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카파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 전설적 포토저널리스트 로버트 카파의 2차대전 종군기
로버트 카파 지음, 우태정 옮김 / 필맥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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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콘탁스 카메라를 꺼내들고 그 비행기가 착륙하여 정지할 때까지의 모습을 한 통의 필름에 꽉 채워 담았다. 그러고는 기체 앞으로 달려가 두 번째 콘탁스 카메라의 초점을 맞췄다. 승강구가 열리고, 부상당한 승무원이 대기 중인 의료진에게 인도됐다. 그는 아직도 신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뒤이어 두 사람이 더 실려 나왔다. 하지만 그들은 아무런 신음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조종사가 내려왔다. 이마에 베인 상처자국을 제외하면 그는 무사한 것 같았다. 나는 클로즈업 사진을 찍기 위해 그에게로 다가갔다. 비행기에서 내리던 그가 갑자기 멈춰서더니 내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봐, 사진사! 이게 당신이 기다리던 장면들인가?"
나는 카메라를 닫고는 작별인사도 하지 않고 런던으로 돌아와 버렸다.
성공적으로 임무를 완수하고, 필름들로 가득 채운 가방을 들고 런던행 기차를 타고 가면서 나는 나 자신과 사진기자라는 내 직업에 회의가 들었다. 장의사나 해야 할 일을 내가 한 것 같아 역겨운 생각마저 들었다. 만약 장례에 관계된 것이라면, 이제부터 나는 장의사가 아니라 문상객 쪽에 서리라고 굳게 다짐했다. -46~7쪽

나는 운전병과 함께 다시 길을 떠났다. 이 전쟁이 싫어지기 시작했다. 종군기자의 삶이란 별로 낭만적인 게 못 됐다. 울퉁불퉁한 길을 따라 황량한 사막을 가로질러 몇 시간을 달렸지만, 아군이든 적군이든 간에 살아있는 생명체라고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단지 독일군이 버려두고 간 쓸모없는 장비들만 눈에 띌 뿐이었다. -61~2쪽

공격이 개시된 순간부터 점령 때까지의 전 과정을 지켜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번 전투에서 나는 썩 괜찮은 사진도 몇 장 찍을 수 있었다. 단순한 사진에 불과한 것이었지만 전투란 것이 얼마나 볼썽사납고 비참한 것인지를 여실히 보여준 사진이었다. 특종은 운도 운이지만 얼마나 신속하게 전송하느냐에 좌우되는 것이다. 또 대부분은 게재된 다음날이면 더이상 아무런 의미도 갖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으로부터 10년의 세월이 지났을 즈음 병사들이 오하이오 주의 자기 집에서 이때의 트로이나 사진을 보게 된다면, 아마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래, 그때는 그랬었지."-10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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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NY 2012-05-29 1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제목을 참 잘 지은 거 같아요.

이매지 2012-05-30 09:13   좋아요 0 | URL
내용과도, 표지와도 잘 어울리죠. ^^
 
사랑의 기초 : 연인들 사랑의 기초
정이현 지음 / 톨 / 2012년 5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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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았던 20대의 마지막 해. 친구들은 하나둘 결혼하기 시작했고, 이러다 나만 남으면 어쩌지 하는 불안감도 조금씩 찾아왔다. 잇속 따지지 않고 누군가를 만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도 조금씩 깨달아가지만, 그래도 다시 한 번 조건 없이 '그냥' 잘 통하는 사람과 연애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누군가를 몇 달이나 마음에 담아두고 있다는 얘기에 누군가는 철이 덜 들었다고 핀잔을 줬고, 누군가는 나도 그런 두근거림을 느껴보고 싶다며 설레했다. 카페에 앉아 가만히 창밖에 오가는 사람들을 볼 때면 대체 저 사람들은 어떻게 만나서 어떻게 사랑하게 된 걸까 하는, 똑 부러진 정답이 없는 호기심을 안고 지내던 어느 날, <사랑의 기초>를 만났다. 알랭 드 보통과 정이현의 공동 작업이라는 점도 관심을 끌었지만 "첫사랑도 마지막 사랑도 아닌, 바로 지금 우리의 사랑"이라는 띠지 문구에 '남의 사랑 이야기'를 '내 사랑 이야기'처럼 읽고 싶어 연애를 시작할 때의 두근거림을 안고 읽기 시작했다.

  82년생 준호와 84년생 민아. "애인을 사귀려는 목적으로 전혀 모르는 낯선 사람을 소개받"는 자리를 두 사람이 준비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서로가 어떤 사람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저 그 사람이 내 짝이었으면 좋겠다는 얕은 희망 혹은 기대를 품고 나간 자리. 너무나 다행스럽게도 둘은 순조로운 첫만남에 우여곡절을 거쳐 '연인'으로 발전한다. 하나씩 서로의 과거를 나누고, 현재를 공유하며, 미래까지 꿈꾸는 두 사람. 하지만 여느 커플이 그러하듯 둘의 연애도 마냥 핑크빛은 아니다. 요양원에 모셔진 할머니의 존재 같이 때로는 조금은 부담스러운 감정의 공유를 시도하고, 내색하지는 않지만 서로에 대한 불만이나 짜증도 조금씩 쌓여간다. "둘이 얼마나 똑같은지에 대해 열심히 감탄하며 보내는" 연애 초반부를 거쳐 "그것이 얼마나 큰 착각이었는지를 야금야금 깨달아가는" 중반부를 지나 "나눌 것은커녕 남아 있는 것도 거의 없는" 종장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준호와 민아는 함께 걸어간다.

 

  서로 모르는 두 사람이 처음 만나 사랑하고 헤어지는 과정을 담기에 200페이지 남짓한 분량은 결코 길지 않다. 하지만 분량이 얼마 되지 않는다고 해서 둘 사이에 있었던 수많은 사건과 수많은 감정의 뒤섞임이 반감되는 것은 아니다. 소개팅 자리에서 서로의 공통점을 찾으려고 애쓰다 비슷한 반경에서 생활해왔다는 것을 알게 돼 안도하는 준호와 민아처럼 초반부에 나 또한 이들의 연애와 나의 연애를 겹쳐보고 공통점을 찾으려 애썼다. 동갑에다가 비슷한 고민까지 하는 여주인공이라니. 100퍼센트 일치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내심 '이거 내 얘기 같잖아' 싶었다. 아니, 어쩌면 민아는 직장생활을 하는 20대 후반의 미혼 여성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모습을 어느 정도 투영할 수 있을 정도로 '보편적'인 인물일지도 모르겠다. 이런 현실감 있는 인물 설정은 사십대인 작가 본인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쓴 것이 아니라 실제 이십대와 소통한 것에서 연유한다. 정이현은 알랭 드 보통과의 대담(<사랑의 기초: 한 남자> 뒤에 수록되어 있다)에서 "자의 반 타의 반, 이십대 남녀들을 만나 그들의 사랑과 연애에 대한 솔직한 생각들을 물어"보는 과정을 거쳤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요즘 이십대의 연애관이 자신의 이십대 때와는 사뭇 달라 "어느 순간엔 세대차이 같은 것도 느꼈"다고 술회한다. 이런 사전 인터뷰 과정 덕분인지 "모든 이십대 남녀를 일반화해선 안 되겠지만" 정이현은 이십대와의 간극을 좁히는 데 성공했고, <사랑의 기초: 연인들> 속의 민아와 준호는 "분명 지금 이십대의 방식으로, 이십대들이 할 수 있는 보편적인 사랑을 나"누었다.   

 

  인물상뿐만 아니라 남녀 간의 만남도, 사랑도, 이별도 그 모습은 조금씩 다를지 모르겠지만, 모두 "사소하게 꿈꾸고 사소하게 절망하고 사소하게 후회하기를 반복"하는 "보편적인 연애"를 하면서 지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서로 다른 포물선을 그리며 살아온 두 사람이 하나의 점으로 겹쳐졌다가 다시 각자의 포물선을 그리는 과정. 기적 같은 찰나의 교차. 이 과정을 한번이라도 경험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어느 정도 공감할 만한 이야기가 <사랑의 기초: 연인들>에는 존재한다. 그후로 그들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하는 유의 연애판타지를 그린 것이 아니라 읽고 나면 기어이 맥주 한 캔을 따게 하는 결말이기에 더 공감하면서 읽었던 것 같다. "치정 때문에 죽고 죽이는 고대 희랍식 드라마는 자주 일어나지 않으며, 드라마 퀸이 되기를 열망한다고 해서 아무한테나 그런 역할이 주어지는 것도 아니다"라는 말처럼 그저 함께 걷던 두 사람이 어느새 점점 멀어져 각자의 길을 걷는 과정은 불꽃 튀는 격정적인 사랑이나 이별보다야 더 현실감 있으니 말이다. 어쨌거나 명색이 연애소설이니 말랑말랑하고 몸이 배배 꼬이는 듯한 달달함을 기대한 독자는 이 무덤덤한 연애에 실망할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정이현이 섬세하게 그려낸 별것 아닌 담담한 연애가 마냥 달콤한 사탕 같은 연애소설보다 더 매력적이다. 읽고 있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 번 연애를 했으면, 하고 꿈꾸게 하니 말이다. 결국 각자의 길을 가게 된 두 사람처럼 이 책과, 그리고 민아와 준호 두 사람과 이별하며 "불완전한 인간들끼리 나눌 수 있는, 아마도 가장 완벽한 작별인사"를 건네고 싶다. "안녕"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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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12-05-27 1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이게 20대의 마지막 해에 쓴 리뷰란 말이죠...? ㅋ
정이현에 묻어가지 마시고... 꿈 꾸세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ㅎㅎㅎ

이매지 2012-05-27 14:43   좋아요 0 | URL
그럼에도 불구하고 꿈꾸는 게 사랑이고 연애고 낭만이죠. ㅎㅎ
이십대도 반년 남짓 남았군요. 뭐 좀 아쉽기도 하고 삼십대가 기대되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ㅎㅎ

하늘바람 2012-05-28 0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이현 작가의 최근 책이군요.
우아 이매지님이 벌써 그렇게 되셨나요?
우리가 안 세월이 그런가요 벌써
대학교 다니시면서 공부하고 어떤 일을 할까 고민하시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매지 2012-05-28 11:57   좋아요 0 | URL
제가 서재생활을 한 게 한 2004년 정도부터니까 정말 오래됐죠. ㅎㅎ
나이가 변하니 고민도 변하고 그렇게 되네요. 하하핫.
(아 뭔가 부끄럽구요.ㅎㅎ)

Kitty 2012-05-28 0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 리뷰 좋다...

Kitty 2012-05-28 0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엉 달고 보니 반말 ㅋㅋㅋ 리뷰 넘 좋아요 ㅎㅎ

이매지 2012-05-28 11:59   좋아요 0 | URL
아니 반말이 뭐 어때서요. ㅎㅎ
이거 너무 사적인 얘기를 많이 쓴 것 같아 민망하구요. ㅎㅎ
 
좀비 -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
조이스 캐롤 오츠 지음, 공경희 옮김 / 포레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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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좀비는 영원히 내 것이 될 것이다. 그는 모든 명령과 변덕에 복종할 것이다. "네, 주인님" "알겠습니다, 주인님" 하면서. 내 앞에서 무릎을 꿇은 채 나를 올려다보며 말할 것이다. "사랑합니다, 주인님. 오직 주인님뿐입니다."
그렇게 될 것이고 그런 존재일 것이다. 진정한 좀비는 '아니다'라는 말은 한마디도 할 수 없고 오직 '그렇다'라는 말만 할 수 있으니까. 그는 두 눈을 맑게 뜨고 있지만, 그 안에서 내다보는 것은 없고 그 뒤에서는 아무 생각도 없을 것이다. 어떠한 심판도 하지 않을 것이다. -75~6쪽

과거는 과거일 뿐이고, 우리는 나아가는 법을 배운다. -127쪽

지구가 허공을 뚫고 밀려들었다. 축을 기준으로 회전하지만 사람들은 그게 느껴지지 않는다고, 그것을 경험할 수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것을 느끼는 것은 두려운 동시에 행복하다.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과 본모습대로 하는 것 외에는 중요한 게 없음을 아는 것도 그렇다. 나는 미래로 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되돌아가 닿을 수 있는 과거는 없다. 상황을 바꾸고 싶거나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을 때 돌아갈 수 있는 과거는 없지만, 분명히 미래는 있고, 우리는 이미 그 안에 있다. -1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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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기초 : 연인들 사랑의 기초
정이현 지음 / 톨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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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애인을 사귀려는 목적으로 전혀 모르는 낯선 사람을 소개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우습고 괴상한 일인지 알 수 있다. 차라리 지하철 같은 칸에 탄 아가씨와 사귀게 되는 일이 쉬울 것 같았다. 아니, 우연히 한입 메어 문 맥도날드 햄버거에서 죽은 생쥐의 꼬리털이 발견되어 수억 원의 보상금을 타는 일이 지금은 더 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아아, 어리석은 희망이여. 그는 자책했다. -15~6쪽

그녀의 이름이 무엇이었대도 그 아이의 타고난 본성은 별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이름이란 결국 그런 것인지도 몰랐다. -32쪽

혼자 남겨진다는 것은 익숙해서 더 두려운 일이었다. 혼자임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경우라면 그나마 견딜 만했다. 하지만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홀로 남겨지는 상황을 상상하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언젠가는 홀로여야 한다면 그 타이밍을 선택하는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닌 '나'여야 한다고 민아의 무의식이 말하고 있었다. 상대가 멍하니 한눈파는 순간을 잘 포착하여 휙 놔버리는 것이 민아의 방식이었다. 그러지 않으면, 그 타이밍을 맞추지 못하면, 분명히 모두가 등을 돌리고 말 것이고, 결국엔 어깨를 떨지 않으려 애쓰며 다시 혼자서 그 어린 날, 점심시간마다의 지독한 순례에 나서야 할 터였다. 그것은 친구 관계에서도, 그리고 연애를 할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58쪽

연애의 초반부가 둘이 얼마나 똑같은지에 대해 열심히 감탄하며 보내는 시간이라면, 중반부는 그것이 얼마나 큰 착각이었는지를 야금야금 깨달아가는 시간이다. -78쪽

민아는 극단적 비관주의자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하여 그 신호에 재빠르게 대응하기에 앞서, 도저히 감당하기 힘든 애인의 문제점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보기로 했다. 몇 차례의 실패한 연애들이 남겨준 습관이었다. 비교적 허술한 경제 관념, 비교적 불안정한 직장, 비교적 이해심 없는 성품, 비교적 의심스러운 바람기…… 여기서 '비교적'의 비교 대상이 누구인지는 불분명했다. 앞서 만났던 2번, 3번의 평균치일 수도 있고 친구들의 애인들일 수도 있다. 아직 만나지 못한 5번, 6번, 7번들에 비해서일 수도 있다. 또 누군가를 새로 만나 순서대로 다음 번호를 부여하고, 연애의 기승전결을 되풀이해야 한다는 데에 생각이 미치자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러나 무엇보다 결정적인 한 가지가 있었다. 그 남자는 더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 그녀 자신의 마음이 어떤지는 어쩌면 중요하지 않은 문제였다. 그녀는 애초의 계획대로 이별을 진행시켰다. 그만두지 않으면 절대로 시작할 수 없다는 경구는 이 시대의 이십대 여성들을 매혹시키는 전언이었다. -79~80쪽

남녀의 첫 만남 뒤에 언제쯤 연락하는 것이 바람직한가에 대한 연구 보고서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이 도시의 젊은이들 사이에 통용되는 타이밍에 대한 보편적 규칙은 있었다. 열살짜리 아이조차 주머니에 휴대전화를 넣고 다니게 된 2000년대 이후론 그 간격이 터무니없이 짧아진 것만은 분명했다. 심지어 이제는 스마트폰을 손안에 쥐고 다니는 시대였다. 통화뿐만 아니라 문자메시지도, 이메일도, SNS도, 스마트폰 전용 메신저 서비스도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다. 마음은 손가락 끝에 존재하고 있다. 여자들은 그 어떤 개인 휴대기기도 존재하지 않던 시대보다 수십 배 빠른 속도로 불안에 빠져들었다. -98~9쪽

그때 그들은 어디로든 갈 수 있었고 어디로도 가지 않을 수 있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민아와 준호는 봄밤 속으로 함께 걸음을 내디뎠다. 처음 보는 별들이 뒤를 따라왔다. -107쪽

두 개의 서로 다른 포물선들이 공중에서 조우해 마침내 하나의 점點으로 겹쳐진 순간에 대하여, 그 경이로운 기억에 대하여 어떻게 탄성을 터뜨리지 않을 수 있을까. 이 세계에서 기적은 종종 태연한 일상의 방식으로 구현되곤 했다. 이제 막 사랑을 시작한 젊은 연인에게 한없이 평범해 보이는 매일의 일상, 그 틈새에 숨겨져 있는 치명적인 운명의 조각들을 찾아내는 일은 경이로운 놀이였다. 그 신비롭고 아름다운 우연의 세목들을 하나하나 헤아려보다가 자신들이 마침내 지금 여기 함께 있다는 사실은 진실로 기적이 아닐 수 없다고 그들은 감격했다. -108~9쪽

어떤 관계에서든 더 많이 말하는 사람은 있다. 연인들은 필연적으로 역할을 선택해야 한다. 굿 스피커가 될 것인가 아니면 굿 리스너가 될 것인가. 말할 것인가, 들을 것인가. 던질 것인가, 받을 것인가. 그들이 서로에게 매혹된 원인은, 각각 상대방이 아주 훌륭한 청자라고 믿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114쪽

어쩔 수 없는 순간이 올 때까지 빨랫감을 숨겨두고 싶은 마음은 엄마도 그녀도 다르지 않을 거였다. '나'도 있고 '사랑하는 사람'도 있고 '부모'도 실망시키지 않는 삶. 세상 어딘가에는 그런 삶을 사는 여자도 있겠지.-157쪽

그들의 사랑이 지금 고갈되어가고 있다 해서 사랑한 적이 없었다는 뜻은 아니다. 그들의 사랑이 비극적 파국에 이르렀다는 뜻도 아니다. 이곳은 보기보다 냉정하고 이성적인 세계였다. 치정 때문에 죽고 죽이는 고대 희랍식 드라마는 자주 일어나지 않으며, 드라마 퀸이 되기를 열망한다고 해서 아무한테나 그런 역할이 주어지는 것도 아니다.
이별과 맞닥뜨릴 때마다 '죽고 싶어'라고 말하는 사람은 많지만 실제로 목숨을 끊으려고 시도하는 이는 드물었다. 물론 비련의 사랑을 애꿎은 생명으로 되찾으려 드는 무모한 젊은이도 없지는 않았지만 목적을 이룬 숫자는 매우 미미했다. 눈물은 오래지 않아 마를 것이고 그들은 머지않아 새로운 사랑을 시작할 것이다. 다시 사소하게 꿈꾸고 사소하게 절망하고 사소하게 후회하기를 반복하다보면 청춘은 저물어갔다. 세상은 그것을 보편적인 연애라고 불렀다. 대개의 보편적 서사가 그러하듯 단순하고 질서정연해서 누군가에겐 아름답게, 누군가에겐 참을 수 없이 지루하게 여겨졌다. -201쪽

마침내 그들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별에 대한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합의는 없었다. 이혼을 앞둔 부부가 아닌 다음에야 이별 합의서에 서명하는 연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실패한 연인에겐 나눌 것은커녕 남아 있는 것도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이 무언으로 동의한 부분은, 더 오래 같이 있으면 아무도 행복해지지 않는다는 것뿐이었다. -207쪽

처음 만난 순간에도 헤어지는 순간에도 사람들은 '안녕'이라고 말한다는 것을 그들은 불현듯 깨달았다. 각자의 길을 향해 뒤돌아서, 서로의 뒤통수 반대 방향으로 한 발짝 내디딘 것과 거의 동시였다. 그것은 불완전한 인간들끼리 나눌 수 있는, 아마도 가장 완벽한 작별인사였다. -2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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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의 탑
모리미 토미히코 지음, 이영미 옮김 / 문학수첩 리틀북 / 2008년 12월
절판


어떤 점에서인가, 그들은 근본적으로 잘못되어 있다.
왜냐하면 내가 잘못될 리는 없기 때문이다. -5쪽

그녀가 나의 위대함을 이해하지 못한 탓에 나를 거부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정은 충분히 알고 있다. 사람에게는 각자에게 맞는 능력이 있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나는 신사적으로 행동했던 것이며, 불필요한 감상을 끊어 내고 그녀가 없는 생활로 되돌아간 것이다. 그 후에 행해진 나의 '연구'는 그녀에 대한 끊을 수 없는 애정 같은 것과는 무관하며, 철저히 냉정하고 신사적으로 행해 왔음에 틀림없다. 이상한 편지를 보내거나, 전화를 걸었다 말없이 끊거나, 주위에 나쁜 소문을 퍼뜨리는…… 그런 무익하고 어리석은 일을 나는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그녀는 나에게 감사하면 했지, 그런 사내를 앞잡이로 내세워 내게 수치를 겪게 할 필요는 단연코 없었다. -33~4쪽

그가 갑자기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숨을 헐떡이며 "이건 내 꿈이 아니야"라고 소리쳤다.
중학생 시절의 어리석음을 다 드러낸 꿈을 거부하고 싶은 심정은 충분히 이해한다. 과거 자신의 발가벗은 모습에서 눈을 돌리고 싶은 건 당연하다. 그러나 현재의 우리는 과거 실패의 퇴적 위에 세워진 존재다. 태곳적 생물들의 유해가 석유가 되어 현대 문명을 쌓는 초석이 된 것처럼, 우리도 과거의 한심하고 어리석었던 자신을 연료로 태워 이제는 멋지게 달려가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적나라한 과거를 당당히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애당초 지하 깊숙이 매장되어 있는 석유를 파헤쳐 내지 않았다면, 세상에 숱하게 방출되어 맘껏 환경을 파괴시키는 플라스틱 제품은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40 ~1쪽

우리는 매우 절도 있는 인간이므로 술에 취해 정신을 놓는 일은 없다. 정신이 몽롱해지기 전에 전선에서 퇴각하는 방침을 세워 놓았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는 경우에는 재빨리 변기에 게운 후 철수한다. 자신의 에틸알코올 분해 능력도 파악하지 못하고, 게다가 토사물을 투하할 장소조차 분간하지 못한 채 술을 마시는 학생이 많은 세태가 심히 유감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단순히 유감으로 끝날 일이겠는가, 같은 학생으로서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술은 백약의 으뜸'이라고 우겨 댈 생각이라면, 술집 계단에 잘못 투척한 토사물을 자기가 빨아들일 정도의 각오는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이다. -46쪽

순탄하게 흘러가는 일상 속에서, 화려하진 않더라도 뭔가 인생의 심오한 경지를 엿보는 것 같은 고상한 경험이 나에게 있느냐 하면, 그런 깊이 있는 일과는 인연이 없다. 작금의 젊은이에게서 흔히 볼 수 있듯이, 갈수록 현대 문명에 의지하는 나날을 살아간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런 나날을 보내면서도, 이것 또한 젊은이에게 흔히 있는 일인데, '나는 선택된 인간'이라는 역겨운 프라이드를 나 역시 품고 있다. 이 또한 있을 법한 일이긴 하겠으나, 선택된 자로서의 그 어떤 황홀도 불안도 일상 속에서는 손톱만큼도 발견할 수 없다. 그럼 네가 '선택되었다'고 확신하는 증거는 어디에 있냐고 묻는다면, 오히려 내 쪽에서 가르쳐 달라고 하고 싶을 정도다. 그러나 어딘가에 분명히 있을 것이다. 눅눅히 젖어 있는, 모두가 눈길을 피해 버릴 것 같은 으스스한 어둠 속에 아직 발견되지 않은 보물이 잠들어 있다고 나는 믿는다. -56쪽

일상은 간결한 게 최고다. 진정한 위업은 극적인 일상과는 무연한 장소에서 은밀히 행해지는 것이다. 망설임 없이 '이거다'라고 드러낼 수는 없는 게 유감이지만, 나 역시 세계사에 남을 위업을 이루고자 하는 인간이므로 사색을 흐트러뜨리는 파란만장한 일상 따윈 원치 않는다. 그저 조용히 내버려 두길 원한다. 살짝 외로워질 때만 마음을 써 주면 충분하다.
그러나 마음을 써 주길 원할 때는 마음을 써 주지 않고, 그냥 혼자 내버려 두길 원할 때는 내버려 두지 않는 게 세상사이게 마련이다. -56~7쪽

둘이 머리를 맞대고 앉아 사정없이 부풀어 오르는 자신들의 망상에 상처 입는 세월을 보내는 사이, 우리는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우리는 그런 식으로 '세상이 썩었다'고 한탄했는데, 솔직히 말해 이따금 세상이 썩었는지 우리가 썩었는지 알 수 없을 때도 있었다. 어찌 되었든 우리 일상의 대부분은 그렇게 풍부하고 지나치리만큼 참혹한 망상으로 이루어졌다.
일찍이 시카마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일상의 90퍼센트는 머릿속에서 일어난다."-87쪽

"언제 술 한잔 하자."
그가 말했다.
"이도가 또 축 처져 있어. 위로해 줘야지."
"술 마시는 건 좋은데, 침울해 있는 인간에게 해 줄 말은 아무것도 없다."
시카마가 오리온자리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친구잖아."
"도움도 안 되는 위로의 말을 건넬 생각은 없어. 난 다만 그의 강렬한 질투에 경의를 표하고, 그 결말을 조용히 응시하고, 그리고 기탄없이 즐길 뿐이지."-106~7쪽

긴긴 하루였다.
하숙집으로 향하는 언덕길을 오르면서 뒤늦게 분노가 솟구쳐올랐다. 현대 문명에 철저히 의존해 살아가긴 해도, 양친과 지구환경 외에는 부끄러워할 대상 하나 없이 조개와 같은 무해한 생활을 하고 있건만, 스토커 놈에게 스토커라고 불리질 않나, 애차 마나미호가 어딘가로 끌려가질 않나, 교토대생 사냥에 쫓기질 않나, 망상에 빠진 빚쟁이가 찾아오질 않나, 크리스마스가 다가오질 않나, 실로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챙겨 주길 원치 않을 때에만 챙겨 주길 원치 않는 인간이 일상을 침범해 들어오는 잔혹한 현실. 그리고 정작 챙겨 주길 원하는 사람은 날 챙겨 주지 않는다. 딱히 그녀를 두고 하는 말은 아니다. -128~9쪽

우리는 인류를 구제하게 될 거대한 에너지를 떠올려 보았다. 좌절, 실연, 죽음에 이르는 병, 모든 고뇌가 유익한 에너지로 변환되어 자동차를 움직이고, 비행기를 띄우고, 인터넷은 어디서든 연결되고, 아이돌 비디오도 실컷 볼 수 있게 된다. 이보다 멋진 미래는 없다. 그렇게 되면 이도처럼 과도한 고통을 끌어안은 자가 인류의 구세주로 각광을 받고, 숨 막힐 정도로 포지티브한 인간은 몽땅 수납장에 갇히는 신세가 될 것이다. 그의 시대가 도래하는 것이다. -150쪽

작금의 세상에는 크리스마스라는 악령이 설쳐 대고 있다. 일본인이 크리스마스를 축하하는 부조리는 일단 눈 감아 주기로 하자. 아이들에게 꿈을 주는 건 좋다. 설령 그것이 켈트 신앙을 기원으로 한 정체 불명의 흰 수염 할아버지가 이뤄 주는 '물욕'의 꿈이라 할지라도. 하나 작금의 크리스마스와 연애 예찬주의의 잘못된 습합까지 허락해 줄 까닭은 없다. 목청껏 행복을 구가하는 것은 실로 폭력적인 일이다. -154쪽

그러나 이 자리에서 명확히 밝히고자 한다. 듣고 싶지도 않은 행복의 구가(謳歌)를 들어 줘야 할 의리 따윈 없다고. 세상에서 소외되었다는 불합리한 열등감을 맛보며 하숙집에서 냄비를 끌어안고 우울하게 지내야 할 의리도, 보통 사람처럼 학창 시절을 보내지 못한다느니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낼 연인도 없다느니 하는 무익한 번민을 끌어안아야 할 의리도 없다고! 그들은 분명 수많은 샘플을 눈앞에 늘어놓고 제군에게 '행복'을 제시해 보일 것이다.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낼 이성이 있다는 사실, 그것이 마치 학생의 본분인 양 소리 높여 주장할 것이다. 닥쳐, 닥치라고. 학생의 본분은 학문이다. 사랑에 정신을 빼앗길 여유가 있으면 좀 더 학문에 매진하란 말이다, 이 미친 새끼들아! -154~5쪽

어찌해 볼 수 없는 우리의 위대함이 어리석은 틀에 박히기를 거부하는 거라고 큰소리치며 현혹시키는 건 간단하다.
그러나.
그러나 때로는 틀에 박힌 행복도 좋다고, 우리가 중얼거린 적도 있지 않을까. -200~1쪽

사랑 따위로 뻐길 게 뭐 있어? 사랑하는 놈이 그리 잘났나?
현대 풍조에 연애 예찬 경향이 있다고 하더라도, 본디 불합리한 정서인 연애를 칭송하는 위험성을 제대로 파악해야만 한다. 인간 저변에 깔린 어두운 감정을 제아무리 달콤한 말로 치장한다 해도, 언젠가 그것은 모든 것을 미련 없이 내팽개치고 본성을 드러낸다. 막상 그 광기에 직면해 그럴 리가 없다고 신음해본들 이미 때는 늦다. 흔히 '비뚤어진 애정'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연애라는 것 자체가 애당초 어딘가 비뚤어져 있다. 그럼에도 그는 왜 그리 기쁜 듯 행복한 듯 싱글벙글 만족해하는 걸까.
사람들은 광기의 구렁텅이에 기꺼이 몸을 던지고, 뭇사람들에게서 허우적대는 모습을 드러낸다. 아직 몸을 던지지 않은 사람들은 가능한 한 빨리 몸을 던지고 싶다, 몸을 던지지 않은 나는 행복하지 않다, 부끄럽다고까지 생각한다. 결단코 그렇지 않다. 부끄러운 것은 구렁텅이에 빠진 모습이며, 빠지고 싶어하는 모습이다. -217~8쪽

연애는 어디까지나 배은망덕한 기쁨이며, 부끄러워해야 마땅한 일이며, 가능하다면 남의 눈을 피해 맛보아야 할 금단의 과실이다. 그것을 마치 인생에 당연히 열리는 과실인 양 장소를 안 가리고 먹어 대고, 과즙을 남에게 튀겨 대는 행위가 얼마나 무거운 죄인지 인식해야 마땅하다.
만천하에 우글거리는, 팔짱을 낀 남녀들에게 고하노라.
"살아가라, (그러나 조금은) 부끄러운 줄 알라."
-218쪽

그러나 취해선 안 된다. 결코 자신에게 취해선 안 된다. 그렇게 자기 자신을 타이르고, 눈 내리는 새벽 거리를 걸으며 한동안 끙끙 힘을 내봤지만, 적어도 오늘만이라도 자신에게 취하게 해 주자고 마음먹고 나는 울었다. -245쪽

어떤 점에서인가, 그들은 근본적으로 잘못되어 있다.
그리고 하긴, 아마도 나 역시 잘못됐을 것이다. -2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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