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까지 연기하라
로버트 고다드 지음, 김송현정 옮김 / 검은숲 / 2013년 1월
절판


이제 연극에 대한 이야기는 집어치우자. 동료 연기자들과 나는 우리 연극의 잠재력과 문제점에 대해 지겨울 만큼 분석했다. 신물이 나고 정나미가 떨어질 정도로. 내 연기 인생은 몇 년 전에 뚜렷한 이유도 없이 본궤도에서 이탈해 옆길로 들어섰다. 이 연극이 나를 정상 궤도로 되돌려놓아야 했다. 그게 아니라면, 적어도 옆길에서 어느 정도 끌어내기라도 해야 했다. 나는 로저 무어의 뒤를 이어 새로운 제임스 본드가 될 뻔했던 사람이다. 나조차도 지금은 믿기 어렵지만, 여하간 사실이다. 내리막에 이르기 전까지는 오르막이 끝났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법이다. -11~2쪽

우리는 서로를 탓했다. 그러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우리는 책임을 서로에게 떠넘기지 말고 함께 나누어야 했다. 과거를 바꿀 수는 없다. 어쩌면 미래 역시 바꿀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재를 망가뜨릴 수는 있다. 그렇다. 현재를 철저히 파괴할 수는 있다. -18쪽

"순서란 중요해요, 그렇지 않나요?"
"뭐, 어느 정도까지는."
"하지만 적정선이 어딜까요? 그게 문제겠죠."
"답을 알고 있소?"
"각자가 찾아야죠. 그런 다음, 그걸 고수해야죠. 즉, 위기 상황이 오면 원칙을 지켜야 한다는 말이에요."-92쪽

그의 제안이 내가 베푼 호의에 대한 보답이든, 신발 속의 돌멩이를 빼내는 수단이든, 결과는 매한가지였다. 우리 둘의 문제가 동시에 해결되는 것이다. 문득, 이게 바로 사업가의 본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매력적인 제안. 생산적인 거래. 비용 효율성. 이익률. 최종 결산.
"우리가 서로를 좋아할 필요는 없습니다, 토비. 서로 존중하는 걸로 충분하죠."
"승자가 될 수 있는데 굳이 뭐하러 패자가 되려 하느냐, 그런 뜻입니까?"
"비슷합니다."
"그렇다면, 당신의 제안을 거절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겠군요."
"그렇죠. 나는 어리석은 사람을 많이 만납니다. 서로에게 득이 되는 제안을 면전에서 거절하는 사람을 자주 보죠."-150쪽

죽음은 절대적인 것이다. 그리고 지독히 낯선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는 죽음이 도달하는 순간을 명확히 인지하지 못한다. 심장이 고동을 멈춘다. 몸이 움직임을 멈춘다. 그리고 결국 뇌가 천천히 기능을 정지한다. 정확히 언제 데니스 메이플에게 그러한 일이 일어났는지, 몇 분 몇 초에 데니스가 최종적으로 눈을 감았는지 논의하는 것은 쓸모없는 짓이다. 내가 데니스를 발견하기 전이었을까? 아니면, 내가 데니스를 붙들고 헛되이 발버둥 치는 동안이었을까? 아니면, 구급차 안에서? 아니면, 이후 병원에서? 나도 모른다. 영원히 그럴 것이다. -173~4쪽

제니가 사랑에 빠진 남자는 대체 어떤 인간일까? 평상시에 제니는 사람의 인성을 잘 파악한다. 따라서 제니는 로저 콜본이 어떤 인간인지 알고 있을 것이다. 로저 콜본은 제니를 그렇게 완벽하게 속일 수 없다. 아닌가?
모르겠다. 확신이 서질 않는다. 이 문제뿐 아니라 다른 어떤 것에 대해서도. 곁눈으로 무언가를 본 듯한 느낌이 들지만, 고개를 돌려 똑바로 바라보면 아무것도 없다. 로저 콜본의 더러운 속임수와 추잡한 거래 너머에서 분명 무슨 일인가 벌어지고 있다. 지금껏 나는 너무도 상반되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따라서 내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단 한 가지뿐이다. 나는 진실에 접근하지 못했다. 나는 진실을 본 적도 없다.
하지만 그렇게 될 것이다. -242쪽

현실이 연기자의 삶을 침범하는 경우는 드물다. 연기자는 무대 위에서도 무대 밖에서도 가식의 탈을 뒤집어쓴다. 하지만, 내 경우엔 상황이 변했다. 완전히.
어떻게 하면 내가 처한 곤경을 이치에 맞게 다른 이들에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없었다. -252쪽

나는 로열 퍼빌리언 궁전의 뾰족탑과 양파 모양 지붕들을 건너다보며, 가련하고 뚱뚱했던 왕, 조지 4세에게서 동질감을 느꼈다. 그는 자신의 진정한 아내 피츠허버트와 안락한 가정생활을 누리고 싶어 했지만, 결국 둘은 갈라서고 말았다. 그들의 이별은 여러 면에서 조지의 잘못이었고, 내가 제니를 잃은 것도 내 잘못이었다. 하지만 책임을 인정한다고 해서 그러한 삶의 과오들이 가벼워지는 것은 아니다. 사실, 정반대다. -268쪽

상황은 인간보다 더 교활한 공모자다. 상황은 인간이 상상도 못할 기묘한 방식으로 운명의 날실과 씨실을 얽어놓는다.-3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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