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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에 나는 없었다 ㅣ 애거사 크리스티 스페셜 컬렉션 1
애거사 크리스티 지음, 공경희 옮김 / 포레 / 2014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많은 이들이 그렇듯이 나 또한 셜록 홈스로 추리소설에 입문했다. 하지만 어린 시절에 가장 많이 접한 소설가는 코넌 도일이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코넌 도일의 작품은 셜록 홈스 시리즈 외에 출간된 게 없다시피 했고, 셜록 홈스 시리즈마저도 몇 번 읽다보면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셜록 홈스에게서 시작된 실타래는 이후 여러 갈래로 뻗어나가며 나를 길고 긴 미스터리의 세계로 이끌었다. 그렇게 닿은 작가 중 하나가 바로 애거사 크리스티였다. 거의 20년 전, 마지막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은 애거사 크리스티 전집은 아직도 완독을 못 했지만, 애거사 크리스티는 언제라도 돌아갈 수 있는 고향처럼 늘 든든하게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런 애거사 크리스티가 '메리 웨스트매콧'이라는 필명으로 발표한 <봄에 나는 없었다>가 뒤늦게 깜짝 선물처럼 찾아왔다. 처음에는 왜 필명으로 발표를 한 걸까 의아했지만 책을 읽으며 조금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봄에 나는 없었다>에는 지금까지 '꽤 괜찮은 삶'을 살아온 조앤 스쿠다모어라는 한 중년 여성이 등장한다. 막내딸의 갑작스러운 발병으로 바그다드에 갔다가 집에 돌아가는 길에 조앤은 우연히 고등학교 동창 블란치와 마주친다. 천박하고 끔찍하게 늙어버린 블란치는 조앤에게 그녀의 가족에 대한 갸우뚱한 몇 마디를 던지고 "몇 날 며칠 자신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말고는 할 일이 아무것도 없다면 자신에 대해 뭘 알게 될까……"라는 알쏭달쏭한 질문을 남긴다. 블란치의 말처럼 며칠 뒤 조앤은 날씨 때문에 사막의 기차역 숙소에 발이 묶이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말고는 아무것도 할 게 없어진다. 그동안 애써 외면했던 기억이 파편이 떠올라 조앤을 할퀴고 찌르기 시작한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오리엔탈 특급 열차 살인사건> 등으로 대표되는 애거사 크리스티의 작품에는 기발한 트릭들이 등장한다. 독자를 속이고, 독자를 즐겁게 하는 그녀의 '기술'은 언제 어떤 작품을 읽어도 평타 이상의 솜씨를 뽐낸다. 하지만 내가 애거사 크리스티에게 매료됐던 것은 그런 '기술' 때문만이 아니었다. 애거사 크리스티의 작품에는 기교뿐 아니라 인간에 대한 고찰이 있었다. 인간의 본질을 꿰뚫어보면서도 냉소가 아닌 따뜻한(때로는 담담한) 시선을 보내는 애거사 크리스티의 작품은 단순히 사건을 해결해나가는 과정 이상의 통찰이 담겨 있었다. <봄에 나는 없었다>는 애거사 크리스티의 여느 추리소설과는 사뭇 분위기가 달랐지만 이런 통찰만큼은 여전했다.
<봄에 나는 없었다>에는 어떤 잔혹한(또는 치밀하게 계획된) 범죄도 등장하지 않는다. 자기 자신이라는 보이지 않는, 아니 애써 보려 하지 않는 실체와의 대결만이 있을 뿐이다. '내가 아는 내 모습이 진짜 내 모습이라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 하는 다소 철학적인 고찰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한, 상처받고 두려워하는 한 여자가 등장할 뿐이다. 독선적이고, 이기적인 모습에 도망치고 싶고, 외면해버리고 싶지만 그것이 다른 누군가가 아닌 자기 자신이기에 <봄에 나는 없었다>는 더 오싹하다. 상대를 위한다는 미명 아래 나 자신을 기만하지 않았는가? 다른 사람의 시선만 신경쓰지 않았는가? 새로운 나로 다시 한번 시작해보고 싶지 않은가? 어쩌면 애거사 크리스티는 이런 식의 숱한 자문 끝에 내린 결론을 <봄에 나는 없었다>로 담아낸 것이 아닐까. 삶이란 어쩌면 조앤이 그러했듯이 마음속 가장 여린 부분을 찔러대는 조각난 상처를 그러모아 애써 살아가는 것은 아닐는지.