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대통령께서 재임 시절에 유청장님께 그리 말씀하셨단다. 거제도를 갔을 때 눈물나게 아름답다고 여겼는데 외국 섬에 가서는 그런 기분을 못 느끼셨다고... 그럼에도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이 안타깝다 하셨단다. 그래서 대표섬 4,5개를 관광섬으로 지정해 보는 게 어떠냐고 말씀하시니 유청장이 해보라고 하셨단다. 그래서 추진한 것이 '가고 싶은 섬, 살고 싶은 섬' 프로젝트.
우리가 도착할 보길도와 윤선도, 그리고 나주 관아에 대한 짧은 설명들이 이어졌지만, 그것들이 금세 40여 분 정도를 채웠다. 역시나 건재한 입담이시다. 원래 계획은 황석영, 방배추를 모두 초청하는 거였는데 불발되었다고 하신다. 아, 이렇게 안타까운 일이! 역사적인 구라 라이브를 볼 기회를 놓쳐버렸다. 방배추 씨는 현재 경복궁 야간 근무 중이신데, 이 자리에 참석하려면 두 명 정도가 근무를 바꿔야 해서 공직근무 중에 그럴 수 없다고 마다하셨단다. 하하핫, 성실하셔라.^^
방배추 이름의 유래는 설명하기 귀찮아서 배추 몸처럼 생겨서 그렇게 되었다고 방송에서 말씀하셨지만 실제 이유는 달랐다고 한다. 녹화 마치고 전화해서 앞으로 방배추 이름의 유래는 방송용처럼 가자고 입단속도 시키셨다고...ㅎㅎ
1권 답사 시절에 황석영이 마이크 잡고 1시간을 못 채웠던 것을 유교수님은 무려 7시간을 연속으로 말씀하셨다고 한다. 11시간 여정 중에 그렇게 8시간이 입담으로 채워졌다니 가히 전설이 될 만하다. '구라' 반열에 올라가도 전혀 부족함이 없다.
지난 부여 답사 때도 틀어주시던 음악이 참 좋았는데 이번에도 음악 감상을 덕분에 맘껏 했다.
이번 답사 여행 때 나를 즐겁게 한 또 하나의 시간은 간식 타임이었는데, 지난 몇 달 간 다이어트 한다고 구경조차 하지 못했던 달달한 것들이 가득했다.
가장 신선했던 것은 커피였다. 다이어트 중에 가급적 자제했지만 조금씩은 금지 식품들을 먹었는데 유일하게 100% 안 먹은 것이 커피였다. 난 데미 소다 달라고 한 거였는데 간식 주시던 분이 잘못 알아들으시고 커피를 주셨는데, 그게 너무 유혹적이어서 그냥 홀랑 마셔버렸다. 아, 천국에 온 기분이었다. 역시 커피는 진리였어!
정안 휴게소에 들러서 잠시 쉬었다가 다시 길을 재촉했다. 버스에 탑승하고 계신 여러 인사들을 소개해 주셨다. 제일 위에 이름이 올라 계신 분이 백낙청 교수님이셨는데 혹시 이게 나이순??? 이번 여정에 인상을 보고 깜짝 놀란 분이 몇 분 계셨는데 그중 한 분이 백낙청 교수님이셨다. 너무 선하게 생기셔서 이분은 시를 써야 하는 것 아닐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 어느 것 하나 막히지 않는, 인공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얼굴이셨다. 내기 바둑을 위해 참석하셨다는 임재경 선생님과 유교수님이 윤선도에 대해 허튼 소리를 할까 봐 감시 차 참석하셨다는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님, 그리고 유교수님이 직접 딸의 주례를 선 이후 함부로 못하고 계시다는 김정헌 화백님, 전 청와대 정무수석 유인태 씨와 지난 부여답사 때도 눈도장을 찍은 눌와 김효형 대표님, 그리고 여러 대학의 여러 교수님들이 각자 자기 소개를 하셨다. 그 중에는 21년 전에 보길도에 왔다가 파도 소리에 홀려 결혼을 결심하셨다는 부부도 계셨고, 논이 없던 제주도를 진도가 먹여 살렸다며 진도 쌀을 소개하신 분도 계셨다. 오호라! 제주도가 진도에 그런 빚을!
하여간, TV나 신문에서나 이름을 볼 법한 분들이 너무 많아서 블로거란 이름으로 자리한 나는 유일한 민간인이 된 기분으로 앉아 있어야 했다. 아, 뻘쭘하여라..;;;;
유인태씨는 대학 때 물에 빠진 유교수님을 구해준 일화가 있다고 하신다. 그 공으로 현상금 붙은 친구를 숨겨주었다가 민청학련 사건 때 걸렸다는 유교수님. 빚은 그때 갚았는데 평생 우려내는 중이라고... 하핫! 길이길이 기억될 명 추억이 되겠다.
지난 번 서울역사박물관 대화 때도 들었지만, 신촌 우리마당에서 진행한 우리 미술 수업은 16주로 끝나지 않아서 다시 16주를 연장했는데, 그 바람에 사설강습소법 위반으로 걸렸다고 하신다. 연속 30주 이상은 등록을 해야 한다고... 그래서 장소를 물색하다가 어느 포교원에 자리를 잡으셨단다. 부처님 불상 앞에 스크린을 걸고 수업을 하셨는데, 하필 그때 그림이 김홍도 신윤복 차례로 유명한 춘화가 차례로 등장했단다. 하하핫, 부처님이 졸지에 쉽지 않은 구경을...ㅎㅎㅎ
우리가 첫날에 머무를 보길도는 무려 1000만 평이나 된단다. 흔히 평수로 이야기할 때 기준이 되곤 하는 여의도가 80만 평에 해당하고, 서울이 2억 평, 제주도가 6억 평, 그리고 남한 전체는 약 300억 평에 해당한다고 하신다. 끝발 있는 ~청은 모두 서울에 있다고 하는데 끝발 없는 ~청은 모두 대전에 있다고 썰~을 푸시는 유교수님!
산림청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고 한다. 면적이 너무 넓어 관리하기 힘들다고... 대략 200억 평쯤 된다고 한다. 국토의 2/3가 산이라고 배웠던 기억을 살려도 맞아 떨어지는 수치다. 그러자 경찰청장은 사람 사는 곳을 다 쳐야 하니 300억 평이라고 엄살을 늘어놓으셨다고... 그러자 해양청장이 바다는 육지의 4배라며, 1200억 평이라고 으름장을 놓으셨다고 한다. 이제 유교수님이 나설 차례다. 문화재청장은 등기등본 상 직할만 약 1억 평이라고 하신다. 여기에 매장문화재는 육지와 바다 모두 해당되는데, 이중 바다는 3년에 하나 건져 올리므로 다 올리려면 600년이 걸린다고... 게다가 몽골, 태국 등등 해외에 나가 있는 문화재까지 생각하면 근무하기 가장 고달픈 것이라고 엄포를 놓으셨단다. 하지만 인생도처유상수! 더 큰 고수가 등장했다. 바로 기상청장. 자긴 계산조차 할 수 없다고 하신다. 하핫, 하늘과 우주 앞에 누가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있으랴!
버스가 나주에 도착하면 거기서 점심을 먹고 순오기님 일행과 나의 일행이 합류하고, 그쪽으로 오신 몇 분이 더 합류하게 되어 있었다. 나주는 정약용과 정약전 형제가 유배길에 올랐다가 헤어진 길목이신다. 그렇게 헤어져 수십년의 세월이 흐르고 끝내 불귀의 객이 되었으니 참으로 아픈 장소라고 할 수 있겠다. 작년에는 강진에 무척 가보고 싶었는데 못 갔던 기억이 난다. 역시 강진에도 한 번 가봐야 해....
차에서 내리기 전에 유교수님이 내게 메일로 글 잘봤다고 하셨다. 어떤 메일인지? 아마도 박경철-유홍준의 대화 포스팅 말씀하신 듯하다. 알라딘 뉴스레터에 실렸고, 창비쪽에서도 링크를 건다고 했으니 말이다. 아, 쫌 쑥스럽다.^^
나주에 예약된 식당은 '하얀집'이란 이름의 곰탕집이다. 이름이 마음에 들어서 고르셨다고...
먼저 도착한 순오기님과 민주양, 그리고 나의 일행과 한 테이블에 앉았다. 오기 전에 멀미가 나서 고깃국물을 먹을 수 있을까 염려가 되었는데 아주 맑은 국물이었고 시원한 맛이어서 속이 오히려 편안해졌다.
식사를 마치고 섬으로 가기 전에 주변을 잠시 둘러보았다.
답사기 6권에 보면 조선시대 관아의 비극적 운명에 대해 자세히 소개되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조선시대 관아가 제모습 그대로 남아 있는 게 없다.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신시가지 형성 과정에서 훼손되어버렸고, 관리되지 않은 한옥은 필연적으로 허물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또 그 흔적을 찾기가 어렵다. 더구나 전국 관아 터에 모두 초등학교가 들어서고 해방 후에는 그 정도가 더 심해져 버렸다. 당시 문교부 관할 건물은 문교부 땅에 지어야 했으므로 오늘날의 문화재청이 가장 유적을 훼손한 셈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그 중 제대로 복원 가능한 곳이 7곳 정도였고 이중 나주 관아가 복원 진도가 가장 빨랐다고 한다.
서울의 형상과 가장 닮아 있다는 나주는 왜구 문제로 시끄러운 곳이었다. 때문에 서울 다음에 중요한 곳으로 인식되어 나주 목사는 주로 무관을 임용했다고 한다.
나주 향교를 찾기 위해서 길을 빙글빙글 조금 헤매어야 했다. 해가 들어간, 조금은 컴컴한 날이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척 뜨거운 날이어서 옷이 흠뻑 젖고 말았다. 날이 화창했으면 사진이 좀 더 잘 나왔을 텐데 다소 아쉬운 부분이다.
향교는 지방의 교육 기관으로 유교 선현에 대한 제사 기능과 교육 기능을 동시에 갖추고 있다. 나주 향교의 건물 배치는 서울의 문묘와 같은 형식은 전묘후학을 이루고 있다. 즉 앞쪽에는 제사 공간, 뒤쪽에 학습공간이 위치한다.
보물 제394호로 지정된 대성전이다. 공자를 중심으로 한 27위의 위패를 모신 공간으로 단연코 향교의 중심 건물이라 할 수 있다. 건물이 무척 커서 늠름해 보인다.
향교 옆엔 꼭 있다는 은행나무가 이곳에도 역시 600년 수령을 자랑하며 우뚝 서 있다. 사진에 찍힌 인물들을 모자이크 처리했더니 나무의 기상이 죽어버린다. 아흐 동동다리~
박석무 이사장님의 걸걸한 목소리로 나주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며 땅끝마을로 이동했다.
버스에서 내려 배에 탑승했는데, 버스도 배에 실려서 이동했다. 우와, 배가 생각보다 크구나!
'땅끝'이라는 글자보다 더 땅끝을 느끼게 해준 건 등대였다.
날이 어두웠기 때문에 바닷물이 반짝이진 않았지만 나름대로 분위기 있는 빛깔을 보여주었다.
(사진 펑!)
목에 걸린 볼펜은 나의 동행 언니가 선물해준 거였다. 나는 답례로 팔에 차고 있는 팔찌를 주었다. ^^
배 위층에서 때아닌 맥주 선상 파티가 열려버렸다. 맥주 권할 때 생각 없어서 거절했는데 뒤늦게 아쉬움이 밀려와 버스 안에서 다시 맥주를 받아놨다. 유교수님은 술을 전혀 안 드시는 줄 알았더니 맥주를 드시고 계셔서 반사적으로 찰칵! 나중에 조교님께 물어보니 술 잘 안 하시는데 집필하실 때 한 잔 정도 즐기시는 정도라고 하신다. 최근 담석 제거 수술을 받으셨다던데 건강 유의하셔요!!!
선생님 오른쪽으로 찍힌 선글라스 쓰신 분은 유인태 전 정무수석님? 끊임없이 담배를 물고 계시던데 그게 금연초인지 전자 담배인지... 오실 때는 버스 안에서도 피우시더만...ㅜ.ㅜ
구름과 바다와 그 가운데 섬이 한폭의 그림 같다. 누구 작품인지 절경이다.
여러 섬들을 하나씩 거치면서 승객을 태우는 것 같았다. 보길도행 페리호에 타고서 한 시간 정도를 가고 나서야 드디어 보길도에 도착했다.
버스 안에서는 다시 간식 타임! 맥주는 쟁여뒀다가 밤중에 먹었다. 다이어트에 대한 강박관념은 이미 날아간 상태!
보길도가 사랑받게 된 데에는 윤선도의 공이 크다. 제주도로 유배를 갈 때는 완도에서 출발하기 마련인데 날씨가 좋으면 하룻길에 제주까지 닿지만 풍랑을 만나거나 하면 보길도에서 쉬어갔다고 한다. 윤선도의 경우는 보다 극적이다. 병자호란 당시 해남에 낙향해 있던 윤선도는 가솔과 노비들을 이끌고 올라가다가 인조의 항복소식을 듣고는 뱃머리를 돌려 제주도에 은거할 뜻을 세운다. 남쪽으로 내려가던 윤선도는 도중에 어느 섬에 들렀는데 풍광이 하도 아름다워 은신처를 잡게 되었으니 그곳이 바로 보길도다. 유교수님의 국보순례에도 이 내용이 소개되어 있다.
언니가 찍은 사진인데 너무 마음에 들어서 바탕화면으로 써도 좋겠다고 생각한 사진이다. 운치 있다!
마치 연꽃이 피어나는 듯한 지세라고 해서 이곳 이름을 '부용동'이라 지은 윤선도는 이곳에 거처할 집을 짓고 그에 딸린 정자와 연못도 만들었다. 계곡물을 판석으로 막아 연못을 만들고, 연못물을 끌어들여 인공연못도 만들고, 그 사이에 섬을 축조하고 세연정을 지었다. 못 가운데에는 육중한 자연석 일곱 개를 배치하였다. 실로 장대한 스케일이라 할 수 있다.
세연정 전경이다. 3칸짜리 정자인데 몹시 크다.
정자 한쪽 끝에 조금 올라간 부분은 불을 때울 수 있는 공간 같다. 그 위에 밀짚 모자 쓴 민주 양이 보인다. 문 열어보는 이가 유교수님!
주변을 한바퀴 빙 돌고는 반대편에서 세연정을 찍어보았다. 이곳을 둘러싼 모든 산과 계곡을 모두 정자 안으로 끌어당기는 건축 구조라니, 호방한 기상이 마구 솟구친다. 이런 자리에 앉아 있으면 절로 싯구가 떠오르지 않을까?
여섯 어르신들도 한 자리에 모여 찰칵! 왼쪽부터 유홍준, 김정헌, 백낙청, 박석무, 유인태, 임재경(아마도..;;;;) 선생님.
그리고 이어진 산행. 10여분 정도로 오래 걸리지 않았지만 길이 미끄러워서 무척 조심스러웠다. 저 커다란 바위는 마치 장금이를 촬영한 장소 같잖아!
오르는 길은 꽤 힘들었다. 이렇게 힘든 길은 미리 말해줬어야 했다는 어르신들의 아우성이 빗발칠 때에야 옥소대에 도착했다. 꼭대기에 올라서 아래를 휘둘러 내려보니 없던 호연지기도 생길 판이다.(아, '호연지기' 하면 나꼼수의 가카가 생각나...;;;;)
(사진 펑!)
산에서 내려와 정자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을 때에 유교수님이 슬쩍 들어오셔서 내 옆에 서셨다. 너무 좋아서 표정 관리가 안 되어버렸다. ㅎㅎㅎ 이때부터 많은 참가자들과 유교수님의 포토타임이 시작되었다.^^
세연지의 저수를 위해 만든 판석보는 일명 '굴뚝다리'로 불린다. 건조할 때는 돌다리가 되고 우기에는 폭포수가 되어 일정한 수면을 유지하도록 만들었다고 하니 신비롭다. 인물 얼굴이 선명하게 보이지 않아 모자이크 처리는 패쓰!
날이 흐려도 물에 비친 나무 그림자를 가릴 수는 없다. 마음까지 고요해지고 평화로워진다.
4번 사투암은 '옥소대를 향하여 활을 쏘는 데 발받침 역할을 하였다"고 전해지는데 유교수님이 활쏘는 시늉을 해보이셨는데 사진을 찍었다고 생각했는데 보이지 않는다. 어디 갔지??? (나중에 찾아보니 활쏘는 자세를 취한 것은 다음날이었다. ㅎㅎㅎ)
역시 윤선도를 떠올리게 하는 보길도답게 '어부사시사'라는 이름이 제격이다.
(아악 쓰다가 다운 되어서 글이 날아갔다..ㅜ.ㅜ 미텨미텨...;;;;;)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ㅜ.ㅜ
버스를 타고 조금 이동해서 올려다본 동천석실이다. 산중턱 절벽 위에 지은 1칸 짜리 정자인데 여기서 독서하며 사색을 즐겼다 한다. 음식물은 직접 개발한 도르래를 이용해서 올려받았다고 한다. 한 번 올라가면 좀처럼 내려오기 힘든 곳이니 그야말로 공부 외에는 할 게 없는 곳! 고시라도 준비해야 마땅한 집이 되겠다. 저곳에서 내려다보면 주변 장관이 오죽 대단할까. 하늘과 산과 계곡을 모두 품어안은 곳이니 그 자신의 세계에서 제왕이 되고도 남음이 있겠다. 평생을 당쟁에 시달리며 고단하게 살기는 했지만, 한편으로는 어마어마한 재력으로 풍류남아 기질을 제대로 발휘하며 호연지기를 내보였다.(아, 또 호연지기;;;;;)
보길도 위쪽의 섬은 '노화도'라고 하는데 풍문으로는 윤선도에 반발한 노비들이 불을 질러서 노화도라는 소리가 있다. 박석무 이사장님은 이런 전설에 노발대발 하셨는데 사실인지 소문일 뿐인지 알쏭달쏭하다. 당대에 수많은 인력을 동원해서 지은 것들이 후대에 후손들에게 떠받들어지는 유산이 되는 경우는 비일비재하다. 유교수님은 사치스럽지 않고서 문화유산이 될 수 있겠냐는 말씀을 하셨다.
“100년 후에 지정될 문화재가 이 시대에 생산되지 않고 있다”
▶정재승 : 지난 20년간 나온 예술 작품 중 전 시대의 수준을 넘는 것이 많은가요. 우리가 그런 시대에 살고 있는지 궁금해집니다.
▶유홍준 : 사실, 걱정스러운 면이 많습니다. 문화재청장 떠날 때 기자간담회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100년 후에 지정될 문화재가 이 시대에 생산되지 않고 있다.”
우선 국민정서를 바꿔 부자들이 호화주택을 짓게 해야 합니다. 지금도 3대에 걸쳐 상속세 세 번만 맞으면 재산가치가 제로로 됩니다. 국가로 귀속되죠. 그런데 왜 호화주택을 짓지 못하게 합니까. 국민 정서라는 주위의 시선 문제 때문이기도 하죠. 이상하게 사람을 좌우로 가르고,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을 분리시켜 보는 시선이 있잖아요. 현재 주택법으로도 200평 이상의 대지는 호화주택을 갖고 있다고 해서 중과세 대상입니다. 멋있는 집을 지으면 일단 사치로 봅니다. 그런데 사치가 들어가지 않고 문화유산이 나올 수 있을까요? 평범한 것은 문화재가 될 수 없어요.
희망의 인문학 캠페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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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날의 칼 같은 느낌이다. 노비들에게는 그의 기질이 부담스러웠겠지만 후손들은 그 덕분에 그 시대의 한 풍경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다.
하여간 이 어마어마한 스케일을 보니 해남 윤씨의 재력이 보통이 아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효종이 수원에 그에게 지어준 집이 기울자 목재를 해체해서 해남까지 싣고 와 다시 지었다고 하는데, 임금에 대한 충정도 높이 살만하지만, 그걸 운반해올 수 있었던 그의 집안 재력이 더 대단하다.
이참에 그의 대표 시조 '오우가'도 한 번 감상해 보자.
내 벗이 몇이나 하니 수석과 송죽이라
동산에 달 오르니 그것이 더욱 반갑구나
두어라 이 다섯 밖에 또 더하여 무엇하리
구름 빛이 깨끗하다 하나 검기를 자주 한다
바람 소리가 맑다 하나 그칠때가 많구나
깨끗하고도 끓일 때 없는 것은 물 뿐인가 한다
꽃은 무슨 일로 피었다 빨리 지며
풀은 어이하여 푸르자 마자 누러지는가
아마도 변하지 않은 것은 바위뿐인가 하노라
더우면 꽃 피고 추우면 잎 지거늘
솔아 너는 어찌 눈서리를 모르느냐
깊은 땅 속에 뿌리 곧은 줄을 그것으로 하여 안다
나무도 아닌 것이 풀도 아닌 것이
곧기는 누가 시켰으며 속은 어찌 비었는가
저렇게 사철이 푸르니 그를 좋아 한다
작은 것이 높이 떠서 만물을 다 비취니
밤중의 달빛이 너만 한 것이 또 있겠느냐
보고도 말 아니하는 내 벗인가 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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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를 타고 해변을 따라 달려 도착한 곳은 망끝 전망대다. 예전보다 길이 좋아져서 버스를 타고 좀 더 멀리 돌 수 있게 되었지만 섬을 완전히 한바퀴 돌 수는 없어서 갔던 길을 되돌아와야 했다.
공룡알 해수욕장 가는 길에 만난 토종닭! 빨간 벼슬이 인상적이었다. 생각보다 걸음이 빨라서 사진 찍을 때 애먹었다. 저러다 날아가는 것 아닌가 싶을 만큼 빠르더라.^^
축대의 돌도 큼직하다. 공룡알 해변은 정말 '공룡' 알이 발견되어서가 아니라 돌이 큼직해서 공룡알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크기 비교를 위해서 내 발과 함께 찍어보았다.
하얀 파도가 근사하다!
누군가가 쌓아놓은 자그마한 돌탑이다. 저 돌 사이사이에 무수한 소망들이 담겨있을 테지...
돌은 주워오지 못했지만 소라 껍데기는 주워왔다. 순오기님의 조언대로 락스 물에 담가서 나름 표백을 했는데 그래도 물이끼는 완전히 빠지지 않았다. 책장 위에 올려놓으니 다현양이 갖고 싶다고 탐난다. 그리고는 돌아서서는 잊어버렸다능!
하늘이 온통 어둑어둑한 가운데 구름인지 안개인지 구분이 가질 않는다.
가로등이 운치 있어 보여서 한 컷 찍었다.
전복으로 유명한 곳 답게, 저녁 메뉴는 전복 회!! 그렇지만 나는 회 못 먹는 여자 사람!! ㅠ.ㅠ
전라도에서만 판다는 잎새주를 한 컷 찍고, 이날 내 배를 채워준 고마운 고구마도 한 컷! 다이어트의 절대 법칙이 탄수화물을 가급적 제한하는 거였는데, 고구마를 맘껏 먹은 날이었다. ㅎㅎㅎ
식사를 마치고 나와 보니 해가 저물어 검은 바다가 되어 있다. 섬으로 들어오니 일정이 빨리 끝날 수밖에 없어 일찍 숙소로 들어간다는 강점이 있다. 펜션과 민박에 나누어 숙박했는데, 이름은 달라도 숙소의 생김새는 비슷비슷...^^
더워서 땀도 많이 흘렸지만 바다를 건너는 동안 소금기 가득한 바닷바람 때문에 머리카락이 온통 엉켜있었다. 빨리 샤워를 하는 게 급선무였는데 처음에 더운 물이 나오지 않아 애먹었고, 나중에 온수가 나올 때는 너무 뜨거워서 또 애먹었다. 아주 차갑거나 뜨겁거나! 중간이 없는 물이었다.(성경구절이 하나 떠올랐는데 그게 어디더라... 일곱 교회 얘기할 때 나온 것 같은데...;;;)
다 씻고 나왔지만 이대로 잠드는 것은 뭔가 억울하다. 이곳 예송리 해수욕장의 해조소리가 유명하다고 들었는데 그게 듣고 싶어서 비가 오는 데도 해변가로 나가보려고 했다. 나의 일행은 방에 있겠다고 해서 혼자 나왔는데 마루 위에서 이미 맥주 파티가 진행되고 있었다. 잠시 동승해서 맥주 한캔을 시원하게 마셨다. 아, 오비는 카스보다 뭔가 약해... ㅎㅎ
눌와의 김효형 대표님은 이미 불콰하게 취하신 것 같았다. 국보순례가 눌와에서 나온 책인데 예약 주문의 사인본에 대해서 질문을 드렸다. 그거 직접 쓰신 거냐고!
하하핫, 직접 다 썼다고 하기엔 너무 대단한 문장이지 않은가. 저 작품은 낙관을 무려 세개나 찍은 거라고 한다. 물론 교수님이 아니라 김효형 대표님이...^^ㅎㅎㅎ 답사 여행의 오랜 파트너로서, 또 눌와에서 나온 책이다 보니 몸소 수고를 하셔야 했다. 게다가 무릎팍 도사 출연 이후 주문 폭주로 전날까지도 계속 낙관 찍었던 터라 손이 너덜너덜 하셨다. 안쓰러버라...;;; 다음권 답사기 때는 더 멋진 낙관 한 다섯 개쯤 부탁한다고 하니 옆에 있던 창비 부장님 표정이 일그러지신다. 절대 사양하시는 두 분...^^
무릎팍 도사 촬영기도 질문했다. 때마침 방송국에서 먼저 출연 섭외가 들어와서 내심 기대했던 와중에 반가웠다고 한다. 녹화는 모두 6시간 동안 찍었는데 방송은 1부 50분, 2부 50분 해서 100분 정도 방영될 거라고 했다. 부여 답사 때에 부여로 내려가게 된 계기를 무척 재밌게 들었는데 그 이야기가 나오면 노대통령 얘기도 나오기 마련이어서 혹시 편집된 거냐고 물으니, 정치적인 얘기는 모두 편집 되기 때문에 애초에 하지 않았다고 하신다. 흐음, 그랬구나. 워낙 입담이 좋으신 분이라 방송 녹화 실황이 더 재밌었다고 하신다. 당연히 그랬겠지. 그래도 6시간이면 비교적 짧게 끝난 게 아닌가 싶다. 강호동은 10시간 녹화... 뭐 이런 걸로 워낙 유명하니까.^^
방송 직후 답사기 6권 세트의 매출이 대략 6배 정도 늘었다고 하신다. 우와, 대단하구나!
눌와 대표님은 좋은 책을 만들고 있다 자부하는데 영업이 너무 힘들다고 하신다. 글쎄요... 그건 창비 부장님께 조언을 들으셔야겠네요..^^
대표님이 소개한 눌와의 책 한 권 '그늘에 대하여'는 일단 보관함에 담아두었다. 할인률이 적군요. 흑...;;;;
더 앉아 있다가는 해조음을 못 들을 것 같아서 양산을 우산 삼아 쓰고 해변가로 나갔다. 어두워서 소리가 더 잘 들릴 것 같았는데 생각보다 작았다. 물 들어오는 시간대의 차이 때문일까?
어두운 가운데 찍어보았다. 파도에 떠밀렸다가 다시 떨어지는 돌 구르는 소리에 한껏 취했다가 혼자 남아있는 동행이 신경 쓰여 먼저 방으로 돌아왔다.
그동안 쌓인 밀린 얘기들을 아직도 젖어있는 머리칼을 말리며 나누었다. 그러다가 순오기님과 민주양을 불러서 반지 나누기!
첫번째 사진이 그날 찍은 우리들의 손이고, 두번째는 그 다음주에 만난 친구 손, 그리고 세번째는 어제 만난 친구 손, 네번째는 오늘 만든 반지다. 요새 반지 삼매경에 푹 빠졌달까...
또 다시 우리끼리 얼마간의 담소를 나누고 취침을 위해 헤어졌다. 몇 시간 사이 욕실이 엄청 습해서 두루마리 휴지가 흥건히 젖어 있었다. 게다가 바퀴벌레가 출몰해서 나의 동행은 비명을 질렀고, 벌레 나올까 무섭다고 해서 불을 켜고 잠을 자야 했다...;;; 그렇게 남도의 밤은 깊어갔고, 밖에서는 아직도 맥주 파티의 여흥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 같이 잠든 언니는 파도 소리가 들렸다고 하던데, 무뎠던 나는 방안에서는 파도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다만 그곳에 내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가슴이 벅찼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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