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버드가 처음으로 산 실용적인 아프리카 지도였다. 하지만 내가 실제로 아프리카 땅을 밟아 짙은 선글라스를 끼고 아프리카의 하늘을 올려다볼 날이 찾아와 줄까? 하고 버드는 불안한 마음으로 생각했다. 오히려 나는 지금 이 순간에도 아프리카로 출발할 가능성을 결정적으로 잃어 가고 있는 것이나 아닐까? 요컨대 나는 지금 자신의 청춘에서 유일하며 마지막인 눈부신 긴장으로 충만한 기회에 속절없이 작별을 고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만약 그렇다고 한들, 이제 그것을 면할 길은 없는 것이다. -10쪽
버드는 고개를 돌리고 주저앉아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사라져가는 시가지를 바라보았다. 사이렌에 놀란 통행인들은 버드가 등 뒤에 두고 온 임산부의 무리와 마찬가지로 호기심과 정체를 알 수 없는 기대를 드러내며 구급차를 지켜보았다. 그들에게는 필름이 갑자기 정지한 화면과도 같은 부자연스런 동작 정지라는 인상이 있다. 그들은 지금 평범한 일상생활의 극히 미세한 금을 들여다본 참이다. 그들은 순진한 경건함을 또한 표현하고 있다. 내 아들은 전장에서 부상당한 아폴리네르처럼 머리에 붕대를 감고 있다고 버드는 생각했다. 내가 모르는 어둡고 고독한 정장에서 내 아들은 머리를 다친 것이다. 그리고 아폴리네르처럼 붕대를 감고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고 있다……-48쪽
느닷없이 버드는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아폴리네르처럼 머리에 붕대를 감고, 라는 이미지가 버드의 감정을 단번에 단순화하여 방향을 지워준 것이다. 버드는 센티멘털로 질척질척해진 자신이 허용되고 정당화되는 것을 느끼며 자신의 눈물에서 단맛조차 발견했다. 내 아들은 아폴리네르처럼 머리에 붕대를 감고 찾아왔다. 내가 모르는 어둡고 고독한 전장에서 부상당하여. 나는 아들을 전사자처럼 매장해야만 한다. 버드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48쪽
버드는 머리가 둘 달린 것처럼 보이는 자기 아이와 언젠가 보았던 방사능 장애로 인한 장애아의 사진을 비교해 보려 했다. 하지만 버드에게 있어 아이의 이상(異常)은 그것을 둘러싸고 타인과 이야기를 하긴커녕 혼자서 다시 생각해 보려하는 것만으로도 지극히 개인적이고 뜨거운 수치의 감정이 목구멍까지 치올라오는 버드만의 고유한 불행이었다. 그것은 지구상의 모든 타인들과 공통의, 인류 모두에게 걸려 있는 문제는 될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73쪽
버드는 여자 친구에게 자신이 뻔뻔스런 젊은 제비같이 엉기고 있다고 느꼈다. 하지만 히미코의 남자 친구들은 대개들 그녀에 대해 이렇게 구는 것이다. 히미코와 결혼했던 남자는 버드를 위시한 다른 어떤 남자들보다 더욱 직접적으로, 남동생 같은 태도로 그녀에게 의존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날 아침 느닷없이 목을 매어버린 것이다. -73쪽
"우리가 여기서 이야기를 하고 있잖아, 버드. 우리에겐 우선 이 현실 세계가 하나 있는 거지" 하고 히미코는 이야기를 시작했고, 버드는 새로 따른 위스키 잔을 아이의 장난감처럼 소중하게 손바닥에 올려놓고 듣기 시작했다. "그런데 나나 자기나 완전히 이질적인 존재로서 포함되어 있는, 이곳과는 별개의 수많은 다른 우주가 있는 거야, 버드. 우리는 과거의 여러 시간 속에서 자신이 사느냐 죽느냐가 피프티-피프티(fifty-fifty)였던 기억을 갖고 있지. 예컨대, 나는 어릴 때 발진티푸스로 거의 죽었었어. 난 자신이 죽음을 향해 떨어지느냐 아니면 회복으로 가는 비탈을 올라가느냐 하는 인터체인지에 섰던 순간을 확실히 기억하고 있는걸. 그리고 지금 목하 너와 마찬가지로 이 우주에 있는 나는 되살아날 방향을 선택한 거야. 그런데 그 순간에 또 하나의 내가 죽음을 골랐어. 그리고 빨간 발진투성이인 나의 어린 주검 주변에는 죽어 버린 나에 관해 약간의 추억을 지닌 사람들의 우주가 진행하기 시작한 거야."-80쪽
"있잖아 버드, 죽음과 삶의 갈림길에 설 때마다 인간은 그가 죽어버려서 그와는 관계가 없어진 우주와 그가 여전히 살아 나가면서 관계를 이어가는 우주라는 두 개의 우주를 앞에 두게 되는 거야. 그리고 옷을 벗어 버리듯이 그는 자신이 죽은 자로서밖에 존재하지 않는 우주를 뒤에 버려두고 그가 계속 살아가는 쪽 우주로 찾아오는 거지. 그래서 한 사람의 인간을 둘러싸고 마치 나무줄기에서 가지와 잎이 갈라지듯이 갖가지 우주가 튀어 나오게 되는 거고. 내 남편이 자살했을 때도 그와 같은 우주의 세포 분열이 있었던 거야. 여기 있는 나는 남편이 죽어버린 쪽 우주에 남았지만, 남편이 자살하지 않고 살아가는 건너편 우주엔 또 하나의 내가 그와 함께 살고 있는 거지. 한 인간이 요절하면서 뒤에 남겨 두는 우주와 그가 죽음을 면해 살아가고 있는 우주라는 형태로 우리를 둘러싼 세계는 끊임없이 증식해 가는 거야. 내가 다원적인 우주라고 부르는 것은 그런 의미지."-80~1쪽
"서둘 건 없어" 하고 히미코가 달랬다. "그럼, 서둘 거야 없지, 나는 꽤나 오랫동안 참으로 서둘러야만 할 일을 만난 적이 없는 것 같아. 어린아이 땐 항상 서둘고 있었는데. 그건 왜 그랬을까?" "금세 아이가 아니게 되어 버리니까 그런 거겠지?" "정말 나는 금세 아이가 아니게 되었어. 그리고 지금은 아버지 나이지. 하지만 아버지로서의 충분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으니까 제대로 된 아이를 만나지 못한 거야. 내가 규격에 맞는 아이의 아버지가 될 수 있는 것은 언젤까? 나는 자신이 없어" 하고 버드는 감상적으로 말했다. "그런 건 누구도 자신할 수 없어, 버드. 다음 번 아이가 튼튼한 아이일 때, 자기 역시 제대로 된 아버지였다는 것을 확실할 수 있는 거지, 그리고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자신을 갖는 거야."-92~3쪽
아아, 나는 어쩌면 좋을까, 하고 버드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나의 일상생활은 언제나 이런 최악의 함정이 입을 벌리고 내가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설상가상으로 아프리카에서 내가 만났을 모험적인 생활의 위기와 달라 나는 이 함정에 빠진다 해도 기절조차 못하고 사고사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언제까지나 멍하니 함정의 벽을 바라보고 있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야말로 전보를 치고 싶어, AM RATHER IN TROUBLE, 하지만 누구에게? -115쪽
"사모님께는 신생아의 뇌에 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았어요. 내장이 좋지 않다고 해 두었습니다. 뭐, 뇌도 내장임에는 분명하니까 거짓말은 아니지. 완전히 거짓말로 급한 불을 끄려다가는 그 거짓말이 탄로 났을 때 또 다른 거짓말을 해야 하니까!" "네" 하고 버드는 말했다. "자, 그럼. 무슨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버드와 의안을 한 의사는 예의 바르게 머리를 숙이고 서로를 외면한 채 스쳐 지나갔다. 그건 다행이네요! 하고 버드는 의사의 인사를 되새김질했다. 수술이 가능해지기 전에 쇠약해져서 죽는다. 다시 말하자면 수술 후의 식물인간 아기를 끌어안을 일도 없고, 또 자기 손을 더럽혀 갓난이를 죽일 것도 없고, 그저 아기가 근대적인 병실에서 청결하게 쇠약사하는 것을 기다린다. 더구나 그동안 아기를 잊어버리고 있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다, 그것이 버드가 할 일이다. 그건 다행이네요! 깊고 어두운 수치심의 감각이 되살아나서 그에게 온몸이 굳어지는 듯한 기분을 맛보게 했다. -157쪽
"분명히 이건 나 개인에게 한정된, 완전히 개인적인 체험이야" 하고 버드가 말했다. "개인적인 체험 중에도 혼자서 그 체험의 동굴을 자꾸 나아가다 보면, 마침내 인간 일반에 관련된 진실의 전망이 열리는 샛길로 나올 수 있는 그런 체험이 있지? 그런 경우, 어쨌든 고통스런 개인에게는 고통 뒤의 열매가 주어지는 것이고. 흑암의 동굴에서 괴로운 경험을 했지만 땅 위로 나올 수가 있음과 동시에 금화 주머니를 손에 넣었던 톰 소여처럼! 그런데 지금 내가 개인적으로 체험하고 있는 고역이란 놈은 다른 어떤 인간 세계로부터도 고립되어 있는 자기 혼자만의 수혈을 ㅈ러망적으로 깊숙이 파들어 가는 것에 불과해. 같은 암흑 속 동굴에서 고통스레 땀을 흘리지만 나의 체험으로부터는 인간적인 의미는 단 한 조각도 만들어지지 않지. 불모의, 수치스러울 따름인 지긋지긋한 웅덩이 파기야. 나의 톰 소여는 끝없이 깊은 수혈 밑바닥에서 미쳐 버릴지도 몰라."-204쪽
"어째서 수술을 하지 않고 쇠약사하기를 기다리는 거지?" 하고 델체프 씨가 미소를 거두더니 용맹해 보일 정도로 남자답고 결연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내 아이가 수술을 받아 정상적으로 자랄 가능성은 백분의 일도 안 돼요" 하고 버드는 당황하며 말했다. "카프카가 아버지에게 쓴 편지에 있는 말이지만, 아이에 대해 부모가 할 수 있는 일은 찾아오는 아기를 받아들이는 것뿐이랍니다. 자네는 아기를 맞아주는 대신 그를 거부하고 있는 건가요? 아버지라고 해서 타인의 생명을 거부하는 에고이즘이 허용되는 걸까?"-218쪽
타인들의 공통된 세계에서 인간 일반을 위한 오직 하나의 시간이 진행되고, 온 세상 인간이 한 가지로 겪게 될 나쁜 운명이 형성되어 가고 있다. 하지만 버드는 그의 개인적인 운명을 지배하고 있는 아기 괴물의 요람에만 매달려 있다. -252쪽
나는 스무 살이 아냐. 내가 지금 잃지 않고 소유하고 있는 스무 살 때와 같은 거라고는 버드라는 어린애 같은 별명뿐이지. -269쪽
나는 아기 괴물에게서 수치스런 짓들을 무수히 거듭하여 도망치면서 도대체 무엇을 지키려 했던 것일까? 대체 어떤 나 자신을 지켜 내겠다고 시도한 것일까? 하고 버드는 생각했다. 그리고 문득 기가 막혔다. 답은 제로였다. -269~270쪽
"자넨 이번 불행과 정면으로 맞서 잘 싸웠군 그래" 하고 교수가 말했다. "아뇨, 저는 여러 번 도망치려 했었어요. 거의 도망쳐 버릴 뻔했었죠" 하고 버드는 말했다. 그러고는 자기도 모르게 원망스러움을 억누르는 듯한 음성이 되어 "하지만 이 현실의 삶을 살아낸다고 하는 것은 결국 정통적으로 살도록 강요당하는 것인 모양이네요. 기만의 올무에 걸려 버릴 작정을 하고 있는데도 어느 샌가 그것을 거부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버리는 그런 식으로요." "그렇게 하지 않고 현실의 삶을 살 수도 있다네, 버드. 기만에서 기만으로 개구리 뜀 뛰듯이 죽을 때까지 가는 인간도 있지" 하고 교수는 말했다. -27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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