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도 듣지 않는 채로 달리기를 하고 있는 사람은 부모의 복수를 다짐하는 자들이라는 댓글을 어디서 봤던 것 같다. 나는 오늘 내 부모의 원수 놈들에게 피의 복수를 다짐하며 음악을 듣지 않고 30분 뛰었다.



뻥이다.


음악을 듣지 않고, 달리면서는 미셸 푸코의 감시와 처벌을 생각했다. 이게 더 미친 소리 같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런데 아주 가끔 그런다. 작년에는 비트겐슈타인 생각했었다ㅋㅋㅋ 아 뭐 대단한 사색을 하는 건 아니고. 음악도 없이 그냥 달리기만 하면 심심하니까 한 가지 생각에 집중해 보는 거다. 읽은 것에 대한 나만의 의미랄까. (생각이 가능해지다니!!! 다시 달리기에 익숙해졌나보다. 이제 좀 덜 힘들여 뛰게 되는 듯. 체력 1년 만에 회복했네. 음, 잘하고 있어.)


오늘은 조난주의 푸코 교실 줌 강의 들은 날이었고, 내가 감동받은 부분은 (혹시 샘 에고 서치하시다 내 블로그 보게 되면 놀라시겠다 ㅋㅋㅋ 난주 샘 혹시 보셨다면.... 공부 나눠주시는 거 넘 감사하고요. 출처 밝힙니다!)


"말은 그냥 말이 아니다.

그것은 권력 효과를 담지한 것이다.

나의 본질을 규정하는 어떤 말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거부해야 한다."


나는 선생님이 한 말이 무슨 말인지 알아 먹는다. 내가 푸코를 읽는 까닭임과 동시에, 내가 참을 수 없어하는 종류의 언행이 바로 그것이니까. 나는 이걸 규정 폭력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그걸 내 안에서 언어로 정리하고 나자, 이젠 과거의 방식으로 상처받지 않게 되는 것 같다. 오랫동안 나를 나보다 더 잘 안다는 듯이 함부로 말하는 사람들에게 저항할 말을 찾지 못해서 고통 받았다. 그래서 나는 언어를 가져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욕망이 구체화 된 것은 블로그에도 걸어둔 버지니아 울프의 말을 만나고 부터이다. 아마도 2019년.


- 무엇이든 말로 바꾸어놓았을 때 그것은 온전한 것이 되었다. 여기서 온전함이란 나를 다치게 할 힘을 잃었음을 의미한다. 

오늘처럼 선생님이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과 비슷한 맥락의 이야기를 해주실 때, 내가 푸코를 아주 엉망으로 읽고 있는 건 아니구나. 어깨가 조금 올라간다. 히힛.


강의 마지막에 수업 참여하시는 다른 선생님들(샘은 선생님이라고 참여자들을 호명하시는 데, 원래 그런지는 모르겠지만ㅋㅋㅋ 선생님이라는 말이 좋다. 흐흐.)과의 대화가 좋았다. 푸코를 읽을수록. 특히 <감시와 처벌>의 경우, 새로운 관점을 주는 것과 동시에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저항할 수 있는 건가? 하는 질문을 계속하게 되신다고. 



푸코 읽기의 어떤 코어에 닿은 질문. 저항에 관한 질문은 친구들도 했었다.


아마 나에게도 찾아왔던 질문이기도 했었을텐데... 내 경우는 약간 달랐다. 그러니까, 일종의 가해 의식에 시달렸던 것 같다. 실제로 내가 무슨 대단한 일을 저질렀다는 것은 아니고. (요즘엔 이게 나라는 인간의 피학적 성향인가도 싶은데.)


푸코의 권력 개념을 직관적으로 이해한 다음, 나를 이루고 있었던 모든 관계에서  역학 작용 혹은 권력 구도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내가 무서워졌다. 내가 가지고 있는 관계(권력)를 최소화하고 싶었다. 내게 영향력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원래 없다는 듯 사라지고 싶었다. 그렇지만 당장 사라지기엔 수습해야할 것들이 많았고(지겨운 K-장녀). 어쩔 수 없지. 사람들을 실제로 거의 만나지 않고 지냈다. 푸코의 의도야 어쨌든. 그건 아마 내가 일종의 피해자 정체성에 안주하고 싶었기 때문일 거다. 뭐? 나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난 책임지고 싶지 않은데? 


저항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 것은 가까스로 혼자가 되어 가해자-공모자-뭐 여타의 라벨링을 스스로 하지 않아도 될 만큼의 내면 세계(나에게도 목소리가 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된 일기 쓰기?)를 조금은 구축하고 나서 일거다. 


그런데 다시 돌아가서 저항. 


선생님들은 저항을 궁금해하셨다. 그건 같이 읽던 친구도 그랬던 것 같다.

- 권력이 이런 모습이라면, 어떻게 저항해야한단 말입니까?

한계 안(물론 이 한계를 알아차리는 데에는 희진 샘 말대로 공부가 필요할 테고)에 엄연한 자유(인식하게 되면 알게 되면, 지배받지 않게 되는 부분이 분명 있다. 지배받더라도 호락호락 다 넘겨주지는 않는다)가 있다.라고 난 종종 표현해왔지만.


우리에게는 각자의 에피스테메(인식론적 단절ㅋㅋㅋ)가 있고. 질문의 결이 좀 달랐을지도 모르겠다며.


나는 푸코 철학이 가진 맹점(?)이라는 저항의 불가능성(?)에 대해서는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동의하지도 않는다. 잘은 모르지만, 기존의 저항 개념 역시 탈구축해야할 것). 지금도 그렇다. *내게 문제는 왜 저항하고 싶지 않아 하는 것인지다.* 왜 투항하고 싶은 걸까. 그냥 남에게 나를 맡겨버리고픈 거냐. 왜 그만 읽고 싶은 거지. 현상유지. 그리고 어렴풋한 불만. 어떻게든 이유와 구실을 찾아내서 더 알고 싶지 않아 하는 의식. 어쩌면 무의식. 내가 내게 가혹한 부분일지도 모르며, 내가 내게 용기 내라고 하는 부분일 수도 있고, 내가 내게. 저질러 왔던 스스로를 한계 짓는 규정. 나여, 한계 안에 엄연한 자유가 있다니요. 너는 자유가 싫어서 한계를 스스로 지어 오기를 반복한 인간 아닌가. 


그러니 저항이라는 단어보다는 지배라는 말이 더 어울릴 것이다. 나는 왜 권력에 차라리 지배받고 싶어하는 걸까. 푸코 식으로 질문하자면. 나는 어쩌다 지배받는 것을 기쁘게 여기는 인간으로 만들어졌는가. 이런 나를 어떻게 다르게 형성할 것인가.


얼마 전에 읽은 <한나 아렌트의 말>을 가져온다면. 


“(143) 그보다는, 미스터 스탈린을 신봉했었고 이후 개인적으로 그런 환상에서 깨어난 사람들을 가리키는 거예요. 즉, 진정한 혁명가였거나 정치적 활동에 관여했던 사람들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 말하듯 신神을 상실하고 새로운 신을 찾아 나섰다가 반대편에 있는 새로운 악마한테 향했던 사람들을 말하는 거예요. 그들은 그저 패턴을 역으로 바꾸었을 뿐이죠.”

 <한나 아렌트의 말>


나는 말을 잘 듣고 싶었다. 그냥 다 믿고 싶었다. 그게 내 인생을 망쳤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도 모르게 그러고 있을 때가 있다.  


그리고 푸코는 근본적으로 바보와 교조주의를 아주 싫어하지. 아마 그건 내가 푸코를 좋아하는 이유이면서 나와 동일시하는 까닭일 것이다. 사실은 내 안에 있는 내가 가장 마주보기 싫어하는 특징이기에 가장 저항하고자 하는 것. 


어이없는 반골 기질이 욱 튀어나오지 않는다면, 사람들이 하자는 대로 하고 말을 잘 듣는 편이었다. 그냥 내 의지나 내 의사나 감정은 그 사람 자체보다 중요하지 않다고 느낄 때가 많다. 나는 그런 나를 알아서.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신기하고 부럽고 좋아서 나도 모르게 또 그런 사람들이 좋아하는 사람이 되려고 행동하곤 했지만. 이제는 이렇게 생긴 나를 더 먼저 더 많이 좋아하기로 결단했다. 당신들의 평가와는 상관없이. 그리고. 그 결단들이 쌓여야 하는 거라고. 


달리면서 생각한다. 나를 좋아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나 자신에게 집중하는 거라고. 호흡에 집중. 내가 있어야 나를 좋아하지. 근데 집중 이걸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감을 잡은 것 같다가도, 제대로 가고 있나 잘 모르겠는 날들이 온다.


오늘 같은 날.

문득 외롭다는 생각이 드는 날.

책은. 책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걸 실감하게 될 때.


“(179) 내 생각에 우리에게도움을 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심사숙고하는 거예요. 그리고 사유한다는 말은 항상 비판적으로 생각한다는 뜻이고, 비판적으로 사유하는 것은 늘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는 거예요. 실제로 모든 사유는 엄격한 법칙, 일반적인 확신 등으로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건 기반을 약화시켜요. 사유하다가 일어나는 모든 일은, 거기에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건 비판적으로 검토할 대상이 돼요. 즉, 사유 자체가 그토록 위험한 일이라는 단순한 이유 때문에, 위험천만한 사유란 존재하지 않아요. 이걸 어떻게 확신하느냐면…. 나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편이 훨씬 더 위험하다고 생각하거든요.”

- 아렌트 머모님.... 아마도 사람들은 외로운 게 싫어서 사유하지 않는 모양입니다. 사유는 쩜 외로워엉.


그랬다.

오늘 수업의 마지막 화두는 저항이었고.


서른 살 이후의 나는 나를 이렇게 만들어버린 세계에 저항하려고 악착같이 읽고 썼구나 하게 되었다. (요즘엔 그냥 재밌어서 읽기도) 

내가 지배받고 있다는 것 자체를 모른다면 저항조차 할 수 없다. 나의 내면은 내면화된 그 말들에 지배받는다. 어느 덧 내 안에 자리잡은 타인들의 시선은 그들이 사라져도 내 안에 남아 나를 감시한다. 


복잡해진 지배의 현실에 저항하기 위해서는 지성을 벼려야 해. 정신 안 차리면, 생각하던 대로만 생각하면 그들이 하자는 대로 하게 된다. 이 시선은 누구의 시선인가. 이 말은 누구의 말인가. 내 몸에 적합한 말인가. 생각하자. (다르게) 생각하자. (몸 먼저) 생각하자. 나는 저항하기 위해서 책을 읽는다.


그런데 정말 재밌는 것은. 


책에는 너무도 고상하고 고매하고 대단한 사람들이 많아서. 

지배받고 싶어 하는 성향의 나는 정신 안차리면 금세 책에게 지배당한다는 거다. 대상을 바꾸어 만들어낸 다른 신. 내 안의 교조. 나는 내가 이러다 책들에 저항하지 않고 싶어질까 봐. 


그럴 땐 별 수 없다. 책 덮고, 동생이랑 놀아야지. 

동생이 안 놀아주면 재밌는 거나 봐야지. 


이렇게 쓰고 보니 엄청 책 읽는 사람 같네.

아니다. 요즘엔 돈 버느라 바쁘다. 

책 읽을 시간 음슴. 

ㅋㅋㅋㅋㅋ


올봄부터 내가 공들여서 만드는 나는. 책에 의존하지 않는 나인데, 현대를 사는 도시인의 슬픔은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돈을 벌어야 해서, 책에 의존할 겨를이 통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못하게 하면 더 하고 싶은 것은 인간의 생겨먹음인지라. 으아아아아. 책!!!!!!!! 읽고 싶!!!!!!지만... 암튼 책을 읽기 위해서라도 체력을 먼저 키워야 한다.


* 결론 : 내일도 운동 열심히!! 내 부모의 원수!!! 복수!!! !!! ㅋ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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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3-10-26 09:4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사유는 외롭다. 홀로 음악도 없이 사유하며 하는 달리기는… 부모의 원수를 생각하는 급.. ㅋㅋㅋ 전 뭐 안 들으면 달리기 싫던데, 대단해요! 전 달리기 쉬고 홈트 시작한 후 허리가 안 아픕니다ㅎㅎ
저도 책 너무 읽고 시퍼요.. 실컷 ㅠㅠ

공쟝쟝 2023-10-26 09:48   좋아요 3 | URL
맞아요 달리기 잘못하면 무릎이랑 허리 나가요.(그건 나?) 그래도 유산소 하면 기분 좋으니... 엄청 살살 달립니다. 목숨을 걸고 뛴다고 하면 다 웃던데... 진짠데.... 언제나 탑골송을 듣는데 어제 밤에는 음악 텐션이 아니더라고요. 뛰는 데 계속 부모의 원수가 생각나서.... 웃었다.........

괭님의 생애 주기에서 책을 손에 안 놓는 것 만으로도 정말 대단한 거예요. 인간은 본디 외로운 데다, 곁에 있는 사람들도 반드시 다 사라질테니.... (하나도 하나도 위로 안되겠지만) 째애끔만 견뎌보아요ㅜㅜ 대신 자기 몸 많이 돌보시고요. 오래 살아야 책 실컷 읽죠.........!!

잠자냥 2023-10-26 11: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음엔 칼 차고 달려요!

공쟝쟝 2023-10-26 21:01   좋아요 0 | URL
검은 옷을 입고. 복면을 쓰고. 씨익.

서곡 2023-10-31 07: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인‘티‘ ‘제‘ 니까 비판적 사유야 숨쉬듯 자연스럽게 가능하실 겁니다 ㅋㅋ 오늘 이달의 마지막 잘 보내시기 바랍니다!

공쟝쟝 2023-10-31 10:08   좋아요 1 | URL
엔티…!! 시월의 마지막 날이네요… 서곡님도 하루 잘 보내시고 읽고 계시는 책들 모두 ❤️💘💖 박살 내버리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