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동 아가씨 - 근현대 여성 공간의 탄생
김미선 지음 / 마음산책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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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대, 같은 공간에서 함께했다 할지라도 누구의 경험을 중심으로 해석되고 쓰이느냐에 따라 그 공간의 역사는 달라진다. -7쪽

이러한 작업을 통해, 여성의 소비 공간인 양장점과 미장원이 한편으로는 여성들의 노동 공간이자 배움의 공간이었음을 알았다. 또한 다양한 여성들이 공존하는 가운데 그들의 일상을 접할 수 있는 창구임을 깨달았다. 일련의 작업은 내게 새로운 연구 지평을 열어주었다. 식민지 시기에 형성된 소비문화가 해방 이후에 연속되거나 단절되는 '변화성'을 주목해야 하며, 특히 이것을 식민지 근대 도시의 '공간성'과 관계 지으며 조망할 때 한국의 근대성을 규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 구술사 방법론을 통해 식민지 주선의 중심지였던 본정이 한국전쟁 이후 소비문화의 중심지인 명동으로 바뀌는 과정과 그 결과의 의미를 논의한 배경은 여기에 있다. -10~11쪽

명동은 식민지 시기 일본인에 의해 새로운 소비 공간으로 부상하면서, 한국 근현대사에서 중요한 무대로 등장하였다. 일본인들이 조선에서 처음 자리를 잡은 곳은 남산 기슭이었다. 이 일대는 원래 '남촌'이라 불렸는데, 가난한 양반이나 하급 관료들이 주로 거주하였다.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일본인들은 남산골 진고개에 일본 공사관을 세우고 이 일대를 독점적인 거류지로 정하였다. 이때부터 일본인들은 진고개 일대를 일본 또는 본국을 의미하는 본정통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1906년에는 이곳에 통감부를 세웠는데, 조선이 강점당한 이후 이름이 조선총독부로 바뀌어 1926년까지 있었다. 일본은 서울역과 가깝고 조선 정치의 중심지인 경복궁과 마주한 본정통과 그 일대를 거점으로 새로운 상권을 개발하고 조선을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39쪽

빠리의 번화가 샹제리제 거리, 뉴욕의 5번가, 동경의 긴자 한다면 서울은 명동 거리. 서울에서 으뜸가는 번화가인 명동 거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번화로운 지대이기도 하다. (…) 이 땅의 냉한지대와는 아랑곳없이 명동의 하루는 낮이면은 낮대로, 밤이면 밤대로 온갖 사치와 유행과 오락과 술과 여자로 그칠 사이 없는 소란 속에 그래도 한국 최고의 호사로운 풍경을 이루고 있다. 오백 환, 천 환짜리 지폐가 그 어느 지역보다도 마구 난무하는 곳, 명동 거리. 넓이 약 2평방키로의 이 유흥 지대는 어느 일면으론 바로 서울의 축소판이기도 하다. -60쪽

명동에 즐비하게 차려놓은 양품점, 양복점, 양장점은 도합 50개소가 넘으며, 모두가 최신의 첨단을 걷는 것으로 자처하여 이 점으로 해서 일반 상점의 그것보다 약 이 할 이상이 비싼 것도 특징. 하긴 대지 한 평에 이십만 환서부터 삼십만 환이니 우리나라 판도 안에서 가장 비싼 땅이 바로 명동 일대. -61쪽

'명동 족속'이라 불리우는 사람들은 남자건 여자건 간에 겉보기에 일목요연하다. 최신, 최고…… 무엇이든 이 두 가지 요건이 구비된 것만을 몸에 붙이고 또 가까이 한다는 것이 이들의 신조인데 여하간에 한국의 유행은 서울에서 퍼지고 서울의 유행은 명동에서 시작된다. 모던 여성의 복장 스타일을 좌우한 A라인, H라인, 후레야, 타이트, 헵번 스타일, 복스 타잎, 맘보 스타일…… 가지가지 유행이 파리에서 뉴욕에서 동경에서 뒤늦게 수입되어 항상 그 쌤플을 보여주는 것이 명동 거리…… 또 쌤플 노릇을 한다는 것이 명동 뽀이나 껄들의 자랑. -61~2쪽

해방 이후 본격적으로 설립되기 시작한 양재와 미용 기술 관련 학원과 학교는 전쟁으로 문을 닫았다가 전후 명동 일대를 중심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명동에 양장점과 미장원이 증가하면서 양재사와 미용사에 대한 수요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기술을 가르치는 교육 시설이 필요해졌다. 이렇게 명동은 여성들의 공간, 즉 성별화한 소비 공간으로 재편되었다. 이처럼 전후 명동을 중심으로 여성과 관련된 소비 공간이 등장할 수 있던 배경에는 한국전쟁 기간에 피난민이 대거 몰린 부산을 비롯한 대구에서 소비문화가 번성했던 요인이 있다. 여성들은 전쟁 중에도 양재와 미용 기술을 이용해 생계를 유지하고 돈을 벌었다. 그 경험은 전후 여성들이 기술을 통해 경제적 자립을 하거나 교육 시설을 운영하고자 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81~3쪽

미용이란 다시 말하면 화단에 물을 주고, 잡초를 뽑고 가지를 추리고 의지를 만들어주는 가꿈이라 하겠읍니다. 소박한 미를 정리된, 그리고 조화되고 세련된 미로 이끌어올리는 길이 아니겠읍니까? 그러므로 이것은 자연에의 역행이 아니라 자연을 정리하고 보조하며 살리는 길이요 방법이라 하겠읍니다. 젊은 여성이 미용(미장원 출입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에나 악세사리에 관심이 없다면 그 인생은 오히려 어딘지 부자연하고 병적이고, 기형적인 것으로 볼 수밖에 없읍니다. 인생에 패배하고 절망한 약자가 남을 증오하고 남과 싸울 기력도 없이 그 채찍을 자신에게 가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읍니다. 몸을 가꾼다거나, 장식한다는 일은 여성에게 있어선 산다는 열의와 근면을 뜻하게 되는 것입니다. -117~8쪽

당시를 살아가던 여성에게 명동은 소비 공간과 노동 공간인 동시에, 그 이상의 공간이었다. 자신들의 일상과 긴밀하게 연결된 곳이었으며, 심정적으로 더욱 유착된 공간이었다. 이들은 명동의 양장점에서 새로 옷을 맞춰 입고 미용실에서 최신 유행하는 헤어스타일을 따라 하며 변화를 시도했다. -178쪽

명동에는 양재사와 미용사와 같은 직업여성, 이곳을 드나들며 소비하는 여성들, 성적 서비스를 하는 여성들 등 다양한 부류의 여성들이 공존하였다. 이 다양한 여성들은 명동을 여성의 공간으로, 즉 소비 공간, 노동 공간, 문화 공간으로 만들어냈다. 이곳에서 여성들은 자신의 익명성을 유지하면서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자신을 표현할 수 있었다. 또한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었으며, 국극이나 영화와 같은 매체를 통해 문화생활을 즐길 수 있었다. 소비문화의 중심지인 명동은 여성들에게 해방 공간과도 같았다. 여성들은 명동이라는 공간을 드나들면서, 서로 달랐음에도 용광로처럼 하나의 새로운 도시 문화를 만들어냈다. -202쪽

다양한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조건에 처한 여성들이 공존하면서 새로운 도시 문화를 만들었다는 점은 1950년대와 1960년대의 명동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측면이다. 전쟁으로 인한 '폐허'와 '허무'가 난무하는 가운데에서도 여성들은 부딪쳐 싸웠고 도전하였다. 여성이라는 이름으로 명동에 모여들어 이곳에서 많은 것들을 공유하였다. 동시에 여성들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와 그 간극을 알아가기도 했다. 한국 사회에서 1950년대와 1960년의 명동처럼 다양한 연령대와 사회적, 경제적 차이를 보이는 여성들이 직간접적으로 한데 만날 수 있던 공간은 없을 것이다. 지금은 연령과 사회적, 경제적 지위에 따라 공간적 분화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20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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끌림 - Travel Notes, 개정판
이병률 지음 / 달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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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열정이 그러했고 청춘의 열정이 그러했고 먼 곳을 향한 열정이 그러했듯 가지고 있는 자와 가지고 있지 않은 자가 확연히 구분되는 그런 것. 이를 테면 열정은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건넌 자와 건너지 않은 자로 비유되고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강물에 몸을 던져 물살을 타고 먼 길을 떠난 자와 아직 채 강물에 발을 담그지 않은 자, 그 둘로 비유된다.
열정은 건너는 것이 아니라, 몸을 맡겨 흐르는 것이다. --쪽

사랑의 시작은 그래요.
어떤 이상적인 호감의 대상이 한번 내 눈을 망쳐놓은 이후로,
자꾸 내 눈은 그 사람을 찾기 위해 그 사람 주변을 맴돌아요.
한 번 본 게 다인데 내 눈은 몹쓸 것으로 중독된 무엇처럼
그 한 사람으로 내 눈을 축축하게 만들지 않으면
눈이 바싹 말라비틀어질 것 같은 거죠.

하지만 이 그림은 혼자서만 애태우는 사랑이 아니라
두 사람이 동시에 서로의 존재 때문에 애달파하고 있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두 사람이 부딪치고 나면 아마도 두 사람은
마음을 터놓으면서 자신의 감정이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될지도 모르죠.
"사실, 난…… 오래전부터, 당신을 좋아하고 있었어요."
이 말을 동시에, 둘이서, 상대방이 똑같은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그냥 해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두 사람 말이 골목 가득 메아리가 되어 울려 퍼지는 거예요. --쪽

당신은, 당신이 사는 집의 크기를 100이라고 친다면
나는 얼마쯤이었을까.
당신은, 당신이 알고 있는 가장 많은 숫자가 1000이라고 한다면
나는 그 가운데 얼마였을까.
당신은… 당신의 만 개쯤이나 되는 생각 속에
내가 차지하고 있는 자리는, 얼마쯤이었을까. --쪽

사랑은 그런 의미에서 기차다.
함께 타지 않으면 같은 풍경을 나란히 볼 수 없는 것.
나란히 표를 끊지 않으면 따로 앉을 수밖에 없는 것.
서로 마음을 확인하지 않았다면 같은 역에서 내릴 수도 없는 것.
그 후로 영원히 영영 어긋나고 마는 것. --쪽

무엇 때문에 난 사랑하지 못하는가, 하고 함부로 생각하지 마라.
그건 당신이 사랑을 '누구나, 언제나 하는 흔한 것' 가운데 하나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왜 나는, 잘하는 것 하나 없으면서 사랑조차도 못하는가,
하고 자신을 못마땅해하지 마라.
그건 당신이 사랑을 의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랑은 흔한 것도 의무도 아닌 바로 당신, 자신이다.

사랑해라, 그렇지 않으면 지금까지 잃어온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잃게 될 것이다.
사랑해라, 사랑하고 있을 때만 당신은 비로소 당신이며,
아름다운 유일한 한 사람이다. --쪽

발걸음을 멈춰 서서 자주 뒤를 돌아다본다.
그건 내가 앞을 향하면서 봤던 풍경들하고 전혀 다른
느낌을 풍경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보고 지나온 것이 저거였구나 하는 단순한 문제를 뛰어넘는다.
아예 멈춰 선 채로 멍해져서 그 자리에 주저앉는 일도 생겨버리기 때문이다.
내가 뒤돌지 않았다면 그것은 그냥 뒤로 묻힐 뿐인 것이 돼버린다.
아예 아무것도 아닌 게 돼버린다.
내가 뒤척이지 않으면, 나를 뒤집어놓지 않으면
삶의 다른 국면은 나에게 찾아와주지 않는다.
어쩌면 중요한 것들 모두는 뒤에 있는지도 모른다. --쪽

간혹 사람들은 묻는다. 왜 그렇게 다녀야만 하냐고. 피의 문제라고 대답도 했다가 결핍의 문제라고도 했다가 나도 잘 모른다, 라고 대답을 해왔다. 상상력을 위해서라고 말하기에는 뭔가 폼 잡는 것처럼 보일 것 같아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다.
상상력이 부족해서 더 가난한 시대에, 사람들은 함부로 남을 이야기할 때만 상상력을 동원한다. 그 뻔한 상상력만으론 행복해질 수 없다는 걸 모르고 사는 눈치다.
진정으로 남의 입장이 되어보기 위해서, 낯선 공간으로 끌려들어가기 위해서, 그렇게 먹먹해지고 막막해져서 조금 나은 상상력의 밑천을 짊어지고 돌아오기 위해 나는 먼 길에 머무르기를 좋아한다. --쪽

여행은, 120점을 주어도 아깝지 않은 '곳'을 찾아내는 일이며
언젠가 그곳을 꼭 한 번만이라도 다시 밟을 수 있으리란 기대를 키우는 일이며
만에 하나, 그렇게 되지 못한다 해도 그때 그 기억만으로 눈이 매워지는 일이다. --쪽

힌두교도의 말 중에는 '중요한 것은 우주를 한바퀴 도는 것이 아니라, 우주의 중심을 한바퀴 도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쟝 그르니에의 <섬>에 나오는 이야기다.
중요한 것은 '중심'이다. 무엇을 보고, 무엇을 겪고, 무엇을 이해하는지의 핵심은 항상 '중심'에 있다. --쪽

거기, 길이 있었다. 기분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고, 운수 좋은 일이 닥칠 것 같은 길이었다. 애초부터 그 길을 가려고 한 건 아니었다. 다른 길로 가려 했지만 뭔가 자꾸 잡아당기는 기분이 들었던 길. 그래도 그 길로 들어서지는 않았다. 다른 길로 가다 보니 어느새 길은, 이쪽 길로 이어져 있었다. 다른 길로 가도 한 길이 되는 길의 운명. 길의 자유. 그 길 위에 나는 서 있었다. 그 길에 서 있음으로써 나는 살 것 같았다. --쪽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은 상처 때문에 떠난다. 나 또한 다르지 않았다. 사람으로부터 내가 사는 곳으로부터 떠나 눈발이 된다. 사는 일 또한 그랬다. 차곡차곡 쌓인 사람과 희망에 대한 환상으로 살면서, 때론 조용히 허물어지는 것까지도 바라보는 것.
끊임없이 뭔가가 닥치는 일이 인생이고, 그 닥치는 일을 잘 맞이하고, 헤치고 그러다 다시 처음인 듯 끌리고 하는 게 인생의 길이란 생각이 든다. 나 또한 모든 이들의 바람처럼 그 인생을 통째로 느끼고 싶었고, 느끼며 살고 싶었을 것이고, 그래서 이 책의 바탕은 그것이 된다. 조금 욕심을 낸다면 그 느낌들을 당신에게 전하고 싶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같이 가주었음 한다. 내 길에 당신도 함께해줬으면 한다.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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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9-03 13: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9-03 17: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탈리아 데이 - 2012-2013 개정판 Terra's Day Series 2
윤도영.박기남 글.사진 / TERRA(테라출판사) / 2012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이탈리아에서 본 한국인 관광객 열에 일고여덟은 이 책을 들고 있을 정도로 대중적인 가이드북. 지도에 작은 길이 몇 개 누락되어 있고, 부라노섬 정보가 따로 없어서 아쉬웠지만 많은 도움이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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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2-08-28 1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후~ 그래, 어땠습니까?!

이매지 2012-08-28 12:57   좋아요 0 | URL
사람도 풍경도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ㅎㅎㅎㅎㅎ

BRINY 2012-08-28 1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탈리아 다녀오셨군요~

이매지 2012-08-28 22:55   좋아요 0 | URL
첫 해외여행을 좀 빡세게 다녀왔습니다. ㅎㅎ
 
프랑스 파우더 미스터리 엘러리 퀸 컬렉션 Ellery Queen Collection
엘러리 퀸 지음, 이제중 옮김 / 검은숲 / 2011년 12월
절판


엘러리 퀸은 아버지의 수사 방법에 상상력이 결여되어 있다고 개탄했다. 엘러리는 순수한 논리가이자 몽상가이며 예술가다운 기질도 갖고 있었다. 코안경 너머의 그의 눈은 언제나 무엇인가를 추구했다. 범죄자들은 그의 예리한 두뇌로 날카롭게 해부되곤 했다. 범죄자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 같은 그의 복합적인 기질은 가히 치명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엘러리는 기분이 내킬 때면 추리소설을 쓰기도 했는데, 그 일을 제외하고는 그의 아버지가 퇴직하기 전까지 무슨 일을 했는지 세상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리처드 퀸이 경감으로 재직하던 당시 '엘러리 퀸'의 이름으로 많은 추리소설들이 출간되었다는 사실은 몹시 흥미로운 일이다. 그러나 '퀸'이 아닌 그의 이름으로 출간된 책은 없으며 '엘러리 퀸'의 소설과 그의 본명으로 나온 책들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이 <프랑스 파우더 미스터리>는 엘러리 퀸이라는 이름으로 출간된 두번째 책이다. 본명으로 낸 책들은 작가와 그의 아버지가 실제로 겪은 사건들을 거의 가감 없이 그대로 쓴 것이다). -13~4쪽

보통 사람들한테는 범죄자들이 범행 시에 항상 똑같은 행동을 한다는 것이 이상하게 보일 거야. 이를테면 같은 담배만 피우고 버린다든가, 늘 똑같은 가면을 쓴다든가, 일을 끝낸 다음에는 반드시 여자를 끼고 질펀하게 논다든가 하는 행동들 말이야. 그러나 그들에게 있어 범죄 행위는 곧 직업이라네. 어떤 직업이든 일을 하는 중엔 그 사람의 특성이 나타나기 마련이지. 보통 사람들은 그 사실을 거의 깨닫지 못하지만. -15쪽

여러분 가운데 누군가가 특별 대우를 요청할까봐 미리 말씀드리는데, 이건 살인 사건입니다. 살인은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범죄 가운데서도 최악의 것입니다. 따라서 살인 사건을 해결하는 데 있어 법 아래 개인이든 기관이든 차별이 있을 수는 없습니다. 한 여인이 난폭하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누군가가 그녀를 살해했습니다. 바로 이 시각에 범인은 몇 킬로미터 밖에 있을 수도 있고, 이 방 안에 있을 수도 있습니다. -54쪽

"'장기의 수는 직접 두고 있는 사람보다 옆에서 훈수하는 사람에게 더 잘 보인다.'라는 말이 있죠. 누가 한 말이냐고요? 못난 아들이 가장 좋아하는 작가, '작가 미상'의 말입니다. 그럼 게임을 시작해볼까요?"-71쪽

'단서'라는 말은 신화에 기원을 두고 있다. 어원학적으로 볼 때, 'Clue'라는 단어는 'Clew'에서 유래됐다. (……) 고대 영에서 '실'이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Clew는, 테세우스가 미노타우로스를 죽이고 미궁에서 빠져나갈 수 있게 하기 위해, 아리아드네가 그에게 실을 건네주었다는 전설에서 유래되었다. (……) 단서란 탐정에게 유혀적인 것일 수도 있고 무형적인 것일 수도 있다. 또한 정신적인 것일 수도 있고 실제적인 것일 수도 있다. 단서는 마땅히 있어야 할 것이 없는 상태에서, 혹은 없어야 할 것이 있는 상태에서, 혹은 없어야 할 것이 있는 상태에서 뭔가를 찾아내는 것이다. (……) 아무튼 그것의 형태가 어떠하든 간에, 단서는 범죄를 담당하는 수사관들을 종잡을 수 없는 미로에서 한 줄기 빛이 비치는 광명의 세계로 안내하는, 길잡이의 역할을 한다. -<범죄의 예술>, 존 스트랭 윌리엄 O. 그린이 쓴 서문에서 발췌-143쪽

범인을 추적하는 과정은 세상에서 가장 스릴 있는 일이다. 그리고 그 스릴은 (……) 추적자의 기질과 정비례한다. 추적자는 현미경을 이용해야만 찾을 수 있는 범죄의 미세한 부분까지도 정확하게 관찰하고 (……) 수집해야 한다. 그러고 나서 조물주가 인간에게 부여한 상상력을 이용해서 실제의 모든 현상들을 포괄할 수 있는 이론을 창출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완전한 스릴을 맛볼 수가 있게 되는 것이다. (……) 문제에 대한 통찰과 끈기 그리고 정열 이런 것들을 고루 갖춘 사람만이 범인을 추적해내는 일에서 천재성을 발휘할 수 있다. -<지하 세계의 존재>, 제임스 레딕스-247쪽

나는 추리소설을 읽으면서, 사건을 해결하기 직전 범인을 알아내기 위해 논리적인 분석을 해보는 것에서 짜릿한 쾌감을 느끼곤 한다. 나는 추리소설의 진정한 맛을 느끼는 방법은 여러 가지라고 생각하는데, 읽는 것 못지않게 자신이 직접 추리를 해보는 것도 즐거운 일의 하나라고 믿고 있다. 따라서 스포츠맨 정신에 입각하여, 독자들에게 아름다운 도전장을 보낸다. 마지막 페이지를 아직 읽지 않은 독자들이여, 누가 프렌치 부인을 죽였을까? …… 대부분의 추리소설 애호가들은 직감으로 범인을 '짐작'해버리는 경향을 갖고 있다. 어느 정도의 '짐작'은 추리에 도움이 된다는 점을 나는 인정한다. 하지만 상식과 논리를 적용시키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또한 그렇게 함으로써 즐거움도 배가시킬 수가 있다. -3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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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달리다
심윤경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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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아름다운 정원> <달의 제단> <이현의 연애>로 홀딱 반해버린 심윤경. 과작인 탓에 동화를 제외하고 가장 최근에 쓴 <서라벌 사람들>이 벌써 4년 전 이야기다. 작년 가을 느닷없이 동화 '은지와 호찬이 시리즈'를 냈을 때 인터뷰에서 '새 소설이 출간 임박'했다는 언급이 있어서 언제 나온나 목이 빠져라 기다렸는데, 해를 지나 마하 39의 속도로 <사랑이 달리다>가 찾아왔다. 책을 손에 쥐자마자 심한 독서 침체기 중이었음에도 달리는 버스 안에서, 달리는 지하철 안에서, 심지어는 걸어다니면서도(!) 홀리듯 읽었다. 일단 책장을 넘기는 순간, 주인공 김혜나와 함께 앞뒤 보지 않고 달릴 수밖에 없는 소설 <사랑이 달리다>이다.


  생일이면 아빠가 옷을 차려입고 덩실덩실 춤을 출 정도로 금이야 옥이야 자란 김혜나. 그녀는 맨날 제정신 못 차리고 대형사고만 치는 작은 오빠 김학원, 돈과 자기 가족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큰오빠와 어린 시절부터 아옹다옹 삐걱삐걱했지만 풍족한 환경 탓에 최소한 물질적으로는 아쉬움 없이 살아왔다. 그런 어쨌거나 소소한 사고들이 있었지만 겉으로는 무사평온하게 지낸 그녀가 부모의 이혼(그것도 믿었던 아빠가 젊은 여자와 눈이 맞아버려 새 살림을 차리면서 벌어진)을 경험하면서 인생이 꼬이기 시작한다. 아빠에게 재산 분할 소송도 걸지 않고 엄마가 순순히 이혼 도장을 찍으며 아빠의 화수분 같은 재력을 잃게 된 삼남매. 작은 오빠야 전처럼 누군가의 등을 쳐먹으며 살고, 큰오빠야 자기 사업을 한다고 해도 내일모레면 마흔이지만 단 한 번도 제 손으로 돈을 벌어본 적이 없는 김혜나는 아빠의 신용카드 유효기간 만료가 가까워짐에 따라 점점 불안해진다. 게다가 동갑내기 남편이 지방으로 발령까지 나자 김혜나는 비로소 난생처음으로 제 힘으로 돈을 벌기 시작한다. 부잣집 철부지딸인 김혜나가 대형 산부인과 보육실 김혜나로 새 지위를 얻으며 벌어지는 일들이 김혜나의 통통 튀는 매력과 함께 그려진다. 


  '사랑'이 달리다, 라는 제목 때문에 이 책이 단순히 '사랑' 이야기일 것이라고 짐작할 수도 있다. 물론 이 책에 중심에는 사랑이 놓이지만 사랑'만' 다루지는 않는다. <사랑이 달리다>는 어떻게 보면 물질만능주의에 대한 비판이고, 어떻게 보면 모두가 성공을 외치는 빌어먹을 세상에 대한 항변이며, 어떻게 보면 귀엽지만 어떻게 보면 막장일 수 있는 이야기다. 하지만 그 어떤 관점에서 이 책을 읽던지 간에 이 책은 캐릭터가 살아 있는 소설이다. 이런 캐릭터들을 실제로 만날 수 있을까 하며 비현실적인데 싶다가도 어느샌가 아니 뭐 또 이런 사람들이 없으란 법이 어디 있나 싶어지며 친숙하게 다가왔다. 자신을 지탱하던 기반이 무너졌을 때 어떻게든 그것을 다시 붙잡기 위해 각자의 방식으로 우왕좌왕하는 인물들의 모습은 마치 한 편의 희극 같았다. 이야기 초반에 혜나가 "그에게 중요한 것은 어디로 가고 있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운전하느냐였다"라고 작은 오빠 학원의 운전실력을 언급하는데, <사랑이 달리다>도 '어디로' 가느냐보다는 '어떻게' 가느냐에 초점이 맞춰졌다. 등장인물 각자의 종착지보다는 그들이 나아가는 방식 자체에 더 주목했고 그랬기에 그 종착지가 다소 마음에 들지 않았어도 수긍할 수 있었다. 


  다른 인물들이 변모해가는 과정도 흥미로웠지만 역시 주인공 김혜나가 교주라 해도 믿길 정도로 모든 이에게 칭송받는 산부인과 원장 정욱연과 관계를 쌓아가며 변해가는 모습이 가장 눈에 띄었다. 정욱연과 김혜나의 관계는 한 편의 로맨스 소설이기도 했지만 그보다 한 편의 성장소설에 가깝게 느껴졌다. 겉으로 보기에 완벽해 보이건 그렇지 않건 간에 본질은 미성숙한 두 남녀가 서로를 통해 자신의 상처를 직시하고 그것을 함께 끌어안고 성장해가는 모습은 꽤 흥미로웠다. 특히 김혜나가 "이상하게 정욱연을 보면 자꾸만 울고 싶었다. 사실 정욱연을 향한 나의 사랑에서 육체적 욕망이 차지하는 비율은 대단히 미미했다. 이렇게 덮칠까, 저렇게 덮칠까 호시탐탐 궁리했지만 그건 욕망 때문이라기보다는 여자가 남자를 또는 남자가 여자를 차지하는 가장 보편적인 방법이 섹스였기 때문에 나도 그 방법을 한번 고려했을 뿐이고, 정작 그를 마주할 때마다 내가 간절하게 원했던 건 섹스가 아니라 울음이었다"(203쪽) 같이 고백할 때는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김혜나가 정욱연을 사랑하는 방식이 어떤 것인지 너무나 잘 이해가 됐기 때문이다. "나는 괜찮은 사람일 거라고, 나의 내면에는 이전까지 살아온 김혜나와는 다른 무언가 괜찮은 것들이 들어 있을 거라고. 우리는 닮은 점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 앞에서 어떻게 마음을 열지 않을 수 있을까. 정욱연의 모습을 누군가와 겹쳐 보다가 어느샌가 정욱연까지도 사랑하게 되버렸다. 


  <사랑이 달리다>를 구성하는 한 축이 '사랑'(혹은 성장)이라면 다른 한 축은 '돈'이다. 돈으로 표상되는 김혜나 가족의 욕망은 현대사회의 일면을 극대화해서 보여준다. "윤기를 잃어가는 우리의 끝물 젊음처럼, 애초부터 거창하지도 않았던 나의 모든 꿈들은 터벅터벅하게 메말라갔다. 상상 속에서만 존재했을 뿐인 우리의 아이도 백팔십도 달라졌다. 그 아이는 자궁에서부터 손익계산서를 들고 튀어나와서 금융인과 법조인과 의사 이외의 직업은 꿈조차 꾸지 않을 것이다. 돈독이 올라서 반질반질해진 내 아이의 모습 앞에서 그대로 폭발했다"(268쪽)라는 말로 대표될 수 있겠지만, 김혜나 가족은 영어유치원이나 입학사정관제 등으로 드러나는 불타는 교육열, '의대 갈 걸'로 표상되는 전문직종에 대한 선망, 돈과 지위를 가진 사람 앞에서 너무나 쉽게 무너져내리는 자존심, 그리고 돈이든 성공이든 조금이라도 더 손에 쥐고 싶어서 아등바등하는 모습 등 자본주의사회에서 인간이 욕망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단순한 욕망이 아니라 불안의 변형인 이 욕망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낯선 이야기가 아니라 그런지 입 안에 씁쓸함이 감돈다. 대체 이렇게 악다구니를 써서 손에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하는 허망함만 남는 것이다. 


  사랑이건 욕망이건 뭘로 읽던 간에 <사랑이 달리다>는 간만에 심윤경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를 즐겁게 해줬다. 그녀를 이런 작품으로 다시 만나 더없이 기쁘다. 분명 이전 작품과 궤를 달리하는 작품이지만 심윤경이 이런 글도 쓸 줄 아는 사람이었구나 하고 놀랐고, 다음에는 또 어떤 작품으로 찾아올까 하는 기대에 부풀었다. "사랑은 비난이나 경멸보다 빨랐다. 심지어 시간보다도 빨랐다. 미래조차 까마득한 저 뒤에 내팽겨쳐버리고, 내 눈먼 사랑은 그저 두 팔을 벌리고 그를 향해 달릴 뿐이었다. 엄마의 말이 옳았다. 혼신을 다한 사랑이란 훈장과도 같은 면이 있었다. 죽을지 살지 모르고 덤벼드는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자유로움이, 후련함이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팔다리가 없어졌거나 눈이 안 보일지도 모르지만, 그가 그렇게 몸을 던진 적이 있었음을 증명하는 그 작은 금속은 영원히 그의 명예다. 훗날 우리가 어떻게 살든, 죽든"(354쪽). 지금 이 순간 마하 40으로 달리고 있을 김혜나와 혜나를 떠나보내고 새로운 마음으로 달리고 있을 심윤경을 앞으로도 계속 응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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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12-08-20 2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매지님 반가와요. 히죽.

이매지 2012-08-21 01:20   좋아요 0 | URL
이래저래 정신이 없어서 또 오랜만에 빼꼼 나타났는데 ㅎㅎㅎ
조선인님 반가워요. 히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