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강 - 한홍구의 한국 현대사 이야기 한홍구의 현대사 특강 1
한홍구 지음 / 한겨레출판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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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굴에 상처가 나면 흔히 하는 말이 있다. "나 어제 팔십 대 일로 싸웠잖아." 뭐 이 말에 XX:1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이 말이 사실이 아님은 모두다 아니까. 그냥 우스개 소리로 흘려 듣는다. 그런데 만약 이 말이 정말이라면 우린 어떤 반응을 보일까? 우린 그런 사람을 용감무쌍하다고 해야 하나, 멍청하다고 해야 하나? 예전의 나였으면 그런 사람을 '의협심 강한 바보'라고 불렀다. 그런데 지금은 함부로 그렇게 단언하진 못할 거 같다. 이 책을 보고서 어찌 그렇게 함부로 깎아내릴 수 있겠는가. 이 책은 서울시 교육청이 공인한 보수우파 학자들의 무분별한 역사 강의를 듣고서 가만히 있을 수 없어 박차고 나와 그들에게 맞짱을 신청한 책이다. 이건 만용이 아닌 진정한 용기라고 볼 수밖에. 이로서 한홍구 교수에 대한 나의 존경하는 마음은 더욱 깊어지게 되었다.  
 

  이미 '대한민국사'를 읽어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그의 글들은 하나의 역사 사실에 단순히 접근하는 법이 없다. 대원군의 쇄국정책 때문에 무기력하게 한일합방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한다. 사태를 단순히 보면 하나의 사안에 모든 죄를 덧씌울 순 있다. 하지만 그렇게 짐지운다 해도 그 사태는 해결되지 않는다. 왜냐? 제대로 사태를 파헤쳐 보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저자는 바로 그렇게 단선적으로 역사를 보는 관점을 비판한다. 그 당시에 일어났던 수많은 사건들을 일일이 들여다보며 객관적으로 사태에 접근하는 거다. 그래야만 쇄국정책의 함의도 더욱 분명하게 알 수 있으니까. 그가 쇄국정책을 긍정할 수 있었던 이유도 그런 객관적인 시각에서 나왔다. 그건 반대로 한미FTA를 부정하는 논리이기도 했고. 그래서 대한민국사는 여러 사실들을 통해 하나의 사건을 파헤친 문제작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전혀 따분하진 않다. 우리의 현대사임에도 누구도 쉬쉬하며 말할 수 없었던 것들이 그의 책엔 하나 가득 펼쳐진다. 한홍구 교수님 책의 미덕은 바로 그거다. 때론 진실을 말하는 게 엄청난 용기를 요구하기도 한다.
 

  바로 그런 미덕은 이 책에서 유감없이 드러난다. 우선 따분하지 않게 역사를 읽을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고 하나의 사안을 꿰뚫는 여러 사실들을 볼 수 있어서 더욱 좋다. 21세기에 들어선 지도 벌써 10여가 되어 가고 있고 민주화를 이루었다고 한 지도 20년이 되었지만 우리에겐 그 모든 게 아직 익숙하지 않았나 보다. 정권이 바뀐 10년만에 다시 보수정권이 들어섰고 거기에 맞장구를 치듯 사회의 구석구석이 보수화 되어 갔다. 검찰이나 경찰의 보수화는 말할 것도 없고 교육계도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발을 맞췄다. 더욱이 서울시 교육청은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전교조 심판'이란 타이틀로 당선된 교육감은 강남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으며 정권의 입맛에 맞게 교육을 이끌었으니까. 그래서 등장한 것이 현대사 특강이다. 그전에 금성교과서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좌파 역사관'의 극치라며 정부의 전방위적 압박이 시작되었다. 결국 금성교과서는 저자들의 동의없이 내용을 대폭 수정하였다. 거기에 덧붙여 이젠 학생들을 상대로 좌로 치우친 현대사를 바로 잡아 강의하기로 한 거다.

 

왜 현대사에 집착하냐고? 물을 필요도 없다. 자신들의 영욕(과연 '榮'이 더 많을까? '辱'이 더 많을까?)이 스며 있는 만큼 자신에게 유리한 역사로 바꾸어야 한다. '욕'은 지우고 '영'을 드높여라. 강사진이 '극우드림팀!'으로 구성된 건 당연하다. 이들이 설파한 것은 '신자유주의란 진리'와 '이승만,박정희 미화'이였다. 20세기엔 '반공교육'이 있었다면 21세기엔 한물 간 '이념교육'이 횡횡하고 있었다. 바로 이 책에선 그렇게 설파된 내용들을 하나 하나 묻고 따지고 있다. 그것도 아무 조건 없이! 그래서 가슴 후련하게 읽을 수 있다. 그것도 왜 잘못된 것인지 하나 하나 깨달으면서 말이다. 이렇게 책을 읽으며 통쾌했던 적이 언제였던가. 가볍지만 절대 가볍지 않고 심각한 듯 하지만 전혀 심각하지 않다. 그저 물 흐르듯 맘껏 읽고 무엇이 옳은가 판단하는 것은 자신의 몫이다.  

 

  난 개인적으로 이 책이 반가웠다. 그리고 단숨에 읽었다. 솔직히 나만 읽긴 아깝다. 그래서 바라는 점이 있다. 이 책을 우리 중고등학생들이 많이 많이 읽었으면 좋겠다. 08년 촛불 시위는 그들이 먼저 시작했다. 그들은 어쩌면 무기력에 절어 있는 자신의 목소리조차 내본 적이 없는우리 20대보다도 더 낫다고 할 수 있다. 이제 더이상 10%의 기득권층의 이익만을 대변하는 국가의 의식화 교육을 받으며 의식화되어선 안 된다. 자신의 의식을 자신이 만들어 가야 한다. 아무 말 필요 없다. 그냥 속는 셈치고 한번 읽어보자.

 

  여담으로 진중권 교수는 위의 강의 장면을 '아동학대'라 규정했다. 왜 그렇게 말했는지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제 말이 이해가 안 되면, 뉴라이트 강사 여러분은 직접 밤에 잘 때 의자에서 주무셔 보세요. 그리고 가족한테 시켜서 잠들만 하면, 깨우도록 부탁을 하는 겁니다. 그렇게 한 일주일 동안만 주무셔 보시면, 왜 제가 이런 제안을 하는지 몸으로 이해하실 수 있게 될 겁니다. 잠 안 재우기 고문당하는 학생들, 부모님이 투표 잘못한 죄를 뒤집어 쓴 희생양들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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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9-04-08 2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랫만입니다. 와우 사진이 예술이군요!

leeza 2009-04-09 08: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사진 볼때마다 참 맘이 아팠었는데.. 그래도 한홍구 교수님의 이 책 덕에 좀 나아졌죠..

꼬마요정 2009-04-14 1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진 리뷰 잘 읽었습니다. 저도 장바구니에 슬그머니 집어넣었어요~ 그나저나 애들.. 맘이 아프면서도 멋져요! 사실, 저렇게 자는 것도 저항의 일부분이지 않겠어요? 아무도 깨어있고 싶어하지 않아하는, 니는 씨부려라 나는 듣기 싫다..라며 온몸으로 외치고 있잖아요.
 
예스맨
대니 월러스 지음, 오득주 옮김 / 민음사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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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오늘 '예스맨'을 다 읽었다. 처음엔 소설인 줄 알고 있었을 땐 별 느낌 없었다. 의식에서 구성해낸 픽션이라면 보지 않아도 뻔했으니까. 내가 결혼 생활을 해보지 않고 연애하던 그 마음을 확대하여 결혼 이야기를 한다면 얼마나 어처구니없겠는가. 하지만 제대로 알고 보니 이건 소설이 아니었다. 자신이 직접 체험한 일을 쓴 수필이었다. 그 때부터 이 책이 눈에 확 들어왔다. 정말 누구도 감히 못 해볼 엄청난 일을 하고서 그 소감문을 쓴 거니까.

 
 이 책이 좀 더 와 닿았던 이유는 나도 남들이 감히 해보려 하지 않는 일을 해보려 마음 먹었기 때문이다. 그런 게 동병상련이다. 남다른 무언가를 했던 사람의 자취를 쫓아가며 거기서 메시지를 얻는 것도 좋다. 실상 이 책은 뜻밖의 서연으로 읽게 된 책이다. 예스맨이 영화로 개봉한 건 알았지만 책으로 있는 건 몰랐으니까. (내가 이 책이 소설일거라 착각한 이유는 영화 때문이기도 하다.) 아마 그렇기 때문에 평생 읽지 않았을 거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남희에게서 문자가 왔다. 자세히 기억나진 않지만 'Yes Man'이라는 책이 좋으니 한 번 읽어보라는 것이었던 것 같다. 그 문자를 통해 책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박준씨의 「언제나 써바이 써바이」도 다 읽었으니 바로 읽을 수 있겠구나 하고 집어 들게 되었다.

   대니는 이제 막 여자 친구와 헤어지고 그저 방 안에만 갇혀 시간을 보내고 있는 26살의 청년이다. BBC에서 라디오 프로그램을 맡은 프로듀서이기도 하지만 프리랜서이기에 한가하다. 그러던 그가 어느 날 버스를 타고 가다가 옆 사람의 한 마디 이야기를 들음으로 인생은 전혀 달라지게 된다. 그 한마디는 뭐였을까? 이미 책 제목에도 나와 있다시피 충분히 짐작될 것이다. "좀 더 자주 예스를 말하세요" 특별함이라곤 눈꼽 만치도 없다. 우리말로 굳이 바꾸자면 "자주 좋아라고 말하자구요" 쯤 될 텐데 과연 이 말을 듣고 바뀔 사람이 있을까? 그런데 주인공은 이 말에 충격을 받고 직접 실천까지 한다. 대니처럼 자신을 송두리 째 흔드는 그런 경우는 아니었지만, 현아의 "말로만 하지 말고 직접 행동으로 옮겨봐"란 말은 나에게 국토종단을 실천할 수 있는 힘이 되었다. 그러고 보면 한 마디가 위력을 발휘하기 위해선 그걸 말하는 사람의 마음 이상으로 그걸 받아들이는 사람의 맘 자세가 되어 있냐, 그렇지 않냐에 달려 있는 듯하다. 즉, 모든 것이 맞물려 시의적절할 때, 한 마디 말이 큰 파장을 일으켜 내 인생이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기도 한다는 것. 고로 대니의 그와 같은 반응은 변하고 싶은 마음과 연관이 있었던 것이다.

  그는 친구 한 명에게 그 한 마디 말에 대해 이야기 하고 오로지 'Yes'만 말하기로 했다는 결심을 털어놓는다. 이런 결심 앞에 걱정이 앞서는 건 어쩔 수 없다. 세상엔 좋은 제안만 있는 건 아니니까. 그래서 그는 초반에 사기를 당할 뻔도 했고 자신에게 지금 당장 필요 없는 자동차와 건강식품을 사기도 한다. 그래서 뭐랬는가? 예스도 분별이 있어야 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건 충분히 생각해볼만한 일이다. 어제 진규와 이런 이야기를 나눴었다. "초등학생 때 쓰레기를 줍는 게 좋은 행동이라고 생각해서 학교에서 집까지 가는 길에 쓰레기를 주우면서 갔거든. 그게 너무 많아 도무지 다 주울 수 없더라고 그래서 이렇게 줍다가는 집에 갈 수 없겠구나 생각하며 그만 두었어"라고 말했다. "바로 그런 게 융통성 아니겠냐?"라고 나는 대답을 했다. 그랬더니 "과연 그런 식으로 핑계를 대며 옳다고 생각한 행동도 하지 않는 게 융통성일까?"라고 반문을 하는 것이 아닌가. 맞다! 융통성이란 때론 핑계가 되기도 한다. 때에 따라 'No'라고도 할 수 있다고 한다면 보통 일에도 예외를 들며 No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합리화의 귀재인 인간이기에 무언가를 하려 하기보다 가능성을 꼭꼭 닫아둔 채 하지 않으려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오히려 자신이 각오했던 일은 흐지부지 될 것이다. 그런 우려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대니는 완벽하게 모든 제안에 예스라고 말하기로 하였다. 과연 그 결과는 어떨까?

   결과적으로 그가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평생 만나보지도 못했을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고 많은 곳을 가볼 수 있었다. 그는 진정으로 우연에 몸을 맡기고 그 안에서 충분히 즐겼다. 그 우연은 완전한 상황이 아니다. 지금 무언가를 했다고 해서 그게 어떤 좋은 결과를 낳을 것이라 기대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그런 기대 심리로 'Yes'를 말한다면, 그건 보험이나 새로운 종교에 다름 아니니까. 그런 기대를 가지고 'Yes'를 말하면 말할수록 'Yes'는 다른 삶으로 인도하는 자유여행권이 되기보다 저주가 될 것이다. 그저 'Yes'를 통해 새롭게 펼쳐질 삶에 자신을 맡겨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대니도 초반엔 분명히 그런 기대심리를 드러낸다. 우연하게 25,000파운드에 당첨되었던 것처럼 '예스'라고 하다보면 그와 같은 대박 횡재가 올 것이라 생각 했다. 하지만 스페인 복권 사기 사건을 겪고나서 그는 이렇게 고백한다. "예스가 내 판단력을 흐려놨다. 냉소주의로 날 무장시켰어야 할 순간에 낙관주의를 불러 일으켰다. 모든 일이 잘될 거라는 실낱같은 희망에 나는 그 어떤 의심도 물리쳤다. 이게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짓인지는 생각지도 않고, 가능성에, 여행을 간다는 사실에 흥분했다. 난 아마 또 한 번의 행운을 찾고 있었나 보다. 다시 한 번 흥분과 놀라움으로 충전되고 싶어서. 25,000파운드에 당첨됐다가 너무도 허무하게 다시 잃었던 그 날처럼, 난 그날 영광을 맛보았고, 그걸 더 원했던 것이다. 아마 '예스'에는 중독성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저 '믿습니다!'만 외치면 그 믿음이 행운을 가져다 줄 거라는 희망에 젖어 살았던 것 같다.(219p)" 이런 깨달음 후에 진정 자신의 삶에서 '예스'를 실천하며 사는 다른 사람을 만난 후에야 그 기대심리를 버리게 된다. 그저 현재를 긍정하며 다가오는 기회들을 손으로 꽉 쥐고서 가는 것 뿐. 그 때부터 자신의 '예스'가 의무감에서 벗어난 참된 자유의 발언이 된다. 예스도 맹목적이 될 수 있다. 거기에 차후를 생각하는 어떤 흑심이 들어갈 때, 그 예스는 '노' 못지않은 부정적인 말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사건에 대해 Yes라 말했다면, 그 때부턴 그 의사를 존중하고 그게 어떠한 변화를 낳는지 지켜보고 지켜보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우린 어떤 선택을 하고서도 시시때때로 이 선택이 옳은 지, 다른 선택을 했다면 어땠을지 의심하지 않던가. 현재를 부정하고 언제나 '만약...'이란 상상 속에 살고자 하는 욕구는 나 자신을 부정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 한 편의 드라마 같은 책을 읽으며, 참 많은 힘을 얻었다. 내 마음을 활짝 열 수만 있다면 세상은 그만큼 더 활기찬 공간이 될 수 있다. 그건 세상뿐만 아니라 사람도 마찬가지다. 어느 순간이건 나의 한계를 넘어 이질적인 사물과 마주치고 전혀 취향이 다른 사람과 만날 마음만 있다면 세상은 한결 살기 좋아질 것이다. 난 그 예감을 맘 속 깊이 느꼈다. 내가 'No'라고 말했기 때문에 놓쳤던 수많은 기회들을 이제는 절대 놓치지 않으리라 맘도 먹었다. 그 첫 시험대가 바로 국토종단이다. 열린 마음을 점검하고 우연성에 나를 던져 과연 어떠한 변화가 일어나는 지 몸소 경험하고 싶다. "내가 한 일이라곤 놀랄 만큼 긍정적인 태도로 사안에 접근하고 그저 무슨 일이 일어나는 지 지켜본 것뿐이었다. (181p)"라던 대니의 말처럼 그런 마음으로 길을 떠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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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한국사 - 하 - 조선 건국에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까지, 개정판 종횡무진 역사 시리즈 4
남경태 지음 / 그린비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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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꿰뚫어 볼 수 있다는 건, 크나큰 축복이다. 동서양사를 동시에 비교하며 그 안에서 하나의 의미를 돌출해 낸다거나 지금의 의미를 유추해 볼 수 있으니 말이다. 그렇게 전체적인 비교와 유추가 가능할 때 자민족주의에 빠지지 않을 수 있고, 역사 왜곡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나온 왠만한 역사서들은 그런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세계사적인 추세에서 유추해 볼 수 없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한국민이라는 한계성을 스스로 인정했기 때문인지 자민족 우월주의적 관점에서 역사를 풀어내곤 했다. 물론 일본이 의도적으로 역사를 왜곡하고 비하한 측면도 없었던 게 아니다. 그래서 우리 역사를 보면서 '우린 이래서 안 돼'라는 비하의식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고 하여 지금에 와서 모든 것들을 다 긍정하며 역사 띄우기로 민족 자부심을 도출해서도 안 된다. 그건 곧 우물 안 개구리가 되는 격이니까.
  이 책은 그런 역사를 비교적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해준다. 이미 저자는 서양사와 동양사를 일목요연하게 서술한 책을 출간한 적이 있다. 그러니만치 한국사를 보는 시각도 이미 전세계사의 측면에서 볼 수 있는 안목이 갖춰져 있다.  동양사적인 측면에서 상권을 풀어냈으며, 하권에서는 서양사까지 전체적으로 조망하며 풀어내고 있다. 그래서인지 처음엔 우리의 역사를 너무나 의존적인 역사로 보는 것만 같아 불편하기도 했지만, 그런 불편함조차 우리 역사를 어떻게든 우월하게 보려 했던 편견이 작용했을 뿐이다. 마음을 조금만 열면 좀더 객관적으로 우리 역사를 조망할 수 있다. 그런 인식 하에 우리 역사를 좀더 차근 차근 어떤 편견 없이 봐야 할 것이다. 물론 이렇게 객관적이라는 말로 표현은 했지만, 보는 사람마다 이것 또한 지극히 주관적일 수 있음 또한 사실이다. 그저 판단은 자기가 하는 것이니...

  하권을 보는 내내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늘 우리의 현대사를 대할 때마다 드는 갑갑증이 일었다. 하지만 여느 역사책을 읽을 때 드는 그런 종류의 갑갑증은 아니었다. 이 책은 그런 면에서 내 맘에 쏙 든다. 무협지보다는 무거운 듯하지만, 여느 전문 역사보다는 가볍다. 그래서 읽고 있으면 이야기 책을 읽는 듯 가볍게 읽을 수 있지만, 그 안엔 무수한 생각들이 스며든다. 왕국화를 이루지 못한 지도층의 나약함도 무능함이지만, 그걸 그대로 인정하며 왕 밑의 백성을 자임하며 묵묵히 살았던 백성들에 대해서 화가 치밀었던 것이다. 우리의 가장 큰 문제는 뭐든 '당연한 것을 의심해보지 못하는 것'이다. 왕 밑의 신하나 백성을 자임하며 그 모든 사태의 책임을 그에게 물을 줄 모른다. 그런 왕을 거부하는 건 자기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는 것이라 착각하기 때문일터. 그런 묵인과 무능함이 절묘한 하모니를 이루는 순간, 우리는 근대사의 비극을 몸소 맛보아야만 했다.

  역사를 알아야 하는 건 왜인가? 바로 과거를 반추해 봄으로써 현대의 삶을 살고자 함이다. 비극은 다시 되풀이 해서는 안 되는 역사의 교훈으로, 희극은 우리의 마음 속에 긍정의 기운으로 삼아야 하는 것이다. 이 책은 바로 그런 비극과 희극을 여과없이 드러내 놓아 오늘의 삶을 사는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는 책이다. 이 책에서 어떤 깨달음을 얻어낼 것이며, 그 깨달음을 현재에 삶에 어떻게 적용시켜 나갈 것인가 다분히 개인의 몫이다. 

  (개정판이다. 얼마나 많이 변했을까 기대하며 보게 된 내용은 바로 이것이다. 책의 전체 디자인이 많이 바뀌었다. 칼라 도판을 도입하고 전체적으로 깔끔한 편집방식은 읽는 독자에겐 둘도 없이 좋다. 하지만 내용이 그다지 많이 바뀌지 않아서 예전에 읽었던 독자들에겐 그다지 매력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구판과 신판 중 어느 것을 소장하고 싶냐고 묻는다면, 두말할 필요도 없이 당연히 신판이다. 고로 이 책은 사서 아까운 책은 아니란 말씀. 고이 간직하며 두고 두고 읽는다면 분명히 더욱 빛을 발할 책임엔 분명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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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한국사 - 상 - 단군에서 고려까지, 개정판 종횡무진 역사 시리즈 3
남경태 지음 / 그린비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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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당연하다고 느끼던 것들을 뒤집어 볼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어느 순간 그런 것들이 나의 삶의 의미가 되었으며, 앞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기반이 되었으니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생각들을 뒤집어 본다는 것은 곧 나에 대한 생각의 지반을 허문다는 것과도 같다. 하지만 그런 생각의 재정립은 순간은 힘든 일일지 모르나 우리의 삶을 한 단계 발전 시킨다. 바로 위기는 곧 기회이기 때문이다. 
  역사는 학생 때 징그럽도록 외우며 배웠던 까닭에, 하나의 거부할 수 없는 진리로 나에게 각인되었다. 연표를 외웠으며 그 하나 하나의 상황들을 민족주의적인 사관으로 받아들였다. 그런 까닭인지 과거의 사대주의 사관들이 현대의 관점에선 짜증나는 그 무엇이었으며, 신라의 통일은 반도중심의 통일이라 한심하게 느껴졌다. (물론 신라의 입장에선 고구려나 백제나 당이나 모두 외세였음은 마찬가지다. 오늘의 관점에서 해석하면 그런 문제가 생긴다) 그런 등등의 과거사와 그것이 그대로 이어져 내려온 역사의 아이러니가 반복되는 현대사를 보면서 역사를 공부한다는 건 어떤 일보다도 짜증나는 일이었다. '왜 이렇게 우리는 약한 거야?' '왜 정복을 하며 다른 나라를 뒤집어 엎지 못하는 거지?' 라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우리 역사였다.

  바로 이런 것들이 내가 역사를 배우면서 느꼈던 생각들이다. 그런 가운데 고구려 역사에 집착하게 된 건 이런 한계를 느꼈기 때문이다. 정복 왕조로서 맘껏 영토를 넓힐 수 있었던 고구려가 우리의 대안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또한 신라중심의 반도 통일을 보상 받고자, 발해의 넓은 영토를 우리의 역사로 받아들이며 통일신라 시대를 남북국 시대로 규정하는 것에 찬성하기도 했다. 또한 사대주의시대였던 조선 시대의 모습 속에서 실학 사상이나 한글의 창제 같은 독자적인 흐름들을 보면서 우리의 역사의 한계를 그렇게 보상 받으려 했다.

  하지만 이런 역사 인식이 옳은지, 그렇지 않은지는 따져볼 일이다. 하지만 난 당연하게도 이런 역사의 지식들을 아무 생각없이 진리로 받아들였다. 그렇게 가르침을 받았기도 했지만, 답답한 역사라는 게 일본의 식민사관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젠 이것마저도 넘어서야 할 필요가 있음을 느끼게 되었다. 바로 이 책을 읽게 되면서부터이다.

  1권에서는 고조선의 성립에서부터 고려시대까지를 다루고 있다. 책은 역사책임에도 불구하고 표지에 나와 있다시피, 무협지보다는 무겁게 기존 역사서보다는 가볍게란 표어처럼 재밌었다. 물론 글이 좀 길어져 지루할 때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글을 전개하는데 있어 강약을 조절할 줄 아는 필자가 쓴 덕인지 전체적으론 이야기책을 읽듯 재밌게 읽을 수 있었다.

  이 책을 읽고난 사람들의 관점은 다양하게 나뉠 것 같다. 어떤 이는 좀더 역사를 객관적으로 보게 되었다는 객관적인 평을 할 것이고, 어떤 이는 완전 사대주의 사관에 입각해서 쓰여진 책이라 비평할 것이다. 어떤 맘으로 이 책을 읽건 그건 지극히 개인 몫이니 할 말은 없지만, 적어도 난 이 책을 통해 좀 더 객관적인 동양사적인 측면에서 우리 나라의 역사를 볼 수 있게 되어 좋았다. 우리의 역사를 좀더 객관적으로 보고 그 역사를 통해 지금 우리의 향방을 결정해야 할 것이다. 역사를 공부하는 가장 큰 이유는 과거를 통해 현재를 재조명한다는 데 있으니깐 말이다. 이 책을 읽음으로 어떤 것을 느끼건, 그것을 통해 지금 우리의 삶의 모습을 돌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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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써바이 써바이 - '온 더 로드'의 박준, 길 위의 또 다른 여행자를 만나다
박준 지음 / 웅진윙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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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엇이 그리도 조급하고 두려웠던 것일까? 남들에 비해 뒤처진다는 사실 때문에 그랬나? 그러고 보면 언제나 나의 생각은 어떤 하나의 틀에 갇혀 꽉 막혀 있었다. 우리나라엔 일반룰이 있다. 어느 나이 때엔 취직을 해야 하고, 어느 나이 때까진 결혼을 하고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어딘가 문제 있는 사람으로 낙인찍히기 십상이다. 바로 그런 일반적인 것들에 눌려 살아왔기 때문에 내 삶의 행복은 언제나 지금 이 순간엔 있을 수 없는 것이 되고야 말았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그 뿐만이 아니었다. 그런 일반룰을 충실히 따르며 살아갔던 사람조차도 행복과는 요원한 삶을 살고 있었으니까. 교사가 되고 싶어 잠자는 시간, 밥 먹는 시간을 쪼개어 공부를 한다. 그 결과 임용에 합격한다. 과연 그 때부터 미루어두었던 행복이 찾아오나? 맞다. 잠시 행복했다. 적어도 결과 발표가 나온 모니터창을 보고 주위 사람들에게 축하 메시지를 받은 그 순간엔. 하지만 곧 연수를 들어가고 학교에 배정받아 적응하다보니 정신이 하나도 없다. "임용에 합격하면 담배 끊을 거야."라고 말하던 선배는, 지금 더 심한 골초가 되셨다. 이쯤 되면 김우정씨의 "연봉 1억이 넘는 사람도, 남들 보기에는 엄청나게 잘 사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도 자기가 잘 산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행복해하지 않아요 (239p)"라는 말이 이해가 된다. 지금 당장은 내가 그런 입장이 아니니 그게 부러워 보이며 행복은 그 속에 있다고 믿게 마련이다. 하지만 그게 막상 이루어지고 나면 다른 고민이나 걱정이 또 밀려들게 마련이다. 알라딘이란 애니메이션에서 이미 그 욕망의 끝없음을 살펴본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우린 영영 행복할 수 없단 말인가? 답부터 이야기하자면 전혀 그렇지 않다. 그 허황된 일반룰을 깨는 것부터 시작한다면 우리도 충분히 행복해질 수 있다.

  무엇을 가졌기 때문에, 남들보다 많은 걸 소유했기 때문에 행복한 것이 아니다. 그저 지금을 살아갈 수 있는 내가 있고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어서 행복한 것일 뿐이다. 단, 그 일이 어떤 무거운 사명의식에 따라 마지못해 하는 일이어선 안 된다는 것. 진정으로 내가 하고 싶은 일이어야 하고 내 자신이 즐기며 할 수 있는 일이어야 한다. 그럴 때 일은 여가활동이 되고, 여가활동은 일이 되는 놀라운 삶의 마법이 일어난다.

  바로 이 책에는 그와 같은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죽은 시인의 사회」에 나오는 키팅 선생님의 말처럼 'Carpe Diem'을, 「개밥바라기별」에 나오는 노동자 아저씨의 말처럼 "사람은 씨팔....... 누구든지 오늘을 사는 거야"를 현실에서 맘껏 적용하고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 이들 개개인을 바라보면 일반룰에서 많이 벗어나 있음을 알 수 있다. 결혼적령기임에도 조바심을 느끼지 않고 별로 개의치 않는다고 말하거나 무료봉사를 하며 그간 모아둔 돈이 조금씩 바닥나고 있음에도 불안해하지 않는다. 이게 뭐냔 말이냐? 우리가 지금 일반룰로 인해 조급해하고 불안해하고 있는데 이들은 그런 불행을 자초하면서도 오히려 '써바이 써바이(행복이란 말의 캄보디아어)'라고 하고 있지 않은가? 이들과 우리가 서로 다른 種의 인간이거나 이들과 우리가 쓰는 '행복'이란 단어의 사전적 의미가 반대이지 않고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분명히 이들은 그런 일반룰을 반대로 행동하고 있음에도 오히려 행복하다고 말하고 있고 난 똑같은 이유로 불행하다고 말하고 있다. 누군가 심각한 착각에 빠져 있는 게 분명하다.

  "우리는 깨끗한 물 아니면 안 되고, 더울 때 에어컨 없으면 안 되고, 오래 살아야 하잖아요? 그런데 아흔까지 사는 게 쉰까지 사는 것보다 행복할까요? 깨끗한 물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아니지만, 내가 깨끗한 물을 먹을 수 있어서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행복할까요? (80p)" 백지윤씨의 말인데, 이 말을 통해 그녀가 생각하는 행복은 어떤 것인지 알 수 있다. 누구는 '깐깐한 물(?)'을 마시려 오늘도 열심히 일 한다. 그래야만 건강하고 오래 살 것 같으니까. 바로 그게 행복이라 생각하니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정확히 그게 빈틈이었던 셈이다. 온실 속의 화초로 모든 것들과 차단된 채 만수무강할 것이냐? 내가 정작 하고 싶은 일들을 하며 세상과 부딪기며 짧은 인생 굵게 살 것이냐? 그런 물음들이 가능하다면 이 이야기는 또 어떤가? "여기서 만나는 사람들 보면 '내가 많이 살았구나' 싶어요. 나보다 훨씬 어린 사람들이 일찍 가는 거 많이 봤으니까. '서른 셋이면 살만큼 산 거 아닌가. 많이 누렸지 뭐'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러니까 살아 있는 게 감사하죠. (104p)" 이기원씨의 말이다. 장수해야만 행복한 게 아니란다. 그저 지금 살아있음에 감사할 수 있다는 것. 그런데 이게 얼마나 맥 빠지는 소린가? 마지못해 살고 죽지 못해 사는 사람에게 그걸 감사히 여기세요 라고 하는 것처럼. 그런데도 분명한 건 의식이 전복되는 순간 이와 같이 현재를 긍정하게 되고 바로 이 순간에 행복을 불러들일 수 있게 된다. 고로 행복은 미래에 있는 그 어떤 유토피아 같은 게 아니라 지금 나의 곁에 있지만 내가 의식하느냐, 마느냐에 따라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그 무엇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을 읽으며 난 그런 나만의 행복을 재구성할 수 있었다. 일반룰에 의한 행복이 아니라 나만이 누릴 수 있고 가질 수 있는 그런 행복 말이다.

  안연지씨는 캄보디아인들의 행복을 "삶을 즐기는 것 아닐까요? 우리는 뭘 해야 한다는 강박이 심하잖아요. 이 사람들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요. 돈이 없으면 없는 대로 인정하고 상관하지 않는 달까. 욕심이 없고 뭘 해야겠다는 삶의 목표 같은 것도 없어요. 그런 걸 많이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없어도 행복한 거 아닐까요? (204p)" 라고 말했다. 아주 중요한 지적이다. 생각의 과잉은 우릴 불안의 늪으로 밀어 넣는다. 땅이 꺼질까? 지붕이 무너질까? 늘 불안해했다던 '杞憂'의 이야기는 더 이상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바로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보험에 들고 돈에 대한 불안으로 재테크를 하고, 직장에 대한 불안으로 스펙 올리기에 여념이 없는 우리의 모습일 뿐이다. 행복은 그와 같은 의식 과잉을 떠나 몸으로 직접 부딪치며 나의 것을 소유하려 하기보다 다른 사람과 나누려 할 때 나를 찾아오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왜 열심히 일하세요?"라고 물으면, "행복해지려고"라고 대답할 것이다. 누구나 행복을 바라지만 그렇게 살지 못하는 게 참 안타깝다. 나 또한 그런 안타까움을 반복하고 살았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어느 정도 자유로워질 수 있어서 다행이다. 왠지 모를 답답함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이 책은 좋은 치유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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