과 자기도취에 빠진 사람, 과대망상증에 빠진 사람, 세 유형이 있다. 죄의식에 사로잡혀서 끊임없이 자신을 탓하는 유형이 죄인이다. 자기도취형은 죄인형과는 반대로 자신을 찬미하며 남들에게도 항상 찬미를 받고자 한다. 자기도취형이 남들에게 매력 있는 사람으로 비치길 갈망한다면 과대망상형은 권력을 가진 사람, 그래서 남들이 두려워하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 하지만 이런 자기중심성은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없다. 아무리 역사상의 위인이라 하더라도 전지전능한 존재는 아니므로 언젠가는 극복할 수 없는 장애에 부딪칠 수밖에 없다. 러시아 원정에 나섰다가 패배하고 결국엔 세인트헬레나로 유배당한 나폴레옹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자기중심성이 불행의 주된 원인이라면 우리는 열정과 관심을 자기 내부가 아닌 바깥에 쏟는 것만으로도 행복을 성취할 수 있다. 러셀이 보기에 “행복한 사람은 자유로운 애정과 폭넓은 관심을 가지고 객관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렇다고 도덕가들이 얘기하듯이 자기부정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저 관심을 외부로 돌리기만 하면 된다. 이타적일 필요도 없다. 가령 도덕가들은 사랑은 이기적이어서는 안 된다고 충고하지만 러셀은 그것이 어떤 한도를 넘어설 만큼 이기적이어서는 안 된다는 정도의 제한으로 받아들인다. 자신의 행복을 포기하고 상대방의 행복을 바라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행복의 비결은 단순하다. 되도록 폭넓은 관심을 가지는 것, 그리고 관심을 끄는 사물이나 사람들에게 되도록 따뜻한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세상에 대한 열정 그리고 흥미로운 삶
러셀은 열정과 사랑, 가족, 일, 일반적 관심사, 노력과 체념 등을 ‘행복의 원인’으로 열거하는데, 궁극적으로 필요한 것은 자기 자신에게만 관심을 두는 내향성의 극복이다. 왜 내향적인 성향이 문제가 되는가. 러셀은 이런 이야기를 들려준다. 옛날에 소시지 기계가 두 대 있었다. 돼지고기를 원료로 해서 소시지를 만들어내는 기계다. 이 중 한 대는 돼지에 관심이 많아서 엄청난 양의 소시지를 생산했지만, 다른 한 대는 “돼지가 나한테 무슨 소용이람?”이라고 말하며 시큰둥해 했다. 이 기계는 돼지에 대한 관심을 끊는 대신에 자신의 내부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기계는 작동을 멈췄다. 하지만 아무리 연구해보아야 이 기계는 자신의 내부가 공허하고 어리석은 것으로 여겨졌다.
이 두 기계의 차이가 열정을 갖고 있는 사람과 열정을 잃은 사람 간의 차이라고 러셀은 말한다. 우리의 마음은 소시지 기계와 같아서 외부 세계로부터 원료가 공급되지 않으면 일을 할 수 없다. 우리가 열정을 가질 수 있는 대상은 무궁무진하다. 다른 조건이 비슷하다면 어느 것 하나에라도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훨씬 더 세상에 잘 적응할 수 있고 흥미로운 삶을 살 수 있다. 거기서 더 바란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이 이상한 행성과 이 행성이 우주 안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대해 더 많은 지식을 습득하고 인류사의 원대한 조망 속에서 살아간다면 개인적으로 어떤 운명을 산다고 해도 강한 행복감이 곁을 떠나지 않을 것이라는 게 러셀의 행복론이다.
12. 1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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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행복관의 역사에 관해서는 시셀라 복의 <행복한 개론>(이매진, 2012)가 유용하다. 프로이트의 <문명 속의 불만>과 러셀의 <행복의 정복>을 비교한 장도 포함돼 있는데, 이 두 책은 같은 해에 출간됐다. 제니퍼 마이클 헥트의 <행복이란 무엇인가>(공존, 2012)과 엘리자베스 파렐리의 <행복의 경고>(베이직북스, 2012)도 행복론과 관련하여 참고할 만한 책. <행복의 경고>는 이번주에 주문한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