헐거워짐에 대하여

- 박 상 천-


맞는다는 것은
단순히 폭과 길이가
같다는 걸 말하는 게 아닌가 봅니다.

오늘 아침,
내 발 사이즈에 맞는
250미리 새 구두를 신었는데
하루종일
발이 그렇게 불편할 수 없어요, 맞지 않아요.

맞는다는 것은 사이즈가 같음을 말하는 게 아닌가 봅니다.
어제까지 신었던 신발은 조금도 불편하지 않았어요.
맞는다는 것은 어쩌면
조금 헐거워지는 것인지 모릅니다.
서로 조금 헐거워지는 것,
서로가 서로에게 편안해지는 것,
서로가 서로에게 잘 맞는 게지요.

이제, 나도 헐거워지고 싶어요
헌 신발처럼 낡음의 평화를 갖고 싶어요.
발을 구부리면 함께 구부러지는
헐거운 신발이 되고 싶어요.

===============================================================

생떽쥐베리의 <어린왕자>에서 여우가 말했던가요? 우리는 서로에게 길들여지는 것이다라고.

낡음, 오래됨 같은 단어에서는 왠지 포근함과 아늑함이 느껴집니다. 아마도 그 오랜 세월을 통해 서로에게 편하게 길들여진것 같아요. 낡은 신발속의 발처럼 말이죠.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조금은 헐거워서 편안한 그런 사람이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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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4-07-29 1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옷도 구두도 낙낙한 것이 좋아요.
사람도 좀 어리숙해서 편한 사랑이 좋고요.
내 몸에 발에 딱 맞았다가 세월이 흐르면서 낡아지고 헐거워진 것들이 좋아요.
시 잘 읽고 갑니다.

호밀밭 2004-07-29 2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두가 잘 길들여져서 발이 편안해지면 안심이 되어요. 그리고 나이가 들수록 발 치수보다 하나 정도 큰 것을 사게도 되더라고요. 헐거운 게 좋아서요. 사람도, 인생도 너무 꼭 끼면 숨이 막히기는 할 거예요. 저도 저에게 편안한 사람이고 싶네요.

잉크냄새 2004-07-30 0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포근함, 아늑함... 왠지 낡은 냄새가 나면서도 단어 자체에서 뿜어져나오는 그 따스한 온기를 느낄수 있어요. 나이가 든다는 것은 어쩌면 삶에서 조금은 헐거워질수 있는 여유를 지니게 되는 과정인지도 모르겠네요.

水巖 2004-07-30 0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맞는 말씀이군요. 우리는 얼마나 빡빡한 세상을 살고 있었는지 되돌아보면 아무것도 아닌것을 말이죠.
 

상주들의 읍에 묻혀 향을 피우고 절을 하고 뒤돌아선다. 돌아가신 분이 어느 시절부터인가 준비하셨을 홀로 덩그러니 놓여있는 영정, 영혼처럼 피어오르는 향, 지인들이 보냈을 이름이 적힌 화환, 삼베를 두른 상주들의 모습. 상가집의 풍경은 어디나 비슷하다고 본다. 상가집이란 말보다는 장례식장이란 말이 더 어울릴것 같다. 이제는 집보다는 보통 병원이나 일반 장례식장에서 더 많은 상이 치루어진다.

처음 상가집에 간것은 고등학교때이다. 야간 자율학습을 빼고 담임선생님과 함께 간 친구 어머님의 상가집이다. 그 당시의 기억은 가물가물하지만 선생님이 가는 도중 내내 말씀하신 죽음이라든지 허무함이라든지 하는 말들이 가슴에 와닿지 않은것 같다. 그저 친구가 당한 슬픔에 대한 막연한 연민과 측은지심이랄까 현실의 나와는 무관한 별세계의 일처럼 느껴지곤 했다.

나이가 들면서 찾아가는 상가집은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업무를 마치고 멀리 떨어진 상가집으로 차를 몰고 가면서 덜컥 겁이 나는 때가 있다. 서둘러 고향집에 전화를 걸어 부모님의 안부를 묻고 실없는 놈이라는 꾸지람에도 괜시리 눈물 한방울 찔끔하며 이렇게 살아계심에 감사하며 미소짓는다. <검은양복>이란 단편드라마가 생각난다. 가난한 살림에 마지막으로 어머님의 상에 입을 검은 양복을 준비하는 맏형의 이야기를 보면서 막연한 슬픔에 사로잡혔었다. 남의 일이 아닌 내 일이 될수도 있다는 불안감, 솔직한 심정이다.

영정에 절을 하고 물러나 자리잡고 있으면 오랜 세월 만나지 못한 많은 이들을 만나게 된다. 초저녁부터 도착하기 시작한 친구들이 한밤중이면 어디서 소식을 들었는지 모두 한곳에 모인다. 우리가 슬픔에 대하여 나누는 대화는 적다. 그냥 쳐다보며 편안히 돌아가셨는지를 묻고 어깨 한번 쓰다듬어 주는 것으로 슬픔의 표현을 대신하는것 같다. 보통 누가 장가를 갔다든지, 아이를 낳았다든지, 회사에서 승진했다든지, 사업을 한다든지, 때론 오래전 소식이 끊긴 친구의 최근 소식과 그 시절의 추억을 이야기하며 밤을 새운다.

새벽이 찾아오면 장지까지 따라갈 몇몇 친구를 제외하곤 다시 삶의 자리로 돌아간다. 오래된 명함을 바꾸고 무사히 돌아가라고 등 두드리며 다음에는 자주 만나자고 약속한다. 그러나 모두들 알고 있다. 우리가 다시 이렇게 모두 모이는 자리는 또 어느 친구의 상가집이 될 것임을 알고 있다. 그곳에서 또 살아온 일들을 이야기할 것이다.인생은 어차피 살아가는 문제이기에 삶이라는 한 단어로 표현할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상가집, 어쩌면 그곳은 죽음의 연민 대신 삶의 포근함이 자리잡은 곳인지도 모른다. 이 세상 떠나시는 분의 마지막 배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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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 2004-07-28 2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상가집에 다녀오셨나 봐요. 상가집에 가면 언제나 숙연한 분위기보다는 조금은 들뜬 분위기가 느껴져 놀랐던 생각이 나요. 들뜬 분위기라는 게 꼭 나쁘다는 생각은 안 해요. 실감이 안 나서일 수도 있고, 그냥 영화처럼 축제라는 개념으로 맞이하는 것일 수도 있으니까요. 상가집이 포근함이 자리잡은 곳이라는 말, 저도 동감해요. 포근하다는 말도 여러 가지 의미잖아요. 아기도 엄마의 뱃속에서 포근했을 테니까 죽은 이도 조금은 포근하게 저 세상으로 가도록 남은 사람들이 배려를 해야겠지요.

겨울 2004-07-28 2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살면서 한번 볼까말까한 친지들을 만나 반가운 눈인사를 나누는 곳이기도 해요. 아이적에 헤어졌다가 훌쩍 어른이 된 모습으로 나타난 그들을 보며 내가 먹은 나이를 헤아리기도 하고요. 생각해보면 죽음을 실감하기도 전이라 슬퍼할 겨를도 없고 몹시 앓다가 돌아가신 경우는 편히 가셨구나 싶어서요.

잉크냄새 2004-07-29 0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숙연한 분위기보다는 조금은 들뜬 분위기라는 표현이 맞는것 같아요. 젊어서 요절하거나 급작스런 죽음이 아닌 수명이 다하여 돌아가신 분들의 상가집은 더 그런것 같아요. 가슴속에야 서글픈 맘을 품고 있겠지만 겉으로는 좋은 곳으로 가시라고 하면서 내색을 잘 안하죠. 상주도 객들도 마찬가지인것 같아요.물론 그 모습뒤에 내재된 슬픔을 느끼지만요...

stella.K 2004-07-29 1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상갓집 아주 가끔씩 다니곤 하지만, 마냥 슬프지 않아서 다행이란 생각을 하곤 합니다. 오랫만에 그간 못 만난 사람을 만나는 건, 결혼식장에서 보는 것 보다 더 짙은 감동이 있더라구요. 왜 일까요? 그래. 우린 이렇게 살아서 서로 만나는구나. 하는 감동일지...
저도 오래전 아버지를 보내드렸지만, 그때 찾아 온 사람들이 참 반가웠어요.

ceylontea 2004-07-29 1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상가집...제가 처음 갔을때는 초등학교 6학년인가 5학년인가 했을때 같아요..(6학년이었을 것 같아요..)... 같은 반 친구 아버님이 돌아가셨지요... 지금은 사망원인이 무엇인지 기억이 나지 않네요..저희 부모님도 젊으셨을때라.. 부모가 돌아가신다는 것에 대해 상상조차 못하던 그때였죠... 지금은 그런 일이 있었다라는 기억정도만 남아있다고나 할까?
그리고.. 기억에 남은 것은 고등학교 2학년때인 것 같아요... 저랑 친한 친구 어머님이 돌아가셨지요. 중학교때도 같은 학교였고.. 그 중학교 3학년 내내 같은 반을 했고 고등학교도 같은 학교를 다닌 친구였지요... 그리고 친구네 집이 가까워서 가끔 놀러가 뵙기도 했었는데...
그리고 제가 직장인이 되고나서는 정말 상가집에 갈 일이 많이 생기더군요..
사람이 죽는다는 것이...호상이든 너무 어이 없는 죽음이든... 마음이 먹먹해지더군요.

잉크냄새 2004-07-30 0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 우린 이렇게 살아서 서로 만나는구나 하는 감동...
전 가끔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죽음의 순간에 직면했을때 과연 죽음을 또 다른 생의 연장선이라고 볼수 있을까 하는 생각. 니어링 부부의 책을 읽으면서 남편을 떠나보내는 헬렌의 담담한 모습이 왠지 근접할수 없는 모습으로 다가오더군요. 어떤 사고로 세상을 살면 삶과 사랑과 죽음을 연속선상에서 볼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미네르바 2004-08-12 15: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성경의 잠언에 보면 지혜있는 자는 상가집에 가라고 하더군요. 상가집에 가면 좀더 삶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게 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남은 생을 더 열심히 살아야 된다고 말하는 거겠지요.

잉크냄새 2004-08-12 1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죽음이 있는 곳에서 삶을 생각한다. 뭔가 모순인것 같으면서도 의미심장하네요. 원래 진리는 모순속에서 더 빛나는가 봅니다.
 

누구에게나 가슴속에 깊이 각인된 색깔이 있지 않을까 싶다. 그것이 좋은 추억이든 나쁜 추억이든 부지불식중에 가슴속에 자리한 색. 나에게는 분홍이 그런 색이다. 신호대기의 차 안에서 바라본 분홍의 옷을 통해 그 시절을 헤아려본다. 짝사랑의 추억이 묻어있는 색,  분홍이다.

1.분홍색 파카

고향집은 여중과 여고 앞이었다. 학교 등교길은 매일 수백명의 여학생을 정면으로 마주보고 가야하는 길이었다. 그 길을 택한다면 5분 정도의 거리였으나 내가 택한 길은 여학생들의 등교길을 피하여 빙 둘러서 가야하는 15분 정도의 길이었다.그 당시만 하더라도 쑥쓰러움을 많이 탔나보다. 고3의 이른 봄날, 등교 시간이 늦어 어쩔수 없이 5분 거리의 길을 가방을 둘러메고 뛰어가는데 분홍색이 눈에 확 들어왔다. 누굴까? 교복위에 분홍색의 파카를 입은 저 여학생이 누굴까? 그런 호기심으로 다음날부터 그 길을 걸어다녔다. 그리고 어느날 부터인가 분홍은 단순한 분홍이 아닌 빛을 뿜어내기 시작하는 선명한 분홍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2. 리차드 클레이더만과 똥개

친구들과 몰래 하교길의 뒤를 밟아 집을 알아내었다. 어차피 어리숙하기는 마찬가지인 몇몇 녀석과 머리를 맞대어 생각해낸 것이 TAPE 선물이었다. 그 당시에 리차드 클레이더만의 아드린느를 위한 발라드가 상당한 인기가 있었다. 리차드와 몇몇 사람들의 경음악을 녹음하여 나름대로 포장을 하였는데 문제는 전해주는 방식이었다. 최종 선택은 새벽에 대문앞에 몰래 갖다 놓는 것이었다. 내가 떨려서 못하겠다고 하니 친구 한 녀석이 나섰다. 의기양양하게 언덕을 올라가 대문앞에 다다른 녀석이 냅다 뛰기 시작한다. 똥개의 존재를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날 새벽 자전거 세대는 새벽길을 똥개에게 쫓겨 달아났다. TAPE 물어뜯으면 보신탕을 만들어 버린다고 다짐하며 달렸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TAPE는 무사했고 똥개 또한 보신탕의 운명을 면했다.

3. 성당의 종소리

언덕에 위치한 천주교는 그 당시만 하더라도 뱃길의 좌표로 이용될 정도로 눈에 띄는 건물이었다. 천주교 앞 언덕에서 보면 그 여학생의 집이 바로 보인다. 해가 지는 저녁이나 별이 총총한 밤에 가끔 올라 그리움의 눈으로 바라다 보곤 했다. 그러던 주말 어느 날, 언덕에 앉아있는데 말로 설명할수 없는 청아한 종소리가 들렸다. 성당의 종소리, 난 지금도 가장 아름다웠던 소리를 물으면 그때의 성당 종소리를 말한다. 그 종소리에 이끌려 성당을 한달 정도 다녔다. 지금도 고향에 가면 가끔 찾는 이곳은 성당의 종소리와 짝사랑했던 여학생의 모습으로 가끔 떠오른다.

4. 부치지 못한 편지

내 생애 최초의 연애편지이다. 그 당시는 알지도 못하는 조르주 무스타키의 방랑한 음성이 어쩌구 저쩌구 하는 그야말로 느끼함으로 포장한 유치찬란한 편지이다. 아마도 어디에서 인용했었는가 보다. 직접 전해주리라는 나의 오기로 그 편지는 지갑속에서 반년을 넘는 세월을 허리를 구부린채 지냈다. 우표와 함께 누군가에게 전해질 운명을 다하지 못한채 지금도 그때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사물함 속에서 잠자고 있다.

5. 그리고 피천득의 <인연>

우연찮게 만나게 된것은 대학교 1학년때였다. 아는 후배가 자리를 만든 것이었다. 만나고 돌아서 오는 길에 문득 떠오른 것이 피천득의 <인연>이다. [ 아사코를 세번 만났다. 세번째는 아니 만났으면 좋았을 것을...] 처음의 만남이었지만 가끔은 그냥 이대로의 추억으로 남아야 하는 것도 있는가보다 하는 생각을 하며 돌아섰다.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는 알지 못하지만, 만났다는 자체가 괜히 아쉬웠다. 차라리 만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을....

그래, 추억은 가끔  이루어지지 말아야 할 꿈 하나 간직하는 것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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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대 2004-07-26 14: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전에 저도 이런 비슷한 글을 썼고 잉크님이 댓글을 달아주셨죠.
그때 잉크님도 비슷한 사연이 있나보다 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추억을 감춰놓고 계셨군요^^
분홍이라... 저도 분홍색 참 좋아합니다. 분홍색 옷을 입은 여자를 보면 이뻐보이기도 하구요.

비로그인 2004-07-26 15: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빛바랜 흑백 영화 한 편 본 듯한 느낌입니다. ^^
다른 사람들에겐 스쳐지나가는 그저 그런 것도 내게만은 설렘으로 기억되는 것들이 있게 마련이죠.
그건 그렇고, 잉크 냄새 님이 쓰셨다는 그 최초의 연애 편지..살짝이 훔쳐 보고 싶은 맘, 간절하네요. ^^*

미네르바 2004-07-26 15: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누구나 가슴 속에 그런 추억 하나 품고 살고 있죠.
생각만으로도 왠지 풍요로워지는 푸근함, 설레임...
그러나 저도 그런 생각 들어요. <...세번째는 아니 만났으면 좋았을 것을...>같은...

그런데 George moustaki 음악은 정말 감미롭지요. 지금도 샹송가수 중에 제일 좋아해요.
특히 Le facteur(우편 배달부)를 좋아해요. Ma solitude(나의 고독)도 좋고...

잉크냄새 2004-07-27 09: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나고 나면 다 푸근하고 설레이는 추억으로 남는가 봅니다.
만나고 헤어지고... 결국 그런 인연의 산물이 인생이 아닌가도 싶고요...

ceylontea 2004-07-28 1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이런 드라마 같은 일은 잉크냄새님이 직접 겪으신 것이란 거죠??
너무 멋져요... 전... 고등학교때 다닐 때 친구들하고 우~~하고 몰려다닌 기억밖에는 없는데... 잉크냄새님은 참 낭만적이네요...
좋은 추억입니다..

icaru 2004-08-07 14: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은 분홍색 파캅니까? 저는 파랑색 남방인데..하하..
님 휴가 떠나신겁니까?
저 휴가다녀오니...님은 안뵈시고....

좋은 휴가 되셨으면 좋겠다고... 코멘트 하고가유~~
 

중학교 시절 유난히 울음이 많으신 여선생님이 계셨다. 도덕 선생님, 막 대학을 졸업하고 처음 발령을 받은 학교가 우리 중학교였다. 학생들의 짖궂은 장난에 눈물을 참 많이 흘리신 분이란 기억이 난다. 처음 매를 드신 날도 울었고 출입문에 올려논 세숫대의 물세례를 받았을때도 울었다. 수업 시간에 잠시 나가 눈물을 닦고 들어와 다시 울먹이는 목소리로 수업을 하던 기억이 난다.

그런 도덕 선생님에게 흑기사가 한명 있었다. 기술 선생님, 그 당시 노총각 선생님으로 솔직한 행동과 유머감각으로 학생들에게 꽤나 인기가 좋았다. 그 선생님의 T자를 이용한 종아리 치기 타법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뼈속까지 깊은 울림을 남기는 내공을 지니고 있었다. 문제는 도덕 시간에 발생한 문제까지 연관하여 매를 드시니 불만이 있을수밖에, 지금의 우리라면 그 아련한 심정 십분 헤아려 흔쾌히 맞아주겠지만 그때는 정말 싫었다.

흑기사의 체벌로 가장 악명이 높았던 것이 한겨울의 체벌이었다. 그 당시 중학교는 3층만 올라가도 바다가 훤히 내다보이는 곳이라 한겨울 바다바람이 엄청나게 몰아치는 곳이었다. 한겨울의 바다바람은 말로 설명하기 힘들 정도로 혹독한 바람이다. 살을 벤다는 표현도 부족하다. 

도덕 선생님이 울고간 어느 겨울날, 기술시간에 제도실 대신 옥상으로 집합했다. 그 혹독한 체벌이란 것이 눈 쌓인 옥상에서 팬티만 남기고 전부 벗은 후 양팔벌리기로 서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선생님이 물통을 들고 돌아다니면서 수업 내용 물어보고 얼굴이나 가슴에 물방울 튀기기였다. 이빨을 달그락거리며 부들부들 떠니 답인들 생각나겠는가. 거의 백전백패지. 이런 상황에서 가장 부러움의 눈길을 받는 녀석이 바로 팬티 안입고 온 녀석이다. 꼭 한둘은 있었던것 같다. 인간의 기본 존엄성이 있는지라 어찌 홀라당 벗길수 있겠는가. 팬티 안 입은 애들은 바지입고 체벌을 받으니 의기양양(?)해 질수 밖에...대신 물 세례는 더 받았지만...

어쨌든 그해 겨울, 팬티 안 입은 애들 빼고는 상당히 추웠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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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 2004-07-25 2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중학교 때 생물 선생님이 옆반 국어 선생님을 좋아했던 생각이 나네요. 하지만 국어 선생님이 어느 날 결혼을 하시더라고요. 괜히 생물 선생님이 안 되어서 마음이 짠했었는데.
그 기술 선생님 체벌 방법 독특하시네요. 그리고 바지 입고 체벌 받은 학생들도 참 그렇네요. 그래서 흑기사 기술 선생님은 좋은 결과를 얻으셨는지도 궁금하고요.

stella.K 2004-07-25 2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큭, 팬티 안 입고 다니는 사람도 있남?
바다가 보이는 학교라...생각만으로는 정말 낭만적일 것 같은데, 선생님한테 잘못 걸리면 그런 일도 당하는구랴. 그 모진 칼바람 잘 견디고 이제까지 잘 살아오셨수. 기특하구랴! ^^

Laika 2004-07-25 2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잠시 교과서를 덮어라
첫 눈이 오는구나
은유법도 문장성분도 잠시 덮어두고
저 넉넉한 평등의 나라로 가자
오늘은 첫눈 오는 날
산과 마을과 바다위로 펼쳐지는
끝없는 백색의 화해와 평등이
내가 너희들에게 준 매운 손찌검의
너희들 가슴에 칼금을 그은 편애를
스스로 뉘우치게 하는구나

 

노총각 선생님의 사랑 얘기와 상관없이 바다가 보이는 학교라는 말에 "정일근"의 "바다가 보이는 교실"이 생각나네요.. 그때의 체벌이 많이 힘드셨겠는데, 이런 더운날 들으니 좀 시원해지도하네요....ㅎㅎ 잉크님의 학창시절 얘기는 들을때마다 재밌어요..^^ 그나저나 정말 팬티 안입고 다니는 애들은 뭐랍니까? ^^

 


잉크냄새 2004-07-25 2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촌구석 남학교여서 그런 모양입니다.^^ 특히 소금강 자락에 살던 아이들이 의심의 눈초리를 받곤 했죠. 체육 시간에 늦게 나오는 사람, 한번쯤 의심해볼만 합니다.가끔 불시에 신체검사 비슷하게 하면 꼭 한두명 걸려들었거든요.^^;

미네르바 2004-07-25 2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잉크냄새님의 이야기 보따리는 여전히 웃음을 자아내는군요.
그 해 겨울은 정말 추웠겠어요. 그 여선생님과 노총각 선생님의 후일담은 없나요?
바다가 보이는 곳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것은 정말 부러워요.
 

<가을에 우는 매미 / 그 목소리에 / 죽기 싫은 기색이 역력하다 > - 소세키-
<너무 울어 / 텅 비어 버렸는가, / 이 매미 허물은 > - 바쇼-
<여름 매미 / 나무를 꼭 껴안으며 / 마지막 울음을 운다 > - 이싸 -
<올해의 첫 매미 울음 / 인생은 / 쓰라려,쓰라려,쓰라려 > - 이싸 -

하이쿠 시인들은 대부분 방랑자였다고 한다. 평생을 소유하지 않고 걸식하며 걸어다니며 자연의 풍경과 하찮은 미물에 숨어있는 삶의 본질에 대하여 많은 하이쿠를 남겼다. 인생의 유한함, 어찌할수 없는 숙명, 바닥에 다다른 외로움과 허무...

그들이 다룬 많은 소재에서 그들의 방랑생활을 엿볼수 있다. 이, 벼룩, 귀뚜라미, 허수아비, 나비, 거미, 매미...이 사물들이 그들의 심정에 따라 때론 서글픈 모습으로 때론 해학적인 요소로 처리되곤 한다.

그런데, 유독 매미만큼은 모든 하이쿠에서 서글픈 운명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왜? 짧은 생의 허무함 때문일까?  한 세상 살고가면서 구차하게 허물을 남겨서일까? 우리도 매미소리를 울음소리로 표현하지 노래소리로 표현하는 경우는 드물다. 왜 매미만 유독 서글픈가?

올 여름 찌는듯한 더위속에 들리는 매미소리. 인생이 짧고 쓰라려 울음 우는 소리가 아닌 인생이 즐거워 어찌할줄 모르는 노래소리로 듣고 싶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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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4-07-25 1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7년을 땅속에 있다 세상에 나와 일주일을 살다 가는 삶이라 그런 것 아닐까요...

stella.K 2004-07-25 15: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이 근사하네요.^^

잉크냄새 2004-07-25 2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미는 매워서 우는군요.^^
삼땡은 33 이고 3333은 대통령이 아닌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