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기초 : 연인들 사랑의 기초
정이현 지음 / 톨 / 2012년 5월
구판절판


사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애인을 사귀려는 목적으로 전혀 모르는 낯선 사람을 소개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우습고 괴상한 일인지 알 수 있다. 차라리 지하철 같은 칸에 탄 아가씨와 사귀게 되는 일이 쉬울 것 같았다. 아니, 우연히 한입 메어 문 맥도날드 햄버거에서 죽은 생쥐의 꼬리털이 발견되어 수억 원의 보상금을 타는 일이 지금은 더 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아아, 어리석은 희망이여. 그는 자책했다. -15~6쪽

그녀의 이름이 무엇이었대도 그 아이의 타고난 본성은 별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이름이란 결국 그런 것인지도 몰랐다. -32쪽

혼자 남겨진다는 것은 익숙해서 더 두려운 일이었다. 혼자임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경우라면 그나마 견딜 만했다. 하지만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홀로 남겨지는 상황을 상상하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언젠가는 홀로여야 한다면 그 타이밍을 선택하는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닌 '나'여야 한다고 민아의 무의식이 말하고 있었다. 상대가 멍하니 한눈파는 순간을 잘 포착하여 휙 놔버리는 것이 민아의 방식이었다. 그러지 않으면, 그 타이밍을 맞추지 못하면, 분명히 모두가 등을 돌리고 말 것이고, 결국엔 어깨를 떨지 않으려 애쓰며 다시 혼자서 그 어린 날, 점심시간마다의 지독한 순례에 나서야 할 터였다. 그것은 친구 관계에서도, 그리고 연애를 할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58쪽

연애의 초반부가 둘이 얼마나 똑같은지에 대해 열심히 감탄하며 보내는 시간이라면, 중반부는 그것이 얼마나 큰 착각이었는지를 야금야금 깨달아가는 시간이다. -78쪽

민아는 극단적 비관주의자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하여 그 신호에 재빠르게 대응하기에 앞서, 도저히 감당하기 힘든 애인의 문제점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보기로 했다. 몇 차례의 실패한 연애들이 남겨준 습관이었다. 비교적 허술한 경제 관념, 비교적 불안정한 직장, 비교적 이해심 없는 성품, 비교적 의심스러운 바람기…… 여기서 '비교적'의 비교 대상이 누구인지는 불분명했다. 앞서 만났던 2번, 3번의 평균치일 수도 있고 친구들의 애인들일 수도 있다. 아직 만나지 못한 5번, 6번, 7번들에 비해서일 수도 있다. 또 누군가를 새로 만나 순서대로 다음 번호를 부여하고, 연애의 기승전결을 되풀이해야 한다는 데에 생각이 미치자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러나 무엇보다 결정적인 한 가지가 있었다. 그 남자는 더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 그녀 자신의 마음이 어떤지는 어쩌면 중요하지 않은 문제였다. 그녀는 애초의 계획대로 이별을 진행시켰다. 그만두지 않으면 절대로 시작할 수 없다는 경구는 이 시대의 이십대 여성들을 매혹시키는 전언이었다. -79~80쪽

남녀의 첫 만남 뒤에 언제쯤 연락하는 것이 바람직한가에 대한 연구 보고서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이 도시의 젊은이들 사이에 통용되는 타이밍에 대한 보편적 규칙은 있었다. 열살짜리 아이조차 주머니에 휴대전화를 넣고 다니게 된 2000년대 이후론 그 간격이 터무니없이 짧아진 것만은 분명했다. 심지어 이제는 스마트폰을 손안에 쥐고 다니는 시대였다. 통화뿐만 아니라 문자메시지도, 이메일도, SNS도, 스마트폰 전용 메신저 서비스도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다. 마음은 손가락 끝에 존재하고 있다. 여자들은 그 어떤 개인 휴대기기도 존재하지 않던 시대보다 수십 배 빠른 속도로 불안에 빠져들었다. -98~9쪽

그때 그들은 어디로든 갈 수 있었고 어디로도 가지 않을 수 있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민아와 준호는 봄밤 속으로 함께 걸음을 내디뎠다. 처음 보는 별들이 뒤를 따라왔다. -107쪽

두 개의 서로 다른 포물선들이 공중에서 조우해 마침내 하나의 점點으로 겹쳐진 순간에 대하여, 그 경이로운 기억에 대하여 어떻게 탄성을 터뜨리지 않을 수 있을까. 이 세계에서 기적은 종종 태연한 일상의 방식으로 구현되곤 했다. 이제 막 사랑을 시작한 젊은 연인에게 한없이 평범해 보이는 매일의 일상, 그 틈새에 숨겨져 있는 치명적인 운명의 조각들을 찾아내는 일은 경이로운 놀이였다. 그 신비롭고 아름다운 우연의 세목들을 하나하나 헤아려보다가 자신들이 마침내 지금 여기 함께 있다는 사실은 진실로 기적이 아닐 수 없다고 그들은 감격했다. -108~9쪽

어떤 관계에서든 더 많이 말하는 사람은 있다. 연인들은 필연적으로 역할을 선택해야 한다. 굿 스피커가 될 것인가 아니면 굿 리스너가 될 것인가. 말할 것인가, 들을 것인가. 던질 것인가, 받을 것인가. 그들이 서로에게 매혹된 원인은, 각각 상대방이 아주 훌륭한 청자라고 믿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114쪽

어쩔 수 없는 순간이 올 때까지 빨랫감을 숨겨두고 싶은 마음은 엄마도 그녀도 다르지 않을 거였다. '나'도 있고 '사랑하는 사람'도 있고 '부모'도 실망시키지 않는 삶. 세상 어딘가에는 그런 삶을 사는 여자도 있겠지.-157쪽

그들의 사랑이 지금 고갈되어가고 있다 해서 사랑한 적이 없었다는 뜻은 아니다. 그들의 사랑이 비극적 파국에 이르렀다는 뜻도 아니다. 이곳은 보기보다 냉정하고 이성적인 세계였다. 치정 때문에 죽고 죽이는 고대 희랍식 드라마는 자주 일어나지 않으며, 드라마 퀸이 되기를 열망한다고 해서 아무한테나 그런 역할이 주어지는 것도 아니다.
이별과 맞닥뜨릴 때마다 '죽고 싶어'라고 말하는 사람은 많지만 실제로 목숨을 끊으려고 시도하는 이는 드물었다. 물론 비련의 사랑을 애꿎은 생명으로 되찾으려 드는 무모한 젊은이도 없지는 않았지만 목적을 이룬 숫자는 매우 미미했다. 눈물은 오래지 않아 마를 것이고 그들은 머지않아 새로운 사랑을 시작할 것이다. 다시 사소하게 꿈꾸고 사소하게 절망하고 사소하게 후회하기를 반복하다보면 청춘은 저물어갔다. 세상은 그것을 보편적인 연애라고 불렀다. 대개의 보편적 서사가 그러하듯 단순하고 질서정연해서 누군가에겐 아름답게, 누군가에겐 참을 수 없이 지루하게 여겨졌다. -201쪽

마침내 그들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별에 대한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합의는 없었다. 이혼을 앞둔 부부가 아닌 다음에야 이별 합의서에 서명하는 연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실패한 연인에겐 나눌 것은커녕 남아 있는 것도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이 무언으로 동의한 부분은, 더 오래 같이 있으면 아무도 행복해지지 않는다는 것뿐이었다. -207쪽

처음 만난 순간에도 헤어지는 순간에도 사람들은 '안녕'이라고 말한다는 것을 그들은 불현듯 깨달았다. 각자의 길을 향해 뒤돌아서, 서로의 뒤통수 반대 방향으로 한 발짝 내디딘 것과 거의 동시였다. 그것은 불완전한 인간들끼리 나눌 수 있는, 아마도 가장 완벽한 작별인사였다. -210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