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시대, 같은 공간에서 함께했다 할지라도 누구의 경험을 중심으로 해석되고 쓰이느냐에 따라 그 공간의 역사는 달라진다. -7쪽
이러한 작업을 통해, 여성의 소비 공간인 양장점과 미장원이 한편으로는 여성들의 노동 공간이자 배움의 공간이었음을 알았다. 또한 다양한 여성들이 공존하는 가운데 그들의 일상을 접할 수 있는 창구임을 깨달았다. 일련의 작업은 내게 새로운 연구 지평을 열어주었다. 식민지 시기에 형성된 소비문화가 해방 이후에 연속되거나 단절되는 '변화성'을 주목해야 하며, 특히 이것을 식민지 근대 도시의 '공간성'과 관계 지으며 조망할 때 한국의 근대성을 규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 구술사 방법론을 통해 식민지 주선의 중심지였던 본정이 한국전쟁 이후 소비문화의 중심지인 명동으로 바뀌는 과정과 그 결과의 의미를 논의한 배경은 여기에 있다. -10~11쪽
명동은 식민지 시기 일본인에 의해 새로운 소비 공간으로 부상하면서, 한국 근현대사에서 중요한 무대로 등장하였다. 일본인들이 조선에서 처음 자리를 잡은 곳은 남산 기슭이었다. 이 일대는 원래 '남촌'이라 불렸는데, 가난한 양반이나 하급 관료들이 주로 거주하였다.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일본인들은 남산골 진고개에 일본 공사관을 세우고 이 일대를 독점적인 거류지로 정하였다. 이때부터 일본인들은 진고개 일대를 일본 또는 본국을 의미하는 본정통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1906년에는 이곳에 통감부를 세웠는데, 조선이 강점당한 이후 이름이 조선총독부로 바뀌어 1926년까지 있었다. 일본은 서울역과 가깝고 조선 정치의 중심지인 경복궁과 마주한 본정통과 그 일대를 거점으로 새로운 상권을 개발하고 조선을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39쪽
빠리의 번화가 샹제리제 거리, 뉴욕의 5번가, 동경의 긴자 한다면 서울은 명동 거리. 서울에서 으뜸가는 번화가인 명동 거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번화로운 지대이기도 하다. (…) 이 땅의 냉한지대와는 아랑곳없이 명동의 하루는 낮이면은 낮대로, 밤이면 밤대로 온갖 사치와 유행과 오락과 술과 여자로 그칠 사이 없는 소란 속에 그래도 한국 최고의 호사로운 풍경을 이루고 있다. 오백 환, 천 환짜리 지폐가 그 어느 지역보다도 마구 난무하는 곳, 명동 거리. 넓이 약 2평방키로의 이 유흥 지대는 어느 일면으론 바로 서울의 축소판이기도 하다. -60쪽
명동에 즐비하게 차려놓은 양품점, 양복점, 양장점은 도합 50개소가 넘으며, 모두가 최신의 첨단을 걷는 것으로 자처하여 이 점으로 해서 일반 상점의 그것보다 약 이 할 이상이 비싼 것도 특징. 하긴 대지 한 평에 이십만 환서부터 삼십만 환이니 우리나라 판도 안에서 가장 비싼 땅이 바로 명동 일대. -61쪽
'명동 족속'이라 불리우는 사람들은 남자건 여자건 간에 겉보기에 일목요연하다. 최신, 최고…… 무엇이든 이 두 가지 요건이 구비된 것만을 몸에 붙이고 또 가까이 한다는 것이 이들의 신조인데 여하간에 한국의 유행은 서울에서 퍼지고 서울의 유행은 명동에서 시작된다. 모던 여성의 복장 스타일을 좌우한 A라인, H라인, 후레야, 타이트, 헵번 스타일, 복스 타잎, 맘보 스타일…… 가지가지 유행이 파리에서 뉴욕에서 동경에서 뒤늦게 수입되어 항상 그 쌤플을 보여주는 것이 명동 거리…… 또 쌤플 노릇을 한다는 것이 명동 뽀이나 껄들의 자랑. -61~2쪽
해방 이후 본격적으로 설립되기 시작한 양재와 미용 기술 관련 학원과 학교는 전쟁으로 문을 닫았다가 전후 명동 일대를 중심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명동에 양장점과 미장원이 증가하면서 양재사와 미용사에 대한 수요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기술을 가르치는 교육 시설이 필요해졌다. 이렇게 명동은 여성들의 공간, 즉 성별화한 소비 공간으로 재편되었다. 이처럼 전후 명동을 중심으로 여성과 관련된 소비 공간이 등장할 수 있던 배경에는 한국전쟁 기간에 피난민이 대거 몰린 부산을 비롯한 대구에서 소비문화가 번성했던 요인이 있다. 여성들은 전쟁 중에도 양재와 미용 기술을 이용해 생계를 유지하고 돈을 벌었다. 그 경험은 전후 여성들이 기술을 통해 경제적 자립을 하거나 교육 시설을 운영하고자 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81~3쪽
미용이란 다시 말하면 화단에 물을 주고, 잡초를 뽑고 가지를 추리고 의지를 만들어주는 가꿈이라 하겠읍니다. 소박한 미를 정리된, 그리고 조화되고 세련된 미로 이끌어올리는 길이 아니겠읍니까? 그러므로 이것은 자연에의 역행이 아니라 자연을 정리하고 보조하며 살리는 길이요 방법이라 하겠읍니다. 젊은 여성이 미용(미장원 출입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에나 악세사리에 관심이 없다면 그 인생은 오히려 어딘지 부자연하고 병적이고, 기형적인 것으로 볼 수밖에 없읍니다. 인생에 패배하고 절망한 약자가 남을 증오하고 남과 싸울 기력도 없이 그 채찍을 자신에게 가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읍니다. 몸을 가꾼다거나, 장식한다는 일은 여성에게 있어선 산다는 열의와 근면을 뜻하게 되는 것입니다. -117~8쪽
당시를 살아가던 여성에게 명동은 소비 공간과 노동 공간인 동시에, 그 이상의 공간이었다. 자신들의 일상과 긴밀하게 연결된 곳이었으며, 심정적으로 더욱 유착된 공간이었다. 이들은 명동의 양장점에서 새로 옷을 맞춰 입고 미용실에서 최신 유행하는 헤어스타일을 따라 하며 변화를 시도했다. -178쪽
명동에는 양재사와 미용사와 같은 직업여성, 이곳을 드나들며 소비하는 여성들, 성적 서비스를 하는 여성들 등 다양한 부류의 여성들이 공존하였다. 이 다양한 여성들은 명동을 여성의 공간으로, 즉 소비 공간, 노동 공간, 문화 공간으로 만들어냈다. 이곳에서 여성들은 자신의 익명성을 유지하면서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자신을 표현할 수 있었다. 또한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었으며, 국극이나 영화와 같은 매체를 통해 문화생활을 즐길 수 있었다. 소비문화의 중심지인 명동은 여성들에게 해방 공간과도 같았다. 여성들은 명동이라는 공간을 드나들면서, 서로 달랐음에도 용광로처럼 하나의 새로운 도시 문화를 만들어냈다. -202쪽
다양한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조건에 처한 여성들이 공존하면서 새로운 도시 문화를 만들었다는 점은 1950년대와 1960년대의 명동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측면이다. 전쟁으로 인한 '폐허'와 '허무'가 난무하는 가운데에서도 여성들은 부딪쳐 싸웠고 도전하였다. 여성이라는 이름으로 명동에 모여들어 이곳에서 많은 것들을 공유하였다. 동시에 여성들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와 그 간극을 알아가기도 했다. 한국 사회에서 1950년대와 1960년의 명동처럼 다양한 연령대와 사회적, 경제적 차이를 보이는 여성들이 직간접적으로 한데 만날 수 있던 공간은 없을 것이다. 지금은 연령과 사회적, 경제적 지위에 따라 공간적 분화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20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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