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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홍 - 彩虹 : 무지개 ㅣ 김별아 조선 여인 3부작
김별아 지음 / 해냄 / 2011년 12월
평점 :
품절
세자의 연정과 사랑
얼마 전까지 정은궐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해를 품는 달>이 크게 화제를 이끌어내며 방영되었다. 가상 조선시대에 살았던 세자의 지고지순한 사랑을 다룬 책이자, 드라마다. 드라마에는 김수현이 그 역할을 맡았는데 역할에 몰입을 잘하여 드라마 자체가 마치 소설을 읽는 듯한 짜임새있는 연기와 구성을 보여주었다.
세자는 한 눈에 반한 여인을 지극히 사랑하여 그녀가 세자빈에 간택되었을 때도, 원인모를 병에 들어 폐빈 되었을 때도, 그녀가 병으로 죽고 난 후에도, 그가 임금이 되어 중전을 거느리게 된 후에도 연심을 그만두지 않았다. 어찌나 그녀에 대한 사랑이 깊었던지 그만두지 못한 것이 아니라, 그 스스로 잊지 않으며 살았다. 끝내는 죽었던 세자빈이 살아 돌아와 그의 사랑은 이루어지게 된다. 결과적으로만 보면 조선의 로맨틱한 세자의 감동적인 러브스토리이다. 나도 <채홍>을 읽기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내 관심은 오롯이 어서 세자와 세자빈이 재회하는 것에만 치중되어 있었다. 만나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TV를 두들기곤 했다.
그러다 <채홍>을 읽게 되었다. 너무 읽고 싶었던 책을 선물까지 받은 터라 들뜬 마음으로 펼쳐보았다가 덮을 때는 비탄하며 답답한 가슴을 두드렸다. 그 여파는 한창 즐겨보고 있던 <해품달>에서 관심을 두는 인물을 바꾸게 했다. 바로 어린 시절에 세자빈과 함께 예동을 지냈던 중전이다. 그녀는 공주의 예동을 지낼 때부터 관심 밖이었다. 세자빈의 오빠를 마음에 품었던 공주는 세자빈 쪽으로 마음이 가기 마련이었고, 왕마저도 지식이 뛰어난 세자빈을 마음에 두었다. 중전은 늘 세자빈과 비교되는 수치를 당해야했고, 주저앉아야했다. 그럴 때마다 그의 아비는 더욱 독하게 마음을 먹으라며 다그치기만 했다. 성장한 후에도, 죽은 세자빈 대신 들어오게 되었다는 간접적인 이유로 세자에게 미움 받았고, 자신의 아비가 세자빈을 살해하는 것을 주도했다는 데에 대한 죄책감으로 매일 밤 떨었다. 세자빈이 살아 돌아와 자신을 해할 것이라는 두려움으로 정신적 이상까지 생겨버렸다. 심지어 합방일이 되면 세자는 언제나 몸이 아프다는 핑계를 대며 교태전에 걸음하는 것을 피했다. 그녀는 이러한 무관심과 자신을 향한 질타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하고 자처해왔다. 하지만 늘 그녀는 외로운 존재였다. 남편에게, 아비에게 버림받은, 상처가 많은 여인이었다.
왜 내가 중전에게 눈길이 가게 되었는가? 바로 <채홍>에도 이와 같은 여인이 다뤄지기 때문이다. 순빈 봉씨. 역사서에 쓰여진대로만 보면 자신이 아이를 갖지 못하자 후궁의 회임 소식을 들고 투기를 부리고, 거짓 임신을 고하고, 심지어는 궁녀와 동성애까지 저지른 나쁜 여자다. 김별아는 이런 순빈 봉씨를 어떠한 여자로 다루고 있을까. 또 그녀를 통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일까.
순빈 봉씨, 사랑할 수 있는...
순빈 봉씨는 알려진 것이 없는 여자다. 그 칭호 넉자 말고는 이름도 모르고 단지 동성애를 저지르고 폐출 당했다는 기록만이 보인다. 이런 그녀에게 김별아는 난(暖)이라는 예명을 붙여주었고, 친근하게 봉빈이라고 불렀다. 이렇게 난으로, 봉빈으로 그녀를 표현해야 했을 이유가 무엇일까.
봉빈은 일찍이 어미를 잃고 유모를 한 가족이라 여기며 살아왔다. 듬직하게 자란 오라비들 밑에서 담뿍 사랑을 받으며 남부럽지 않게 컸다. 그녀는 비록 아비뿐인 가정에서 성장했지만 덕이 높았고 자존감은 하늘을 찔렀다. 수려한 미모는 감히 중국의 천하일색들에 견줄만 했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오만했다. 간택절차로 궁에 들어 선을 보일 때도 그녀는 고개를 처박고 있는 다른 후보자와 달리 궁안을 둘러보며 느긋이 서있었다. 자기는 타 후보자들과는 다르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세자의 총애를 얻기 위해 입에 올리기도 민망한 술법들을 행했던 앞선 세자빈 휘빈 김씨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비웃음을 치기도 했다.(휘빈은 엄청난 박색이었다! 땅딸만한 키에 답답한 이목구비를 지닌 여인으로 그려지고 있다. 그래서인지 세자는 더욱 그녀에게 무관심했고 불안해진 휘빈은 민간의 술법을 행하기에 이르렀다. 결국은 부덕한 죄로 쫓겨났고 재간택에 봉빈이 뽑히게 된 것이다.)
어쨌든 난의 오만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엄청난 사랑을 받으며 자라왔기 때문이었다. 가족들은 물론이고 아름다운 외모로 뭇 남성들까지도 홀리게 만들었을 것이다. 봉빈은 그 외모로 세자의 마음까지도 잡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자신은 휘빈과는 전혀 다르기에, 아니 수십배는 더욱 아름답기에 잡지 못하면 이상하리라 말했을 것이다. 그런데 웬걸, 세자는 봉빈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았다. 되려 미모의 얼굴을 보고는 마음과 눈을 질끈 닫았다. 세자는 여자에게 무심했다. 만인의 사랑을 받고 있으나 한 사람의 사랑을 받는것과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에 익숙치 못했다. 특히 세자에게는 오래전부터 미(美)에는 반드시 악이 있다는 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봉빈의 미는 세자의 마음을 얻는 데 독이 되었을 뿐이었다.
난의 사랑받고픈 마음과 세자의 선입견은 첫날밤부터 격하게 충돌하기 시작했다. 연(宴)에서 마신 몇 잔의 술을 핑계로 세자가 등을 돌리고 드러 누워버린 것이다. 어느새 그는 코까지 골며 잠들어버렸다. 콧소리가 쌕쌕거리며 고르게 퍼질수록 오라비의 신혼 생활을 엿들어오며, 남과의 접촉을 은밀히 상상하며, 첫날밤에 대한 기대와 설렘을 품어오던 난의 억장을 처참히 무너져갔다. 누가 알았을까. 난이 시집간 첫날 밤, 등을 돌린 남편의 뒤에서 스스로 저고리 옷고름을 풀고 치마를 벗을 줄을. 난은 지독하리만치 잔인한 수치심과 자괴감에 빠졌을 것이다. 그녀는 겨우 세자빈 따위의 신분으로 장차 성군이 될 인물에게 이래라 저래라 할 수도 없었다. 그저 아름답게 태어난 걸, 문종의 세자빈으로 간택된 죄, 즉 자신을 탓하며 가슴을 쥐어뜯었다.
순빈 봉씨, 사랑받고픈...
세자는 봉빈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기 시작했다. 끝내는 극과 극으로 치달아버렸다. 세자에게 또 다른 후궁이 들어서면서 부터 더 심해졌다. 몇 년동안 갖지 못한 아이를 후궁은 들어온지 얼마 되지 않아 바로 잉태해버렸다. 봉빈은 엄청난 질투심과 분노로 후궁을 괴롭히는 등의 파행을 저질렀다. 태어날 아이와 어미를 저주하며 하루하루 술잔을 비워갔다. 상상임신까지 했다. 하지만 상상임신으로, 그녀는 위로받지 못하고 더욱 악처로 치닫게 되었다.
봉빈은 어느새 술고래가 되어있었다. 자신에 대한 한탄을 담아 한 잔, 세자에 대한 분노를, 사랑을, 그리움을, 외로움을, 질투를, 체념을 담아 열잔, 또 한 잔 마시다 보니 그녀의 옆에는 빈 술병이 산더미처럼 나뒹굴고 있었다.
이런 그녀의 상태를 아는 것인지 모르는 것인지 왕 내외는 세자와 세자빈을 단 둘이서만 나가 살도록 명하였다. 너무나도 멀어진 그들의 사이를 조금이라도 좁히기 위해서, 상상임신 아니 거짓임신으로 궁내를 휘휘스럽게 했던 세자빈의 면모를 조금이라도 깨끗이 하기 위해서. 하지만 이것으로 더욱 둘의 사이는 멀어지게 되었다.
대체 봉빈은 전생이 어떤 죄를 살았길래 이토록이나 처절하게 외로움을 견뎌내야 했을까. 은희경의 <빈처>라는 작품이 있다. 현진건의 <빈처>가 돈의 결핍을 나타낸 것이라면 은희경의 것은 사랑, 즉 애정의 결핍을 다룬 작품이다. 이 작품은 아내의 일기장을 읽으며 자신을 되돌아보는 남편이 등장한다. 우리가 주목할 부분은 남편이 아닌 아내다. 남편은 아름다운 그녀를 차지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고, 끝내는 얻어냈다. 하지만 이루어진 사랑의 남루한 일상이라고 그랬다. 그는 사랑을 얻었다는 허무감 때문인지 아내에게 무관심했고, 무시했다. 아내를 위할줄 몰랐고 따스한 한 마디 해줄 줄을 몰랐다. 일찍 들어온다고 말해 몸도 좋지 않은 아내를 저녁 차린다고 고생하게 만들어 놓고는 달랑 전화 한통으로 늦는다고 말한다. 아내는 그런 남편을 이해해주려고 하지만 쓰러질 듯한, 아려오는 외로움을 느낀다. 이루어진 사랑의 남루한 일생... 이루어진 사랑의 쓴 인생... 사랑의 외로움. 봉빈은 <빈처>의 아내보다도 더한 외로움과 고통을 느끼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빈처>의 아내는 자신이 원한 결혼을 하기라도 했다. 결혼 전 연애 시절에는 무한 사랑을 받아보기라도 했다. 그런데 봉빈은 뭔가. 원하는 결혼도 아니었고, 세자가 그녀에게 사랑의 감정을 조금이라도 내비친 적이 없었다. 그녀는 결혼 첫날밤부터 폐빈되기까지 7년 동안을 외톨이로 지냈던 것이다. 술을 벗삼아, 바느질을 남편삼아 외로움을 견뎌내야 했다.
그녀가 택한 마지막 탈출구는 궁녀와의 사랑이었다. 동성애, 오직 그 하나만이 봉빈의 외로움을 달래줄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세상은 그걸 허락하지 않았다. 봉빈을 음녀로, 악녀로 치부하기에 바빴고 결국엔 쫓겨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죽음에 이르렀다. 어째서 고통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게 만들어 놓고는, 그렇게 해 놓고서는 그 고통을 벗어내고자 하면 더욱 더 옥죄이고 결박하는 것일까. 왜 여성이라는 사실 때문에 마음껏 무시해도 되고, 마음껏 쫓아버려도 되고, 마음껏 짓밟아도 되는 존재가 되어버린 것일까. 나는 여기서 내가 던진 질문의 해답을 찾고자 했다. 김별아 작가는 이런 순빈 봉씨를 위로하기 위해 난이라는 예명을 지어준 것일까? 여성으로 태어나 망가지고 짓밟힌 삶을 살아야 했던 그녀를 추모하기 위해?
순빈 봉씨, 여자로서 패배자...
조선 시대의 여성들은 늘 패배자로 살아야 했다. 늘 남자의 밑에 서있어야 했고, 그들을 뛰어넘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역사에서도 패배자였다. 봉빈은 오로지 악녀로만 그려져 있다. 도저히 따뜻한 면모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방탕한 여인. 하지만 어쩌면 김별아 작가가 그려낸 봉빈의 모습보다 훨씬 처참하고 힘든 삶을 살다간 여인이었을 수도 있다. 그럴 가능성은 농후하다. 조선시대의 여성들에게 정절과 여성으로서의 모습은 굉장히 중요했다. 봉빈은 정절을 어긴 여인이었다. 그렇기에 더욱 악하게 그려질 수 밖에.
말했다시피 조선시대는 여성들에게 정절을 강요하던 때였다. 그런 시대에 동성애로 퇴출된 여인을 김별아는 왜 끌어온 것일까? 나는 조심스레 '조선시대 여성들의 삶, 애처로운 그들의 삶'을 그려냈다고 생각해본다. 봉빈은 세자빈이라는 이름을 달고 살았다. 세자빈이라는 지위로서 박생들에게 덕을 보여야 하는 자리였고, 그녀에게는 수많은 격식과 의례와 절차를 지켜야하는 의무가 주어졌다. 봉빈은 좋게 받아드리고자 했다. 하지만 격식과 의례와 절차는 그 자체의 의미가 아닌 구속과 결박의 의미로 봉빈을 옭아맸다. 마음이 전혀 담기지 않은 형식적인 밤일, 친정과의 교류를 금지하며 세자는 봉빈을 더 깊은 구렁텅이로 잠기도록 했다. 그런데 비단 봉빈만이 이러한 제약과 규율 내에서 악압받으며 살았을까? 물론 아니다.
그러나 무엇으로도 이번 생애 그곳까지 닿을 방도가 없기에 김태감은 무력했다. 사랑하면서도 사랑에 무력했기에, 사랑하면서도 사랑할 수 없는 사람에게 헛힘을 쓰기 시작했다. 입번하러 나서는 길에 트집을 잡아 아내의 귀뺨을 올려붙었다. 쓰러져 울고 있는 아내를 내버려둔 채 나갔다가 출번하면 또 다른 가탈을 부려 아내를 쳤다. 고생중에 마음고생만큼 사람을 상하게 하는 것이 없으니 금세 아내의 눈빛은 흐려지고 피부는 윤기를 잃었으며 변함없는 산해진미에도 살이 내렷다. 수척해진 아내의 모습을 볼 때마다 가슴이 찢어지듯 아팠으나 김태감은 매타작을 멈출 수가 없었다... 44p
지인의 친구 분은 배를 타시는데 어렵사리 결혼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결혼한지 얼마 되지도 않아 바로 아내가 집을 나가버렸다고 한다. 그 이유인 즌슥 아내가 그 분과 밥을 먹다가 생선을 뒤집었는데, 생선을 뒤집는 행동은 배 타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금기시 되어있던 일이라고 한다.(배가 뒤집힌다나...) 화가 난 남자는 쌍욕을 하며 아내의 귀뺨을 때려버렸다고 한다. 그저, 잘 몰랐을 뿐인데 차근차근 설명해주면 될 것을 썅년, 이라고 욕까지 하며 때렸어야 할 이유가 있었을까. 그 행동으로 아내는 당장 짐을 싸서 나와버렸다고 한다.
김태감의 아내도 실수를 저질렀다. 내시의 부인으로서 '자른다'는 말을 입에 올린 것이다. 하지만 그 때의 여자들은 화를 때며 욕을 하고 때리는 남자를 두고 위의 아내 분처럼 집을 나갈 수 있었을까? 모든 것이 구속된 그들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었으리라. 그저 맞고, 맞으며 참아냈으리라.
봉빈에게는 신체적 구속은 없었다. 폭행도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늘 아파해야 했다. 그녀 자신으로서 조선 시대에 태어난 것을 아파하고, 역사로서도 아파야했다. 봉빈은 삶의, 속세의 패배자였으며 다시 일어날 수 없게 쓰러져버렸다.
차라리 벚꽃같은 삶이었으면...
엊그제 핀 듯한 벚꽃이 벌써 다 졌다. 날리는 벚잎을 보며 문득 봉빈을 생각했다. 그녀의 삶이 벚꽃같았다면 어땠을까. 벚꽃같이 짧지만 화려한 인생을, 짧지만 강렬한 사랑을 한 번이라도 겪어봤더라면 그녀는 이토록 힘들지 않았을텐데.
봉빈을 역사 속으로, 아니 내 마음속으로 보내며 다시금 생각해본다. 사랑을 구속당했던, 인권을 억압받았던 조선시대의 여성들. 사슬로 감긴 사랑이라는 감정에 목숨을, 인생을 걸고 덤벼들었던 당돌한 여인. 그만큼 아파야했고, 외로워야했고, 슬퍼야했고, 고통받아야했고, 탄식해야했고, 눈물흘려야했고, 피흘려야했던 여인.
가끔씩 <채홍>을 읽지도 않고 저질스러운 작품으로 치부해버리는 자들이 있다. 그런 자들에게 나는 이제 무조건 책을 내밀며 한 번 읽어보라 권할 것이다. 김별아가 그려낸 하나의 작품안에서 김별아 자신의 호소와, 여성들의 호소와, 그리고 나의 호소를 느껴보라 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