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어 라이프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3
앨리스 먼로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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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캐나다 출신의 노벨문학상 작가인 앨리스 먼로의 새 신작이 문학동네 세계문학 시리즈로 출간되었다. 제목이 [거지 소녀]이다. 국내 출판사의 세계문학 시리즈를 꾸준히 구입해서 읽다 보니 이 책도 구입하게 되었다. 그런데 읽으려 하니 무언가가 꺼림직했다. 책장 한구석에 오래전에 구입했던 앨리스 먼로의 대표작인 [디어 라이프]가 읽지 않은 채로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결국 새 책을 펼쳐 보고 싶은 욕구를 묻어두고 [디어 라이프]를 끄집어 냈다. 그리고 앨리스 먼로의 창조한 그녀만의 단편의 세계로 들어가게 되었다.

 

소설의 가장 큰 매력은 소설을 읽은 사람을 그 소설만이 창조한 독특한 세계로 인도하는 것에 있다. 마치 3D 입체 영화를 보듯, 소설을 펼치면 새로운 공간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된다. 물론 모든 소설이 그런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렇게 읽는 독자를 새로운 세계로 빨아들이는 소설이 훌륭한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때로는 작가가 창조한 판타지 속 세계일 수도 있고, 작가가 경험한 과거의 세상일 수가 있다. 엘리스 먼로의 소설을 읽는다면 지금 내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를 확실히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엘리스 먼로의 소설을 펼치는 순간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세상으로 들어가게 된다. 광활한 캐나다의 기차여행, 맹렬한 눈보라가 몰아치는 캐나다의 벌판, 보수적인 종교적 색채가 강한 캐나다의 도시들, 전쟁이 막 끝나 모든 것이 뒤숭숭한 1950년대, 그리고 그런 세상에서 사랑하고 상처받는 여인들, 이것이 바로 엘리스 먼로가 만들어 내고 독자를 끌어들이는 이 소설의 세계들이다.

 

첫 소설 [일본에 가 닿기를]이란 소설은 기차 여행을 주 배경이다. 소설은 그레타라는 여성이 남편 피터의 배웅을 받으며 어린 딸 케이티와 함께 기차 여행을 하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소설의 시간은 그레타가 기차를 타고 밴쿠버에서 토론토로 이동하는 며칠의 시간이다. (지도에서 찾아보니 밴쿠버는 캐나다의 서쪽 끝에 있고, 토론토는 동쪽 끝에 있었다) 그 시간 동안 그녀는 피터에 대해서 생각하고, 또 그녀가 마음을 두고 있는 다른 남자를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다가 기차에서 만난 연극을 하는 그레그라는 남성을 일탈을 한다. (그녀의 소설에서는 가끔 연극을 하는 남성이 등장한다. 연극이란 그녀의 소설에서 평범한 삶에서의 일탈을 통로와 같은 소재이다.) 이 소설에서 기차 여행의 과정을 통해 작가는 주인공 그레타의 불안한 내면을 표현한다.

 

"그 순간 새로운 공포심이 일었다. 만약 케이티가 객차 끝까지 이쪽 저쪽 돌아다니다가 어찌어찌 문을 여는 데 성공했다면, 혹은 누군가가 문을 열었을 때 따라 나갔다면, 객차들 사이에는 다른 객차로 넘어갈 수 있는, 각 객차들을 연결하는 짧은 통로가 있었다. 그곳에서 서면 기차의 움직임이 갑작스럽고 무섭게 느껴졌다. 그 뒤에도 무거운 문이, 앞에도 무거운 문이 있었고, 통로 양쪽에는 덜컹거리는 금속판들이 있어다. 그 금속판들이 기차가 정차ㄹ할 때 내려지는 계단을 가려주었다. 사람들은 그곳을 통과할 때 늘 걸음을 서둘렀다. 덜컹대는 소리와 흔들림은, 결국 세상 모든 것이 그리 필연적인 방식으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금 일깨워주었다. 사람들은 무심한 듯, 하지만 다급하게 덜컹대는 소리와 흔들림을 통과한다." P 35

 

나 역시 오래전에 기차의 연결칸들을 통과할 때며 이런 비슷한 감정을 느꼈던 것 같다. 작가는 객차의 연결칸의 혼란스러운 공포를 지금 그레타의 심리와 너무나도 절묘하게 연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문센]이란 소설에서는 전쟁이 끝나가는 1940년대 후반의 춥고 황량한 캐나다 시골마을 너무 잘 묘사하고 있다. 이 소설 역시 시골 마을의 교사로 부임한 젊은 여생이 기차 플랫폼에 내리면서 시작이 된다. 그녀가 맞닥뜨리는 춥고 황량한 시골마을과 그녀의 인생이 묘사된다.

 

"남자들은 모두 숲속 제재소에서 내렸고 - 걸어서 십 분도 걸리지 않을 것 같았다 - 잠시 뒤 눈 덮인 호수가 시야에 들어왔다. 길고 하얀 목조건물이 그 앞에 서 있었다. 여자가 포장된 고기 꾸러미를 챙겨 일어셨고, 나를 따라 일어섰다. 기관사가 다시 '샌'하고 외쳤고, 문들이 열렸다. 여자 둘이 전차에 타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이 고리를 든 여자에게 인사를 건네자 여자도 날이 아주 춥다고 대답했다." P 46

 

[자갈]이란 소설은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게 읽었던 책이었다. 대부분 단편소설은 읽는 속도가 느리다. 그 이유는 소설을 읽는 시간이 긴 것이 아니라, 한편의 소설을 읽으면 그 소설이 주는 기분에 빠져 다음 소설로 넘어가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자갈]이란 소설이 그랬다. 다른 소설들은 비교적 빨리 읽었지만, 이 소설을 읽은 후에는 엘리스 먼로의 다른 소설들을 읽기가 쉽지가 않았다. 평범한 타운의 가정의 어머니는 연극을 하는 젊은 '닐'이라는 남성을 선택하고, 어린 주인공과 언니는 엄마를 따라 닐이 거주하는 마을 외곽의 트레일러에서 함께 머문다. 어머니는 자유를 선택했지만, 딸들은 모든 것이 혼란스럽다. 소설은 어린 주인공의 시각에서 이런 혼란스러움을 잘 표현한다. 결국 언니인 카로는 이런 혼란스러움과 어머니에 대한 관심을 요구하기 위해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되고, 주인공은 이것을 평생 짐으로 짊어지게 된다.

 

"어머에게 그 시절을 떠올려보라는 말은 차마 할 수 없다. 나는 그 문제로 굳이 어머니를 괴롭히지 않는다. 어머니가 차를 몰고 우리가 살던 그 시골길에 다녀온 것을 알고 있다. 그곳은 많이 변해서 농사가 신통치 않던 땅에 지금은 유행하는 집들이 들어섰다고 했다. 어머니는 그 집들을 보며 느낀 경멸의 감정을 얼마간 드러내며 그런 말을 꺼냈다. 나도 그 길에 가보았지만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요즘에는 가족 안에 일어난 무서운 사건을 애써 지워버리는 건 잘못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제 자갈 채석장이 있던 자리에도 집이 지어졌고, 그 아래 땅은 반반하게 다져졌다." P 139

 

[기차]라는 소설은 남성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몇 편 안되는 엘리스 먼로의 소설 중의 하나이다. 엘리스 먼로의 소설은 대부분 여성의 긴 인생에서의 짧게 지나가는 사랑과 그 사랑의 여운이 어떻게 인생에 묻어 있는지를 다루고 있다. 남성이 주인공인 이 소설도 크게 다르지 않는다. 소설은 한 남성이 기차에서 뛰어내리면서 시작된다. 그리고 우연히 기찻길 옆의 한 여성이 사는 농장에 머무르게 된다. 여성과 사랑에 빠지지만 그 여성이 암이 걸린다. (나이 든 여성과 젊은 남성의 연애, 그리고 여성이 병이 들고 남성이 여성을 돌보는 구조는 앞의 [메이벌리를 떠나며]라는 소설과 비슷한 구조이고, 엘리스 먼로의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구조이다) 여성을 돌보던 남자는 또 홀연히 떠나고, 소설 말미에서 이 남성이 이렇게 여성을 떠나는 이유를 언급된다.

 

이 책의 뒷부분의 소설은 대부분 엘리스 먼로의 자전적인 소설이다. 이 소설들을 읽다 보면 앞의 소설들에서 등장하는 시골마을과 언니의 죽음, 병든 여인, 그리고 재혼 등의 모티브들이 모두 그녀의 삶에서 가져왔음을 알게 된다. [시선], [밤], [목소리들], [디어라이프] 등을 읽으며 마치 그녀의 인생의 단편을 사진을 보듯이 보게 된다.

 

엘리스 먼로의 소설은 대부분 긴 인생과 그 인생에서 짧은 사랑, 그리고 그 사랑이 인생에 주는 영향력에 대해 이야기한다. 때로는 그 사랑의 영향이 인생에서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때로는 전부인 것처럼 이야기한다. 그러기에 소설을 읽으면 조금은 나른한 기분이 들 때다 있다. 마치 소설 한 편을 다 읽고 인생을 다 산 느낌과 비슷한 허무함이 들 때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소설의 이미지가 오랫동안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그것이 엘리스 먼로의 소설이 가진 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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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리적 의심
도진기 지음 / 비채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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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를 지은 것이 분명해 보이는 사람이 있다. 그것도 잔인하게 사람을 죽이고, 야비하게 돈을 갈취해 보이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그런데 증거가 없다. 아니, 증거는 있는데 그 증거들이 이리저리 꼬여서 합당한 증거로 쓰일 수가 없다. 결국 뻔히 죄인인 줄 아는데도 그를 무죄로 선고해야 한다. 그럴 때 그 무죄를 선고하는 판사의 입장은 어떠할까?

 

도진기 작가는 판사라는 특이한 경력과 함께 한국에서는 매우 드문 추리소설 작가이다. 그것도 인기작가이다. 그의 소설에서는 범죄에 대한 예리함과 함께 사람에 대한 따스한 감성이 묻어나는 소설이 많다. 이번 소설은 추리소설이라기보다는 법정 소설에 가깝다. 아마 저자의 경험이 많이 담긴 소설일 것이다. 소설의 내용은 현민우 판사가 세간의 이목을 끈 젤리 사건이라 불리는 사건을 배당받으면서 시작된다. 이곳에서 나오는 젤리 사건이란 얼마 전 언론에 많이 언급되었던 낙지 살인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남성이 여성과 여행을 가서 모텔에서 낙지를 안주로 술을 마시다가 여성이 낙지를 먹다가 질식사를 했다. 모두 우연인 줄 알았던 사건이 남성이 여성 앞으로 들어 논 거액의 보험금을 타면서 세간에 드러났다. 여러 가지 정황증거에 불구하고 남성은 무죄로 판결되었다. 소설에 나오는 젤리 사건은 남성과 여성이 바뀌었고, 낙지가 젤리로 바뀌었을 뿐 대부분은 상황은 비슷하다.

 

?재판이 진행될수록 주인공은 피고인인 김유선이 유죄라는 것을 확신하게 된다. 그러나 모든 것은 정황증거뿐이고 결정적인 증거가 나오지를 않는다. 당시에는 아무런 의심 없이 죽은 남성을 장례했기에, 부검이나 확실한 검시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판사로서의 주인공의 고뇌가 시작된다.

 

"재판에서의 결정은 오늘 점심 메뉴는 뭘로 할까 하는 종류의 문제가 아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 회사가 다른 회사를 제치고 시장점유율을 높일까 하는 제로섬 게임도 아니다. 점심이 맛없어 봤자 잠깐이면 지나가고, 회사가 시장 공략에 실패한다 해도 그만큼 다른 회사가 이익을 보는 셈이니 원론적으로는 사회 전체로 보아 손해가 아니다. 판결은 다르다. 잘못하면 모두가 손해를 본다. 진범을 놓치고 무고한 이의 인생을 망가뜨린다. 되돌리기 어려운 파탄을 초래한다. 나쁜 놈 이야기를 듣고 나쁜 놈이라 욕하는 건 쉽지만 의심을 매단 채 함부로 무기징역! 사형! 외칠 수는 없다. - 중략- 재판이란 게 인간의 권한을 넘어서는 무겁고도 무자비한 일이라는 생각도 든다. 판사는 겸손해야 하지만 판사의 일까지 겸손하게 생각하면 안 된다. 이 일을 진진하고 또 진지하게 여겨야 한다. 판결이 갖는 위험을 생각하면 재판을 절대 우리 사회의 컨베이어 벨트의 한 단계로만 볼 수 없다." (P 113)

 

재판 과정에서 여러 증거들이 맞서지만, 결정적인 증거는 비구 폐색의 증거이다. 비구 폐색이란 타인이 인위적으로 코와 입을 막아 상대를 숨지게 하는 것이다. 이 경우 지금까지의 경험상 반드시 입이나 코 주변에 상처가 남게 된다. 살해당하는 사람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살기 위해 반항을 하기 때문이다. 반대고 기도폐색은 젤리나 낙지와 같은 것이 목에 막혀 숨지는 사인으로 상처가 없다. 문제는 죽은 남자의 입 주변에는 상처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결정적인 증거가 되어 피고인은 무죄로 굳어간다. 배심 판사들 역시 피고의 무죄를 주장하지만, 주인공 혼자만 유죄를 주장한다. 그리고 결국 배심 판사들의 반대와 결정적인 증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무기징역을 선고한다. 이런 선고에는 법에 대한 그동안의 회의가 있었기 때문이다. 소설에서 그는 오래전 자신이 법과 정의의 강의를 떠올린다.

 

"그럼 정의는? 이렇게 물의 시겠죠. 사실 법 입장에선 난감합니다. 사람들의 기대와 실제 모습이 다르거든요. 분칠한 경극 배우 같다고나 할까요. 화장을 지우면 상상치도 못했던 민낯이 드러나는...... 아무튼 그래서 법은 이 곤란한 물음을 무마하기 위해 '절차적 정의'라는 애매모호하고 편의적인 말을 등장시킵니다. 무슨 말이냐. 절차만 정의로우면 된다.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는 건 그뿐이다. 그 나머지는 우리가 모르고, 알 수도 없다. 결과의 정당성까지는 ㅅ우리가 손댈 수 없다...... 이런 애깁니다. 이 절차에 따르다 보니, 결과적으로 어떤 좋은 사람이 착착 맞물려 돌아가는 톱니바퀴에 끼어 기름이 쫄쫄 짜이고, 어떤 나쁜 사람이 그 바로 아래에서 입을 벌기고 냠냠 받아먹는 상황이 와도 법은 어쩔 수 없다고 혀를 한 번 쯧쯧 차고는 끝인 겁니다. 우리는 '정의'를 원하지만, 도달할 수 있는 최대한의 '법치'에 불과합니다. 냉정하지만 그게 현실입니다. 법치는 결론보다 절차에 관심이 있습니다. 공정한 결론보다 공정한 절차, 그걸 추구하는 시스템인 것입니다...... " (P 184)

 

결국 주인공은 절차적 정의를 무시하고 정의를 추구하지만, 그런 주인공의 판단은 예기치 못한 일들로 이어져 간다. 이 소설은 기존의 저자의 소설처럼 재미있고 속도감 있게 읽혔지만, 전작에 비해 읽으면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었다.

 

최근에 국민의 법 감정과 다른 판결을 내리는 판사들로 인해 많은 공분들이 있다. 여성을 강간한 남성에게 예상외의 가벼운 판결을 내릴 때 '자신의 딸이 이런 일을 당해도 그럴 수 있느냐?'라는 분노들이 있다. 흉악범이 10년 정도 있다고 출소한다고 하자, 도대체 어떤 사람이 이런 판결을 내렸냐며 울분을 쏟아내기도 한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며 판사들의 고뇌를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다. 그들이 울분에 의해서 판결할 수는 없는 것이다. 결국 이들을 움직이는 것은 시스템이다. 그들 역시 그 시스템에 의해 움직일 뿐이다. 그렇다면 그런 시스템에서 벗어나 정의를 추구하면 될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시스템이 무너지고 감정적인 판결들이 난무할 것이다. 이 책에서 저자가 접하는 딜레마이다. 읽는 내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이라는 것이 이상과는 얼마나 다른지를 느끼게 하는 동시에, 판사만이 가지고 있는 고뇌를 느끼게 하는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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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 지도
앤드루 더그라프.대니얼 하먼 지음, 한유주 옮김 / 비채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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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 주는 가장 큰 매력은 소설 속에서 또 다른 세계를 발견한다는 것이다. 역사 소설에서는 다른 시대, 다른 공간의 세계를 만날 수 있다. 판타지 소설에는 현실과 비슷하면서도 전혀 다른 독특한 세계를 만날 수 있다. 여행 소설이나 스릴러 소설 등에서도 그 소설 속에서만 존재하는 독특한 세계가 있다. 이렇게 소설은 현실과 다른 새로운 세계로 여행을 할 수 있는 특권이 있지만, 한편으로는 너무나 다르거나 복잡한 세계관으로 소설에 몰입하기 어려울 때도 있다. 그러기에 개인적으로는 소설을 읽으면서 때로는 백지에 소설의 세계관과 등장인물 간의 관계를 그리기도 한다. 그러면서 이런 소설의 세계를 그림으로 잘 표현한 자료가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그런데 정말 그런 그림들이 실려 있는 책을 만났다. 이런 소설의 세계를 그림으로 그린 책이 있다. 바로 [소설&지도]라는 책이다. 이 책은 유명한 고전 19편의 배경이 되는 세계를 멋진 지도로 그려내고 있다.

 

 

 

이 책에서 제일 먼저 접하게 되는 지도는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의 배경이 되는 지도이다. 어린 시절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아]를 읽고 그 독창적인 세계관과 배경에 매료된 적이 있었다. 지도를 보니 당시의 경험이 새롭게 떠오른다. 소설 속에서 오디세우스가 방황했던 세계란 한눈에 펼쳐지는 느낌이다. 오디세우스의 고향 이타카와 10년 동안 전쟁을 치른 트로이, 오디세우스를 유혹에 빠지게 한 오기기가, 노래로 오디세우스와 부하들을 유혹한 세이런, 부하들을 잡아먹는 외눈박이 거인이 폴리페모스까지 환상의 세계가 멋진 그림으로 그려져 있다.

 

 

 

 

대니얼 디포의 [로빈스 크로스]의 배경이 되는 무인도도 아주 멋지게 그려져 있다. 그림에는 단순히 지명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소설에서 로빈스 크로스가 겪었을 외로움과 절망, 배고품, 죽음에 대한 공포까지도 아주 디테일하게 보여주고 있다.

 

 

 

비록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가장 관심을 끈 지도는 프레더릭 더글러스가 쓴 [미국 노예, 프레더릭 더글러스의 삶에 관한 이야기]라는 책의 배경이 되는 지도이다. 저자는 어린 시절부터 노예로 이곳저곳을 팔려 다녔고 자신의 경험을 기록한 책을 쓰게 되었다. 지도에는 그가 태어났던 곳과 그가 팔려 다녔던 곳, 그리고 그가 노예해방 운동을 했던 곳들이 기록되어 있다. 지도를 통해 그의 일생이 보이는 것이다.

 

허먼 멜빌의 [모비딕]도 매우 인상 깊게 읽은 책 중의 하나이다. 그리고 이 책에는 소설의 주 무대가 되는 피쿼드 호의 구조가 아주 잘 그려져 있다. 또한 피쿼드 호가 쫓는 모비딕이란 고래의 이미지도 그려져 있다.

 

 

 

마지막으로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의 여행]의 배경이 되는 미시시피강의 지도가 그려져 있다. 어린 시절부터 좋아했던 책이고, 만화나 영화로도 자주 접했던 원작 소설이다. 이 소설에서 미시시피강은 단순히 소설의 배경이 되는 것뿐만 아니라, 소설의 배경이 되는 남북전쟁 전의 남부의 상황을 표현해 내는 이미지이다. 이 책의 저자도 이 부분을 언급한다.

 

"소설 속 비유와 인물이 대단히 유기적으로 상호작용하는 까닭에 가끔은 미시시피강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을 깜박 잊을 정도다. 강은 늘 변화하지만 항상 그 자리에 있고, 항상 스스로 갈등을 빚고 있다. 하지만 마크 트웨인의 강(강을 다니는 배에서 도선사로 일한 적이 있기에 미시시피는 정말로 그 강이었다)은 옛날 옛적부터 전해져온 상징이 아니라 뭔가 미국적인 것에 가깝다." (P 73)

 

이 책에서는 내가 아직 읽지 않는 소설들에 대한 지도가 더 많이 등장하지만, 지도를 보면서 읽지 않은 소설들도 더욱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나 역시 소설을 읽으며 내가 읽은 소설을 하나의 이미지나 지도로 그려 보면 어떻까 하는 마음까지도 들 정도로 소설의 세계를 매력적으로 그린 지도로 가득 찬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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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꾸었다고 말했다 - 2018년 제42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손홍규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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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식가는 아니지만 가끔은 맛을 음미해가면서 먹을 만큼 가치가 있는 음식을 만나기도 한다. 그런 음식은 바로 한 입에 털어 넣지 않고, 한 입 한 입 먹으며 맛을 음미한다. 소설도 그런 소설이 있다. 한 번에 읽기 아까운 소설, 그래서 조금씩 읽으며 맛을 음미하는 소설이 있다. 내게는 매년 출간되는 [이상문학상 작품집]이 그렇다. 예전에는 많은 단편소설을 읽었지만, 최근에는 몇 권의 수상 작품집을 읽는 것이 전부이다. 그중 매해 빠지지 않고 구입해서 읽는 책이 바로 [이상문학상 작품집]이다. 아직 올해 수상작은 구입하지 못했고, 먼저 작년에 읽은 단편소설들을 리뷰로 정리해 보았다. 개인적으로 매년 수상한 소설들에 호불호가 갈릴 때가 있다. 어떤 해에는 수상한 작품들이 너무 좋아서 한 편 한 편 음미해서 읽을 때가 있고, 어떤 해에는 내게는 별 감흥이 없는 느낌으로 다가올 때가 있다. 그런데 작년 이상문학상 대상과 우수상 작품집들은 한결같이 읽으면서 무척 몰입해서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읽고 나서도 그 여운이 계속해서 남아 있는 소설들이 많았다.

 

 

우선 대상 수상작은 손홍규 작가의 [꿈을 꾸었따고 말했다]이다. 손홍규 작가는 소설보다는 산문으로 익숙하다. 그의 산문집인 [다정한 편견]과 [마음이 다쳐서 돌아가는 저녁]이라는 책을 매우 인상 깊게 읽었었다. 실력 있는 단편소설 작가들의 특징은 인간의 내면의 감정의 변화를 매우 세밀하게 묘사하는 데 있다. 그런데 손홍규 작가는 단순히 인간의 감정뿐만 아니라, 그 감정의 형성을 둘러싸고 있는 인생이라는 부분을 아주 세밀하게 묘사한다. 한 사람이 느끼는 내면의 깊은 감정과 그 감정을 형성하게 한 그 주변의 인생을이라는 것을 너무나 세밀하게 묘사한다. 적당한 표현을 찾지 못해 세밀한 묘사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지만, 세밀하다가는 말로만 표현할 수 없는 독특한 시각으로 인생을 묘사한다. 그런 인생에 대해 묘사가 가장 뛰어난 작품이 이번 수상작인 [꿈을 꾸었다고 말했다]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소설은 어느 도시의 골목집의 선술집에 장례식의 상주인 듯한 젊은 청년들이 들어오면서 시작된다. 술집에는 인생의 거친 풍파를 다 겪은 듯한 사람들이 모여있다. 거친 그들이지만 이 젊은이에게만은 따스한 연민을 보낸다. 소설은 한동안 이 젊은이에게 초점을 맞추다가, 그 젊은이가 술집을 나간 후 그 술집에 있었던 한 중년 남자에게 초점을 맞춘다. 인생의 모진 풍파를 거친 그는 이제는 죽음을 앞두고 있다. 아내는 그를 외면하고 아들은 그를 떠났다. 중년 남자의 모진 삶에 초점을 맞추던 소설은 다시 남자의 아내에게 초점을 맞춘다. 그녀의 삶 역시 남편 못지않게 거칠다. 그렇게 소설은 초점을 이동해 가며 인생에서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렇게 잃어버린 인생을 개인의 실수로 보기보다는 어떤 불가항력적인 힘에 끌려다니다 보니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된 것으로 묘사한다.

 

 

"청년은 감정 표현이 서툴렀고 지금도 여전히 서투른 그와 비슷해 보였다. 그는 물 컵을 만지작거렸다. 이 물 컵조차도 순수한 강철은 아니었다. 니켈과 크롬이 포함된 합금이었다. 그의 감정도 언제나 합금이었다. 순수한 감정은 존재하지 않았고 그럴 수도 없었다. 그는 살아야 했고 어떤 감정이 엄습하면 그것에 사로잡히지 않기 위해 전혀 다른 감정을 쥐어짜낸 뒤 엄습하는 감정을 방어했다. 그런 과정에서 감정들은 뒤엉켜 하나가 되어 동시에 전혀 다른 무엇이 되었고 이렇게 합금처럼 태어난 감정들을 뭐라 불러야 할지 알 수 없었으나 아마도 그것을 가리키는 가장 적절한 말은 괴물일 거시며 이런 방식으로 그는 서서히 괴물이 되어갔다. 그에게도 꿈이 있었다. 그리고 남들처럼 꿈을 꾸지 않으려고 애쓰는 순간이 왔다.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던 시절을 지나니 어느 순간 꿈을 포기하기 위해 애쓰게 되어버렸다." (P 69)

 

 

이상문학상 작품집에는 항상 수상 작가의 작품 세계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대표 작품들이 함께 실린다. 대부분 자전적 소설이 많은데, 이번 소설은 자전적 소설이라기보다는 작가가 그리려는 인생을 가장 잘 묘사한 소설이다. [정읍에서 울다]라는 소설은 나이 들어 치매에 걸린 아내를 돌보는 한 노인의 이야기이다. 주인공은 그럭저럭 시골에서 노년을 보내며 억척스러웠지만 지금은 치매에 걸린 아내를 돌보고 있다. 그렇다고 그 돌봄이 애잔하거나 절절한 것은 아니다. 그는 젊었을 때 이루지 못한 사랑을 그리워하고, 억척스러운 아내와 살아온 삶을 대면하게 바라본다. 그럼에도 소설의 마지막 부분은 애잔하다. 인생에서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추억은 순자라는 한 여자와의 추억이 아니었다. 그의 유년 시절과 소년 시절이 혹은 그가 잃어버린 열망과 꿈이 담긴 과거 전체였으며 그가 결코 되돌아갈 수 없고 재현할 수 없는 인생의 어느 시기였다. 그가 아름다웠던 시절, 그가 선량했던 시절, 타락이 무엇인지 몰랐던 시절. 그래서 순자와 헤어질 때면 자신의 과거가 등을 돌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고 이 결별이 타인에 의해 강제로 이루어진 듯한 억울함을 느꼈다. 그의 가슴속 깊은 곳에 정말 영혼이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아내에 대한 원망이 있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그가 아내와 결혼하여 일가의 가장으로 삶을 꾸리게 된 순간부터 그가 꿈꾸었던 모든 것들과 이별해야 했고 그토록 비장하게 그가 바라던 세계에서 떨어져 왔음에도 결국 초라한 늙은이밖에 되지 못했다는 서러움만은 확실히 그의 감정 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P 123)

 

 

우수상 작품 구병모 작가의 소설인 [한 아이에게 온 마을]이란 소설도 매우 인상 깊게 읽었다. 소설은 뜻하지 않게 남편의 시골학교 발령으로 시골로 내려 간 한 여인의 삶에 초점을 맞춘다. 언뜻 시골이라면 따스한 인심이 생각나지만, 그런 따스하다는 말로 포장된 채 자신을 감시하고 타인의 생각으로 자신을 재단하려는 시선들에 대해 예리하게 표현하고 있다.

 

 

"산후조리원이 뭐 하는 곳인지는 알지만 그걸 선금 걸고 예약까지 한다는데에 노인들은 혀를 내둘렀다. 개중에는 가뜩이나 계집들이 애를 안 낳아 나라가 망한다는데 실상은 조리원에 줄까지 서야 들어갈 수 있다니 당최 누구 말이 맞느냐고 되묻는 이도 있었다. 거기에 더하여 옛날에는 여자들이 일하다 밭고랑에 주저앉아 낫으로 탯줄을 끊었다니, 집에서 돌보는 게 당연한 것을 무슨 애 낳는 데 호텔씩이나 잡아 들어가느냐 든지, 한 사나흘 자리보전하며 미역국 먹고 나면 으레 다시 밭일하러 애를 업고 나오는 법이라는 19세기 레퍼토리가 한 치도 기대에 어긋나지 않고 돌림노래처럼 흘러나왔으며, 남편이 피땀 흘려 벌어다 준 돈을 장사치들 아가리에 쏟아부어 되겠느냐는 대목에서 정주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먼저 가방을 챙기거나 겉옷을 꿰는 등 부산을 떨면서 이제 정말 시간이 없으니 나가 보아야겠는데요, 했다. 그러면 방문객들은 암만 봐도 집에서 살림 돌보는 게 전부인 여자가 어째서 시계를 수시로 들여다보며 종종거리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앉은 자리를 털었다." (P 176-7)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들었던 우수상 수상작품은 방현희 작가의 [내 마지막 공랭식 포르쉐]였다. 마치 손홍규 작가의 젊은 버전을 보는 듯한 시각으로 인생을 어두운 면을 바라보고 있다. 사용하는 언어와 묘사는 조금 더 세련되어 있지만, 인생을 보는 작가의 시선은 더 날카롭다. 성공한 친구의 뒤치다꺼리를 하던 주인공이 친구의 죽음과 함께 그가 몰던 클래식은 포르쉐를 얻는다. 그리고 그 포르쉐에 빠져 그것을 수리하면서 자신의 인생을 회피한다. 이 과정에서 포르쉐를 수리하는 과정을 그의 인생과 오버랩시키는 작가의 묘사력이 뛰어나다.

 

 

"친구 녀석은 비바람이 몰아치는 고속도로를 달렸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고속도로만이 들려줄 수 있는 소리를 들으며 달렸을 것이다. 어쩌면 그런 도로에서 미끄러질 때만 들을 수 있는 소리가 있는지도 모른다. 미친 녀석을 받아주는 공간은 작은 차체 하나 만큼 일 뿐인 게다. 그 차체 하나로 뚫고 가는 외길 만 큼이었을 테다. 친구는 그 작은 차체로 뚫고 가는 길에서 들을 수 있는 모든 소리를 들으려 했던 것뿐인지도 모른다. 미친다는 건 그런 거니까. 고장 나는 곳이 또 고장이 나면 그 차는 버려야 하는 것이지. 그러나 녀석은 고장 난 곳이 매번 다시 고장 난다는 것을 모르는 척했지. 미친다는 건 그렇게 남김없이 탕진하는 것이니까. 그는 토크 렌치의 눈금을 정밀하게 맞춰 브레이크 호스를 조였다. 그 역시 두 사람의 뒤를 따를지 모른다. 그러나 지금 그만둘 수는 없다. 누추한 공업사를 벗어나는 길은 소리를 타고 이동하는 길뿐이니까" (P 224-5)

 

 

단편소설은 장편소설에는 느낄 수 없는 단편소설만의 맛이 있다. 조금 더 작은 공간에 많은 것을 세밀하게 밀어 넣은 미니어처 같은 느낌이다. 특히 이상문학상 작품집은 아주 정교하고 세련된 미니어처들만 모아 놓은 느낌이다. 2019년 이상문학상 작품집이 기대가 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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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 아워스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마이클 커닝햄 지음, 정명진 옮김 / 비채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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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인생에 있어서 가장 무서운 것은 무엇일까? 바로 '시간'이 아닐까? 요즘 거울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해 본다. 내 나이 또래에 비해서는 흰머리가 나지 않는다고 자부하고 있었는데, 지난해부터 머리 옆에 하나 둘씩 새치가 생기더니 이제는 어느덧 곳곳에 흰머리가 보이기 시작하고 있다. 그리고 나이가 든다는 중압감이 밀려온다. 이렇게 이룬 것 없이 시간이 흐른다는 생각이 나를 무기력하게 누른다. 내 몸에서 젊음이 빠져나가고 있다는 생각이 주는 우울감과 함께. 그럼에도 시간이 주는 그 무기력감이나 우울감과 계속 싸워야 한다는 것을 안다. 그것이 나의 운명이며 모든 인간의 운명일 것이다. 그리고 그 무기력감과 우울감에 육체와 정신이 잠식되면서 서서히 죽어가는 것이 또한 인간이 운명일 것이다. 그래도 살아있는 동안은 싸워야 할 것이다. 삶의 의지가 몸에서 빠져나가지 않도록. 그

마이클 커닝햄의 소설 [디 아워스]는 바로 시간이 주는 무기력감과 싸우는 세 여인의 이야기이다. 이 소설은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댈러웨이 부인]과 [세월]에서 모티브를 가져왔다고 한다. 마이클 커닝햄은 이 책으로 퓰리처상을 수상하고, 또 원작이 영화화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이 책은 결코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니다. 이 책은 각각 다른 시대와 다른 장소를 살았던 세 명의 여인의 하루의 삶을 묘사한다. 그런데 그 하루의 삶의 외적으로 일어나는 일에 비중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세 명의 여인의 의식의 흐름에 초점을 두고 있다. 그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면서 읽는 과정이 결코 쉽지는 않다. 그럼에도 그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그녀들이 싸우는 치열한 삶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 책은 버지니아 울프의 자살 장면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각각 다른 시대와 다른 장소에 살았던 세 명의 여인의 하루의 삶을 교차적으로 반복해서 나열한다. 1923년의 런던 교외의 버지니아 울프의 하루와 1949년 로스앤젤레스에서 살았던 로라 브라운 부인의 하루의 삶과 1990년대 뉴욕에서 살고 있는 댈레웨이 부인으로 불리는 클러리서라는 여인의 하루의 삶을 나열한다.

소설의 등장인물은 시대와 장소도 다르고, 전혀 공통점도 없어 보인다. 물론 세 명 모두 댈레웨이 부인이라는 소설의 주인공과 연관성이 있기는 하다. 버지니아 울프는 댈레웨이 부인이라는 소설을 쓰고 있었고, 로라 브라운은 댈레웨이라는 소설을 읽고 있었고, 클리리서는 자신의 남자 친구인 리처드에게 댈레웨이 부인이라는 애칭으로 불린다. 그러나 소설을 읽다 보면 세 명의 여인을 관통하는 뚜렷한 주제가 드러난다. 그것은 바로 '시간'이다. 그리고 시간이 주는 무기력함이다. 이들 세 명의 여자들은 다른 사람들이 보면 성공과 행복을 모두 가진 것 같지만, 모두 시간이 주는 무기력함과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중이다.

버지니아 울프는 소설을 쓰면서 계속해서 찾아오는 두통과 무기력과 싸우고 있는 중이다.

"그녀는 항상 병이 재발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이겨내며 작업한다. 먼저 두통이 찾아오는데, 어느 모로 보나 일반적인 고통이 아니다. 두통은 그녀에게 스며든다. 단순히 괴롭히는 게 아니라 숙주에 있는 바이러스처럼 그녀 안에 존재한다. 고통의 요소들은 그녀의 눈에 광휘의 파편을 끈질기게 던지며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은 이를 보지 못한다고 스스로에게 말해야 한다. 고통은 버지니아라는 존재를 점점 더 고통 자체로 바꿔 버리면서 그녀를 집어삼킨다. 그 진행과정이 너무 강렬하고 그 변덕스러움은 너무 선명해서, 그녀는 고통 자체가 하나의 생명을 가진 어떤 물체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래너드와 함게 광장을 이잘 때면 그녀는 조약돌 위로 반짝이는 그 은빛 덩어리를, 여기저기 아무렇게나 찌르며 해파리처럼 흐느적거리면서도 완전한 하나의 덩어리로 남는 고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P 111-2)

로라 브라운 부인은 남편의 생일날 자신을 잠식하는 무기력과 힘겹게 싸우고 있다.

"그런데 그녀는 뭘 더 바라는가? 자신의 선물이 거절당하고 자신의 케이크가 비웃음 받기를 원하는가? 물론 그렇지 않다. 그녀는 사랑받기를 원한다. 아이에게 조용히 글을 읽어주는 좋은 엄마가 되기를 바라고, 완벽한 식탁을 준비하는 아내가 되고 싶다. 이상한 여자는 절대로 되고 싶지 않다. 변덕과 분노가 가득하고, 외로움을 타고 뾰로통하며, 참아줄 수는 있지만 사랑스럽지 않은, 여민의 정을 불러일으키는 여자이고 싶지 않다. 버지니아 울프는 코트 주머니에 돌덩이를 집어넣고 강으로 걸어 들어가 물에 빠져 죽었다. 로라는 절대로 자신이 우울해지도록 놔두지 않을 것이다. 침대를 정돈하고 진공청소기를 돌릴 것이며 저녁에 생일상도 차릴 것이다. 그 외에는 다른 어떤 일도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P 153-4)

마지막으로 댈리웨어 부인으로 불리는 클리리서 역시 마찬가지이다. 개인적으로는 세 명의 여인 중에서 클리러서의 의식이 가장 분명하고 세밀하게 드러나고 있다. 뉴욕의 거리를 걷고, 남자 친구인 리처드의 파티를 준비하고, 여러 사람을 만나면서 그녀의 세밀하면서도 내밀한 의식이 계속해서 드러난다. 마치 봄날에 녹아가고 있는 살얼음판을 걷고 있는 듯한 긴장감이 계속해서 드러난다. 특히 그녀가 싸우는 시간의 무기력은 연인인 리처드와의 관계에서 더 극명하게 드러난다. 에이즈에 걸려 죽어가고 있는 소설가인 리처드를 무기력에서 건져 내려 애를 쓰는 그녀 역시 계속되는 무기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을 친다.

그러나 이 세 명의 여인들의 싸움의 결과는 어차피 결정이 되어 있는 싸움이었다. 소설의 초반 버지니아 울프가 자살하는 장면에서 작가는 이미 이들 세 명의 여인의 싸움이 패배할 것임을 확정하고 있다. 소설의 마지막에서는 클리러서의 애인 리처드가 자살하면서 한 말이 모든 것을 말해준다.

"내가 이 일을 견딜 수 있을지 모르겠어. 당신도 알잖아. 파티와 시상식, 그리고 그게 끝나면 이런저런 시간, 그ㄹ게 끝나면 또 이런저런 시간."

"파티에 안 가도 돼. 시상식에도. 당신은 안 해도 된다고."

"그래도 그 시간들을 남아 있어. 그렇지 않아? 하나의 시간, 그리고 나면 또 그런 시간, 그 시간들을 당신이 다 견뎌낸다고 해도 또 그런 시간이 있어. 세상에, 또 그런 시간이라니. 지긋지긋해."

"당신은 지금도 좋은 날을 보내고 있어. 당신도 알잖아."

"별로. 그래도 그렇게 말해주다니, 당신은 참 착해. 그런데 요새 가끔씩 거대한 꽃의 꽃잎들이 나를 옥죄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괴상한 비유인가? 아무튼 그래. 식물의 숙명 같은 거랄까. 파리지옥을 생각해봐. 숲을 숨 막히게 만드는 칡을 생각해보라고. 축축한 녹색이 어디로 번성해 가는 과정이지. 어딘지는 당신도 알잖아. 녹색의 침묵,. 웃기지 않아? 지금 이 순에도 '죽음'이라는 단어가 말하기가 이렇게 어렵다니." (P 292-3)

버지니아 울프도 리처드도 죽어가면서 '실패했다!'라고 말을 한다. 그들이 말하는 실패란 인생의 실패가 아닐 것이다. 그들처럼 치열하게 삶을 산 사람도 없으니까. 그들이 말하는 실패는 바로 시간이 주는 무기력함과 싸움에서의 실패일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이 싸움에서의 실패는 그들에게 있어서는 시간의 문제이지, 결국에는 정해져 있는 숙명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소설 전반에 흐르는 실패와 연결된 죽음의 이미지, 그리고 그 죽음과 맛 서려는 인물들의 의식의 흐름,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시간에 대한 묘사가 뛰어난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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