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26년전 오늘..나는 무슨일이 일어나는지 아무것도 몰랐다.
단지 어둡게 변하신 아버지의 얼굴만 가물가물 기억이 난다.
그때 담배를 피우시던 아버지는 마당에서 서성거리시면서 연신
줄담배를 피셨었다. 걸려오는 전화에 다급히 전화를 받으셨고,
이어서 황급히 어딘가에 전화를 걸어서 이미 어릴 적에 떠나온
땅의 토속어로 전화상의 누군가와 때로는 조용히 때로는 목청을
높여 전화통화를 하셨었다.
26년전 오늘..나는 무신일이 일어나는지 아무것도 몰랐다.
2.
나는 그가 그 사람인 줄 몰랐다.
23년전 5월 5일, 웃기지도 않게 학교대표로 어린이날 상이라는 걸
받고 청와대로 초청을 받았다. 드넓은 잔디밭에 맛난 다과가 차려져
있었고, 군악대의 합주와 함께 두명의 남녀가 저쪽에서 걸어왔다.
검은 양복을 입은 사람이 군데군데 눈을 부라리며 이곳저곳을 살폈던
것이 기억난다.
꽤 많은 어린이들(나를 포함)은 일렬로 줄을 서서 천천히 그 두사람과
악수를 했었다. 남자는 대머리였고, 여자는 턱의 발육이 남달랐다.
어린 마음에 집에 와서 신나게 자랑을 해댔고, 그곳에서 받은 선물을
펼쳐놨다. 그걸 바라보시는 아버지는 웃고 있으셨지만, 결코 밝은 표정
은 아니셨던 기억이 난다.
나는 그때 그가 그 사람인 줄 몰랐다.
3.
나는 더이상 그놈하고 상종하지 않았다.
12년전 5월이라고 생각된다. 나는 대학이라는 곳을 다니고 있었다.
여태까지의 의무교육과정에서 학교에 있는 녀석들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
하면 비교적 가까운 곳에 있었지만, 대학이라는 곳은 전국각지에서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였다.
그놈은 집은 서울이여도 삼천포가 고향이며 그곳에서 살았던 시간이 대부분인
놈이였다. 술자리에서 자연스럽게 1980년 5월 18의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술이
거니하게 들어간 자리에서 나온 이야기였고, 대부분 사람들의 의견은 은폐된
진실, 반란의 개념이 아닌 항쟁과 민주화투쟁의 이야기로 방향을 잡고 있었다.
그때 그놈은 꽤 높은 목청으로
`그때 XXX놈들 다 쓸어버려야 했어.!!'
라는 충격적인 망발을 했었다.
곧이어 날라온 술잔..방향을 보니 쓸어버려야 한다는 그 지역이 고향인 녀석이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이미 술상위를 성큼성큼 뛰어오는 모습이 목격되었다.
일순간에 아수라장이 되버린 술판이였고, 중간에서 말리기 급급했었다.
그 후 문제의 발언을 한 그놈과의 대화에서 그의 발언은 단지 술기운이 아닌
어렸을 때 부터 그의 아버지에게서 전수받은 잘못된 조기교육의 결과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름까지도 갱제 갱제를 외치던 전직 대통령과 한자 글자마져도 똑
같았던 그놈하고 더이상 상종하지 않았다.
내 또래에도 과거 위정자들이 권력을 위해 서슴치 않고 사용했던 `지역감정'을
매달고 다니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던 계기가 되었었다.
4.
올해 5월 14일 우연히 TV에서 하는 다큐를 보게 되었다.
26년전 그곳에서 일어난 사건이 주제였었고, 다른 다큐와의 차별성은 피해자의
시선이 아닌 가해자의 시선에서 다큐는 진행되고 있었다.
당시 군이라는 집단의 광기어린 명령으로 진압군이라는 명목하에 투입되었던
공수여단의 병사들의 현재 모습은 그 당시 피해자의 모습과 별반 다를 것 없이
참혹 그 자체였다.
정신을 놓고 수십년을 정신병원에서 지내고 있는 사람. 괴로움에 못이겨 스스로
생을 마감한 사람..그리고 고통받는 그들의 가족...
아이러니하게도 그때 당시 명령을 직접 내린 사람들은 내 추측으로는 대한민국
5%안에서 여생을 즐기면서 풍족한 노후를 보낼 것이라고 생각된다.
책으로 기술된 과거의 역사속에서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살육과 학살이 있었고,
권력자들의 권모술수와 야합이 존재하였다는 것을 무덤덤하게 읽어 왔던 나도
돌이켜 보면 책이 아닌 현실에서 파란만장한 이땅의 역사가 관통되는 그자리에
있었다는 사실 하나에 살벌하고 섬짓한 느낌이 가끔씩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