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점에서인가, 그들은 근본적으로 잘못되어 있다. 왜냐하면 내가 잘못될 리는 없기 때문이다. -5쪽
그녀가 나의 위대함을 이해하지 못한 탓에 나를 거부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정은 충분히 알고 있다. 사람에게는 각자에게 맞는 능력이 있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나는 신사적으로 행동했던 것이며, 불필요한 감상을 끊어 내고 그녀가 없는 생활로 되돌아간 것이다. 그 후에 행해진 나의 '연구'는 그녀에 대한 끊을 수 없는 애정 같은 것과는 무관하며, 철저히 냉정하고 신사적으로 행해 왔음에 틀림없다. 이상한 편지를 보내거나, 전화를 걸었다 말없이 끊거나, 주위에 나쁜 소문을 퍼뜨리는…… 그런 무익하고 어리석은 일을 나는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그녀는 나에게 감사하면 했지, 그런 사내를 앞잡이로 내세워 내게 수치를 겪게 할 필요는 단연코 없었다. -33~4쪽
그가 갑자기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숨을 헐떡이며 "이건 내 꿈이 아니야"라고 소리쳤다. 중학생 시절의 어리석음을 다 드러낸 꿈을 거부하고 싶은 심정은 충분히 이해한다. 과거 자신의 발가벗은 모습에서 눈을 돌리고 싶은 건 당연하다. 그러나 현재의 우리는 과거 실패의 퇴적 위에 세워진 존재다. 태곳적 생물들의 유해가 석유가 되어 현대 문명을 쌓는 초석이 된 것처럼, 우리도 과거의 한심하고 어리석었던 자신을 연료로 태워 이제는 멋지게 달려가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적나라한 과거를 당당히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애당초 지하 깊숙이 매장되어 있는 석유를 파헤쳐 내지 않았다면, 세상에 숱하게 방출되어 맘껏 환경을 파괴시키는 플라스틱 제품은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40 ~1쪽
우리는 매우 절도 있는 인간이므로 술에 취해 정신을 놓는 일은 없다. 정신이 몽롱해지기 전에 전선에서 퇴각하는 방침을 세워 놓았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는 경우에는 재빨리 변기에 게운 후 철수한다. 자신의 에틸알코올 분해 능력도 파악하지 못하고, 게다가 토사물을 투하할 장소조차 분간하지 못한 채 술을 마시는 학생이 많은 세태가 심히 유감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단순히 유감으로 끝날 일이겠는가, 같은 학생으로서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술은 백약의 으뜸'이라고 우겨 댈 생각이라면, 술집 계단에 잘못 투척한 토사물을 자기가 빨아들일 정도의 각오는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이다. -46쪽
순탄하게 흘러가는 일상 속에서, 화려하진 않더라도 뭔가 인생의 심오한 경지를 엿보는 것 같은 고상한 경험이 나에게 있느냐 하면, 그런 깊이 있는 일과는 인연이 없다. 작금의 젊은이에게서 흔히 볼 수 있듯이, 갈수록 현대 문명에 의지하는 나날을 살아간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런 나날을 보내면서도, 이것 또한 젊은이에게 흔히 있는 일인데, '나는 선택된 인간'이라는 역겨운 프라이드를 나 역시 품고 있다. 이 또한 있을 법한 일이긴 하겠으나, 선택된 자로서의 그 어떤 황홀도 불안도 일상 속에서는 손톱만큼도 발견할 수 없다. 그럼 네가 '선택되었다'고 확신하는 증거는 어디에 있냐고 묻는다면, 오히려 내 쪽에서 가르쳐 달라고 하고 싶을 정도다. 그러나 어딘가에 분명히 있을 것이다. 눅눅히 젖어 있는, 모두가 눈길을 피해 버릴 것 같은 으스스한 어둠 속에 아직 발견되지 않은 보물이 잠들어 있다고 나는 믿는다. -56쪽
일상은 간결한 게 최고다. 진정한 위업은 극적인 일상과는 무연한 장소에서 은밀히 행해지는 것이다. 망설임 없이 '이거다'라고 드러낼 수는 없는 게 유감이지만, 나 역시 세계사에 남을 위업을 이루고자 하는 인간이므로 사색을 흐트러뜨리는 파란만장한 일상 따윈 원치 않는다. 그저 조용히 내버려 두길 원한다. 살짝 외로워질 때만 마음을 써 주면 충분하다. 그러나 마음을 써 주길 원할 때는 마음을 써 주지 않고, 그냥 혼자 내버려 두길 원할 때는 내버려 두지 않는 게 세상사이게 마련이다. -56~7쪽
둘이 머리를 맞대고 앉아 사정없이 부풀어 오르는 자신들의 망상에 상처 입는 세월을 보내는 사이, 우리는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우리는 그런 식으로 '세상이 썩었다'고 한탄했는데, 솔직히 말해 이따금 세상이 썩었는지 우리가 썩었는지 알 수 없을 때도 있었다. 어찌 되었든 우리 일상의 대부분은 그렇게 풍부하고 지나치리만큼 참혹한 망상으로 이루어졌다. 일찍이 시카마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일상의 90퍼센트는 머릿속에서 일어난다."-87쪽
"언제 술 한잔 하자." 그가 말했다. "이도가 또 축 처져 있어. 위로해 줘야지." "술 마시는 건 좋은데, 침울해 있는 인간에게 해 줄 말은 아무것도 없다." 시카마가 오리온자리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친구잖아." "도움도 안 되는 위로의 말을 건넬 생각은 없어. 난 다만 그의 강렬한 질투에 경의를 표하고, 그 결말을 조용히 응시하고, 그리고 기탄없이 즐길 뿐이지."-106~7쪽
긴긴 하루였다. 하숙집으로 향하는 언덕길을 오르면서 뒤늦게 분노가 솟구쳐올랐다. 현대 문명에 철저히 의존해 살아가긴 해도, 양친과 지구환경 외에는 부끄러워할 대상 하나 없이 조개와 같은 무해한 생활을 하고 있건만, 스토커 놈에게 스토커라고 불리질 않나, 애차 마나미호가 어딘가로 끌려가질 않나, 교토대생 사냥에 쫓기질 않나, 망상에 빠진 빚쟁이가 찾아오질 않나, 크리스마스가 다가오질 않나, 실로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챙겨 주길 원치 않을 때에만 챙겨 주길 원치 않는 인간이 일상을 침범해 들어오는 잔혹한 현실. 그리고 정작 챙겨 주길 원하는 사람은 날 챙겨 주지 않는다. 딱히 그녀를 두고 하는 말은 아니다. -128~9쪽
우리는 인류를 구제하게 될 거대한 에너지를 떠올려 보았다. 좌절, 실연, 죽음에 이르는 병, 모든 고뇌가 유익한 에너지로 변환되어 자동차를 움직이고, 비행기를 띄우고, 인터넷은 어디서든 연결되고, 아이돌 비디오도 실컷 볼 수 있게 된다. 이보다 멋진 미래는 없다. 그렇게 되면 이도처럼 과도한 고통을 끌어안은 자가 인류의 구세주로 각광을 받고, 숨 막힐 정도로 포지티브한 인간은 몽땅 수납장에 갇히는 신세가 될 것이다. 그의 시대가 도래하는 것이다. -150쪽
작금의 세상에는 크리스마스라는 악령이 설쳐 대고 있다. 일본인이 크리스마스를 축하하는 부조리는 일단 눈 감아 주기로 하자. 아이들에게 꿈을 주는 건 좋다. 설령 그것이 켈트 신앙을 기원으로 한 정체 불명의 흰 수염 할아버지가 이뤄 주는 '물욕'의 꿈이라 할지라도. 하나 작금의 크리스마스와 연애 예찬주의의 잘못된 습합까지 허락해 줄 까닭은 없다. 목청껏 행복을 구가하는 것은 실로 폭력적인 일이다. -154쪽
그러나 이 자리에서 명확히 밝히고자 한다. 듣고 싶지도 않은 행복의 구가(謳歌)를 들어 줘야 할 의리 따윈 없다고. 세상에서 소외되었다는 불합리한 열등감을 맛보며 하숙집에서 냄비를 끌어안고 우울하게 지내야 할 의리도, 보통 사람처럼 학창 시절을 보내지 못한다느니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낼 연인도 없다느니 하는 무익한 번민을 끌어안아야 할 의리도 없다고! 그들은 분명 수많은 샘플을 눈앞에 늘어놓고 제군에게 '행복'을 제시해 보일 것이다.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낼 이성이 있다는 사실, 그것이 마치 학생의 본분인 양 소리 높여 주장할 것이다. 닥쳐, 닥치라고. 학생의 본분은 학문이다. 사랑에 정신을 빼앗길 여유가 있으면 좀 더 학문에 매진하란 말이다, 이 미친 새끼들아! -154~5쪽
어찌해 볼 수 없는 우리의 위대함이 어리석은 틀에 박히기를 거부하는 거라고 큰소리치며 현혹시키는 건 간단하다. 그러나. 그러나 때로는 틀에 박힌 행복도 좋다고, 우리가 중얼거린 적도 있지 않을까. -200~1쪽
사랑 따위로 뻐길 게 뭐 있어? 사랑하는 놈이 그리 잘났나? 현대 풍조에 연애 예찬 경향이 있다고 하더라도, 본디 불합리한 정서인 연애를 칭송하는 위험성을 제대로 파악해야만 한다. 인간 저변에 깔린 어두운 감정을 제아무리 달콤한 말로 치장한다 해도, 언젠가 그것은 모든 것을 미련 없이 내팽개치고 본성을 드러낸다. 막상 그 광기에 직면해 그럴 리가 없다고 신음해본들 이미 때는 늦다. 흔히 '비뚤어진 애정'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연애라는 것 자체가 애당초 어딘가 비뚤어져 있다. 그럼에도 그는 왜 그리 기쁜 듯 행복한 듯 싱글벙글 만족해하는 걸까. 사람들은 광기의 구렁텅이에 기꺼이 몸을 던지고, 뭇사람들에게서 허우적대는 모습을 드러낸다. 아직 몸을 던지지 않은 사람들은 가능한 한 빨리 몸을 던지고 싶다, 몸을 던지지 않은 나는 행복하지 않다, 부끄럽다고까지 생각한다. 결단코 그렇지 않다. 부끄러운 것은 구렁텅이에 빠진 모습이며, 빠지고 싶어하는 모습이다. -217~8쪽
연애는 어디까지나 배은망덕한 기쁨이며, 부끄러워해야 마땅한 일이며, 가능하다면 남의 눈을 피해 맛보아야 할 금단의 과실이다. 그것을 마치 인생에 당연히 열리는 과실인 양 장소를 안 가리고 먹어 대고, 과즙을 남에게 튀겨 대는 행위가 얼마나 무거운 죄인지 인식해야 마땅하다. 만천하에 우글거리는, 팔짱을 낀 남녀들에게 고하노라. "살아가라, (그러나 조금은) 부끄러운 줄 알라." -218쪽
그러나 취해선 안 된다. 결코 자신에게 취해선 안 된다. 그렇게 자기 자신을 타이르고, 눈 내리는 새벽 거리를 걸으며 한동안 끙끙 힘을 내봤지만, 적어도 오늘만이라도 자신에게 취하게 해 주자고 마음먹고 나는 울었다. -245쪽
어떤 점에서인가, 그들은 근본적으로 잘못되어 있다. 그리고 하긴, 아마도 나 역시 잘못됐을 것이다. -2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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