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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스맨
대니 월러스 지음, 오득주 옮김 / 민음사 / 2008년 12월
평점 :
절판
오늘 '예스맨'을 다 읽었다. 처음엔 소설인 줄 알고 있었을 땐 별 느낌 없었다. 의식에서 구성해낸 픽션이라면 보지 않아도 뻔했으니까. 내가 결혼 생활을 해보지 않고 연애하던 그 마음을 확대하여 결혼 이야기를 한다면 얼마나 어처구니없겠는가. 하지만 제대로 알고 보니 이건 소설이 아니었다. 자신이 직접 체험한 일을 쓴 수필이었다. 그 때부터 이 책이 눈에 확 들어왔다. 정말 누구도 감히 못 해볼 엄청난 일을 하고서 그 소감문을 쓴 거니까.
이 책이 좀 더 와 닿았던 이유는 나도 남들이 감히 해보려 하지 않는 일을 해보려 마음 먹었기 때문이다. 그런 게 동병상련이다. 남다른 무언가를 했던 사람의 자취를 쫓아가며 거기서 메시지를 얻는 것도 좋다. 실상 이 책은 뜻밖의 서연으로 읽게 된 책이다. 예스맨이 영화로 개봉한 건 알았지만 책으로 있는 건 몰랐으니까. (내가 이 책이 소설일거라 착각한 이유는 영화 때문이기도 하다.) 아마 그렇기 때문에 평생 읽지 않았을 거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남희에게서 문자가 왔다. 자세히 기억나진 않지만 'Yes Man'이라는 책이 좋으니 한 번 읽어보라는 것이었던 것 같다. 그 문자를 통해 책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박준씨의 「언제나 써바이 써바이」도 다 읽었으니 바로 읽을 수 있겠구나 하고 집어 들게 되었다.
대니는 이제 막 여자 친구와 헤어지고 그저 방 안에만 갇혀 시간을 보내고 있는 26살의 청년이다. BBC에서 라디오 프로그램을 맡은 프로듀서이기도 하지만 프리랜서이기에 한가하다. 그러던 그가 어느 날 버스를 타고 가다가 옆 사람의 한 마디 이야기를 들음으로 인생은 전혀 달라지게 된다. 그 한마디는 뭐였을까? 이미 책 제목에도 나와 있다시피 충분히 짐작될 것이다. "좀 더 자주 예스를 말하세요" 특별함이라곤 눈꼽 만치도 없다. 우리말로 굳이 바꾸자면 "자주 좋아라고 말하자구요" 쯤 될 텐데 과연 이 말을 듣고 바뀔 사람이 있을까? 그런데 주인공은 이 말에 충격을 받고 직접 실천까지 한다. 대니처럼 자신을 송두리 째 흔드는 그런 경우는 아니었지만, 현아의 "말로만 하지 말고 직접 행동으로 옮겨봐"란 말은 나에게 국토종단을 실천할 수 있는 힘이 되었다. 그러고 보면 한 마디가 위력을 발휘하기 위해선 그걸 말하는 사람의 마음 이상으로 그걸 받아들이는 사람의 맘 자세가 되어 있냐, 그렇지 않냐에 달려 있는 듯하다. 즉, 모든 것이 맞물려 시의적절할 때, 한 마디 말이 큰 파장을 일으켜 내 인생이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기도 한다는 것. 고로 대니의 그와 같은 반응은 변하고 싶은 마음과 연관이 있었던 것이다.
그는 친구 한 명에게 그 한 마디 말에 대해 이야기 하고 오로지 'Yes'만 말하기로 했다는 결심을 털어놓는다. 이런 결심 앞에 걱정이 앞서는 건 어쩔 수 없다. 세상엔 좋은 제안만 있는 건 아니니까. 그래서 그는 초반에 사기를 당할 뻔도 했고 자신에게 지금 당장 필요 없는 자동차와 건강식품을 사기도 한다. 그래서 뭐랬는가? 예스도 분별이 있어야 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건 충분히 생각해볼만한 일이다. 어제 진규와 이런 이야기를 나눴었다. "초등학생 때 쓰레기를 줍는 게 좋은 행동이라고 생각해서 학교에서 집까지 가는 길에 쓰레기를 주우면서 갔거든. 그게 너무 많아 도무지 다 주울 수 없더라고 그래서 이렇게 줍다가는 집에 갈 수 없겠구나 생각하며 그만 두었어"라고 말했다. "바로 그런 게 융통성 아니겠냐?"라고 나는 대답을 했다. 그랬더니 "과연 그런 식으로 핑계를 대며 옳다고 생각한 행동도 하지 않는 게 융통성일까?"라고 반문을 하는 것이 아닌가. 맞다! 융통성이란 때론 핑계가 되기도 한다. 때에 따라 'No'라고도 할 수 있다고 한다면 보통 일에도 예외를 들며 No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합리화의 귀재인 인간이기에 무언가를 하려 하기보다 가능성을 꼭꼭 닫아둔 채 하지 않으려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오히려 자신이 각오했던 일은 흐지부지 될 것이다. 그런 우려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대니는 완벽하게 모든 제안에 예스라고 말하기로 하였다. 과연 그 결과는 어떨까?
결과적으로 그가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평생 만나보지도 못했을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고 많은 곳을 가볼 수 있었다. 그는 진정으로 우연에 몸을 맡기고 그 안에서 충분히 즐겼다. 그 우연은 완전한 상황이 아니다. 지금 무언가를 했다고 해서 그게 어떤 좋은 결과를 낳을 것이라 기대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그런 기대 심리로 'Yes'를 말한다면, 그건 보험이나 새로운 종교에 다름 아니니까. 그런 기대를 가지고 'Yes'를 말하면 말할수록 'Yes'는 다른 삶으로 인도하는 자유여행권이 되기보다 저주가 될 것이다. 그저 'Yes'를 통해 새롭게 펼쳐질 삶에 자신을 맡겨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대니도 초반엔 분명히 그런 기대심리를 드러낸다. 우연하게 25,000파운드에 당첨되었던 것처럼 '예스'라고 하다보면 그와 같은 대박 횡재가 올 것이라 생각 했다. 하지만 스페인 복권 사기 사건을 겪고나서 그는 이렇게 고백한다. "예스가 내 판단력을 흐려놨다. 냉소주의로 날 무장시켰어야 할 순간에 낙관주의를 불러 일으켰다. 모든 일이 잘될 거라는 실낱같은 희망에 나는 그 어떤 의심도 물리쳤다. 이게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짓인지는 생각지도 않고, 가능성에, 여행을 간다는 사실에 흥분했다. 난 아마 또 한 번의 행운을 찾고 있었나 보다. 다시 한 번 흥분과 놀라움으로 충전되고 싶어서. 25,000파운드에 당첨됐다가 너무도 허무하게 다시 잃었던 그 날처럼, 난 그날 영광을 맛보았고, 그걸 더 원했던 것이다. 아마 '예스'에는 중독성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저 '믿습니다!'만 외치면 그 믿음이 행운을 가져다 줄 거라는 희망에 젖어 살았던 것 같다.(219p)" 이런 깨달음 후에 진정 자신의 삶에서 '예스'를 실천하며 사는 다른 사람을 만난 후에야 그 기대심리를 버리게 된다. 그저 현재를 긍정하며 다가오는 기회들을 손으로 꽉 쥐고서 가는 것 뿐. 그 때부터 자신의 '예스'가 의무감에서 벗어난 참된 자유의 발언이 된다. 예스도 맹목적이 될 수 있다. 거기에 차후를 생각하는 어떤 흑심이 들어갈 때, 그 예스는 '노' 못지않은 부정적인 말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사건에 대해 Yes라 말했다면, 그 때부턴 그 의사를 존중하고 그게 어떠한 변화를 낳는지 지켜보고 지켜보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우린 어떤 선택을 하고서도 시시때때로 이 선택이 옳은 지, 다른 선택을 했다면 어땠을지 의심하지 않던가. 현재를 부정하고 언제나 '만약...'이란 상상 속에 살고자 하는 욕구는 나 자신을 부정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 한 편의 드라마 같은 책을 읽으며, 참 많은 힘을 얻었다. 내 마음을 활짝 열 수만 있다면 세상은 그만큼 더 활기찬 공간이 될 수 있다. 그건 세상뿐만 아니라 사람도 마찬가지다. 어느 순간이건 나의 한계를 넘어 이질적인 사물과 마주치고 전혀 취향이 다른 사람과 만날 마음만 있다면 세상은 한결 살기 좋아질 것이다. 난 그 예감을 맘 속 깊이 느꼈다. 내가 'No'라고 말했기 때문에 놓쳤던 수많은 기회들을 이제는 절대 놓치지 않으리라 맘도 먹었다. 그 첫 시험대가 바로 국토종단이다. 열린 마음을 점검하고 우연성에 나를 던져 과연 어떠한 변화가 일어나는 지 몸소 경험하고 싶다. "내가 한 일이라곤 놀랄 만큼 긍정적인 태도로 사안에 접근하고 그저 무슨 일이 일어나는 지 지켜본 것뿐이었다. (181p)"라던 대니의 말처럼 그런 마음으로 길을 떠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