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어 라이프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3
앨리스 먼로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캐나다 출신의 노벨문학상 작가인 앨리스 먼로의 새 신작이 문학동네 세계문학 시리즈로 출간되었다. 제목이 [거지 소녀]이다. 국내 출판사의 세계문학 시리즈를 꾸준히 구입해서 읽다 보니 이 책도 구입하게 되었다. 그런데 읽으려 하니 무언가가 꺼림직했다. 책장 한구석에 오래전에 구입했던 앨리스 먼로의 대표작인 [디어 라이프]가 읽지 않은 채로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결국 새 책을 펼쳐 보고 싶은 욕구를 묻어두고 [디어 라이프]를 끄집어 냈다. 그리고 앨리스 먼로의 창조한 그녀만의 단편의 세계로 들어가게 되었다.

 

소설의 가장 큰 매력은 소설을 읽은 사람을 그 소설만이 창조한 독특한 세계로 인도하는 것에 있다. 마치 3D 입체 영화를 보듯, 소설을 펼치면 새로운 공간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된다. 물론 모든 소설이 그런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렇게 읽는 독자를 새로운 세계로 빨아들이는 소설이 훌륭한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때로는 작가가 창조한 판타지 속 세계일 수도 있고, 작가가 경험한 과거의 세상일 수가 있다. 엘리스 먼로의 소설을 읽는다면 지금 내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를 확실히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엘리스 먼로의 소설을 펼치는 순간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세상으로 들어가게 된다. 광활한 캐나다의 기차여행, 맹렬한 눈보라가 몰아치는 캐나다의 벌판, 보수적인 종교적 색채가 강한 캐나다의 도시들, 전쟁이 막 끝나 모든 것이 뒤숭숭한 1950년대, 그리고 그런 세상에서 사랑하고 상처받는 여인들, 이것이 바로 엘리스 먼로가 만들어 내고 독자를 끌어들이는 이 소설의 세계들이다.

 

첫 소설 [일본에 가 닿기를]이란 소설은 기차 여행을 주 배경이다. 소설은 그레타라는 여성이 남편 피터의 배웅을 받으며 어린 딸 케이티와 함께 기차 여행을 하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소설의 시간은 그레타가 기차를 타고 밴쿠버에서 토론토로 이동하는 며칠의 시간이다. (지도에서 찾아보니 밴쿠버는 캐나다의 서쪽 끝에 있고, 토론토는 동쪽 끝에 있었다) 그 시간 동안 그녀는 피터에 대해서 생각하고, 또 그녀가 마음을 두고 있는 다른 남자를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다가 기차에서 만난 연극을 하는 그레그라는 남성을 일탈을 한다. (그녀의 소설에서는 가끔 연극을 하는 남성이 등장한다. 연극이란 그녀의 소설에서 평범한 삶에서의 일탈을 통로와 같은 소재이다.) 이 소설에서 기차 여행의 과정을 통해 작가는 주인공 그레타의 불안한 내면을 표현한다.

 

"그 순간 새로운 공포심이 일었다. 만약 케이티가 객차 끝까지 이쪽 저쪽 돌아다니다가 어찌어찌 문을 여는 데 성공했다면, 혹은 누군가가 문을 열었을 때 따라 나갔다면, 객차들 사이에는 다른 객차로 넘어갈 수 있는, 각 객차들을 연결하는 짧은 통로가 있었다. 그곳에서 서면 기차의 움직임이 갑작스럽고 무섭게 느껴졌다. 그 뒤에도 무거운 문이, 앞에도 무거운 문이 있었고, 통로 양쪽에는 덜컹거리는 금속판들이 있어다. 그 금속판들이 기차가 정차ㄹ할 때 내려지는 계단을 가려주었다. 사람들은 그곳을 통과할 때 늘 걸음을 서둘렀다. 덜컹대는 소리와 흔들림은, 결국 세상 모든 것이 그리 필연적인 방식으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금 일깨워주었다. 사람들은 무심한 듯, 하지만 다급하게 덜컹대는 소리와 흔들림을 통과한다." P 35

 

나 역시 오래전에 기차의 연결칸들을 통과할 때며 이런 비슷한 감정을 느꼈던 것 같다. 작가는 객차의 연결칸의 혼란스러운 공포를 지금 그레타의 심리와 너무나도 절묘하게 연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문센]이란 소설에서는 전쟁이 끝나가는 1940년대 후반의 춥고 황량한 캐나다 시골마을 너무 잘 묘사하고 있다. 이 소설 역시 시골 마을의 교사로 부임한 젊은 여생이 기차 플랫폼에 내리면서 시작이 된다. 그녀가 맞닥뜨리는 춥고 황량한 시골마을과 그녀의 인생이 묘사된다.

 

"남자들은 모두 숲속 제재소에서 내렸고 - 걸어서 십 분도 걸리지 않을 것 같았다 - 잠시 뒤 눈 덮인 호수가 시야에 들어왔다. 길고 하얀 목조건물이 그 앞에 서 있었다. 여자가 포장된 고기 꾸러미를 챙겨 일어셨고, 나를 따라 일어섰다. 기관사가 다시 '샌'하고 외쳤고, 문들이 열렸다. 여자 둘이 전차에 타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이 고리를 든 여자에게 인사를 건네자 여자도 날이 아주 춥다고 대답했다." P 46

 

[자갈]이란 소설은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게 읽었던 책이었다. 대부분 단편소설은 읽는 속도가 느리다. 그 이유는 소설을 읽는 시간이 긴 것이 아니라, 한편의 소설을 읽으면 그 소설이 주는 기분에 빠져 다음 소설로 넘어가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자갈]이란 소설이 그랬다. 다른 소설들은 비교적 빨리 읽었지만, 이 소설을 읽은 후에는 엘리스 먼로의 다른 소설들을 읽기가 쉽지가 않았다. 평범한 타운의 가정의 어머니는 연극을 하는 젊은 '닐'이라는 남성을 선택하고, 어린 주인공과 언니는 엄마를 따라 닐이 거주하는 마을 외곽의 트레일러에서 함께 머문다. 어머니는 자유를 선택했지만, 딸들은 모든 것이 혼란스럽다. 소설은 어린 주인공의 시각에서 이런 혼란스러움을 잘 표현한다. 결국 언니인 카로는 이런 혼란스러움과 어머니에 대한 관심을 요구하기 위해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되고, 주인공은 이것을 평생 짐으로 짊어지게 된다.

 

"어머에게 그 시절을 떠올려보라는 말은 차마 할 수 없다. 나는 그 문제로 굳이 어머니를 괴롭히지 않는다. 어머니가 차를 몰고 우리가 살던 그 시골길에 다녀온 것을 알고 있다. 그곳은 많이 변해서 농사가 신통치 않던 땅에 지금은 유행하는 집들이 들어섰다고 했다. 어머니는 그 집들을 보며 느낀 경멸의 감정을 얼마간 드러내며 그런 말을 꺼냈다. 나도 그 길에 가보았지만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요즘에는 가족 안에 일어난 무서운 사건을 애써 지워버리는 건 잘못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제 자갈 채석장이 있던 자리에도 집이 지어졌고, 그 아래 땅은 반반하게 다져졌다." P 139

 

[기차]라는 소설은 남성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몇 편 안되는 엘리스 먼로의 소설 중의 하나이다. 엘리스 먼로의 소설은 대부분 여성의 긴 인생에서의 짧게 지나가는 사랑과 그 사랑의 여운이 어떻게 인생에 묻어 있는지를 다루고 있다. 남성이 주인공인 이 소설도 크게 다르지 않는다. 소설은 한 남성이 기차에서 뛰어내리면서 시작된다. 그리고 우연히 기찻길 옆의 한 여성이 사는 농장에 머무르게 된다. 여성과 사랑에 빠지지만 그 여성이 암이 걸린다. (나이 든 여성과 젊은 남성의 연애, 그리고 여성이 병이 들고 남성이 여성을 돌보는 구조는 앞의 [메이벌리를 떠나며]라는 소설과 비슷한 구조이고, 엘리스 먼로의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구조이다) 여성을 돌보던 남자는 또 홀연히 떠나고, 소설 말미에서 이 남성이 이렇게 여성을 떠나는 이유를 언급된다.

 

이 책의 뒷부분의 소설은 대부분 엘리스 먼로의 자전적인 소설이다. 이 소설들을 읽다 보면 앞의 소설들에서 등장하는 시골마을과 언니의 죽음, 병든 여인, 그리고 재혼 등의 모티브들이 모두 그녀의 삶에서 가져왔음을 알게 된다. [시선], [밤], [목소리들], [디어라이프] 등을 읽으며 마치 그녀의 인생의 단편을 사진을 보듯이 보게 된다.

 

엘리스 먼로의 소설은 대부분 긴 인생과 그 인생에서 짧은 사랑, 그리고 그 사랑이 인생에 주는 영향력에 대해 이야기한다. 때로는 그 사랑의 영향이 인생에서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때로는 전부인 것처럼 이야기한다. 그러기에 소설을 읽으면 조금은 나른한 기분이 들 때다 있다. 마치 소설 한 편을 다 읽고 인생을 다 산 느낌과 비슷한 허무함이 들 때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소설의 이미지가 오랫동안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그것이 엘리스 먼로의 소설이 가진 힘일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